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unexamined life is not worth living"

(자기성찰 없는 인생은 살 가치가 없는 인생이다)

- Socrates 소크라테스

빠리 세익스피어&컴퍼니(Shakespeare & Co.) 서점 주인 조지 휘트먼 할아버지

빠리에 사는 지인이 내가 할아버지께 보낸 책을 전달해드리고 사진을 찍어 보내주었다

어느덧 아흔이 넘으셨고 몸은 쇠약해보이지만,

사진속 할아버지의 눈빛은 내가 기억하는 그 눈빛과 크게 다르지 않다

벌써 15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나를 잘 기억하신다니 황송하기만 하다.

주말 사무실에 잠시 들렀다가 근처 광화문광장을 가보았다

세종문화회관 앞 국악공연의 무대 뒤에서 살짝....

[최보식이 만난 사람] "쓰고 있던 '바라카바(얼굴을 가리는 방한용 복면)'를 뒤집어 숨진 그녀의 얼굴에 씌웠다"

故 고미영의 '등반 파트너' 김재수 대장
연인이 아니더라도 우정을 나눌수 있지 않나 그녀의 열정, 마음에 닿아
여자의 행복 모르고 살아 오로지 운동과 등반훈련 자기와의 싸움만 했다"고미영씨와 10번의 히말라야 원정을 했지만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시샤팡마봉에서 '업고 정상에 데려갈 수는 없지만 만약 미영씨가 고통받고 죽어가고 있을 때면 내가 그 옆에서 같이 죽어줄게'라고 말했다. 그게 내 진심이었다. 우리 관계에서는 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었다."

김재수(48) 대장의 얼굴은 굵고 진하게 타 있었다. 화형(火刑)을 막 당한 것 같았다. 히말라야의 강렬한 광선과 눈(雪), 슬픔으로….

그는 히말라야 14좌를 목표로 했던 고미영씨의 등반 파트너였다. 등반을 위한 파트너 계약은 국내에서는 생소한 개념이다. 그는 히말라야 10개 봉우리를 고미영씨와 같이 등반했다.

―매스컴에는 당신이 고미영씨의 연인으로 소개됐다.

김재수 대장은“고미영씨와 함께 등반할 때 행복했고 우린 연인을 뛰어넘는 애틋한 관계였다”고 말했다./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대체 무얼 알고 싶나.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인데 연인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가. 남녀가 2년6개월을 같이 등반했으니 소문이 안 나면 이상하다. 하지만 지금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 상황에서 이런 걸로 떠들고 있다. 내게도 가족과 형제가 있다. 숨진 고미영씨도 마찬가지다. 그런 입장을 생각해줘야 하지 않는가."

―어쩌다 연인 관계라는 말이 퍼진 것인가?

"고미영씨는 4년 전 연하의 한의사와 결혼 얘기가 있었다. 가족 상견례를 했고 결혼 날짜를 잡는 말까지 나왔다. 그녀는 '등반과 결혼 두 가지에 다 충실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러면서 유럽으로 100일간 등반 여행을 떠났다. 그 사람 생각이 나면 즉시 돌아와 결혼하겠다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등반하는 동안 그 사람 생각이 한 번도 안 났다고 한다. 그녀는 이메일로 이별을 통보했다. 이런 내용을 그녀 다이어리의 첫 장에 적어놨다. 이를 나와 연관지어 모(某)스포츠지에서 '결혼할 사이'라고 보도했다."

―힘들겠지만 이왕 말이 나온 이상 사실 관계는 분명히 하는 게 낫다.

"주변에서 '두 사람이 잘 어울리고 앞으로 잘 됐으면 좋겠다'는 말을 많이 했다. 미영씨는 매력적인 여자였다. 나중에 목표로 한 등반을 끝냈을 때 우리가 어떻게 됐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렇지 않았다. 남녀 감정이 개입되면 등반이 안 된다. 이런 시선 때문에 베이스캠프에서 텐트를 칠 때도 멀찍이 떨어져 쳤다."

―결코 연인이 아니라면 그런 감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연인이 아니더라도 우정을 나눌 수가 있지 않은가. 그녀의 열정이 내 마음에 닿았던 것이다. 미영씨는 여자로서 느껴야 할 행복감은 전혀 모르고 살았던 것 같다. 오로지 운동과 등반 훈련, 자기와의 싸움만 했다. 그게 안타까웠다. '당신은 여자고 여자다워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누굴 만날 때면 말투와 옷차림을 어떻게 하라는 것까지 조언했다. 내가 옷을 사준 적도 있다. 우리는 파트너였다. 어쩌면 연인보다 더 애틋한 관계일 수 있다. 그걸 이해해야 한다."

―둘이 처음 만난 것은 2007년 봄 에베레스트 등반 때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경남 김해원정대를 꾸릴 때 미영씨가 '함께 가게 해달라'며 전화를 걸어왔다. 원정 경비가 부족했던 상황이라 '후배 대원들은 1500만원씩 내지만 당신은 선배 축에 속하니 300만원을 더 내라'고 했다. 출발날 인천공항에서 처음 인사했다. 그녀는 2년 전에 실패했던 에베레스트봉의 정상에 섰다. 하산하면서 전진캠프에서 함께 머물 때 '곧바로 파키스탄의 브로드피크봉을 등반할 작정인데 같이 가달라. 난 고산등반을 아직 모른다'고 부탁했다. '나는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어 더 이상 비울 수 없고 나이도 지났다. 도저히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등반 파트너로 맺어졌나?

"미영씨는 소속회사(코오롱)에 국제전화를 걸어 나를 자신의 등반 매니저로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14좌를 완등할 계획이니 도와달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내 의사는 상관없었다. 당돌하게 느껴졌다. 자기 꿈을 위해 이렇게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한 번만 같이 가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네팔에서 귀국하지 않고 둘이서 파키스탄행 비행기를 탔다. 그때 비행기 안에서 졸던 그녀가 힐끔 내 쪽을 쳐다보면서 '어깨에 기대도 되나'고 묻기에, 난 '안 된다'고 했다. 남녀 둘이서 등반을 갈 경우 세상의 시선을 의식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 같다."

―처음으로 둘이 한 조(組)가 된 브로드피크봉 등반은 어떠했나?

"생각보다 씩씩하게 잘했다. 브로드피크 정상에 올라섰을 때 정말 대견해 그녀의 등을 두드려줬다. 어떻게 표현할까, 밝은 성격의 미영씨와 함께 있을 때 난 정말 행복했다. 그건 틀림없다. 참 많은 얘기를 했다. 어린 시절의 얘기, 이혼의 아픔, 앞으로의 꿈에 대해…. 내게는 못할 얘기가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하필 정상 가는 날에 생리하네' 하는 말까지 했다. 그 등반을 마친 뒤 나는 '이 사람의 꿈을 위해 끝까지 도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회사측과 매니저 계약을 맺었다."

―정확하게 요구받은 등반 파트너의 임무는 무엇이었나?

"함께 등반하면서 여러 상황에서 코치하고, 등반 일정이나 정상 공격 날짜를 결정하는 것이다. 사진과 동영상 촬영도 맡는다. 이런 촬영을 하려면 두 배의 체력이 소모된다."

―고산등반 경험이 있다 해도 히말라야 등반은 당신에게도 어렵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나는 아직 히말라야에서 지친 적이 없다. 1993년 산(山)전문지에서 대한민국에서 히말라야 14좌 완등을 가장 빨리 할 산악인으로 나를 꼽은 적이 있었다. 당시 내가 8000m 봉우리 3개를 올랐을 때 엄홍길씨는 1개였다. 하지만 난 개인 사업체를 갖고 있었고 그때 이미 아이도 있었다. 14좌를 계속 할 만한 여건이 안 됐다."

―고미영씨와 히말라야 10개 봉우리를 함께하는 동안 고씨는 언제 가장 힘들어했나?

"지난여름 다울라기리봉 등반이 가장 힘들었다. 다른 원정대들이 모두 철수한 다음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등반로에 설치돼 있던 고정로프들이 모두 눈에 묻혀 있었다. 로프를 전부 꺼내면서 등반을 했고, 로프가 없는 구간도 많았다. 정상 공격하는 날에는 너무 날씨가 나빠 어느 봉이 정상인지 구분이 안 돼 거의 도달하고도 다시 마지막 캠 프로 철수했다. 하루를 쉬고 같은 길을 다시 올라갔다."

―그때도 등정을 한 뒤 하산에서 문제가 있었나?

"하산하면서 미영씨가 탈진해 잠깐 정신을 잃고 눈 위에 드러누웠다. 나는 이틀쯤 안 먹고 운행해도 별 느낌이 없다. 스포츠클라이밍으로 단련된 미영씨는 근육량이 많아 배가 고프면 갑자기 힘이 쫙 빠지는 스타일이었다. 난 그녀를 위해 항상 여분의 간식을 갖고 다녔다. 그녀에게 사탕을 건네니, '내가 당뇨가 있나. 배만 고프면 힘이 없지' 말했다. 함께 하산하던 세르퍄는 먼저 내려간 뒤였다. 그녀는 '대장님도 먼저 내려갈 거죠?' 웃으며 물었다. '당연히 내려가야지. 그러나 널 혼자 버려두고는 안 내려간다'고 했다."

―작년 여름 K2봉 원정이 더 치명적이었지 않았는가? 그때 함께 등반한 경남연맹 원정대 3명이 눈사태에 휩쓸려 숨졌고, 당신과 고미영씨는 이들보다 불과 몇 시간 빨리 하산해 위기를 모면했다.

"난 고미영씨와 함께 등반하면서 그 원정대의 대장을 맡았다. 8월 1일 밤 나를 비롯해 5명이 정상에 선 뒤 일렬로 하산했다. 8200m의 보틀넥(병목) 지점에서 내가 선두로, 그다음 외국 산악인, 세 번째로 고미영씨가 내려왔다. 그다음 차례부터 못 내려왔다. 1m 간격으로 내려왔는데, 왜 뒤따라 못 내려왔는지 이유를 모른다. 내려와서 보니까 그 지점에 불빛들이 쭉 앉아 있었다. 그렇게 밤을 지새우고, 다음 날 아침 내려오다가 눈사태를 맞은 것이다. 후배 대원 3명을 포함해 총 11명이 숨졌다. 대형사고였다. 공교롭게도 이번 고미영씨 사고처럼 같은 파키스탄이고 여름시즌이었다. 고미영씨 영결식을 마치고 이틀 뒤, 이들의 1주기 추모제가 있었다."

생전의 산악인 고미영.

―K2봉에서 후배를 잃는 참사를 겪고도, 바로 그해 가을 마나슬루봉으로 원정을 갔다. 그런 마음이 들던가?

"어떻게 얘기를 해야 되나. 힘든 얘기인데… 산에 안 가면 비겁한 사람이 된다."

―그게 왜 비겁한 사람이 되는 것인가?

"사람의 할 짓이 아니라고 할지 모르나 거기서 사고 났으면 그걸 뛰어넘어야 한다. 고미영씨의 14좌 완등 계획을 계속 밀고 가야지, 산을 피해버리면 비겁한 것이라 생각했다. 미영씨도 등반을 강행해야 한다는 쪽이었고, 나도 이왕 시작한 이상 가을등반을 하자고 했다."

―여성 산악인끼리의 14좌 완등 레이스에서 고미영씨가 너무 서두른다는 느낌이 없었나?

"매스컴과 주변에서 그 경쟁을 불붙였다. 올해 갑자기 목표 시기가 당겨진 것이다. 경쟁에서 1등과 2등은 천지차다. 여성으로 최초 완등을 하면 개인의 명성으로 스폰서 기업에 환원해줄 수 있는 것이다. 프로는 그런 책임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당신도 그 경쟁에서 결코 질 수 없다는 책임감을 느꼈는가?

"스포츠팀의 감독이라고 생각하면 당연하지 않겠는가. 기왕 시작된 것이면 1등을 만들어야지, 2등을 만들면 왜 매니저가 필요한가. 서두르게 한 책임이 내게도 없다고 할 수 없다. 처음에는 14좌 완등을 한 해 뒤로 미뤘으면 했다. 하지만 올봄 시즌에서 마칼루와 칸첸중가봉을 마치고 나서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올해가 윤달이 있는 달이라 다울라기리봉 등반을 해도 될 것 같은데 생각이 어떤가' 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이미 고소 적응이 다 되어 있어 등반은 열흘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산악계 일각에서는 "고산등반이 스포츠게임처럼 됐다"며 과열경쟁을 비판해왔다. 당신은 어떤 입장인가?

"받아들이는 편이다. 하지만 그런 등반 기회를 누구든 놓치고 싶지 않는 것이다. 산악인의 꿈을 펼치도록 도와주는 기업체를 욕할 수는 없다."

―마지막 낭가파르바트봉 등반에 대해 이야기하자. 7월 10일 오후 7시11분 등정한 뒤 하산 길에서 사고가 났다. 그때 곁에 있지 않았나?

"하산 과정에서 캠프3에서 캠프2로 내려올 때 100~200m 이상 간격이 있었다. 루트가 좁아 내가 먼저 내려오고, 다른 대원, 고미영씨 순이었다. 대략 6500m 지점에서 쳐다본 게 마지막이었다. 곧 내려오겠지 하며 텐트에서 물을 끓이며 기다렸다."

―슬픔이 가장 절실하게 다가온 순간은?

"다음 날 아침 헬기를 불러 추락 추정 주변을 수색했다. 20분 동안 그 주위를 4바퀴 돌게 되어 있었다. 마지막 4회를 돌고 못 찾고 돌아가려는데, 내 눈에 뭔가 걸렸다. '찾았다 돌려라!'며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그때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추락 현장에 도착했을 때 무엇을 보았나?

"도착 직전 난 1초의 희망을 걸었다. 아직 숨진 게 아니라, 제발 몸이 부자연스러워 누워 있기를. 후배들에게 '기다려라'고 한 뒤 내가 먼저 다가갔다. 머리 뒷부분에 핏물이 고여 있었다. 햇볕과 눈에 며칠간 노출된 얼굴은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그 모습을 남들에게 보여주기 싫었다. 내가 쓰고 있던 바라카바(얼굴을 가리는 방한용 복면)를 뒤집어 그녀의 얼굴에 씌웠다.

파키스탄 병원에서는 옷을 갈아입혀야 하는데, 여자선배가 '그 얼굴을 보면 평생 어른거릴 것 같다'며 못하겠다고 했다. 내가 옷을 갈아입혔다. 남자는 안 된다고 했지만, 내가 남편이라고 거짓말했다."

그는 고미영씨가 끝내지 못한 남은 봉우리에 모두 오르겠다고 했다. 25일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봉으로 떠난다고 꼭 써달라고 부탁했다.

학소도에도 어김없이 가을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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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너'가 학소도에 온지도 어느덧 8개월 - 그간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서서히 멋진 세퍼트 성견이 되어가고 있다

토종벌, 너는 내 운명 … 연 3억원 봉 잡은 ‘꿀 아빠’ [중앙일보]

4대째 가업 잇는 청토청꿀 농장 김대립 대표

충북 청원 청토청꿀 농장의 김대립 대표가 벌통을 들어올리자 벌들이 날아오르며 왱왱거렸다. 은근히 겁이 많은 기자가 물었다. “쏘지 않을까요?” 김 대표의 답. “날갯짓 소리를 들어보니 얘들 오늘 기분 좋네요. 쏠일 없어요.” 그 말 그대로였다. 촬영하는 한 시간 동안 사진기자의 옷 속까지 파고든 벌들이 있었지만 한 방도 쏘지 않았다. [청원=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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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가지 않고 벌을 치고 싶어요.”

충북 산골의 양봉 농장 집 아들이던 고교생은 1992년 어느 날 큰맘 먹고 먹고 아버지한테 이렇게 털어놨다. 아버지는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아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할아버지 때부터 3대째 벌을 쳐 온 집안.

“공부를 한다면 뭐든지 뒷바리지해 줄게. 일단 대학 가서 생각해 보자.”

아버지의 간곡한 권유를 아들은 차마 거스르지 못했다. ‘싫어요’의 ‘싫’자가 목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꾹 참았다.

아들은 벌 농장 바로 옆의 시골집을 떠나 읍내에 자취방을 얻었다. 방과 후에 입시학원에 다니기 위해서였다. 일단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지만 머릿속에선 벌이 계속 왱왱거렸다. 고교 학생주임 선생님의 허락을 얻어내 학교 옥상에서 벌 다섯 통을 키우며 관찰했다. 충청전문대(전자공학과)에 진학한 뒤에도 대학 뒷산에서 벌을 치는 게 취미였다. 졸업 후 아들은 다시 아버지 앞에 꿇어앉았다. “그럼 이제 벌을 치겠습니다.” 이번엔 아버지도 반대할 수 없었다. “공부를 했으니 됐다. 하고 싶은 걸 해.”

그로부터 10년 뒤, 아들은 벌 1000통을 키우는 대규모 토종벌 농장의 운영주가 돼 있다. 충북 청원 청토청꿀(www.ctcg.co.kr) 농장의 김대립(35) 대표다. 120통에서 시작해 8배 넘게 키운 것. 일손을 획기적으로 덜어주는 신기술을 개발한 것이 사업을 키우는 원동력이 됐다. 토종벌에 관한 특허가 4건, 실용신안이 3건에 이른다.

그의 e-메일 아이디(ID)는 ‘beespapa’, 그러니까 ‘벌 아빠’다. 벌 농장에서 자라면서 어려서부터 벌에 빠졌다. “게임에 빠져서 PC방에서 날 새는 아이들 많잖아요. 저도 벌과 씨름하면서 밤새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비실비실한’ 벌통을 공부 재료 삼아 아버지한테서 받아 키우며 관찰했다. “벌 치는 이들은 벌통을 신주단지 모시듯 해요. 꿀이 찰 때까지 가만히 두는 거지요. 하지만 저는 어차피 안 될 벌통을 받은 덕분에 벌집을 쪼개어 벌의 습성을 면밀히 관찰할 수 있었어요. 어린 마음에 신기해서 열심히 들여다본 것인데, 그런 것들이 이후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밑거름이 되더군요.”

벌 치는 일에 뛰어들어 처음 도전한 것이 ‘인공 봉분’이었다. 벌 농사의 핵심 중 하나가 봉분, 즉 무리 나누기다. 해마다 5~6월이면 벌통 속에 마릿수가 늘어나고, 새로운 여왕벌이 탄생하면서 벌떼 일부가 벌통을 빠져나와 새 무리를 이룬다. 언제 이렇게 ‘자연 봉분’을 할지 알기 힘들다. 그래서 5~6월이 되면 벌통을 지키고 있다가, 무리 나누기를 하려고 집단 비행을 시작할 때 쫓아가 새 벌통으로 유인해야 한다. 벌통마다 일일이 그렇게 해야 하니 여간 손이 가는 게 아니다. 벌 농장을 키우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것이다. 어려서 관찰한 벌의 습성을 떠올리며 인공 봉분을 하려고 온갖 시도를 해 봤다. 실패를 거듭한 끝에 3년 만에야 방법을 찾아냈다. 2003년 특허까지 받은 이 기술을 동원하면 5분이면 봉분이 끝난다고 한다. 일손을 확 덜게 돼 혼자 벌을 치면서도 농장 규모를 1000통까지 늘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양봉협회에 따르면 토종벌 농장 규모는 대개 100통 이하다.

봉분 시기를 조절하는 것도 가능했다. 봄 꽃이 만발하기 직전에 인공 봉분을 했다. 다른 농장의 벌들은 꽃이 활짝 핀 5~6월에 무리 나누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그가 치는 벌들은 이미 봉분을 마치고 열심히 꿀을 땄다. 생산성이 오를 수밖에 없었다.

서양벌들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한 특수 구조의 벌통이나 켜켜이 색이 다른 ‘무지개 꿀’도 김 대표의 아이디어다. 일반 토종꿀은 1.2㎏ 한 통에 12만원 정도인데, 무지개꿀은 50%가량 비싼 18만원을 받는다. 한때 백화점·대형마트에 납품했으나 이젠 소비자 직거래만 한다. 맛본 고객이나 입소문을 전해들은 이들의 주문 수요만 해도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매출은 연 3억원 안팎. 순익이 얼마인지 정확히 따져본 적은 없단다.

김 대표는 인공봉분 기술 보급에도 열심이다. 지방 농업기술센터에서 강의하고, 농장을 찾은 이들에게 1박2일 실습비로 1만원만 받고 기술을 전수한다. 특허까지 낸 독보적 기술을 왜 남들한테 거저 주는지 궁금했다. “요즘 토종꿀이라는 것 중에는 토종벌에 설탕물을 먹여 만든 것이 많아요. 꽃에서 나온 진정한 토종꿀 업계가 커져야 제 사업도 더 잘되겠다는 생각에 기술을 열심히 전파하고 있어요.” 다만 뭔가 한 가지는 숨겨 둘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무지개꿀 제조 방법은 비밀이란다. 올해도 다음 달 12~20일에 그의 농장에선 ‘토종꿀 축제’가 열린다. 일반인들이 꿀 따기, 밀랍 만들기 같은 체험을 할 기회를 마련했다. 제대로 된 토종꿀이 어떤 것인지에 관한 강연도 할 생각이다.

김 대표는 미혼이다. 혼인을 해 생긴 자녀가 벌꾼의 대를 잇겠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벌 치기 싫다고 해도 이 길로 가라고 강권할 것 같아요. 애써 개발한 기술과 노하우를 제대로 이어가게 하고 싶어요.”

김대립 대표가 개발한 기술

◆서양벌 침입 방지 벌통=입구를 꼬불꼬불한 미로형으로 만들었다. 늘 드나드는 토종벌은 잘 찾아다니지만, 서양벌은 헤맨다. 덕분에 7~8월이면 서양벌의 습격을 받아 토종벌이 죽는 일이 확 줄었다. “사실 벌통 입구에 풀만 우거지게 해도 서양벌이 잘 침입하지 못한다”는 게 김 대표의 귀띔.

◆무지개 꿀=시루에 찐 ‘무지개떡’처럼 층층이 색이 다른 꿀. 원래 벌집에 든 꿀은 이렇다. 시기마다 피는 꽃이 달라 벌들이 따오는 꿀도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벌집이 갈색이라 제각각인 꿀 색깔이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그는 벌들이 우윳빛 벌집을 만들도록 하는 방법을 찾아내 층마다 다른 색이 살아나는 무지개 꿀을 만들었다.

◆자동 여닫이 벌집=기온이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벌이 드나드는 벌통 입구가 자동으로 닫힌다. 겨울에 찬바람이 들어가 벌이 죽는 일을 막는 장치다. 일반 농가에서 통풍·환기를 생각해 벌집 입구를 겨울에도 틔워놓기 때문에 온도가 뚝 떨어질 때 벌떼가 죽는 일이 종종 생긴다.


청원=권혁주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문화재사랑] 인간과 가장 가까운 자연유산글·사진 신남식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교수

 

  • 만남의 시작
     

개는 약 12,000년 전 야생으로부터 인간에 의해 가축화되었으며, 반려동물로서의 역사도 시작을 같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늑대의 후손이라 할 수 있는 개는 인간과 사회적인 구조가 비슷하였고 먹이사슬 안의 경쟁자이며 사냥의 대상이었으나, 인간은 야생개가 먹이를 찾아내는 탁월한 능력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사냥의 파트너로서 존재가치를 두게 된 것이다. 또한 인간이 먹고 남은 음식을 얻기 위해 접근을 시도하였고, 인간과 같이 한 이후로는 친화성을 바탕으로 인간과 친밀한 유대관계가 형성되었고 현대사회에서는 더욱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어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많은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과 함께 전통적으로 자연을 벗 삼고 동물을 좋아하는 우리에게도 세계의 우수견종에 비견되는 고유의 개가 자연유산으로 곁에 있음에 자랑스러움이 있다.


 


진도의 진도개


 

 

천연기념물 제53호인 진도의 진도개는 우리국민으로부터 가장 사랑받고 있는 동물이기도하다. 1938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진도개는 예부터 선조들이 기르던 개의 후손이 육지에서 떨어진 진도에 토착화하면서 순수한 혈통을 그대로 보존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도개의 키는 수컷이 50~55cm, 암컷은 45~50cm이며 머리의 형태는 앞에서 보면 8각형을 나타내고 예리한 3각형의 눈과 강한 턱을 가지고 있다. 모색은 황색이나 백색을 띠며 코는 검은색이나 담홍색을 띤다. 진도개는 성격이 명랑하고 활발하며 후각과 청각이 예민한 편이다. 또한 영리하고 주인과의 친화성도 강하여 가정견으로서 손색이 없다.

특히 살던 곳에서 멀리 다른 곳으로 갔다가도 살던 곳으로 되돌아오는 성질이 뛰어나다. 1993년 진도에서 300km 떨어진 대전으로 분양되었으나 혼자의 힘으로 다시 진도의 살던 곳을 찾아온 “백구”의 실화가 이를 뒷받침한다.

진도개는 2005년에 영국의 켄넬클럽과 세계애견연맹에 정식으로 견종등록이 됨으로써 세계의 공인견이 되었다. 또한 진도군의 진도개 명견화사업은 지난해 지식경제부의 지역연고사업진흥사업에 선정되어 혈통 일원화 시스템 구축 등 많은 추가적인 연구활동을 진행하고 있어 오래지 않아 세계의 명견으로서 자리매김을 할 것으로 보인다. 
 


경산의 삽살개


 

천연기념물 제368호인 경산의 삽살개는 한반도의 동남부지역에 널리 서식하던 우리 민족의 애환이 깃들어 있는 고유의 개다. ‘귀신과 액운을 쫓는 개’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삽살개는 이름도 순수한 우리말로서 가사나 민담,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흔히 있던 삽살개는 일제 말기인 1940년 이후 전쟁에 필요한 가죽 공급 목적으로 많은 수를 죽임에 따라 그 수가 급격히 줄어 멸종위기에 까지 이르렀으나 1969년부터 경북대 교수들에 의해 30여 마리의 삽살개를 수집한 것이 복원작업의 시초였으며 이후 1985년 하지홍 교수에 의해 보존사업이 재개되면서 체계적인 연구와 증식노력으로 그 수는 안정적으로 늘었으며 일반인들에게도 많은 수가 분양되어 사랑을 받고 있으며 독도지킴이로서 명성을 높이고 있다.

삽살개의 키는 수컷이 51cm, 암컷은 49cm이며 온몸이 긴털로 덮여 있고 눈은 털에 가려서 안보일 정도이며, 주둥이는 뭉툭하고 머리가 큰 편이다. 성품은 대담하고 용맹스러우며 주인에 대해서는 충직하다. 1992년 삽살개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면서 사단법인 한국삽살개보존협회가 설립되어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삽살개의 혈통을 보존하며 DNA를 활용한 체계적인 관리와 연구를 진행해오고 있으며, 세계최초로 삽살개를 활용하여 개 미토콘드리아 DNA 전체 염기서열을 밝힌 이후 다양한 연구로 국내외 개 연구를 선도해 나감으로써  삽살개를 세계속에 자랑스런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해 나가고 있다.


 


반려동물로서 진도개, 삽살개를 위하여


 

우리의 진도개와 삽살개는 천연기념물로서 혈통의 보존이라는 명제가 가장 앞에 있지만,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반려동물로서의 역할도 추가되면 더욱 빛을 발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삽살개보존협회에서는 1999년부터 삽살개를 이용하여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치료를 도와주는 활동 즉 동물매개치료(animal assisted therapy)활동을 하고 있으나 좀 더 다양하게 활동영역을 넓혔으면 하는 바람이다.


개는 소유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증진에 도움을 주며, 정서발달에 영향을 준다. 어린이에게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은 사회성과 정서적 발달을 들 수 있다. 어린이들이 보살피는 일들을 나누어 함으로써 책임감을 가질 수 있으며, 일의 결과에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은 자신감의 향상에도 중요하게 작용하게 된다. 또한 말을 못하며 주인에게 의존적인 개와 교류를 하면서 상대방의 감정과 욕구를 이해하려 노력하게 되기 때문에 인간관계에서도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이 향상된다. 가정에서 개의 존재는 가족이 함께 보내는 시간과 대화의 기회를 늘려주어 가정의 행복과 즐거움이 증가된다고 한다.


노인들에게 있어서는 개가 손자, 손녀와 유사한 가족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기에 외로움을 덜 느끼게 하고 스트레스의 완충역할도 해준다. 개와 함께하면 그전보다 많이 걷게 되는데, 이는 노인들의 건강에 필수적인 운동을 가능케 하여 신체적 건강을 증진케 한다.


현대인의 정신적, 신체적인 요소들이 다양한 만성적인 스트레스에 관련되어 있다고 하며 근래에 들어서는 거의 모든 질환들이 심리적 요소와 결부되어 인간의 건강을 위협하고 주된 사망원인이 된다고 한다. 긴장을 풀거나 기분 좋은 생각을 하거나 가벼운 운동 등은 스트레스를 완충시키는 방법인데. 개의 소유가 이와 비슷한 기전으로 스트레스 해소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개가 우리 인간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이외에도 많이 있다. 장애인에게는 일정한 역할을 대신해주어 궁극적으로 독립적인 삶을 증진시키는 도우미견도 있다. 시각장애인의 안전한 보행을 돕는 맹인안내견, 듣지 못하는 장애인의 소리인지를 대신하여 생활을 돕는 청각도우미견, 휠체어에 의지하는 척추장애자의 생활을 도화주는 서비스견이 대표적이다.


또한 고도로 발달된 개의 후각능력을 이용하여 사회에 공헌하는 개들도 있다. 산악조난, 눈사태, 지진이나 건물붕괴 등으로 실종된 사람의 위치를 찾도록 특수하게 훈련된 개가 인명구조견이다. 해외에서 들어오는 불법농산물이나 식품을 가려내는 검역탐지견이 있다. 최근에는 간질환자의 발작을 냄새로 미리 탐지해 주인에게 알려주고, 암환자를 조기에 발견하는 개를 연구하고 있으며 일부 활동 중에 있다.


이러한 연구와 활동이 진도개와 삽사리를 통해 이루어진다면 그 우수성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자리도 될 것이다.


대개의 견종들은 교잡에 의해 육종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우리의 진도개와 삽살개는 오래전부터 우리의 노력으로 품종의 특성을 유지해오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개인의 희생과 지역주민, 관계기관의 노력이 이루어낸 자랑스런 문화유산이다. 외모도 수려하다. 이제 우리의 진도개, 삽살개도 좀 더 사회성을 높이고 잠재능력을 더욱 개발하여 인간의 삶의 질 향상에 활동영역을 넓혀, 세계인의 사랑을 받으며 반려동물로서의 가치를 높이는 기회를 함께 가졌으면 한다.

입력 : 2009.08.21 10:01 / 수정 : 2009.08.21 10:04

검찰 `인종차별적 발언도 모욕`…첫 기소 [연합]

2009.09.06 05:40 입력

인권단체 `인종차별과 인권 이해 높이는 계기`
국내에서 외국인에게 인종차별적 발언을 한 남성이 기소되는 첫 사례가 나왔다.

체류 외국인과 다문화 가정이 급증하는 상황에서 이뤄진 이번 기소는 순혈주의에 기반을 둔 뿌리깊은 우리나라의 인종차별적 문화를 반성하고 외국인에게 관대한 사회적 인식을 형성하는 계기가 될지 주목된다.

6일 법무법인 공감과 성공회대에 따르면 인천지방검찰청 부천지청 형사2부는 지난달 31일 형법상 모욕 혐의로 박모(31)씨를 약식기소했다.

박씨는 7월 10일 오후 9시께 버스에 함께 타고 있던 인도인 보노짓 후세인(28) 성공회대 연구교수에게 "더럽다", "냄새난다"는 등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모욕감을 준 혐의를 받고 있다.

당시 술에 취한 상태였던 박씨도 후세인씨에게서 모욕적인 말을 들었다고 주장하며 맞고소했으나 조사 과정에서 이를 취하했다.

일부 선진국과 달리 우리나라에는 인종차별적 발언이나 행위를 규제하는 법규가 없어 박씨는 일반 형법으로 처벌됐다.

김주선 부천지청 차장검사는 "국내 법은 이런 상황에 대해 내국인과 외국인의 차별을 두고 있지 않다"며 "'법 앞의 평등' 정신에 따라 공정하게 처리했으며 한국인이든 외국인이든 마찬가지로 다룬다"고 설명했다.

피해자측 법률 지원을 담당한 공익변호사 모임 '공감' 관계자는 "법원의 판단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검찰이 인종적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차별적 발언을 형사처벌 대상으로 간주한 사례는 한국 사법 사상 이번이 처음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 인종주의를 묵인해온 사회적 인식을 환기하고 본격적으로 문제제기를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후세인씨는 지난달 19일에는 이번 사건을 조사한 부천 중부경찰서와 산하 계남지구대 소속 경찰관들과 박씨의 인종차별적 태도를 바로잡아달라며 국가인권위에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이번 사건을 우리 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린 인종차별 문제를 공론화하고 자성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인권운동계와 법조계에서 나오고 있다.

특히 국내 체류 외국인이 110만명을 넘고 2050년에는 국내 거주자 10명 가운데 1명이 귀화자나 외국인일 것으로 예상돼 인종차별 문제를 내버려두면 한국 사회를 짓누르는 불안요소가 되리라는 우려도 나온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 때문에 차별을 받는다는 점에서 인종차별은 고약한 반인도적 범죄다. 비록 약식기소이지만 인종차별과 인권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본다"라고 말했다.

그는 유럽계 백인과 유색인종 외국인을 차별하는 부끄러운 관행과 문화를 돌아봐야 한다며 "인종 문제는 차후 우리 사회의 '시한폭탄'이 될 가능성이 큰 만큼 지금부터라도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공감의 한 변호사는 "외국인의 임의적인 구금을 허락하는 인신보호법처럼 우리 법제도 곳곳에 숨어 있는 인종차별적 요소를 찾아 없애는 노력이 시급하다"라고 지적했다. (연합뉴스)

"오바마가 짝퉁 휴대폰 모델?"… 진짜 겁없는 중국업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허락없이 광고 모델로 등장시킨 대담한 중국 휴대전화 업체가 등장했다.

이 업체는 오바마 대통령의 애용품인 휴대전화 ‘블랙베리’를 베낀 ‘블록베리’ 광고에 그를 등장시켰다. 국내외 네티즌들 사이에선 ‘중국이 짝퉁 천국인 줄은 알지만, 해도해도 너무한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짝퉁 제조업체를 뜻하는 중국의 한 산자이(山寨) 업체는 최근 미국의 유명 휴대전화인 ‘블랙베리’를 베낀 ‘블록베리’ 광고에 남색 정장에 파란색 타이 차림의 오바마 대통령을 모델로 등장시켰다.

지난달 말에서 이달 초 처음 선보인 것으로 추정되는 이 광고는 오바마 대통령이 블랙베리 매니아라는 사실을 감안한 듯, “오바마는 블랙베리, 나는 블록베리‘라는 문구까지 버젓이 노출시키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편리한 이메일 전송 기능 때문에 취임 당시 기밀이 유출될 수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블랙베리 사용을 관철시킬 정도로 블랙베리에 대해 유달리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블록베리의 사양은 블랙베리와 조금 다르다. 광고에 따르면, 키패드가 있는 블랙베리와 달리 블록베리는 터치스크린 입력 방식을 채택했다.

이 광고를 본 한 국내 네티즌은 “비슷한 인물도 아닌, 게다가 짝퉁 제품에, 오바마 대통령을 동의없이 모델로 쓰는 중국이 정말 대단하다”는 반응을 올렸다.

- 인왕산 鶴학巢소島도에서 최범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