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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문화ㅣ주경철의 세계사 새로 보기] ⑤ 튤립

꽃 한 송이 값이 대저택 한 채!
17세기 네덜란드 휩쓴 ‘튤립 투기’


<이 기사는 주간조선 2086호에 게재되었습니다>

1636년 12월에 네덜란드에서 출판된 한 팸플릿은 희귀한 꽃을 피우는 튤립 구근 한 개를 팔아서 살 수 있는 상품 목록을 이렇게 제시하고 있다.

꽃 한 송이로 한 재산을 만들 수 있는 어처구니없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17세기 중엽 네덜란드 전역에 휘몰아쳤던 ‘튤립 광기(Tulip mania)’는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투기 사례 중 하나이며 최초의 자본주의적 버블 현상으로 알려져 있다. 엄격한 자기 규제를 특징으로 하는 칼뱅주의(Calvinism)의 나라 네덜란드에서 어떻게 그처럼 엄청난 탐욕의 분출이 일어난 것일까? 그리고 왜 하필 아름다운 꽃이 투기의 대상이 되었을까?

튤립의 원산지는 파미르 고원으로 추정된다. 자연 상태에서 이 꽃은 재배종보다는 키가 작고 색깔도 소박했지만, 아주 튼튼하고 거친 환경에서도 잘 자랐다. 중앙아시아 내륙 산간 지방의 모진 겨울 추위가 지나고 봄이 찾아올 때 강렬한 붉은빛으로 피어나는 이 꽃은 유목민족들의 사랑을 받아서, 그들과 함께 페르시아와 터키 지방으로 점차 퍼져갔다. 페르시아에서는 이미 11세기에 이 꽃을 재배하고 있었다.
 
:: 15세기 튤립은 터키의 꽃

15세기경에는 튤립이 터키에 전해져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튤립은 네덜란드의 꽃이기 전에 터키의 꽃이었다. 동서양을 아우르는 세계 최강의 문명을 이룩한 터키의 정원에서 가장 고귀한 지위를 누린 꽃이 바로 튤립이었다. 터키인들에게 정원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유목민족들에게 낙원과 천국의 이미지는 다름 아닌 정원이기 때문이다. 파라다이스(paradise)라는 말의 어원은 고대 페르시아어 아피리다에자(apiri-daeza)로서 이는 ‘벽으로 둘러싸인 정원’을 가리켰다. 이 말이 고대 히브리어(pardes)와 그리스어(paradeisos)를 거쳐 유럽 여러 언어에 들어온 것이다. 에덴동산이 그와 같은 정원 모습을 한 낙원에 해당한다.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술탄(sultan·황제)들은 천국의 모습을 지상에 재현하기 위해 정원에 지극 정성을 기울였다. 이곳에는 시원한 샘물과 분수가 있고 시내가 흐르는 가운데 온갖 꽃들이 피어나 있다. 이 지상천국을 화려하게 수놓는 여러 꽃 가운데 가장 큰 사랑을 받은 꽃은 단연 튤립이었다. 터키어로 튤립은 라레(lale)인데 이 말은 아랍어의 ‘알라’와 마찬가지로 신(神)을 가리킨다.

활짝 필 때 오히려 고개를 숙이는 튤립은 신 앞에서 겸손을 지키는 고귀한 꽃이었다. 그런데 오스만제국 시절에 사람들이 좋아하는 튤립은 이미 야생화와는 형태와 색깔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꽃잎이 아주 길고 끝이 바늘처럼 뾰족한 형태로서 단검을 연상시키던 이런 꽃들은 자연 상태에서는 찾기 힘들며, 사람이 인위적으로 환경을 만들어주어야만 생존할 수 있었다. 과거에 크게 유행했던 이런 꽃들은 오늘날 다 사라져서 단지 그림이나 도자기 문양에만 남아 있다.

:: 튤립 때문에 권좌에서 쫓겨난 왕
오스만제국 시대 중에서도 특히나 튤립이 큰 인기를 누리던 아흐메트 3세 시절은 ‘튤립시대(1718~1730)’라고 불린다. 상대적으로 평화를 누리던 이 시기는 궁정 사람들과 고관, 부유층 사람들이 아름다운 정원이 딸린 별장에서 음주가무를 즐기고 음악·건축·시 등에서 세련된 문화를 향유하던 호시절이었다. 당시 술탄의 정원에서는 봄마다 장대한 튤립 축제가 열렸는데, 그 화려함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정원 주변에 거울을 둘러 세워 전시장이 두 배 이상 넓어보이도록 했다. 각 품종의 이름은 은으로 만든 명패에 새겼다. 튤립 4개마다 초를 하나씩 세워 불을 켰는데, 이 초의 높이도 꽃의 키와 일치하도록 만들었다. 금박을 입힌 새장 안에서 새들이 노래를 불렀고, 커다란 거북 수백 마리가 등에 촛불을 지고 정원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게 함으로써 전시장을 환상적인 조명으로 장식했다. 전시장을 찾는 사람들에게도 튤립의 색깔을 돋보이게 하고 조화를 이루는 색의 옷을 입도록 했다.”(마이클 폴란 ‘욕망하는 식물’, 152쪽) 그렇지만 이건 조금 도가 지나친 게 아닐까?

“촛농 떨어질 때 백성들의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의 소리 높더라(燭淚落時民淚落, 歌聲高處怨聲高)”는 옛 노래 그대로이다. 엄청난 값을 치르며 페르시아와 네덜란드에서 수입하는 수백만 개의 튤립 구근 대금이 국가 재정에 막대한 부담이 되었고, 결국 튤립이 한 시대를 끝내는 계기로 작용했다. 1730년에 ‘반(反) 튤립 봉기’가 일어나서 아흐메트 3세는 퇴위되었다.

술탄의 정원을 지키는 정원사(bostanji) 역시 이국적인 풍모가 넘쳐났다. 이들은 튤립을 가꾸는 전문가 외에 호위병이자 짐꾼이자 경찰이자 사형집행인이었다. 왜 지상천국을 지키는 이 사람들이 사형 집행까지 맡아서 하는지 이유는 아리송하지만, 하여튼 하얀 모슬린 바지에 짧은 셔츠, 빨간색 테 없는 모자를 쓴 이 정원사들은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에게 무거운 자루를 매달아 보스포루스해에 던져버리는 일을 담담하게 집행했다. 그중에서도 고급 관리들의 사형 집행은 수석 정원사의 몫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한 가지 특이한 일은 사형 선고를 받은 고관에게 마지막으로 목숨을 건질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었다. 사형수와 수석 정원사는 정원을 통과해서 톱카피궁 최남단 집어장(集魚場)까지 800미터 거리를 달리기 시합을 한다. 문자 그대로 목숨 걸고 달리는 이 경주에서 사형수가 정원사보다 빨리 도착하면 사형에서 추방형으로 감면되지만, 정원사가 더 빨리 도착해 있으면 그 자리에서 처형되어 시신은 바다에 던져진다. 1823년에 하지 살리흐 파샤라는 사람이 이 이상한 관례에 따라 마지막으로 목숨을 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바람장사(windhandel)’로 불렸던 튤립 선물거래를 풍자한 그림.

:: 네덜란드인의 마음을 훔치다
유럽인들이 터키의 정원에서 처음 튤립을 보았을 때, 튤립은 이와 같은 이교적인 매력이 가득한 신비의 꽃이었다. 튤립이라는 말은 터번(turban)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꽃 모양이 그와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누가 처음 튤립을 유럽에 들여왔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대체로 16세기 중엽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지역에 모습을 드러냈고, 곧 여러 지역으로 퍼져갔다. 그 가운데 가장 크게 성공을 거두어서 제2의 고향이 된 곳이 네덜란드였다.

이 나라에 튤립이 전파된 데에 중요한 공헌을 한 사람은 프랑스 출신의 저명한 식물학자인 클루시우스였다. 그는 빈과 프랑크푸르트에서 식물학자로 활동하다가 1593년에 레이덴대학 교수로 임명되었고, 그와 동시에 그곳에 식물원 건립을 주관했다. 이 대학의 상징처럼 된 식물원(Hortus academicus)은 전 세계의 식물 자원을 들여와서 관찰하고 실험한 후 다시 여러 지역에 보급하는 중요한 기관으로 발전했다. 클루시우스는 레이덴에 튤립 구근을 가지고 와서 재배했는데, 여기에서 꽃이 피어나자 사람들이 모두 그 꽃들을 훔쳐갔다. 오늘날 레이덴과 할렘 주변 지역에 봄마다 형형색색의 꽃들이 피어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동산이 만들어지게 된 먼 기원은 다름 아닌 클루시우스의 꽃 도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왜 네덜란드 사람들이 튤립에 그토록 열광했을까? 이 나라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정원에서 꽃을 기르는 것을 좋아한다. 네덜란드의 또 다른 상징물인 나막신도 원래는 습기 많은 정원에서 일할 때 신는 덧신이다. 구름 많이 끼는 축축한 날씨에다가 진창 투성이인 풍경을 접해 보면 집집마다 꽃을 가꾸어서 조금이라도 아름다운 모습을 만들어보려는 이 나라 국민들의 노력이 저절로 이해가 된다. 문제는 왜 네덜란드의 황금기라고 불리는 17세기에 이 꽃이 역사에 이름을 남길 광적인 투기의 대상이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 투기장이 된 꽃밭
꽃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문제라면 급격한 경제 성장의 시대를 살아가던 당시 사람들의 심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 당시 네덜란드 사회에서는 빈민 출신 사람들이 단시간 내에 사회의 최상층으로 올라가는 것이 가능했다. 야콥 포펜은 아버지가 시장에서 생선을 통에 담는 미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 자신은 거부가 되었고 암스테르담 시장까지 역임했다.

심지어 바닝 콕이라는 사람은 유랑 걸인의 아들이었는데, 유럽 최고 부자 중 한 명이 되었다. 이처럼 사회 전체적으로 부가 크게 증가하고 사회적 유동성이 큰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인생 역전’의 꿈을 품게 마련이다. 표면상으로는 종교적 자기억제와 합리적 관리를 내세우는 칼뱅의 교리가 지배적이었지만, 이면에는 어떻게든 기회를 보아 큰돈을 거머쥐어야 한다는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튤립 광기 시대에 유행했던 종자들.

처음에 순수한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으로 시작된 꽃 재배가 한탕주의로 돌변한 데에는 튤립이 지닌 몇 가지 특이한 요소도 작용했다. 튤립을 많이 키우다 보면 100개 중 한두 개꼴로 특이한 무늬를 가진 꽃이 피어난다. 오늘날에는 이것이 특별한 바이러스에 감염된 결과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당시에는 물론 이런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변종 가운데에서도 특히 강렬한 불꽃 무늬를 띤 꽃들은 사람들의 찬탄을 불러일으켰고 그에 합당한 이름도 얻었다. 예컨대 역사상 최고의 튤립으로 알려진 전설적인 튤립종 셈페르 아우구스투스(semper augustus)는 푸른색과 흰색 바탕에 빨간 불꽃 무늬가 꽃잎 끝까지 뻗쳐 있었다.

이런 희한한 꽃일수록 심하게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다. 튤립은 종자에서 자라나서 꽃이 필 때 아주 심한 변이를 나타내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어떤 꽃이 필지 예측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새로운 구근을 만들어내기까지 6~7년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된다. 이런 조건에서 사람들이 탐내는 멋있는 꽃들을 얻기는 아주 힘들었다. 자연히 이런 꽃값이 천정부지로 오르기 시작했다. 15길더 하던 ‘아드미랄’이 175길더로, 45길더 하던 ‘비자르덴’이 550길더 하는 식으로 꽃값은 계속 상승했다.

이왕 꽃을 재배하는 김에 큰돈을 벌겠다는 욕심이 발동해서 많은 사람들이 전 재산을 털어 텃밭 한 조각을 사가지고 구근을 키웠다. 화훼산업이 완전히 투기로 변모한 것이다. 아직 꽃이 피어나기도 전인 땅속의 구근에 대해서도 매매가 이루어졌다. 구매자는 미리 선금을 주고 나중에 피어날 꽃을 확보해 두었다가 실제 꽃이 피었을 때 훨씬 비싼 가격으로 되팔아서 큰 이윤을 남겼다.

오늘날에는 선물거래라고 하는 이 현상을 당시에는 ‘바람장사(windhandel)’라고 불렀다. 이 바람이 모진 광풍으로 커진 것은 1636년부터 그 다음해까지다. 꽃값은 오르고 올라 급기야는 꽃 한 송이가 대저택 한 채 값이 될 지경이었다. 결혼 지참금 대신 비싼 튤립 구근 하나만 달랑 들고 가는 일도 벌어졌는데, 그래서 이 품종의 이름은 ‘내 딸의 결혼식’으로 붙여졌다.

터키에서 유행했던 단검 모양의 튤립이 그려진 이즈니크 도자기.

:: 거품 붕괴하면서 날개 없는 추락
그러나 모든 일에는 끝이 있는 법! 사람들은 이제 가격이 올라도 너무 올랐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637년 초에 사람들은 꽃을 시장에 내다팔려고 했다. 그렇지만 팔려는 사람만 있지 사려는 사람은 없었다. 오르던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가격이 떨어졌다. 심지어 5000길더짜리가 50길더로 떨어졌지만 그래도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았다. 막판에 ‘상투를 잡은’ 사람들이 큰 손해를 입게 된 것은 정해진 이치였다. 버블이 터지고 한 바탕 광풍이 지나는 동안 네덜란드 사회는 적지 않은 충격을 겪었다.

꽃을 보는 시각도 사회마다 또 시대마다 다르다. 한 인류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아프리카에서는 원체 아름다운 꽃에 대한 동경이 약해서 종교 제의나 사회적 의례에서 꽃을 사용하지 않으며, 예술이나 종교에서 꽃의 이미지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아마도 먹을 게 충분하지 않아 꽃을 기를 여유가 없고 생태적으로도 아프리카 원산 꽃이 거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북부 아프리카의 이슬람권처럼 외래 문명과 접촉하면서 새삼 꽃의 아름다움을 배울 수는 있다. 또 시간이 지나면서 꽃의 유행도 바뀐다. 예컨대 영국에서는 늘 장미가 인기를 누렸는데,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화려한 장미가, 빅토리아 시대에는 다소곳한 장미가 가장 큰 사랑을 받았다. 한때 프랑스에서 히아신스가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여(‘튤립 광기’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히아신스 열풍’을 일으켰지만 곧 사그라들었다.

꽃의 아름다움이 때로는 황제의 절대 권력을 반영하기도 하고, 때로는 추악한 투기와 결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튤립은 그런 먼 역사의 뒤안길에서 돌아와 이제는 유치원 아이들이 가장 쉽게 그릴 수 있는 순수한 꽃이 되었다. 

 / 주경철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서양사학 석사.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 박사(네덜란드사 전공).
   현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문화로 읽는 세계사’
   ‘대항해시대’ ‘네덜란드’ ‘문명과 바다’ 등 저서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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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의 하드보일드] 4년 만에 침묵 깬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

  "명당이 따로 있나요, 자기가 좋으면 다 명당입니다." 최창조에겐 조그만 우리나라 곳곳이 다 명당이다. 사진은 18세기 고지도인 '아국총도'와 최창조 전 교수를 합성한 모습. / 조선일보DB

"현대 風水에서는 빌딩이 山이고 도로가 江입니다"

우리 풍수는 명당 찾기 아니고… 모자란 곳 메워주는 '自生풍수'… 도시에 옛 풍수 이론은 안 맞아…

"앞에선 風水 무시하던 분들뒤에선 묏자리 봐달라 부탁"

풍수대가는 어디 살까?… 아파트 1층에 살아 "자기가 좋으면 명당"

4대강 정비는 필요한 일… 낙동강·한강 연결 불필요… 생태계 완전히 달라 위험…최창조(崔昌祚·59)는 2004년 8월 행정수도 논란에 휘말렸다. 한 잡지에 보낸 원고가 뒤늦게 불씨를 댕겼다. 그 주장의 요체는 '천도(遷都) 9불가론(不可論)'이었다. 그는 반대파의 영웅, 친노(親盧)파의 원수가 됐다.

통일에 도움이 안된다, 물 부족이 심각하다, 자금조달이 만만치 않다…, 이런 논점을 두고 그는 반대론자들과 토론하길 원했다. 그러나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에서 풍수가로 변신한 이 순진한 남자에게 돌아온 건 욕설뿐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전화가 집으로 걸려왔어요. 저는 그때 운동권 출신들이 토론문화에 익숙하다는 말이 새빨간 거짓말인 걸 알았어요. 그들은 제 말을 들을 생각도, 듣고 싶어하지도 않았어요. 무지막지한 욕만 해댔습니다."

뭇매에 시달리던 그와 아내는 수면제와 신경안정제에 의존해 잠들 수 있었다. 인민재판 열흘만에 그는 항복했다. 집과 휴대전화 번호를 바꾼 것이다. 그 뒤 그는 일상 활동을 제외하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서울 구로구 신도림동 아파트를 찾았을 때 그는 하루 전에 나왔다는 새 책을 건넸다. '최창조의 새로운 풍수이론'이다. 4년 만에 내놓은 신작(新作)이 하필 정부의 행정수도 이전 백지화 논란과 겹친 건 운명일까.

―숨어 지낸 겁니까.

"특강도 하고 답사도 다니고 기업에 자문도 해주고 지냈습니다. 평상시와 같았어요."

―이번에도 풍숩니다, 뭐가 새롭다는 겁니까.

"책 제목을 '빌딩을 산(山)으로, 도로를 강(江)으로'로 하고 싶었습니다. 현대처럼 도시화가 90% 이상 진행된 세상에서는 과거 풍수이론을 적용할 수 없거든요."

―왜 출판사가 필자 주장을 묵살했을까요.

" '풍수'자(字)가 없으면 안 팔린다는군요. 문제는 풍수라는 글자가 들어가면 도서 10진 분류법에서 9번으로 된다는 데 있어요."

―9번이 뭔데요.

" '사주·잡서(雜書)'항목입니다. 저는 풍수가 인문학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하긴 돌아가신 아버지도 제가 지리학과에 진학하니 '왜 풍수를 하려느냐'고 반대했지요."

―최 교수가 되살리겠다는 자생(自生) 풍수가 뭡니까.

"우리 풍수는 명당을 찾는 게 아닙니다. 모자란 곳을 메워주는 비보(裨補)사상이 바탕입니다. 도선국사가 터를 잡은 1200~1300개 사찰 가운데 그렇게 좋은 자리는 몇 곳 안돼요."

―그런 자생 풍수의 맥이 언제 끊긴 겁니까.

"자생 풍수는 도선(道詵)국사에서 무학(無學)대사로 이어지다 조선 중기에 끊겼습니다. 서경천도를 주장한 묘청(妙淸)도, 홍경래(洪景來)도, 전봉준(全奉準)도 모두 자생 풍수의 맥을 이은 분들입니다."

―다 풍운아들이군요.

"자생 풍수는 개벽(開闢)사상과 관련이 있습니다. 일례로 고려 태조 왕건릉은 초라하기 짝이 없어요. 주산(主山)도 없습니다. 후기의 공민왕릉은 명당 중 명당입니다."

―왜 공민왕이?

"노국대장공주 사후 공민왕은 시신을 궁궐에 놔두고 전국에서 명당을 찾지요. 시신 썩는 내가 진동해 신하들이 간언을 했을 정도입니다. 공민왕은 원(元)나라에서 오래 살다 온 인물입니다. 그때부터 중국 풍수에 자생풍수가 밀리기 시작한 겁니다."

―중국 풍수와 자생 풍수는 뭐가 다른가요.

"자생풍수는 기복(祈福) 발복(發福)을 믿지 않아요."

―자생풍수가 중국 풍수와 개벽사상과의 연관 때문에 사라졌다는 얘깁니까?

"무학대사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그가 입적하자 성종이 국사(國師) 칭호를 내리려는데 삼정승 육판서가 일제히 반대합니다. 무학대사가 별 볼 일 없는 인물이었다면 그랬을 리가 없었겠지요. 경국대전에 보면 음양지리과 교과서 목록이 있어요. 지금 남아 있는 교과서가 없습니다. 규장각에 보관된 책 중 20% 정도만 정리됐다는데 그 안에 있을지는 모르죠."

―그럼 지금 남은 풍수서들은 다 위서(僞書)겠네요.

"비기(秘記)라는 말이 붙은 건 대개 그렇다고 봐야죠."

우리 사회에서 풍수(風水)는 앉아서 천리(千里) 밖을 내다보는 술법(術法)처럼 통한다. 한마디로 비과학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비과학이 종종 사생결단(死生決斷) 게임의 도화선이 되기도 한다.

바로 행정수도, 청와대 이전처럼 민감한 현안과 연결될 때다. 학자티 물씬한 최창조가 현대 지리학과 고전 풍수 이론을 섞어 한 말을 세상은 제멋대로 이해했다. 그의 팔자(八字)에는 갈등이란 단어가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5년 전 처음 '이지메'를 당해본 겁니까.

"90년대 후반 화장(火葬) 문제를 거론했다 유림(儒林)들의 항의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자기 의견을 말했습니다. 제 반론은 경청했지요. 의견일치를 보지는 못했지만요. 친노와 다른 것도 있어요. 반드시 해 뜬 다음부터 전화하고 해가 지면 전화하지 않았습니다."

―유림과 운동권들의 차이가 뭡니까.

"운동권 출신들은 제 글을 읽어보지도 않았어요. 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에게 반대하느냐, 그 자체에 화를 냈어요. 그런 사례는 우리 주변에 많아요."

―또 어디가요.

"한 시민단체의 상임지도위원을 지금도 맡고 있습니다만 천성산, 사패산 터널 사례에서 보듯 대안 없이 반대만 하더군요. 낭비할 것 다 낭비하고 몇 년 후 해보면 자기들 주장이 틀린 걸로 나타나는데 사과도 안합니다."

―환경을 지키자는 취지는 좋지 않습니까.

"그 단체들 주장을 풍수적으로 말하자면… 흠, 잘생긴 산은 무조건 보호하고 별 볼 일 없는 야산은 건드려도 된다는 식이지요. 댐도 그래요. 환경단체는 무조건 못 만들게 하는데 제가 전주에 8년을 살아봐서 압니다. 그곳은 물이 부족해 금강댐 물을 끌어다 씁니다. 오죽하면 바닷물 담수화(淡水化) 얘기까지 나오겠습니까. 팔당댐에 물을 가득 채워도 유사시 서울과 수도권 주민들이 사흘밖에 마실 수 없는 양입니다."

―그래도 생태계를 생각하는 건 그들뿐인데….

"소양강댐 건설 때 생태계 걱정을 했지만 이미 그곳에는 새 생태계가 생겼어요. 새만금도 이미 방조제 밖에 새 갯벌이 생기고 있습니다. 시민단체는 건설을 '유전자 변형식품' 같다고 겁주지만 배고프면 유전자 변형식품 가리겠습니까? 당연히 먹어야죠."

―토론을 해보지 그랬습니까.

"분위기 자체가 토론이 잘 안되는 풍토였어요. 한 번 논쟁을 해볼까 생각해봤지만 '귀찮다'는 생각이 들어 관뒀어요. 막무가내, 토론의 부재는 제가 가본 북한도 비슷해요."

―운동권, 일부 시민단체와 북한이 뭐가 비슷하단 말입니까.

"1997년 12월 북한 평양을 방문한 적이 있어요. 이리 가자 저리 가자, 자기들 마음대로더군요. 어느 날은 새벽에 깨우더니 '교수 선생, 축하합니다. 김대중(金大中) 선생께서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라고 하더군요. 그게 왜 저를 새벽에 깨워 축하할 일입니까?"

―5년 전 주장했던 9불가론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나요.

"제가 내세운 것 중에 무리한 근거가 있긴 해요. 남으로 도읍을 옮긴 왕조가 망했다고 했는데 그건 고구려와 백제뿐이거든요. 두 가지 사례로 일반화할 수는 없는 것이었는데. 하지만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아요."

―일단 정부가 약속한 것을 어기는 건 사기(詐欺) 아닙니까? 충청도민들이 분개하는 이유를 저는 이해합니다만.

"제 생각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거야말로 정치적 행정적으로 결정해야지요."

―평양도 다녀왔다니, 서울과 평양 어디가 풍수적으로 좋던가요?

"당연히 서울이지요. 평양과는 비교할 수 없어요."

최창조는 세상과의 불화를 원치 않는 것 같았다. 그런 그가 유독 집착하는 게 현 청와대 터 문제다. 그는 청와대 터가 우리 국토를 유린하려는 일제의 의도에서 비롯됐다고 보고 있다.

식민지 땅을 훼손하는 전통은 세계적으로 식민지를 경영한 영국에서 유래됐다. 이른바 성소(聖所)를 더럽혀 기를 꺾겠다는 것이다. 최창조는 "일본은 그런 영국의 전통을 더 교묘하게 발전해 우리 땅에 실천했다"고 주장했다.

―5년 전 경기도 교하(交河)에 새 행정수도를 두자고 했지요.

"새 수도를 교하로 옮기자는 것처럼 돼있는데 행정부처는 서울에 그대로 두고 청와대만 옮기자는 것이었어요. 통일 후 서울이나 평양에 수도를 두면 남북 갈등이 생길 수 있어요. 대통령이 그 중간지대인 교하에 20년 정도 살면 어떻겠느냐는 글이었습니다. 그런 전제가 빠지니 마치 교하 신수도론을 주장한 것처럼 됐지요."

―왜 청와대를 옮겨야 합니까.

"청와대는 조선총독부 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齊藤實)가 1927년 지은 겁니다. 그가 서울에 도착해서 처음 받은 게 강우규(姜宇奎) 의사가 던진 폭탄이었습니다."

―청와대의 시작부터 불길했군요.

"청와대 역사를 '피'로 연 거지요. 해방 후에는 미군정청 장관의 관저였고요. 우리 대통령들도 그곳에서 비극을 맞았잖아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쫓겨나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암살당하고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은 감옥가고 노무현 대통령도 퇴임 직후 비극을 맞지 않았습니까? 김영삼(金泳三) 김대중 대통령도 골치를 앓았지요."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풍수적으로 청와대 터는 백두산 정기를 서울에 불어넣는 용(龍)의 목과 머리에 해당됩니다. 일제가 입 부분에 총독집무처를 짓고 목줄에 총독관저(청와대)를 지어 눌러놓은 겁니다."

―청와대에 들어가봤습니까.

"김대중 대통령 때 두번 가봤습니다. 두번째 갔을 때 '북악산 정상에 토치카가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더군요. 일제 때 만든 것인데 핵폭탄도 견딜 수 있을 만큼 단단해 보였어요. '지금 건드려서 뭐하겠느냐. 가까운 데 있는 흙으로 메우는 게 좋겠다'고만 했지요. 그때 청와대 내부를 샅샅이 봤는데 청와대 구 본관이나 지금 본관이 구중궁궐에서도 뒤쪽이었어요."

―그게 안 좋은 겁니까.

"저 같은 사람은 1주일만 살아도 돌아버릴 것 같더군요. 이건 풍수가 아니라 환경심리학에도 나와요. 불안감을 조성하는 자리지요. 역으로 보면 그런 터에서 몇년을 버틴 것만으로도 대통령들의 강기(剛氣)가 대단한 거지요."

―청와대 터에 있는 북악은 좋아 보이던데.

"북악산이 참 묘한 산입니다. 청와대에서는 서울 시내가 전부 조망(眺望)됩니다. 한강까지 보입니다."

―좋은 산 맞네요?

"이상한 게 가까이서 보면 웅장하고 아름다운데 멀리서 보면 인왕산에 눌려 있어요. 자기가 인왕산에 눌리는 걸 모르고 '나는 볼 것 다 본다'는 식의 독불장군(獨不將軍)이 바로 북악입니다. 그 터에 살다 보면 사람이 점점 더 고집불통이 되는 거지요."

―지금도 교하로 청와대를 옮겨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성남 근처 옛 일해재단 터가 좋아보이더군요. 지금 세종연구소가 전체의 10분의 1쯤 쓰고 있는 것 같은데 보안시설도 잘돼있고 서울공항까지 가는 지하도며 지하철도가 이미 다 건설돼 있어요. 아주 좋은 터라고 할 순 없지만 추가비용도 얼마 들지 않을 것 같고요."

―일해재단 터는 어떻게 알게 된 겁니까.

"전두환 대통령이 누굽니까? 상왕(上王) 노릇 하려 했으니 괜찮은 곳이겠다 싶어 가본 겁니다. 그곳으로 옮기는데 문제가 한가지 있긴 해요. 국민들은 대통령이 한강 남쪽으로 가는 것에 거부감을 갖잖아요.

―지금 청와대는 없애야 합니까.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 그 자체로 관광명소가 될 수 있지요."

최창조가 만능(萬能)일 수는 없다. 그는 청계천에 반대했지만 지금은 '잘한 일'이라고 했다. 광주광역시에 있던 전남도청을 옮길 때도 그는 무안을 추천했지만 실제론 다른 의도가 있었다고 했다.

"당시 해양국가 운운하는 이야기가 화두가 됐어요. 어차피 광주에서 옮긴다니 무안에 있는 삼향면 남악(南嶽)이란 말이 마음에 들었던 겁니다. 서울의 북악에 대한 남악의 상징성에 손을 들어준 거지요."

―한창 추진 중인 4대 강 정비는 어떤가요.

"해야지요. 지금 섬진강을 포함해 5대 강은 사람이 손을 안대면 부서질 정돕니다. 영산강이 제일 엉망이고 섬진강이 그나마 제일 낫지요."

―대운하(大運河)는?

"그건 반대합니다. 낙동강과 한강은 완전히 다른 생태계인데 그걸 연결시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렵고 꼭 해야 될 일도 아닙니다. 수운(水運)이 필요하면 그냥 부산에서 인천항으로 오면 됩니다."

―청계천 정비를 반대했지요.

"지금 해놓고 보니 잘한 거지요. 청계천뿐 아니라 안양천, 정릉천도 사람들이 건드려서 살려놓은 케이스입니다. 몇 년 전에는 물에 손 담그기가 무서울 정도였는데 지금은 왜가리가 날 정도잖아요. 청계천 반대한 건 풍수적 이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뭡니까.

"조선시대 어효첨이란 분이 있었어요. 청계천은 개천(開川)이라 했는데 그때도 정비 논란이 많았어요. 명당수(明堂水)거든요. '명당수는 맑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 비등했을 때 어효첨은 '이렇게 큰 도성의 개천을 명당수라한들 어찌 맑게 할 수 있느냐'며 반대했습니다. 부역이 심해질 것을 우려한 거지요. 반대한 그분도, 정비를 주장한 분들도 다 풍수의 대가였습니다."

―그렇습니까?

"당시 재상들은 다 풍수에 일가견이 있었어요. 어효첨은 죽은 뒤 강가에 묻어달라고 했습니다. 발복(發福)을 믿지 않은 거지요. 나중에 홍수가 나 무덤이 유실됐습니다만 옛 사람들이 지금의 겉 다르고 속 다른 이들보다 나아요."

―갑자기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 이야기는 뭔가요?

"풍수 이야기를 하면 그렇게 반대하던 분들이 어느날 술이나 한잔하자고 하더니 산소 자리를 잡아달라더군요. '공은 공이고 사는 사'가 아니나면서요. 허허."

―풍수의 대가도 잘못 볼 때가 있는가 봅니다.

"돌아가신 풍수대가 중에 육관도사와 지창룡 선생이 계십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분들이 자진해서 묏자리를 봐준 적이 있어요. 그분들이 아버지가 경기도 여주에 잡은 터에 매장하면 '6개월 내에 큰일이 난다'고 하니 제 형이 '네가 한번 가보라'는 겁니다."

―두 도사(道士)의 말에 당황했겠습니다.

"풍수적으론 안 좋은 땅이었어요. 정북향(正北向)이었거든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 아버지 성품 그대로 잡은 터였습니다. 형에게 그 말을 하니 '그러면 됐다'고 하더군요."

―6개월 내 큰일이 생겼습니까.

"아들 녀석이 '서울대에서 잘렸으니 큰 일 난 게 맞다'고 해서 '이놈아 잘린 게 아니라 내 발로 걸어나왔다'고 했지요."

최창조는 풍수가도 많이 틀린다고 했다. 명당에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풍수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가 커다란 돋보기를 들고 웃고 있다.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최창조와 지리학, 더 나아가 풍수와의 인연을 맺어준 매개체는 아버지다. 그의 선친은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위곡리에서 장작을 사 서울에서 파는 일을 했다. 최창조는 일곱 살 때부터 조수(助手)로 그런 아버지를 따라다녔다. 어린 그에게 우리 땅, 우리 마을은 뇌리와 몸속에 박혀버렸다. 그래서 그는 천성적으로 도시를 싫어했다. 그는 전북대에서 서울대로 옮긴 지 4년 뒤 교수직을 내던졌다. 만일 전주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서울대 교수는 왜 그만둔 겁니까.

"사람 만나는 게 겁났고요, 또 한가지는 영어를 잘 못했어요. 하와이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지금 이 장소로 다시 오느냐'는 영어를 운전기사가 못 알아듣는 거예요. 20분 동안 대화했는데도. 사실 서울대로 간 건 여러분 특히 류우익 교수의 권유가 컸어요. 그분이 제 어머니께 전화를 한 모양입니다. 어머니가 제게 '내가 보기 싫으냐'고 해요. 내키지 않았지만 서울로 왔죠."

―교수가 사람 만나는 걸 겁내다니요.

"완치됐지만 한때 '공황장애'에 시달렸거든요."

―서울대 교수 그만두고 후회하지 않았습니까.

"아내와 재래시장을 며칠 동안 관찰했는데 새벽 4시부터 짐나르고…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농사는 어렸을 때 해봐서 어려운 걸 알고. 집을 줄여 남은 돈으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SK그룹 고 최종현(崔鍾賢) 회장이 도와줬습니다."

―무슨 대가로….

"처음엔 산소자리 봐달라는 줄 알고 거절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집은 유목민 텐트 이상 지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었고 자기 소유의 집도 없었어요. '젊은이들이 한국인이라는데 자부심을 갖도록 연구를 해달라'는 거였어요. 지금은 삼성생명과 한화건설에서 도와주고 있고요."

―결국 부동산 터 봐주는 거 아닌가요.

"종합적인 자료가 올라오면 판단을 도와주는 거지요. 직관(直觀)을 빌려준다고나 할까요."

―재벌가의 명당터 운운하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서울에선 어디가 좋나요.

"서울에선 가회동이 제일 낫지요. 성북동도 북촌(北村)의 범주여서 아늑하고. 이태원동, 한남동은 외명당(外明堂)이어서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갈 곳입니다."

―강남 갑부들이 많다는 ○동은?

"서울 지세로 보면 청와대가 목줄기, 위장에 해당되는 곳이 무교동입니다. 대기업 본사와 은행 본점이 많지요. 창자 부위가 마장동 쪽입니다. ○동은 변기(便器)쯤 되는 위치인데 그 얘길 했다가 항의를 많이 받았어요. 저는 곧이곧대로 말한 거고, 요새 항외과라는 것도 많이 생기잖아요. 아들이 뭐라고 하더군요. '아버지는 창자에 비유하는 게 좋아? 변기에 비유하는 게 좋아?'라고요."

―이런 질문이 어떨지 모르지만, 지금 댁이 명당은 아닌 것 같은데. 아파트인데 1층이고.

"명당, 명당 하는 건 배우가 무대 탓하는 것이나 목수가 연장 탓하는 것과 같아요. 제가 이곳으로 온 건 대학 그만둔 후 생계가 막막해 넓은 집을 팔고 남은 돈을 생계에 쓰려 했던 겁니다. 1층은 장점이 많아요. 공짜로 수목 감상하고 엘리베이터 고장나도 염려없고 사고가 나도 금세 대피할 수 있잖아요. 자기가 좋으면 다 명당입니다."

―경기고 다닌 분치곤 꽤 괴팍한 성격 같은데.

"성적은 거의 꼴찌였어요. 단(段)은 못 땄지만 유도부 주장도 했고요. 고1 때부터 술을 마셨는데 그 덕을 톡톡히 봤어요. 당시 경기고에 '체인' '세븐스타'라는 서클이 있었는데 안상수 인천시장이 '체인' 보스였어요. 어느날 술집에서 마주쳤는데 유도부 주장이라 건드리지 않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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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에게] 우리가 만들어야 할 '국격(國格)'

이지영 미국 뉴욕주 Centereach High School 11학년

얼마 전 미국 레이크 플래시드에서 열린 스케이트 아메리카 대회에 다녀왔다. 그 대회에는 김연아 선수가 출전했는데 기대했던 대로 김연아 선수의 경기는 훌륭했고, 모든 관중들은 김연아 선수의 경기가 끝나자 우레와 같은 기립박수를 쳤다.

경기가 끝난 후에도 마치 우리나라 관중들처럼 외국 관중들도 김연아 선수가 제일 완벽했고 최고라고 칭찬하면서 대기실에 들어가는 김연아 선수의 뒷모습까지 사진과 동영상에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잘하는 선수에 대해서는 국경을 넘어서 모든 사람들이 공통으로 찬사를 보낸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관객들의 응원 모습은 그다지 바람직해 보이지 않았다. 김연아 선수가 나왔을 때만 유독 흥분하고, 소리를 지르고, 김연아 선수의 경기가 끝나자마자 다음 경기는 보지 않고 썰물같이 빠져 나가는 한국 관객들의 모습은 다른 나라 관중들의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다른 나라 선수들도 모두 피땀 어린 연습을 하고 나왔을 텐데, 이상하게 우리나라 관중들은 그들에 대한 박수에는 인색했다. 우리나라 선수에 대해서 더 큰 박수를 보내는 것은 당연하지만 다른 나라 선수들에게도 역시 예의를 표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거듭하였다.

이곳 미국에서 지내면서 정말 많은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대해 잘 모르고 있고, 또한 꼭 긍정적이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일 많이 아는 것은 한반도가 남한과 북한으로 분단되어 있다든지(더욱이 북한이 뉴스에 더 많이 나오기 때문에 남한보다 북한이 더 유명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국전쟁이 과거에 있었다는 정도이다. 조금 아는 사람들은 남한이 최근에 잘살게 되었다는 말도 한다. 우연히 만난 어떤 외국인은 한국을 '부자나라'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난 그 나라 사람들을 보면서 나라의 수준을 판단하게 된다. 우리나라가 과거 50년 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 중의 하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후 엄청난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 경제적 부를 뒷받침할 품위와 여유는 아직 부족한 것 같다. 지나친 판단인지 모르겠지만 응원을 갈 수 있는 경제적 부는 이루었지만 경기를 즐기면서 응원하는 여유는 아직 갖추지 못한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만 우리나라가 정말 잘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 몇몇 최강대국만 빼면 우리나라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잘사는 나라가 됐으므로 이제는 경제적 부의 축적과 더불어 나라의 품위까지 갖추어야 할 시점에 온 것 같다. 나라의 품위, 즉 국격(國格)은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우리 개개인이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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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식이 만난 사람] 결혼정보업체 선우 이웅진 대표

 

"첫눈에 반했다는 건 '느낌'일 뿐… 결혼해도 헤어지는 경우 많아"
"30대 중반~40대 초반 똑똑한 여성들은 비극의 세대"
"이혼 사유 1위는 변심이 아니라 경제력이죠"
"학원 사무실 한 귀퉁이고물 책상 두개와전화기 한대로 시작"

'오래전 작은 인연이 저희를 연인으로 만들었고, 오늘 그 인연이 하나가 됩니다….'

가을에는 청첩장이 많이 날아왔다. 나이가 드니 한때 불꽃처럼 타올랐던 열정도 시들해 보이고 부양의 현실적 책무만 남지만, 다시 결혼에 대해 생각했다. 언젠가 내 자녀들도 이 길을 갈 것이다.

선우의 이웅진 대표는“사랑이 있는 결혼이 최고지만 사랑만으로 결혼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사랑과 결혼은 어떤 관계입니까?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어요."

지금껏 6000쌍의 결혼을 성사시킨 선우의 이웅진(44) 대표가 말했다. 그는 1991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결혼정보업체'라는 걸 만들었다. 이는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 됐다. 이때부터 '중매쟁이' '마담뚜' '결혼상담소'는 철 지난 유행처럼 뒷전으로 밀려났다.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경우를 믿지 않나요?

"첫눈에 반했다는 것은 '느낌'이지, 지속되는 사랑은 아닙니다. 그런 느낌으로 결혼한 이들은 나중에 이혼을 많이 합니다."

―사랑은 원래 불 같은 느낌이 아닌가요?

"순간의 호감도를 사랑으로 착각하는 겁니다. 그건 언제든지 변질될 수 있어요. 남녀가 결혼해서 40~50년을 산다면 그런 느낌만으로는 지탱해낼 수 없어요. 결혼하면 끝이 아니라 결혼 한 뒤의 '후속편'을 생각해야 합니다. 서로 대화가 통하고 갈등이 생기는 요인이 적고, 경제력도 뒷받침돼야 사랑은 지속될 수 있지요. 이혼 사유의 1위는 '변심(變心)'이 아니라 '경제력'입니다."

―결혼정보업체는 사랑보다 조건과 계산에 따른 결혼 문화를 만들어왔지요?

"조건이 아니라 환경입니다. 앞으로 함께 살아가려면 통(通)할 수 있는 점을 검증하려는 것이죠. 무엇보다 학력과 직업, 집안을 봐야 합니다. 상대가 어떤 교육을 받아왔고 어떤 부모 밑에서 자랐는지를, 결혼을 염두에 두는 만남이라면 누구나 처음에는 이런 걸 다 따지죠. 비슷한 환경 출신끼리 만나 결혼했을 때 더 잘 산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사랑과 결혼을 너무 물질화시키고 있지 않나요?

"실제 모든 만남이 그런 욕망을 숨겨놓고 있는 겁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면 위선적이지요. 소위 '신분'을 뛰어넘는 운명적인 사랑이란 소설이나 드라마 속에나 있지 현실에는 거의 없어요. 설령 있어도 결혼 후에도 그렇게 멋있게 지속될까요?"

―얼마 전 당신 회사의 웹사이트를 통해 200억원대 재산을 가진 49세 여성이 "연하의 남편감을 구한다"고 공개 구혼한 적이 있지요?

"며칠 만에 400여명의 지원자가 몰렸지요. 20대 청년도 있었고, 직업별로는 대기업, 전문직을 포함해 언론사 출신도 있었습니다. 아직 결혼이 성사되지는 않았어요. 조건이 좋은 여자와 결혼하려면 남자가 꼭 버려야 할 게 있어요. 자존심이지요."

―젊은 남녀가 만나 새로운 삶을 출발하는 게 결혼인데, '돈으로 상대를 구하겠다니 결혼이 이렇게 타락했나' 생각도 들더군요.

"이분이 돈을 내세웠던 것은 아닙니다. 직업, 학력, 미모, 경제력 등 사람마다 제 나름의 장점이 있어요. 우리가 이분에게는 '경제력'을 부각했던 거지요. 이를 '배금주의'라고 한다면, 학벌을 내세우면 '학벌주의', 직업은 '직업차별주의', 미모는 '미모지상주의'가 됩니다. 이분의 경우를 보면 돈 많은 사람도 결혼 문제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방증이 될 수도 있죠."

―젊은이들은 교제할 때 상대의 어떤 조건을 우선 봅니까?

"남자는 외모와 직업을 보고, 반응을 잘하는 여성을 좋아합니다. 반면 여자는 장래성을 보고, 점잖은 남자를 선호해요. 직업으로는 공무원, 공사(公社), 대기업 회사원 등이 인기가 높습니다. 한때 '열쇠 3개' 말이 있을 정도로 판·검사를 높이 쳤지만 지금은 선호도가 많이 떨어졌습니다. 있는 집의 여자 부모들도 '그런 결혼을 하면 내 딸이 피곤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유능한 직장 여성들 중에는 일에 매달리다가 결혼 적령기를 놓칩니다. 서른 넘은 여성은 결혼정보업체에서도 잘 안 받아준다면서요?

"요즘에는 직장 안 다니는 여성은 결혼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직장을 구하고 일에 매이다 보면 적령기를 놓쳐요. 30대 중반부터 40대 초반의 똑똑한 여성들이 '비극의 세대'입니다. 통상 '서너 살이 더 많고 키는 크고 학벌이 좋거나 비슷해야 한다'는 게 배우자에 관한 공식이지요. 그러니 이분들의 결혼 상대는 이미 유부남입니다. 사회적 성취를 한 입장에서는 억울한 것입니다. 지금 결혼문화에서의 가장 희생자는 여성 자신이 된 거죠."

―어떤 조언을 해줄 것인가요?

"남자가 여자보다 더 똑똑할 필요가 있느냐, 더 연상일 필요가 있느냐, 한마디로 자신을 내조할 수 있는 '남자 신부'를 만나라는 것이지요. '이상형'에 매달리면 결혼은 점점 어려워집니다.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더 불리해진다는 거죠."

―직장에는 '무심한' 노총각들도 있습니다.

"여성의 결혼이 늦는 것은 사회적인 문제이지만, 남성은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굉장히 눈이 높거나 결혼할 준비가 안 돼 있는 경우지요."

―어떻게 주선하면 결혼 성사율을 높일 수가 있죠?

"누구나 자기보다 나은 상대를 원하죠. 우리는 현실에서 이들의 '욕망'을 설득하는 거죠. 당신은 상대에게서 어떻게 비쳐질 것인지를 말해줍니다."

―짝을 지워줘도 결코 결혼에 성공 못하는 유형도 있지요?

"남자의 경우 너무 외모에 집착하면 결혼을 못 합니다. 상대 외모의 빈틈만 찾아내는 이도 있어요. 그래서 400번 이상 선본 사람도 있습니다. 여자의 경우는 부모가 너무 간섭할 때 잘 안 됩니다. 또 네 번째 만날 때까지도 여자가 데이트 비용을 분담하지 않아도 문제가 발생합니다."

―'결혼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는 말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이면 집사람의 눈치를 봐야 하고, 당신은 결혼정보업체 사장이니 당연히 결혼에 찬성이겠지요?

"혼자 살아도 멋이 있고 문제 없지 않으냐 하는데, 이는 대부분 젊고 힘이 넘치는 인생 황금기 때의 판단입니다. 늙어서도 '화려한' 싱글은 없습니다."

아직은 결혼을 사랑의 '해피엔딩'으로 믿습니다. 영화와 고전적 소설 속에서 그랬습니다. 오늘도 청춘남녀들은 결혼할 짝을 구하기 위해 그렇게 노력하는 중입니다.

―하지만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너무 '싱겁게' 이혼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 열정과 투자한 시간이 너무 허무하지 않을까요?

"이성을 만나는 기회를 많이 갖는 대신 열정은 없어진 것 같아요. 만남의 감동이 사라진 거죠. 열정을 불사르는 방법은 못 배웠어요. 옛날에는 노력할 데까지 노력하고 헤어졌어요. 지금은 쉽게 만나니 상대에 대한 노력을 하지 않아요. '쿨하게' 헤어집니다. 이혼을 하는 이유를 통해 어떻게 결혼해야 하는지 답을 얻을 수 있지요."

―당신은 어떻게 결혼했나요?

"어려운 시절 도서대여업을 할 때 만난 여성이었는데, 제가 결혼정보업체를 처음 차렸을 때는 여성 회원으로 맞선 자리에 나가곤 했어요. 그러다가 저와 결혼했어요."

그는 찢어질 듯 가난한 집안의 출신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육성회비 600원을 못 내 선생님께 여러 번 혼이 나자 처음 가출했고, 그 뒤로는 상습적인 가출 소년이었다. 돈을 벌어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겠다는 결심으로 극장에서 껌을 팔기도 했다.

중학교를 겨우 졸업한 뒤 정규 학력을 접고(재작년에 성균관대를 졸업), '아르바이트 학생'이라며 일용품을 팔러 다녔다. 나중에는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화장지를 판매하기도 했다. 이어 사람을 찾아다니며 책을 빌려주고 회수해오는 도서대여업을 했다. 한창때는 회원 숫자만 5000여명에 달했지만 파산했다.

1991년 선배가 운영하는 학원 사무실의 한 귀퉁이에 고물 책상 두 개와 전화기 한 대를 놓고 지금의 회사를 차렸다. 당시 그는 한 예식장에서 하객으로 가장해 반년 동안 점심을 해결했다고 한다.

―결혼정보업체로는 당신 회사가 제일 먼저 시작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때 제 나이 24살이었어요. 도서대여업을 할 때 회원 관리를 위해 회원등반모임을 가졌어요. 횟수가 잦아지면서 남녀회원 간에 서로 눈이 맞아 커플이 생겼어요. 거기서 힌트를 얻었어요. 만나게 해주는 것이 돈벌이가 되겠다고. 버스나 지하철에 올라타 '새로운 결혼 문화를 책임질 이웅진입니다. 여러분 가족 중에 미혼이 있다면 연락 주세요'라며 전단을 뿌렸지요. 이런 기억 때문에 초창기에는 신입사원을 채용할 때 지하철 안에서 승객을 상대로 자기소개를 다섯 번씩 하도록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 뒤로 결혼정보업체들이 많이 생겨났죠?

"400개쯤 됩니다. 대부분 쉽게 창업하지만 성공한 회사는 별로 없습니다. 국내 미혼남녀(24~30대 후반)를 700만명쯤으로 보면 결혼정보업체를 통하는 수는 15만명이 됩니다. 우리는 회원관리를 모두 전산화했어요. 10만명의 목록이 있습니다. 성사율은 약 20%입니다. 대부분 고객들은 잘 되면 본인이 잘 돼서, 안 되면 주선이 잘못돼서라고 여기지요."

―결혼정보업체에서 짝지워 주는 상대에 대해 과연 얼마나 믿을 수 있지요?

"처음에는 '사이비 업체'라는 소리도 많이 들었습니다. 결혼한 사람이 신분을 속인다든지 상대를 성적 유린을 한다든지….'커플 매니저'라는 직업에도 시선이 안 좋았습니다. 한번은 면접을 보는데, 응시자가 창밖을 계속 봤습니다. 혹 무슨 일이 있을까 봐, 부모님이 따라온 겁니다. 이런 시선 때문에 김장미팅·효도미팅·헌혈미팅 등 이벤트를 많이 했습니다. 처음에는 여성 회원은 무료였어요. 남성 회원보다 여성 수가 모자랐지요. 지금은 여성의 비율이 더 높아 회비도 더 비쌉니다. 신뢰성이 확보됐다는 뜻입니다."

4년 전에는 싱가포르 정부 관계자가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의 회사를 찾아왔다. '출산율을 높이려면 결혼을 많이 시켜야 한다'는 전략에서다. 이 때문에 그는 내년 초 싱가포르에 지사를 연다. 싱가포르 정부 차원의 지원이 있다고 했다. 그는 이미 미국에도 지사를 설립했고, 영어권 사이트와 중국어 사이트를 곧 개설한다. 그의 말로는 "결혼 사업으로 이 세상 끝까지 가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국적 불문하고 대부분 나이가 되면 결혼을 위해 짝을 만나려고 할 것이다.

―당신이 결혼 안 했다면 어떻게 결혼하고 싶나요?

"결혼에 대해 너무 많이 아니까….고민을 많이 할 것 같아요."

―고민만 하고 결혼을 안 할 건가요?

"어떻게 살아왔나를 알려면 가정환경을 볼 것이고, 숨겨진 성격이 어떤지 알려면 술도 마셔보고 여행도 같이 해볼 겁니다. 사랑 없이는 결혼할 수가 없지만, 결혼에는 사랑만으로 볼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이 있어요. 사랑은 몰라도 결혼에는 책임이 따르니까요."

그런 뒤 "물론 또 다시 결혼은 하지 않을 겁니다"고 덧붙였다.

"자기 집에서 자신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없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게 마련이다."

- 괴테 Johann Wolfgang Goethe

- 인왕산 鶴학巢소島도에서 최범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