나는 두 가지 꿈을 품고 산다.

하나는 소박한 꿈이고, 다른 하나는 거대한 꿈이다.

육신이 지치고 자신감이 소그라질 때는 소박한 꿈을 꾸고,

계획했던 일이 좋은 결과는 낳고 자신감에 부풀어 있을 때는 거대한 꿈을 떠올린다.

현실 앞에서 막연한 두려움을 느낄 때와 우주를 훨훨 날아다닐 듯 한 기분일 때,

나는 이 두 가지 꿈을 상상속에서 비밀스럽게 펼친다.

하지만 꿈은 꿈이고, 그 꿈이 이루어지던 그렇지 못하던간에,

오래전부터 나의 소망은 짧은 삶을 후회없이 살고 싶다는 거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다고 자부하지만,

하고 싶은 많은 일들을 해볼 수 있었고 또 그러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그에 따르는 희생을 감수했다고 하지만,

불확실한 미래는 항상 두려움을 동반한다.

과연 지금처럼 건강이 유지될지,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없을지,

원칙을 포기하고 내자신을 잃어 버리지는 않을지,

얼굴의 미소와 마음의 여유를 간직할 수 있을지,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생의 좌절을 느끼게 되는 일은 없을지,

소중한 가족과 친구들이 항상 내곁에 있어줄지.

우박처럼 와르르 내려치는 이런 두려움과 걱정들 사이에서 나는,

나의 두 가지 꿈을 비밀스럽게 확인하고 위안을 얻는다.

그리고 후회없는 현재를 위해 다시 얼굴에 미소를 담는다.

swords_hr.gif

♤ 징기즈칸 어록 ♤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내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고 병사로만 10만 백성은 어린애, 노인까지 합쳐 2백만도 되지 않았다.

배운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모두 쓸어버렸다.

나를 극복하는 그순간 나는 징기스칸이 되었다.

swords_hr.gif

* 나폴레옹의 love letter

Napoleon Bonaparte(1763-1821)

75,000여 통에 달하는 편지를 썼다.
이중 많은 편지는 아내 Josephine Beauharnais에게 보낸 것이었다.

결혼식을 앞두고 1795년12월에 Josephine에게 보낸 편지는 놀랍게도 부드러운 감성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의 사랑의 언어는 다음과 같다.

"I wake filled with thoughts of you.(아침에 눈을 뜬 순간 내 생각은 당신으로 가득하오)......
The intoxicating evening which we spent yesterday has left my senses in turmoil.(나를 사랑에 취하도록 만든 당신과의 어제 저녁은 나의 모든 감각을 혼란스럽게 하오).

Sweet, incomparable Josephine, what a strange effect you have on my heart! (그 어느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사랑스러운 조세핀, 어쩌면 당신은 이렇게 내 마음을 움직이오!)
Are you angry? (화가 났소?)  
Do I see you looking sad?(당신 얼굴에  비치는 것이 그늘이오?) 
Are you worried?(걱정하고 있소?).....
You are leaving at noon; I shall see you in three hours.(이제 12시면 당신은 떠날 거고 3시간 후에 당신을 보게 될 거요)
Until then, mio dolce amor, a thousand kisses;(그때까지 my sweet love, 당신에게 수천 번의 키스를 보내오)

but give me none in return, (하지만 내게는 키스를 보내지 마오)
for they set my blood on fire. (당신의 키스는 나를 불살라 버리니까)."

 *조세핀에게, 어쩌면 당신은 내마음을 이렇게도 움직이오!

라고 하던 나폴레옹은 이렇게 용감하였구나!

swords_hr.gif

swords_hr.gif

어린이 구한 충견…어머니가 불가항력 포기한 아이 익사직전 끌어내
[국민일보] 2005-01-03 18:46  
최악의 참사를 빚은 해일이 휩쓸고 간 인도 해안 마을에서 어린 세 아들 중 두 명만을 가까스로 피신시킨 뒤 실의에 빠진 어머니에게 기르던 개가 미처 구하지 못한 아들을 데려다 주는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AP통신이 3일 보도했다.

지난달 26일 인도 남부 폰디체리 인근 해안마을.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돌아온 아버지 라마크리시난은 바다 쪽에서 들려오는 심상치 않은 소리를 확인하기 위해 지붕으로 올라갔다. 마을을 향해 밀려오는 산더미 같은 해일을 목격한 그는 아내 상기타(24)에게 무조건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치라고 소리쳤다.

갑작스럽게 어린 세 아들을 피신시켜야 할 상황에 처한 그녀는 절망적인 선택의 기로에서 일곱 살짜리 맏아들을 믿고 나머지 두 아들을 한 팔에 하나씩 안은 채 무작정 언덕으로 내달릴 수밖에 없었다. 한꺼번에 세 아이를 안고 뛸 수 없는 이상 그나마 제발로 뛸 수 있는 맏아들 디나카란을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었던 것.

그러나 해일의 위험을 알기에는 너무 어린 디나카란이 달려간 곳은 자신이 지금까지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알고 있는 해변의 오두막이었다. 이 긴박한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누렁개 셀바쿠마르도 평소에 가장 따르던 디나카란을 쫓아갔다.

가까스로 두 아들을 대피시킨 상기타는 이제 다시는 맏아들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한참을 쓰러져 울고 있는 동안 셀바쿠마르는 본능적으로 어린 주인의 위험을 직감하고 디나카란의 옷깃을 물고 있는 힘을 다해 밖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주둥이로 디나카란을 쿡쿡 찌르고 옷을 물어당기길 수차례,오두막에서 나온 어린 주인과 누렁개는 언덕으로 달려가 울고 있는 어머니의 품에 안길 수 있었다.

“집이 해일에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는 너를 못만날 줄 알았다”는 어머니의 말에 디나카란은 “개가 내 옷깃을 물고 끌어당겨 오두막에서 나오게 했다”고 말했다.

정재웅기자 jwjeong@kmib.co.kr

swords_hr.gif

<화제> 의령의 273살 '얼짱' 소나무

(의령=연합뉴스) 정학구 기자 = "나이 270여살된 소나무가 마치 대형 화분에 심어 놓은 분재처럼 아름답게 자라 주민들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경남 의령군 가례면 운암리 상촌마을 입구에 가면 그리 높지도 않으면서 소복한 가지들이 여느 소나무와는 다른 노거수가 우아한 자태를 드러낸다.

지난 82년 의령군이 보호수로 지정할 때 전문가들의 진단에 따라 나이를 250살로 정했으니 올해로 273살이 되는 셈이다.

밑둥 둘레 3.3m에 부채모양의 윗부분 둘레는 18m에 이르며 키 10m 정도.

비슷한 수령의 나무들이 전국 곳곳에 있지만 소나무로는 드문데다 화분에 심어놓고 정기적으로 가지치기를 한 것처럼 부채모양으로 자란 가지는 나무 전문가들이 봐도 감탄을 한다.

군과 주민들은 이 나무를 특별히 가꾸진 않는다.

매년 병충해 방제를 위해 약을 뿌리고 말랐거나 병충해를 먹은 가지를 잘라내는 정도의 일만 한다.

2003년 태풍 '매미' 당시 뿌리가 약간 드러나자 각종 영양분이 풍부한 '생명토'를 보강해주고 주변 정리도 한차례 해주긴 했다.

이 나무는 현재 8대째 마을에 살고 있는 밀양 손씨들이 정착하면서 심은 것으로 주민들은 파악하고 있다.

군 삼림과 강신천(49) 산림보호담당은 "나무가 워낙 잘 생겨 한 때 군 관문 장소에 옮겨 심으려고 검토를 했을 정도"라며 "유구한 우리역사를 상징하는 듯한 이 나무를 의령의 얼굴로 만들기 위해 생명을 최대한 연장시키고 모양도 훼손되지 않도록 가꾸고 있다"고 말했다. b940512@yna.co.kr (끝)

swords_hr.gif

swords_hr.gif

[환경 미스터리] 10. 소나무는 왜 숲에서 점점 사라질까

솔씨 싹틔우는 맨땅과 햇빛
쌓인 낙엽이 뒤덮고 가려서 …

 

"어릴 때 광릉(경기도 남양주시)에 갔을 땐 소나무가 울창했는데 요즘은 도로변에만 있는 것 같더라고요."



회사원 김기영(31.경기도 고양시 화정동)씨는 "이곳에서 소나무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 아니냐"고 했다. 그의 느낌은 정확하다. 산림청에 따르면 1960년대만 해도 광릉 숲(2240㏊, ha=1만㎡)의 50% 이상이 소나무로 채워져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체의 4분의 1도 안 되는 500㏊만 소나무 숲이다. 소나무는 광릉에서만 사라지고 있는 걸까.

60~70년대 울창한 소나무로 뒤덮였던 남한산성. 지금은 행궁 뒤 영월정 주변과 수어장대 부근에만 소나무가 울창할 뿐이다. 나머지 지역은 활엽수가 대신 자리를 잡았다. 최근 서울시는 남산에서 소나무가 줄어들자 우량 소나무 씨앗을 채취해 양묘장에서 기른 뒤 남산에 다시 옮겨심는 방안을 지난달 초 발표했다. 예부터 지조와 절개.장생(長生)의 상징으로 사랑받던 소나무가 우리 곁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전영우 국민대 산림자원학과 교수는 "소나무가 줄어들고 있는 것은 전국적인 현상"이라고 했다. 그는 궁궐이나 절 등 목재문화재 대부분이 소나무로 만들어진 점을 상기시키며 "이대로 가다간 수십년 뒤 문화재 복원 사업도 못 할 판"이라고 걱정했다.

전 교수는 "50년 전 우리 산의 60%를 덮고 있던 소나무 숲이 25년 전에는 40%, 현재는 25% 정도로 급속히 줄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추세라면 50년 뒤에는 남한에서, 100년 뒤에는 한반도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까지 내놨다. 소나무가 사라진 지역을 신갈나무.떡갈나무 같은 활엽수가 채우게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가장 큰 이유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도시민이 아니라 농민의 감소가 원인이 됐다. 심영만 홍천 국유림관리소장은 "농민이 농촌을 떠나면서 소나무도 같이 없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분석을 내놓는 것은 소나무의 성장 방식 때문이다.

소나무 씨앗이 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맨땅에 떨어져 햇빛을 충분히 받아야 한다. 봄이면 가을.겨울에 떨어진 활엽수의 낙엽이 땅 위에 잔뜩 쌓여 있게 마련이다. 낙엽이 소나무가 발아할 수 있는 조건을 원천 봉쇄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이런 낙엽을 농민들이 긁어내 땔감이나 퇴비로 사용했다. 맨땅을 농부가 드러내 주는 것이다. 소나무로선 농부가 2세를 키워내는 산부인과 의사 역할을 했던 셈이다. 하지만 도시화와 함께 농부가 떠나면서 낙엽은 쌓여만 간다. 낙엽은 활엽수에는 토지를 비옥하게 해 자양분을 제공한다.

결국 소나무는 싹을 틔우지 못하고 활엽수만 번성하게 된다. 활엽수로 덮인 숲은 소나무의 성장에 필요한 햇빛마저 가린다. 그나마 남아있던 소나무도 쇠락해 솔방울을 주렁주렁 유난스럽게 많이 단다. 죽음을 앞두고 서둘러 자손을 남기려는 본능적 생존 전략이다. 인간의 '간섭'이 사라진 숲은 이렇게 소나무의 대(代)가 끊기고 활엽수로 대체되는 것이다.

국립산림과학원 임종한 박사는 "소나무의 멸종을 막고 문화재 복원용 소나무 숲이라도 보존하기 위해서는 농부가 해오던 관행을 의도적으로라도 답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기찬 기자 <
wolsu@joongang.co.kr>


◆ 진실 혹은 거짓=야산에서 꾸부정하게 자라는 소나무를 보면 언뜻 "쓸모없는 나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소나무만큼 용도가 다양하고 목재로서 훌륭한 나무도 드물다. 잎은 소화불량 치료와 강장제로, 꽃은 이질 치료에, 송진은 고약 원료 등으로 쓴다. 화분은 송기떡 같은 음식에 들어간다. 또 재질이 단단해 건축재.펄프용재로 이용된다. 특히 곰솔.강송 등 국내 소나무의 휨 강도는 미송 같은 외국 소나무보다 높아 선박.관.궁궐 제작 등에 유용하게 쓰인다. 겨울에 산소를 공급하기도 한다. 다만 국내 소나무는 외국 소나무에 비해 성장이 늦다.

우리나라에 소나무가 흔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다른 나무에 비해 물이 부족하고 토질이 좋지 않아도 햇볕이 강한 지역이면 잘 자란다. 기후 변화에 잘 적응한다. 따라서 토양이 척박하고 사철이 뚜렷한 한반도에서 번식하기 수월했을 것이다.

 

[서평] ‘한국의 상징’ 소나무의 모든 것 해부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소나무 / 전영우 지음, 현암사

우리나라에는 왜 소나무가 많을까? 소나무는 척박한 땅에서도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환경이 척박해도 견뎌내는 힘이 강한 특성 때문에 화전을 일군 땅에서도 살아나고, 땔감을 위해 베어버린 나무 터에도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예로부터 소나무는 궁궐재로, 나라의 상징수로 쓰인 ‘기둥’이었다. 600여년 전 조선이 개경에서 한양으로 수도를 옮길 때 목멱산에 심은 소나무. 그것은 지금 애국가의 한 구절로 남아 ‘남산 위의 저 소나무’로 널리 불린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겐 정이품 벼슬이 붙은 소나무, 토지를 소유한 부자 나무로 국가로부터 납세번호를 부여받기도 한 석송령 소나무도 있다. 궁궐을 비롯한 옛 건축물의 자재는 물론 거북선·판옥선·사신선·조운선 등 한선(韓船)은 모두 소나무로 만들었다.

조선백자도 경기도 광주 일대에 소나무 숲이 무성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예로부터 백자가마에서는 숯이나 재가 남지 않고 충분한 열량을 낼 수 있는 소나무를 연료로 사용했다. 불티가 남지 않는 소나무는 백자 표면에 입힌 유약을 매끄럽게 해 질 좋은 백자를 굽는 데 최상이었다.

이 책은 ‘가장 한국적인 나무’로 꼽히는 소나무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현장 보고서다. 저자는 지난 11년간 나무(숲)에 관한 책을 10권 넘게 출간한 국민대 산림자원학과 전영우 교수. 저자는 10년 전 처음으로 ‘소나무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 마음의 부채로 남아있던 안타까움을 털고자 이 책을 기획했다고 한다. 현석 이호신 화백과 의기투합, 3년 동안 전국의 주요 소나무숲 29곳을 다니며 소나무와 관련한 역사ㆍ문화ㆍ생태ㆍ환경 이야기를 쓰고 그렸다.

소나무, 산림 60%→25%로 격감

책은 소나무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도 담고 있다. ‘솔’은 나무 중 우두머리를 뜻하는 ‘수리’에서 나왔다는 얘기, 소나무 혼인시키기, 우리의 국보 83호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 일본 고류사의 목조 미륵보살상이 닮은 까닭, 소나무의 부피ㆍ나이를 계산하는 법, 소나무에 막걸리를 주는 까닭 등의 이야기가 재미있다.

이 책에서는 300컷에 달하는 사진과 그림을 통해 소나무숲 현장뿐 아니라 각종 소나무의 씨, 잎 수, 솔방울 모양 등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우리 소나무는 잎이 2개이며, 수피가 붉고, 겨울눈도 붉다고 한다. 굽이치고 옹이진 것은 힘든 환경을 견디며 살아낸 흔적이며, 실제로 살기 좋은 환경에서는 소나무가 곧게 높이 자란다는 것도 설명하고 있다.

소나무숲은 한때 우리 산림의 60% 이상을 차지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겨우 25% 정도로 줄어들었다. 저자에 따르면 ‘소나무 에이즈’라고 불리는 재선충병 등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소나무 전염병으로 앞으로 100년 뒤에는 한반도에서 소나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한다. 이 땅에서 사라지는 소나무숲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1만9500원.

박란희 주간조선 기자(rhpark@chosun.com)

[낮은목소리로] 나무꾼의 하루
[경향신문] 2005-01-14 18:13  
〈한승오 귀농인〉 농사일을 다 마무리하고 한겨울이 오면 나는 나무꾼이 된다. 나무보일러에 불을 지피려면 산에 들어가 나무를 해와야 하기 때문이다. 기름보일러도 있지만 1ℓ에 700원을 훌쩍 웃도는 기름값에 마음껏 기름보일러를 돌릴 형편은 못된다. 겨울이 깊어갈수록, 연료통의 기름 눈금이 한 금 한 금 밑으로 내려갈수록 나는 더욱 부지런한 나무꾼이 되어야 한다.

-보일러 기름 아끼려 톱질- 자그마한 톱 하나 달랑 들고 집 뒤로 이어진 야트막한 산을 오른다. 저 멀리 보이는 앞산에서 윙 윙 엔진톱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누군가가 나처럼 나무를 하러 산에 올랐나 보다. 무섭게 톱날이 돌아가는 엔진톱 앞에서는 수십 년 세월 자리를 굳게 지켜온 큰 나무도 나무젓가락 꺾이듯 쉽게 넘어지고 만다. 엔진톱을 한두 시간 돌리면 주위에 쓰러진 나무는 즐비하다. 그래서 나는 엔진톱이 무섭다. 그 기계 힘에 휘둘려 내 욕심까지 덩달아 커질까 두렵다. 나의 톱은 두 자도 채 안될 만큼 작은데, 나에게는 나무를 베어 넘길 연장이 그밖에 없음이 참 다행스럽다.

올해는 말라죽은 소나무가 눈에 많이 띈다. 햇볕을 받으려고 높이높이 오르려다 그만 지쳐버린 듯, 소나무는 앙상한 줄기만 남긴 채 박제가 되었다. 그 주위에 높다랗게 키를 세우고 무성하게 가지를 벌린 참나무가 밉살스럽다. 소나무가 죽어가는 것은 그 참나무들의 짙은 그늘 때문이었다. 참나무도 소나무를 죽이려 사는 것은 아닐 터, 이곳의 기후가 참나무의 성미를 북돋우는 쪽으로 점점 기울어지기 때문이겠지. 시골의 야트막한 뒷산 한 구석에서도 지구적 변화가 몰고 오는 진폭이 섬뜩하게 감지된다. 소나무는 적은 햇볕만 쬐어도, 적은 물만 간직하고 있어도 푸릇푸릇한 잎을 사시사철 떨어뜨리지 않는 나무다. 욕심 없이 가난을 받아들이는 침엽수다. 그런데 이제는 한 뼘의 햇볕, 한 방울의 물까지 죄다 빼앗아버리는 잎 넓은 활엽수의 기세에 그 가난한 기개조차 펼 길이 없다. 아 소나무야, 너의 운명이 서글프다. 소나무는 나의 슬픈 땔감.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소나무를 살리려면 주위를 포위하고 있는 참나무를 베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참나무일수록 둥치가 굵고 키가 높다랗다. 혼자 베려다가는 톱질하는 중간에 톱이 나무 무게에 눌려 옴짝달싹 못하고 만다. 그래서 굵은 참나무를 벨 때는 아이들을 부른다. 두 아이가 나무를 넘어뜨릴 방향으로 힘껏 밀고 나는 톱질을 한다. 톱질하다 한숨을 돌리며 아이들에게 물었다. “이 나무는 얼마나 살았을까?” 작은아이가 선뜻 답한다. “100년.” 이어서 큰아이가 답한다. “90년.” 다시 작은아이가 말을 바꾼다. “80년.” 나는 기껏해야 10년 정도로 계산했는데 아이들의 직감은 사뭇 다르다. 그래 맞아, 이 나무는 너희들 짐작대로 어마어마한 존재일 거야. 마 100년의 세월만큼 깊은 존재일 거야. 사람이 100년을 살아 이 나무처럼 될 수 있겠어? -잘린 밑동보면 가슴아파- 톱질을 계속하자 나무 넘어가는 소리가 점점 뚜렷해진다. 뚝, 뚝, 우지직. 아이들이 긴장하며 소리를 지른다. “넘어간다~.” 그 소리와 동시에 뚜두둑 뚝 뚝 쿠웅! 나무의 숨이 묵직하게 넘어간다. 그 숨 넘어가는 소리가 내 가슴을 깊숙하게 두드린다. “어, 10년밖에 안 되네.” 쓰러진 나무의 나이테를 헤아려본 아이들의 실망 섞인 탄식이 들렸지만, 그 세월의 숫자가 참나무의 존재를 왜소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주변 소나무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너를 베었다는 나의 변명도 이미 쓰러진 깊은 존재 앞에서는 군색하기 짝이 없었다. 아 참나무야, 잘리고 남은 너의 허연 밑동이 내 가슴을 아프게 찌른다. 참나무는 나의 가슴아픈 땔감.

베어낸 나무를 어깨에 메고 산을 내려오지만 내일이면 또 산을 올라야 하는 나무꾼. 산과 나무에 기대어 살아야 하는 나무꾼. 나는 주문을 읊조리듯 속으로 곱씹는다. “산이여, 나무여… 가난한 나무꾼을 내치지 마소서.”

 

경기도 양평 땔감나누기
[한겨레신문] 2004-12-22 21:51  

할머니께 ‘겨울나기’ 땔감 22일 오전 경기도 양평군 명달리 소유곡 마을에서 생명의숲 청년회원 40여명이 인근 야산에서 모은 잔가지들과 목재들을 겨울나기 땔감으로 전달하자, 홀로 사는 김기순(82) 할머니가 “오랫만에 사람들이 집을 찾아와줘서 고맙다”며 눈물을 닦고 있다. 양평/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겨울철 난방비 한 푼이라도 아껴야죠"

 

[연합뉴스] 2004-12-06 10:14

겨울을 맞아 기름값이 급등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수인리의 산골 주민들이 산속에 버려진 간벌목을 땔감으로 채취하고 있다.주민들은 간벌사업시 자르는 방법이나 나무 길이 등을 고려한다면 땔감이외에 농가용 재목으로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며 당국의 정책 배려를 바라고 있다./이해용/지방/사회/ -지방기사 참조- 2004.12. 6 (춘천=연합뉴스) dmz@yna.co.kr (이해용)

 

 

 

 

 

 

 

 

 

"이 눔의 지게가 내 인생인디..."
[오마이뉴스 2004.12.29 17:57:37]

 

 
[오마이뉴스 노태영 기자] 지게를 보면 아버지가 생각난다. 지게를 생각하면 어렸을 적 땔나무하던 시절이 가슴 아프게 떠오른다. 지게를 보면 작대기가 생각난다. 작대기는 바로 아버지의 버팀목이자 권위의 상징이기도 하다. 노동이 힘들고 지게가 무거울 때 작대기는 노동요에 장단을 맞추는 악기가 된다. 산 속에서 호랑이 만났을 때 작대기는 방어무기가 된다. 지게는 몸이 불편하신 아버지 어머니의 편안한 운반 수단이 된다. 그리고 이승과 저승을 가는 길목에서 지게를 빌려 타기도 한다. 아버지와 60여년 함께 한 평생지기 지게 없는 농촌과 작대기 없는 농사꾼을 생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나에게 지게와 작대기는 아버지와 거의 동일시할 정도로 친숙하게 느껴진다. 지게가 나의 의식을 이렇게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아버지가 지게를 진 모습이 어렸을 적에 일상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게를 진 아버지의 모습은 지금은 아니지만 어렸을 적에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막 해가 뜰 무렵에 아버지가 지게 위에 바작을 얹고 산더미처럼 수북하게 쌓아올린 소 먹일 풀(꼴)을 지고 대문으로 들어오시는 모습은 마치 산이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1990년대 초에 아버지가 고향을 떠나실 때, 가장 안타깝고 정이 들고 손때 묻은 농기구가 바로 지게였던 것 같다. 지금도 생생하다. 인천으로 이사 가던 날 아버지는 빈 지게를 메시고 집을 한 바퀴 돌고 나서도 빈 지게를 내려놓지 않으셨다. 지게다리를 쓰다듬는 아버지의 모습은 멀어져 가는 고향, 아니 다시 못 돌아올지도 모르는 고향을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는 "이눔의 지게가 내 인생인디"라고 말씀하시며 눈물을 훔치셨다. 그렇다. 지게는 아버지와 60여년을 함께 한 평생지기다. 그러니 지게를 벗어버리는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했으랴. 지금은 지게가 하는 일을 손수레나 경운기가 대신하고 있지만 옛날에는 지게 없이 농사짓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농사꾼들은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지게 없이는 못산다고 종종 말하곤 했다. 조금은 딱딱하지만 백과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지게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곧은 가지가 비스듬히 돋은 장나무 2개를 잘라 아래를 약간 넓게 나란히 세우고 장나무 사이에 나무나 장쇠를 가로질러 사개를 맞추어 고정시킨다. 2개의 멜빵을 걸어 어깨에 메는데, 등이 닿는 부분에는 짚을 엮어 짠 두툼한 등태를 단다. 짐을 얹어 사람이 어깨에 지고 운반하며, 세울 때는 작대기를 세장에 받쳐 놓는다. 지게는 한국의 농업형태와 지형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났고, 각 지방과 시대에 따라 그 모양과 쓰임새가 여러 갈래로 분화되었다. 쪽지게·옥지게·거지게·물지게·솔지게 등의 많은 종류가 있으며, 각 부분의 이름도 지방에 따라 각기 차이가 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시대가 변함에 따라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다. 지게는 산길이나 좁은 길에서 무거운 짐을 나르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내가 시골에서 본 지게는 그다지 다양하지 않다. 지게는 바작이라는 부속물에 의해 훨씬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다. 지게는 농사꾼에게는 거의 분신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장날에 장에 갈 때 다른 사람이 지게에 팔 물건을 지고 가면, 할 일 없는 사람은 빈 지게라도 지고 장에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지게는 농사꾼의 희망이자 천형 지게는 희망과 고역을 그대로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지게는 우리 7남매에게는 희망이었다. 아버지의 지게 속에 담긴 엄청난 꼴(풀)과 땔나무, 온갖 곡식 등이 바로 우리의 희망이었고 우리의 삶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농사꾼의 천형(天刑)의 모습을 갖고 있다. 아버지의 지게는 당신에게는 고역과 노역의 힘듦이 그대로 묻어 있다. 지게를 멘 아버지의 등은 7남매를 등에 업으신 것보다 더 무겁게 느껴지셨으리라. 농사를 지으면서 지게를 멘 사람들은 척추가 휘고 관절염이 생기게 마련이다. 동네 사람들을 보면 지게를 많이 멘 사람들은 거의 신체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그래서 이런 지게에 대한 나의 추억은 결코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우리 집에는 지게가 3개가 있었다. 아버지 지게와 형님 지게, 그리고 나의 지게. 크기가 다 달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 지게는 우리 지게와는 조금 달랐다. 아버지 지게에는 바작이라는 싸리나무로 만든 커다란 운반도구가 있다. 바작에는 보통 꼴(풀)이나 흙을 담는다. 묶을 수 없는 것을 보통 바작에 담아서 지게에 얹어 나른다. 벼 낟가리나 보리 다발 등은 대개 지게에 바로 얹어 나른다. '가을에는 부지깽이도 덤벙인다'라는 속담처럼 바쁜 시골에서는 어린아이도 높을 대신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나의 지게를 아버지가 만들어주셨다. 작고 아담한 지게다. 지게질하는 어린 농사꾼 지게를 아무나 지는 것은 아니다. 아낙네는 지게질을 일반적으로 하지 않는다. 허리가 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간혹 과부는 지게를 메는 경우는 있다. 그러나 내 기억으로는 매우 드물었다. 그만큼 지게질은 힘들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아버지는 내 지게를 나에게 맞도록 만들어 주셨다. 그래서 나는 그 지게로 산에 가서 땔나무도 하고 벼 낟가리도 나르고, 콩대도 나르고, 볏 가마도 날랐다. 힘들었지만 아버지처럼 나도 지게를 질 수 있다는 생각이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 마치 어린 농사꾼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자부심도 생겼다. 우리 아이들 또래에서 지게를 질 수 있는 아이들은 많지 않았다. 지난 가을 우리 4형제는 아버지가 고향에 내려오신 후 처음으로 내동산(해발 887m) 남서쪽 자락에 있는 시낭골이라는 골짜기로 으름과 다래, 머루, 산포도를 따러 갔다. 30여년의 세월은 어렸을 때 자주 오르내렸던 뒷동산을 엄청나게 우거진 숲으로 바꾸어 놓았다. 마치 지리산 골짜기를 헤매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새삼 자연의 힘이 세다는 것을 실감했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넘어져 길을 막아서고, 흐르는 골짜기에는 온갖 나무들이 하얀 뿌리를 드러내고 가로 누워 있다. 만물은 이렇게 스스로 길을 내고 스스로 자연으로 돌아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골짜기 중간을 지나 산 중턱에 도달했을 때 문득 30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마 큰 형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큰 형님과 나는 여기까지 땔나무를 하러 왔던 것이다. 지금은 집 바로 뒤 뒷동산에 나무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지만 우리가 어렸을 때는 모든 집이 나무로 밥도 하고 난방도 해결했기 때문에 나무가 드물었다. 그래서 땔나무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동네 주위에서 시작된 땔나무 준비는 갈수록 깊은 산 속에서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집에서 두어 시간이 걸리는 곳까지 땔나무를 하러 가곤 했다. 진짜 나무꾼이 되는 거다. 나무 종류도 다양하다. 이름은 잘 모르지만 나무를 보면 화력이 좋은 나무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싸리나무나 파리똥 나무, 때똥나무, 참나무 등이 화력이 참 좋았다. 이런 나무들은 깊은 산 속에만 있다. 그래서 화력이 좋은 나무를 하기 위해 더 깊은 산골짜기로 들어가야 한다. 지게와 하나가 돼야 힘이 덜 들어 겨울방학을 하면 모두가 땔나무를 하는데 매달려야만 했다. 가족 모두가 나무꾼이 되는 것이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땔나무를 했다. 행랑채 허청에 땔나무가 가득 찰 때까지 산에 가서 나무를 해 와야 한다. 그래야 따뜻하게 겨울을 날 수 있다. 깊은 산에서 땔나무를 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집까지 운반하는 것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바로 지게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한 아름이 넘도록 나무를 베어 칡넝쿨로 단단히 묶는다. 세 묶음 나무를 베면 붉은 밧줄로 다시 이 나무를 묶는다. 그리고 지게를 나무더미 속에 질러 넣는다. 이때 바로 노하우가 필요하다. 나무 다발의 4분의 1 정도에 지게를 질러 넣어야 한다. 지나치게 높게 하면 지게를 졌을 때 밑이 너무 무거워 걷기 매우 어렵다. 또 지나치게 낮은 곳에 지게를 질러 넣으면 위가 무거워 중심잡기가 매우 어렵다. 산길을 내려와야 하기 때문에 힘이 갑절로 든다. 비탈이 심해 45˚가 넘으면 아예 지게를 눕혀 놓고 지게 다리를 잡고 앞에서 끌고 내려와야 한다. 물론 작대기는 브레이크 역할을 해야 한다. 잘 운전하지 않으면 지게와 땔나무 짐이 골짜기까지 굴러 나무꾼이 다칠 수도 있다. 지게다리가 부러지면 다시 지게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여간 낭패가 아닐 수 없다. 나는 나무 두 다발을 묶어 지게에 졌다. 그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다. 다리가 휘청휘청했다. 지게 땔나무 두 다발을 지고 한 시간이 훨씬 넘는 산길을 내려오는 것은 참 힘든 작업이었다. 지게와 내가 하나가 되어야 덜 힘이 든다. 지게와 내가 따로 놀면 갑절로 힘들다. 그래서 지게의 움직임에 나의 걸음걸이를 맞춰야 한다. 자연스럽게 리듬을 타게 된다. 지게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보면 춤추듯이 사뿐사뿐 걸을 수 있게 된다. 물론 작대기로 리듬을 맞춘다. 그리고 오르막길에서는 작대기가 지주대(支柱帶) 역할을 한다. 그리고 풀숲을 지날 때는 작대기는 뱀을 쫓는 구실을 하게 된다. 지게질을 잘 하는 사람은 작대기를 잘 활용한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내려오다 동네가 보이면 발걸음 약간 가벼워지고 내가 지게에 지고 있는 땔나무가 나를 대견스럽게 느끼도록 만들었다. 아버지 지게에 실려오는 봄 아버지는 아이들 허리통 만한 나무들을 지게에 지어 나르셨다. 나중에 톱으로 팔뚝 크기로 잘라 장작을 패서, 집을 빙 돌아가면서 처마 밑에 어른 키가 넘도록 쌓아놓으셨다. 쌓아 놓은 장작이 참 아름답기도 하고 든든한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런 장작으로 설에 조청도 하고 떡도 한다. 섣달이나 정월에 추워지면 구들장이 뜨거워지도록 아궁이에 장작을 넣어 놓으면 밖이 아무리 추워도 방바닥만큼은 천국이 되었다. 시골에서 땔나무는 이듬해 진달래꽃이 필 때까지 계속되었다. 봄에 하는 나무는 물이 올라 있기 때문에 조금 말려서 아궁이에 넣으면 화력이 참 좋았다. 봄에는 대개 아버지가 땔나무를 많이 하셨다. 우리들은 학교 개학을 했기 때문에 산에 갈 수가 없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이 아버지는 땔나무를 네 다발로 묶어 지게에 지고 오실 때, 나무 짐 위에 참꽃(진달래꽃)을 한 아름을 꽂아 오곤 하셨다. 산에서 봄을 가져오신 것이다. 지게에 지고 오시는 참꽃은 아이들의 간식거리가 되었고, 꽃병에 꽃아 놓으면 집안에서도 봄을 느낄 수도 있었다. 아버지의 지게가 그리운 것은 아마도 지금은 지게를 거의 사용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간혹 도시에서 짐을 나르기 위해 지게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지금은 농촌에서도 지게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옛날 아버지의 지게와 나의 지게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아마도 흙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이번 겨울에 고향에 가면 아버지에게 지게 하나 만들어 달라고 졸라야겠다. 바로 아버지가 고향에 계시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행복이다. 아아! 행복하다.
덧붙이는 글
노태영 기자는 남성고 교사이고, 이 글은 http://family1004.netian.com에도 연재합니다.

swords_hr.gif

swords_hr.gif

- 인왕산 鶴학巢소島도에서 최범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