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내 자신에 대한 반성을 많이 해본다. 진지하게.

내 삶이 비교적 풍요롭다 생각했는데,

그래서 나름대로 삶의 여유를 추구해왔는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아무것도 없이 느껴진다.

마치 낙엽을 다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는 겨울 한가운데의 나무같이,

내 자신이 그렇게 홀로 외롭게 서 있었다.

그리고 ‘냉소주의’란 단어를 떠올린다.

자신감과 거만함, 현실과의 일정 거리두기와 약간의 우월감.

냉소주의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하나하나 되씹어보다,

희미한 그림자 속에서 또 다른 단어를 발견한다.

‘자유’

자유는 필연적으로 외롭다는 진리를 일찍이 깨달았다고 자부해왔는데,

그것을 지키고 방어하기 위해선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내 자신이 너무 지쳐버린 걸까?

문득 자유로부터의 도피도,

자유를 위한 더 많은 희생도 힘겹게만 느껴진다.

내 안의 냉소주의를 쉽게 지울 수도 없고,

자유 또한 내 의지대로 쉽게 포기할 수 없다.

그건 나의 선택이 아닌 것 같다.

나의 유일한 선택은,

새로운 봄을 기다리는 것.

자연의 섭리가 겨울을 떠나보내고, 봄을 가져다 줄 때를 기다릴 수밖에.

겨울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새 봄 맞을 준비를 부지런히 해야 할 시기다.

다시 땅을 갈고 봄에 뿌릴 씨앗을 준비해야겠다.

 

몇 년 전 읽었던 책인데,

최근 책꽂이에서 꺼내 밑줄친 부분만 다시 읽었다.

미지의 세계로의 여행, 그리고 자기 내면으로의 여행에 관한 책이다.

삶의 느림과 본질에 대한 내용이기도 하다.

아래 일부를 발췌해보았다.

 

[걷기예찬]

바디드 르 브르통 산문집 / 김화영 옮김

David Le Breton  “Eloge de la marche”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발로 걸어가는 인간은 모든 감각기관의 모공을 활짝 열어주는 능동적 형식의 명상으로 빠져든다. 그 명상에서 돌아올 때면 가끔 사람이 달라져서 당장의 삶을 지배하는 다급한 일에 매달리기보다는 시간을 그윽하게 즐기는 경향을 보인다. 걷는다는 것을 잠시 동안 혹은 오랫동안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숲이나 길, 혹은 오솔길에 몸을 맡기고 걷는다고 해서 무질서한 세상이 지워주는 늘어만 가는 의무들을 면제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 덕분에 숨을 가다듬고 전신의 감각들을 예리하게 갈고 호기심을 새로이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걷는다는 것은 대개 자신을 한곳에 집중하기 위하여 되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9)

걷는 동안 여행자는 자신에 대하여, 자신과 자연과의 관계에 대하여, 혹은 자신과 타인들의 관계에 대하여 질문하게 되고 뜻하지 않은 수많은 질문들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보게 된다. 바쁜 사람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한가로이 걷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여겨질지도 모른다. 시간과 장소의 향유인 보행은 현대성으로부터의 도피요 비웃음이다. 걷기는 미친 듯한 리듬을 타고 돌아가는 우리들의 삶 속에서 질러가는 지름길이요 거리를 유지하기에 알맞은 방식이다. (14, 15)

스티븐슨이 생각하기에 ‘전정한 걷기 애호가는 구경거리를 찾아서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기분을 찾아서 여행한다’ (21)

루소에게 있어서 걷기는 고독한 것이며 자유의 경험, 관찰과 몽상의 무궁무진한 원천, 뜻하지 않는 만남과 예기치 않은 놀라움이 가득한 길을 행복하게 즐기는 행위다. 젊은 시절의 토리노 여행을 추억하면서 로소는 걷기의 향수와 행복을 말한다. ‘나는 내 일생 동안 그 여행에 바친 칠필 일 간만큼 일체의 걱정과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틈을 가져본 기억이 없다…… 그 추억은 그 여행과 관련된 모든 것, 특히 산들과 도보여행에 대한 가장 생생한 맛을 내게 남겨놓았다. 나는 오직 행복한 날에만 늘 감미로운 기쁨을 만끽하며 걸어서 여행했다. 머지 않아 온갖 책무들, 볼일, 들고 가야 할 짐보따리 때문에 나는 하는 수 없이 점잔을 빼면서 자동차를 타야 했다. 전과 달리 그때부터 내가 여행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가는 기쁨과 도착하는 기쁨뿐이었다.

스위스의 소로투른에서 파리로 가면서 청년 루소는 중요한 것이라곤 오직 존재하는 것뿐인 이 완벽한 순간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 이 여행에는 보름이 걸렸는데 나는 이때를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로 꼽을 수 있다. 나는 젊었고 건강했으며 돈도 충분히 있었고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나는 여행을 하는 것이었다. 도보로, 그것도 혼자서 여행하는 것이었다……여러 가지 감미로운 공상들이 나의 동행이 되어주고 있었다. 내 뜨거운 상상력이 내게 이처럼 멋진 공상들을 안겨준 적은 한번도 없었다……나는 한 번도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으며 이렇게 뿌듯하게 존재하고 살아본 적이 없었다.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때 혼자 걸어가면서 했던 생각들과 존재들 속에서만큼 나 자신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23, 24)

걷기는 집의 반대다. 걷기는 어떤 거처를 향유하는 것의 반대다. 우연히 내딛는 걸음걸음이 인간을 과객으로, 길 저 너머의 나그네로 변모시키기 때문이다. 그를 걷잡을 수 없는 인간으로, 집도 절도 없는 인간으로, 구두밑창이 닳도록 어느새 저만큼 떠나버린 인간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바로 그가 저녁마다 잠자는 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여기 혹은 저기에 존재한다는 것은 실처럼 뻗어간 길, 고저장단으로 변화하는 곡선의 한 과정에 불과하다. 사실 걷는 사람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 속에다가 거처를 정한다. 저녁에 멈추는 발걸음, 밤의 휴식, 그리고 식사는 매일같이 새롭게 달라지는 거처를 체험적 시간 속에 새겨놓는다. 걷는 사람은 시간을 제 것으로 장악하므로 시간에게 사로잡히지 않는다. 숱한 여러 가지 다른 수단들을 다 버리고 바로 이런 이동수단을 택함으로써 그는 달력의 시간과 맞서서 자신의 양보할 수 없는 권능을, 사회적 리듬에 맞서서 자신의 독립성을 앞세운다. 그리하여 길가에서 등에 진 배낭을 벗어놓고 달콤한 낮잠을 즐기거나 돌연 마음을 흔들어놓는 한 그루 나무나 어떤 풍경을 음미하거나 또는 운 좋게 목격하게 된 어떤 지역의 풍습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선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33)

걸어서 여행하는 사람은 누구에게 무엇을 보고해야 할 의무 같은 것은 없는 자유인이다. 그야말로 기회와 가능성의 인간이요, 흘러가는 시간의 예술, 길을 따라가며 수많은 발견을 축적하는 변화무쌍한 상황의 나그네다. (35)

스티븐슨은 대번에 보행자에게 왜 고독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이론을 내놓는다. ‘도보로 산책하는 맛을 제대로 즐기려면 혼자여야 한다. 단체로, 심지어 둘이서 하는 산책은 이름뿐인 산책이 되고 만다. 그것은 산책이 아니라 오히려 피크닉에 속하는 것이다. 도보로 하는 산책은 반드시 혼자 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유가 그 내재적 속성이기 때문이고 마음내키는 대로 발걸음을 멈추거나 계속하여 가거나 이쪽으로 가거나 저쪽으로 가거나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걷기 챔피언 옆에서 뛰다시피 따라 걷거나 데이트하는 처녀와 함께 느릿느릿 걷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의 보조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50)

빅토르 세갈렌…..’남다르고 각별한 경험을 하는 데는 자기만의 견고한 정체성이 필요불가결한 조건이다. 이러한 규칙에 수반되는 약간 의외의 귀결은 바로 혼자서 여행하는 편이 낫다는 사실이다. 둘이서 여행하게 되면 벌써 동일한 경험을 나누어 가지기 위하여 자신이 어느 한 몫을 포기하게 되며 그리하여 목표에 다가갈 위험이 있는 것이다. 이때 목표란 바로 세상에서 제일 친한 두 친구의 여행에서 얻는 결론, 즉 여행은 혼자서 하라는 교훈 바로 그것이다.’ (50, 51)

소로는 처음부터 생각이 뚜렷하다. 그는 이렇게 쓴다. ‘확신하거니와, 내가 만약 산책의 동반자를 찾는다면 나는 자연과 하나가 되어 교감하는 어떤 내밀함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그 결과 나의 산책은 분명 더 진부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사람들과 어울리고자 하는 취미는 자연을 멀리함을 뜻한다. 그렇게 되면 산책함으로써 얻게 되는 저 심오하고 신비한 그 무엇과는 작별인 것이다.’ (51)

해즐리트(William Hazlitt)…..’방 안에 있을 때는 다도 남과 어울려 지는 것을 즐긴다. 그러나 일단 밖에 나서면 자연만으로 충분하다. 내가 혼자일 적만큼 덜 외로울 때는 없는 것이다. 나는 걸으면서 동시에 말을 하는 것이 지성의 증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들판에 나가면 들처럼 식물이 되어 지내고 싶다. (51)

아름다움은 민주적인 것이어서 만인에게 주어진다. 지극히 아름다운 곳들은 수없이 많다. 심지어 같은 날, 같은 산책에서 경이로운 일이 몇 번씩이나 되풀이하여 나타나서 어떤 배경, 분위기, 풍경, 소리, 얼굴을 남긴다. 보행은 세계의 희열을 향한 자기개방이다. 그것이 내면적인 휴지와 평정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변환경과 몸으로 만나는 일이므로 우리는 여러 장소의 감각적 조건에 끊임없이, 거리낌없이 자신을 맡기게 된다. (115)

세상에 대한 지식을 무한히 넓히기 위해서도 길이 필요하다. 아스팔트에는 역사도 없고 이야기도 없다. 심지어 그 위에서 사고가 일어났다 해도 자동차들은 그곳에 아무런 기억의 자취도 남기지 않고 지나가버린다. 자동차는 장소와 역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풍경을 칼처럼 자르고 지나간다. 자동차 운전자는 망각의 인간이다. 풍경이 차의 앞 유리창 너머 멀리서 휙휙 지나갈 뿐이므로 길에 대한 감각적 마취 혹은 최면상태에 빠져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다만 엄청나게 커진 눈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경우 그는 길을 가다가 멈출 여유가 없다. 그는 바쁜 사람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걷는 사람은 전신의 감각을 열어놓고 몸을 맡긴 채 더듬어가는 행로와 살아 있는 관계를 맺는 가운데 매순간 발밑에 밟히는 땅을 느낀다. 그는 자신이 거쳐 가는 길 위의 숱한 사건들을 골고루 기억한다. 물론 길가의 산세가 아름답다고 해서 너무나 열중해서 감상하다 보면 다른 보행자와 충돌할 위험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121, 122)

다른 곳으로부터 와서 그저 비껴지나가는 것뿐이라는 사실 때문에 사람들의 굳게 닫혔던 입이 열리고 즉각적인 접촉이 더 쉬워지는 경우도 없지 않다.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어서 기껏해야 몇 시간 뒤면 저마다 멀리 떠나 있으리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만남이 더욱 용이해지는 것이다. (135)

글쓰기는 길을 가는 동안 수집한 수많은 사건들의 기억, 숱한 감동들, 그리고 느낀 인상들이다. 그것은 여행자가 시간의 한계로부터 벗어나 그 시간을 공책의 페이지들로 탈바꿈시켜가지고 나중에 향수에 젖으며 그 시간으로 되돌아가보는 방식, 텍스트 여기저기에 점철된 수천 수만 가지의 표적들 덕분으로 그 시간을 추체험하는 한 방식이다. 기억이란 그것대로 한계를 가진 것이기에 우리는 걷는 동안 경험한 것들 중에서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 것들의 전체는 우리들 앞에 보잘것없는 몇 토막이 남았을 뿐인 기록의 합에 비긴다면 어지러울 정도로 그 수가 많은 것이다. 길을 가면서 일기를 쓰게 되면 그때의 우여곡절들을 규칙적으로 기록하고 또 더듬어온 길들을 회상해보거나 과거의 에피소드들을 상기해보기 위한 독서에 바쳤던 노력 덕분에 그 도보여행은 그만큼 더 생생하게 기억 속에 남는다. 물론 세월이 흐르면서 상상이 실제 경험과 뒤섞이고 간결하게 기록한 몇몇 문장들에서는 실제로 표현된 것 이상의 암시가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글 속에는 여행으로부터 축적된 수많은 이미지가 저장되어 있는 것이다. (140, 141)

카잔차키스……’나는 노랗게 바랜 여행수첩을 뒤적여본다. 그러니까 어느 것 하나 죽어 없어진 것은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이 내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이제 이렇게 그 모든 것이 깨어나서 반쯤 지워진 해묵은 페이지들로부터 솟아올라 다시 수도원이 되고 수도사가 되고 그림들과 바다가 되다니! 그리하여 나의 친구도 그때의 아름답던 모습 그대로, 꽃다운 청춘의 모습 그대로, 독수리 같은 푸른 눈으로 시가 가득한 가슴으로 빛나는 미소를 지으며 땅속에서 다시 솟아오른다. (142)

도시인은 침묵이 지배하는 공간에서는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 그는 침묵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얼른 큰 소리로 말을 하거나 자동차의 라디오나 시디 음악을 켜서 안도감을 주는 소리를 추가하고 누구에게건 휴대전화를 걸어서 자기의 존재를 확인받고자 한다. 소음에 길이 든 사람들에게 고요한 침묵의 세계는 결국 표적이 사라진 불안의 세계가 되고 만다. 갑자기 떠들썩한 소리가 딱 그쳐버리면 기분이 으스스해지기 쉽다. (213)

긷기는 사람의 마음을 가난하고 단순하게 하고 불필요한 군더더기들을 털어낸다. 걷기는 세계를 사물들의 충일함 속에서 생각하도록 인도해주고 인간에게 그가 처한 조건의 비참과 동시에 아름다움을 상기시킨다. 오늘날 걷는 사람은 개인적 영성의 순례자이며 그는 걷기를 통해서 경건함과 겸허함, 인내를 배운다. 길을 걷는 것은 장소의 정령에게, 자신의 주위에 펼쳐진 세계의 무한함에 바치는 끝없는 기도의 한 형식이다. (237)

길을 걷는 것은 때로는 잊었던 기억을 다시 찾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리저리 걷다보면 자신에 대하여 깊이 생각할 여유가 생기게 되기 때문만이 아니라 걷는 것에 의해서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 트이고 추억들이 해방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걷는 것은 죽음, 향수, 슬픔과 그리 멀지 않다. 한 그루 나무, 집 한 채, 어떤 강이나 개울, 때로는 오솔길 모퉁이에서 마주친 어느 늙어버린 얼굴로 인하여 걸음은 잠들어 있던 시간을 깨워일으킨다. (255)

우리가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행이 우리를 만들고 해체한다. 여행이 우리를 창조한다. (261)

나의 초등학교 시절을 지탱해주던 책은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와 '좁은문'이었다면

10대 시절 나의 감성을 유하면서도 단단하게해주었책은 단연 헤르만 헤세의 책이었다.

내가 헤르만헤세의 책을 처음 접한것은 한창 감성이 예민 16살 겨울이었다.

친척집에 가는길 지하철 타러가는 지하 상가한켠 바닥에 노점에서 아주싸게파는 책들이 있었더랬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무너저가는 이름모를 출판사들의 책들이었던것같다.

싼건 1,500원 비싼건 3,000원

빠른 걸음으로 걷다 나의 눈길을 끈 책표지가 하나있었다.

'데미안'

일단 제목이 짧고 남자이름이라 좋았고 표지 그림이 왠지 나를 유혹하는듯했다.

5초도 안되어 나는 3,000원을 지불고 책을 옆구리에 바로 끼워 빠른 발걸음을 제촉했다.

그리고 몇일이 지났을까....

조금은 지루한 겨울방학이라 느낄때쯤 나는 '데미안'을 읽기 시작했고

한장 두장 읽을수록 나는 몰입했고 싱클레어가 되어만갔다

중학교1학년때인가 읽었던 나비를 읽었을때의 아련함이 되살아났다.

중간쯤 읽었을때 그때 읽은 나비의 작가와 같다는걸 알게되었고 나는 또하나의 보물을 확인한듯했다.

  데미안이란 책에서는 '자살'을 하지말아야할것이라고 했으며 '천직'을 갖는것을 아주 중요하게 이야기해주었고 나는 스폰지처럼 그 문장들을 흡수했고 바이블처럼 여겼다.

'아브락삭스'라는 선과악이 동시에하는 신의 이야기가나온다.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삭스"

이 문장을 읽은 나는

'...지금 나도 내 안에 악한 마음과 선한 마음이 싸우고 있다 내가 어른이 되기위서는

나의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싸워서 내 자신을 이겨내야만 어른이 될수있다.(질풍노도의 시기가 바로 알에서 깨어나기 직전의 나라고생각했었다.)'고 생각했었다.

이렇게 나는 헤세만세헤를 좋아하고 존경하는 것을 넘어 그당시는 거의 숭배했었다.


[헤르만헤세가 쓰던 손목시계, 안경, 타자기]


책에 내 나름의 주석과 해석을 달아놓을정도였다.

헤르만헤세와 나의 공통점을 찾아보기도했었다.

둘다 사람이란거 말고 공통점이 떠오르는게 없었다

구지 의미를 따지자면 나이차이가 딱 100살이 난다는것이었다.

20대 이후부터는 이런저런 일을 겪고 하면서 살다보니 잊고 살았는데

몇주전부터 헤르만헤세 130주년 기념해서 '화가의 눈을 가진 시인 헤르만 헤세전'을 전시한다는것을 알게되었다.

다시금 10대의 감성이 피어오르는듯했지만 일상의 일이 있기때문에 전시회갈 시간이 없을거라 생각했는데 자연스레 시간을 낼 수 있게되었다.

전시회에 들어가는 발걸음은 정말 설레이고 떨렸으며 검은 커튼을 열고 들어서서 온통 헤르만헤세의 사진과 자료 그림들로 둘러싸지 전시관이 들어왔을땐 울컥 눈물이 핑돌았다.

아.... 잊고살았구나!

무엇을 잊고살았는지 한마디로 말할 수 없지만

그건 나 자신인듯했다.

이번 전시회에서 인쇄된 글만 보다가 여기서 헤르만헤세가 그린 소박한 그림들과 필체들의 원본, 그리고 출판 서적의 원본또한 볼 수 있어서 흡족하고 보람되었다.

또한 그의 다른 면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한 여인에게 직접 만들어준 예쁜 삽화가 그려진 단 한권뿐이라는 동화책이 전세계에세 7권이 발견됐으며, 또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는것이었다.

화가로서의 헤르만헤세와 평화주의 자로서 활동했던 헤르만헤세를 만날 수도 있었다.
노벨상을 줄때 노벨문화상과, 노벨평화상을 갖이주려했으나 노벨상은 한사람에게 두가지를 주지않는다는룰이 있어 직업이 작가이기때문에 노벨문화상을주었다는것도 알게되었다.


[헤르만 헤세 첫 발간한 처녀작 시집 '낭만의 노래]


[헤르만 헤세 첫 시집' 낭만의 노래' 단장하여 다시 출간한 시집]



[데미안]초판 (헤르만헤세를 숨기고 S싱클레어로 출판됨)




[데미안] 헤르만헤세로 재출판됨




[피카소가 직접그려준 싯다르타 표지 그림]
 
 

[헤르만헤세가 직접 그린 그림과 글]




[황야의 이리 책 원본과 영화한 자료]

 


[헤르만헤세의 옆서 글]

 



[헤르만헤세가 직접 타이프한 편지 / 주치의 뮌첼에게 보내는 글]
 
 


[헤르만헤세가 직접 타이프한 편지 해석/ 주치의 뮌첼에게 보내는 글 해석]


[헤르만헤세 육성이 담긴 테잎]

헤르만헤세 소설책 : 데미안, 수레바퀴 밑에서, 유리알 유희, 싯다르타,
지와사랑(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피터 카멘찐트, 황야의 이리, 인생의 노래,
나비, 크눌루프 등이 있다.

[출처: http://blog.naver.com/ys0317/140038323295]

2008학년도 서울대 입학식이 3일 오전 11시 서울 신림동 서울대 종합체육관에서 열렸다. 중앙일보 이어령 고문이 신입생 3403명에게 축사를 했다. 서울대 신입생은 물론 우리 시대 젊은이들이 경청할 만한 대목이 많다. 이 고문은 ‘대학 2.0시대의 창조적 지성’을 당부했다. 이날 축사를 옮겨 싣는다.

떴다 떴다 비행기♬
물에 뜬 부평초처럼 자율보다는 타율에 의해
대학의 좁은 문 통과한 당신 분명 “떴습니다”

대학생이 된 여러분을 축하하는 이 자리에서 나는 ‘떴다 떴다 비행기’의 평범한 그 동요를 다시 한번 들려주고 싶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이카루스 같은 신화가 없습니다. 우리 역사책에는 하늘을 날려고 하다가 떨어져 죽었다는 옛사람의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서양에는 비행 실험을 하다가 탑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9세기 안달루시아에는 무어인 필나스, 11세기 영국에는 수도사 올리버, 그리고 15세기 이탈리아에는 조반니 바티스라는 사람이 있었지요.

그런 미치광이조차 없는 땅에 태어난 우리에게도 하늘을 나는 꿈은 있었습니다. “떴다 떴다 비행기 날아라 날아라 높이 높이 날아라 우리 비행기”가 그것입니다. 누가 비웃든 그 동요에는 분명 하늘을 날고 싶어 하는 우리 어린아이들의 진솔한 꿈이 담겨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단순한 가사인데도 ‘뜨는 것과 나는 것’, ‘나는 것과 높이 나는 것’ 의 그 차이와 비전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비행기를 향해 “날아라”라고 소리치는 것을 보면 이 비행기는 뜨기만 하고 아직 날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비행기의 동요는 뜻밖에도 뜨기만 하고 날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그냥 비행기가 아니라 ‘우리 비행기’입니다. 그래서 “높이 날아라”라는 말이 나 자신을 향한, 나라 전체를 향한 말로 들리기도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비행기라는 말 대신 내 이름이나 혹은 친구의 이름을 넣어 불러 보십시오. 인생의 추임새가 될 것입니다. ‘우리 비행기’를 ‘우리 학교’ ‘우리나라’로 바꾸어 보십시오. 마치 교가나 애국가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래서 ‘떴다’에서는 박수 소리를, ‘날아라’에서는 응원의 소리를, 그리고 ‘높이 높이’에서는 애틋한 기도를 들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라는 다감한 말에서 조금은 콧날이 시큰해지기도 할 것입니다.

2008학년도 서울대 입학식이 3일 오전 11시 서울대 종합체육관에서 열렸다. 본사 이어령 고문이 신입생에게 축사를 했다. 입학식 직전 서울대 주요 관계자가 행사장에 입장하고 있다. 맨 앞줄 셋째가 이 고문이다. 이 고문은 대학 2.0시대에 걸맞은 자율과 창조를 강조했다. 지식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융합되는 새 시대의 지형도를 펼쳐놓았다. [서울대 제공]

◇떠있는 것과 나는 것=대학에 합격한 순간 여러분도 떴습니다. 입시공부의 오랜 굴레에서 벗어나 공중에 떠있는 기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뜬다’라는 말을 잘 씁니다. 인기가 뜨고 명성이 뜨고 나라 전체가 인터넷에 뜹니다. 심지어는 나를 띄워 달라고도 하고 남을 띄워 준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뜬다는 말처럼 위험하고 무서운 것도 없습니다. 연예인이나 정치인, 기업인과 그 수많은 유행상품들이 하루아침에 떴다가 사라집니다. IMF의 외환위기 때 우리는 한강의 기적으로 떴던 대한민국 전체가 허망하게 추락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확실히 ‘뜨는 것’과 ‘나는 것’은 다릅니다. 공기든 물 위든 떠있는 것은 외부로부터 오는 타율의 힘에 의해 움직입니다. 구름이나 풍선은 자기 뜻 없이 떠다니다가 사라지고 물에 뜬 거품과 부평초는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흐르다가 껴져 버립니다.

하지만 독수리의 날개는 폭풍이 불어도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고, 잉어의 강한 지느러미는 급류의 물살과 폭포수를 거슬러 용문에 오릅니다. 죽은 고기만이 물 위에 떠서 아래로 내려가는 법이지요. 동물학자들은 이상하게도 생물의 본능에는 유체(流體)에 거슬러 올라가려는 습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아이들은 뛰어서 맞바람을 일으키면 바람 없이도 바람개비가 돌아간다는 원리를 압니다. 순응이 아니라 역풍이 만들어내는 이 양력(揚力)이야말로 우리를 날게 하는 창조적 지성, 그 방향을 결정짓는 이성의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날아라 날아라♪
한 방향 좁은 골목에선 선두만이‘Best One’이지만
360도 열린 공중에서는 ‘Only’라는 독창성이 승리자

◇대학의 다양성·개방성·자율성=오늘이 지나면 “떴다 떴다”의 축하는 “날아라! 날아라!”의 응원가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대학의 ‘좁은 문’이 하늘의 무지개로 열리는 순간입니다. 모노크롬의 수험공부와는 다른 빨-주-노-초-파-남-보의 다양한 경주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같은 방향으로 달려야 하는 좁은 골목에서는 오직 선두에 선 한 사람만이 승리자가 되지만 360도로 열린 공중에서는 모두가 원하는 방향대로 날 수가 있어 누구나 승리자일 수 있습니다. ‘베스트 원’이 아니라 ‘온리 원’의 독창성이 요구되는 경주입니다.

그렇지요. 대학생은 한 마리가 놀라서 뛰면 다른 것들도 덩달아 뛰다가 무리 전체가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스프링복들과는 다릅니다. 학교는 더 이상 미셸 푸코가 말하는 감옥 같은 거대한 국가의 감금장치(監禁裝置)가 아닌 것입니다. 다양성과 개방성, 그리고 자율성의 기류를 타야만 여러분은 자유롭게 날 수가 있습니다.

◇광산의 카나리아=대학을 ‘광산의 카나리아’라고도 합니다. 공기에 민감한 카나리아는 갱내가 오염되면 먼저 죽기 때문에 광부들은 그 경보를 통해서 위험을 감지합니다. 그런 점에서 대학은 칸트가 ‘영구평화론’에서 언급한 국가의 도덕적 발전의 세 단계를 반영하고 있는 곳입니다. 유치원을 무기율(無紀律)의 단계로 본다면 초·중·고의 각급 학교는 ‘타율(他律)’의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학은 마지막 ‘자율(自律)’의 단계에 속한다고 할 것입니다.

타율의 단계에 있는 학교나 국가는 인간성을 단순한 수단으로 보는 사회와 같습니다. 이 수단의 왕국에서는 교육 역시 유의성(有意性)이 아니라 유용성(有用性)을 추구하고 있어 교육자와 피교육자 사이의 관계는 단순히 공급자와 소비자의 관계로 바뀌고 맙니다. 배우는 분야 역시 시험이나 취업에 관련된 것만이 뜨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타율에서 자율의 단계로 진입하면 인격을 목적으로 하는 인간들이 서로 존중하며 살아가는 ‘목적의 나라’가 출현하게 됩니다. 의무교육과는 대조적으로 ‘자신을 위한 교육(self education)’을 실현하는 단계입니다. 이렇게 타율이 자율로 변하고 뜨는 것이 나는 것으로 전회(轉回)하는 것이 여러분의 대학생활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확대한 것이 칸트가 영구평화의 이상으로 삼은 자율 단계의 국가입니다.

높이 높이 날아라 우리 비행기♪
나는 것만으론 부족해 풀리지 않는 5차 방정식처럼
상상력의 한계 도전해야 그것이 대학 2.0시대 생존법

◇공식이 없는 대학의 꿈=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여러분 앞에 닥쳐올 새 시대의 상황은 수학문제로 치면 고차 방정식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바빌로니아의 시대부터 수천 년 동안 1차에서 4차 방정식에 이르는 난문제들에 도전하여 그것을 푸는 공식을 발견해 왔습니다. 하지만 5차 방정식부터는 어떤 공식도 일반 대수학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한계를 발견하고 수리적으로 증명한 것이 여러분과 비슷한 나이에 결투로 숨진 프랑스의 천재 수학자 에바리스트 갈루아입니다. 여러분이 그냥 날아서는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공식이 존재하지 않는 삶의 고차 방정식과 맞서게 된 여러분은 차가운 하숙방에서 그 난제에 도전한 갈루아와도 같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지금까지 해온 공식으로는 풀리지 않은 문제들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로컬리즘도 글로벌리즘의 문제도 아닙니다. 인간 문명의 한계를 증명하고 그것을 넘어서려는 높은 정신과 초월적인 상상력을 갖지 않으면 풀리지 않는 문제들입니다. 먹이를 찾기 위해 낮은 바다 위를 배회하는 갈매기 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갈매기 조너선처럼 혼자서라도 높이 높이 나는 비행술을 연습하고 실현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대학을 고공 비행의 연습장이며 동시에 공식이 존재하지 않은 삶의 고차 방정식을 푸는 창조적 지성의 집합체로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 아닙니다. 높이 날려는 의지와 욕망은 그 자체가 의미와 충족이 되는 오토텔릭(자기목적)의 산물인 것입니다.

◇대학 2.0시대가 온다=일방적인 ‘리드 온리(read only)’의 인터넷 기반을 읽고 쓰는 ‘리드 앤드 라이트(read and write)’로 업그레이드한 웹 2.0시대에서는 UCC(user created contents)의 경우처럼 공급자와 소비자의 경계가 없이 다 함께 콘텐트를 창조합니다. 일방적으로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학생들이 직접 참여해야 지식을 창조하고 공유하는 주체가 됩니다. 공식이 존재하지 않은 고차 방정식에서는 대수학만으로는 안 됩니다. 다른 학문 체계와 손을 잡아야 합니다. 학과 사이의 문지방을 낮추고 두터웠던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벽도 무너뜨려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만들어가야 할 ‘대학 2.0’시대의 기반인 것입니다.

“떴다 떴다 새내기 날아라 날아라 높이 높이 날아라 우리 대학 새내기.” 어디에선가 맑은 합창소리가 들려옵니다. 세계 상위권으로 뜬 ‘우리 대학’, 한강의 기적으로 떴고 IT와 한류로 떴던 ‘우리나라’ -올해로 60년 환갑을 맞는 대한민국도 이제 방향을 정하여 날아야 합니다. 높이 높이 날아야 합니다.


이어령 본사 고문

내가 본 마지막 삽살개 추정 검정개

삽살개는 아시다시피 천연 기념물이다.

삽살개는 또한 멸종해가는 위기에 대구의 하 지홍 교수 부자 2대에

걸쳐 희생적인 노력으로 살려낸 개다.


그리고 개가 번식을 잘해 현재 전국에 이 개를 기르고 있는 애견가가

수 천 명을 넘어 설 듯하다.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삽살개 보존회도 있고 동호인 클럽 성격의 사이트나

블로그도 수 십 개가 될 것 같다.


개 또한 품성도 훌륭하고 용모도 훤칠한 것이 사람들의 애정을 받을만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이렇게 평온한 삽살개 세상에 딴소리를 풀어 놓아 버리면 나의 블로그는 비난 댓글에 쑥밭이 되지도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그러나 나는 결국 블로그의 특성상 이 이야기를 안 풀어 놓을 수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먼저 블로그의 논지를 밝히면 삽살개의 원류에 대해서 다른 이견(異見)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원종 삽살개는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다는

의견을 말 하려고 하는 것이다.


삽살개의 원조중의 원조라고 알려진 청삽사리부터 이야기 해보자.

나는 삽사리의 원종은 털 색깔이 단색인 청삽사리라고 확신한다.


----여기서 경산 삽사리 부정 측에서 진짜 삽사리의 그림이라며

제시했던 개를 그린 동양화를 짚고 넘어가 보자.


그려진 개는 바둑이 무늬의 모피 색을 가졌다.

바둑이 무늬는 단색을 가진 순종개가 잡종화의 길로 접어들었을 때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나의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이 그림은 청삽사리 잡종화 단계의 개를

그린 그림으로 생각된다.-----

 

삽살개라 불리우던 바둑이.

지금 청삽사리라고 하는 것의 색깔이 그 삽사리의 원조를 살려보자고 하는 노력 끝에 고정된 색깔인데 바로 이 색깔에 의문이 붙는다.


삽사리 앞에 붙은 청(靑)이라는 것은 흑색을 일컫던 고어(古語)식

미칭(美稱)이다. 

수묵화(水墨畵)의 시대에 살던 우리 조상들은 때로는 색채 명에 대해서

대단히 너그러웠다.

청색(푸른색)과 녹색(풀색)을 구별하지를 않았던 것이 그 대표 사례이다.


어린이날만 되면 꼭 방송을 타는 어린이날의 노래에 그 것이 나타나 있다.


“----- ♪달려라 푸른 들판을 ---- ” 이 그 것이다.


벌판이 푸르다고(blue) 할 것이 아니라 녹색(green)이라고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다.


개에서도 명칭의 혼동은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발견할 수가 있다.

제주도에 가보면 검정개를 청개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그러니까 청삽사리는 지금 청삽사리가 가지고 있는 연회색이 아니라

삽살개 원종인 청삽사리는 전신이 새까만 흑 삽사리였던 것이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 본다.

우리나라 유일무이한 이상오씨의 한국 야생 동물기를

다시 한번 참조해 보겠다.

지난 번 늑대에 대한 이 분의 글을 소개 했을 때 반응이 아주 뜨거웠다.


그 분은 사냥이나 야생 동물에만 해박한 지식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자연사 역사에 귀중한 기록을 남긴 단 하나의 토종개

전문가이기도 했다.

그는 이 책에 내가 참조할만한 유일무이한 청삽사리에 대한 정보를 남겼다.

먼저 청삽사리에 대한 구절부터 보자


“ 삽살개는 요즘은 전혀 볼 수 없는 없으며 또한 왜소화(矮小化)하여 그 원종의 위용을 볼 수가 없으나 4,50년 전에는 간혹 이른바 ‘청(靑)삽살개’라 하여 흑색의 긴 털에 주둥이가 짧고 몸집이 큰 것이 있었으니 그 원종의 모습을 계승한 것으로 귀종(貴種)의 개라고 일컬어 졌었다.”


그리고 그 조상의 한 후보로 티베트 마스티프를 지목했다.

그 글은 이렇게 쓰여 있다.


“ 축견의 이동 상황이 문헌상으로 나타난 것은 겨우 근대에 와서이다.

  이 중에 특이한 것은 티베트의 마스티프이니, 서쪽으로 이동하여 남유럽에  까지 이르렀으며 모로서 개라고 하여 훗날에 영국에서 개량되어 오늘날 의 마스티프 개의 원종이 된 것이다.

동으로 퍼진 것은 중국, 만주, 우리나라로 이동하여 털이 길고
북실북실한 삽살개가 되었다.” 


티베트  마스티프

이 글이 쓰여 진 것은 1950년대 이다.

그러니까 일정 초기까지 우리나라에 청삽사리가 살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가 말한 진짜 청삽사리의 색깔은 흑색이었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현재의 삽사리의 저런 연한 회청색을 보고 아무리 색깔에 둔감했던

옛 분들이라도 흑색을 말하는 ‘靑‘이라는 단어를  부여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더해서 이상오씨가 사셨고 활동 하셨던 곳은 오늘날 천연 기념물

경산 삽살개의 모종(母種)인 강아지들을 채집한 영남 지방이다.


삽살개 육종가 하 지홍 교수의 부친께서 삽살개 연구 목적으로 영남
지역에서 부지런히 삽살개를 닮은 개를 모으셨고 그리고 이들 강아지로 바탕으로순종 보존을 위한 육종을 계속해서 오늘날의 삽살개를 만들었다지만 이 지역에서 살았었고 활동 하셨던 토종견 전문가 이상오씨가 청삽사리는 멸종했다고 한 말에 유의하자.


여기에 더해서 나의 한 경험을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밝히자면 나는 삽살개의 마지막 세대의 개로 추정되는 개를
보았었다.


내 고향은 호남 지방의 서해안 연안의 한 농촌이다.

초등학교 때 매일  넓은 평야 사이로 난 큰 길(신작로)을 걸어서 2킬로나

떨어진 학교로 등하교를 했었다.

그 길목에 있었던 한 마을의 기와집에서 기르던 개의 모습이 아직도

나의 망막에 선명하다.


전체가 새까맸었다.

귀는 넘어져 있었고 털은 무척 길었었다.

우리는 그 개를 북실개라고 불렀다.

털이 북실북실하다고 해서 그렇게 불었을 것이다.

(앞서 이상오씨가 청삽사리 털을 북실북실하다고 한 것을

상기해주시기를 바란다.)

여자 학생들도 그 개를 무서워하여 귀신 개라고 불렀던 기억도 난다.


티베트 마스티프 새끼

그 개는 궁벽한 그 지역 어디서도 비슷한 형태를 찾아 볼 수가 없는

독특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내가 살던 지역은 진돗개 한 마리만 들어와도 면(面)에서 화제가 되고 순종여부가 아리송한 세파트 한 마리만 있어도 근처 동네에서 다 알게 되는 그런 궁벽한 시골이었다.

인근 동네 개들의 거의 전부가 X개라 불리던 개가 시절 그 개는 특히나

눈에 띄는 존재였다.


이 개를 내 기억의 망막 속에 완전하다시피 담고 있었던 것은 이 개는 심심하면 자기 마을 앞의 신작로를 지나가는 학생들을 쫓아 와서 마구 짖어 댔기 때문이다.


그 놈은 평평한 평야 지대인 논사이로 난 신작로에서 300미터 쯤
떨어진 마을에 살았는데 한 달에 한 두 번은 그 신작로로 지나가는
학생들을 보면 갑자기 달려 나와 짖어 대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묶어놓고 기르지만 주인이 가끔 풀어주면 그간 싸였던 스트레스를 그렇게 풀었었던 것 같다.


그 때의 농촌 학생들이란 뱀과 들쥐가 장난감이었던 야생에서 살았었고

동네 개들한테 한 두 번은 물려 본 경험이 있었던 야생마 같은

아이들이라 겁이 없었다.


북실개가 짖으며 달려 나오면 지지 않고 신작로의 돌을 주워서 우박처럼 집어 던졌다.

다른 개들은 돌멩이 세례가 가해지면 그저 꼬리를 내리고 슬금슬금

후퇴하는데 이놈은 기막히게도 어린 학생들이 던지는 돌들의 사정거리를 알아서 그 밖까지 물러서면 절대 더 이상 물러서지 않았었다.

우리가 돌팔매질을 그만두고 그 동네 입구를 백여 미터를 지나서야
그때야 그 놈도 집으로 돌아가곤 했었다.


돌팔매질에 소질이 있었던 나는 그 놈이 나타나면 항상 앞장을 섰었다.

어떤 때는 그 놈을 거꾸로 자기 집으로 도망 들어 갈 때까지 몰아가며 돌을 던져댔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자주 대면하다보니 그 특이한 개의 모습은 나의 뇌리에 깊숙이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또 변변히 못한 머리이지만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다는 말 대로 동물에 대한 나의 기억력은 상당히 좋았다.


나는 거기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시로 유학을 와서까지도 그 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었다.


다만 나는 그때 내가 너무 어려서 그 개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 너무 아쉽다.


세월이 흘러 올림픽이 끝나고 90년대에 들어서자 경산의 삽살개가 매스컴에 자주 뜨기 시작했다.

사진도 많이 소개 되었고 책도 나왔다.


이때만 해도 삽살개는 나의 깊은 관심사가 아니었었다.

그러나 삽살개가 언론의 조명을 받아 많이 알려지자 시끄러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삽살개가 잘못 육종되었으며 한국 삽살개란 현재의 삽살개와 전혀
다르게 생겼다는 부정의 의견이었다.


삽살개를 보신 나이 드신 분들이 삽살개에 대해서 말한 것도 보도되기도 했었다. 

키도 저렇게 크지도 않았었고 얼굴을 덮은 덥수룩한 털도 없었다는
증언들이었다.


나는 그제야 청삽사리는 원래 검은 색이었다는 것이었다는 이상오씨의

글이 생각났다.

나는 이에 흥미를 가지고 현재 삽살개에 부정적인 사람들의 의견들을

들어보았다.


그들의 말하는 바는 하지홍 교수 부자 2대가 힘들여 삽살개를 육종
한 것은 크게 살 일이라는 점은 인정했다.

이들 삽살개의 원종 조상들을 영남 일대의 벽촌에서 찾아내 수집했는데

이 것에 오류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 무렵에는 이미 순종 삽살개가 멸종을 고할 때였기 때문에 벽촌이라고 해서 그렇게 많은 종자가 남아 있지를 않았었다는 것이었다.

( 이 점도 이상오씨의 말과 일치한다.)


그들은 하 교수의 부친이 순종 삽살개의 피를 간직했다고 구매해왔던

털 많은 개들의 조상에 대해서는 한 가능성을 제시했다.   


오래 전에 경북 김천인가 어디에 서양 선교사가 ( 천주교 신부였는지도

모른다.) 한 사람이 포교 활동을 위해서 오랫동안 살았었다 한다.


허 씨를 성으로 해서 한국 이름까지 가진 분이었다.

이 분이 털 많은 개를 좋아해서 털긴 개 몇 마리를 오랫동안

길렀다는 것이다.

삽살개 부정측은 개들 중의 하나를 올드 잉글리쉬 쉽 독으로 보고 있다.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신 분이면 아시겠지만 동네에 씨 좋은 개가 있다고 하면 그 무렵의 시골 분들은 자기네 암캐와 교접을 시켜서 좋은 혈통을 가진 개의 품성을 반이나마 내리받으려고 했었다.


그 분의 털 많은 개들은 궁벽한 시골에서 보기에도 근사 해 보이는 선진국의 개들이었다.

그 씨를 탐내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물 건너온 개들의 씨가 대단히 많이 인근에 퍼져나갔다는 것이고 이 피가 섞인 잡종 개들이 퍼뜨린 씨들이 삽살개로 오인 받아서 지금

삽살개의 종자를 키워 내는 기초 종견이 되었다고 했다.


나는 삽살개 부정 측의 의견을 듣고 한참 뒤에 진돗개에 대해서 조사 할 것이 있어서 모 신문사에 갔다가 우연히 개에 관해서 스크랩 해 놓은

옛 기사들을 보았다.


삽살개가 메스컴을 타기 훨씬 전에 나온 훨씬 기사였다.

거기에 삽살개에 대해서 떠도는 말을 짧으나마 기록 한 구절이 있었다.


삽살개의 조상에 대해서 몇 마디 언급한 것인데 그중 하나가

서양 선교사가 가져 왔다는 짧은 구절이 있었다.

위의 삽살개 부정 의견을 뒷받침 해주는 것이라 인상에 남았다.


삽살개 싸움은 오래 지속되었지만 이미 삽살개가 천연 기념물로 자리를

잡은 이상 여론은 부정 쪽을 편들지 않았다.

부정하던 쪽은 진짜 조상으로 의심하던 올드 잉글리쉬 쉽독의 유전자와

삽살개의 유전자 검사까지 하고서 확전을 희망했던 것 같으나 항의의 융단 폭격에 결국 글로브를 벗고 자기가 스스로 올라갔던 링에서 내려가고 말았다. 


나는 이 삽살개 전쟁으로  비로소 어린 학생시절 보았던 의문의 검정개에 대해서 관심이 돌아갔다.

우리 털이 긴 개를 거의 찾을 수가 없었던 시절 그 개가 행여 기적적으로 살아 남았었던 마지막 삽살개의 한마리가 아니었을까?

  

나의 돌멩이질에 쫓겨 가면서도 씩씩대던 검은 개가 마지막 삽살개의 한 마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하면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자료를 수집하러 국립 남산 도서관에 같다가 커다란 애견 도감을 보게 되었다.


백과사전보다도 더 큰 이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다가 어느 장에서 그림

하나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티베트 마스티프라는 개를 소개하는 장이었다.

거기에 전신이 검정개 사진 한 장이 있었다.

정말 놀랄 사진이었다.


내가 삽살개가 아니었을까 생각했었던 초등학교 시절의 개를 너무도

흡사하게 닮은 모습이었다!

전신의 검은 색깔 , 위로 치켜진 꼬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온몸의 북실북실한 털-----

그 개를 직접 찍은 사진이 거기에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티베트 마스티프가 삽살개의 조상 ?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대강 읽어 젖힌 이상오씨의 글 전후에 티베트 마스티프에 관한 글이 있었던 것 같은 생각이 났다.


나는 급히 집에 돌아와서 책을 꺼내 그 부분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역시 앞에서 소개한 삽살개의 조상이 티베트 마스티프라는 구절이 다른

새로운 느낌으로 돌아왔다.


검정 티베트 마스티프

나는 티베트 마스티프가 아닌 그냥 마스티프라고 불리는 개를 알고
있었다.

일본의 도사견의 모태가 되었다는 말도 들었었고 김홍도가 그렸다고
잘못 알려진 투견도의 모델이라는 말도 들었었다.

영국에서 개발했다는 그 개의 사진도 여러 번 보았는데 인상이 무척

험악한 개였다.


잉글리쉬 마스티프

그 개와 티베트 마스티프는 호칭이 단지 단어 한자 차이인데

생김생김에서 차이가 많았다.


이 상오씨가 말한 티베트 마스티프가 어떻게 한국에 전래되었는지를
밝히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진돗개의 조상을 찾아서 오랫동안 자료를 모아온 나의 시각으로 보면 옛날 몽골족이 데려온 것이 거의 틀림없었다.


진돗개의 조상을 찾아다니며 자료를 수집 하던 중에서도 삽살개를 몽골군이 데려왔다는 어느 오래된 신문기사를 읽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티베트 마스티프는 티베트에만 사는 것이 아니다.

몽골에도 이 개가 많다.

한국에 드려온 마스티프의 거의가 몽골에서 수입한 것이다.

중국 북경에서는 티베트 마스티프가 쩡아오, 즉 사자 개라는 이름으로

엄청나게 비싼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시간이 지나자 티베트 마스티프가 한국에도 도입되기 시작했다.

몽골에서 수입 된 것이라 했다.


2000년도 초에 마침 몽골에서 수입된 라이카 견을 조사를 하기 위해서

서울과 춘천 사이의 경춘 가도에 있는 라이카 견 수입 판매 업체를 찾아

간 일이 있었다.

가보니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이스트 라이카는 없었고 웨스트 라이카만 있었다. 

실망스러웠지만 이스트 라이카가 곧 수입된다는 말을 듣고 돌아왔다.

몇 개월 뒤에 나는 그  곳을 다시 찾아 갔다가 별난 개들을 만났다.


한 눈에 그 것이 티베트 마스티프를 알아보았다.

전체적인 인상이 역시 삽살개의 조상이라 할 만한 생김생김이었다.


내가 보았던 북실개와 책에서 본 티베트 마스티프와 조금은 달랐다.

세파드처럼 상체는 검정색이고 하체는 갈색인 블랙 앤드 탠의

모피 색을  가졌다.

체구도 엄청나게 컸고 다리가 길었다.

그날 처음 알았지만  티베트 마스티프의 털 색깔에는 갈색도 있었다.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했으나 관리인이 인상을 쓰며 접근을 못하게
했다.

내가 꺼내든 카메라가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까이 서 보지 못한 나는 아쉬웠지만 다시 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돌아온 뒤에 나는 티베트 마스티프라는 개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겁나게 보이는 티베트 마스티프는 티베트의 야생에서
사는 오리지날 티베트 마스티프에 비하면 매우 순한 편이라는 사실이 있었다.


티베트의 야생에서 생활하는 티베트 마스티프는 이리 종류와 만나서 격돌하면 문자 그대로 한방에 이리의 숨통을 끊어 놓는 괴력을 가지고
있다.


중국인 사이에 쩡아오, 다시 말하면 사자 개라고 불리 우는 티베트 마스티프의 인기는 대단하다.

그들은 티베트 마스티프가 세상에서 제일 용맹한 개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가격도 엄청 비싸서 오직 고소득 가정에서만 기를 수가 있다.

동서 어느 기록을 들여다봐도 이 개의 용맹함은 부정 할 수 없는 것

인듯했다.


사진을 보면 티베트 마스티프가  왜 사자개라고 불리는지를 알만하다.

한국 매사냥의 자료 수집을 할 때도, 그리고 진돗개의 조상을 조사 할 때도 내가 크게 놀랐던 것은 200년도 안 되는 짧은 세월을 몽골 영향권에 우리나라에 들어가 있는 동안 몽골이 우리나라의 끼친 영향의 크기가 우리의 상식을 훨씬 뛰어 넘는 것이었다.


그 한 예를 보자

많이 알려져서 한 때는 그 이름을 딴 보칼 그룹이 나오기도 했던 송골매가 실은 몽골어에서 왔다는 사실이다.


몽골 지배가 구체화 되면서 매사냥이 몽골에 의해서 적극적으로 고려에

도입되기 시작했다

상무 민족인 몽골족은 왕족부터 아래 하급 무사까지 말을 타고 하는 매사냥을 즐겨했었다.


그전부터 물론 한국에 매사냥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러나 몽골의 영향아래 이 스포츠가 상류층, 다시 말하면 지배층의
스포츠로 크게 퍼져 나갔다는 점이다.

매사냥은 지금의 골프와 같이 고려 상류 사회의 귀족 스포츠로 고려사회 에 정착했고 이 스포츠는 근세 조선조 까지도 내려왔었다.

그와 같은 케이스로 삽살개 역시 몽골족이 데려온 개로서 하나의 상류사회의 심벌로서 키워진 듯하다.


한국인들의 역사를 보면 순종 보존이라는 면에서 한국인은 취약성을

보이고 있다.

이 취약성에 대해서 이 상오 씨는 한국인에게 왕성했던 식견 문화 때문이었다고 한탄했다.

백성들의 절대 다수가 담백질 공급원이 마땅치 않았던 농민들이 한국 실정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같이 순종을 보존해온 개들은 순종을 보존해야만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기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돗개가 가진 사냥이라는 기능이 개의 순종을 보존케 하는 큰 몫을 했듯이 삽살개는 그의 특이한 외모 때문에 사대부(士大夫)등의 양반 집에서 사회적 심벌로서 길러졌었고 -- 그러고 이런 연유로 삽살개는 고급 상품으로 인식되어 그 품종을 보존해 오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한참 뒤 볼일이 있어서 그 쪽으로 가는 길에 티베트 마스티프가

있던 사육장에 다시 가보았다.

관리인은 카메라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했으므로 아무것도 들지 않고

빈 몸으로 사육장 안으로 들어갔다.


사육장에 그사이 작은 변화가 있었다.

그 날은 그가 별로 경계심을 보이지 않아서 티베트 마스티프가 있는 앞에까지 바짝 다가가서 자세히 살펴 볼 수가 있었다.


몇 달 안 본 사이에 그 사업장에 사업의 큰 변경이 있었던 것 같았다.

라이카가 대폭 줄어들었고 대신 티베트 마스티프가 많이 늘어나
있었다.

수요가 큰 쪽으로 비중을 옮긴 듯했다.


그들 새로운 티베트 마스티프 중에 전신이 검은 마스티프가 한 마리 있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그 놈에게 달려가서 유심히 관찰했다.

동시에 머릿속에는 어린 시절 보았던 학교 옆 동네 북실개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검정개와의 첫 눈 맞춤부터 나는 그 북실개의 아련한 정취를 흠뻑 맡을 수가 있었다.

북실개보다 훨씬 커다란 체구와 긴 다리만 빼놓고는 북실개와 상당히

닮아 있는 것이 놀랄 만했다.


한참을 구경하며 옛 기분에 까지 젖어 보는 중에 그 전신이 검은 개의

얼굴이 옛 북실개와 차이가 있슴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눈이 북실개와 달랐다.

티베트 마스티프는 눈이 제법 컸고 눈 꼬리가 서양개처럼 밑으로

내려와 있었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북실개의 눈매는 날카로운 진돗개보다는 조금

순해 보이는 스피츠 개의 그 것과 비슷했었다.

작지만 영리한 느낌이 드는 눈매였다.

그런 눈에 분노를 띄고 돌을 던지는 나에게 맹렬히 짖어대는 북실개의

모습이 항상 마음속에 남아 있었기에 분명한 차이를 가려 낼 수가 있다.


다음으로 티베트 마스티프의 두부가 위가 둥글게 튀어 나온 것이

눈에 띄었다.

전체적으로 어쩐지 입체적인 인상이 들었다.


북실개는 얼굴이 평면적이었다.

윗머리도 둥근 것이 아니라 평평해 보였다.

그리고 눈과 눈 사이도 넓어 보였었다.


한 마디로 두 개의 인상을 비교하라면 티베트 마스티프의 인상이 서구적이었다 .

대조적으로 북실개의 인상은 동양적이었다.


여기서 부터는 글을 다 쓰고 다시 점검하다가 이 대목에서 생각 나는바가 있어서 아래 글을 첨언한다.


내가 본 티베트 마스티프의 인상이 어쩐지 입체적이고 서구적이었다고 

앞에서 표현했다.


이 대목에서 생각나는 것은 이상오씨가 멸종했다고 쓴 청 삽살개의

털이 검은 색이고 주둥이 짧다는 구절이다.

주둥이가 짧으면 얼굴이 들어나고 넓게 보이고 전체적인 인상이

평면적으로 보인다.


북실개의 주둥이가 짧았기에 그렇게 동양적인 인상을 나에게

주었던 것 같다.

육식과 사냥을 주로 하면서 살던 환경에서 살려면 무는 힘이 좋아야

하기 때문에 입이 길수록 좋다.

티베트나 몽골의 마스티프는 그런 환경에서 살았었다.

그러나 한국에 들어와 살면서 씹는 힘이 별로 필요 없는

식물성 음식을 먹으면서 변화가 오지 않았을까?

쓰지 않으면 퇴화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삽살개의 긴 주둥이가 퇴화해서 짧아졌다고 추리도 한번 해본다.


블로그에 게재 결정을 한 뒤 그 개의 사진을 한 장이라도 찍어서
올리고
싶었다. 

촬영을 허락하지 않은 그 사육장의 태도를 생각하면 고민이 안 될 수가

없었다. 

할 수없이 외국인과 함께 갔더니 다행이도 주인이나 관리인이 다 바뀌어 있어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더 운이 좋았던 것은 아직 완전히 성장하지 않은 검정 티베트 마스티프가 한 마리를 발견한 것이다.

옛날 내가 보았던 그 북실개와 정확히 같은 크기였다.

내가 다가가자 펄펄 뛰며 짖어대다가 카메라를 들이대니 구석으로 피했다.

옛날 나를 보고 마구 짖다가 돌멩이를 던지면 도망가던 북실개와 어찌나 비슷한지 더욱 그 북실개의 추억이 떠올랐다.

여기 올린 사진을 보시기 바란다.

단지 머리가 부스스하게 일어난 것이 북실개를 떠오르게 하는 비슷함이

다소 지장을 받는다.  
 ( 앞 새끼 사진에서도 보듯이 티베트 마스티프의   새끼때는 머리가 
   부스스하게 일어나 있는 것 같다.)


글을 맺으면서 다시 한 번 감회에 젖어든다.

티베트 마스티프가 한국에 와서 삽살개가 되어 600년 가까운 세월을 종족을 보존하며 내려오다가 멸종의 단계를 밟았지만 그래도 호남 지방 농촌의 애견가 보호로 기적적으로 살아 남아있었던 마지막 세대 중의
한 마리를 내가 정말 보았을까?


나에게도 이런 행운이 있을 수 있었을까?

나는 단정적인 판단을 유보 하면서 글을 맺겠다.

---------------◇-----◇---- 


포스팅 직전 다시 한번 말씀드린다.


나는 앞에서 소개한 북실개라는 삽살개 추정의 개가 나의 허구의 거짓이 아님을 하느님과 나의 양심을 걸고 맹세한다.


북실개가 살았었던 동네의 위치도 기록했다가 삭제했음도 밝힌다.

쓸데없는 논쟁에 기한 없이 끌려 다니기가 싫어서였다.


이미 삽살개의 정체성에 시비를 걸었다가 집중 포화를 받고 후퇴한

경우를 너무나 생생하게 본 경험이 나를 글을 올리기 전에 몇 번이나 망설이게 했던 것을 앞에서 말씀드린바 있다.


나 역시 하 교수님 부자 2대에 걸쳐서 오늘의 삽살개를 개발해낸 공로를 크게 평가한다.

지금 수많은 멧돼지 사냥개 전문가들이 지난 30년 세월동안 멧돼지 사냥

명견을 개발해내기 위해 각종 노력을 해왔지만 각자의 주장과 각자의 명견만 있을 뿐 아직 세계에 이렇다하고 내놓을 만한 자타공인의 명견은 아직 탄생이 되지 않고 있다.


명 엽견의 개발이 동반견의 개발보다 훨씬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두 분이 노력해서 이 정도의 개이나마 개발 해낸 과정과 노력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나는 원종이 다르다고 무조건 이미 개발해놓은 삽살개를 부정 하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울프 하운드라는 영국 개도 원래 원종이 있었지만 멸종되고 나서 다시 인위적으로 개발해낸 개다.


단지 삽살개의 원류 조상이 이럴 수도 있다고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 논란에 휩싸여 욕을 얻어먹기도 거북스럽다.

[출처: http://kr.blog.yahoo.com/waterview33/128]

- 인왕산 鶴학巢소島도에서 최범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