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C 미친 바보들] <5> 꽃에 미쳐 정원을 꾸미다

"매화 얼어붙을라"… 하나뿐인 이불로 둘러줘
국화 48종 돼야 구색갖춘것… 중국에서 수선화 반입 늘어
국법으로 금지시키기도… 온실장치 설치한 집 많아

정민·한양대 국문과교수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의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가운데 독서여가(讀書餘暇)란 작품이 있다. 여름날 부채를 든 선비가 툇마루로 나와 앉았다. 마당에는 고급스런 도자기 화분 두 개가 받침대 위에 놓였다. 그는 비스듬히 기대 앉아 화분에 핀 꽃을 감상한다. 한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에는 고급 화분에 담긴 화훼를 파는 상점과 삼층으로 틀어 올린 분재송(盆栽松), 또는 괴석을 가마에 싣고 부지런히 어디론가 달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온다.

18세기 들어 화훼 재배와 정원 경영이 웰빙 붐을 타고 크게 성행했다. 오창렬(吳昌烈)이 ‘간화편(看花篇)’이란 시에서 “나는 어린 꽃 기르길 어린 자식 기르듯 했고, 이름난 꽃 아끼기를 명사를 아끼듯 했다.(我養穉花如穉子, 我愛名花如名士)”라 한 것은 조금도 과장된 말이 아니다.

당시에는 꽃에 미친 사람이 참 많았다. 승지 박사해(朴師海)는 매화에 벽(癖)이 있었다. 안채에서 자는데, 눈보라가 크게 몰아쳤다. 매화가 얼까 봐 걱정이 된 그는 덮고 있던 하나 뿐인 이불로 매화를 칭칭 둘렀다. 벌벌 떨며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젠 안 춥겠지?” 당시 문인들의 화훼벽이 잘 나타난 유명한 일화다. 승지라면 지금으로 쳐서 청와대 비서관이다.


분재와 꽃을 파는 상점을 담은 그림. ‘태평성시도’의 부분이다.
원예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자연스레 이를 공급하는 화훼 상인들이 생겨났다. 필운대 아래 누각동과 도화동 청풍계 등에는 아전으로 있다가 물러난 뒤 분재나 화훼 재배로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기이한 등걸에 접붙인 매화나 괴석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 분재, 층층이 꼬아 올려 높은 곳에 열매가 달리게 한 층석류, 화분 하나에 서너 가지 빛깔의 꽃을 피운 국화 등이 특히 인기가 높았다.

조수삼(趙秀三·1762-1849)의 문집에는 분송(盆松)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조팔룡(趙八龍)이란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도화동 어귀에 살며 분에 담긴 온갖 기이한 형상의 소나무를 팔았다. 그의 소나무 분재는 장안의 부잣집에서 값을 아끼지 않고 사갔다. 사람들은 그를 애송노인(愛松老人)으로 불렀다.

호남에서 조운선(漕運船)이 쌀을 싣고 올라올 때면 치자와 석류, 동백과 영산홍, 백일홍과 종려, 왜철쭉 또는 유자 같은 남방의 화훼들이 배에 가득 화분에 담겨 서울로 실려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 겸재 정선의‘독서여가’. 부채를 든 선비가 툇마루에 앉아 고급스런 도자기 화분에 핀 꽃을 감상하고 있다.
국화 재배도 크게 성행했다. 백학령(白鶴翎)이니 취양비(醉楊妃)니 하는 외래 품종 국화의 이름은 이 시기 여러 문인들의 문집에 수도 없이 나온다. 백운타(白雲朶) 같은 일본 품종이 새로 들어와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양수리 위 벽계(檗溪) 북쪽 미원촌(薇源村)에 은거했던 심석구(沈錫龜) 같은 사람은 혼자서 무려 48종의 국화를 재배했던 것으로 유명했다. 신위(申緯·1769-1845)의 시에 보면, 국화꽃 파는 소리가 온 거리에 가득한데, 해마다 다른 품종이 나와 품형(品形)을 다툰다고 했다.

강이천(姜彛天·1769-1801)의 기록에는 국화재배 전문가인 김노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국화꽃을 손톱만한 것부터 한자 남짓 큰 것까지 자유자재로 피워냈고, 심지어 검은 빛깔의 국화까지 피웠다. 꽃 피는 시기도 마음대로 조절했고, 한 가지에서 서로 다른 색깔의 꽃을 피워내기까지 했다. 그는 그 방법을 비밀에 부쳐 이것으로 먹고 살았다.

내가 궁금해서 찾아보니 서유구(1764-1845)의 ‘예원지(藝?志)’에 한 줄기에서 여러 빛깔의 꽃을 피우는 비법이 실려 있었다. 붉은 꽃을 희게 만들려면 유황을 태운 연기를 꽃받침에 쐬어 탈색시켰다. 검은 꽃은 흰 꽃이 막 피려 할 때 진한 먹을 기름 한 두 방울에 섞어 꽃잎에 떨구거나, 먹물을 젖에 적셔 칫솔로 몇 차례 뿌려 먹물이 꽃잎에 스며들게 해서 만들었다. 한 마디로 경쟁력 있는 화훼 상품을 출시하기 위해 별 짓을 다했다.

(정약용도 서울 집에 18종의 국화 화분과 그 밖의 여러 종류의 화훼를 재배했다. 강진 시절 제자인 황상에게 써준 글에는 뜰 앞에 울림벽을 하나 세워 석류,치자 등 갖은 종류의 화분을 품격을 갖춰 마련하되, 국화는 48종은 되어야 구색을 갖추었다 할만 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중국에 사신 갔던 사람들이 수선화 구근을 가져오면서 수선화 붐도 일었다. 나중에는 너나없이 가져오는 바람에 국법으로 수선화의 반입을 금지해야 했을 정도였다. 남국의 식물인 파초도 사대부의 집안에서 재배했다. 이 시기 문사들의 정원을 그린 그림에는 으레 파초가 그려져 있다. 온실 장치까지 갖춘 집도 적지 않았다.

원예 붐이 이렇듯 경쟁적으로 조성되다 보니 정원 조경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당시 문집에서 정원의 구체적 배치를 묘사한 글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실제 18세기 문집에서 주인의 성씨를 따거나 고유한 이름이 붙은 정원은 필자가 직접 확인한 것만도 수십 개가 넘는다. 이런 것은 물론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정원을 경영할 여력이 없을 경우에는 의원(意園), 오유원(烏有園), 장취원(將就園) 등 상상 속의 정원을 꾸며 글로 남기는 일도 유행처럼 번졌다.

 

정원 조성 붐을 타고 괴석에 대한 수요도 부쩍 늘어났다. 앞서 신위가 중국에 사신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괴석만 잔뜩 싣고 온 일을 말했지만, 이희천(李羲天·1738-1771) 같은 이는 집에 만 점의 수석을 갖춰두고 당호를 아예 만석루(萬石樓)라고 지었을 정도였다.

유박(柳璞·1730-1787)이 황해도 배천에 경영한 백화암(百花庵)은 당대 내로라 하는 문인들이 모두 기문과 시를 써주었을 만큼 유명했다. 그는 자신의 화훼 재배 경험과 철학을 담아 ‘화암수록(花庵隨錄)’이란 인상적인 책을 남겼다. 어느 집에 기이한 화훼가 있단 말을 들으면 천금을 주고라도 반드시 구해왔고, 중국을 왕래하는 배편에 부탁하여 외국의 화훼를 구해오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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