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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이신 최명 서울대 명예교수

오랜만에 선생님을 모시고 선배들과 즐거운 저녁을 보냈다

강정인 서강대 정외과 교수(가운데), 구갑우 (경남대)북한대학원대학 교수(벽쪽)

김영순 서울시립대 교수(외쪽), 김영수 영남대 교수(오른쪽)

[편집자에게] 정치학과 실종 사건 유감

 
최명·서울대 명예교수

서울의 한 유수한 대학이 구조조정을 한다고 하여 톱기사로 났다. 구조를 조정하든 기구를 개편하든 그 조직의 사정에 따른 것이겠으나, 나는 평생을 대학에 몸담고 있던 사람이라 관심이 없을 수 없었다. 그 신문에 새로 조정된 도표가 나서, 자세히 들여다보았더니 내가 평생 전공하고 가르치던 정치학의 정치학과(혹은 정치외교학과)는 눈을 비비고 봐도 없었다. 뭐가 있기는 한데, 그것은 '행정·정책' 그런 것이었고, 정치학은 없 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조선일보 '만물상' 칼럼에 '대학 학과 통폐합'이란 제목의 글이 실렸다. 1950년대에 정치학과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우상의 학과였다"고 한 원로 언론인의 말을 인용하고는, "광복 후 새 나라를 세울 인재가 필요할 때 대학의 정치학과는 인재 산실이었다"고 했다. 그런 정치학과가 그 대학의 구조조정에서 날아간 모양이다. 이제는 인재가 필요하지 않은 것인가, 인재를 배출하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요새 우리의 여의도 정치가 하도 엉망이라 그것이 정치학과와 관련이 있다고 판단한 결과인가?

정치와 정치학은 다른 것이다. 정치학은 정치를 연구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잘못 가르쳐서 우리의 정치가 개판이 된 것은 아니다. 그것을 연구하고 분석함으로써 보다 나은 정치의 기틀을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 정치학 공부의 본연인 것이다. 시대가 변하면, 그래서 시대의 요구가 변하면 무언지 변한다. 그것을 나무라는 것은 아니다.

변해도 되고, 변해서 좋은 것도 있다. 그러나 변하지 말아야 하는 것도 있다. 정치학은 모든 학문의 대종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학문은 정치학과 물리학으로 대표되었다. 19세기 영국의 사상가로서 '영국의 헌법'이란 책으로 일세를 풍미한 월터 배조트도 '물리학과 정치학'이란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또 공자나 맹자를 예로 들 것도 없다. '논어'나 '맹자'도 다 정치학 교과서이다. 수신제가를 한 다음에 나라를 다스리면 좋은 사회가 된다는 이야기다. 우리의 조상들이 왜 '사서삼경'을 읽고 또 읽었겠는가? 거기에는 그 나름대로의 정치학의 진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기술의 시대인지 모른다. 그러나 기술자들만 모여서 그 조직이 잘되는 것은 아니다. 기술자들과 함께 갈 지도자가 필요한 것이다. 정치학과에서 배출하는 인재는 바로 그러한 지도자인 것이다. '군자불기(君子不器)'라고 했다. 한둘의 기술에 능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포용하는 창조적 리더십의 인재를 만드는 곳이 정치학과이다. 흔히 이야기되는 문사철(文史哲)의 본산이 정치학이다. 세월이 흐르면 요즘의 사회과학대학이 정치학대학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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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오른 최초의 8천 미터 안나푸르나의 이마를 마주하며 걸어가는 멀고 깊은 산의 길. ‘꽃 피는 시절에 만나 꽃 지는 시절에 헤어진’ 오랜 이름까지 고스란히 다 불러내고 마는 그리움의 길.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꿈꾸며 느리게 걸어가는 길.

 

 

가장 경이롭고 장엄한 풍경들

가슴에 산을 품은 사람들에게 네팔은 낙원이다. 지구라는 별에서 가장 경이롭고 장엄한 풍경을 선물하는 히말라야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네팔의 수많은 트레킹 코스 중에서도 안나푸르나 산군을 따라 원을 그리며 도는 ‘안나푸르나 어라운드’는 트레킹의 여신으로 꼽힌다. 안나푸르나 산군의 최고봉인 안나푸르나는 그 높이가 8,091m로 지구에서 열 번째로 높은 산이다. 주변으로는 안나푸르나 2봉(7,937m), 3봉(7,555m), 4봉(7,525m), 안나푸르나 사우스(7,273m), 강가푸르나(7,454m), 닐기리(7,061m), 마차푸차레(6,997m) 등 아름다운 7천 미터급 봉우리들을 거느리고 있다. ‘풍요의 여신’이라는 그 이름이 뜻하는 대로 안나푸르나로 가는 길은 풍성하다. 나무와 꽃과 숲, 사람의 마을, 만년설이 쌓인 설산과 빙하가 가득하다. 전기가 들어와 밤늦게까지 책을 읽을 수도 있고, 뜨거운 물에 몸을 씻을 수도 있다. 한 마디로 최소한의 경비로, 최대한의 편리를 보장받으며, 최상의 풍경을 접할 수 있는 최고의 트레킹 코스다.

손에 잡힐 듯한 강가푸르나 빙하

트레킹의 시작점은 해발고도 820m의 베시사하르(Besisahar). 구룽족의 마을로 ‘구르카’로 불리는 네팔 용병들의 다수가 구룽족 출신이다. 저지대의 계단식 밭과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숲을 통과하는 사이 참제(Chamje), 바가르샤합(Bagarchhap 2,160m), 차메(Chame 2,710m), 피상(Pisang 3,240m)등의 마을을 지나면 마낭(3,570m)이다. 강가푸르나 빙하가 손에 잡힐 듯 다가서는 마을로 대부분의 트레커들은 고도적응을 위해 이곳에서 이틀간 머문다. 오랫동안 무역으로 번성해온 마낭은 등산 장비점에서 인터넷 카페까지 트레커들이 필요로 할 만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식물의 생장한계선을 넘어선 렛다르(Letdar 4,250m)를 지나면 4,420m의 쏘롱 페디(Thorung Phedi). 페디는 ‘언덕의 발치’라는 뜻. 이름처럼 쏘롱 페디는 해발고도 5,416m의 고개 쏘롱 라(Thorung La)의 발치에 엎드린 마을이다.

길은 험하고, 험한 만큼 아름답다

쏘롱 라를 오르는 일은 육체적, 정신적 한계에 대한 도전이다. 길은 험하고, 험한 만큼 아름답다. 가쁜 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보면 푸른 하늘과 눈 덮인 산뿐이다. 기도 깃발이 휘날리는 쏘롱 라 고개의 정상에 서면 그 모든 고생을 보상해주듯 안나푸르나의 산군이 압도적으로 펼쳐진다. 숨을 고르며 히말라야의 연봉들을 감상했다면 이제 3,800m의 묵티나트(Muktinath)까지 1,600m를 내려가야 하는 일이 남아있다. 묵티나트로 들어서면 풍경은 다시 변한다. 설산과 자갈 덮인 사막 같은 불모의 땅 옆으로 보리가 자라는 푸른 논과 마을이 이어진다. 묵티나트에서 잘콧(Jharkot)을 거쳐 카그베니(Kagbeni)로 이어지는 길은 사막과 같이 황량한 풍경이다. 가파른 바위 절벽길을 통과해 에클라이바티(Eklai Bhatti) 마을을 지나면 자갈길이다. 절벽에서는 자갈이 굴러 떨어지고, 온몸을 날릴 듯 불어오는 강풍이 코와 눈, 입속으로 모래를 밀어 넣는다. 

 

모래 강풍 속을 통과하고 나면 좀솜(2,713m). 비행장까지 갖추고 있는 좀솜은 이 지역의 중심지다. 안나푸르나 구간에서 가장 예쁜 마을로 꼽히는 마르파(Marpa 2,680m)와 툭체(Tukuche 2,590m)는 사과로 유명하다. 긴장을 푼 트레커들이 애플 와인을 마시며 오랜만에 음주를 즐기느라 시끌벅적하다. 좀솜에서 마르파와 툭체를 거쳐 칼로파니(Kalopani)까지 이어지는 칼리 간다키(Kali Gandaki) 강의 협곡은 동쪽으로 안나푸르나 연봉들과 접하고 서쪽으로 다울라기리(8,172m)에 접해 형성된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협곡이다. 바람을 피하기 위해 만든 터널과 좁은 골목이 인상적인 라르중(Larjung 2,570m)과 가사(Ghasa 2,120m)를 지나면 따또파니(Tatopani 1,190m).

 

그리워하게 될 히말라야

‘따또파니’는 네팔어로 ‘뜨거운 물’이라는 뜻이다. 이름처럼, 강변에는 뜨거운 온천이 솟아난다. 해발 고도 천 미터가 넘는 곳에 자리 잡은 노천탕이다. 탕 속에 몸을 담그고 눈을 들면 파란 하늘 끝자락에 게으른 흰구름이 어슬렁거린다. 탕 안의 바위에 책을 올려놓고 소설을 읽는다. 책 읽기가 지겨워지면 신선한 오렌지주스나 피자를 배달시킬 수도 있다. 따또파니에서 다시 1,500m를 오르면 고라파니(Ghorapani 2,750m). 이곳에서 한 시간 거리인 푼힐(Poon Hill 3,210m)은 히말라야가 선사하는 최고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꼽힌다. 안나푸르나 연봉들과 다울라기리, 닐기리, 마차푸차레가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다울라기리의 일출과 안나푸르나의 일몰은 말이나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경이로움이다. 푼힐에서 히말라야의 정기를 듬뿍 받았다면 이제는 산을 내려오는 일만 남았다. 도시로 돌아가는 버스를 탈 수 있는 나야풀(Naya Pul)에 도착하면 곧 깨닫게 된다. 히말라야에서 보낸 날들을 오래도록 그리워하게 되리라는 것을.  

혹시라도 남몰래 품은 이름 하나가 있다면 히말라야에는 오지 말기를. 아름다운 것들 앞에서 더 간절해지는 이름이라면 히말라야는 끝끝내 피하기를. 바다의 물결이 달을 살찌우듯 안나푸르나는 당신의 그리움을 키우고 또 키워 마침내 울게 만들지도 모르니까.

코스 소개
안나푸르나 산군의 외곽을 반시계 방향으로 도는 250여 킬로미터의 코스로 네팔에서 가장 인기 있는 트레킹 코스다. ‘안나푸르나 어라운드’ 혹은 ‘안나푸르나 라운딩’으로 불린다. 1977년에 외국인 여행자들에게 개방된 이후 빼어난 자연환경과 문화적 다양성을 갖춘 최고의 트레킹 코스로 꼽혀왔다. 아열대, 온대, 한대를 지나는 동안 다양한 부족들의 삶을 가까이서 들여다볼 수 있으며, 장엄한 북부 히말라야의 풍경과 건조하고 황량한 사막의 풍경까지 즐길 수 있다. 곳곳에 숙박시절과 식당이 있어 비교적 가벼운 장비로 편하게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는 장점까지 따라온다. 피상, 브라가, 마낭, 카크베니, 마르파, 좀솜 같은 어여쁜 마을, 황량한 아름다움의 묵티나트, 체력의 시험장 쏘롱라 등 다양한 매력으로 가득한 코스다. 안나푸르나 산군은 히말라야 중부에 줄지어선 고봉으로 길이가 55킬로미터에 달한다. 보통 보름이 소요되는 이 구간의 최대 난코스는 5,416m의 쏘롱 라를 넘는 구간이다. 

 

찾아가는 법
한국에서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까지 비행기로 이동한 후 버스로 둠레(Dumre)까지 간다. 그곳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베시사하르까지 간다. 총 8-9시간 소요. 포카라에서 출발한다면 베시사하르까지 버스로 6시간이 걸린다.  

 

여행하기 좋은 때
트레킹하기 좋은 시기는 9월 중순부터 11월까지, 4월부터 5월 중순까지다. 그 중에서도 우기가 끝나 설산이 가장 가깝고 선명하게 드러나는 10월과 11월이 최적기다. 대신 전 세계에서 몰려든 트레커들로 몹시 붐빈다. 12월 말부터 3월 말까지는 쏘롱라의 통행이 눈 때문에 막혀 전 구간 완주는 불가능하다. 6월부터 9월은 우기. 

 

여행팁
대부분의 트레커들이 베시사하르에서 트레킹을 시작해 반시계방향으로 일주하는 이유는 쏘롱라 때문이다. 서쪽 사면의 경사가 심해 서쪽에서 동쪽으로는 하루에 넘기가 힘들어 보통 동쪽에서 서쪽으로 넘어간다. 어느 계절에 트레킹을 하든 두꺼운 오리털 침낭과 동계용 등산 장비의 준비는 필수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추위가 심해지므로 반드시 장비를 꼼꼼히 챙겨야 한다. 해발고도 3,000m를 전후해서는 고산병에 걸릴 수 있으므로 최대한 천천히 걷고, 고산병이 심해지면 하산을 서둘러야 한다. 보통 15일 정도가 소요되지만 날씨가 급변하면 발이 묶일 수 있으므로 시간을 넉넉히 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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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 페이퍼진] 잊을 수 없는 순간들 : 박영석

대통령 축하 전화? 차라리 라면이나 보내주지…
2005년 북극점 정복…식량 없어 3일간 '시체놀이'
히말라야 14좌 등정-3극점 정복…산악 그랜드슬램

히말라야 14좌 완등, 7대륙 최고봉 등정, 지구 3극점 정복!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달성한 산악 그랜드슬램이다. 세계적인 탐험가가 많아도 아무도 이런 업적을 남기진 못했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세계 최단기간(8년 2개월) 14좌 완등, 동계 랑탕리 초등, 세계 최초 6개월간 히말라야 8000m급 5개봉 등정, 세계 최초 1년간 히말라야 8000m급 6개봉 등정, 아시아 최초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 세계 최단기간 무보급 남극점 도달.... 이게 박영석이다.


▶'서울 촌놈', 산악인 되다

어릴 때 이태원에 살았다. 서울 한복판이었지만 바로 뒤에 남산이 있어 시골 아이들 못잖게 촌스럽게 자랐다. 가재도 잡고, 두릅도 따고, 아버지와 솥 들고 올라가 닭백숙도 해먹고.... 주말마다 아버지를 따라 들로 산으로 다니다 네 살 때 북한산 백운대(836m) 정상을 밟았고, 이후 설악산, 오대산, 북한산, 도봉산, 관악산을 수시로 올랐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로부터 충격적인 선물을 받았다. 여행가 김찬삼씨가 쓴 10권짜리 '세계여행전집'이었다.

"고1 때 이사하면서 잃어버릴 때까지 100번도 더 읽었습니다. 아주 너덜너덜할 때까지 보고 또 봤어요. 북극과 히말라야 같은 대자연 사진을 보면서 탐험가를 동경했고, 꿈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77년 고상돈 선배가 에베레스트를 올랐을 때는 정말 멋있는 등반가, 탐험가가 되고 싶었죠."

오산고 2학년 때 서울시청 앞을 지나다가 우연히 카퍼레이드를 목격했다. '마나슬루 원정대 등정 축하 퍼레이드-동국대 산악부'. 무릎을 쳤다. "저거다! 나도 저기 들어가 세계 최고가 되자!" 순간적으로 인생 항로를 잡았다. 어쩌면 어릴 때부터 해 오던 생각을 이날 매듭지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동국대를 어떻게 들어가느냐였다. 책을 멀리한 게 후회가 됐다. 결국, 재수까지 해 기어이 체육교육학과에 입학했다. 군기 센 학과답게 연일 집합이 걸리는 통에 신입생 환영회가 끝나고서야 간신히 산악부 문을 노크했고, 그 후로는 아예 산악부 룸에 가서 살았다. 한데 산악부 군기도 학과 못잖았다.

"과에서 두들겨맞고, 산악부에서 두들겨맞고,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지만, 그래도 즐거웠습니다. 물론 지금 1학년부터 다시 하라면 안 하겠지만요."

큰 산에 오르고 싶어 2학년 말 일본 북 알프스에 도전했다.

"폭설에 영하 30도의 한파까지 겹쳐 죽을 고생 했습니다. 3층짜리 산장이 지붕만 보일 정도였죠. 입산이 금지돼 있었는데 어떻게 뚫고 들어가 정상을 밟았습니다. 눈이 어떻게나 쏟아지는지 담배를 못 피울 정도였어요. 3190m 봉우리였지만, 나중에 보니 히말라야 6000~7000m급보다 더 힘든 코스였더라고요."

▶온 세상을 발 아래

88년 유럽 알프스 3대 북벽을 오르며 맷집을 키웠다.

아이거 북벽을 탈 때는 자신을 키운 2년 선배 허종행이 실족사하는 바람에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 빠지기도 했다.

3학년으로 복학한 89년 봄 히말라야 랑시사리 1,2봉을 연거푸 올랐다. 힘들게 정상에 올랐는데 알고 보니 제2봉(6154m)이었다. 그래서 베이스캠프까지 내려와 다시 제1봉(6427m)에 올랐다. 실수가 부른 횡재였다.

그해 겨울 26세의 역대 최연소 원정대장이 되어 히말라야 랑탕리(7025m) 동계 초등에 성공했다.

후배 2명과 팀을 꾸렸는데 돈이 없어 네팔까지 가는 항공권만 끊었고, 돌아올 때는 원주민에게 침낭이며, 시계며 가진 것 몽땅 팔아 여비를 마련했다.

장비도 다 마련하지 못해 현지 한국인 게스트하우스 '빌라 에베레스트'의 신세를 졌다.

다른 원정대가 쓰고 그 집 창고에 버려둔 단프라박스를 얻어 테이프로 칭칭 감아 사용했다.

박스마다 '87년 로체원정대', '부산원정대' 등 이름이 달라 다들 어느 원정대인지 헷갈려 했다.

"오죽했으면 우릴 보고 '자투리 원정대'라고 했을까요.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지 9일 만에 등정했습니다. 돈이 없으니 오래 버틸 재간이 있습니까. 그래서 빨리 해치웠죠. 덕분에 돈 덜 들이고 원정대 꾸리는 노하우를 터득했습니다."

93년 5월 16일 에베레스트(8848m) 무산소 등정을 시작으로 히말라야 14좌를 정복해 나갔다.

96년까지 초오유와 안나푸르나를 추가한 뒤 97년 들면서 다울라기리, 가셔브룸1, 가셔브룸2, 초오유, 로체 등 5개 봉을 접수, 카르솔리오(멕시코)가 보유하고 있던 한 해 8000m급 봉우리 4개 등정 기록을 갈아치웠다.

경기도 시흥의 아파트 한 채를 고스란히 털어 넣은 결과였다.

98년 시샤팡마, 낭가파르밧, 마나슬루, 99년 칸첸중가, 2000년 마칼루, 브로드피크 정상을 차례로 밟은 뒤 2001년 7월 22일 K2봉 꼭대기에 서면서 역대 아홉 번째 14좌 완등을 달성했다.

이 죽음의 행군에 걸린 시간이 8년 2개월. 세계 최단기록이다.

2002년 남미 최고봉 아콩카과, 오세아니아 최고봉 칼스텐츠, 남극 최고봉 빈슨매시프를 오르며 7대륙 최고봉 정복까지 마무리했다.

▶그랜드슬램을 향하여

더는 오를 데가 없자 극점으로 향했다. 2003년 3월, 여섯이 북극점 도전에 나섰다. 60일 일정으로 러시아를 출발해 1200㎞ 행군을 시작했다.

보급은 없다. 애당초 물자를 몽땅 갖고 떠난다. 식량, 연료, 카메라 장비 등 1인당 120~130㎏에 달하는 물자를 개썰매에 싣고 개 대신 끌고 가는 것이다. 북극점에 도달하면 귀환은 헬기로 한다.

위험하기로 치면 히말라야지만, 힘들기로 따지면 북극점이다.

얼음이 녹기 전에 시간 안에 도착해야 하고, 무게 때문에 갖고 갈 수 있는 식량 또한 한정적이라 기계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기록이나 사진으로 충분히 공부하고 나섰지만, 현지에서 부딪치는 사정은 너무 달랐다.

출발한 지 사흘 만에 모든 게 얼어버렸다. 전선이 얼어 부러지는 바람에 노트북이며 솔라판은 무용지물이 됐고, 카메라 필름은 감으면서 다 부서졌다.

입김은 나가면서 얼어 수염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열렸다.

체온으로 생긴 습기와 땀으로 파카와 침낭은 영하 50도의 혹한에 사정없이 얼어붙었고, 텐트는 텐트대로 버너가 만든 습기가 얼어 이글루로 변해갔다.

파카는 벗을 때마다 찌지직 찌지직 얼음 갈라지는 소리를 내고, 침낭은 숫제 빙낭이 되었다.

얼음 깨겠다고 충격을 가하면 옷감이 찢어지니 그럴 수도 없고, 버너에 녹이자니 시간도 시간이고 연료도 생각해야 했다.

멋모르고 다운파카, 다운침낭 가져간 게 패착이었다.

"오리털은 젖으면 한 곳으로 뭉친다는 사실을 깜빡한 거죠. 파카와 침낭이 젖으면서 오리털이 한 군데로 뭉쳤고, 그게 덩어리째 얼어버린 겁니다. 나중엔 파카와 침낭이 홑겹이 되더라고요."

9㎏짜리 텐트가 열흘 지나자 20㎏이 넘었다. 얼음이 두께를 더해 갔지만 떼어낼 재간이 없으니 그냥 갖고 다닐밖에. 나중엔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 얼음 덩어리로 변한 내피를 잘라내고 말았다.

신발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땀이 얼어 발을 압박하니 틈틈이 숟가락으로 긁어내야 했다.

화가 날 정도로 추웠다. 오죽했으면 밤새 씩씩거리며 "다시 오면 내가 개다"를 되풀이했을까.

영하 50도에서 잠은 사치다. 빙낭에 들어가 비몽사몽 시간 보내는 게 곧 잠이다. 다들 기상 시각인 새벽 4시만 기다렸다. 버너를 켤 수 있어서다. 그때 비로소 몸도 녹이고, 장갑도 말리고, 잠깐 조는 걸로 부족한 잠도 보충한다.

실은 잠보다 온기가 더 절실하다. 그래서 잠을 줄이며 새벽 3시에 일어난 적도 많다.

용을 썼는데도 행군 속도가 떨어지면서 목표로 잡았던 4월 30일 도착이 불가능해졌다. 그동안의 고생이 아까워 밀어붙이려 했지만, 러시아에서 헬기를 보내줄 수 없다고 버텼다. 더 늦어지면 얼음이 녹아 위험하다는 게 이유였다.

"결국, 포기했죠. 실패로 인한 분함보다는 이 지옥에 다시 와야 한다는 생각에 기가 막혔습니다."

그해 겨울 방향을 남극으로 돌려 44일 만에 등정에 성공했다.

북극은 유빙을 타고 올라가지만, 남극은 땅이라 훨씬 수월했다.

▶마침내 북극점에 서다

2005년 2월 다시 북극점을 향했다. 이번엔 후배 3명(홍성택 오희준 정찬일)과 함께 넷이서 캐나다 워드헌터를 출발했다.

직선거리는 1000㎞였지만, 실제로는 2000㎞ 행군이었다. 자고 나면 얼음판이 떠내려가 있고, 다시 진군하면 또 떠내려가 있고.... 어떤 날은 10㎞를 걸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20㎞ 후퇴해 있기도 했다.

그렇다고 판판한 얼음판을 걷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다. 떡 벌어진 얼음 틈새도 건너야 하고, 얼음산도 넘어야 한다. 얼음과 얼음 사이가 많이 벌어져 있으면 붙을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야 한다.

특히 얼음이 곳곳에 솟구쳐 있는 난빙지대에 잘못 들어가면 거의 죽음이다. 120㎏짜리 개썰매를 끌고 높이 몇 미터씩 되는 미끄러운 얼음산을 넘는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이럴 때는 온 종일 1㎞도 못 간다. 그러면 그만큼의 거리를 반드시 보충해야 한다. 그래서 거리를 맞추려고 하루 20시간을 걸은 적도 있다.

"가장 무서운 건 끝없이 타협하려는 저 자신이었어요. 한 번 타협하면 끝이 없거든요. 자꾸 쉬다 보면 텐트 치고 싶고, 텐트 치면 버너 켜고 싶고.... 그래서 무조건 제 시각에 출발했죠. 500m 가다가 텐트 치는 한이 있어도 일단은 기계적으로 움직였어요."

보름 남기고 도박을 했다. 남은 식량과 연료의 절반을 버린 것이다. 무게를 줄여 행군 속도를 내자는 전략이었다.

출발한 지 54일째 되는 날 GPS(위성항법장치) 수치가 90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89.998, 89.999로 이어지더니 90에 딱 맞춰졌다. 마침내 북극점에 선 것이다.

히말라야 14좌, 7대륙 최고봉, 지구 3극점을 모두 밟은 세계 최초의 산악 그랜드슬램이 달성되는 순간이었다.

"거의 미친놈처럼 소리 지르며 데굴데굴 굴렀죠. 탐험가 생활 중에서 가장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북극점에 태극기를 꽂는 장면은 지금 봐도 뭉클합니다."

한데 기막힌 현실이 들이닥쳤다. 식량은 떨어졌고, 연료만 조금 남았는데 기상 악화로 헬기를 띄울 수 없다는 전갈이 온 것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3일간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움직이면 칼로리가 소모되니 그 만큼 버티기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때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대통령이 축하전화를 할 예정이니 전화기를 켜 두라'고. 방송들은 이미 대통령이 전화로 격려했다고 속보를 내보낸 상황.

"그거 다 오보예요. 전화 안 받았습니다. 전화기를 아예 꺼버렸어요. 캐나다 쪽과 교신도 해야 하고 그래서요. '차라리 라면이나 한 박스 보내 주지' 하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고요."

침낭에서 몰래 사탕 먹고 - 동상 우려 3초만에'큰일'

① 인간이 배고파지면

식사는 좀 특별하다. 알파미라고 부르는 냉동건조 쌀에다 냉동야채, 냉동고기, 버터 한 덩어리, 냉동건조한 분말 식용유, 라면스프 등을 넣어 죽처럼 끓인다. 아침과 저녁 두 끼를 이렇게 먹는다. 버터와 식용유는 칼로리를 높이기 위해 넣는다.

점심은 350칼로리 비스킷 2개로 때우고 간식으로 초콜릿 바 2개를 먹는다. 그리고 단백질 분말을 뜨거운 물에 풀어 보온병에 넣어 다니며 틈틈이 마신다. 냉동식품으로 만드는 죽이니 맛있을 리 만무하다. 배에 기름기 있는 초반엔 반도 못 먹고 버린다. 1주일 지나면 다 먹는다. 열흘 지나면 없어 못 먹는다.

"한번은 간식으로 육포를 먹는데 대원 중 하나가 먹다가 자꾸 떨어뜨리더라고요. 이상하다 했더니 다 먹고 정리하면서 '어? 여기 웬 육포가...'하며 잽싸게 주워 먹는 거예요. 인간이 굶주리니까 치사해지더라고요."

누룽지 사건도 잊을 수 없다. 죽 끓일 때 생기는 누룽지는 막내 대원 차지였다. 근데 갈수록 죽은 줄고 누룽지가 두꺼워지는 게 아닌가. 막내가 잔머리를 굴린 것이다. 결국, 숭늉을 끓여 똑같이 나눠 먹는 걸로 정리했다.

하루는 한 대원 침낭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 지퍼를 열어보니 몰래 사탕을 까먹고 있는 게 아닌가. 바깥은 영하 50도. 궁리 끝에 침낭 속에서 완전범죄를 꾀했던 것이다.

"1차 원정 때 얼음이 벌어져 4일간 꼼짝도 못한 채 밥까지 굶고 있는데 옆 텐트에서 사탕 껍질 2개가 나와 벌을 준 적도 있습니다. 극한상황에서 배고파지면 생사고락 같이하는 동료도 잊게 되는 모양이에요. 누굴 탓하겠어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긴데." 

 ② 거시기에도 동상이...

사흘에 한 번꼴로 볼일을 본다.

먹는 게 부실해 별로 나올 것도 없지만, 그 일이야말로 진정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장비가 만만찮아 해체도 그만큼 힘들기 때문이다.

장갑만도 5개다. 손가락장갑 2개와 벙어리장갑 2개를 끼고 마지막으로 스키장갑으로 푹 싼다. 그러니 옷은 어떨 것이며, 지닌 장비들은 또 어떨 것인지는 보지 않아도 뻔하다. 사흘에 한 번도 결코 적은 횟수는 아닌 셈이다.

소변이야 통이 있어 텐트 안에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 하도 춥다 보니 방금 소변 받은 통을 볼에 대거나 가슴에 품기도 한다. 문제는 큰 볼일이다. 절차가 복잡한 만큼 참고 또 참았다가 다급한 사인이 오면 총알같이 장비 해체하고 3초 만에 해결한다. 내리고→누고→닦고→올리는 동작을 순식간에 끝내야 한다. 지체하면 항문에 동상이 생기기 때문이다.

"아무리 번개같이 처리해도 동상이 오더라고요. 껍질 까지고 쓰라리죠. 그러면 거기에 거즈를 끼우고 걸어야 합니다. 볼일보다 보면 소변 나오게 마련이고, 마지막 한 방울은 거시기 끝에 매달려 있지 않습니까. 그게 순식간에 얼어 거기에도 동상이 생깁니다. 누구라고 밝히기는 좀 그렇습니다만 너무 오래 참아 텐트에서 뛰어나가다가 옷에 지린 대원도 있습니다." 

 ③ 영하 50도에서 얼지 않는 건?

수심 3000m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얼음판은 약한 곳이 많다. 폭이 100m나 되는 얼음 땅이 고무판처럼 출렁거리기도 한다.

스키 스틱으로 찔러 물이 나오면 돌아간다. 돌아갈 데가 없어 어쩔 수 없이 건너야 할 때도 있다. 그래서 대원들이 수시로 바다에 빠진다. 바닷물은 영하 3도밖에 안 된다. 한데 바깥은 영하 50도라 빠졌다고 허겁지겁 건져 올리면 그 자리서 얼어 죽는다.

그대로 물에 넣어둔 채 가라앉지 않도록 붙들어만 주고, 나머지 대원은 텐트를 친 뒤 버너에 불을 붙인다. 텐트 내부에 온기가 돌 때 비로소 건져 올려 텐트로 집어넣는다. 비상용 옷으로 갈아입히고, 젖은 옷은 버너에 말린다.

"하루에 한둘은 꼭 빠집니다. 2차 원정 초반에는 제가 빠진 적이 있습니다. 약이 올라 젖은 채로 걷다가 하체에 동상 걸려 고생했습니다. 그 추위에도 휘발유하고 고추장은 안 얼더라고요."

아무도 가지 않은 길…

"히말라야 14좌에 코리안루트 만드는 게 목표"

▶이제는 새길 내러 간다 산에서 일곱 명을 잃었다. 크레바스에 빠져 시신조차 못 찾은 대원도 있다. 그런데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고 다시 히말라야로 갔다.

더 이상 오르는 건 의미가 없어 아예 새 길을 내기로 했다. 그동안 한국 산악인들이 남이 뚫어 놓은 길로만 다니는 게 못내 아쉬웠던 것이다.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타깃으로 잡았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그만큼 위험하고 힘들다는 얘기. 아닌 게 아니라 2007년 1차 원정 때 8000m 지점에서 후배 둘을 눈폭풍에 날려보냈다. 작년 2차 원정에선 8200m까지 올라갔으나 광풍에 모든 것 잃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난 5월 기어이 '박's 코리안루트'를 개척했다. 에베레스트에 18번째, 남서벽에 3번째로 난 길이다.

1975년 영국팀이 남서벽 첫 길을 낼 때 대원 30명에 셰르파가 300명 동원됐다. 1982년 소련팀이 두 번째 루트를 뚫을 때는 대원 20명에 셰르파 70명이 붙었다.

한국팀은 대원 5명에 셰르파 7명이 전부였다. "8830m 지점에 도달하니 로프가 50m짜리 두 동밖에 안 남더라고요. 너무나 절망적이어서 후회를 했죠. '내가 왜 길 낸다고 이 미친 짓을 하나'하고요. 그래도 세계 최고봉에 새 길을 낸 데 대해 자부심을 느낍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건 뭘까. 오를 데 다 올랐고, 갈 데 다 갔고, 새 길까지 뚫었는데. "탐험가, 산악인에게는 정년이 없습니다.

앞으로 히말라야 14좌에 차례로 코리안루트를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내년 3월 중순 히말라야로 갑니다.

안나푸르나 남벽에 코리안루트 만들러." 박영석 대장은 '인명은 재천'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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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 라만차 (La Mancha)지구 /돈키호테(Don Quixote)의 여관
출처: 전경애  다사랑 님의 블로그 더보기

여행기를 쓰다 보니 좀 지루해서 재미있는 사진을 올리고 싶어졌습니다. 해서리..이번 여행 사진 중에 색채가 가장 예쁜 사진이 많은 소설 속의 돈키호테가 묵었다는 여관을 올립니다.

스페인은 가우디와 세르반테스, 둘이서 먹여살리고 있지는 않은지..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기념품들이 두 사람의 작품에 연관이 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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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비야에서 잠시 쉬고 중부 지방의 라만차 지구로 이동합니다.

 

세르반테스가 쓴 소설 속의 주인공 돈키호테는 성(城) 이 많은 라만차 평원을 주 무대로 하고 있습니다. 기사 이야기에 심취한 돈키호테는 어느날 스스로 기사가 되어 말라비틀어진 말(로시난테)을  타고 길을 떠납니다.

 

그로부터 이어지는 황당한 소설 내용..

그 중에 돈키호테가 여관을 성으로 착각을 하고 묵으면서 여관주인에게 기사작위를 수여 받았다는 여관을 만들어 놓은 곳입니다.

세르반테스가 이곳에 묵었을까요?

 

세르반테스는 1605년 돈키호테를 스페인어로 집필하여 스페인어를 완성시켰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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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 입구입니다.

청명한 푸른색이 가장 눈에 먼저 띄었습니다.

흰 벽과 푸른 테두리가 둘러진 창, 그리고 뭔지 모르게 한국에서도 본 것 같은 낯 익은 기와, 한국 보다는 동적인 기와의 배치와 선...기와엔 푸른 곰팡이가 잔뜩 끼어있었습니다. 아주 고풍스럽게.. 스페인 여행을 하면서 기와를 참 관심있게 보면서 다녔습니다. 스페인의 기와에 대해서 혹시 아시는 분이 계시면 제게 설명을 좀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작은 마당이 있는 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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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색도 아니고 잿빛도 아닌 기와 지붕이 저를 아주 친근하게 부릅니다.

꼬르도바_똘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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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 비틀어진 그의 말 처럼 역시 말라비틀어진 돈키호테..

고매한 인격을 자랑하느라 고개를 위로 치켜들고 있습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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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 저장고 입니다.

저장고 안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한 잔 카~~! 마시면 술독에 빠진 기분이 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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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를 만드는 과정에서 포도를 짜는 기구입니다.                    이곳에서 생산된 포도주... 맛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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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품 점..참 예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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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와 그의 배불뚝이 시종 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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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것은 많은데 부피가 너무 많이 나가고 가격도 참 비쌌습니다.

눈 아프게 구경하고, 찜하고 결국은 냉장고 자석으로..ㅎ

지금은 그 때 뭐라도 하나 건져올 것을 하고 후회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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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 앞의 성당앞 마당에 우뚝 선 갈비씨 돈키호테..

도도하고 고고한 자세입니다. 성당의 모습도 약간 황당합니다.

비썩 마른 돈키호테 처럼 좁다랗고.. 문이 잠겨있어서 들어가 보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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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 지붕 위..

마음껏 날고 있는 새들..

돈키호테도 마음껏 날고 있겠지요?

이상과 현실사이에서 헤멜 필요도 없이...

 

꼬르도바_똘레도

 거인의 무리인줄 알고 신나게 전투를 벌인 풍차들이 언덕 저 멀리에 보였습니다.

가까이 가지를 못하고 버스 창을 통하여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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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생(生)은 눈물의 힘으로 깊어진다네

이 잘난 선생은 꼬박꼬박 받은 월급으로
밥걱정 없었고,소질도 없는 글을 긁적였는데,
전업작가인 너는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영혼의 글을 썼구나

나는 지금 40대 남자 제자가 준 그의 자전적 장편소설을 밑줄 그어가며 읽고 있다. 그러니까 보름 전이었다.

결혼식장에서 우연히 대학 후배이면서 같이 근무한 적이 있었던 옛 직장 동료 국어과 여교사를 만났다. 그녀는 반색을 하면서 나에게 물었다.

"그 유명한 《연탄길》의 작가 이철환이를 아세요?"

"몰라, 우리나라 소설가가 어디 한두 사람이야?"

"선생님 제자라는데도 모르세요?"

"뭐?"

사연인즉 며칠 전에 그녀가 몸담고 있는 동대부중에서 그 학교 출신인 그 소설가를 모시고 문학 강연회가 있었단다. 그때 한 학부모가 질문하기를, "어떻게 해서 문학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까?"

그 작가의 대답이 이러했단다. 중학교 2학년 때 '김경남'이라는 국어 선생님이 하루는 자기를 불러서 일기를 잘 썼다고 칭찬하시면서 학교 신문에 실어도 되겠느냐고 물어보셨고, 그 글이 신문에 실렸으며, 또 교내 백일장 때 쓴 글이 '가작'으로 뽑혀 상도 탄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글 솜씨를 인정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훗날 작가가 되기로 결심을 하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사연을 듣고 나서 미안했다. 그 제자는 지금도 나를 들먹이는데 나는 그의 이름도, 얼굴도, 그런 내용을 기억하지 못해서이다. 글을 잘 쓰는 학생은 따로 불러다가 칭찬을 해 주거나 잘 쓴 글은 낭독해 주었던 적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교사의 한마디 말이 제자의 인생길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가슴이 뿌듯해져 왔다.

한 번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작가 이철환의 삶과 문학을 조금이라도 알고 가야 예의인 것 같아 인터넷으로 검색을 했다.

'이철환', 그의 이름은 굵은 고딕체로 방방 뜨고 있었다. 인물에도, 카페글에도, 블로그, 이미지, 웹문서, 이미지, 동영상, 뉴스, 지식, 게시판에도….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연탄길》. '이 세상에 자전거길도 있고, 자동차길도 있고, 아스팔트길, 빙판길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왜 연탄길이람?' 하면서도 읽지도, 보지도 못한 책의 제목에서 고된 삶과 서민의 애환이 묻어져 나옴을 느꼈다. 1·2·3·4편이 나오도록 도대체 어떤 내용으로 360만명의 심금을 울렸을까?

그의 가난은 글을 낳았고, 그의 아픔은 감동적인 글을 낳았던 것 같았다. 그의 글은 얼음 같은 인심, 쇠붙이 같은 세상, 레이저 광선 같은 세태와 내가 창이 되면 네가 방패가 되고 네가 창이 되면 내가 방패가 되어야 하는 이 생존경쟁의 시대에서, 얼음과 쇠붙이와 레이저 광선을 녹이고, 창과 방패를 버리게 하는 역할을 한 것 같았다.

나는 그가 자랑스러워졌다. 어려서는 교사 한 사람의 영혼을 감동시키더니, 어른이 되어서 수백만 인간의 영혼을 감동시켰으니 그가 얻은 명성은 필연이며 유명 작가라는 세간의 인증은 어찌 당연한 찬사가 아니었겠는가?

가을이 스러져 가는 11월 초순, 드디어 만났다. 34년 만에, 28살의 처녀 선생과 15살의 앳된 남학생이 61살의 노교사와 48살의 장년의 나이로 대면한 것이다. 내 근무처를 찾아온 철환이를 태우고 분당의 한 음식점에서 따뜻한 밥을 함께 먹었다. 고된 삶에도 불구하고 그의 해맑은 눈동자와 선량하고 겸손한 표정에서 그가 인생을 얼마나 청결하게 살아왔고, 그의 영혼이 얼마나 순결한가를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율동공원을 거닐며 과거와 현실과 문학과 삶을 이야기했었다. 헤어질 때 철환이는 최근에 펴낸 《눈물은 힘이 세다》라는 소설을 한 권 주었고, 나는 작년 이순 나이에 펴낸 첫 수필집 《종이속 영혼》을 건네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오늘, 나는 내가 그의 제자라도 된 것처럼 그의 책을 밑줄을 그어가며 읽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문장은 이러하였다. "겨울은 눈 내리는 밤으로 깊어지고 생(生)은 눈물의 힘으로 깊어진다."

그날 나를 만나 내 눈을 바라보며 그가 한 말이 떠오른다.

"그때 저를 불렀을 때 일기를 보시며 하신 말씀을 기억하세요? '너의 글에는 진실이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진실이라. 그래, 이 잘난 선생은 꼬박꼬박 받은 월급으로 밥걱정 없이 살면서, 소질도 없으면서 50대에 등단한 주제에 수필을 쓰네, 평론을 하네 하면서 되지도 않은 글을 긁적이고 있을 때, 전업 작가인 너는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면서, 아니 눈물 젖은 빵을 얻기 위해서 영혼의 글을 썼었지.'

제자는 유명작가, 스승은 무명작가, 그래도 스승이랍시고 목에 힘을 주고 내가 제자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옛날처럼 글을 잘 썼다, 못 썼다 할 수도 없고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정치에 이용당하지 말고, 이념에 휩쓸리지 말고, 진정한 문학 냄새가 나는 좋은 글을 써라. 가슴으로 글을 쓰고, 그 영혼의 향기가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삶의 자세를 가다듬게 하는 지침서 같은 글을 계속 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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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 다음날 학소도 식구들의 모습

학소도의 꽃치자 열매

사철나무

동백

보너

오죽

측백

학소도 텃밭에 남겨진 고양이 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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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집에서 자신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없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게 마련이다."

- 괴테 Johann Wolfgang Goethe

- 인왕산 鶴학巢소島도에서 최범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