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동부 코넥티커트 주의 하트포트에 소재한 그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의 집은 빅토리아 조의 고딕식 양식으로 미시시피 강의 Riverboat를 그대로 모방해서 지은 저택이었다

19개의 방,  18개의 벽난로,  5개의 욕실과 발코니, 그리고 지붕 위에 세개의 탑까지 세운 건물로

외양이나 내부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그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에 매혹적인 왕궁에서 귀족적인 생활을 하는 생활을 꿈꾸었다고 한다

 

그의 집은 바로 그러한 어린 시절의 꿈을 실현시킨 마크 트웨인 자신이었다

그의 집에서는 구석구석마다 그의 폭발적이고 구속되기 싫어하는 기질이 숨쉬고 있었다

그러나 17년간 그의 가족들이 정들어 살던 그 집은 경매에 넘어가 버리는 불행을 당하게 된다

그는 당시 2천만달러라는 거금을 벌기 위해 새로운 인쇄기의 발명에

과도한 자금을 투자하는 바람에 파산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그의 객기가 아니었다면

그는 사랑하는 그의 아내와 세 딸,  열한마리의 고양이들,  세 마리의 개,  그리고 일곱명의 하인들과

행복하게 말년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파산 후, 그와 그의 가족들에게는 그 집에 살던 행복한 시절이 다시는 찾아와 주지 않았다

 

다음은 그의 딸, 수지가 그 집에 돌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런던에 머물던 마크 트웨인이 쓴 편지의 내용이다

 

"수지가 그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었다면 나는 더욱 견디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 집은 우리에게 결코 지각없는 물체가 아니었습니다

영혼과 마음과 그리고 우리를 바라보는 눈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집은 우리들을 항상 따뜻하게 보듬어주고,  위로해주고,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 집은 우리의 소유였고 우리는 그 집을 믿고 의지했었습니다

우리는 그 집이 주는 은혜와 평화의 축복 속에서 살았습니다

외촐에서 돌아오면 그 집은 항상 우리를 따뜻하고 밝게 맞아주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감동없이는 우리는 집으로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Id=7515&logId=637506)

 

History of the House

Sam and Livy Clemens were married in 1870 and moved to Hartford in 1871 to be near his publisher, the American Publishing Company. The family first rented a house on Forest Street in the Nook Farm section of the city from Livy's friends, John and Isabella Beecher Hooker, and later purchased land on Farmington Avenue, where their neighbors were some of Hartford's most prominent citizens. In 1873, they engaged New York City architect Edward Tuckerman Potter to design their house.

Mark Twain and his family enjoyed what the author would later call the happiest and most productive years of his life in their Hartford home. Twain wrote:

"To us, our house . . . had a heart, and a soul, and eyes to see us with; and approvals and solicitudes and deep sympathies; it was of us, and we were in its confidence and lived in its grace and in the peace of it benediction."

Financial problems forced Sam and Livy to move the family to Europe in 1891. Though he would complain about the other places the family lived ("How ugly, tasteless, repulsive are all the domestic interiors I have ever seen in Europe compared with the perfect taste of this [the Hartford home's] ground floor"), the family would never live in Hartford again. Susy's death in 1896 would make it too hard for Livy to return to their Hartford home and they sold the property in 1903.

Twain's remarkable 19-room Victorian mansion changed owners several times after the turn of the century. The Bissell family, who purchased the house from the Clemens family, lived in the house until 1917. From 1917 to 1921, the Bissells rented the building to the Kingswood School for boys. In 1921, the house was sold to a developer who by the middle of the decade began to plot the house's destruction so that he could more successfully exploit this prime site by constructing apartment buildings.

The Friends of Hartford saved the house in 1927 and from 1931 until the late 1950s its first-floor occupant was The Mark Twain Branch of the Hartford Public Library. The remainder of the house was rented as private apartments through the 1960s, when the first era of restoration began in earnest in time for the celebration of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house in 1974.

In the meantime, the neighborhood began to change as signaled by the insertion of the Mark Twain Apartments on Farmington Avenue in the 1920s and again more considerably in the early 1960s with the arrival of Hartford Public High School on Forest Street. The latter triggered the destruction of several Nook Farm period houses, and the texture of the immediate surroundings of the Twain House was sharply compromised. While a good neighbor and partner, the high school's physical presence dwarfed the historic landmarks nearby and effectively terminated the sense of a 19th–century setting to the south.

The Mark Twain House was designated a National Historic Landmark in 1963. The restoration was largely completed for the house's centennial in 1974. This early preservation of a Victorian home set the stage for, and encouraged, similar projects throughout the nation. In 1977, the National Trust for Historic Preservation honored the museum with the David E. Finley Award for "exemplary restoration."

 [이규태 코너]진돗개와 한국인

이규태·kyotaelee@chosun.com

지난 5월 개 족보 따지기로 유명한 영국에서 명견으로 등록된 진돗개가 일전에는 세계 80여개국이 참여, 권위를 자랑하는 세계애견연맹에서 국제공인견으로 등록되어 세계의 진돗개로 위상이 떠올랐다. 이 개의 세계화로 한국의 긍정적 측면이 부각될 계기가 되었다는 차원에서 조명을 대보고자 한다. 독일의 동물학자 알프레드 브레임은 개는 그나라의 민족성을 닮는다는 과학적 연구로 알려진 분이다. 그 나라 개를 보고 그 나라 사람을 안다고 말한 것은 로마의 박물학자 프리니우스다. 영국개인 불독이 착실하고 집요한 영국인을 닮고 독일개인 셰퍼드는 정갈하고 이지적인 독일사람을, 프랑스개인 푸들은 유쾌하고 낭만적인 프랑스 사람을, 중국개인 차우는 둔중하고 만만디인 중국사람을 닮았다는 데 이론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하듯이 한국개가 한국사람을 고스란히 닮았다고 견문기에 쓴 분은 개화기 한국에 숨어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무척 개에게 시달렸던 선교사 게일이다. 한국개의 종류는 많지만 그중 진돗개는 한국인의 기질을 많이 닮았으며 긍정적인 측면에서 더욱 그렇다.

한국사람의 정착성 기질, 곧 떠나 있으면서 항상 돌아가야 한다는 귀소성(歸巢性) 강한 것을 진돗개가 닮았다. 세상의 개들에게 귀소성이 다 있지만 바다를 건너서까지 귀소하는 개는 드물다. 진도 가는 나루에서 조상 대대로 사공질하는 한 노인은 뭍에 팔려갔다 찾아드는 진돗개가 나루에 흔히 나타나는데 이를 태워주는 것이 조상대대로의 법도라는 말을 읽은 일이 있다. 넉넉지 못한 진도에서 풍성하게 못 먹고 자라서인지 내핍성(耐乏性) 강한 것이며 아무리 잘먹고 편한 환경에 이주시켜도 가난했던 주인 찾아가는 충직성, 주인 아닌 남과 한국인 아닌 외국인 알아보는 데 별나게 민감한 배타성, 아무리 몸집 큰 멧돼지나 날렵한 셰퍼드일지라도 대드는 대담성, 불리하더라도 끈질기게 버티어내는 지구성, 후각으로 남의 집 물건 우리집 물건을 식별·대처하는 영민성 등을 고루 갖춘 대리 한국인이다. 일본 가면 신들을 모시는 성소마다 개의 석상을 세워놓았는데 이를 고마이누, 곧 고려견이라 한다. 아마도 고대에 일본에 건너간 진돗개의 위와 같은 장점들이 그렇게 신격시하지 않을 수 없게 했음직하다.

 

[뉴욕 뉴 비즈니스]바쁜 주인님 위한 '애완견 산책사' 성업
뉴욕=김기훈특파원 khkim@chosun.com

 

 
미국에선 개(犬) 팔자도 괜찮다. 뉴욕 맨해튼에서는 새벽에 건장한 청년이 7~8마리의 개를 데리고 시내나 강변을 산책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애견 산책사’가 출근하기 바쁜 직장인을 위해 운동을 시켜주는 것이다.

애견산책업은 10여년 전 등장해 지금은 미국에 상당히 많이 퍼져 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뉴욕 지역에만 100여개 업체가 성업 중인 것으로 업계에선 추정한다.

뉴욕의 애견업체인 ‘퍼피패스’나 ‘리시라인’은 수백명의 고객을 확보, 애견산책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부자들이 많이 사는 뉴저지와 매사추세츠에도 애견 산책업체가 많다. 바쁜 직장 생활 속에서도 애견을 갖고 싶어하는 전문직 종사자와 자영업자가 주고객이다.

요금은 지역마다 다르다. 뉴욕의 ‘리시라인’은 시간당 20달러(2만원)를 받고, 뉴저지의 ‘뉴튼 애견산책’의 요금은 30분에 18달러로 비싼 편. 시카고의 ‘대니스 애견산책’의 경우 하루에 1시간30분씩 산책시켜 주는 데 13달러를 받는다. 아침 10시 이전이나 오후 6시 이후, 주말 등 바쁜 시간에 산책을 부탁하면 4달러를 추가로 내야 한다.

애견산책업체들은 개 주인이 휴가를 떠나면 하루에 세 번 산책을 시켜주고 개 식사를 챙겨주기도 한다. 이 경우 요금은 40~50달러로 올라간다.

애견산책업은 생각보다는 바쁘고 힘들다. 신청이 점심시간 전후에 집중적으로 몰리기 때문이다. 아침과 저녁은 주인이 직접 시키고, 낮에는 애견업체에 부탁하는 셈이다. 그래도 뉴욕에서 2년째 애견산책사로 일하고 있는 마이클 터피는 “낮에만 집중적으로 일하고 저녁에는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16년만에 담배 끊은 골초 침팬지

 

【시안=로이터/뉴시스】 23일 중국 북서부 산시성 시안의 친링 동물원에서 '아이아이'라는 이름의 27살짜리 암컷 침팬지가 담배를 피고 있다. 이 침팬지는 1989년 첫 짝이 죽은 뒤 담배를 피기 시작했으며 1997년 두번째 짝과 새끼 한 마리가 죽은데 이어 또다른 새끼 한 마리가 다른 동물원으로 보내진 뒤부터 심한 골초가 됐다. 그러나 아이아이는 최근 16년만에 담배를 끊는데 성공했다.

[만물상]이종(異種) 격투기
정중헌 논설위원 jhchung@chosun.com

 

기성세대에는 막싸움처럼 보이는 이종(異種) 격투기가 젊은세대에선 폭발적 인기다. 지난주 일본 오사카돔에서 열린 K1 월드그랑프리 개막전에서 씨름천하장사 출신 최홍만이 링의 야수 밥샙을 꺾으면서 열기가 치솟고 있다. 케이블TV 중계 순간 시청률이 15.743%까지 올라 케이블사상 최고의 기록을 세웠다니 열광의 도를 짐작할 만하다.

▶이종격투기는 서로 다른 격투기나 무술이 맞붙는 경기다. 그 역사는 고대 그리스올림픽의 판크라티온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1970년대 초 레슬링의 안토니오 이노키와 프로복싱의 무하마드 알리와의 대결을 연상하는 게 편하다. 요즘 젊은 층이 열광하는 종목은 각 무술의 장점만 골라 모은 종합격투기인데 K1은 킥복싱 가라테 쿵후의 K에 NO.1을 합친 입식(立式) 타격경기로 룰은 있다.

▶우람한 체격의 벌거벗은 남자들이 피튀기며 상대를 제압하는 격투기를 현대인들이 왜 좋아할까. ‘이종격투기에 반영된 사회문화적 코드읽기’란 논문을 발표한 서희진 교수는 세 가지로 분석한다. 첫째는 볼거리를 통한 대리만족, 둘째는 흥분과 공격성 등 원초적 본능의 표출, 셋째는 가상을 현실화한 문화적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종격투기를 CEO들의 성공전략으로 내놓은 보고서도 흥미롭다. 이종격투기 경기에서 세계화시대의 개방의 중요성과 끊임없는 변화의 필요성, 다양한 분야의 통합된 기술의 중요성을 읽으라는 요지다.

▶선수들은 어떤 심정일까. ‘테크노 골리앗’ 최홍만은 밥샙과 경기 중 웃었는데 “갑자기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서”라고 했다. 격투기 선수들을 인터뷰해본 결과 처음에는 불안한 마음이 들지만 몇분이 지나면 격렬한 흥분과 행복감을 느낀다고 한다. 링 위에서 싸울 때 기분이 좋다는 선수도 있다.

▶이종격투기 붐을 탈근대와 전근대의 만남으로 해석한 논문도 나왔다. 변화의 방향이 원시 미개사회로 되돌아가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냉정히 보면 폭력과 투쟁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문화적 상업적으로 이용한 돈벌이에 다름 아니다. 업계가 추산하는 국내의 팬 규모는 최소 50만명에서 최대 100만명, 인터넷 사이트만 130여개, 격투기 중계는 여성들이 더욱 열광한다니 세상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이런 쌈박질이 싫은 사람들에겐 지상파가 방영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다. 폭력을 상업화하고 그걸로 스트레스를 푸는 사회는 더욱 거칠어질 수밖에 없다.

 1%의 행복

                글 ; 이해인님


사람들이 자꾸 묻습니다.
님들은 행복하냐고...???

낯선 모습으로 낯선 곳에서 사는 제가
자꾸 걱정이 되나 봅니다.

저울에 행복을 달면...
불행과 행복이 반반이면 저울이 움직이지 않지만
불행 49% 행복 51%면
저울이 행복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행복의 조건엔...
이처럼 많은 것이 필요없습니다.

우리 삶에서 단 1%만 더 가지면 행복한 겁니다.
어느 상품명처럼 2%가 부족하면
그건 엄청난 기울기입니다.

아마...
그 이름을 지은 사람은
인생에 있어서 2%라는 수치가 얼마나 큰지를
아는 모양입니다.

때로는 나도 모르게 1%가 빠져나가
불행하다 느낄 때가 있습니다.
더 많은 수치가 기울기전에
약간의 좋은 것으로 얼른 채워넣어
다시 행복의 무게를 무겁게 해 놓곤 합니다.

약간의 좋은 것 1%...
우리 삶에서 아무 것도 아닌 아주 소소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기도 할 때의 평화로움...

따뜻한 아랫목

친구의 편지

감미로운 음악

숲과 하늘과 안개와 별...

그리고 잔잔한 그리움까지...

팽팽한 무게 싸움에서는 아주 미미한 무게라도
한쪽으로 기울기 마련입니다.
단 1%가 우리를 행복하게 또 불행하게 합니다.

나는 오늘
그 1%를 행복의 저울 쪽에 올려 놓았습니다.
그래서 행복하냐는 질문에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행복하다고.(^^.))...//

  - 인왕산 鶴학巢소島도에서 최범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