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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년에 다시 월드컵이다!

2010 남아공 월드컵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내년은 바쁜 아니 바빠야할 한해가 될 것같다

우리 회사에서 국내 독점 취급하는 2010 FIFA 남아공 월드컵 공식 사커테이블

관련 사이트: http://www.FIFAworldcu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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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팀에 반한 영국인들, 축구화·양말까지 벗겨 갔지요

1966년 월드컵 8강의 추억, 평양엔 없고 서울에 있는 까닭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영국인 영화감독 대니얼 고든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8강에 오른 북한 대표팀의 경기를 비디오로 본 뒤 북한 축구에 반했다. 그는 북한 축구를 소재로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고 싶어 오랜 기간 북한과 접촉했다. 드디어 2001년 고든은 촬영 카메라를 갖고 북한에 들어갈 수 있었다.

고든은 당시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해줄 수 있는 소품이 필요했다. 그래서 월드컵에 출전했던 선수들의 집을 샅샅이 뒤져 유니폼·트레이닝복·축구화 등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뒤져 봐도 스타킹 한 짝 나오지 않았다.

“우리 선수들에게 반한 영국 사람들이 애들부터 노인까지 찾아와 유니폼·축구화·양말까지 완전히 깝데기를 벗겨 갔지요.” 골키퍼로 뛰었던 이찬명 선수의 설명이다.
더 안타까운 뒷얘기도 있다. 유니폼을 뺏기거나 선물로 주지 않은 선수들도 귀국한 뒤에 그걸 내복 삼아 입다가 해지게 되면 아무 생각 없이 버렸다는 것이다. 하기야 당시에 그 유니폼이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

16강 결승골 주인공, 박두익의 가슴 패치도
2007년 4월 3일. 경기도 수원 캐슬호텔에 북한 청소년(17세 이하) 축구 대표팀이 묵고 있었다. 선수단 단장으로 온 이찬명씨를 축구자료 수집가 이재형(47)씨가 찾아갔다. 그러고는 2006년 2월 영국 런던의 포토벨로 마켓(유명한 골동품 거리)에서 산 잉글랜드 월드컵 당시 북한 대표팀 유니폼을 보여줬다. 이씨는 이 유니폼을 2000파운드(당시 약 360만원)를 주고 샀지만 진품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다.

“맞습네다. 틀림없이 그때 우리가 입고 뛴 유니폼입네다. 북쪽에도 없는 걸 남쪽에서 볼 줄이야….” 이 단장은 감격한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이 유니폼이 등번호 10번 강용운이 입었던 거라는 확인도 해 주었다. 서명을 부탁하자 이 단장은 ‘조국통일! 리찬명. 2007.4.3’이라고 써 준 다음 “(희귀품이라서) 돈 되겠네요. 잘 보관하시오”라고 농담도 했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 남북한이 동반 진출하면서 북한 축구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북한은 1966년 잉글랜드월드컵 이후 44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얼굴을 내밀었다.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도깨비 팀’ 북한은 세계 최강 이탈리아를 꺾고 8강에 올라 세상을 놀라게 했다. 8강에서 포르투갈에 3-0으로 이기고 있으면서도 ‘공격 또 공격’을 부르짖다가 에우제비우에게 4골을 내주고 3-5로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그들의 무서운 집중력과 목표를 향한 직선의 돌진에 전 세계 축구팬은 환호했다.

44년 만에 다시 월드컵 무대에 나선 북한은 예선 G조에서 포르투갈과 운명의 재회를 하게 됐다. 월드컵 최다 우승팀 브라질, 아프리카 최강으로 꼽히는 코트디부아르도 같은 조다. ‘죽음의 조’에 속한 북한의 성적이 궁금한 만큼 그들의 과거에도 관심이 집중된다.

이재형씨는 북한에도 없는 북한 축구 관련 희귀 자료 5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그는 “언젠가는 남북한이 동시에 월드컵에 출전할 날이 올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북한 관련 자료를 하나하나 모으기 시작했다. 그게 이렇게 일찍 빛을 보게 될 줄 몰랐다”고 말했다. 그는 월드컵 개막 D-100에 맞춰 남아공의 월드컵 개최 도시에서 ‘월드컵 동반진출 기념 남북한 축구자료 전시회’를 열 계획을 갖고 있다.

쇠가죽 축구화, 당시론 수준급
이씨가 사는 서울 성북구 보문동의 아파트. 방 세 칸 중 두 칸에는 전 세계에서 모은 1만여 점의 축구 자료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하나하나가 세월의 더께를 이고 잠들어 있는 보물들이다. 북한 관련 자료를 더 살펴보자.

우선 눈길을 끄는 게 잉글랜드 월드컵 당시 북한과 포르투갈의 8강전 입장권이다. 리버풀의 구디슨 파크(GOODISON PARK LIVERPOOL)라는 장소와 7월 23일 토요일(SATURDAY JULY 23) 날짜가 선명하다. 재미있는 것은 대회 명칭이 ‘월드컵(World Cup)’이 아니라 ‘줄 리메컵(Jules Rimet Cup)’으로 적혀 있는 것이다. 당시는 우승컵의 이름인 ‘줄 리메컵’과 ‘월드컵’이 대회 이름으로 혼용됐음을 알 수 있다. 줄 리메컵은 1970년 브라질이 월드컵 3회 우승을 차지하면서 영구 보유하게 됐고, 현재 우승컵은 피파컵(FIFA Cup)이다.

이탈리아전 결승골의 주인공 박두익이 8강 진출 축하 만찬에서 착용했던 패치도 있다. 영국의 수집가로부터 이 패치를 구입한 이씨는 박두익의 친필 서명이 있는 이 기념물이 왜 영국에 있는지 궁금했다. 그 수집가는 “기념만찬이 끝난 뒤 박두익 선수가 이 패치에 사인을 해서 평소 알고 지내던 영국의 축구 관계자에게 선물로 줬는데 그게 돌고 돌아 나한테까지 왔다”고 설명했다. 박두익은 왜 이 귀한 기념 패치를 남에게 줬을까. ‘N. KOREA’라고 쓰인 국가 명칭에 답이 있다.

당시 북한은 노스 코리아(N. KOREA)라는 명칭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 자신들의 국제적인 위상을 격하시키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팀이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자신들을 ‘N. KOREA’가 아닌 ‘DPRK’로 표기해 달라고 언론에 요청했다. 선수단 버스에 붙은 표기에서 ‘N.’을 지우고 다닐 정도였다. 그런데 영국 정부가 패치를 제작하면서 N. KOREA라고 명기해 버렸다. 박두익이 이 패치를 북한으로 가져갈 수 없었던 건 당연했다.

북한 선수들이 신던 쇠가죽 축구화도 눈길을 끈다. ‘뽕’이라고 불리는 밑창의 스터드가 6개인데 모두 쇠로 만들었다. 발바닥 위쪽 스터드 사이에 가죽 조각을 덧댄 게 보인다. 원로 축구인들은 “저건 북한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디자인”이라며 당시는 북한의 축구화 제조 기술이 남쪽보다 앞섰다고 증언한다. 실제로 북한은 1930년대에 평양의 ‘서선(西鮮)양화점’에서 축구화를 만들기 시작했고, 남한은 해방 후 북쪽에서 내려온 서선양화점 점원 출신 노종영(1997년 작고)씨가 서울에 ‘서경(西京) 체육사’를 차려 축구화를 처음 만들었다.

이재형씨가 자신이 수집한 각종 기념품과 축구공 앞에서 활짝 웃고 있다. 최정동 기자

남한도 축구 사료 무관심하긴 마찬가지
이씨는 “언젠가 통일이 되면 우리가 남북한으로 나뉘어 서로 경쟁하던 시절이 아련한 역사가 될 것이다. 그때의 기록과 자료를 남겨놓는 것이 우리 역사를 이어가는 소중한 작업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고 북한 축구 자료를 수집하게 된 이유를 밝혔다.
북한 관련 용품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극적인 순간도 많았다.

그는 2002년 9월 서울에서 열린 남북 통일축구 전날, 친분이 있는 조성환(당시 수원 삼성) 선수에게 ‘미션’을 줬다. “경기가 끝나면 꼭 북한 선수와 유니폼을 바꿔 입어라. 그리고 바꾼 유니폼을 경기장 떠나기 전에 나한테 전달해라.”

조성환 선수는 미션을 충실히 수행했다. 유니폼을 손에 넣은 이씨는 다음 날 아침 북한 선수단이 묵고 있는 호텔로 무작정 찾아갔다. 유니폼에 북한 선수단 사인을 받기 위해서였다. 호텔에는 국가 기관의 경호요원들이 겹겹이 지키고 있었다. 이씨는 한 시간 가까이 통사정을 했다. 마침내 경호담당자 한 명이 “축구 자료 전시회를 연 사람이 아니냐. TV에서 본 적이 있다”며 다리를 놓아줘 선수단 전원의 사인을 받을 수 있었다.

이씨는 한때 국정원의 요시찰 대상이었다. 국정원 요원과 몇 차례 만나기도 했다. 이씨는 “나는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사람이 절대 아니다. 다만 북한 축구를 좋아하고, 역사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이 일을 한다”고 말했다. 이후 그 요원이 오히려 이씨를 도와주기도 했다고 한다.

사실 ‘역사 자료에 대한 무관심’은 남북한이 다르지 않다. 북한에 없는 자료를 우리가 갖고 있다고 해서 자랑할 일도 못 된다. 나라가 해야 할 일을 개인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씨는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탈리아와 16강전에서 안정환이 터뜨린 연장 골든골 공,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 홍명보의 마지막 승부차기 공을 모두 갖고 있다. 그가 에콰도르의 바이런 모레노(한국-이탈리아전 주심)와 이집트의 가말 간두르(한국-스페인전 주심)를 직접 찾아가 간곡히 설득한 끝에 겨우 찾아온 것이다. 2002년 월드컵 당시는 흥분과 난리통 속에 공 따위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대회가 끝난 뒤에도 그 공이 어디 있는지, 찾아올 수는 있는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현재는 과거가 되고, 과거는 역사가 된다. 역사에 스토리를 입히면 훌륭한 문화 콘텐트와 상품이 된다. 스토리를 만드는 실마리가 바로 하찮아 보이는 입장권 한 장, 양말 한 짝이다. 이재형씨의 노력 덕분에 우리는 남북한 축구에 관해서 만큼은 끊임없이 이야깃 거리를 끄집어내고 함께 나눌 수 있다.




이재형씨는
어린 시절 축구를 했지만 집안 형편과 부상 때문에 꿈을 접었다. 그 대신 축구 자료 수집에 몰입해 큰 성과를 이뤘다. 갖고 있는 자료는 전부 자비로 구입한 것이다. 월간축구 베스트일레븐 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축구 박물관·도서관·자료실 등을 갖춘 복합 축구 문화공간을 만드는 꿈을 갖고 있다.


정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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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윤봉길 의사 서거 77주년, 최초 공개 사진

 

한 줌 뼈로 해방 조국땅 처음 밟던 날
부산 거리는 태극기·만장으로 뒤덮였다

<이 기사는 주간조선 2085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뿌우, 뿌우.”

1946년 5월 15일 오전 9시 부산항. 일본에서 출발한 맥아더 사령부 소속 군함이 힘찬 고동을 울리며 닻을 내리자 군함에서 한 중년 신사가 하얀 상자를 가슴에 품고 내려왔다. 순간, 수백 명의 시민들이 태극기를 흔들었다. 대한순국열사유골봉환회 서상한(徐相漢) 대표는 가슴에 품은 흰 상자를 힘껏 부둥켜안으며 중얼거렸다. “동지, 기뻐하시오. 그대가 그토록 바라던 해방된 조선 땅이오.” 흰 두루마기에 둥근 안경을 쓴 백범 김구는 숨넘어갈 듯 달려와 “나요, 백범이오. 이제야 돌아오셨구려”라며 눈물을 쏟아냈다.

이날 서상한 대표가 품고 있던 흰 상자에는 윤봉길 의사의 유골이 담겨 있었다. 윤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현 루쉰공원)에서 열린 일본군 전승 기념행사 무대에 폭탄을 던져 일제 군 수뇌부를 섬멸한 독립투사.

당시 윤 의사의 폭탄에 시라카와 일본군 대장과 일본인 거류민단장 가와바다가 사망했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과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 등이 중상을 입었다. 중국의 장제스 총통이 “4억 중국인이 해내지 못한 위대한 일을 한국인 한 사람이 해냈다”고 격찬할 만큼 윤 의사의 의거는 일제 군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것이었다. 윤 의사는 당시 현장에서 체포돼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이후 일본으로 옮겨져 오사카 형무소에 수감돼 있다 1932년 12월 19일 오전 7시27분 일본 이시카와(石川)현 미쓰코우지(三小牛) 공병작업장에서 총살 당했다.

이날 서상한 대표가 일본에서 옮겨온 윤 의사의 유골은 일제가 암매장한 윤 의사의 시신을 어렵게 찾아내 수습한 것이었다. 일제는 윤 의사 총살 당일 “사형집행 후 화장했다”고 공식 발표했지만 “윤봉길이 암매장됐다”는 소문은 끊이질 않았다. 윤 의사와 함께 ‘상하이 의거’를 기획했던 백범 김구 역시 윤 의사 시신 처리에 대한 일제의 발표에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백범은 1945년 11월 환국하자마자 윤봉길 유족들을 만나 “반드시 유해를 찾아오겠다”고 약속했고, 곧장 일본에 있는 애국지사 박열(朴烈), 이강훈(李康勳), 서상한에게 유해 발굴에 힘써줄 것을 요청했다.

이들은 1946년 3월 4일부터 재일동포 청년들과 사형장 근방 공동묘지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이강훈은 당시 유해발굴 작업과 관련, “묘지관리인들이 ‘모르쇠’로 일관해 ‘이 부락의 모든 묘를 파보겠다’고 협박했다”며 “그제야 사형 당시 형무소 간수였던 시게하라(重元)라는 사람이 매장지를 가르쳐줬다”고 증언했다. 시게하라가 가리킨 매장지는 놀랍게도 행인들이 늘 지나는 쓰레기장 근처 평지였다.

재일동포 청년들이 반신반의하며 땅을 파자 윤 의사가 사형 당시 묶여있던 십자가 모형의 나무형틀과 윤 의사의 구두, 목재 관(棺) 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훗날 공개된 일본 육군성의 극비문서 ‘만밀대일기(滿密大日記)’에 의하면 일본군은 윤 의사 사형집행 직후 시신을 사형장에서 남쪽으로 3㎞ 떨어진 가나자와(金澤)시 노다(野田)산 시영공동묘지 북측 통행로에 묻었다. 시신이 묻힌 2m 깊이의 구덩이는 사형 집행 전에 미리 파뒀고, 시신을 봉분(封墳)도 없이 평평하게 묻어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 윤 의사가 수뇌부를 섬멸시킨 데 대한 일제 군부의 치졸한 복수였다.

생전에 그토록 염원했던 해방 조국의 품에 안긴 윤 의사 유골함은 바로 차에 실려 부산 용두산 밑에 있는 동광국민학교(현 부산 영화체험박물관 부지) 빈소에 안치됐다. 윤 의사 유골은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 발굴된 이봉창, 백정기 등 애국지사들의 유골과 함께 도착했는데, 이들의 유골은 동광국민학교 빈소에 한 달간 안치된 후 합동추도식이 열렸다.

1946년 6월 15일, 장맛비가 내리는 가운데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추도식에는 시민과 학생, 만장을 든 각종 사회단체 회원들이 참석해 열기가 대단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비록 정부 수립 이전이지만 일제의 압제에서 막 벗어난 때인 만큼 애국지사에 대한 추모의 열기는 그만큼 순수하고 뜨거웠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윤 의사를 비롯한 애국지사들의 유골은 합동추도식 다음날 오전 임시 특별열차 ‘해방자호’ 편으로 서울로 옮겨져 종로 태고사(현 조계사) 빈소에 안치됐다. 이후 윤 의사는 7월 7일 광복 이후 최초의 국민장이 엄수된 가운데 용산 효창공원 의사묘역에 잠들었다.     

주간조선은 윤봉길 의사 서거 77주년(12월 19일)을 맞아 윤 의사 유족과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로부터 당시 부산 합동추도식과 윤 의사 유품을 담은 미공개 사진들을 입수했다. 부산 합동추도식 장면을 담은 사진은 몇 장이 전해져 왔지만 이번처럼 다채로운 모습이 담긴 미공개 사진들이 한꺼번에 공개된 적은 없다. 이번에 공개된 9장의 흑백 사진에는 윤 의사가 묶였던 십자형틀을 앞세운 추모 행렬과 각종 사회단체의 만장들, 추모행렬을 따라 거리에 도열한 학생과 시민들의 모습 등이 담겨 있다.

당시의 추모 열기와 함께 광복 직후의 사회상까지 엿볼 수 있는 사진들이다. 특히 윤 의사가 사형 집행 때까지 신고 있다가 시신과 함께 묻힌 구두 사진은 윤 의사의 체취가 풍기는 듯해 눈길을 끈다. 이 구두 사진을 제공한 윤 의사 조카인 윤주(62)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지도위원은 “2003년 작고한 이강훈 선생이 생전에 이 사진을 주며 유해 발굴 과정에 대한 증언을 들려줬다”고 말했다.

이번에 공개된 미공개 사진들에 대해 독립운동사 연구가인 윤병석 매헌연구원장은 “윤봉길 의사의 서울 국민장 광경은 많이 알려졌지만 이번에 공개된 부산에서의 추모 행렬과 추도식 장면은 알려지지 않았다”며 “유해 환국 과정이 명확히 정리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도 “윤 의사가 백골이 돼 환국하는 벅찬 광경을 생생하게 복원하고 있다”며 “서울뿐 아니라 부산에서도 이렇게 성대한 추도식이 열려 한마음으로 유족들의 응어리를 보듬어줬다는 것을 보여주는 의미있는 사진들”이라고 말했다. 

십자형틀 앞세우고 추도식장으로
1946년 6월 15일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순국선열 합동 추도식의 추모 행렬. 윤봉길 의사가 사형 당시 묶여있던 십자형틀을 든 남학생과 조화를 든 여학생을 필두로 부산 남녀 중학생 대표 400여명이 선두에 섰다. 십자형틀은 윤 의사 시신과 함께 일본에 암매장돼 있던 것을 찾아내 유골과 함께 갖고 왔다.

합동추도식 가는 길 만장 물결
추도식장으로 향하는 각종 사회단체들의 만장행렬. 윤봉길 의사 유해 발굴을 주도했던 ‘대한순국열사유골봉환회’의 만장이 가장 앞에 보인다. 정부수립 이전이지만 당시 독립을 위해 싸우다 숨진 애국지사들에 대한 추모열기가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등학생들도 거리로
거리에 도열해 있다 추모 행렬이 지나가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초등학생들. 당시 추모 행렬이 지나가는 거리 곳곳에는 학생들과 시민들이 도열해 있었다고 한다. 

 
부산 추도식장에 도착한 백범 김구
백범 김구 선생이 부산 공설운동장 추도식장에 도착해 승용차에서 내리고 있다. 국군 창설 이전이지만 군복을 입은 병사들이 도열해 나름대로 의전 격식을 차리고 있다. 추도식 두 달 전 윤봉길 의사 고향인 충남 예산의 한 행사장에서 “내가 윤봉길 의사를 죽였다”며 통곡했던 백범은 이날 담담히 추도사를 읽었다고 한다. 

 

분향 마치고 나서는 백범 김구
일본에서 봉환된 윤봉길 의사 유골이 한 달간 안치됐던 부산 동광국민학교(현 부산 영화체험박물관 부지) 빈소에서 분향을 마치고 나온 백범 김구. 이 빈소에는 윤 의사의 유골뿐 아니라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 발굴된 이봉창, 백정기 등 여타 애국지사들의 유골도 안치돼 있었다. 

(좌)만장에 둘러싸인 십자형틀
추도식장 연단에 놓인 순국선열 영정과 윤 의사가 묶여있던 십자형틀. 영정은 이봉창 의사의 것만 사진에 찍혀 있다. 왼쪽 하단의 ‘무정부주의자연맹’ 글귀가 적힌 만장이 눈에 띈다. 

(우)분향소 지키고 있는 윤 의사 동생
추도식장의 순국선열 영정 앞에 허리를 굽혀 절을 하는 참배객. 윤봉길 의사의 동생인 윤남의(흰색 양복 입은 사람)가 참배객 뒤에 엄숙한 표정으로 서 있다.

연설하는 김구…  유해 싣고 서울로
순국선열 유해를 싣고 서울로 향하는 임시 특별열차 ‘해방자호’ 앞에서 연설을 하는 백범 김구. 부산역에서 출발하기 전의 모습인지, 중간에 정차한 역에서 잠시 내릴 때의 모습인지 확실하지 않다.
 

시신과 함께 발굴된 윤 의사의 구두 

윤봉길 의사 유해 발굴에 앞장섰던 독립투사 이강훈씨와 그가 공개한 윤 의사 구두. 1946년 3월 6일 일본에서 윤 의사 유해를 발굴한 후 4월 25일 유품을 갖고 먼저 귀국해 찍은 사진이다. 윤 의사 시신과 함께 발굴된 구두는 윤 의사가 의거 당시부터 사형 집행 때까지 신고 있던 것으로, 서울운동장(현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윤봉길의사 거의기념대회’ 때 분실돼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강훈씨 손에 들린 신문은 1932년 12월 19일자 일본 기타쿠니(北國)신문으로 1면에 윤봉길 의사 사형 집행 소식을 담고 있다. 신문 좌측 상단 사진이 수감 당시 윤 의사의 모습이며, 우측 사진은 사형집행 장소를 촬영한 것이다. 2003년 타계한 이강훈씨는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를 폭사시키려다 체포돼 일본에서 12년간 옥살이를 한 인물로, 백범 김구의 요청으로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의사의 유해 발굴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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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개 나이 사람으로 치면 몇살? 동물나이 환산 어떻게 할까

세계 최고령 개로 20살 8개월인 닥스훈트(Dachshund) 종의 오토(Otto)가 기네스북에 올랐다. 1년을 사람의 7년으로 계산하는 '개 나이'로 추산하면 오토는 145세 정도다.

조선닷컴 10월 25일 보도


무슨 근거로 동물 나이를 사람 나이로 환산할까. 동물을 사람 나이로 헤아리려는 시도는 개의 경우가 대다수다. 그럴 듯한 공식을 내놓은 동물학자들도 있다. 개의 1년을 사람의 7년으로 환산하는 계산법도 그 중 하나다.

하지만 이것은 개의 나이가 많아질수록 환산 연령이 대폭 늘어나는 문제가 있다. 예컨대 1939년까지 29년 5개월을 살았다는 호주의 블루이(Bluey)라는 개를 이 계산법에 따라 사람 나이로 환산하면 무려 206살이 된다.


개의 나이에 5를 곱한 뒤 13을 더해 사람 나이로 환산하는 공식도 있다. 1년 이상된 개에 적용되는 계산법인데 동물학자들 사이에선 비교적 정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신남식 서울대 수의과대학 교수는 "1년 된 강아지는 사람으로 따지면 18살인 성년에 해당하며 (5n+13) 공식이 개에게는 거의 들어맞는 편"이라며 "1년 이하 강아지 나이는 생후 3주를 어린아이 첫 돌쯤으로 환산한다"고 말했다. 개 나이 열 살은 63세가 된 사람에 해당하는 셈이다.

개의 1년을 사람의 4년으로 계산하는 공식도 있다. 한국수의공중보건학회에서 펴낸 수의 공중보건학 교과서는 1953년 레보(Lebeau)가 고안한 공식을 소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한 살짜리 개는 사람 15세, 두 살은 24세에 해당한다. 개 나이가 두 살이 넘으면 그때부터는 개의 1년을 사람의 4년으로 본다. 이렇게 개 나이 10년을 사람 나이로 환산하면 56세가 된다.

다른 동물은 어떨까. 토끼 나이의 1.5배를 고양이 나이로 환산하는 식으로 나이를 비교한다. 대한수의학회 관계자는 "개 1년을 고양이 7개월이나 토끼 5개월로 환산하고 개 2년을 고양이 1년이나 토끼 1년 등으로 헤아리는 식"이라고 했다. 다른 동물을 개 나이로 환산한 뒤 사람 나이로 바꾸는 것이다.

사람과 동물의 일생 주기 단계를 비교해 나이를 환산하는 방식도 있다. 예컨대 성장이 멎는 시기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개의 생후 2년을 사람의 20세로 환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새끼를 가질 수 있는 단계인 개의 생후 10달을 임신이 가능한 인간 나이 14세로 환산하는 것도 같은 방식이다.

이 밖에 사람과 동물의 평균 수명을 단순 비교해 나이를 환산해보는 방법도 있다. 예컨대 인간은 80년, 개구리는 10년으로 평균수명을 가정한 뒤 개구리 1년을 사람 나이 8세로 환산하는 식이다. 이런 방식은 해당 동물의 평균 수명만 알면 비교 환산이 쉽지만 정확도는 크게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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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건물은 옥외 광고의 좋은 소재다. 대형 입간판을 올리는 것은 이미 구식이고 건물 자체를 활용해 실제와 같은 느낌을 주는 기발한 광고가 대세다. 나이키가 멕시코의 한 빌딩에 제작한 건물 광고도 눈길을 끈다.
(사진= Toxe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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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칸서 교전중 실종 군견 1년만에 돌아와

[서울신문 나우뉴스]

아프가니스탄에서 교전 중 실종됐다가 1년 만에 되돌아온 군견에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주인공은 호주군 소속 폭발물 탐지견인 ‘사비’(Sabi). 암컷 블랙 라브라도인 사비는 지난 2008년 9월 아프간 오르즈간(Oruzgan) 지방에서 급조폭발물(IED) 탐지 임무 수행 중에 실종됐다.

당시 사비와 군견병 ‘마크 도날슨’(Mark Donaldson)을 포함한 호주군 특수부대와 미군, 아프간 정부군으로 구성된 호송행렬은 매복하고 있던 탈레반 세력의 기습공격을 당했다.

연합군은 2시간에 걸친 치열한 교전 끝에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고 탈레반을 물리쳤지만 호주군 병사 9명이 큰 부상을 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사비의 군견병도 부상을 입었고 그 와중에 사비는 실종됐다.

사실상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사비는 살아있었다. 그것도 같은 지역에서 주인을 기다리며 살아있었다.

돌아온 사비를 처음 발견한 건 존(John)이라고만 알려진 미군 병사로, 호주군 특수부대의 폭발물 탐지견이 실종됐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사비를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사비를 보자마자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평범한 개가 아님을 알아챘다”면서 “개를 데려와 몇 가지 명령을 하자 바로 알아들었다.”고 말했다.

사비는 1년 넘게 황량한 남부아프간 지방에서 살았다.

그동안 호주군 특수부대는 사비의 시신이라도 확인하기 위해 몇 번이나 주변을 수색했던 것으로 알려져 반가움을 더했다.

사비는 바로 오르즈간 지방의 주도(州都)인 ‘타린 코트’(Tarin Kowt)로 호송돼 예전의 부대원들과 만났는데, 그들도 사비를 한 눈에 알아봤다.

한 병사는 사비에게 공을 던져주면서 “이 공놀이는 사비가 훈련받을 때 즐겨하던 것”이라며 “사비가 돌아온 건 놀랍다 못해 기적”이라고 말했다.

군견병이었던 도날슨은 사비의 소식을 듣고 “사비는 잃어버린 마지막 퍼즐 조각”이었다면서 “사비의 귀환은 우리들 기억 속 한 장을 장식할 것”이라고 기쁜 마음을 표했다.

도날슨은 당시 전투에서 부상자를 보호하기 위해 반군의 시선을 자신에게 집중시킨 희생정신을 높이 사 올해 1월, 호주군으로는 최고 영예인 ‘빅토리아 크로스’(Victoria Cross)훈장을 받았다.

한편, 사비는 실종되기 전 이미 두 번이나 아프간에서 임무를 수행해 호주로 돌아갈 예정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는 격리돼 수의검역절차를 밟고 있으며, 검사가 완료되는 대로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사진 = 호주군

서울신문 나우뉴스 최영진 군사전문기자 zerojin2@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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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티 일자리 보고서] [6]"외국인 노동자는 쓰다버리는 일회용"

 외국인 노동자
힘든 일 도맡아 했는데 돌아온건…
저숙련 노동자 65만명… 산업재해 발생률 급증
보상 못받고 쫓겨나기도… 임금체불, 한국인의 3배러시아에서 온 무용수 세폐레바 마리나(23)씨와 동료 3명은 석달째 서울 신도림동의 싸구려 모텔방을 전전하고 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항공료가 없다. 러시아의 리듬체조 대표(상비군)로 활약했던 그녀는 은퇴 후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공연 주선업체의 소개로 지난 4월 한국에 왔다. 경북 통도사 환타지아, 과천 서울랜드, 인천 월미도 등에서 춤을 추고 한달에 110만원을 벌었다. 80만원은 고향의 부모에게 송금하고 30만원으로 버텼다.

하지만 지난 8월부터 월급이 끊겼다. 사업주가 출입국사무소에서 체류 연장 허가를 받아야 하니 미리 석달치 월급을 받았다는 서명을 해달라고 요구했고 그녀는 별 의심 없이 서명을 해준 탓이다. 악덕 업주에게 사기를 당한 셈이다. 소송을 걸려 해도 변호사들은 수임료가 얼마 안 된다는 이유로 기피하고 있다. 임동근 안산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 상담팀장은 "마리나씨처럼 예술흥행 비자로 입국한 여성 노동자 중엔 기지촌 업소로 인신매매되거나 성 노예로 전락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업주로부터 석 달치 임금을 받지 못한 러시아 무용수들이 안산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를 찾아 상담을 받고 있다./김용국 기자 young@chosun.com
국내에 들어와 있는 65만명의 저숙련 외국인 노동자들은 인권단체들 사이에 '일회용 노동자'로 불린다. 쓰임새가 없어지면 가차없이 버려진다는 뜻이다. 임금 체불이 한국인 노동자들에 비해 3배 이상 많고, 산업재해나 부상당하거나 사망하는 경우도 잦다. 노마 강무이코 국제앰네스티 동아시아담당관은 지난 10월 외국인 노동자 인권보고서를 발표하면서 "한국인들이 3D(더럽고 위험하고 힘든) 업무에 주로 종사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한번 사용하고 거리낌 없이 버리고 있다"고 밝혔다.

10월 말 현재 국내 체류 중인 외국인 노동자(조선족 포함)는 69만5157명이다. 전문기술직 3만8900명을 제외한 65만6257명(94%)이 저숙련 생산직 노동자이고, 이 중 미등록(불법) 체류자는 18만1331명이다. 경영자·교수·엔지니어·외국어 강사 등으로 일하는 전문직 노동자는 한국인과 동등하거나 오히려 더 나은 조건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아 차별 시비가 없다.

문제는 영세 제조업이나 농축산업, 연근해 어업 등에 종사하는 비숙련 노동자들이다. 이들의 60~65%는 조선족, 30% 정도는 동남아에서 온 노동자들이다. 한국인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사망하는 경우는 줄어드는 추세지만 외국인 노동자는 반대다. 지난해 업무 중 사망한 외국인은 117명으로 2007년(87명)보다 26%(30명) 늘었다.

외국인 노동자의 산업재해 부상도 1년 사이 32%나 늘어났다. 김해성 지구촌사랑나눔 대표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중장비와 화학물을 다루는 위험한 일을 많이 하면서도 충분한 안전교육이나 장비를 제공받지 못하기 때문에 부상이 많다"고 말했다.

대구의 한 공장에서 외국인 노동자가 마스크를 쓴 채 일을 하고 있다. ‘코리안 드림’을 찾아 한국에 온 외국인 노동자들은 주로 3D(더럽고 위험하고 힘든) 업무에 종사하며 임금체불·산재·구타의 삼중고(三重苦)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서울 가리봉동의 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에는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한 외국인 노동자들의 하소연이 끊이지 않고 있다. 얼마 전엔 경기도의 한 공단에서 근무했던 인도네시아 출신 요다(가명·26)씨가 "선반기계에 손목을 절단당하고, 팔목이 관통되는 부상을 입었지만 보상금도 못 받고 해고당했다"며 도움을 요청해왔다.

대한산업의학회에 따르면 외국인 노동자의 산업재해 발생률(전체 노동자 중 산재 피해를 입은 사람 비율)은 1.06%(2006년)로 한국 노동자(0.77%)보다 훨씬 높다. 부상을 입어도 보험금을 신청하지 않는 미등록 노동자들을 포함하면 그 수치는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

임금 체불이나 임금 차별도 심각하다. 외국인 노동자의 66%, 조선족의 87%는 노동 환경이 열악한 30인 미만 영세업체에서 근무하고 있다. 정당한 노동권이나 보상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이유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외국인 노동자의 임금 수준은 90만~120만원 정도로 최저임금(시급 4000원) 수준에 불과하지만 자국에 비해 3~4배의 임금을 더 벌 수 있기 때문에 부당한 처우를 받으면서도 묵묵히 일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2006년 2월 한국에 온 스리랑카인 모하메드 파룩(28)씨는 그해 3월 충남의 한 바닥타일 제조공장에 취업했다. 그가 맡은 업무는 30~45㎏짜리 타일 재료를 드럼통에 담은 뒤 타일 제조기계에 들이붓는 3D 작업이었다. 한국 노동자들은 다들 기피해 지금은 모하메드씨를 비롯해 10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이 일을 도맡고 있다. 키는 작아도 단단한 체구이던 그는 일하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나자 허리와 다리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4분마다 자신의 몸무게 절반 정도의 드럼통을 들었다 놨다 하니 몸에 무리가 온 것이다.

하지만 그는 1년간 통증을 숨겼다. "혹시 잘리거나 월급이 깎일까 봐 그냥 파스를 붙이고 참고 일했어요."

하지만 통증이 악화돼 지금은 더 이상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졌다.

일을 그만둔 파룩씨는 정부에 산재 신청을 냈다. 평생 힘든 육체노동은 할 수 없는 몸이 된 그는 산재보상금이 나오는 대로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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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en Acres Is the Place to Be

The Recession Is Inspiring More Young Families and Singles to Head Back to the Country

In June, 40-year-old Shane Dawley and his 36-year-old wife, Rhonda, uprooted themselves and their four boys from their suburban Atlanta rental home and bought an old five-acre farmhouse in Ogdensburg, Wisc. Their goal: Flee the rat race and adopt a more self-reliant lifestyle amid the troubled economy.

Rhonda Dawley

Shane Dawley and his four sons, who moved from the Atlanta area earlier this year, dig for potatoes on their farm in Ogdensburg, Wisc.

While Mr. Dawley, who had worked at a parking garage, hasn't found a full-time job yet, he's been working on nearby farms learning new skills (one person paid him with an old John Deere tractor), and his family is raising chickens while learning to garden and hunt.

"Our generation has never seen anything like this," says Mr. Dawley of the economic downturn. "Fear sometimes is a good thing and will push you to do things you ordinarily wouldn't."

While urban and suburban real estate is still generally under pressure, the rural market is holding up better in many areas, thanks in part to buyers such as the Dawleys. Sometimes dubbed "ruralpolitans," these city and town dwellers are looking at land as their new safe investment, one they hope could prove more stable than their jobs and 401(k)s—and provide a better lifestyle.

Motivations can vary, but typically there are three groups: young people buying land as an asset or investment, with vague hopes to live on it someday; exurban commuters who have jobs in big towns or cities but want to escape the sprawl; and back-to-the-land types who want to dabble in hobby farming. While the 76 million-strong baby boomers eyeing retirement represent the largest ruralpolitan segment, they're being joined by a growing contingent of 20-to-early-40-somethings freshly imprinted by this recession's pain.

A 'Ruralpolitan' Puts a Utility Truck to the Test

3:38

Transplants to the countryside can accumulate an arsenal of heavy duty tools such as chain saws and leaf blowers. WSJ's Wendy Bounds puts her country chops to the test with an off-road utility vehicle.

Kathryn O'Shea-Evans, a 25-year-old freelance writer, moved from Portland, Ore., to New York on Dec. 31, 2006. When the economy began floundering, she was frugal—living in a $650-a-month boarding-house room, buying clothing in resale shops, and socking away part of each paycheck.

Then, this past August, she flew to Montana to look at a place to invest those savings: a $12,000, 12-acre parcel of land.

"From the minute I landed in New York City, every job I've had I've been worried will end any moment," says Ms. O'Shea-Evans, who is now working on a "permalance" basis as an editorial assistant at Travel + Leisure magazine. She passed on the 12 acres but is continuing her rural-property search. "It's totally worth it to put every extra dime into buying something that I will know is there," she says. She is now looking for something with a house on it.

At United Country Real Estate Inc., one of the country's largest real estate groups dedicated to rural properties, the average residential sale price climbed 7% last year from 2006 levels, before the recession began. This year, says the firm, based in Kansas City, Mo., prices are expected to be up 2% from 2006. That's compared to an expected 22% median price decline nationally in existing single-family homes in 2009 from 2006 levels, as tracked by the National Association of Realtors——a drop exacerbated by the number of distressed homes sold at discount.

Shane Dawley

Shane Dawley's son James, 9, strolls among the crops.

United broker Inez Freeman Pahlmann in West Plains, Mo., cites "a big, big trend toward the younger generation moving back to the rural" areas to be more self-sufficient, even if they earn a lower salary. Likewise, Ms. O'Shea-Evans's United Country agent, Tom VanHoose in Great Falls, Mont., says young clients in their late 20s and 30s have jumped from just a handful a few years ago to 15% of his business.

"Most of these kids say they've just saved and want to put their money someplace that won't go away," Mr. VanHoose says. "They see General Motors go down and AIG go down and they are asking, 'Gee, can my company go down?' There's a lot of angst and anxiety."

At Mossy Oak Properties Inc., a West Point, Miss.-based real estate franchise specializing in rural properties, royalties from sales rose almost 10% in the first three quarters of 2009 from a year earlier. Higher commodity prices in recent years have helped boost rural land values in some farming regions, says Lannie Wallace, Mossy Oak's executive vice president, who believes younger clients view farm and timberland as a long-term investment. "They've seen their parents' stock investments lose 30% to 40% and think: 'If I buy this piece of property and all else fails, I've still got this piece of property.' "

Certainly the country life isn't for everyone, and the grass can stop seeming quite so green when you actually get there. Surprises such as backed-up septic systems, murky well water, voracious weeds and assorted vermin add their own pressures.

Mr. Dawley's family wanted to raise chickens for eggs, but when they bought the generic "assortment" mix at the local cooperative, they ended up with more roosters than hens. He and his nine-year-old, James, decided to try killing one—"My wife didn't want anything to do with that," he says—and cooking it.

Elizabeth O'Shea-Betker

New York freelance writer Kathryn O'Shea-Evans is property-hunting out West.

It turns out that roosters can be tough. "We took one bite and it was like, 'We can't eat this thing,' " says Mr. Dawley. Their garden ambitions fizzled after the soil turned out to be acidic (they didn't test it first) and half the crops died. "That will all be different next year," he says.

Similarly, when Kent Wiles, 48, and his wife, Lynn, 50, and daughter, Zia, 11, first moved from Portland, Ore., to rural Clatskanie, they were eager to buy horses but didn't do enough homework. The first season, the horse destroyed the fields by overgrazing and punching holes in the pasture, until Mr. Wiles learned he needed to fence off sections and rotate the animals. And then there was the manure: "Horses are just massive pooping tubes with four legs," he says.

He heaped the waste into smelly piles that attracted flies, before deciding to build bins. "I was out there in the winter in the dark with the headlights of the truck going, freezing my hands off building these bins," he says. "And I'm realizing, 'Hmmm, this isn't how I pictured it.' "

History shows economic downturns or disasters such as the Sept. 11 terrorist attacks frequently trigger a short-lived appetite for escape, and that those approaching retirement often crave more-remote properties. If baby boomers follow typical migration patterns, the rural population age 55-85 will increase by 30% between 2010 and 2020, according to the U.S. Department of Agriculture's Economic Research Service.

Becky White

Kent, Lynn and daughter Zia Wiles moved to rural Clatskanie, Ore.

But other factors, such as widespread Internet access, are giving this current ruralpolitan trend new longevity, particularly among younger generations. Enhanced renewable-energy options and associated tax credits mean homes can be more affordably powered by the sun or wind in areas where utility companies won't service cheaply.

Younger buyers, such as Jesse Ptacek, 27, have time to reap payback from such investments. For the past few years, Mr. Ptacek has watched the U.S. economy flounder from Kuwait, where he's a firefighter for a U.S. Department of Defense contractor. Knowing he will likely face bleak job prospects upon his return home in January, he recently bought 62 acres of land in Montana.

His new spread, for which he paid $225,000, includes a 2,100-square-foot, three-bedroom log home situated well off the grid. Its main heat source is a wood stove, there's bear, moose and pheasant hunting nearby, and Mr. Ptacek is erecting solar panels for electricity. He expects to commute up to 60 miles for work, likely in Great Falls or Helena.

"I've done the stock-market thing, and I lost money like everyone else," says the unmarried Mr. Ptacek, whose grew up in Rochester, Minn., population 100,845. "And I started to think about things, what's real, what's not real."

Lynn Wiles

Zia Wiles

Interest in small-scale hobby farming has also bloomed, particularly among the young. When environmental-news Web site Mother Nature Network ran a piece called "40 Farmers Under 40" this year, it garnered nearly 100,000 hits, one of its most popular features since the site's launch. Visitors to the Web site of Living the Country Life magazine increasingly seek info on wood stoves, solar panels and windmills.

"It's a little like the pioneer spirit," says Betsy Freese, the magazine's editor. "They still want high-speed Internet but want to feel like they are doing something else for their families."

Before his family moved to rural Clatskanie, Ore., Mr. Wiles says he was a classic "urban liberal" dweller, frequenting microbreweries, coffee shops and bookstores. Now his family lives on five acres where, in addition to horses, they also own goats and turkeys, among other animals.

He and his wife run an employment-services company for people with disabilities. One travels 60 miles to Portland several times a week for business; otherwise, they work from home. Mr. Wiles has learned to operate a compact tractor and built a horse shed, and he has acquired several guns. "Look, we're not survivalists and storing powdered milk or anything like that, but if the s—- hits the fan, I can grow all the food I want and take care of my family," he says. "It's liberating."

Jesse Ptacek

Firefighter Jesse Ptacek's off-the-grid spread in Montana.

That pioneer spirit is also felt by manufacturers of compact tractors and small work-utility vehicles, such as the John Deere Gator. "What we are seeing in this [ruralpolitan] customer segment is growth," says Dan Paschke, product marketing manager for utility tractors at Deere & Co.'s agriculture and turf division. The biggest demographic growth segment for James River Equipment, an Asheboro, N.C., John Deere dealer, is someone who commutes to a metro market 30 to 45 minutes away. "They are buying small, easy-to-use equipment and don't have a lot of experience," says Clyde Phillips, a partner.

Manufacturers also are tweaking seats and designs to suit this new generation of first-time users, including females. "We took a lot of women out on tests to make sure the vehicles are still badass for guys but comfortable enough for a woman to drive every day," says Aaron Hanlon, product manager for Cub Cadet Utility Vehicles, a brand of MTD Products Inc. Polaris Industries Inc., known for its powerful off-road utility vehicles, this month is rolling out its first low-maintenance, eco-model: an all battery-powered ride called the Ranger EV.

For some people, the break to rural living is a hedge against an unpredictable future. Brandon Peak is a 36-year-old technician at Intel Corp. who works nights on the factory floor in Phoenix and rarely sees his wife and three children during the week. Mr. Peak's company laid off workers this year, and he's received no raise. So when his parents called recently to say they'd purchased 80 acres in Missouri, and asked if he and his family would join them to start a dairy farm, their son jumped at the chance. They're scheduled to move in March.

"I can't tell you how many people at work say, 'Man, I'd like to do that,' " Mr. Peak says. "Everybody is looking for the next opportunity for hope."

Write to Gwendolyn Bounds at wendy.bounds@wsj.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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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소도 산 오가피 열매 - 금년엔 유난히 풍년!

학소도 오가피酒를 마셔보지 않았으면 술을 논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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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가난’과 거리가 먼 3040 고학력자

고학력자나 전문직 종사자, 대기업 출신 귀농자들이 많아졌다. IMF 이후 부쩍 늘었던 생계형 귀농과 2000년대 유행한 은퇴 귀농자의 전원생활 바람이 잠잠해진 반면, 3040세대 젊은 엘리트들의 귀농이 부쩍 늘었다. 농림수산식품부의 자료에 의하면 최근 수년간 50대 귀농 인구가 18.9%, 60대 이상은 9.8%를 기록한 반면, 40대는 28.3%, 30대는 무려 36.4%에 달했다. 지난 4월 정부가 ‘귀농귀촌종합대책’을 발표한 후 이런 경향은 더욱 두드러졌다.

 

조직적 귀농 준비와 시골살이

인터넷으로 정보를 공유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예 도시 출신 엘리트들이 모여 사는 케이스도 많아졌다. 전북 장수의 ‘하늘소마을 ’과 경북 봉화의 ‘비나리마을 ’, 전북 진안의 ‘새울터마을 ’은 고학력 귀농자들이 많이 모여 사는 대표적인 귀농 공동체다. 이들은 귀농 준비 단계부터 정보를 공유하고, 지자체의 지원을 받아 시골살이에 더 쉽게 적응한다. 최근 지자체들이 관내 인구 증가를 목표로 적극적인 귀농 지원 정책을 펴면서 생긴 새로운 추세다.

 

농촌에 살면서 재능을 기부한다

고학력 귀농자들은 다양한 생활 패턴을 갖고 있다. 물론 농사도 짓지만 땅만 일구며 사는 건 아니다. 지자체에서 귀농자들을 사회복지사나 촉탁 교사, 마을 간사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고, 사회생활 경험이 풍부하니 한 명은 농사를 짓고 한 명은 부업하는 새로운 형태의 맞벌이(?)도 등장한다. 농촌 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어 마을에 보급하거나 폐교를 개조해 미술관으로 만드는 등 마을 발전에 힘쓰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농사짓고 싶어서 ‘귀농’한 것이 아니라 시골에 살기 위해 ‘귀촌’했다”고 말한다.

 

귀농지는 연고보다 실리가 우선

1세대 귀농자들은 주로 고향 근처 마을을 물색해 터전을 잡았지만 요즘은 연고보다 편의성과 실리가 우선이다. 지자체별로 귀농지원센터를 찾아 정보를 수집하는 건 기본이고, 농사를 지으면서도 부가 가치를 생산할 틈새시장이 없는지 관찰한다. 자연과 어울려 사는 생태형 귀농이 1세대 귀농의 99%를 차지했다면, 엘리트 귀농자들은 그 전형적인 패턴 위에 ‘플러스 알파’를 창조한 사람들이다.

 

초보 농부로 변신한 14년 차 호텔리어

전라북도 장수에는 귀농 가족 12가구가 모여 사는 ‘하늘소마을’이 있다. 이곳은 7년 전 장수군청에서 주도적으로 만든 전국 최초의 귀농자 마을이다. 집이 딱 12채뿐이어서 한 가구가 떠나야 새로운 귀농 가족이 터를 잡을 수 있다. 지난 4월 이곳에 정착한 초보 농부 김성래(42)씨는 서울의 한 호텔에서 식음료 부문 책임자로 일하다 외식업체 점장을 지낸 호텔리어 출신이다. 사람 발길이 드문 아주 깊은 시골에서 살고 싶어 여기저기 알아봤지만,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해 이곳을 택했다. 지자체를 통해 땅과 농기구 등 필수 인프라를 지원받을 수 있어 경제적으로 유리하고 적응도 쉽기 때문이었다.

 

하늘소마을의 ‘본업’은 유기농 농산물 직거래다. 귀농 공동체지만, 공동 생산이 아니라 철저히 자기 땅에서 각자 재배하고 스스로 판매한다. 군에서 지원한 땅을 가구별로 똑같이 나눴을 뿐 활용법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 도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생태 체험 프로그램 등 마을 단위 공동 프로그램도 가끔 운용하지만 본업인 농사짓기는 모두 ‘각자 알아서’해야 한다. 전통적인 시골의 어울림과는 좀 다른 스타일의 공동체다.

김성래씨는 비닐하우스 2동에 25종의 작물을 심어 인터넷으로 판다. 1년 동안 한두 작물을 많이 짓는 것보다 조금씩 자주 생산하는 게 훨씬 경제적이라고 판단해 철저하게 다품종 소량 생산으로 밀어붙였다. 여기에 외식업계에서 일하던 인맥과 노하우를 살려 판로를 개척하고 인터넷과 신문 광고를 통해 부지런히 홍보하니 7개월 만에 제법 그럴듯한 개인 사업자가 됐다. 환경에 관심이 많은 아내의 에코 블로그도 자연스레 유기농 직거래 장터가 됐다.

“농사는 시골 분들이 잘 짓지만 유통이나 홍보는 아무래도 도시 출신 젊은이들이 더 잘하잖아요. 그런 면에서 귀농자들이 도시와 농촌의 가교가 될 수 있어요. 현지인에게 뭘 얼마나 심을지 배우고, 그 대신 어떻게 홍보하고 팔 것인지 아이디어를 전해 주는 거죠.” 이들 가족은 아직 온전한(?) 농부가 아니다. 아내 박진희씨가 서울에 남아 직장 생활을 하는 주말부부이기 때문이다. 아직 시골 생활의 틀이 잡히지 않았고 농사만으로 가계를 감당하기 힘들어 내년 초까지 시한부 주말부부로 지내기로 했다. 이것은 사실 귀농자들의 비슷한 고민거리여서 하늘소 마을도 현재 12가구 중 세 집이 주말부부다. 게다가 대부분 맞벌이. 시골에서 무슨 맞벌이냐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대부분 사회생활 경험을 살려 군청 사회복지사나 인근 학교 기간제 교사로 일한다. 하늘소마을의 일상은 이렇듯 다른 시골 마을과 사뭇 다르다.

봉화 터줏대감 된 서울대 출신 홍보맨

경상북도 봉화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귀농 인구가 몰리는 ‘귀농의 메카’다. 서울에서 차로 3시간 남짓 달리면 닿을 만큼 비교적 가깝고 땅값도 저렴해서 귀농을 염두에 두는 사람에겐 매력적인 조건을 갖춘 것. 지난해에만 무려 85가구가 도시를 떠나 봉화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 터줏대감 송성일(47)씨는 귀농을 준비하며 1년 넘게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다 청량산 자락 ‘비나리마을’에 둥지를 틀었다. 서울대 철학과 출신으로 대기업 홍보실에서 근무했던 송씨는 도시의 반복된 일상에 지쳐 서울 생활을 청산했다. 2000㎡의 땅에 잡곡과 고추·고구마를 심었고, 화가인 아내 류준화씨는 집 근처 폐교를 미술관으로 개조해 아이들을 가르치고 전시회도 열며 마을 사랑방을 꾸려가고 있다.

“홀아비 농사를 짓느라 힘에 부친다”고 하면서도 표정만은 환한 걸 보니 제법 익숙해진 농사일이 즐거워 보였다. 땅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느끼는 즐거움은 도시에서 얻지 못한 색다른 활력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농부의 삶이 그의 정신을 완전히 충만하게 해주지는 못했다. 그는 관심사가 다양하고 일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농사일에 지친 시골 남정네들이 밤 9시만 되면 잠자리에 드는데 송성일씨는 밤늦게까지 책을 읽거나 공부를 했다. ‘내가 이 마을에서 뭘 할 수 있을지’ 찾아가는 공부였다.

사실 그는 귀농 12년 차 베테랑이다. 그 기간 동안 마을에서 영향력을 넓혀 요즘은 본업인 농사일에 거의 신경을 쓰지 못할 정도로 많은 일을 하고 있다. 비나리마을이 정보화마을로 지정돼 프로그램을 관리하고 체험 마을 제정 사업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 외지 사람이 마을 일에 앞장서는 것은 농촌의 전통 정서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일이지만 오랫동안 마을 사람들과 거리낌 없이 지내 온 그였기에 가능했다. 요즘 비나리마을 귀농자들은 농촌 문화 체험장을 만들거나 약초 가공 판매를 시도하는 등 다양한 경제활동을 시작하고 있다. 이들 덕분에 조용한 농촌 마을이 모처럼 활기를 띠고 있다. 그 도화선이 송성일씨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봉화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건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농촌 정착에 실패해서 이곳을 떠나는 사람도 많아요. 나홀로 살던 도시 습관을 버리지 못해서죠. 성공적인 귀농을 위해 가장 중요한 건 마을 사람과 얼마나 조화를 이루고 살 수 있느냐거든요. 저도 10년이 넘게 산 뒤에야 겨우 이곳의 주민이 된 것 같아요.” 그의 바람은 비나리마을을 ‘살 만한 공동체’로 만드는 것이다. 마을끼리 활발한 교류를 진행하면서 농사와 예술이, 도시와 농촌이 서로 만나는 마을, 이른바 ‘인터빌리지’를 만들어갈 계획이다. 매달 비나리마을의 문화를 체험하러 미술관을 찾아오는 도시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하니, 그의 꿈이 이뤄질 날이 그리 머지않은 듯하다.

고향으로 돌아온 대기업 마케터

이맘때면 시골 마을마다 대추 나무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지만 젊은 일손이 부족해 그걸 털어낼 짬이 없다. 하지만 귀농자가 꾸준히 찾아와 몇 년째 마을 가구 수가 그대로인 경북 봉화마을은 3040세대 젊은 농부들이 일손을 모으는 모습이 전혀 낯설지 않다. 기자가 봉화를 찾은 날은 마침 10년 차 베테랑 귀농자 김일현(40)씨 집에 귀농 후배들이 모여 대추를 터는 날이었다. “대추나무는 빨리 털어야 내년에 열매가 더 많이 열린다”는 그의 말에 옆집에 사는 귀농 1년 차 초보 부부가 눈을 반짝인다. 이곳 귀농자들은 이렇게 자주 모여 농사일은 물론이고 자녀 교육, 마을 전반에 관한 일을 꾸준히 상의한다.

김일현씨는 대기업 마케팅 담당자로 일하다 고향 봉화로 귀농했다. 도시 생활을 갑자기 정리하려면 적응 기간이 필요한데 아무래도 고향에서는 심리적으로 더 안정될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제아무리 고향이래도 낯선 시골살이는 그에게 많은 어려움을 안겼다. 유치원 교사인 아내와 함께 고향행을 결심할 때만 해도 의기양양했다. 복잡한 도심만 벗어나면 정말 신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거기에도 도시와 똑같이 어려운 삶이 있었다.

“사람들이 흔히 그러잖아요. ‘시골 가서 농사나 짓자’고요. 그런데 농사가 어디 쉬운가요. 무턱대고 밭부터 샀다가 빚더미에 오른 사람이 수두룩하더라고요. 사실 경제성 측면에서 보면 농사는 좀 위험한 선택이죠. 그래서 저는 밭 안 빌리고 집 주변 텃밭에 표고버섯이나 감자, 토마토를 조금씩 심었어요.” 주위 귀농자들이 인터넷 홍보에 열을 올릴 때 그는 좀 다른 전략을 세웠다. 수확한 작물을 죄다 서울 지인들에게 선물로 보내고 ‘나눠 먹으라’고 선심을 쓴 것. 시골에서 직접 키웠다는 소문이 나면서 그의 채소를 구입하겠다는 사람이 생겨났다.

김일현씨는 농사보다 체험학교 주인장으로 더 유명하다. 문 닫은 학교 건물을 싸게 매입해 농촌체험학교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내년부터는 콩 농사를 직접 지으며 도시 학생들을 대상으로 콩학교를 운영할 계획이다. 메주 만들기 체험 등 세부 프로그램도 구상 중이다. 손으로 담근 메주를 판매할 수도 있으니 일석이조다.

그가 체험 프로그램 구축에 힘쓰는 데는 경제적인 이유보다 ‘교육’적인 이유가 더 크다. 평소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다양한 자극과 체험의 기회를 줄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해왔고, 내 아이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에게도 그 기회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돈 많고 여유가 있어도 아이들 공부 못 시킬까 봐 귀농을 주저하는 분들이 참 많죠. 하지만 저는 여기서 배우는 게 더 많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요. 창의성과 감수성을 키우고 싶다고요? 그게 학원에서 되겠어요? 정말 교육을 시키고 싶다면 자연으로 보내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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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이한 기자, 지희진 / 객원기자

사진이민희 / studio lamp

 

오피니언

[노재현 시시각각] ‘연희 창작촌’의 문과 무 [중앙일보]

 
어제 서울에선 종일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연희동의 한적한 주택가도 마찬가지였다. 잘생긴 소나무들이 곳곳에 자리 잡은 ‘연희문학창작촌’. 대지 6915㎡(약 2095평)에 지하 1층, 지상 1층의 아담한 건물 네 동이 들어서 있다. 각각의 집 이름이 예쁘다. ‘끌림’ ‘홀림’ ‘울림’ ‘들림’이다. 지난달 5일 개관했으니 이제 한 달이 조금 넘었다. 서울시 소속 서울시사(市史)편찬위원회가 쓰던 공간을 리모델링한 뒤 공모로 뽑힌 문인들에게 거의 무료로 숙소를 제공하고 있다. 평(약 3.3㎡)당 5000원, 그러니까 한 사람당 월 5만원가량의 월세를 받는 것은 순전히 문인 특유의 ‘자존심’을 살려주기 위해서다. 현재 19명의 작가가 이곳 집필실에서 글 쓰고, 주방에서 밥 지어 먹고, 작은 도서관(문학미디어랩)에서 책·영화를 보고, 휴게실 겸 체력단련실(예술가 놀이터)에서 탁구 치고 자전거 타고 바둑도 둔다. 1개월, 3개월, 6개월 중 자신이 원하는 만큼 머물 수 있다.

연희문학창작촌에 입주해 있는 소설가 은희경씨는 “세금 내는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딱히 자신이 입주 혜택을 받아서가 아니다. 글에 전념할 곳이 마땅치 않고 여건마저 어려운 작가들을 위해 서울시가 도심 속에 이만한 공간을 마련해 준 게 너무도 기껍다고 했다. 그동안 문인만을 위한 창작촌은 원주시의 토지문화관과 인제군의 만해마을창작촌 두 곳뿐이었다. 그나마 민간에서 설립한 곳이기에 연희창작촌의 의미는 한층 각별하다. 은희경 작가도 토지문화관, 고시촌, 시골의 빈집, 절간, 방학 중에 비는 지방대학 기숙사 등 조용히 글 쓸 곳을 찾아 숱하게 돌아다녔다고 한다. 소설가이자 연희창작촌 운영위원장인 박범신(서울문화재단 이사장)씨는 “언젠가는 연희창작촌에서 태어난 작품이 노벨문학상을 받는 날이 올 겁니다”라고 자부했다.

게다가 연희창작촌은 ‘터’가 특별하다. 전적비가 세워질 정도로 치열했던 ‘연희고지 전투’의 현장이다. 6·25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뒤에도 서울 탈환의 길은 험난했다. 인천상륙 닷새 뒤인 1950년 9월 20일부터 24일까지 이 일대는 피로 물들었다. 북한군이 버려두고 간 전사자만 1200구를 헤아렸다고 한다. 한·미 해병대의 피해도 막심했다. 창작촌이 자리 잡은 언덕배기에 서린 선열들의 피와 땀, 눈물은 아직 다 마르지 않았을 것이다. 무(武)가 난무하던 이곳, 후손들이라도 잘 먹고 잘 살라고 나라를 지켜준 조상들 덕분에 이제 작가들이 문(文)의 서기(瑞氣)를 마음껏 발산할 수 있게 된 것 아닐까.

연희창작촌과 담 하나 사이로 전두환 전 대통령 사저가 있다. 나무 담 틈새로 경호원들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여기에서도 문과 무, 권위주의와 탈(脫)권위주의가 교차한다. 지난달 창작촌이 문을 연 뒤 박범신 운영위원장은 이웃집 주인인 전 전 대통령과 일종의 상견례를 했다. “한 달에 한 번쯤은 시 낭송회 등으로 좀 시끄러울지 모르는데 이해해 주십시오.” 박 위원장이 미리 양해를 구하자 그는 “왜 이해를 못합니까. 기회가 되면 저도 참석하겠습니다. 한번 불러 주세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문인들은 술 좋아하시지 않습니까”라며 발렌타인 양주 한 병을 선물하더라고 했다. 창작촌 길 건너편에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저도 있다. 그래서 입주 문인들끼리 “이웃에 기가 센 분들이 버티고 있으니 우리는 안심하고 글이나 쓰자”는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고 한다(그러고 보니 내일이 12·12사태 30주년이다).

모처럼 태어난 연희창작촌의 성공을 기원한다. 박범신 위원장은 “시민을 위한 문학 프로그램, 외국 작가와의 교류 행사도 활발하게 벌일 계획”이라며 “이곳이 명작의 자궁 역할을 하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전쟁의 아픈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 권위주의체제의 잔영(殘影)이 넘보이는 곳. 이런 마을에서라면 우리나라 역사를 날줄과 씨줄로 엮어낸 명작 대하소설이나 장시(長詩)가 여러 편 나올 법하지 않은가.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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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4대강과 풍수, 그리고 세종시

김지하·시인

나도 더는 그 따위 몰상식한 정책을
옳다 그르다 왈가왈부하지않겠다.
다만 나라를 위해, 국민을 위해,
참으로 하기 싫은 말 한마디를 한다.
도대체 이 나라에 대한 國土觀이란 것을 가지고나 있는가?

몇번이나 몇번이나 똑같은 말을 해야 되는 것인가?

대운하니 사대강이니 사강나래니 말만 바꾸면서 끝없이 지치지도 않고 산천을 파헤치고 때려부수겠다고 나서는 그 까닭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옛날 같으면 오역(五逆)이니 오사(五事)니, 한 술 더 떠 황극(黃極)이니 하며 온 나라가 시끄럽게 떠들고 일어나 그 정책 책임자를 최소 보름에서 한 달 보름 동안 단식하고 무릎 꿇어 하늘에 빌고 또 빌게 하고야 말았을 일들이다.

모르겠는가? 하늘이 무엇인지 모르겠는가? 산과 강물과 숲과 모래밭이 하늘에 속하는 하늘의 영지, 즉 천지(天地)임을 아직도 모르겠는가? 당신들 소유물이던가?

내 알기론 대통령은 하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라고 들었다. 사실이 아닌가? 유럽의 기독교도들은 그 성스러운 하늘의 영지를 그 따위로 때려부수는 사람들의 이름이던가?

이 이상 나도 더는 그 따위 몰상식한 정책을 옳다 그르다 왈가왈부하지 않겠다. 다만 나라를 위해, 국민을 위해, 그리고 하늘과 생명을 위해 참으로 하기 싫은 말 한마디를 아니 할 수 없어 한다.

도대체 이 나라에 대한 국토관(國土觀)이란 것을 가지고나 있는가? 한국의 자생풍수(自生風水)에 대해 단 한 페이지의 지식이라도 섭취한 적이 있는가?

우리의 국토, 우리의 산천은 애당초부터 간방(艮方)이라고 하여 그따위 제멋대로의 산천파괴를 못하게끔 돼 있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신경준(申景濬)의 산경표(山經表)를 읽은 적이 있는가? 산경표는 김정호(金正浩)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의 '속갈피'라 불리는, 지리서(地理書)가 아닌 지질서(地質書)다. 읽은 적이 없는가?

일본인 대지질학자 마치무라 세이요(重村世勳)는 산경표를 '신의 지표'라고 칭송했고, 저 유명한 스코필드 박사는 이를 두고 "예루살렘의 나침판 같다"고 여러 번 혀를 내둘렀다. 무엇을 뜻하는가?

단순한 과학서가 아니란 뜻이겠다.

산경표에 따르면 우리나라 산골짜기의 높낮이는 천 가지 만 가지로 서로 다르고, 물굽이의 복잡하기와 그 물속 사정의 서로 다르기가 그야말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다. 그만큼 복잡한 삼천대천 세계라는 말이다. 그래서도 고려 말 나옹화상(懶翁和尙)은 우리 국토는 문자 그대로 작은 화엄세계라 당나라 해충국사의 표현에 따르면 '무봉탑(無縫塔)'이 적절하다고 말한 바 있다.

'무봉탑'이 무엇인가?

누덕누덕 바느질할 수 없는 타고난 유리궁전(琉璃宮殿)이라는 뜻이다. 하늘만이 바꿀 수 있는 땅인 것이다. 그것을 지금 어떻게 하겠다고?

19세기 말 서세동점 시대 같으면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말처럼 산천개조의 필요성에 약간 솔깃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지금은 21세기. 생태계 혼돈이 극에 달하고 입만 열면 녹색을 떠들며 문명의 대세가 동아시아로 중심이동하고 있는 중에 이곳 전통 중의 우주생명사상으로부터 새 시대의 녹색당, 인격-비인격, 생명-무생명 등 일체 존재를 다같이 거룩한 우주공동 주체로 들어올리는 모심의 문화, 모심의 생활양식으로 현대 인류의 삶 전체를 변혁하지 않으면 지금의 대혼돈은 극복할 길이 전혀 없다는 전문 유럽 생태학자들의 새로운 동아시아 녹색당 요구가 머리를 쳐드는 이 즈음에 뭘 어찌하겠다고? 운하? 보? 댐? 준설?

준설이 녹색인가?

모래통 나를 백수는 요즘 한국엔 없다. 방글라데시 노동자를 데려와 쓸 건가? 그게 뉴딜인가? 정부의 환경평가기관이 세 차례나 수질오염 가능성을 경고했는데도 뭐라고? 예산을 많이 투입하면 해결할 수 있다고? 지금 장난을 하는 건가?

신종플루는 분명 수질오염으로 시작된 것이고, 그 진원지인 멕시코 '라 글로리아'에는 또 다른 진녹색의 독성 수질이 쉬쉬하는 속에서도 대유행이다. 프랑스·스페인·포르투갈 앞바다에 '타발타바라풀'이라는 죽지 않는 해조류에 의한 수질오염 가능성, 페르시아만 일대의 '악마의 향기'라는 이름의 썩은 어패류에 의한 수질오염 가능성, 러시아 극지 사모아 발란까 지역의 극도의 뜨거운 독성 액체의 분출, 중국 여러 곳에 지금 막 퍼지고 있는 시뻘건 짐승꽃 '가홍(可弘)'이란 이름의 기괴한 수질오염 식물에 대해 듣지도 못했는가?

도대체 환경부·국토부의 그 잘난 체하는 전문가들은 전문 관계 지식은 고사하고 수질오염으로 인한 피해가능성에 대해 눈도 귀도 감각도 일절 닫은 것인가?

어쩔 작정이란 말인가? 오늘의 글로벌 세계에서 그것이 모두 남의 일인가? 마치 죽지 않는 해파리들처럼 4대강에 그것들이 어느 날 한꺼번에 몰려온다면?

나는 정운찬 총리의 세종시 견해를 지지한다. 계룡산은 철저한 남향의 피난 풍수다. 우리는 지금 북으로 대륙으로, 그리고 바다로 나아가야 한다. 한 전문 풍수인의 말처럼 수도를 열린 교하(경기도 파주시)로 밀고 나가도 모자랄 이때 뭐가 어째?

그래서 최소한의 국토관은 당연히 가지고 있을 줄 알았다. 무엇이 문제인지 아직도 모르겠는가?

정 총리가 앞에 직접 나서서 다시금 장기적이고 전국민적인 공청회와 토론, 수많은 전문가들의 여러 가지 의견 청취를 통해 '물'과 '물길'에 대한 새로운 사고가 도출된다면 그때는 내 견해를 바꿀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순 무식쟁이들 깡통 두들기는 차원이라면 나는 아예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다.

그래도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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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왕산 鶴학巢소島도에서 최범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