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행이란 것을 싫어하며, 또 탐험가들도 싫어한다. 그러면서도 지금 나는 나의 여행기를 쓸 준비를 하고 있다. 내가 이 일을 결심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려야 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브라질을 떠나 온 지도 벌써 15년이나 지났으며, 그동안 내내 이 책을 써볼 생각을 수없이 해왔다. 그러나 그때마다 부끄러움과 혐오감이 앞서서 그만두고는 하였다. 무엇 때문에 그 시시하고 무미건조한 사실이며 사건들을 상세히 서술해야 한단 말인가.”

“여행이여, 꿈 같은 약속이 가득히 든 마법의 상자여”

“샤토브리앙(Chateaubriand, 1768~1848: 프랑스의 낭만주의 문학가-옮긴이 박올줄)이 그의 저서 <이탈리아 기행>에서 ‘사람들은 각기 그가 보고 사랑했던 모든 것으로 구성된 하나의 세계를 자기 안에 지니고 있으며, 이질적인 세계 속에서 돌아다니는 듯 보일 때조차도 항상 자기 세계로 돌아오고 있다’고 말했듯이 앞으로도 옮겨다니는 것은 가능하다. 생각지도 않았던 일인데, 시간은 인생과 나 사이에다 지협(地峽)을 길게 끌어다놓았다. 그 옛날의 경험과 마주보게 되기까지는 20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지난날 나는 의미도 모르는 채 지구 끝까지 그 경험을 추구하러 넋을 잃고 다녔던 것이다.”

- 프랑스의 저명한 인류학자이며 사상가인 레비-스트로스 Claude Levi-Strauss가 쓴 기행문학의 고전 작품이자 지적 자서전인 <슬픈 열대 Tristes Tropique> 중에서 -

<소나무의 눈물: 슬픔의 혹은 기쁨의?>

서울에서 이탈리아 밀라노를 가다

청담동 꼬르소 꼬모(CORSO COMO) 오프닝 파티에 초대받아 가다

‘10 꼬르소 꼬모’ 한국상륙

세계적 편집매장…24일 청담동 오픈

마침내 국내에 본격적인 라이프스타일 콘셉트매장이 등장했다. 단순히 예쁜 옷과 구두만 골라다 파는 게 아니라 라이프스타일 전반의 새롭고 창의적인 콘셉트를 제시하고, 판매도 하는 본격적인 콘셉트매장이 한국에 상륙한 것.

제일모직은 세계적인 편집매장(Concept Store)인 이탈리아 밀라노의 ‘10 꼬르소 꼬모(10 CORSO COMO)’와 독점계약을 하고, 서울 청담동의 신축빌딩 트리니티 플레이스에 ‘10 꼬르소 꼬모 서울’을 꾸몄다.

오는 24일 개점하는 ‘10 꼬르소 꼬모 서울’은 국내외 유명브랜드 의류, 액세서리, 서적, 음반, 카페를 아우르는 복합 편집매장. 제일모직은 이 콘셉트매장을 통해 세계적인 패션 및 문화트렌드를 소개하고,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녹여낸 새로운 글로벌미학을 제안할 계획이다.

연면적 1400㎡, 3개층으로 꾸며진 ‘10 꼬르소 꼬모 서울’에는 패션숍 외에 서점 카페가 조성돼 남녀의류와 패션소품, 책, 홈컬렉션, 아트상품을 전시 판매하게 된다. 카페에서는 음료와 파스타, 와인을 즐길 수 있다. 매장 명칭 중 Corso는 ‘번지(街)’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따라서 ‘10 Corso Como’는 ‘꼬모街 10번지’를 의미한다.

밀라노에 위치한 ‘10 꼬르소 꼬모’는 이탈리아 패션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감각파 디렉터로 꼽히는 카를라 소차니가 지난 1991년 “패션, 미술, 음악, 디자인, 라이프스타일을 통합하는 멋쟁이 복합문화공간을 꾸며보자”며 선보인 매장. 이후 쇼핑뿐 아니라 갤러리와 서점, 카페 기능을 겸하며 ‘삶의 멋진 스타일’을 총체적으로 제안해 순식간에 세계적 명소로 부상했다. 특히 각국의 첨단패션과 예술, 문화의 정수를 똑부러지게 선별하고, 편집해내는 소차니의 안목은 정평이 나있다.

제일모직 관계자는 “꼬르소 꼬모는 세계 최초로 ‘콘셉트가 있는 편집매장’의 전형을 만들어낸 선진형 매장으로 ‘가치중심 소비’를 지향하는 고객이 그 대상”이라며 “꼬르소 꼬모 서울은 밀라노 현지를 제외하곤 해외에 오픈하는 첫 번째 매장인 만큼 앞으로 세계의 최신 패션감각과 라이프스타일 트렌드를 입체적으로 선보이겠다”고 밝혔다. 또 “매장이 지향하는 콘셉트에만 맞으면 고가명품에서부터 실용적인 아이템까지 포괄적으로 취급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매장에는 제일모직이 이탈리아에서 론칭해 세계적 명품으로 육성하고 있는 ‘데렐쿠니(DERERCUNY)’도 입점할 예정이다.

이영란 기자(yrlee@heraldm.com)

http://www.10corsocomo.co.kr

서울에서 이탈리아 사람을 제일 많이 만난 저녁이었다

금년 3월이 장인환, 전명운의거 100주념이 됩니다.

그때 미국 언론에서는 이사건을 어떻게 보고 있었나 찾아 보았습니다.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할때 일본에 공을 세운

Durhan W. Stevens는 일본의 추천을 받아 대한제국의 외교고문이 된 친일파 입니다.

스티븐스는 1908년 3월 20일 조선식민지정책의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워싱톤으로 가는도중에

샌프란시스코에 들렸읍니다.

니뽄마루편으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스티븐스는 워싱톤 정가에 분위기를 띄우기 위하여

먼저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와 인터뷰를 합니다.

다음날 아침 인터뷰 내용이 신문에 실렸읍니다.

 

'조선사람들은 일본의 보호 아래 많은 혜택을 받고있으며

그리고 좀더 많은 혜택을 기대하고 있다.

일본은 미국이 필리핀을 위해서 일하는 것 처럼 조선을 위해서 일하고 있다.

일본정부는 조선인의 교육과 군비를 대폭 지원하고 있다.

조선인은 농민과 양반으로 나늬어 있는데 농민들은 아무리 일을 많이 해도 먹고 살기는 커녕

아무것도 없는 벌개벗은 존재이다.

동시에 양반들은 모두 부패해 있다.

농민들은 일본의 지배하에 있기를 바란다.

양반들도 처음에는 일본정부를 의심하더니 지금은 일본이 실시하고 있는 개혁만이 희망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티븐스는 계속해서 이어갔다.

'워싱톤을 방문한 다음(일본을 위해서 일한다음) 수개월 후에 조선으로 돌아가면

외교고문을 계속할것 인지는 불분명하다.'

 

맨 끝부분에 외교고문을 그만둘 생각을 은연중에 비치는걸 보아 스스로도 떳떳치 못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것 같읍니다.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겨 가고 있는 조선의 참담한 모습에 울분을 머금고 있던 이지역

교민들에게 크로니클지의 스티븐스 인터뷰기사는 엄청난 충겨과 분노를 가저왔읍니다.

그당시 샌프란시스코에는 100명도 안되는 교민이 있었읍니다.

모든 교민은 다 상항한인감리교회에 모여 회의를 거듭한 끝에 대표를 스티븐스에게 보내

신문기사 내용을 정정하고 사과 할것을 요구하기로 결론을 내렸읍니다.

공립협회 회원 최유섭과 정재관 그리고 대동보국회 회원 이학현과 문양목 4인을 대표로 선정했읍니다.

그날 저녁 대표 4인은 스티븐스를 만나러 고지에 있는 Fairmont Hotel 을 향하여 가파른 언덕을

걸어 올라갔읍니다.

오늘 나는 그때 그분들이 걸어 갔었던 그길을 나 스스로 걸어가 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게 하나도 없는 이길을 그분들은 무슨생각을 하며 걸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3월의 눈부신 햇살이 쪼이는 Mason st. 가파른 언덕을 숨가쁘게 올라 갑니다.

언덕위에 다 올라 California st. 를 건너 Fairmont Hotel 을 바라 봅니다.

1908년 그당시는 동양인은 사람취급도 못받던 시절이었읍니다.

동양인 하나 죽여도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던 고약한 때 였었읍니다.

담대한 조선청년 4인은 호텔 라비로 들어가 스티븐스를 불러내 라비 북쪽 코너에 있는 의자에

둘러 앉았읍니다. (후에 스티븐스는 일본인이 면회하자는 줄 잘못알고 내려 왔다고 했읍니다.)

다음에 무슨일이 벌어 젔는지 크로니클지의 기사를 살펴 봅니다.

신문은 사건 다음날인 3월 23일 아침에 일면 톱기사로 실렸읍니다.

 

'조선인들이 페어몬트호텔에서 외교고문을 폭행'

'스티븐스 격분한 방문객한테 의자로 무참히 얻어 맞다'

'호텔 라비에서 대소동'

'격노한 우국지사들이 희생자와의 인터뷰에 이의를 제기하다'

'페어몬트호텔에 투숙해 있는 대한제국 외교고문 스티븐스는 어제밤 격분한 네명의 조선인들 한테

호텔 라비에서 폭행을 당해 넉다운되었다.

살려 달라는 비명을 들은 호텔종업원들과 투숙객들이 달려와 스티븐스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

애국지사들은 후에 해명하기를 말리지만 안았었다면 죽였을 것이라고 했다.

스티븐스는 깊은 타박상과 상처를 입었는데 심각한 부상은 아니다.'

다음지면으로 넘어가 기사는 폭행사건의 동기와 과정을 자세히 보도합니다.

많은 지면을 활애해서 기사화 했는데 언론과 미국인들이 자국민 스티븐스보다는 조선인과

대한제국의 편에 서있는 내용입니다.

 

'조용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호텔 라비 북쪽 코너에서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이학현이

스티븐스에게 주문하기를 지난번 인터뷰의 내용이 잘못되었음을 신문에 기고해 줄것과

외교고문으로서 조선에 대하여 긍정적인 발언을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오히려 일본이 조선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일을 해 왔고

조선땅에서는 조선인들이 일본정부와 정책을 열열이 환영하고 있다고 설파했다.'

기사는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이학연의 설명에 의하면 "30분정도 대화를 나누면서 그의 발언은 우리를 더욱 분노하게 했고

정말 화가 나서 더이상 참을수가 없었다."

"누군가 그에게 주먹을 날렸고 스티븐스는 의자에 앉은채 뒤로 넘어 갔다. 우리 모두가 달려들어

그를 패기 시작했다."

"지금도 원통한 것은 옆에 있던 등나무 의자로 그를 때렸어야 했는데 그렇게 못한것이 한이다"

"스티븐스가 큰소리로 울면서 도와줄것을 요청해 호텔종업원이 달려와 우리 사이를 말려 놓는

바람에 더이상 그를 때릴수가 없었다."

"나는 모여든 사람들에게 저자는 거짓말쟁이라고 소리치고 그자리를 나와 버렸다."

소동과 함께 라비 분위기는 매우 흥분되어 있었고 스티븐스는 그의 방으로 돌아 갔다.

스티븐스는 기자에게 상처를 보여주길 원치 않았고 이사건에 대해서 인터뷰를 거절했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그들이 죽이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다음 페이지에는 이학현이 설명하는 조선의 현 상황과 일본 군인들의 잔학상 그리고 일본정부의

야망, 일본인들의 수탈 등 여러 내용을 자세히 싣고 있읍니다.

 

사건직후 조선 청년 4인은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교민들에게 돌아가 스티븐스의 망언을 전했읍니다.

듣고있던 교민들은 울분울 참지 못해 그를 죽여 버려햐 한다고 외첬읍니다.

그때 공립협회원 전명운(25세)이 내가 처치하겠다며 나섰고

대동보국회원 장인환(32세)도 나섰읍니다.

다음날 아침 일본말을 잘하는 교민이 일본 영사관에 전화를 걸어 스티븐스의 스케쥴을 물어 보았읍니다.

불안해 하던  스티븐스는 일정을 앞당겨 동부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하여 샌프란시스코 선착장으로

간다는 정보를 알아 냈읍니다.

전명운과 장인환은 스티븐스를 저격하기 위하여 선착장에 먼저 나가 기다리기로 했읍니다.

<출처: http://blog.chosun.com/silhuette>

이번 봄엔 어떤 씨앗을 파종할지 고민되네.....

Chrysanthemum viewing (観菊), Japan ca.1900.

Germany. Dated on the back 23. Juli 1931

 

<출처: http://www.flickr.com/photos>

새한양 로타리클럽에서 강연

홍대 앞에서

좋은 아이디어 -- 언젠가 학소도에서 직접 만들어보고 싶다

노란버스의 화가 친구 한생곤이 새로운 변신을 시도했다 -- BIKER!

옆에는 얼마 전에 결혼한 신부

광화문 교보빌딩

- 인왕산 鶴학巢소島도에서 최범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