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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만 있고 과정이 없는 나라로 돌아왔다.

그곳이 대한민국, 나의 모국이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내가 태어나고 어린시절을 보냈던 우리집, 학소도 鶴巢島.

나의 귀향은, 거창한 철학도 그럴싸한 이상주의도 없다.

오랜 시간 간직해온 꿈을 이루기 위해 귀향한 것도 아니다.

도시생활에 지쳐 좋은 직장을, 편안한 삶을 뒤로하고 도망치듯

낙향한 것도 아니다.

경복궁과 광화문과 청와대를 내려다보는 인왕산으로 돌아온 이유는 단순히,

내가 알을 까고 날아올랐던 그 둥지로 돌아온 것 뿐이다.

부화한 치어가 바다로 나가 성장한 뒤 연어가 되어 다시 원래의 강으로 돌아오듯

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고향 학소도로 귀향했다.

10년 전이다.

집은 늙어있었지만, 나는 젊었다.

낡은 벽지를 때어내고 페이트를 칠했다.

전선을 다시 연결하고 새로운 등도 달았다.

깨진 유리창을 갈고 현관문에 자물쇠도 설치했다.

그리고 나무를 심었다.

손가락 굵기의 묘목을 구해와 한 그루, 한 그루 정성껏 앞뜰과 뒷텃밭에 심었다.

감나무, 왕벗나무, 살구나무, 앵두나무, 배롱나무, 보리수나무, 매화나무....

수십 그루의 나무들이 건강하게 자라주어 매년 꽃과 열매를 내게 선물한다.

꽃도 심었다.

튤립, 백합, 무스카리, 동자꽃, 개나리, 할미꽃, 아이리스, 국화....

내가 심은 수십 가지의 다년초, 일년초 외에도 자연이 선물해준 야생화도 많다.

봄, 여름, 가을 마치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는 듯이 꽃을 활짝 피어

나를 놀라게도 기쁘게도 해준다.

그리고 매일 아침 내가 살아 있음을 제일 먼저 확인해주고,

날씨와는 상관 없이 아무리 늦은 밤이라도 

귀가하는 나를 뛰어와 맞이해주는 우리 멍멍이 식구들.

인간이 자연에게 건낼 수 있는 말은 무엇이 있을까?

내게는 감사하다는 말밖에 떠오르는 표현이 없다.

 

2010년 새해를 맞으면서

나의 둥지를 둘러보다 떠오른 생각을 몇 자 적어보았다.

유난히 바쁜 한 해가 될 것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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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소도 앞뜰 한켠에 있는 화분들

눈이 녹으면서 멋진 조각품을 연출했다

학소도 옥상에서 뒷텃밭을 바라보며

학소도 옥상과 이웃집 지붕

                 

                               학소도 옥상에서 바깥세상을 내려다보며             

눈폭탄 맞은 어린 사철나무

어린 나무들도 이런식으로 세상의 혹독함을 경험하며 성장하나보다

텃밭의 소나무

하얀 눈세상 속에서 유난히 붉게 빛나는 산수유열매

몽련의 꽃봉오리가 밍크코트를 입고 겨울의 혹독함을 견디어내고 있다

눈 속에 파무친 어린 오죽

 

눈으로 치장한 매화나무

학소도 텃밭의 오솔길

눈 속에 숨은 황금측백나무

 보너

서울이  

눈과 어울리는 스노우베리(snowberry)

폭설이 내린 뒤 학소도에서 가장 신이난 보너

축구공을 쫒는 모습이 맨유의 웨인 루니, 첼시의 디디에 드로그바를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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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백호

호랑이는 우리나라 설화와 민담의 단골 손님이다. 때론 의로움과 용맹함으로, 때론 어수룩함과 친근함으로 우리 곁에서 살아 숨쉬어 왔다. 옛날 이야기는 으레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로 시작한다. 하마터면 웅녀(熊女)와 함께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 불에 달군 돌을 떡으로 알고 먹거나 기름 바른 발로 나무를 오르는 아둔함도 있지만 은혜를 갚고, 위선자 북곽선생을 호되게 꾸짖는 산군자(山君子)이기도 하다.

삶의 지혜를 담은 속담과 경구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호랑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고, 호랑이 새끼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 호랑이와 관련된 지명도 호미곶 등 389개나 된다. 육당 최남선이 우리나라를 호담국(虎談國)이라 부른 배경이다.

올해가 바로 호랑이 해다. 특히 경인(庚寅)년의 천간(天干)은 오행(五行)으로 흰색과 금(金)을 뜻한다. 음양으론 양(陽)의 기운이다. 그래서 갈색 칡범이 아니라 백호의 해라고 한다.

백호는 청룡·주작·현무와 함께 신묘한 영물(靈物)이다. 하늘의 사방(四方)을 지키는 사신수(四神獸) 중 하나로 서쪽의 수호신이다. 백호가 상상 속의 동물과 같은 반열에 오른 것은 아마도 실제로 본 경우가 별로 없어서일 것이다. 백호는 유전자 변이로 생기는데, 시베리아산의 경우 10만 분의 1 확률로 태어난다고 한다. 동물원에서 보는 흰 가죽에 초콜릿색 무늬, 푸른 눈의 백호는 대부분 벵골산이다. 벵골산은 백호가 태어날 확률이 1000분의 1로 높아 그만큼 인공 번식도 쉽다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 14마리가 사육되고 있다.

역술인들은 같은 호랑이 해라도 경인년은 돈과 칼의 기운이 더욱 세다고 한다. 이 해에 태어난 남성은 무관과 공직에 많이 진출하고, 여성은 의사와 약사가 많다는 얘기다. 그래서인가. 국내 1000대 기업 최고경영자 가운데 122명이 범띠인데, 이 중 71명이 경인생이라고 한다. 한편으론 양극성이 강해 위아래가 바뀌는 급변의 시기로도 본다. 1950년의 6·25전쟁이나 1890년의 일제침탈 본격화를 든다. 하지만 서기로 첫 경인년인 30년은 예수가 고난을 받고 세계 3대 종교의 하나로 거듭난 해다.

2010 경인년 역시 새 시대의 터닝 포인트다. 녹색성장과 함께 G20 정상회의도 주재하며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서는 것이다. 국운이 ‘호랑이에 날개를 단 격’으로 힘차게 비상하는 한 해가 되길 기원한다.

박종권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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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령, 공포 대상, 익살꾼 … 60년 만의 백호 해

사육사·전문가의 호랑이 이야기

용인 에버랜드에 있는 백호 세 자매. 백호는 혼자 생활하는 보통 호랑이(황호)와 달리 야생에서도 함께 잘 어울려 다닌다. [김성룡 기자]

내일이면 경인(庚寅)년 호랑이해가 열린다. 호랑이는 수많은 민담의 단골 주인공일 뿐만 아니라 서울 올림픽 마스코트, 서울시 상징물이기도 했을 만큼 한국인에게 친숙한 존재다. 특히 2010년은 60년 만에 돌아오는 백호의 해다. 산신령으로 묘사됐을 만큼 신성하게 여겨진 동물이라 내년 출산율이 반짝 오를 거란 기대도 많다.

호랑이가 ‘용맹함’의 상징으로만 다뤄졌던 것은 아니다. 호환(虎患)은 천연두와 더불어 대표적인 재앙으로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각종 민담과 민화에서는 익살스럽고 어수룩하게 묘사돼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호랑이는 일제시대 때 대대적으로 포획되기 시작해 1940년 마지막으로 한 마리가 포획된 뒤 자연 상태에서는 멸종됐다. 호랑이의 면면을 ‘호랑이 엄마’인 서울동물원 편현수 사육사와 용인 에버랜드 정상조 사육사,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호랑이전을 기획한 구문회 학예연구사에게 들어봤다.

◆공포의 대상=다 큰 수컷 호랑이는 꼬리를 합친 몸길이가 3m를 넘고, 체중은 250㎏가량 나간다. 앞발 힘만 800kg 가까이 된다. 사자의 두 배다. 편현수 사육사가 호랑이를 돌본 지 6년, 그간 10여 마리의 아기 호랑이를 안아서 키웠지만 “아무리 정들여 키운 아기 호랑이라도 10개월쯤 되면 마지막으로 안아보고 우리 안으로 들여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몸무게가 80kg에 육박하는 호랑이를 안았다가 사육사가 크게 다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상조 사육사는 “흔히 사자와 비교되지만 무리생활을 하는 사자와는 달리 단독생활을 해서 더 독립심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현재는 자연 상태에서 볼 수 없지만, 조선시대 때는 사냥이 힘들어진 늙은 호랑이가 민가에 자주 출몰했다고 한다. 호랑이 잡는 부대인 ‘착호군’을 따로 만들었을 정도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구문회 학예연구사는 “호랑이가 얼마나 무서웠으면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들의 무덤을 ‘호식총(虎食塚)’으로 만들었을 정도”라고 말한다. 시신을 묻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쌓은 다음 떡시루를 얹고 가락을 꽂아 호식총으로 꾸몄다. 호랑이 몸에 달라붙은 귀신이 돼 죽어서도 호랑이의 종 노릇을 한다고 믿어 그것을 막기 위한 의식이었던 셈이다.

◆산신령=호랑이는 신성한 동물로 여겨졌다. 쉽게 볼 수 없는 백호는 ‘산신령’으로 묘사됐다. 주작·현무·청룡·백호로 구성된 사신 중 유일하게 실제 동물로 서쪽과 가을 수호를 담당했다.

호랑이 기름과 호랑이 이빨, 호랑이 수염은 각종 질병을 낫게 해준다고 믿었다. 구문회 학예사는 “호랑이의 발가락을 구워 짜낸 호랑이 기름은 각종 병을 낫게 해주고, 호랑이 수염은 행운을 가져다 주며 치통을 치료해 준다 믿었다”고 설명했다. 특히 호랑이 가죽은 권력과 부를 상징해 조선시대 세도가들의 초상화나 사진에는 호랑이 가죽이 종종 등장한다.

백호는 실제로 생존하는 데는 불리한 편이다. 흰색 털이 금방 눈에 띄어 먹이사냥이 어렵기 때문이다. 편현수 사육사는 “백호는 유전적으로 흰색 변종인데 시베리아 호랑이(백두산 호랑이) 사이에서 백호가 탄생할 확률은 10만분의 1도 되지 않는다”며 “그렇다고 용맹함에서 뒤처지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서울동물원에 있는 백호(암컷)를 결혼시키기 위해 수컷 호랑이를 같은 우리에 넣었다가 수컷이 물린 적도 있다.

◆어수룩하고 익살맞은 친구=호랑이가 주인공인 민담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팥죽할멈과 호랑이’ 이야기다.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위험에 처한 할머니를 구하기 위해 알밤과 지게, 송곳 등 작은 물건들이 힘을 합한다는 내용이다. 김향금 아동문학가는 “호랑이는 종종 권력을 휘두르는 권력자들에게 비유되곤 했는데, 백성들에게 비유되는 작은 물건들이 통쾌하게 무찌름으로써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꼈던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차돌을 불에 구우면 찰떡이 된다는 토끼의 말을 듣는 호랑이, 곶감을 무서워한 호랑이 이야기에는 민중의 바람이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고 말한다.

임주리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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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유길준(兪吉濬)에게 길을 묻다

강천석·主筆

"지도자가 아니라 국민 수준이 國力
'중국의 世紀' 문턱에서 우리를 돌아보라"

1910년 8월 22일 조선과 일본 사이에 특별한 조약이 맺어졌다. 조약은 "일본국 황제 폐하와 대한제국 황제 폐하는 양국 간의 특수하고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고, 상호 행복을 증진하여 동양의 평화를 확보하기 위하여…"로 이어지는 전문(前文)과 '제1조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면서도 영구히 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앞의 조항에 게재된 양여를 수락하면서 또한 전체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낙한다'는 등의 8개 조문으로 되어 있다. 조선 왕조는 정말 1910년 8월 22일 그날 망한 것일까.

세밑 중국 여행 짐 보따리에 3권의 책과 돋보기를 굳이 우겨넣은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조선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자 미국 유학생이던 유길준(兪吉濬·1856~1914)의 서유견문(西遊見聞)과 유길준이 유학 시절 배웠던 일본 개화 사상가 후쿠자와(福澤諭吉·1835~1901)의 '문명론의 개략(槪略)', 여기에 일본 학계에 천황처럼 군림했다던 마루야마(丸山眞男·1914~1996)의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를 더했다. '평생을 후쿠자와에게 홀려 문명론의 개략을 읽고 또 읽었다'는 마루야마는 예순다섯에서 예순여덟까지의 3년간 '문명론의 개략'에 관한 25번의 강의를 묶어 책으로 내놓았다. 마루야마가 후쿠자와에게 빠졌듯이 유길준에게 홀려 '서유견문을 읽는다'라는 책을 남긴 우리 학자가 없는 게 아쉬웠다.

150년 전 한국과 일본의 두 선각자가 국가의 운명을 두고 밤새워 씨름한 흔적을 중국 땅에서 훑어보는 감회는 유별났다. 유길준은 1881년 조선 사신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쭉쭉 뻗은 큰길 곁의 방직공장, 붉은 벽돌로 솟은 건물에서 걸어나오는 대학생들, 서양식 제복을 입고 훈련하는 육군, 검은 연기를 뿜으며 바다를 가르는 군함 등 모든 것이 놀랍고 새로웠다. 유길준의 결단은 빨랐다. '서양사정'이란 일본 최초의 베스트셀러 저자로 능란한 영어 선생이란 이름을 얻고 있던 후쿠자와를 찾아가 일본어를 익혔다.

유길준은 2년 후 다시 조선 사절의 수행원으로 문명 개화의 본고장 미국 땅을 밟고선 혼자 떨어져 미국 학교에 들어가 어린 미국 소년 사이에 끼여 1년 반 동안 영어를 배웠다. 그가 하숙집 주인 겸 선생님 겸 보호자였던 미국인에게 인사조차 치르지 못한 채 급하게 귀국선에 오른 것은 옛 친구들이 일으킨 갑신정변 소식을 듣고서다. 대서양 항로를 택한 그는 영국·프랑스·독일·벨기에·네덜란드를 둘러본 다음 수에즈 운하를 빠져나와 4년 만에 일본땅을 밟았다. 그러나 후쿠자와는 나라와 나라 사이가 평등해야 한다는 만국공법(萬國公法)을 역설하고 한·중·일 삼국이 개화를 앞당겨 서양 세력에 함께 맞서자던 과거의 그가 아니었다. 그해 "일본이 한국·중국과 어울려 지내서는 장래가 없다"는 탈아론(脫亞論)을 발표했고 "100권의 만국공법이 몇 문의 대포만 못하며, 몇십 개 조약의 힘은 한 상자의 탄약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할 만큼 변해 있었다. "대포와 탄약은 도리(道理)를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없는 도리를 만들기 위해 있는 것"이고 "전쟁은 독립국의 권익을 신장시키는 수단"이라는 데까지 나아가 있었다.

유길준은 이런 세계사적 전환과 국가적 위기에 자신의 체험을 녹여 '서유견문'을 쓰기 시작해 1889년 원고를 마쳤다. 유길준과 후쿠자와는 이미 길을 달리했지만 공교롭게 결론은 같았다. '한 국가의 국력은 국왕의 현명함 여부가 아니라 국민 전체의 지력(智力) 수준에 달렸다'는 것이다. 유길준이 땀을 찍어 적은 '서유견문'의 원고는 6년 만에 겨우 빛을 보았다. 그것도 고작 1000부를 찍는 데 그쳤다. 국민을 깨우쳐 국민의 힘을 키우기 위해 전례가 드물게 국한문(國漢文)을 섞어 썼던 의도도 크게 빗나갔다. 이보다 20년 앞서 후쿠자와가 내놓은 문명 3부작 가운데 '서양사정'이 20만부, '학문의 권장'이 370만부, '문명론의 개략' 역시 수만부가 팔린 것에 비하면 너무 초라했다.

'서유견문'이 나온 지 15년 후 조선은 망했고 유길준도 불운한 선각자로 잊혀지고 말았다. 반면 후쿠자와는 환갑을 맞던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자기 눈으로 보고 "오늘의 행복은 불가사의(不可思議)할 정도'라는 감격담을 흘렸다. 그는 현재도 위대한 사상가 대접을 받으며, '문명론의 개략'은 여전히 일본 국민의 필독서(必讀書)라는 위치를 지키고 있다. 상해 공항 거대한 청사 앞으로 막막하게 펼쳐진 활주로를 내다보며 유길준에게 작은 소리로 물어보았다. "100년 전 동아시아의 낙제생이던 중국의 세기(世紀)가 발밑까지 밀려온 오늘 대한민국의 국력, 당신 말대로라면 우리 국민의 지력(智力)은 과연 어느 수준에 왔는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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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의 건강 장수를 위한 15계명

한국 남성의 평균 기대 수명은 79세다(여성은 82세). 하지만 남성은 남녀 공통으로 나타나는 암(가령 장암)에 걸릴 확률이 70%나 높다. 그렇다면 남성이 평균 수명까지 건강하게 사는 방법은 없을까.

영국의 의학 칼럼니스트 빅토리아 램버트는 최근 데일리메일에‘남성이 건강하게 장수하는 방법 15가지’라는 글을 기고했다.


1. 지갑은 가슴 앞주머니에 넣고 다녀라

물리치료 전문가들은 ‘지갑 신경장애(wallet-neuropathy)’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바지 뒷주머니에 항상 지갑을 넣은 채로 사무실 의자나 자동차 운전석에 앉아 있다가 허리에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에 해당하는 말이다. 지갑은 등의 좌골 신경을 압박하면서 통증을 가져오거나 종아리나 발목, 발의 마비 증상을 가져온다. 결과적으로 걷거나 앉거나 누울 때 심한 통증이 온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가만히 서 있어야 통증이 가신다는 사람도 있다.

2. 진통제는 웬만하면 먹지 말라

진통제를 복용하면 고혈압 증세를 악화시킬 수 있다. 65세 이상의 남성은 어느 정도 고혈압 증세가 있기 때문에 여기에 진통제까지 복용하면 심장 마비나 뇌졸중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하바드 의대 연구팀이 1만 6000여명의 남성 건강 전문가들과 공동으로 실시한 연구 결과, 하루에 이부프로펜 같은 비스테로이드성 항염증제(NSAID) 한 알만 복용해도 심장마비, 뇌졸중 발병률이 38%나 높아지고 하루 아스피린 한 알을 먹으면 26%가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루 두 알 이상의 진통제를 복용하면 뇌졸중과 심장마비 발병률은 48%나 높아진다. 진통제는 혈관을 이완시켜 혈압을 낮춰주는 화학 성분의 효과를 막아주기 때문이다.

3. 매일 부부관계를 가져라

불임 치료를 받고 있는 부부 가운데 절반 가량이 남자의 정액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부실한 데서 불임이 비롯된 것으로 나타났다. 호주의 산부인과 전문의 데이비드 그리닝 박사가 이끄는 연구팀에 따르면, 부부 관계를 자주 갖는 것이 정액의 질적 수준을 유지하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다. 부부 관계를 자주 하지 않고 금욕 생활을 하면 정액의 양은 늘어날지도 모르나 정액에 결함이 많다면 아무리 양이 많아도 별 의미가 없다. 체내에 오래 축적된 정액은 유리기(遊離基)로 인한 DNA 손상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된다. 그리닝 박사는 자주, 다시 말해 매일 사정해주는 것이 정자의 DNA 손상을 상당 부분 줄여준다.

4. 젊은 여성과 결혼하라

15~17년 연하의 여성과 결혼한 남성의 조기 사망률은 20%나 줄어든다는 연구 보고가 나와 있다. 아내가 7~9세 연하인 경우에도 조기 사망률이 11% 감소했다. ‘노벨상 사관학교’로 불리는 독일 막스 프랑크 연구소가 1990년부터 2005년까지의 덴마크 인구 통계 자료를 분석한 결과다. 연구소에 따르면 나이 어린 여성이 남편을 더 정성스럽게 보살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건강하고 성공한 남자는 나이가 들어도 젊은 여성에게 인기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여성은 어떨까. 여자는 자기와 비슷한 나이의 남자와 결혼해야 오래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기보다 7~9살 연상 또는 연하인 남자와 결혼하면 조기 사망 위험이 20%나 높아졌다. 15~17살 연상 또는 연하와 살면 조기 사망 위험이 30%까지 높아졌다.

5. 당분이 포함된 음료를 마시지 말라

밴쿠버 브리티시 컬럼비아대와 하바드 의대 연구팀에 따르면, 당분이 듬뿍 포함된 음료를 하루 두 잔 이상 마시는 남자들은 통풍에 걸릴 위험이 높다. 다이어트 소프트 드링크는 문제가 없지만 과일 주스나 과당이 많이 포함된 과일(오렌지) 주스는 문제가 된다. 류마티즘 전문의들은 과당이 요산의 배설을 막아주기 때문에 나중에 관절 부분에 축척되어 엄청나게 아픈 통풍을 가져온다. 심한 경우엔 관절의 통증은 물론이고 운동 장애및 관절 변형을 초래하므로 노인성 퇴행 질환으로 연결되기 쉽다.

6. 이쑤시개 대신 치실을 사용하라

원형 탈모증 증세가 있는 남성은 이발소나 가발 가게가 아니라 치과에 가야 한다. 스페인 그라나다대 연구팀은 잇몸 질환과 대머리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지금까지 대머리나 원형 탈모증은 유전이나 스트레스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대머리는 구강 감염과 관련된 면역 체계와도 관련이 있다. 잇몸 질환을 예방하려면 치실을 사용해 찌꺼기를 제거해야 한다.

7. 골반하부근육 강화 운동을 하라

케겔 운동은 1940년대 미국의 산부인과 의사 아놀드 케겔이 요실금 치료를 위해 개발한 것인데 이 운동이 성감을 높이는 데 효과가 있다고 밝혀지면서 성기능 향상을 위한 근육 운동으로 널리 보급되었다. 물론 남자에게도 여기에 해당하는 근육이 있다. 방광과 성기에 자극을 주는 근육을 강화함으로써 노화에 따른 발기 부전이나 요실금을 막을 수 있다. 웨스트 오브 잉글랜드대 그레이스 도리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에 따르면, 골반하부근육과 괄약근 운동은 발기부전 치료에 비아그라 못지 않는 효과가 있다. 요실금 증세를 보이던 남성의 3분의 2는 골반 하부 근육을 단련시키는 프로그램을 마친 뒤 상태가 현저하게 호전되었다. 이 근육이 어떤 상태인지를 알아보려면 소변을 보다가 도중에 소변을 잠시 참았다가 다시 내보내보라.

골반하부근육 강화 운동의 요령은 다음과 같다. 양 무릎을 벌리고 의자에 앉아 발은 바닥에 평평하게 둔다. 앞으로 몸을 기울인 다음 양쪽 팔뚝을 허벅지 위에 올린다. 그런 다음 마치 바람이 새는 것을 막는 것처럼 항문의 괄약근을 좁혀 짜내듯 힘을 준다. 한참 동안 그 상태를 유지하다가 다시 풀어주는 것을 반복한다. 그런 다음 요도 주변의 근육도 같은 방법으로 조여준다. 처음엔 2초 정도 유지했다가 점점 근육이 강화되면 10초까지 긴장 시간을 늘린다. 이것을 하루 네 번씩 한번에 5회 반복한다.

8. 하루 빨리 승진하라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보건병리학과 마이클 마머트 교수가 1967년부터 1977년까지 20~64세의 남성 공무원을 대상으로 한 조사 연구에 따르면, 하위 직급에 종사하는 사람은 고위층에 있는 사람에 비해 사망율이 3배나 높았다. 자신이 맡고 있는 일에 대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을수록 더 많은 성취감을 느낀다.

9. 하루에 사과를 5개 이상 먹어라

50세 이상 남성들의 대장암 사망률은 여성에 비해 훨씬 높다. 과일이나 야채, 콩류, 곡류 등에 많이 들어 있는 섬유질을 충분히 섭취하지 않는 식습관 때문이다. 섬유질 섭취는 대장암 예방의 최선의 방법이다. 섬유질은 섭취한 음식의 대장 통과를 도와줄 뿐만 아니라 몸에 좋은 대장균을 많이 만들어서 대장 세포에 영양분을 제공해준다. 대장균은 대장에 혹이 생기더라도 암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아주고 대장암이 발병하더라도 치료를 용이하게 도와준다. 대장암 예방 기구에 따르면 성인 남자의 하루 섬유질 권장 섭취량은 18g이다. 바나나 1개 또는 잡곡빵 한 조각에 들어 있는 섬유질은 1.8g다. 사과 1개(물론 껍질 채로 먹어야 한다)에는 4g이 들어 있다. 바나나를 10개 먹는 것보다 사과 5개 먹는 게 더 쉽다.


10. 육류 섭취량을 줄여라

육류 섭취를 줄이면 암이나 심장병 예방은 물론 젊음을 유지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연구팀에 따르면, 고단백 음식을 먹는 대신 탄수화물 섭취를 줄이면 남성 호르몬의 일종인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낮아진다. 테스토테론은 남성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떨어지는데 이게 부족하면 만성 피로와 탈모, 발기 부전 등을 일으킨다. 영양학자 토머스 인클던에 따르면, 하루 단백질 섭취량은 전체 칼로리의 16%로 제한해야 한다.


11. 가공 육류나 직화 구이는 피하라

전립샘암 예방을 위해서는 소시지, 햄, 훈제구이 등 지나치게 가공한 육류나 바베큐 구이는 피하는 게 좋다. 고온에서 육류를 익히면 고기 속에 들어 있는 단백질이 복소고리식 아민(HCA)이라 불리는 발암 물질로 바뀐다. 직화 구이에서 고기 위에 새까맣게 타 있는 물질이 바로 그것이다. 고기를 불에 구우면 숯이 타거나 고기 속의 지방질이 떨어져 타면서 내는 연기에는 암을 유발하는 화학물질이 들어 있다.

12. 아내에게 맞벌이를 시키지 말라

런던 퀸 메리 의대 연구팀에 따르면, 가사에 전념하거나 파트 타임으로 일하는 아내를 둔 중년 남성은 하루 종일 일하는 맞벌이 아내를 둔 중년 남성에 비해 우울증에 걸릴 가능성이 훨씬 낮다. 아내가 전업 주부로 있으면서 가족을 돌보다가 풀 타임 직업 전선에 나서는 경우에 가장 우울증이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업 주부로 있는 아내는 남편의 정신 건강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전업 주부로 있는 아내는 가족을 돌보고 살림을 도맡아하고 친구들과도 행복하게 지내기 때문이다.

13. 오른손잡이는 왼손으로 칫솔질을 하라

평소 자주 쓰지 않는 손을 써보는 훈련을 하라. 대뇌에 자극을 주어 새로운 기억 세포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치매 예방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여성은 알츠하이머병에 걸릴 확률이 높은데 반해 남성은 심장마비와 뇌졸중을 일으키는 혈관성 치매에 걸리기 쉽다. 어쨌거나 치매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두뇌 훈련이 필요하다. 아침에 일어나 버릇처럼 하는 일들, 가령 칫솔질, 커피잔 들기 등을 평소 쓰던 손이 아닌 반대편 손으로 해보라. 이게 미국의 신경생물학자 로렌스 카츠 박사가 만들어낸 신조어 ‘뉴로빅스’다. 하루에 짧은 시 한편씩 외우거나 출근할 때 다른 길로 돌아서 가는 것도 뉴로빅스 운동에 해당한다.

14. 나쁜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라

템플대 의대 비뇨기과 잭 미들로 교수는 “부부 관계를 개선하고 싶다면 나쁜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야 한다”고 말한다. 비아그라를 찾지 않고서도 발기부전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담배를 끊고 체중을 줄이고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면 된다. 특히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는 게 중요한데 왜냐하면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으면 성기와 동맥 혈관에 찌거기가 발생해 혈류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은 남성은 수치가 낮은 남성에 비해 발기부전 증상을 보일 확률이 거의 2배나 높다. 콜레스테롤을 낮추기 위해선 저지방 식사로 바꿔야 하고 규칙적인 운동을 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혈중 콜레스테롤을 낮추는 약을 처방할 수도 있다.

15. 하루에 10분 정도는 햇볕을 쬐라

비타민 D 부족을 방지하기 위해 매일 10분씩 햇볕을 쬐라. 비타민 D 부족은 남성에게 성욕 감퇴, 탈모, 근력 약화, 운동 후 천식, 관절통 등 온갖 고통과 문제를 안겨준다.

디지털뉴스 jdn@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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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경제 國父 호암<이병철 삼성창업주>에게 길을 묻다

월간중앙 보보시도량(步步是道場). 이것이 인생이다. 나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바로 도량이라는 생각 아래 사업을 계속 일으켜왔다. 인생은 도량이고 나에게는 끊임없이 사업을 일으켜가는 것이 나 자신에 대한 연마였다. 행복의 척도는 사람에 따라 모두 다르다. 인생을 도량이라고 친다면, 그 도량에서 살아가는 데 적합한 내 나름의 삶의 방법을 끝까지 지키고 싶을 따름이다. 인생이라는 석재에 신의 모습을 새기는 것도 좋고, 악마의 모습을 새기는 것도 좋다. 다만 나는 그 석재에 사업을 위해 산 한 사나이를 새겼으면 한다. <호암어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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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했던 그 시절, 눈 시리게 투명하고 하얀 것이 많았다. 추운 아침이면 처마 끝에 달려 있던 수정고드름, 장독대 위에 쌓인 흰 눈…. 그래서인가?

눈같이 흰 백설탕 가루에 대한 추억은 각별하다. 친구라도 집에 데려오면 어머니는 커다란 스테인리스 대접에 꼭꼭 숨겨두었던 백설탕을 한 술 넣어 휘휘 저어 주셨다.

갈비나 과일상자는 꿈도 못 꾸던 시절, 어쩌다 명절 때 들어온 설탕은 다락방에 숨겨 놓은 귀한 보물이었다. 먼 친척이 선물로 가져 온 생전 처음 보는 커피에도 설탕을 듬뿍 넣었고, 각설탕을 아삭아삭 씹어먹던 기억도 유년의 추억이다.

황명수 단국대 명예교수는 ‘한국의 대표적 기업가 호암 이병철 연구’라는 논문에서 “우리나라에 커피문화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부터다.

1953년 설립된 제일제당에서 생산하는 값싼 설탕의 영향이 컸다”며 “커피의 국내 보급과 함께 다방문화도 대중 속에 뿌리내렸다. 마치 신대륙 발견 이후 영국이 홍차문화시대를 맞이한 것과 같다”고 적었다.

20세기 중반 제일제당에서 생산하는 설탕과 제일모직에서 생산하는 양복지는 한국에 커피문화와 맞춤양복 시대를 열게 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제일모직이 탄생한 1954년 이후에는 당시 마카오에서 수입하던 영국제 양복지의 가격이 7만환에서 1만2000환까지 떨어져 제일모직은 마카오 밀수 원단을 몰아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삼성가족’의 뿌리는 조부로부터 배운 유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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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양조공장 앞에 모인 호암(오른쪽에서 네 번째 정장 차림)·임직원과 가족들(연대 미상).

삼성 창업주 호암 이병철 회장. 그는 일제강점과 전쟁으로 피폐된 조국에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잇달아 설립해 설탕과 모직의 대량생산을 주도하며 먹고 입는 문화의 대변혁을 이루어냈다. 이러한 소비재산업으로 자본을 축적한 호암은 이후 기업인으로 살았던 50여 년 동안 금융·의료·중화학·전자·통신·반도체 등 쉬지 않고 새로운 산업에 도전하며 국가경제에 기여했다.

호암은 기업활동뿐 아니라 우리 문화에 대한 애정도 각별해 해외에 나가 있는 우리 문화재를 사재를 털어 사들이고, 잊혀져 가던 우리의 소리 ‘국악’을 살리기 위한 후원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생산활동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기업인의 역할을 넘어 반 세기 역사의 한국문화를 주도하는 역할을 해냈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해 나간 ‘프런티어 정신’의 뿌리는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그의 생가에서 시작된다. 중교리는 1년 내내 큰눈이나 큰비가 오지 않는 조용한 시골마을이다. 2009년 12월1일 찾은 생가 마을에는 집집마다 열려 있는 감나무가 늦가을의 정취를 물씬 풍겼다.

2007년 11월19일 호암 사후 20주기에 맞춰 개방한 생가는 개·보수 과정을 거쳐 말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연말연초에는 하루 1500명이 넘는 사람이 ‘이병철 회장처럼 큰돈을 벌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기 위해 이곳을 찾는단다. 1910년 2월12일. 호암은 경주 이씨 집성촌인 이곳에서 아버지 이찬우와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의 2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찬우는 이곳에서 4대째 내려오는 천석꾼 지주였다. 사랑채와 안채가 분리된 1884㎡(570평)의 넓은 마당 한편에는 천석꾼의 집임을 증명하듯 제법 넓은 광이 한눈에 들어왔다. 남서향으로 앉은 집 바로 뒤로는 야트막한 산이 둘러서 있다. 거기서 보면 멀리 10리 밖으로 남강이 흐른다.

풍수전문가들이 말하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형 명당이다. 호암은 감나무와 벽오동이 서있는 앞마당에서 뛰어 놀았다. 다섯 살이 되던 해-. 조부 이홍석(1838~97)이 만년에 세운 서당(문산정)에서 한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서당은 지금까지 그대로 보존돼 있다. 생가에서 산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20여 분 걷다 보면 산속 깊이 숨어 있는 서당이 나온다.

호암은 1986년 발간한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어머니는 아침마다 책을 옆에 끼고 형과 함께 대문을 나서는 나를 지켜보았다”고 회고했다. 어린 시절 매일 아침 형과 함께 오솔길을 걷던 소년 호암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드넓은 하늘, 피어났다 사라지는 뭉게구름….

소년은 오솔길에서 세상 밖을 보았고, 미래를 꿈꿨다. <호암자전>에 따르면 조부 이홍석은 학문에 소양이 있어 당시 영남지역의 거유(巨儒)로 일컬어지던 허성제의 문하생으로 시문·성리학 등에 능했다. 호암의 부친인 이찬우는 생전 선친 이홍석으로부터 “문장은 경국의 대업이며 불굴의 성사다.

사람의 생명이나 영화는 유한하지만 문장의 생명은 무한하다”는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조부 밑에서 자란 호암이 한학 공부를 강요당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부에서 부친으로 이어지는 유교 가풍에 호암 역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5년 남짓의 한학 공부는 평생 호암 인생철학의 근원이 됐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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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 있는 호암 생가.

‘붓’을 버리고 ‘상인’의 길을 걷다

호암은 <호암자전>에서 “가장 감명받은 책으로 좌우에 두는 책을 들라면 <논어>”라고 했고, “논어야말로 인간이 사회인으로서 살아가는 데 불가결한 마음가짐을 알려준다”고 적었다.

삼성그룹이 유교를 바탕으로 한 가족주의적 회사공동체로 ‘삼성가족’을 형성하고 ‘삼성효행상’ 등 전 사회적으로 도의교육 실천에 앞장선 것도 호암이 조부와 부친의 영향을 받아 유년시절 익힌 한학 공부에 뿌리를 두고 있다. 호암은 이러한 한국의 전통사상에 서구의 합리사상을 접목해 훗날 삼성이 가장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만들었다.

호암이 태어난 1910년은 한민족으로서는 잊지 못할 한일병탄의 해였다. 1987년 11월19일 78세로 서거할 때까지 그는 정치·사회·경제적으로 극심한 변화를 겪은 시대를 통과해야 했다. 1910년 한일병탄, 1919년 3·1운동, 1930년의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과 1942년 태평양전쟁, 1945년의 8·15 해방, 1950년의 6·25, 1960년 4·19와 1961년 5·16, 1979년의 10·26 등 10년을 주기로 대사건이 일어났다.

이 격동하는 사회에서 일생을 살았던 호암은 사회의 변화기마다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업종을 개척해 한국기업의 롤 모델을 만들어 나갔다. 서당으로 가는 오솔길에 안주하지 않았던 것이다. 1936년 26세의 나이에 사업 투신을 결심한 호암은 부친으로부터 쌀 300석쯤의 재산을 받아 마산에서 협동정미소를 창업한다.

호암이 처음 사업가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거창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호암자전>에 밝힌 당시 심정을 보자. “어느 달밤 순간적으로 사업에 대한 결심을 굳혔던 당시, 확고한 신념이나 소신 같은 것은 아직 없었지만, 사회적 제약 등 여러 가지 여건을 생각한 나머지 사업을 하고 싶다. 사업에 도전해 보고 싶다 - 그렇게 스스로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호암은 1930년 학업에 큰 뜻을 품고 일본 와세다(早稻田)대 정경과에 입학해 유학길에 오르기도 했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곧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밝은 달빛이 창을 너머 방 안으로 스며들던 그날 밤, 잠든 세 아이의 얼굴을 보며 “너무 허송세월했다. 뜻을 세워야 한다”는 결심을 굳혔던 것.

호암이 말한 ‘사회적 제약’은 일제 치하에서 운신의 폭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시대에 주요 관직은 모두 일본인 차지였다. 호암은 일본 유학길에 오르는 배 안에서도 ‘조선인’이라는 멸시와 천대를 받았던 경험을 기억했다. 이러한 사회적 여건을 감안해서였는지, 상인(商人)을 높이 보지 않던 유학자의 집안이었음에도 선친은 호암의 의사를 기꺼이 들어줬다.

“마침 너의 몫으로 300석쯤의 재산을 나누어 주려던 참이다. 스스로 납득이 가는 일이라면 결단을 내려보는 것도 좋다.” 이렇게 하여 호암은 붓을 버리고 상인으로서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호암 인생에서 첫 번째 도전이었다. 1930~40년대는 우리나라 기업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 시기는 일제가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매우 심각한 경제위기에 직면했을 때다.

호암은 협동정미소를 창업한 이후 일출자동차회사를 인수하고 부동산사업에까지 진출해 660만여m2(200만 평)의 대지주가 되나 1937년 중일전쟁의 여파로 빚더미에 앉게 된다. 전적으로 은행 대출에 의지해 토지를 확장하던 차에 일본이 은행대출 전면금지정책을 펴자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이다.

호암은 협동정미소·일출자동차·토지사업을 청산하면서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는 일생일대의 실패를 경험한다. ‘사업은 반드시 시기와 정세에 맞춰야 한다’ ‘무모한 과욕을 버리고 자기 능력과 한계를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생각을 터득한 것도 바로 이때의 실패로 얻은 교훈이다.

호암은 훗날 삼성이라는 이름 아래 새로운 사업을 펼칠 때도 이 말을 염두에 두고 무리한 투자나 과욕을 부리지 않았다. 한번 쓰디쓴 실패를 경험한 호암은 1938년 자본금 3만원으로 대구에 삼성상회를 설립하고 다시 재기를 꿈꾼다. 삼성상회는 현재 ‘삼성’의 모체로, 주업은 무역과 제분업이었다.

‘삼성(三星)’의 삼(三)은 큰 것, 많은 것, 강한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우리 민족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다. 성(星)은 밝고 높고 영원히 깨끗이 빛나는 것을 뜻한다. 크고 강력하고 영원하라. 호암은 재출발하는 사업에 이런 소망을 담아 직접 상호를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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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산업자본’시대를 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해방을 맞은 우리 민족의 가장 시급한 경제적 과제는 ‘자립’이었다. 대구의 삼성상회를 출발로 조선양조주식회사 등을 거쳐 서울로 진출한 호암은 1948년 11월 ‘삼성물산공사’라는 간판을 달고 국제 무역업을 시작한다. 신생국가인 한국에서 가장 시급한 사업은 물자부족을 해결할 수 있는 국제무역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나이 38세 때였다. 마카오·홍콩·싱가포르 등 주로 동남아를 상대로 오징어 등을 수출하고 면사를 수입하던 초기만 해도 삼성물산공사는 무명의 회사였다. 하지만 호암은 이때부터 특유의 가족주의 경영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규모를 정하지 않고 사원이면 누구나 실적에 따라 수익배당을 받을 수 있게 했고, 직원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애쓰면서 근무 의욕을 불러 일으켰다.

삼성물산공사는 이런 합리적 경영 덕분에 설립 1년 만에 무역업계에 혜성으로 등장한다. 당시 천우사·동서상사·화신산업·미진상사·남선무역 등 상공부에 등록(1950년 3월)된 무역업체 543개 가운데 당당히 7위에 부상했던 것. 1950년대는 호암과 삼성의 역사에 대전환이 일어난 시기다.

삼성물산공사를 통한 재화가 축적되자 호암은 수입대체산업인 제당업과 모직업으로 눈을 돌렸다. 악성 인플레이션과 미국의 원조로 소비재 경기의 영향을 많이 받던 1950년대는 6·25로 인해 수백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생겼고 가옥은 물론 일제가 남긴 산업시설마저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1950~60년대 미국의 대한 원조는 군사원조를 포함해 총 48억 달러였다. 이는 국민총생산(GNP)의 8%, 총투자의 64%, 총수입의 70%에 해당했다. 이 중 경제원조 규모는 총 24억1000만 달러에 달했다. 이러한 방대한 원조에도 1953~60년 실질 GNP 연평균 성장률은 3.7%에 불과했다.

1인당 국민소득은 1953년의 61달러에서 1960년 70달러에 그치는 저성장을 이룬다. 당시 민생안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음에도 제지·제당·모직물은 국내 산업이 전무해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했다. 이들 물품에 대한 제조업의 필요성을 느낀 호암은 1953년 제일제당, 1954년 제일모직을 설립하면서 소비재 경기의 활성화를 꾀했다.

특히 제일제당은 근대적 생산시설을 갖춘 첫걸음으로, 상업자본을 탈피해 산업자본으로 전환한 한국 최초의 선구 자본이었다. 호암이 우리나라 근대 산업발전사에서 분기점을 마련한 것이다. 호암의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의 설립은 시작에 불과했다. <호암자전>에서 밝힌 당시 호암의 심정을 엿보자.

1960년대 ‘기업가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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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생산된 설탕의 시제품 앞에서.

“나는 제당 설립 2년 만에 거부(巨富)의 칭호를 받았다. 일신의 안락을 위해서는 그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나 언제나 축재(蓄財)가 목적이기보다 신생 조국에 기여할 수 있는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고 있었다. 기업가는 기업을 구상하여 그것을 실현시키고 그것을 합리적으로 운영하면서 국가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를 발전적으로 파악해 하나 하나 새로운 기업을 단계적으로 일으켜갈 때 더 없는 창조의 기쁨을 가지는 것 같다.”

‘호암(湖巖)’이라는 호는 전용순(전 상공회의소 회장, 신민당 대표) 씨가 지어준 것이다. ‘호수처럼 맑은 물을 잔잔하게 가득 채우고 큰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는 준엄함을 가져라’라는 뜻이다. 1955년 제일제당과 제일모직 설립으로 거부의 칭호를 막 듣기 시작할 때 지은 ‘호암’이라는 호는 이후 그의 40여 년 기업인생에서 나침반이 되었다.

1960년대는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시대였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66)을 착수한 데 이어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7~71)을 거치며 성공적인 공업화를 구축하는 시기다. 이 시기 호암은 삼성물산을 중심으로 수출주도형 전략을 꾀한다. 1964년, 4390만 달러 규모의 세계 최대 한국비료 공장 건설을 주도했던 삼성은 국내 1위 기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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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전경련이 주최한 제1기 최고경영자과정에서 자신의 경영철학을 피력하는 이병철 회장.

제일모직과 제일제당이 소비재 기업으로 꾸준히 선두를 지켰고, 1958년 안국화재해상보험, 1963년 동방생명 인수로 금융업에도 진출, 삼성은 따라올 경쟁자가 없는 압도적 1위 기업이었다. 지금의 현대와 대우가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중동 건설 붐이 일기 시작한 1970년대부터였다.

현대에 1위를 내주었던 삼성은 외환위기 이후 현대그룹 등이 해체되면서 다시 재계 1위 기업의 명성을 되찾는다. 삼성의 질주가 한창이던 이 시기 호암은 일개 기업의 성장에만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신세계백화점과 고려병원을 설립하고 동양라디오·동양TV·<중앙일보> 등 중앙매스컴을 통해 언론문화 창달에 기여한 시기도 1960년대다.

1965년에는 사재 10억원을 기증하는 등 삼성문화재단을 설립해 축적된 부의 사회공헌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1961년 호암은 한국경제인협회(전경련의 전신)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면서 경제인들의 상호 이해를 도모하기도 했다. 4·19 이후 계속된 혼란으로 경제활동이 위축되고 국민이 생활고와 물자 고에 시달리던 시절이었다.

정부와 공동 협력을 모색하기 위한 창구로 기업인 단체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이처럼 1960년대는 호암 개인에게나 한국경제사에서 분수령을 이루는 시기다. 한국에 선진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기업가’를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일본 자본주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치(澁澤榮一·1840~1931)는 호암과 곧잘 비교되는 인물이다.

‘칼’이 지배하던 에도(江戶)시대를 마감한 일본이 문호를 개방하고, 메이지(明治) 유신으로 본격적인 자본주의 길을 걸은 것은 우리보다 100여 년 앞섰다. 에도 막부 말기 치아라이지마(현 사이타마현)의 농업과 상업을 겸하던 집안에서 태어난 시부사와는 1869년 메이지 정부의 조세국장·구조개혁국장을 맡아 일본의 조세·화폐·은행·회계 제도를 근대적으로 개혁했다.

그러던 시부사와는 1873년 33세의 나이에 관직을 버리고 실업계에 투신한다. 일본에서 처음 주식회사 제도를 도입한 시부사와는 미즈호은행·도쿄가스·도쿄해상화재보험·태평양시멘트·데이코쿠호텔·지치부철도·도쿄증권거래소·기린맥주·세키스이건설 등 500개의 기업 설립에 관여해 일본 ‘최초’의 사업과 제도를 수없이 벌여 나갔다.

시부사와는 자본주의 체제에 공자의 윤리관을 적용한 선각자였다. 부와 도덕이 일치되었을 때만이 진정한 부를 쌓을 수 있고, 그 부가 장기적으로 사회에 환원될 때 개인·사회·국가가 함께 번영할 수 있다는 철학을 가졌다.

유학자 집안에서 자란 호암 역시 도의사상을 기본으로 40여 년의 기업활동 동안 “인류와 국가에 도움을 주는 사업만이 발전할 수 있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훗날 ‘이병철’이라는 한국의 기업인은 100년을 앞서 나간 자본주의 스승 일본을 극복하고 도전해 결국 이겨내는 신화를 창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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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성물산 발기인들 및 주변 친지들과 함께(1955년). 2. 제일합섬 구미공장 건설현장을 시찰하는 이병철 회장(1973).

1970년대, 기술자립시대 개막

1970년대 한국경제는 두 차례에 걸친 석유파동과 스태그플레이션 등 국내외적으로 수많은 경제적 고초와 시련을 겪었다. 이런 악재에도 제3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 기간인 1972~76년 GNP의 연평균 성장률은 9.7%로 높은 성장을 기록했다. 이 시기 호암이 역점을 둔 분야는 전자와 중화학공업이었다.

전자공업의 기술자립시대를 개막한 것이다. 1950년대 중엽에는 설탕이나 섬유제품이 국민에게 필수불가결한 데다 수입대체효과가 컸기 때문에 소비재 위주의 투자를 했으나 1970년대에는 시대가 요구하는 또 다른 진보적 산업군을 찾은 것이다. 1969년에 설립한 삼성전자는 ‘이코노 TV’의 개발과 양산, 컬러TV의 자체개발 등으로 1970년대 들어 세계적 종합전자 메이커로 성장한다.

삼성전관·삼성전자부품·삼성코닝은 모두 1970년대 설립한 전자업체다. 1975년 삼성물산이 종합무역상사 1호로 전환하면서 삼성그룹의 수출 창구를 일원화해 시장 다변화에 참여한 것도 전자공업 활성화에 불을 붙였다. 삼성중공업과 삼성조선을 설립한 것도 이 시기였다.

1980년대 들어 호암은 또 한번 기업인으로서 생애를 건 일대 비약을 시도한다. 반도체·컴퓨터 등 첨단 기술산업에 미래를 걸기로 한 것. “기술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수출과 수입대체산업으로 축적한 산업기술을 토대로 첨단 기술에 과감히 투자하기로 결심한다.

1983년 10월 삼성전자 내에 반도체, 컴퓨터 사업 팀을 조직했고, 1984년 5월엔 삼성반도체, 통신기기 및 VLSI 공장을 준공시키며 기술입국 시대의 선도적 역할을 했다. 1986년 6월27일 호암이 삼성종합기술원 기공식에서 밝힌 의지를 보자.

“과학기술은 지식과 힘의 결합이며, 미지의 경지, 그리고 더 높은 정상으로 인간을 이끌어주는 무한탐구의 세계다. 영원한 기술 혁신과 첨단 기술 개발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야말로 자원빈국인 우리나라가 살 수 있는 길이다. 그것은 국가와 민족의 융성을 약속해 준다.”

호암은 유전공학에도 정성을 쏟아 인터페론 대량생산 기술 개발, 인공 감미료 아스파탐 개발 등에 공헌한다. 21세기를 겨냥한 항공·로봇산업과 첨단 정보산업, 첨단 의료기기 분야, 소프트 산업 개발에도 끝없는 채찍질을 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시대를 앞선 프런티어 정신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의 <닛케이비즈니스>지는 몇 년 전 과거 100여 년간 일본 100대 기업의 흥망을 연구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이들 기업의 평균수명은 30년 정도라고 밝혔다. 1970년 <포천>지 선정 세계 500대 기업 중 약 3분의 1은 겨우 13년도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삼성그룹은 2010년 창립 72주년을 맞았다.

호암이 쌀 300석을 밑천으로 시작한 삼성상회는 호암이 작고한 1987년 11월 당시 37개 계열기업에 외형 14조원의 국내 최대 재벌그룹으로 성장했다. 작고한 지 23년여가 지난 지금 삼성은 2008년 말 기준 자산규모 318조원(금융기관 포함), 매출액 191조원를 기록한 글로벌 기업 ‘삼성’으로 천문학적 성장을 했다.

이 거대 그룹이 몸집만 큰 공룡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세계적 기업으로 진화해간 내면에는 호암이 심은 창업정신과 시스템이 흐른다. 1953년 제일제당 설립부터 1987년 11월19일 서거까지 30여 년간 호암의 경영사는 마치 영국의 산업혁명기와 같은 대격변을 겪었다.

그가 세운 삼성은 경공업 중심에서 첨단 산업과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거쳤다. 1970년대 후반기에는 제2차 오일쇼크의 영향으로 그룹의 성장률이 다소 둔화했으나 호암은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이 시기에 삼성반도체를 비롯한 신사업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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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용인 한옥에서.

인재 제일주의로 신인류 ‘삼성맨’ 창조

1957년 국내 기업 최초로 공채 제도를 도입한 삼성은 은행이나 관직으로 몰렸던 한국의 인재들을 기업으로 끌어 들이는 전초 역할도 했다. 1960~70년대 ‘삼성’은 젊은이들이 미래를 걸어 보고 싶은 기업 1순위로 떠올랐다. 삼성이 만든 설탕을 먹고 자란 세대가 평일에는 제일모직에서 나온 양복을 입고 회사에 출근하고, 주말에는 신세계백화점에서 쇼핑했다.

삼성은 당시 이미 한국 중산층의 라이프스타일을 이끌어 가고 있었다. 삼성이 그룹으로 정착하기 시작한 1970~80년 10년간 삼성그룹의 자산은 41%, 매출액 48%, 인력은 50% 증가했다. 미국의 시인 프로스트는 시 <가지 않은 길>에서 “나는 남들이 덜 간 길을 택했고 /그것이 모든 차이를 만들었구나”라고 노래했다.

시대를 앞서 간 호암의 신사업 도전은 바로 이 시가 상징하는 ‘프런티어 정신’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암이 선택한 경영이념은 사업보국·인재제일주의와 경쟁을 통한 합리 추구였다. 호암은 이 중에서도 기업을 성장시키는 제일 조건은 ‘인재’라고 생각했다.

인재교육에 앞장서 ‘삼성맨’(Samsung Man)이라는 신인류를 창조했고, 한국적 기업의 정서를 뛰어넘는 철저한 실력주의를 바탕으로 국내 최초 공개채용제도를 실행에 옮긴 것도 이런 이유다.

사업보국·인재제일·합리추구라는 창업주의 경영이념은 2세인 이건희 전 회장에게 계승돼 ‘인간존중·기술중시·자율경영’으로, 삼성 정신은 ‘고객과 함께, 세계에 도전, 미래 창조’로 진화했다. 호암은 비록 20세기를 살다 갔지만 그가 정착시킨 삼성의 유·무형 시스템은 여전히 살아 움직이며 21세기 기업경영의 나침반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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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한 해의 끝에서 생각하는 국격 [중앙일보]

 
 
이명박 대통령이 큰일을 했다. 시쳇말로 확실하게 ‘한 건’ 했다. 공사비만 200억 달러에 달하는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공사 수주라는 메가톤급 빅뉴스로 2009년 대한민국의 세밑을 화끈하게 장식했으니 말이다. ‘경제 대통령’ 잘 뽑은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사단법인 민생경제정책연구소는 ‘기적을 일군 미소 대통령,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는 제목의 논평을 냈다. 이 대통령이 이룬 쾌거를 ‘만루홈런’에 비유하며 “서민들의 어려움을 한 번에 날려 버렸다”고 감동을 쏟아 냈다. 공사 수주를 삐딱하게 보는 한 신문사를 향해 폐간을 촉구한 단체도 있다. 자유주의진보연합은 원전 사고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과거의 공산품 수출 정책처럼 정부가 원전 수출을 독려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꼬집은 이 신문 사설을 ‘쓰레기 글’로 규정하고, 이런 ‘창피한 글’을 쓰느니 차라리 자진 폐간하라고 목청을 높였다.

나는 이 대통령의 세일즈 외교, 비즈니스 외교의 성과를 폄하할 생각이 없다. 잘한 것은 잘한 대로 인정하는 게 옳다고 본다. 특유의 상인적 감각을 발휘해 수주에 기여한 공로는 평가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성사가 어려웠을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은 낯간지럽다. 국격(國格)과도 맞지 않는다.

대통령의 전화 몇 통과 막판 직접 담판으로 수백억 달러짜리 엄청난 공사가 결정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UAE 나름대로 꼼꼼하게 득실을 따져 보고 한국에 주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다 된 밥에 숟가락 하나 얹어 놓고 생색을 내느니, 재주는 기업들이 부리고 공은 대통령이 차지했다고 비아냥대는 것도 듣기 거북하지만, 마치 이 대통령 개인의 업적인 양 치켜세우는 것도 딱하긴 마찬가지다. 한국 기업들의 실력과 노력,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의 외교력이 조화를 이룬 결과라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다.

국가 대항전에서 한국이 프랑스를 꺾었다고 흥분하는 것도 낯 뜨겁다. 프랑스가 제시한 조건이 한국이 제시한 조건에 못 미쳤기 때문에 밀린 것이지, 프랑스가 한국과 국운을 걸고 전쟁이라도 벌였단 말인가. 프랑스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우리만 흥분해 프랑스를 이겼다고 의기양양해한다면 이 무슨 우스운 꼴인가.

프랑스 언론은 프랑스의 패배는 당연한 결과라며 이번 패배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보도를 잇따라 내놓고 있다. 프랑스 컨소시엄의 전열(戰列)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 프랑스 언론이 지적한 첫째 패인이다. 유럽형 가압경수로(EPR)를 최초로 건설한 프랑스전력공사(EDF)가 참여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바람에 엘리제궁이 개입한 끝에 이달 중순에야 최종 컨소시엄 구성을 마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전력공사(KEPCO)가 중심이 돼 처음부터 일사불란하게 달려든 한국 컨소시엄에 비해 신뢰감을 주기에 역부족이었다는 것이다. 최종 입찰가에서도 프랑스는 한국의 1.8배에 달하는 360억 달러를 써 냈다고 한다. 입증된 안전성에 유리한 공기, 품질보증에 가격경쟁력까지 갖췄으니 결과가 뻔한 게임이었다는 게 프랑스 언론의 분석이다.

2010년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의 서울 개최를 앞두고 이 대통령은 유난히 국격을 강조하고 있다. 수주전에서 프랑스를 꺾고, G20 정상회의를 유치했다고 국격이 저절로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경제력만으로 국격이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CNN에 국가 이미지 광고를 한다고 당장 높아지지도 않는다. 국격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품격의 총합이기 때문이다. 인격이 모여 국격을 이룬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지도자의 품격이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기 마련이다. 결국 지도자부터 모범을 보여야 한다. 남을 배려하고, 존중하고, 겸손하고, 사려 깊고, 흥분하지 않고, 자제할 줄 아는 지도자 아래서 국격은 올라갈 수 있다.

“제가 한 일은 별로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동안 한국의 원자력 산업 발전을 위해 묵묵히 애써 온 과학기술인과 기업인들의 노력이 모여 이뤄 낸 결과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고 효율적인 원전을 정해진 기한 내에 만들어 UAE가 우리에게 보내 준 신뢰에 보답합시다.” 수주가 최종 확정되는 순간, 나는 이 대통령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길 기대했다.

G20 정상회의 유치에 성공했다고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만세삼창을 부르고, 왕조시대에나 어울릴 만한 ‘용비어천가’ 소리가 들리는 것은 국격과는 거리가 먼 일이다. 내일이면 2010년이다. 지도자부터 국민 모두가 진정으로 국가의 품격을 생각하는 한 해가 됐으면 좋겠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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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데스크] 미녀와 야수라니

  최승현 엔터테인먼트부 방송팀장

지금 한국 사회에서 연예인의 연애와 결혼은 대중의 숨겨진 욕망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거울이다. 인터넷이 일상화되면서 이런 뉴스 혹은 루머의 반사각(反射角)은 더욱 확대되고 있다.

2010년 벽두, 영화배우 김혜수유해진이 서로 교제 중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인터넷이 들끓었다. 수많은 연예인 스캔들 기사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유독 이 뉴스에 예민하게 반응했던 건, 두 사람의 관계가 마치 "신분을 뛰어넘은 사랑"처럼 비쳤기 때문이다.

가상의 세계에서 김혜수가 자신감 혹은 자만심으로 똘똘 뭉친 커리어 우먼('스타일', '한강수 타령')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미모의 요부('타짜', '장희빈') 사이를 오가는 동안 유해진은 주로 광대 혹은 범죄자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런 두 사람의 열애설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자 대중은 폭발적으로 반응했다. 김혜수는 "외모보다 내면을 볼 줄 아는 여자"라며 환호를 받고 있고, 유해진은 "숨겨진 능력이 무엇이기에 대단한 여자의 남자가 됐느냐"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인터넷의 그 많은 댓글을 보면 사랑에 앞서 조건에 반응하는 우리 사회의 세태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많은 사람들이 외적인 조건을 기준으로 두 사람의 우열(優劣)을 임의로 가늠해 누가 이 관계를 통해 더 이익을 얻을 것인지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다. '미녀와 야수', '루저의 승리'라는 표현까지 아무렇지 않게 쓰인다. 유해진은 야수, 루저가 돼버렸다.

연예인의 결혼을 돈으로 따지는 일은 아무리 입방정들이라고는 해도 너무할 정도다. 재벌가에 시집간 스타를 두고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그룹 내에서 실권은 하나도 없는 빈껍데기 집안이니 계산 잘못했다", "유명한 회사는 아니지만 부동산으로 기반이 탄탄한 집안이니 그걸 보고 결혼했을 것" 등의 이야기가 나돈다. 얼굴이 알려진 여자 연예인이 회사원과 결혼식을 올린다고 하면 "저 사람 아버지가 지방 유지"라는 식의 해석이 금세 따라붙는다. 연예인끼리 결혼하면 두 사람이 현재 출연하고 있는 CF 숫자를 기준으로 즉각 득실이 계산되고 있다.

결혼정보회사 선우가 지난해 2만명의 회원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배우자가 갖췄으면 하는 부분'을 묻는 질문에 '사회 경제적 조건'을 꼽은 사람은 28.29%였다. 성격(29.27%), 신체적 매력(23.82%), 가정환경(18.62%)을 꼽은 사람들과 비슷했다. 시대가 변하고, 대중에게 몸을 맡기고 사는 연예인들이라 해도 남녀의 사랑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의 마술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연예인에게만은 특별한 잣대, 그것도 너무나 속물적인 잣대만을 들이대려고 하는 것일까. 말은 다르게 하면서도 실은 물질적 조건에 따라 타인과 자신을 비교해 가며 스스로를 피폐하게 몰아세우는 우리의 모습이 투영된 것은 아닐까. 꽉 막힌 세상에 허울뿐인 사랑을 통해서라도 한몫 단단히 챙기고 싶은 우리 사회 일각의 욕망이 연예인들의 사랑과 결혼을 비틀어 보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인터넷에 떠도는 숱한 반응들 중 가장 당황스러운 건, 유해진을 선택한 김혜수의 '소신'에 대한 칭찬이다. 소신이라는 말이 이렇게도 쓰이고 있다. 김혜수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을 뿐이다. 우리들이 그렇게 사랑하는 것처럼. 두 사람의 심정은 요즘 아마 이럴 것이다. "우리 그냥 좀 놔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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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 희망 없는 곳이 없더라”
[인터뷰]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2010년 01월 06일 (수) 15:17:22 김상만 기자 ( hermes@mediatoday.co.kr)
 지난해 전직 대통령 두 명이 세상을 떠났다. 용산참사와 쌍용차 정리해고 문제가 불거지면서 서민, 노동정책은 후퇴했다. 효과가 불분명한 토건사업인 4대강 사업에는 2012년까지 20조 원이 넘는 혈세가 투입될 예정이고 세종시 이전 수정문제로 지역갈등마저 나타나고 있다. 언론계는 어떤가. 언론인들의 반대에도 정치권에 몸담았던 인사를 방송사 사장으로 임명해 방송장악 진통을 겪었다. 정부의 ‘당근’에 목이 맨 언론사들은 비판과 감시라는 본연의 임무를 망각한 채 어천가를 줄기차게 부르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시민사회운동가인 박원순(54·사진)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는 여전히 ‘희망’을 말한다. 자신의 발로 대한민국 곳곳을 돌아다녀보니 희망이 없는 곳이 없더란다. 시민사회를 대표하는 박 상임이사에게 경인년 벽두, 한국사회의 ‘소통’과 ‘희망’에 대해 들어봤다.                 / 편집자 주


"MB정부 서민정책 진정성 없어
6월 지방선거 뒤 급격한 레임덕
촛불 뛰어넘는 대안 만들어야"


‘억압과 공포에 의한 통치.’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는 한국정치의 현재를 이렇게 진단했다. 국가운영 방식이 ‘협치(수평적·분권적인 지배방식)’로 바뀌고 있는 것이 세계적 추세인데 한국사회는 오히려 관료적이고 중앙집권적인 통치방식으로 뒷걸음질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경찰과 검찰, 국정원 등 권력기관들이 인터넷에서 자유로운 의견들이 소통되는 것을 막고 있다”며 “억압과 공포에 의한 과거 권위주의적인 통치로의 회귀”라고 비판했다.

   
  ▲ 이치열 기자 truth710@  
 
그는 또, 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서민정책에 진정성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재벌우호정책 등 상위계층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정책을 펴면서 서민들을 위한 정책은 말만 요란한 생색내기가 많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올해 6월 지방선거 뒤 급격한 레임덕 현상을 겪을 것”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대한민국 곳곳에 희망이 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는 “촛불을 뛰어넘어 이제는 대안을 만들어 갈 때”라며 “트위터와 같은 소셜미디어를 활용해 아이디어를 나누고, 좋은 언론을 구독하고, 시민사회단체에 기부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바꾸는 기적을 이뤄낼 수 있다”고 말했다. 그와의 인터뷰는 지난 12월23일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 희망제작소 사무실에서 2시간 동안 이뤄졌다.

-지난해 용산참사와 쌍용차 정리해고, 미디어법 논란 등을 겪으면서 현 정부와 국민사이의 소통 창구가 꽉 막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사회분위기가 전체적으로 경직돼 있는 게 문제다. 경찰·검찰·국정원 등 권력기관들이 대표적인 소통창구인 인터넷에서 자유로운 의견들이 오가는 것을 막고 있는 상황도 발생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국정운영 방식이 협치에 의한 통치가 아니고 억압과 공포에 의한 과거 권위주의적인 통치스타일로 바뀌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소통을 제약한다. 한 사회가 진취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상상력, 실험, 표현을 극도로 보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가 발전하기 어렵다. 현재는 진취적 분위기가 억압당하고 일방적 지배가 이뤄지고 있다. 이로 인한 엄청난 손해는 사회로 돌아오게 된다.”

-이런 경직된 분위기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게 된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대한민국 최고의 권력이자 한 국가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 바로 대통령이다. 그래서 더 많은 노력과 통찰이 필요하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희한한 문제가 하나 있다. 최고 권력자가 되는 순간 모든 것으로부터 차단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진정한 권위라면 사람들과의 수평적인 의사교류, 그리고 굉장히 열심히 듣고자 하는 열린 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누구나 말할 수 있는 구조가 보장돼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대통령이 말을 독점하고 소통을 막고 있는 상황이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다. 최고 권력자의 말 독점은 언론을 장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최근 권력이 방송사와 인터넷, 다양한 매체에 압력을 행사하면서 다른 쪽으로는 각종 이권으로 언론을 길들이려고 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한 국가의 건강한 자정기능을 무너뜨리는 나쁜 징조다.”

-소통을 말하자면 언론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과거처럼 정치와 언론의 유착 현상이 나타나면서 언론이 오히려 국민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는 실정이다.
“진실은 밝히면 해소되지만 숨기고 지하에 묻으면 나중에 더 큰 폭발력으로 자라나게 돼 있다. 권력이 만약 진실을 숨기려고 한다면 나중에 100배, 1000배의 인화력을 갖고 폭발할 것이다. 이것은 권력자 입장에서 좋은 게 아니다. 지금 당장은 언론을 통제해 인기를 올릴 수 있겠지만 퇴임 후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청와대에서 나온 뒤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대통령이 돼야지 국민을 억압하고 장악하고 내쫓은 대통령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지방선거가 끝난 뒤 집권 4년차에 들어가면 급격한 레임덕이 시작될 것이라고 본다. 그때가 되면 사람들이 억눌려 있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모든 것을 다 쥐고 있으니까 못할 게 없을 것 같지만 역사를 살펴보라. 그렇지 않다. 이 대통령이 왜 이런 생각을 못하는지 모르겠다.”

   
  ▲ 이치열 기자 truth710@  
 
-한국사회에서는 소위 메이저 언론으로 불리는 조선, 중앙, 동아일보가 보도하지 않으면 이슈가 되지 않는다. 국세청 직원이었던 안원구 씨의 권력형 비리사건은 묻히고 한명숙 전 총리의 뇌물수수 의혹은 확대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조중동의 여론지배력은 매체의 영향력이 있으니까 당연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점을 지적하고 싶은 게 있다. 첫째, 규모가 작은 언론사라고 지나치게 수세적이고 패배주의적인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현대사회의 이슈는 인터넷의 발전으로 조중동이 아니더라도 인터넷과 블로그, 소셜네트워크 서비스 등을 통해 굉장히 빠르고 널리 확산된다. 조중동이 언급하지 않아도 국민들은 다 알고 있다. 눈에 안 보여도 국민들을 무시하면 안 된다. 지난 재보궐 선거 결과를 보라. 그것이 바로 민심이다. 오는 6월 지방선거 결과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지금은 공포와 억압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일 뿐 국민들은 다양한 소스를 통해 정보를 받아들이고 있다. 제 블로그(wonsoon.com)만 하더라도 하루에 2000~3000명이 매일 꾸준히 들어온다.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트위터를 통해 내 글을 실시간으로 접속하는 사람만 1700명이다. 몇 달 후엔 1만 명이 넘을 것으로 본다. 이것만 해도 내 글을 일상적으로 보는 사람이 몇 만 명은 족히 넘는 것이다. 또, 인터넷은 쉽게 글을 옮길 수 있고 자신의 의견까지 덧붙일 수 있어 기존 매체 못지않은 영향력을 발휘한다. 1인 미디어를 통한 개인의 영향력이 이 정도일 정도로 세상이 바뀌었는데 중소 언론사가 자신들의 위상을 저평가하고 수세적인 자세를 갖는다면 이는 자신의 책임과 역할을 메이저 언론이나 정부에 떠넘기는 것이나 다르지 않다.”

-지난해 큰 화두 가운데 하나가 촛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촛불이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촛불은 꺼진 것인가.
“촛불이 과연 우리에게 빛이었던가. 이런 자문부터 해봐야 한다. 촛불시위는 국민들의 실망과 새로운 사회를 바라는 열망들이 보여준 창조적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때도 나는 촛불 한가운데서 촛불을 넘어 그 다음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광장에 나와서 외치고 저항하고, 항의하면 새로운 미래사회가 도래하는가. 그렇지 않다. 촛불에 열광한 시민들이 시위만 해서는 안된다. 다양한 시민단체, 인간적 복지를 위한 창조적 모임을 만들어 냈어야 했다. 좋은 언론을 하나 정기구독 하는 것, 좋은 방송의 시청자가 되어주는 것, 블로그에 접속하고, 트위터를 하고, 미디어오늘과 같은 대안매체를 봐주는 것, 각 지역에 인터넷 신문을 만드는 것, 소셜미디어를 100% 활용하고 이를 세력화하는 것 등 실사구시적 실천이야말로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균형 잡히고 의식이 깨어있는 시민 100만 명 만 있으면 세상이 바뀐다. 이들이 한 달에 1만원씩만 기부해도 수천 개의 사회단체가 자립할 수 있고, 사회를 바꿀 수 있다. 거창한 일들도 고민해야 하지만 자신이 생활 속에서 할 수 있는 일만 해도 어마어마한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4대강 사업 서두를수록 문제
정치입문 고민했지만
지금 이 자리가 내 역할"


박원순은…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는 변호사 출신의 진보적 시민운동가다. 경기고와 서울대 입학으로 순탄한 길을 갈 수 있었으나 박정희 정권 시절 민주화 학생운동으로 감옥에 투옥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는 1980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변론을 맡으면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1995년부터 2002년까지 참여연대 사무처 처장으로 일하면서 부패정치인 낙천낙선운동, 소액주주 운동, 보안법폐지 운동 등을 벌여 성과를 내기도 했다. 이후에는 아름다운재단과 희망제작소를 설립해 1% 기부운동과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벌이고 있다. 이런 노력을 인정받아 지난 2006년 만해 대상과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

   
  ▲ 이치열 기자 truth710@  
 
-이명박 정부가 중도, 서민정책 등을 내세우면서 지지도가 크게 상승하는 추세다. 현 정부의 서민정책을어떻게 평가하나.

“이 대통령이 중도서민 정책을 중간에 내세운 것은 국정의 독주, 소통의 단절, 진보세력 억압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니까 국면전환용으로 발표한 것이다. 보금자리 주택, 미소금융, 재래시장 방문 등의 행보가 언론에 나오고 화면에 비춰지면서 이를 잘 알지 못하는 국민들의 지지효과가 일정정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지도가 올라갔다고 즐거워할 일이 아니다. 1년 뒤 어떻게 될 것인지를 생각해보면 알게 된다. 지금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들은 예산만 쏟아 부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특히 미소금융사업은 기본적으로 민간이 하는 게 적절하다. 희망제작소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소액대출 사업으로 50명 이상의 ‘싱글맘’을 돕고 있는데  참 쉽지 않다. 이 사업이 성공하려면 지원하는 사람들의 열정과 에너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취약계층이 자립하도록 성공하도록 하려면 어마어마한 지원이 필요하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민간이 해야 성공한다. 그런데 정부는 잘하고 있는 걸 빼앗아가 망쳐놓고 있다. 정부나 관료는 실적을 위해 기본적으로 눈에 보이는 자금지원에만 신경 쓸 수밖에 없다. 사회적 기업을 지원하겠다고 내용을 부풀리지만 결과는 뻔하다. 설사 정치적 견해가 달라도 일을 잘 할 수 있는 쪽에 맡겨야 성공한다. 역량과 경험을 가진 곳은 다 배제하고 해본 적도 없는 뉴라이트에 이런 사업들을 맡겼다. 당연히 도덕적 해이가 나타나지 않겠나. 어마어마한 낭비다. 여당이 잘해야 야당도 정권을 잡기 위해 더 노력하는 선순환 구조가 나타날 텐데 지금 상황은 암담하기만 하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명박 대통령을 만들어줬듯이 이 대통령 역시 다음 정부를 만들어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현 정부에 대한 진정성이 의심스럽다는 말들이 나온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고 나서 상위 2%가 부담하는 세금을 감면하고 재벌우호정책을 펴는 등 상위계층에 대해 구체적인 정책을 폈다. 그러나 서민들을 위한 정책은 말만 요란하다. 정부는 또, 4대강에 예산 20조 원을 쏟아 붓겠다고 했다. 예산이 4대강 사업으로 쏠리면서 지방자치단체교부금이 대폭 줄어들었다. 지자체들은 예산감축이 불가피해졌다. 신규 복지사업을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하던 사업도 중단해야 하는 상황이다. 정부는 서민생활에 영향이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영향이 없을 수 있나. 양극화는 더 심해질 것이다. 서민들을 위한다는 현 정부의 진정성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4대강 사업이 실패하면 다시 복구하는 데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4대강 사업을 임기 중에 끝내려고 서두른다는 것이다. 올해 예산은 어떻게 한다고 해도 내년 말이 되면 국민여론이 악화되면서 예산확보가 쉽지 않을 것이다. 4대강 사업의 문제를 당장 눈으로 보게 되는 2012년쯤에는 레임덕이 시작될 것이다. 한나라당의 정파적 대립이 더 심각해질 것이고 지금 대통령보다는 다음 대통령 후보로 모든 것이 몰릴 것이다. 4대강 사업도 어디까지 마무리 될지 불투명하다. 문제는 이 대통령과 한나라당 이후의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잘못하고 있다는 민주당, 시민사회세력, 진보세력 등은 진정 국민들에게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확신을 주고 있는가. 여론전쟁과 홍보경쟁 이전에 진정 이 정권을 압도하는 정책과 역량을 갖고 있는가. 민주당에도 얘기했다. 지난 진보정권 10년 동안을 되돌아보면 준비 없이 정권을 잡아도 문제다.”

-박 상임이사는 정치권에서 올해 지방선거에 출마해 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고 있다. 시민사회영역에 머물러 있기보다 정치를 통해 직접 세상을 바꾸고 싶은 욕망은 없는가.
“고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치권으로 이동한 시민사회 인사들이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했고 오히려 시민사회까지 오염시키는 경우를 종종 봐 왔다. 내가 한 자리 하는 게 나 자신에게도 도움이 안 되고 한국사회 전체를 보더라도 더 좋은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정치인들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권력을 잡지 않고도 다양한 방법으로 사회문제를 풀어온 것처럼 앞으로도 정부·기업 등과의 협치를 통해 사회를 바꾸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2010년에도 정부의 소통과 진정성의 부재는 여전히 계속될 것 같다. 그런데도 한국사회에 희망이 있는가.
“분노는 중요하지만 분노만 해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분노를 넘어 대안을 가져야 한다. 개인적으로 좋은 아이디어를 나누고 전파하기 위해 블로그와 트위터, 페이스북 등을 다 하고 있다. ‘제주의 소리’라는 인터넷방송도 있다. 이 방송이 처음 생겼을 때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가졌지만 지금은 제주도 여론을 좌지우지하는 대표 방송이 됐다. 진보는 우파나 보수세력보다는 통찰력이나 열정, 상상력이 더 높다고 본다. 희망제작소만 보더라도 희망이 보인다. 지난해 국정원으로부터 압박을 받는 등 정부와 관계가 악화됐지만 일반회원이 4000명을 넘어섰고 고액기부자도 크게 늘었다. 이런 정도라면 올해 완전 자립도 가능할 것 같다. 위기가 지나가면 더 좋은 세상이 온다는 말이 딱 맞지 않나. 또, 중·고등학생들이 블로그에 글 남기는 것 보면 깜짝 놀랄 아이디어들이 넘친다. 지난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1000여 명의 사람들을 만났는데, 대한민국에 희망이 없는 곳이 없더라. 언론운동도 마찬가지다. 나는 시민운동가들에게 ‘멀리서 대포를 쏘면 맞지 않는다. 바늘로 콕콕 찌르는 운동을 하라’고 말한다. 이제는 인터넷 언론도 지금 이상을 뛰어넘는 역할을 할 때가 됐다. 진실과 정의는 종국에 승리한다고 나는 믿는다.”

낙천적인, 그러나 자신에게 엄격한 시민운동가

   
  ▲ 이치열 기자 truth710@  
 
지난 한해 정부정책을 비판해 온 시민단체 활동가들로부터 귀에 딱지가 들어앉게 들었던 말은 “차라리 벽에다 대고 말을 하는 게 낫다”는 한숨소리였다.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도 지난 해 파트너십을 맺었던 기업의 갑작스러운 변심으로 미소금융사업이 중단되고 그 배후에 국정원이 있다고 폭로한 뒤 고소를 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하지만 그는 2시간의 인터뷰 내내 밝은 얼굴로 ‘희망과 대안’이라는 단어를 빼놓지 않았다. 박 상임이사는 정말 세상이 바뀔 수 있다고 믿는 눈치였다.

“눈앞에 벽(장애물)이 나타났다고 절망할 필요 없다. 벽을 통과하는 신소재를 발명하면 되는 것 아닌가. 아니면 돌아갈 수도 있고 뛰어 넘을 수도 있다. 무너뜨리거나 땅을 팔 수도 있다. 아니면 슬쩍 벽을 밀어보라. 나는 장애물에 막혀 낙심하는 희망제작소 연구원들에게 아르센 뤼팽이나 셜록 홈즈가 나오는 추리소설도 안 읽었냐고 말한다. 그 책들을 보면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은 벽을 살짝 밀거나 촛대를 건드리면 건너편으로 통하는 비밀통로가 나오지 않나. 한번 비밀통로를 발굴해 보라.”

박 상임이사는 낙천적인 이상주의자인 동시에 완벽한 현실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는 “희망제작소에 들어오는 간사들은 유능한 간사로 거듭나던지 병들어 나가든지 둘 중에 하나”라고 말했다. 우스개 소리가 아니다. 그의 책상 위에는 온갖 서류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는데 수많은 보고서들을 직접 검토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단호하게 다시 작성하라고 돌려보낸다. 스스로가 일을 대충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그는 또 전국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바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지난해 지역 곳곳을 돌아다니면 만난 사람만 1000명이 넘는다. 책상 한 쪽에 펼쳐놓은 12월23일자 다이어리를 슬쩍 보니 약속만 8개가 넘는다. 인터뷰 도중에도 10여 통이 넘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너무 바빠 사무실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공식일정을 마치고 밤 10시가 넘어 사무실로 들어와 자료를 검토하다가 밤을 새는 일도 다반사란다. 그는 갑자기 사무실 한 쪽에 놓인 철제 사무용가구 서랍을 열더니 매트리스와 침낭, 개인적으로 아낀다는 꽃무늬 베개를 꺼내 보여주며 웃는다.
그에게 “대한민국에 희망이 없는 곳이 없다고 하셨는데, 집에서는 어떤가요?”라고 물었다. 그는 머뭇머뭇 거리더니 대답했다. “집이요? 집에는 전혀 희망이 없죠(웃음).”                              

인터뷰=노광선 편집국장
정리=김상만 기자
사진=이치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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