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가 최근 휴가를 다녀온 키프러스(Cyprus, 사이프러스)의 풍경사진들이다.

나는 아직 가보지 못한 나라인데,

어릴적 독일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같은 반 친구 중에 키프러스 인이 있었다.

내 기억에 그 친구는 그리스 혈통으로,

방학 때마다 나를 고향으로 초대했는데 아쉽게도 가볼 기회가 없었다.

사진을 봐서는 과거의 치열했던 분쟁의 역사는 느껴지지 않고,

국기에 그려져 있는 올리브나무 같이 평화롭고 아름다울 것 같다.

키프러스(CYPRUS, 사이프러스)

 지중해 동부에 있는 섬나라.
 
위치  지중해 동부
면적  5,896㎢
인구  71만 4000명(2003)
인구밀도  121.09명/㎢(2003)
수도  니코시아
정체  공화제
공용어  그리스어, 터키어
통화  키프로스 파운드(£C)
환율  1£C = 1.9$(2003.9)
1인당 국민총생산  1만 2320$(2003)
 
면적 5,896㎢. 인구 71만 4000명(2003). 인구밀도 121.09명/㎢(2003). 정식명칭은 키프로스 공화국(Republic of Cyprus)이며, 그리스어(語)로는 Kypriaki Dimokratia, 터키어(語)로는 Kibris Cumhuriyeti라고 한다. 수도는 니코시아이며 그리스어와 터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터키 남쪽 약 65km, 시리아 서쪽 약 100km의 해상에 위치하며, 그리스계 주민과 터키계 주민이 혼주하여 그치지 않는 민족분쟁의 씨를 안고 있는 나라이다.

출처:  http://www.shoestring.co.krhttp://cafe.naver.com/moneymania.cafe  등

키프러스(CYPRUS, 사이프러스)의 국기

하양 바탕에 이 나라의 지도와 올리브나무잎을 배합하였다. 지도의 금색은 국가명(키프로스를 사이프러스라고도 한다)이 유래한 구리의 풍부한 생산을 상징하며, 올리브나무잎은 분쟁이 끊이지 않는 그리스, 터키 간의 평화와 화해에 대한 희망을 나타낸다. 국내에서는 국민의 선택에 따라 그리스나 터키 국기와 함께 게양하는 것이 인정된다. 가로세로 비율은 3:5이다. 당시 부통령의 제안으로 학교 교사에 의해 만들어진 후 1960년 8월 16일 대통령인 마카리오스 3세가 선정하여 제정하였다.

키프러스(CYPRUS, 사이프러스)의 역사

유럽의 제국들, 아프리카와 중동사이에서 항상 중요한 무역의 거점이어왔던 키프러스는 전 역사를 걸쳐 항상 서로 차지하려고 해왔던 곳이다. 맨처음 미케네인(Mycenaean)들이 이곳을 차지했고 그후 페니키아인(Phoenician), 이집트인, 앗시리아인(Assyrian)과 페르시아인들이 차지했다. 알렉산더대왕이 이들을 몰아냈으며,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왕(Ptolemy)은 알렉산더대왕에게서 이곳을 빼앗았다. BC 58년에 로마가 이곳을 차지했으며, 비잔틴제국과 이슬람제국이 이곳을 놓고 3세기에 걸친 다툼을 시작했던 7세기까지 비교적 평화와 안녕을 유지했다. 1191년 영국의 사자왕(Richard the Lionheart; 영국의 Richard I 의 별명)은 십자군원정길에 사이프러스에 들러 시시한 정복을 했지만, 사이프러스인들이 그를 너무 많이 괴롭혔고(키프러스인 하나가 사자왕의 매를 죽였고, 그 앙갚음으로 사자왕은 몇몇 마을에 대해 대량학살을 하게 되었다), 결국 템플 기사단원(Knights Templar; 1118년 성지순례자 보호를 위해 십자군속에 결성된 단체)들에게 키프러스인들을 팔았다. 템플 기사단원들은 이 섬을 가이 드 루시그난(Guy de Lusignan)에게 팔았고, 그는 문화를 억압했지만 경제에 대해선 놀라운 성과를 이루었다. 그의 자손들이 3세기동안 이곳에 머물렀다.

베니스인들이 1489년 이곳을 차지했지만, 팽창하고 있던 오토만제국(Ottoman Empire; 구 터키제국)에 의해 바로 쫓겨났고, 오토만제국은 영국에 건네주기까지 300여년동안을 차지했었다. 1925년 키프러스는 영국의 직할식민지가 되었지만, 그때 키프러스인들은 대체로 제국 건설자들의 도구로 쓰이는데 불과했었으며, 이때 민족자결을 위한 격동이 시작되었다. 이 격동이 오늘날 그리스와 터키간 분쟁의 근거가 되었다: 많은 그리스계 사이프러스인들이 그리스와의 단일체를 형성하고 싶어했지만(이 움직임은 에노시스(enosis)로 알려져 있다), 18%를 차지하는 터키인은 이에 그리 열망하지 않았다. 1950년까지 키프러스 정교회와 그리스계 키프러스인의 96%가 에노시스를 원했다. 이에 영국은 새로운 헌법의 초안을 작성했고 터키인은 이 초안을 받아들였지만, 에노시스만을 요구하는 사이프러스 자유투사단체(National Organisation of Cypriot Freedom Fighters)는 이를 거부했으며, 영국에 대한 게릴라전을 시작했다.

1960년 8월에 영국은 키프러스에 독립을 인정했다. 그리스인인 마카리오스(Makarios)가 대통령이 되었고, 터키인 쿠쿡크(K k k)는 부통령이 되었다. 1964년까지 마카리오스는 그리스와 더욱 곤고한 유대관계쪽으로 움직였고, 자치단체 상호간의 폭력이 상승했다. 국제연합(UN)은 평화유지군을 파병했고, 1967년 군사위원회는 그리스정부를 접수했으며, 대부분의 열렬한 그리스추종자들이 이러한 억압적인 체제와의 단일체를 원하지 않았지만 에노시스는 끝났다. 그럼에도 그리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1974년 7월 15일 그들은 마카리오스를 타도하고 그 대신에 꼭두각시 지도자로 대체했으며, 이에 터키는 침공으로 응했고 그리스는 재빨리 철수했다. 그러나 터키인들은 달라지지 않았고, 이 섬의 북부 3분의 1을 차지함으로 180,000 그리스계 키프러스인들을 그들의 집에서 내쫓게 했다. 평화회담이 때때로 열려왔지만 키프러스는 아직 나뉜 상태이다. UN은 키프러스에서의 주둔을 일정비율로 줄여왔고, 소규모의 전투가 국경에서 증가하고 있다. 1996년 8월에는 1974년 이래로 최악의 폭력이 난무하던중 그리스계 사이프러스인들과 터키인들이 충돌했다. 남부는 프랑스, 러시아와 체코공화국으로 무장되어 있고, 반면 북부는 터키의 지원아래 군대를 강화하고 있다. 남부는 1998년중에 러시아제 미사일을 배치하려 하고, 이는 파포스(Paphos)에 새로 개장된 공군기지와 함께 양쪽의 관계를 더욱 삐뚤어지게 한다.
EU는 터키에 키프로스 공화국을 정식 인정하라고 요구해왔다. 현재 남 키공화국만이 2004년 5월에 EU에 단독 가입하였고 국제적 대표성을 인정받고 있고 북 키프러스 터키 공화국은 터키에 의해서만 인정받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터키가 EU에 단독 가입한 그리스계 남 키프러스를 승인하게 되면 이는 터키의 키프러스 침공이 정당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되므로 터키로서는 남 키프러스를 승인하기가 어려운 상황이고 승인을 거부하여 왔고 이것이 터키의 EU가입의 큰 장애물중 하나였다. 

키프러스(CYPRUS, 사이프러스)의종교

키프러스 전체 인구의 약 77%를 차지하고 있는 그리스계 주민의 대부분이 그리스 정교의 신자이며 인구의 약 18%인 터키계 주민의 거의 전부가 수니파 회교도이다. 이외에 소수이긴 하나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를 믿는 사람도 있다.

키프러스의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종교도 그린라인을 따라 나뉘어져 있다. 북부인들은 대부분 수니파회교도(Sunni Muslim)이며 남부는 그리스정교회이다.

‘세계 2위 부자’ 는 어떻게 사나 했더니…
 

[중앙일보 최지영] 버핏의 오마하 자택. [AP=연합뉴스]


세계 둘째 부자인 워런 버핏(77·사진) 집에 강도가 들었다고 AP와 로이터 통신 등 외신들이 보도했다. 그러나 미수에 그친 강도 사건보다 이를 계기로 버핏의 검소한 생활이 다시 한번 주목을 받고 있다.

5일 밤(현지시간) 미국 네브래스카주의 오마하에 있는 버핏의 저택에 20대 백인 청년 한 명이 가짜 총을 들고 침입했다.

강도는 오후 10시쯤 집 안에 사람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초인종을 먼저 눌렀고,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버핏의 부인인 애스트리드가 집 밖에 대기 중이던 경호원을 불렀다. 이 사이 집안에 침입한 강도는 경호원과 정문 앞 베란다에서 마주쳤고 애스트리드는 경찰에 신고했다.

경호원이 붙잡으려고 하자 강도는 가짜 총을 꺼내 들고 저항했다. 몸싸움 끝에 경호원에게 총을 뺏기자 경호원의 머리를 둔기로 내리치고 달아났다. 경찰은 강도가 이미 달아난 오후 10시15분쯤 현장에 출동했다. 경찰은 평범한 외모의 범인을 추적 중이다.

강도가 침입했을 때 버핏도 집에 있었다고 언론들은 전했다. 하지만 경호원만이 머리에 약간의 상처를 입었을 뿐 버핏과 부인은 무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버핏은 강도사건이 발생한 뒤 CNBC와의 통화에서 “나는 괜찮다”며 “오랫동안 안심하고 살던 집이니 만큼 앞으로도 별 걱정 없이 살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사는 집은 1958년에 약 3만2000달러(3000여만원)를 주고 구입한 540여㎡ 규모다. 현재 시가도 71만 달러(약 6억6000만원)에 그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담장도 대문도 없는 평범한 주택이다.

CNBC는 “세계 2위의 부자답지 않게 집이 워낙 검소해 강도도 버핏의 집인지 몰랐을 것”이라고 이웃들이 증언했다고 전했다.

최지영 기자

왜 멍멍이들 사진이 내 홈피에 자주 등장하지 않냐는 어머니의 항의(?)에 힘입어

오랜만에 우리 구구, 학순이, 서울이 사진을 찍었다.

무더웠던 여름을 무사히 보내고

(우리 인간이 한여름에 밍크코트를 걸치고 있다고 한번 상상해보라)

이제 이녀석들도 가을바람을 맞으며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U-17 FIFA WORLD CUP 참관차 방한한 일본 덴츠사의 하마구찌(Hamaguchi)상(오른쪽부터),

일본 축구협회 부회장이자 FIFA 집행위원인 오구라(Junji Ogura)상,

오구라상의 비서 가와세(Mary Kawase)상.

지난번 만났을 때 어머니가 일본 과자를 좋아하신다고 했더니,

이번 서울 출장길에 일본의 유명한 과자를 선물로 갔다주셨다.

에도꼬(동경인)인 하마상은 항상 나를 친동생같이 대해주시는 고마운 분이다.

화창한 일요일 오후, 을지로에서 일본 손님들과 식사를 한 후

오랜만에 여유로움을 만끽하며 서울 천계천 주변을 산책했다.

서울 시내에 관광용 마차(위 사진)가 다닌다는 건 처음 알았다.^^

한 지인의 초대로 오랜만에 금호아트홀에서 바이올린 독주회를 감상했다.

대학교 1, 2학년 때 가끔 주말에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David Symphony Hall에서

usher(공연장 안내인)로 자원봉사할 때가 있었다.

"어셔"로 자원하려면 늦어도 음악회 시작 3시간 전에 가서 등록을 하고,

특정 출입구를 배정받으면 공연 시작 때까지 관객의 좌석 안내역할을 맡는다.

그리고 음악회의 시작과 동시에 빈자리를 찾아 앉아서 무료로 공연을 보는 것으로

일한 시간을 보상받는다. 비싼 좌석에 앉게 되면 그만큼 기분도 당근 더 좋고.^^

금년 봄부터 화분에 씨앗을 파종 또는 가지를 삽목해서 키운 식물 식구가

여름을 지나면서 이렇게 풍성해졌다.

이제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시작되면 노지에서 월동이 안되는 녀석들은 

집안으로 들여놓아야하는데,

식물 매니아들이 왜 온실을 갖고 싶어하는지 이해가 간다.

- 인왕산 鶴학巢소島도에서 최범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