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에 17일간 유럽출장을 다녀왔다.

이제는 더 이상 취미가 아닌 직업이 되어버린 스포츠.

하지만 아직까지는 흥미롭고 열정을 느낀다.

특히 금년 여름 독일에서 개최되는 월드컵은

개인적으로도 많은 기대가 되고 벌써부터 흥분된다.

2002년의 기억도 되살아나고……

살다보니 월드컵은 내 인생과 특별한 인연을 맺게되었다.

2000년 한국월드컵조직위원회라는 곳에서 근무를 시작해서

2002년 월드컵을 무사히 끝마친 후, ㈜포르투나를 설립하게 되어

이제 그 다음 월드컵인 2006 독일월드컵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인생의 물길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그 위에 출렁이며 떠있는 작은 종이배와 같이

물길이 이끄는 곳으로 흘러 흘러 가나보다.

한국 대표팀이 6월 18일 프랑스팀과 경기를 하게될 라이프찌히 경기장.

위 사진에 나오는 통로를 통해 한국 선수들이 경기장에 입장하게 된다.

아래 사진은 선수 벤치

독일 월드컵 마스코트 <레오>

6월 23일 한국팀이 스위스팀과 16강 진출을 놓고 한판승부를 치루게 될 하노버 경기장

2006 월드컵 경승전이 열리게 되는 베를린 축구장(위)

이날은 독일 분데스리가 경기 홈팀 헤르타 베를린 vs. 바이에른 뮌헨의 경기가 열렸다.

7만3천명의 관중이 경기장을 메웠다.

한국의 첫 월드컵경기 vs. 토고 전이 열리게 되는 프랑크푸르트 경기장

괴테가 오랜세월 살다 묻힌 바이마르Weimar에 있는 괴테 박물관의 마차

괴테 (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독일의 시인·작가. 고전파의 대표자이다.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출생. 부친에게서 엄한 기풍을, 모친에게서 명랑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예술가적 성격을 이어 받았고, 부유한 상류가정에서 철저한 교육을 받아 뒷날의 천재적 대성(大成)을 이룰 바탕을 마련하였다. 그레트헨과 첫사랑을 경험하였고, 라이프치히대학 법과 재학시절(1765∼68) 미술과 문학에 심취해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겼으며, 1768년 중병에 걸려 고향에 돌아왔다. 요양중에 경건주의적 신앙이 두터운 클레텐베르크양(孃)과 알게 되었고, 한편 신비과학과 연금술(鍊金術)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건강을 회복한 뒤 슈트라스부르크로 유학, 1771년에 학위를 받았으며, 여기서 5년 선배인 J.G. 헤르더를 알게 되어 민족과 개성을 존중하는 문예관(文藝觀)의 영향을 받았는데, 후일 <슈투름 운트 드랑(Sturm und Drang)>의 바탕이 되기도 하였다. 또 이때 순진한 목사(牧師)의 딸 F. 브리온과의 사랑은 《사랑과 이별(Willkommen und Abschied)》 《5월의 노래(Mailied)》를 쓰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녀를 버린 자책감은 그 뒤 그의 시작(詩作)의 테마가 되었다. W. 셰익스피어·오시언·호메로스 등의 작품에 관심을 기울였고, 고딕건축의 위대성을 깨달았다. 1771년 변호사 자격을 얻어 귀향하여 변호사를 개업하였고, 이듬해 법무(法務) 실습을 위해 잠시 베츨라어의 제국 고등법원에 부임하었으며, 이곳에서 후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 1774)》의 모델이 된 부프를 사랑하였다.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가서 발표한 역사극 《괴츠 폰 베를리힝겐(1773)》,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에 의하여, <슈투름 운트 드랑> 시대의 중심인물로서 그 이름을 전유럽에 떨쳤고 이때부터 《파우스트(Faust)》를 쓰기 시작하였다. 1775년 셰네만과 약혼했으나 같은 해에 파혼하였고, 슈톨베르크 형제와 스위스를 여행했다. 이 무렵 카를 아우구스트의 초청을 받아 바이마르로 가서 정무(政務)를 담당하였다. 인구 10만의 소국(小國)에 지나지 않았으나 문화적 의욕이 가득찬 이곳에서 영주(領主)의 고문관이 되어 치적(治績)을 쌓아 대신(大臣)에까지 올랐다. 1779년과 1780년에 2차 스위스 여행을 하였으며, 1782년 귀족이 되었다. 해부학·지질학·광물학·식물학을 연구하는 한편, 1784년 동물에게만 있고 인간에게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던 간악골(間顎骨)을 발견하였다. 슈타인 부인과의 12년간의 긴 연애와 부인으로부터 받은 감화(感化), 1786년부터 1년 반 남짓의 이탈리아 여행을 통한 고대 및 르네상스 미술과의 접촉은 <슈투름 운트 드랑>의 어두운 정열에서 벗어나게 하였고, 명징(明澄)과 질서를 존중하는 고전주의로 전향하게 하였다. 희곡 《타우리스섬의 이피게니에(1787)》 《에그몬트(Egmont, 1788)》 《토르크바토 타소(1789)》를 썼다. 이탈리아에서 귀국 후 번거롭고 바쁜 정무에서 해방되었다. 1788년 어느 여름날, 바이마르 공원을 산보하다가 조화업자(造花業者)의 딸 불피우스를 만나 1806년 결혼하였으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아우구스트를 낳고 비로소 가정적인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 이 무렵 식물연구에 몰두하여 논문 《식물의 변태(Die Metamorphose der Pflanzen, 1790)》를 발표하였고, 1790년 제2차 이탈리아 여행을 했으며, 1791년부터 신설된 바이마르 궁정극장에서 27년간 감독으로 근무하였다. 한편, 1789년에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그 영향으로 1792년 괴테는 카를 아우구스트공(公)을 따라 프랑스로 종군했으며, 1793년 토마인츠 공위군(攻圍軍)에도 참가하였다. 이듬해 바이마르에 있었던 J.C.F. 실러와 알게 되어 이들의 우정은 1805년 실러가 작고하기까지 계속되었다. 이 10년 나짓한 기간이 독일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만약 실러의 격려가 없었던들 《파우스트》 2부와 《빌헬름 마이스터(Wilhelm Meister)》의 후편을 끝내지 못했을 정도로 이들의 우정은 깊었다. 또 실러의 격려로 많은 서정시·담시(譚詩)·풍자시 등을 썼으며, 또 서사시 《헤르만과 도로테아(Hermann und Dorothea, 1797)》를 탈고했다. 60세 때 소녀 헤르츨리프를 사랑하여 그의 소설 《친화력(1809)》에는 그녀가 오틸리에라는 이름으로 모델이 되었으며, 괴테는 그녀를 위하여 《소네트(Sonette, 1809)》를 썼다. 그는 1808년 나폴레옹 1세를 알현하였고, 20년간 광학(光學)에 관해 애써 저술한 《색채론(色彩論, zur Farbenlehre, 1801)》을 발표했다. 또, 그는 자서전 《시와 진실(1833)》을 썼다. 그는 1816년 아내 불피우스가 죽자, 쓸쓸한 세월을 보내다가 그의 독일어 통역을 통하여 페르시아의 시인 시라지를 알게 되었다. 또 빌레머를 사랑하게 되어 그녀를 사모하여 읊은 《서동(西東)시집 (Westöstlicher Diwan, 1819)》을 내었는데 이 시집 속에는 빌레머 자신의 창작시 2편도 수록되어 있다. 또, 《마리엔바더의 비가(1823)》는 마리엔바더로 피서여행을 갔다가 74세 노령으로 19세 꽃다운 처녀 레베초를 만나 열렬히 구애하였으나 거절된 연모의 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1829년에 《빌헬름 마이스터(Wilhelm Meister)》를 완성하였으며, 23세부터 쓰기 시작하여 무려 59년이나 걸린 그의 생애 최고의 대작인 비극 《파우스트(1832)》를 완성했다. 그의 종교관은 범신론적(汎神論的)이었으나 복음서의 깊은 윤리관은 중시했다. 또, 혁명에 대해선 부정적이었으나, 인류의 진보와 행복에 대해서는 정열을 바쳤다. 그는 문학에서는 낭만주의의 병적 경향을 싫어하여 고전주의로 전향했으나, 만년의 작품에는 다분히 낭만적 요소가 드러난다.

아주 매력적인 도시인 독일의 드레스덴Dresden

도자기로 유명한 독일 도시 마이센Meissen의 호텔에서 바라본 풍경

하이델베르크 대학 인근에 있는 선술집 <제플>

건물 전체의 이중 유리창 사이에 일회용 라이터, 깃털, 조개껍질, 전구 등을 넣어 설치미술작품을 창조해냈다

베를린 미술대학건물 내부

마이센 도자기

[한삼희의 환경칼럼] 벌레와 ‘밥’ 나눠먹는 사람

연초 굉장히 춥던 어느 토요일, 충북 제천 박달재 근처 산속에 혼자 산다는 최성현씨를 찾아갔다. 그의 집은 눈 쌓인 오솔길을 15분 올라가서 나왔다. 산비탈에 선 함석 지붕집이다. 헛간과 나무를 얽어 만든 정자, 이엉으로 지붕 엮은 뒷간도 있다. 생각 못했던 손님이 한 명 있었는데, 최씨 소문 듣고 찾아와 며칠 신세지고 있다는 털모자 쓴 젊은이였다.

1956년생 최씨는 대학 학부에서 축산학을 배웠고 대학원에선 노장(老莊) 사상을 전공했다. 정신문화연구원에서 2년 있다가 1988년 숲으로 들어갔다. 산중(山中) 생활 중간중간 도쿄에서 2년을 신문배달하며 일본말을 배웠고 뉴질랜드에서 가족과 함께 3년 반을 살기도 했다. 그가 바깥세상에 알려진 것은 2003년 ‘바보 이반의 산 이야기’라는 책을 내면서였다. 숲 속에서 살며 관찰한 것, 들여다본 것, 깨친 것을 담은 책이다.

헛간과 아궁이 앞엔 장작더미가 키만큼 쌓여 있었다. 그 장작을 때 방바닥은 지글지글 끓는다. 최씨가 하는 일은 새벽에 일어나 책 읽고 글 쓰고 번역하기, 산책하며 벌레나 새에게 말 붙이기, 명상하기, 그리고 자급자족의 농사일이다. 벌을 키우고 오디 진액을 만들어 팔기도 한다. 손바닥만한 논에선 한 가마쯤 쌀이 나온다. 밭에는 배추, 상추, 쑥갓, 무청, 부추, 고추, 깻잎을 심는다.

되도록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그의 농사법이다. 김매기도 하지 않고 농약이나 비료도 안 뿌린다. 밭의 주인은 풀과 벌레라는 생각에서다. 배추 밭 한 고랑은 아예 배추흰나비 애벌레 몫으로 정해놨다. 배춧잎에서 벌레가 보이는 대로 골라서 거기로 옮겨준다. 고추 밭에도 벌레들이 살 수 있는 풀밭을 따로 만들어 둔다. 풀은 벌레의 밥이자 집이 된다.

그 벌레들은 채소를 갉아먹지만 나중에 나비가 되면 나무와 풀의 가루받이를 돕는다. 만물은 다 그렇게 서로 의지하며 사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니 벌레와도 나눠 먹어야 건강한 먹을거리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산길을 걷다 밤이나 도토리 같은 것을 보면 양지 바른 곳에 묻어준다. 아무것도 아닌 그런 일에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한번은 서울 나들이길에 자기 바짓가랑이에 주름조개풀의 씨앗들이 달라붙은 것을 보았다. 이 씨앗들이 자랄 흙과 빈터가 어디 없을까 찾아봤지만 결국 못 찾았다. 그 씨앗들은 최씨 바지에 붙어 산으로 돌아갔다.

바깥세상과 연(緣)을 끊고 사는 건 아니다. 반 평 넓이쯤 돼 보이는 태양광 집광판을 설치해 전기를 만들어낸다. 그걸로 스탠드 불빛을 밝히고 컴퓨터 작업도 한다. 전화도 있다. 뉴질랜드에 사는 딸과는 이메일 대화를 한다. 며칠을 사람 그림자도 못 보는 때도 있고 어떤 날은 하루에 두 명, 세 명씩 찾아온다. 방문객은 그의 책을 읽은 독자들인 경우가 많다.

여름엔 도시 아이들을 불러 자연학교도 차린다. 작년 여름도 지역 한살림 소개로 초·중학생 6명이 와서 농사도 짓고 산도 쏘다니다 갔다. 최씨는 자기처럼 사는 사람이 곳곳에 여럿 있다고 했다. 이런 사람들끼리 모임도 가져봤다는 것이다.

산속에서 가만히 움직임을 멈추고 있으면 보통 때 눈에 들어오지 않던 작은 날벌레들이 보인다고 한다. 엎드려 보면 줄기와 풀잎 사이에도 작은 동물들의 세상이 있다. 숨을 죽여보면 나무껍질 떨어지는 소리, 잎사귀 흔들리는 소리, 들쥐 기어가는 소리, 벌레가 짝 찾으며 우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다가 가끔은 손등이나 어깨 같은 데 나비나 잠자리가 날아와 앉아줄 때가 있다. 그것들이 자신에게 그처럼 곁을 줄 때 그게 그렇게 좋고 기쁘더라는 것이다.

한삼희·논설위원       입력 : 2006.01.19

 

독일인 친구 칼스텐(폭스바겐 코리아 부사장)의 집에서 열린 파티

손님으로 온 W Hotel의 총지배인(노르웨이인)이 "바이킹 식 원샷"을 설명하고 있다

 

내가 5살 때 그린 그림 <비오는 날 엄마와 누나 그리고 나>

- 인왕산 鶴학巢소島도에서 최범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