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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비만 여성, 동거남 압사시켜

미국에서 체중 130㎏이 넘는 여성이 동거 중인 남성을 압사시킨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는 일이 일어났다.

22일 폭스뉴스 등 외신에 따르면, 지난해 8월 미국 클리블랜드 경찰은 동거 중인 미칼 미들스톤-베이를 자신의 몸으로 압사시킨 여성 미아 랜딩햄을 과실치사 혐의로 체포했다.

당시 체중이 136㎏였던 것으로 알려진 랜딩햄은 체중이 54.4㎏이었던 미칼과 언쟁을 벌이다 홧김에 그를 깔고 앉아 버렸다.

지난 20일 열린 재판에서 캐롤린 프라이드랜드 판사는 랜딩햄에게 과실치사 혐의로 집행유예 3년과 자원봉사 100시간을 명령했다.

랜딩햄은 이날 “세 아이를 함께 기르던 애인을 압사시킨 것은 정말 유감”이라며 “되돌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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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부자는 '있는 척' 안한다"

머리손질 16弗·와인 10弗·옷은 중저가…
"소득, 자산 만드는 능력 탁월" 美스탠리 박사 신작서 밝혀

최지향기자 jh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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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내 백만장자들은 머리 손질에 평균 16달러(약 1만8,000원) 정도를 지불하고, 열 명 중 네 명은 10달러(약 1만1,000원) 미만의 저렴와인을 즐긴다. 여성 백만장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구두는 마놀로 블라닉 같은 명품이 아닌 대중적 브랜드인 나인웨스트였으며, 가장 좋아하는 의류 역시 중저가의 앤테일러였다.

이는 <이웃집 백만장자> 등의 저서를 통해 미국 내 부자들의 특징을 추적해온 토머스 스탠리 박사가 신작 <부자인 척 하지 말고 진짜 백만장자처럼 살아라(Stop Acting Rich... and Start Living Like a Real Millionaire)>에서 밝혀낸 사실들이다. 저자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진정한 부자는 부자인 척 하지 않는다는 것. 워싱턴포스트(WP)는 31일 "성경 잠언에 나오는 '부자인 척 행동하는 사람은 가진 것이 없고 가난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부자다'라는 말이 사실임이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주택을 제외한 순수 금융자산이 100만달러(약 11억5,000만원) 이상인 부자들을 조사한 결과, 스탠리 박사는 "부자가 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수입의 규모가 아니라 수입을 자산으로 바꾸는 능력"임을 밝혀냈다. 특히 흥청망청 돈을 쓰며 겉보기에 화려한 생활을 하는 월가 금융인의 자산은 실제로 많지 않다는 사실이 그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대신 교사처럼 소득이 높지 않은 직업군이 재산을 모아 부자가 될 가능성이 높았는데 전ㆍ현직 교사 중 백만장자는 무려 35만명에 이른다. 즉, 소득의 절대적 많음보다 절약과 안정된 투자가 부자의 지름길임을 보여준 것이다.

진정한 부자들은 으리으리한 집과 고가의 자동차에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부자들 가운데 30만 달러(약 3억4,000만원) 이하의 소박한 집에 사는 이들의 숫자는 100만달러 이상인 집에 사는 이들의 세 배에 이른다. 또한 고가의 자동차를 사는 이들 중 86%는 백만장자가 아니었다.

스탠리 박사는 WP와의 인터뷰에서 "금융위기 이후 수많은 미국 가정이 집을 잃고 파산한 이유는 '부자인 척 하는' 생활습관 때문"이라며 "이 나쁜 습관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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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보다 죽음을 더 정확히 예고하는 양로원 고양이

 사람의 임박한 죽음을 예견하는 ‘식스센스(the sixth sense)’ 고양이.

미국 로드아일랜드의 사설 양로원 ‘스티어 하우스’에 사는 얼룩무늬 고양이 ‘오스카’는 올해 다섯살로, 지난달 31일 AP통신에 따르면 2005년부터 이곳에 온 뒤로 줄곧 양로원 환자들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다.

스티어 하우스는 노인전문요양소로 대부분 다시 회복되기 어려운 말기 환자들이 생을 마무리하는 곳이다. 오스카는 평소에는 이곳저곳 옮겨다니다가도, 특정 환자가 위독한 상태에 처하면 어김없이 찾아와서 그 환자의 죽음을 지켜본다고 한다.

미국 로드아일랜드의 '스티어 하우스'에 사는 고양이 '오스카'. 이 고양이는 의사, 간호사보다 더 정확히 환자의 임종 순간을 알아챈다고 한다.

스티어 하우스 관계자는 “임종을 눈 앞에 둔 환자의 병실에 찾아가면 늘 오스카가 옆에 앉아 있다”며 “병실에서 내쫓으면 밖에서 문을 긁으며 들어오려고 발버둥을 쳤다”고 전했다.

하루는 병원 관계자들이 ‘곧 운명을 달리할 것’이라고 예측한 환자 곁에 오스카가 찾아오지 않았다. 병원 직원들은 ‘오스카의 능력이 사라졌나’라며 의아해했으나, 결과적으로 환자는 죽지 않았다.
이틀 뒤 그 환자의 숨이 멎으려하자, 비로소 오스카는 병실에 찾아왔다. 의사·간호사보다 고양이 한 마리의 예측이 더 정확했던 것이다.

이곳 간호사들은 “오스카가 마치 의사처럼 회진을 다니는 것 같다”며 “누군가의 죽음이 임박하면 그 병실에 찾아가서 환자를 유심히 살펴본다”고 했다. 환자 가족들 중 일부는 이를 꺼렸으나, 정작 환자 본인은 의식이 희미해서 오스카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브라운 대학의 노인병 전문의 데이비드 도사(37) 박사는 애초 오스카의 능력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무려 50건에 달하는 오스카의 ‘실적’을 본 뒤로는 생각을 고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가끔 환자의 가족들조차 임종 순간을 놓칠 때가 있었지만, 오스카는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며 “오스카는 나를 비롯한 직원들보다 더 정확하게 ‘죽음’을 예측했다”고 했다.

도사 박사는 지난 2007년 오스카의 능력에 관련된 내용을 정리해 미국의 저명한 의학 저널인 ‘뉴 잉글랜드 의학 저널’(NEJM)에 기고한 바 있다.

최근에는 오스카와 말기 환자들의 이야기를 묶어서 ‘오스카와 함께 회진(回診)하기: 평범한 고양이의 비범한 능력’(Making Rounds With Oscar: The Extraordinary Gift of an Ordinary Cat)라는 책을 발표했다.

AP통신에 따르면, 도사 박사는 이 책에서 오스카의 능력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지는 않았다. 다만 환자의 몸에서 나는 냄새나 간호사들의 움직임을 통해서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내놓았을 뿐이다.

그는 “오스카를 통해서 삶과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있다”며 “이 책의 메시지는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을 꼭 지켜보라’는 것”이라고 AP통신에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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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잡동사니를 정리하다 발견한 흑백사진들....

아마도 1987년 여름 뉴욕과 파리에서 찍은 것으로 기억한다

대학선배 서석만(Peter Suh)과 컬럼비아 대학 캠퍼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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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흑백사진을 찍은 1987년 이후 세월이 흘러 2005년 다시 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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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의 영원한 ‘로망’ 체 게바라는 나의 동지
[Dossier] 착취와 억압을 넘어 혁명으로 2
퇴행적 현실 극복 위해 무장혁명의 길 걸어
태생적 조국을 넘어 인류의 혁명적 영웅으로
[12호] 2009년 09월 03일 (목) 11:46:00 아메드 벤 벨라 | 알제리 초대 대통령 info@ilemonde.com

40여 년 전, 저 세상으로 떠난 체 게바라가 시공간을 넘어 우리의 양심을 일깨우고 있다. 체 게바라의 호소는 우리의 행동을 촉구하고 있다. 그렇다, 오직 혁명만이 인간을 빛과 같은 존재로 만들 수 있을 때가 간혹 있다. 볼리비아 난카후아주의 깊은 곳에 옷을 벗고 누워 있는 체 게바라의 몸 위로 빛이 비치는 모습은 우리가 세계 곳곳의 신문에 게재된 사진들을 통해 본 장면이다. 지금 체 게바라는 우리 곁에 없지만 그가 남긴 메시지는 우리의 영혼 깊은 곳까지 남아 있다. 체 게바라는 용감한 사람, 양심이 있는 용감한 사람이었다. 비록 천식으로 몸은 쇠약해져갔지만 정신은 강했다. 체 게바라가 발작 때문에 얼굴빛이 푸르스름해지면 난 체 게바라와 함께 블리다 도시 위에 있는 체레아 언덕에 오르곤 했다. 체 게바라가 쓴 <볼리비아 일기>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체 게바라가 얼마나 극도로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육체적·물리적 고난을 이겨냈는지 알 것이다.

체 게바라에 대해 말할 때 쿠바를 빼놓을 수 없다. 쿠바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그가 혁명의 부름을 받아 참여한 제2의 조국으로서 우리와 그의 삶을 연결시켜주는 곳이다.

   
▲ 체 게바라
1962년 가을에 미국이 선포한 쿠바 봉쇄로 세계가 발칵 뒤집힌 적이 있었다. 내가 체 게바라와 알게 된 것은 이 사건이 터지기 전날이었다. 당시 알제리는 빠른 속도로 독립 수순을 밟고 있었다. 독립 후 첫 정부가 들어섰다. 1962년 9월, 난 알제리 정부의 수반으로서 알제리 독립을 축하하는 행사가 거행되는 뉴욕 유엔본부에 참석했다. 유엔본부에서 알제리 국기가 게양되는 상징적인 행사였다. 그것은 알제리 해방 투쟁의 승리이자, 알제리가 자유세계에 공식 참여하는 것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의 결정에 따라 난 먼저 유엔을 방문한 뒤 나중에 쿠바를 방문하기로 했다. 그것은 단순한 방문을 넘어 쿠바와 알제리의 정치 협력을 약속하기 위한 자리였다. 알제리는 어려운 국면에 처한 쿠바 혁명과 전적인 연대를 공개적으로 강조하고 싶었다.

백악관의 초대를 받아 난 1962년 10월 15일 오전에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쿠바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했다.

“쿠바와 대결하는 쪽을 택하실 겁니까?”

내가 케네디 대통령에게 직접 물었다. 그러자 케네디 대통령은 이렇게 대답했다.

“소련의 무기가 있다면 대결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대결하지 않을 겁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뉴욕발 직항편으로 쿠바에 가겠다는 날 말렸고, 심지어 쿠바의 공군기를 타고 가다가 마이애미에서 활동하는 쿠바 반대 세력에게 공격당할 수도 있다고 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이처럼 은근히 겁을 주었지만 난 이렇게 반박했다. “난 알제리 빨치산 출신으로, 알제리 반혁명 세력이든 쿠바의 반혁명 세력이든 두렵지 않습니다.”

1967년 10월 9일, 볼리비아의 작은 촌락 라이게라에 있는 학교의 한 교실. 전날 생포된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가 이곳에서 암살당했다. 장 폴 사르트르로부터 ‘우리 세기에서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는 찬사를 받은 체 게바라가 혁명으로 가득했던 파란만장한 삶을 이렇게 마감했다. 생전에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에서 과테말라까지, 쿠바에서 콩고까지. 마침내 볼리비아까지 누비며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겠다는 따뜻한 희망을 갖고 평생 혁명을 위해 살았다. 아메드 벤 벨라 알제리 전 대통령은 1962년과 65년 사이 체 게바라를 자주 만났다. 당시 알제리는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전세계 혁명가들의 은신처였다.

10월 16일 우리가 쿠바에 도착하자 쿠바인들은 우리를 열렬히 환호했다. 우리 대표단이 쿠바에 도착하면 하바나에서 정치에 관한 회담을 하기로 일정이 짜여 있었다. 하지만 호텔에 짐을 놓자마자, 의전 절차를 생략한 채 우리는 피델, 체 게바라, 라울 카스트로, 그리고 우리와 동행한 기타 지도자들과 두서없이 격의 없는 논쟁을 벌였다. 우리는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난 쿠바의 지도자들에게 케네디 대통령과의 만남에서 받은 기억의 느낌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열심히 나누다 보니 의제 거리가 떨어져 더는 나눌 이야기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쿠바 이곳저곳을 둘러보기로 했다.

이 짧은 사건은 우리의 회동을 전적으로 파격적인 관계로 이끌었으나, 쿠바 혁명과 알제리 혁명을 잇고,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 나의 관계를 돈독히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게바라, 알제리 혁명 성공에 적극 도움

이같은 끈끈한 연대감이 실질적으로 강해진 또 하나의 계기가 있었다. 바로 1963년 10월, 인근 모로코의 침략 도발인 이른바 틴두프 전쟁으로 알제리 혁명이 처음으로 위협을 받았을 때다. 고작 독립투쟁의 전투 경험뿐이었던 알제리 군대는 상공 방어체제도 없었고(알제리에 비행기가 한 대도 없었기 때문이다), 변변한 전투장비도 없었다. 그렇기에 우리 군은 최악의 불리한 상황에서 모로코군의 공격에 맞서야 했다. 우리 군의 대응책은 독립 투쟁 때 사용했던 유일한 전술, 게릴라전밖에 없었다. 사막, 나무가 없는 넓디넓은 길들은 오레스, 유르유라, 콜로 반도, 틀렘센 반도의 산들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다행히 알제리군이 아주 잘 아는 곳들이었다. 적군은 알제리 혁명이 강한 영향력을 미치기 전에 진압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가말 압델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은 우리에게 상공 방어체계를 즉시 마련해주었고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 라울 카스트로, 기타 쿠바 지도자들이 22대의 전차를 보유한 대대와 병사 수백 명을 보내주었다. 수백 명의 병사들은 시디벨아베스 남쪽 베도로 진입해 전쟁이 계속될 경우 바로 투입할 준비를 끝냈다.

쿠바가 보내준 전차에는 적외선 장치가 갖춰져 있어 야간 투입도 가능했다. 이 전차들은 소련이 쿠바에 인도한 것으로, 불가리아 같은 공산주의 국가를 포함해 제3세계에 주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 붙었다. 하지만 소련의 조건을 어기고 쿠바는 알제리 혁명을 돕기 위해 이 전차들을 보내준 것이었다.

틴두프 사건 뒤에는 미국이 있었다. 모로코 군대를 수송하는 헬리콥터들은 미국인 조종사가 몰았다. 훗날 같은 이유로 쿠바 지도자들은 대서양을 지나 앙골라와 그 외의 지역에도 군사 지원을 하게 된다.

쿠바가 알제리에 군 병력을 어떻게 보내주었는지 설명해볼 필요가 있다. 그 무엇보다도 쿠바와 알제리의 긴밀한 관계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 피델 카스트로(왼쪽)와 체 게바라.
1962년 10월, 난 쿠바를 방문했다. 그때 피델 카스트로는 약속대로 20억 프랑을 알제리에 지원해주고 싶어했다. 쿠바의 경제 사정을 고려해 20억 프랑을 현금이 아닌 설탕으로 보낼 수밖에 없다고 했다. 난 설탕은 알제리보다는 쿠바가 더 필요로 하는 것 같아 그의 지원을 거절했지만 피델 카스트로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1년 뒤, 쿠바 선박 한 대가 오랑 항구에 도착했다. 선박에는 쿠바가 약속한 20억 프랑어치의 설탕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런데 쿠바의 전차 10여 대와 병사 100여 명도 함께 승선해 있어 우린 깜짝 놀랐다. 학생 노트에서 찢은 종이에 쓴 짧은 쪽지도 있었다. 라울 카스트로가 보낸 이 쪽지에는 쿠바가 알제리에 든든한 유대감을 갖고 있어 전차와 병력을 지원한다고 적혀 있었다. 물론 우리도 쿠바 선박을 빈 선박으로 다시 보낼 수 없어 쿠바에 대한 감사 표시로 알제리 제품을 가득 실었고, 호르헤 세르게라 대사의 조언에 따라 북아프리카 바르바리아 지방의 말 몇 마리도 함께 태워 보냈다. 이렇게 해서 쿠바와 알제리 사이에 끈끈한 유대감을 바탕으로 한 물물교환이 시작된 된 것이다. 상황이 어떻든 이같은 물물교환은 두 나라의 관계에서 특별한 부분이었다.

게바라, 또다시 혁명의 길로

한편 체 게바라는 현실적으로 규제와 제한이 많아서 진정한 혁명을 완수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혁명이란 비정한 시장 논리 및 상업 우선주의와 직간접으로 얽히는 순간부터 그 과업을 이뤄내기가 무척이나 어렵다는 것이다. 체 게바라는 1965년 2월 알제리에서 열린 아프리카-아시아 회의에서 시장 논리와 상업 우선주의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더구나 쿠바 봉쇄 같은, 소련과 미국이 체결한 협정은 씁쓸함을 남겨주었다. 나는 알제리 주재 소련 대사와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아프리카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봐도 거대한 혁명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 게바라는 이같은 상황을 보며 제국주의의 희생양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이들을 위해 무장혁명을 벌이겠다고 했다.

나는 체 게바라의 방식이 성숙한 혁명을 위한 길은 아닌 것 같다고 열심히 설명했다. 무장혁명이 해외에서 해결책이 되려면 먼저 해당 국가 내부에서 혁명을 일으킬 원동력이 충분히 마련되어야 승산이 있다고 본 까닭에서였다. 하지만 체 게바라를 설득할 수 없었다. 체 게바라는 온몸을 아끼지 않고 혁명에 참가하겠다고 하면서 앙고라의 카빈다, 브라자빌 콩고를 여러 번 방문했다.

나는 그에게 좀더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개인 비행기를 제공해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래서 나는 전세계에 파견돼 있는 알제리 대사들에게 체 게바라를 도와달라고 당부했다. 나는 그가 아프리카에서 돌아올 때마다 다시 만났고 그와 함께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체 게바라는 아프리카에 갈 때마다 풍부한 문화유산을 보며 감동에 사로잡혔지만 아프리카 지역의 이기적이고 권력 지향적인 마르크시스트 정당들에 대해선 못마땅해했다. 예를 들면 앙골라 카빈다, 콩고민주주의공화국의 킨샤사 등지에서 그가 경험한 게릴라 세력에 실망스러워했다. 체 게바라가 자기 방식의 혁명투쟁을 벌이는 동안 우린 다른 방식으로 자이르 서부의 무장혁명을 지원했다. 알제리는 탄자니아 대통령 줄리어스 니에레레,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 말리의 정치가 모디보 케이타, 가나의 정치가 콰메 은크루마, 케냐의 정치가 조모 케냐타, 기니의 정치가 세쿠 투레와 각각 협약을 맺어 항공편으로 무기를 실어 이집트를 경유해 보내주었다. 그리고 우간다와 말리 공화국은 전차를 제공했다. 이집트 카이로에서 나는 회의를 주재해 우리 모두의 지원 프로그램을 마련했으며 투쟁을 벌이는 각국의 지도자들로부터 간절한 요청이 있을 때 바로 지원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지원은 종종 너무 늦었다. 이로 인해 루붐바 콩고 초대 총리는 반혁명 세력에 의해 암살되기도 했다.

역사는 과연 진보하는가?

체 게바라는 알제리에 머물던 어느 날 피델의 요청을 대신 알려주었다. 쿠바는 당시 봉쇄된 상태였기에 라틴아메리카로 무기와 군 지휘관을 보낼 수 없었다. 군 지휘관들은 쿠바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알제리가 중간 역할을 해주면 안 되겠냐는 것이었다.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거리가 멀기에 비밀리에 작전을 성공시킬 확률이 컸다. 내 대답은 물론 긍정적이었다. 얼마 후 체 게바라의 지휘로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조직을 알제리로 맞아들이는 작전이 시작되었다.

곧이어 모든 혁명조직의 대표들이 알제리로 이동해왔다. 난 체 게바라와 함께 이들을 만나봤다. 혁명조직을 통합한 수뇌부는 수도 알제의 한 언덕에 위치한 커다란 건물에 마련되었다. 오른쪽에는 정원이 있었다. 이곳 수시니 빌라는 나중에 유명한 곳이 됐다. 알제리 독립투쟁 시절에 이곳 빌라는 여러 레지스탕스들이 고문을 받아 목숨을 잃은 장소였기 때문이다. 어느 날 체 게바라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메드, 큰일이 일어났어. 수시니 빌라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국경지대에서 (체 게바라가 언급한 나라 이름들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잡혔어. 혹시 고문을 이기지 못해 비밀 사항을 말할까봐 두렵군.” 체 게바라는 무장 활동을 준비하는 수시니 빌라가 탄로나고 우리가 라틴아메리카에 세운 수출입회사가 실제로 어떠한 곳인지 적들에게 노출될까봐 무척이나 두려워했다.

1965년 6월 19일 알제리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고 체 게바라는 이곳을 떠났다. 체 게바라는 군사 쿠데타에 대해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했다. 그는 알제리를 거쳐 볼리비아에서 생을 마쳤다. 역사는 과연 진보하는가? 하지만 루뭄바 콩고 초대 총리가 암살된 후 제3세계의 진보 체제, 특히 은크루마, 케이타, 수카르노, 나세르 등이 이끈 진보 체제는 종말을 고했다. 이것이 바로 후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혁명가들의 가슴속에 영원한 게바라

   
▲ 총살당한 체 게바라의 주검.
1967년 10월 9일이라는 날짜는 우리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 있다. 그날, 난 외롭게 투옥돼 있었다. 그런데 라디오를 통해 체 게바라가 죽음을 맞았고 적들이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1967년 10월 난카후아주에서 게릴라전은 끝을 맺었다. 게릴라전에 대한 기억이 서서히 옅어진다. 하지만 1967년 10월이라는 날짜에서 멀어질수록 투쟁하고 희망을 품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체 게바라에 대한 기억은 오히려 더욱 뚜렷해진다. 체 게바라는 영원히 이들의 일상 속에 자리를 잡고 있다. 투쟁하고 희망을 품는 사람들에게 체 게바라에 관한 것은 가슴속과 머릿속에 남아 있다. 마치 가장 깊고 화려한 곳에 숨겨진 보물처럼 말이다.

내가 갇힌 감옥은 수백 명의 병사들이 조심스럽게 지키고 있었다. 감옥과 그 주변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1972년 5월의 어느 날, 갑자기 감옥 주변이 술렁였다. 몇백m밖에 안 떨어진 지점에 피델이 있었던 것이다. 피델은 근처 농가를 방문하려고 이곳에 온 것이었고 내가 여기 외딴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듯했다. 내가 투옥된 감옥은 언덕 위 외딴 곳이라 피델은 나무 꼭대기 너머 지붕만 겨우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곳은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곳이기에 한때 제국주의 국가의 군대가 고문하는 장소로 택하기도 했다. 순간 내 머릿속에는 이런저런 기억, 여러 얼굴들이 오랜 영화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비록 체 게바라와 난 헤어졌지만 그때는 체 게바라가 내 머릿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실제로, 나와 내 아내는 체 게바라에 대한 기억을 계속 안고 살았다. 우리가 갇혔던 감옥의 벽에는 체 게바라의 커다란 사진이 언제나 붙어 있었고 체 게바라의 눈빛은 우리의 일상, 기쁨, 고통을 바라봤다. 잡지에서 오린 체 게바라의 작은 사진은 마분지에 붙인 후 비닐로 싸서 우리가 어디를 가든 늘 갖고 다녔다. 우리에게는 가장 소중한 사진이었다. 지금 이 사진은 내 고향 마을인 마그니아에 있는 집에 있다. 예전에 부모님이 사셨던 집이었다. 이 집은 유배를 떠나기 전 가장 소중한 기억을 남긴 곳이었다. 바로 이 사진 속에서 체 게바라가 상반신을 벗은 채 누워 있고 그의 몸 위로 무수한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것은 곧 희망의 빛이었다.

글·아메드 벤 벨라
알제리 초대 대통령. 알제리 국민해방전선(FLN)의 전설적인 지도자로서, 알제리 독립을 이끈 뒤 1962년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으나, 1965년 6월 우아리 부메디엔 대령의 쿠데타로 쫓겨나 오랜 수감 생활을 했다.

번역·이주영 ombre2@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한불상공회의소 격월간지 <꼬레 아페르> 전속 번역. 번역서로는 <여성의 우월성에 관하여>(200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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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오백장군 接神한‘바위 스토리텔러’ [조인스]

거대한 돌덩이섬에 이야기의 혼 불러내기 11년
이만훈 기자의 사람속으로 | 제주돌문화공원 만드는 백운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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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철 씨가 ‘전설의통로’에서 설문대할망 전설을 얘기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은 ‘설문대할망과 오백장군’ 설화를 상징해 쌓은 돌탑.

 

월간중앙 꿈이 없는 세상은 삭막하고 불행하다. 그래서 인류는 태곳적부터 집단으로 꿈을 꾸어왔다. 신화다. 신화는 만인의 꿈이다. 제주에는 신화가 넘친다. 꿈의 땅이다.

‘까마득한 옛날 설문대라는 할망이 있었다. 할망이 심심풀이로 바다 한가운데 흙 쌓기 놀이를 한 것이 제주도다. 치마폭으로 나르다 흘린 흙이 수많은 오름이 됐고, 마지막으로 흙을 부은 곳에 한라산이 생겨났다. 산이 너무 높아 눈에 거슬리자 봉우리를 꺾어 던졌다. 꺾인 자리에는 백록담이, 던진 봉우리의 꼭지는 산방산이 되었다. 할망은 한라산을 베고 누우면 다리가 제주시 앞바다 관탈섬에 걸쳐지는 거인이었다. 할망에게는 500명의 아들이 있었다. 어느 해 몹시 가뭄이 들어 아들들이 먹을 것을 구하러 나간 사이 큰 솥에 죽을 쑤다 그만 실수로 빠져 죽었다. 빈손으로 돌아온 아들들이 배고픈 김에 허겁지겁 죽을 퍼먹었다. 늦게 돌아온 막내가 솥 바닥에서 큰 뼈다귀를 발견하고는 어머니를 먹은 형들을 원망하며 차귀도로 뛰쳐나가 울다 바위가 돼버렸다. 형들 역시 죄책감으로 그 자리에서 하염없는 피눈물을 쏟다 바위가 됐다. 한라산 영실의 오백장군이 그네들의 주검이다.’

백운철(65). 그는 몽상가다. 그냥 말하면 ‘미친 영감태기’이고, 좋은 말로 하면 ‘꿈을 좇는 하르방’이다. 환갑을 훨씬 넘기고도 아직까지 ‘설문대할망과 오백장군’ 타령이니 말이다.

“1968년 10월 어머니의 강요로 산신기도를 위해 영실에서 1주일 동안 지낸 적이 있어요. 달밤에 그곳은 그야말로 ‘영실(靈室)’이었습니다. 어슴프레 눈에 잡히는 바위들의 실루엣에서 오백장군을 확인했습니다. 끝없이 자학(自虐)하는 한(恨)의 몸부림…. 그날 이후 지금까지 그 석령(石靈)들을 찾아 위로하는 것이 제 업이 되었습니다.”

제주문화는 돌문화

그는 요즈음 조천읍 교래리에 있는 제주돌문화공원에 산다. 2006년 부분 개장했지만 여전히 400만여m2(130만 평)의 대지 위에 돌을 물감 삼아 ‘설문대할망과 오백장군’ 이야기를 그리느라 여념이 없다. 창고(가수장고)를 집 삼아 11년째다. 이유는 단 하나, 제주의 혼을 되살리기 위해서다.

“제주도는 섬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돌덩이예요. 그렇다 보니 살림살이도 하나에서 열까지 돌이 빠지면 얘기가 안 되죠. 바늘을 가는 숫돌, 돼지 여물통, 세숫대야 등 돌로 된 민속품의 종류만 줄잡아 270여 가지나 될 정도니까요. 제주의 문화는 돌문화입니다. 한마디로 제주의 정체성이죠. 그런데 이 아름다운 문화가 1970년대 이후 새마을운동이다 개발이다 해서 대부분 사라져버렸습니다. 혼이 없어진 거죠. 그러니 후손들한테 부끄럽지 않으려면 뿌리째 없어지기 전에 이제라도 돌문화의 흔적이라도 알려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백씨는 제주사람들에게만 특별한 유전자가 있다고 믿는다. 돌 DNA다. 그래서 돌과 함께 살고, 이야기하고, 죽어서도 돌 품에 잠드는 것이라고 여긴다.

“이곳 사람들한테 문화란 돌과 부대끼며 사는 일상이었습니다. 그러니 돌에 인격을 부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죠. 설문대할망 이야기도 그런 것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제가 제주문화 운운할 때마다 설문대할망 이야기를 중심에 놓는 까닭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모성애가 주제인 이 아름다운 설화가 곧 제주의 혼이자 문화와 직결되거든요.”

백씨의 현재 직함은 제주돌문화공원 ‘총괄기획’. 2020년 최종 완공을 목표로 추진하는 공원 조성의 모든 프로그램을 진두지휘하는 자리다. 공무원이 아닌 민간인 신분으로 도립공원의 핵심 역할을 하는 것은 공원 조성이 민·관 협약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돌문화공원의 탄생 자체가 백씨의 아이디어에서 이뤄진 것이고, 전시품도 대부분은 그의 기증품이다.

지금까지 전체 구상 중 절반 정도 진척됐지만, 조성 초기부터 기획은 물론 디자인과 그에 따른 설치 과정까지 그의 손에서 이뤄지고 있다. 그렇다 보니 공원이 온통 ‘전설의 고향’ 같다.

‘곳자왈’을 다듬어낸 하늘계단을 오르면 ‘모아이’ 같은 거석이 열병한 ‘전설의 통로’가 있고, 좌우에 죽솥과 물장오리를 표현한 연못, 설문대할망과 오백장군을 상징하는 9기의 거대한 방사탑이 손님을 맞는다. 이어 오솔길을 따라 조금 가면 확 트인 개활지에 커다란 ‘하늘연못(Sky Pond: 지름 40m, 둘레 125m)을 머리(옥상)에 인 돌박물관이 나오는데, 지하 1층에 마련된 형성전시관과 자연석전시관을 통해 제주도의 ‘탄생비밀’과 만나면서 설문대할망의 전설을 떠올리게 된다.

돌에 전설의 옷을 입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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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설치가 끝나지 않은 백운철 씨의 기증품 중 일부.

밖으로 나와 바농오름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제주의 돌문화를 시대별·기능별로 보여주는 초가전시관이 그림 같이 앉아 있고, 오름자락 숲 속에도 다양한 민속이 1㎞쯤 오솔길을 따라 곳곳에 펼쳐져 마치 딴 세상인 양 사람을 홀린다.

뿐만 아니라 48기의 돌하르방 군(群)이 위요(圍繞)하는 가운데 오백장군의 막내를 형상하는 높이 6m짜리 선돌이 한라산 영실을 그리며 우뚝 서있는 풍경 하며, 비석거리를 지나 전통 초가마을의 말방앗간까지 보노라면 제주의 신속(神俗)이 하나였던 옛날을 살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다.

“애초부터 설문대할망과 오백장군 설화를 바탕으로 했으니 몽환적 분위기가 느껴질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설문대할망이 제주문화를 살리려고 강림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백씨는 돌 마술사다. 그렇다고 깨고, 쪼고, 다듬어 ‘작품’을 만들어내는 석수장이는 아니다. 잊히고 버려진 돌을 찾아 전설의 옷을 입힘으로써 온기를 불어넣고, 급기야 생명을 얻은 돌들로 하여금 우리한테 말을 걸게 한다. 어찌 보면 가까운 옛날부터 먼 옛날 설문대할망 시절까지의 이야기책을 읽어주는 전기수(傳奇?) 같다.

백씨는 돌문화공원의 ‘씨알’ 2만 점을 기증했다. 조록나무뿌리로 된 형상목(形象木) 1000점을 제외하고는 거의 돌이다. 맷돌·말방아·정낭돌·동자석·돌하르방·화산탄·용암구 등. 그가 얼마 전까지 운영했던 탐라목석원에 있던 것들이다.

‘갑돌이와 갑순이의 일생’으로 상징되는 목석원은 다양한 형상의 고사목뿌리와 돌로 꾸며져 1971년 개원 이래 2009년 8월 초 문을 닫을 때까지 세계 12대 공원에 선정(2001년)되는 등 38년 동안 ‘전설의 정원’으로 뭇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곳.

따지고 보면 목석원의 탄생도 그의 남다른 몽상가 기질에서 비롯됐다. 나무뿌리와 돌멩이에서 갖가지 동물이나 사람 얼굴을 읽어내고 그것에 미쳐 평생을 함께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군에 입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강원도 한계령 부근 도로공사 현장으로 화목(火木)을 하러 다녔어요. 어느 날 덤프트럭을 타고 도착해 불도저가 쓰러뜨려놓은 아름드리의 밑둥치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수백 년 동안 자라면서 뻗어나간 뿌리가 묘한 공간구성을 하고 있는 것이 마치 거장이 빚은 조각작품 같았기 때문입니다. 정신 없이 가지를 치고 몸통을 베어 땔나무의 지정 양을 채운 뒤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뿌리를 챙겨 부대로 가져왔어요. 저의 수집벽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돌과 나무뿌리 수집에 미쳐

이후 그는 땔나무 사역이 있을 때마다 자원했고, 그럴 때마다 수집한 괴목(怪木)이 하나둘 쌓여갔다. 어느덧 부대 안에 소문이 나 중대장이고 대대장이 작품을 달라고 할 정도가 됐다. 일이 없는 토요일과 일요일 냇가에서 빨래를 해놓고 낮잠을 자다 말고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주위의 돌을 뒤적이다 또 한번 자연의 신비를 느끼게 된다.

그로부터 기묘하게 생긴 돌도 수집하기 시작했다. 첫 휴가를 나왔을 때 부모가 서귀포에서 9917m2(3000평) 정도의 감귤밭을 하고 있었다. 부모를 만나 군대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미주알 고주알 보고하느라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어머니가 이웃에 나무뿌리와 돌을 엄청나게 많이 모으는 사람이 있다고 하시면서 데려가는 거예요. 온 집 안에 나무뿌리와 돌이 가득한 것도 그렇고, 모양도 가지가지로 그렇게 기기묘묘할 수 없었습니다.”

성이 성씨인 집주인은 나무뿌리와 돌을 모아 기념품가게에 넘기는 사람이었다. 백씨는 그 자리에서 성씨한테 함께 산에 가자고 졸랐다. 성씨는 프로답게 한라산 골짜기 골짜기를 뜨르르 꿰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고주박을 보고도 단박 무슨 나무인지 알 정도의 고수였다.
백씨는 휴가기간 20일 내내 친구를 만나는 것도 제쳐두고 성씨와 함께 산으로 쏘다녔다.

날씨가 궂은 날에는 바닷가로 다니며 돌을 주웠다. 성씨는 돌에 대해서도 도사였다. 서귀포 칠십리 바닷가 어디에 가면 어떤 종류의 돌이 있는지 죄다 알았다.

“귀대한 뒤에도 줄창 그 생각만 나는 거예요. 그래서 꾀를 냈습니다. ‘관보휴가’를 가기로 말입니다. 중대장의 구두를 닦아주고 관사에 땔나무를 해다 주는 등 환심을 산 뒤 집에 연락해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보내도록 했어요. 결국 보름간의 휴가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정기휴가를 다녀온 지 두 달 만이었으니 얼마나 나무뿌리와 돌에 미쳤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대한 후 백씨의 수집벽은 더욱 거세졌다. 입대 전 다니던 서울예술학교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않고 곧장 서귀포 집으로 내려가서는 하고많은 날 산과 바닷가를 헤매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무뿌리를 캐 흙을 털기 위해 물에 담갔는데 가라앉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문득 외할머니의 나무빗이 물이 가득한 세숫대야 바닥에 있는 것을 본 기억이 떠올랐다.

외할머니는 ‘조레기나무’라고 했지만 정확히 무슨 나무인지 궁금했다. 뿌리를 들고 제주대식물원으로 박정덕(식물학) 교수를 찾아갔다. 주로 물가에서 채집했는데 잎이 동백나무와 비슷하다고 하자 박 교수가 식물도감을 뒤지더니 “제주도의 해발 700m 이하 물가에서만 자라는 조록나무”라며 “재질이 단단해 주로 참빗이나 관 등 견고한 물품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고 가르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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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억원에 일본으로 팔려갈 뻔했던 <관음상> 용암석. 백운철 씨가 007작전을 편 끝에 어렵사리 구해 돌박물관에 기증했다.

 탐라목물원 개장

백씨는 뛸 듯이 기뻤다. 산 나무가 아니라 죽은 나무의 뿌리를 캐는 그로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분포지를 박 교수가 알려줬기 때문이다. 서귀포에는 큰 개울이 네 곳이므로 이곳만 뒤지면 수집은 끝난다? 더 이상 헤맬 필요가 없었다. 나무뿌리 수집의 선배인 성씨도 모르는, 비밀 아닌 비밀을 안 이상 누구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았다.

혹여 누가 눈치 챌세라 아침부터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캐고 또 캐댔다. 얼굴이 반쪽이 됐다.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역시 어머니는 달랐다. 아들이 하는 일이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아버지 몰래 돈을 마련해 귤밭에 99m2(30평)짜리 창고를 마련해주고 조랑말과 마차에 보조일꾼으로 사촌형을 붙여주기까지 했다.

사촌형은 술꾼으로 혼자 살고 있었는데 힘이 장사여서 나무뿌리를 캐는 데 ‘딱’이었다. 당시 마차가 겨우 다닐 정도였던 중산간도로에 마차를 세워놓고 조록나무 고사목뿌리를 모조리 훑어 내렸다. 군대시절 휴가 때부터 시작했지만 제대 후 2년 동안 집중해 모았다. 그렇게 모은 것이 1000점이나 됐다.

남이 하는 대로라면 20년 걸릴 분량이었다. 있을 만한 것은 다 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재일교포 골동품상 이모 씨가 찾아왔다. 99m2 창고에 가득한 형상목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면서 크기와 관계없이 개당 10만원씩 주겠다고 했다. 전부 하면 1억원-. 엄청나게 큰돈이었다. 난리가 났다.

하잘것없다며 ‘웬수’처럼 여기던 것이 갑자기 보물덩어리가 됐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원해 주시던 어머니마저 필요한 것 몇 점만 남기고 팔라고 야단을 했다.

“다음날 이씨와 다방에서 만나 단도직입적으로 ‘국적이 어디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한국이라고 그래요. 다시 ‘그러면 저 조록나무 형상목들이 일본에 있는 것이 맞느냐, 한국에 있는 것이 맞느냐’고 다그쳤죠. 한참을 아무 말이 없던 이씨가 ‘제주에 있는 것이 맞다’고 합디다. 그래서 제가 ‘이것은 제주도의 보물이다. 그러니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절대 팔 수 없다’고 하고는 빈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부모님도 똑같은 말로 설득했죠. 그러고 나서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장으로 있던 최순우 선생에게 사진을 동봉해 편지를 보냈습니다. 최 선생께서 ‘굉장히 아름다운 공간미와 훌륭한 조각 못지않게 때 묻지 않은 아름다움이 있으니 잘 보존하라’고 답장을 주셨어요. 얼마 뒤 조그만 것 하나를 들고 서울로 최 선생을 찾아 뵈었더니 ‘문화재적 가치가 있으니 잘 보전해 달라’며 더욱 격려해 주시더군요.”

서울에 다녀온 뒤 용기 백배해 1970년 11월 제9회 한라문화제에 초청받아 관덕정에서 처음으로 형상목전시회를 열었다. 전시회는 어머니와 함께 모자 공동 명의로 열었다.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어머니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모자전(母子展) 하면 지금도 낯선 판에 당시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형상목전시회도 이색적이었지만, 모자전으로 더 소문이 났다. 대형 플래카드가 나붙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보도되자 어머니가 신이 나 서귀포 과수원을 팔아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지금의 제주 KAL호텔 주차장 자리(820여m2)를 빌려 가건물을 짓고 이듬해 8월10일 ‘탐라목물원(耽羅木物園)’을 열었다. 나무뿌리를 주제로 상설 전시공간이 문을 연 것은 국내 최초의 일이었다.

낮에는 바닷가로 돌을 수집하러 다니는 통에 목물원을 지키는 것은 어머니 몫이었다. 전시장은 가건물로 허가받았지만 기거할 데가 없어 무허가로 16m2(5평)짜리 슬레이트 건물을 지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제주도에 오면 목물원 가까이에 있는 파라다이스호텔에 주로 묵었는데, 그때마다 이 가건물이 헐리고는 했다. 하지만 이후락 정보부장, 박종규 경호실장, 김현옥 내무부 장관 등은 목물원에 들러 금일봉을 주기도 했다.

“어느 날인가 박 실장이 찾아와 느닷없이 호랑이가 울부짖는 모습의 형상목 <포효(咆哮)>를 가리키며 ‘각하한테 선물하게 싸라’고 했어요.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어머니한테 ‘아들이 하는 일이니 무조건 모른다’고 하라고 신신당부한 뒤 달아나버렸죠. 호령 한마디면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청와대경호실장의 ‘명령’이었지만, 귀한 것을 빼앗긴다는 생각에 앞뒤 가리지 않고 그런 것입니다. 박 대통령이 급히 상경하는 바람에 탈 없이 지나갔지만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일을 겪은 뒤 백씨는 어떤 일이 있어도 작품을 보전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겠다는 생각에 문화재 지정을 추진했다. 공무원들을 설득하기 위해 중앙정보부장·청와대경호실장·내무부장관 등이 금일봉을 전달하며 격려한 사실과 최순우 선생의 편지 내용 등이 적힌 팸플릿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죽은 나무뿌리가 기념물이 될 수 있느냐는 반론이 일어 한동안 시끄러웠다. 그런데 백씨가 대만의 고궁박물관에 가보니 소를 탄 사람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형상의 나무뿌리가 국보로 지정돼 있는 것 아닌가? ‘저것이 국보면 제주도의 것은 천보’라고 그는 속으로 외쳤다.

이 같은 사실을 바탕으로 엄선한 20점이 1972년 4월 지방문화재 3-25호(나중에 도 기념물 25호)로 지정됐다.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다. 그해 11월15일에는 목물원에서 ‘갑돌이와 석순이 결혼식’이라는 이름으로 사상 최초로 돌멩이 결혼식을 거행해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들뜬 기분도 잠시뿐, 얼마 지나지 않아 땅 주인으로부터 “떠날 준비를 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5년간 임차계약했지만 눈앞이 캄캄했다. 여기저기 호소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아내가 처형들한테 돈을 빌려 제주시 아라동 그린벨트 땅 8925m2(2700평)를 샀다. 조성비는 어머니가 대줬지만 턱도 없이 모자라 땅을 담보로 사채 300만원을 얻어 충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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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철 씨가 동자석을 이용해 지구환경회의를 모티프로 한 설치작품 <구수회의>.

민속자료 수집에 번 돈 쏟아 부어

1976년 4월 장소를 옮기면서 ‘탐라목석원’으로 문패를 바꿨다. 문제는 건물이었다. 그린벨트 지역이어서 새로운 건물을 지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단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신청해 지정받은 뒤 원두막을 지었다.

원두막은 사방이 트여 그린벨트법에 저촉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관람료 허가는 1978년에야 받을 수 있었다. 목석원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1979년 3월 당시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TBC의 <인간만세>에 소개되면서부터.

“‘목석의 꿈’이라는 부제로 목석원 안에 있는 ‘갑돌이와 갑순이의 일생’ 전시 코스는 물론 바닷가에서 돌짐을 나르는 것을 모두 찍어 방영되자 제주를 찾는 사람들이 공항에서부터 ‘목석원이 어디냐’며 물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입소문을 타고 관람객이 몰려오기 시작해 아시안게임이 열리던 1986년 한 해에만 130만 명이 들를 정도였습니다. 당시 신혼부부들은 거의 목석원에 들렀을 것입니다.”

돈도 많이 벌었다. 하지만 돈이 생기는 족족 목석원에 쏟아 부었다.

“아시안게임이 있었던 1986년 목석원에서 만난 프랑스 사진작가 레오나르드 셀바의 초청으로 1988년 10월 파리 ‘사진의 달’ 행사에 참가한 적이 있습니다. 두 달간 머무르면서 고향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예술의 도시에 가보니 제주도에 있었다 사라진 아름다운 민속문화가 떠오른 것입니다. 파리사람들은 자기네 도시를 그렇게 문화도시로 가꾸며 자랑스럽게 사는데, 제주에 사는 나는 왜 훌륭한 문화를 잊고 사는가 하는 깊은 반성이 들더라고요. 1970년대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대부분 없어졌고, 그나마 남아 있던 것도 1980년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진 그것들을 복원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해 11월 말 파리에서 귀국해 가장 먼저 한 것이 전화를 놓고 운전을 배운 것입니다. 아침부터 차를 몰고 10여 곳의 골동품상을 뒤지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각종 민속품과 자연석 등 제주의 민속문화와 관련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모았습니다. 당시 관람객이 최고조에 달했던 때인데, 수입을 깡그리 민속자료 수집에 쏟아 부었죠. 지금까지 집 한 채 없이 살고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목표를 세운 만큼 돈이 한도 끝도 없이 들어갔다. 누가 동자석을 갖고 있다면 한달음에 달려가 일단 외상으로라도 가져오곤 했다. 그러다 여행자유화 조치로 관람객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타격을 입었다. 관광지가 우후죽순처럼 100여 곳이나 생겨났고, 관광회사들이 커미션을 주는 곳에만 손님을 데려갔기 때문이었다.

외상 빚이 점점 늘어났다. 하지만 그는 은행에 땅을 잡히고 돈을 얻어 급한 빚부터 꺼나가면서도 수집을 계속했다. 수집용 장비로 산 지프의 운행기록이 120만㎞가 넘을 정도로 돌아쳤다. 결국 빚덩이가 10억원까지 커져버렸다. 게다가 1997년 IMF 사태마저 덮치자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결단이 필요했다. 사업계획서를 만들어 도에 제출했다. 그동안 모아놓은 것을 기증할 테니 돌문화를 알릴 박물관을 만들자는 내용이었다. “사실 진작부터 목석원보다 여건이 좋은 곳이라면 언제라도 그러리라 마음먹고 있던 터였습니다. 민속문화를 살리려고 한 짓이지, 제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돈 때문이라면 팔아버리지 이렇게 하겠습니까?”

백씨의 진정을 알아준 이는 북제주군의 신철주 군수(2005년 작고)였다. 지역방송과 인터뷰를 통해 “돌박물관을 만들기만 하면 제주의 정체성을 살릴 수 있다, 그렇게 한다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기증하고 기획·디자인·설치도 한 푼 안 받고 해 주겠다”고 열변을 토하자, 마침 이를 본 신 군수가 목석원으로 찾아와 일일이 둘러보곤 한마디 했다.

“합시다.”

백씨와 북제주군이 최종적으로 협약을 맺은 것은 1999년 1월19일. 백씨는 수집품 일체의 기증과 함께 새로 만드는 시설의 기획·디자인·설치를 담당하고, 군은 이에 필요한 예산과 용역을 제공한다는 내용이었다. 특히 그의 제안에 따라 제3자의 투자금지조항도 명시했다.

“군수와 함께 세 곳의 후보지를 모두 둘러보고 그 가운데 조천읍 교래리 산119번지 326만9741㎡(약 100만 평)를 부지로 확정했습니다. 이곳은 원래 조천목장이 있던 곳으로,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바로 여기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여 년 동안 목장을 하면서 이미 정지작업을 해놓은 데다 주변 경관이 야외박물관을 하기에 더없이 좋았기 때문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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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이 대통령에게 선물한다며 ‘강탈’하려 했던 형상목 <포효>.

 프랑스에서 사진전시회 연 사진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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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철 씨가 목석원을 문닫으면서 자신을 대신했던 나무등걸과 작별 포옹을 하고 있다.

협약을 맺자마자 백씨는 일일이 다리품을 팔아 기본계획을 마련했다. 가급적 돌 하나, 나무 하나 건드리지 않고 땅이 생긴 대로 하자는 원칙이 바탕이었다. 그러다 보니 공무원들과 마찰도 많았다.

“하늘못이 당초 8m 높이로 설계됐는데 주변 경관과 너무 안 맞는 거예요. 설계대로라면 하늘못이 가려 동쪽에서 보면 한라산이 안 보이고 서쪽에서 보면 바다가 안 보이도록 돼 있었습니다. 그러니 조망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건물 높이를 낮출 수밖에 없었죠. 7m를 잘라냈습니다. 잘라내고 편평하게 하느라 6개월 동안 승강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설계사가 그만두는 일도 벌어졌죠.”

백씨는 남다른 감성의 소유자다. 그래서 발상 자체가 기발하고 신선하다. 서라벌예대와 서울예대에서 연극을 전공한 그는 서예와 토우 제작에도 조예가 깊고, 특히 사진은 전문가다. 그의 작품 200점이 사진작가들한테는 ‘꿈의 전당’인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을 정도다.

“돌 일을 많이 하다 보니 오른팔에 문제가 생겨 1981년부터 붓 대신 사진기를 잡았습니다. 당시 목석원에 설문대할망과 오백장군이라는 신화를 형상화하는 작업으로 돌탑을 쌓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시신이 들어간 죽을 먹고 피눈물을 흘리다 바위가 된 오백 아들의 슬픈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싶었어요. 탑을 쌓으면서 가져온 돌 가운데 슬픈 얼굴 모습들을 찾아내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것을 오는 사람들한테 선물로 주고는 했는데, 소문이 났는지 사진을 하는 사람들이 찾아오더라고요. 윤명신·배병우도 그때 만나 알게 됐죠. 그런데 1986년 아시안게임을 하면서 프랑스에서 레오나르드 셀바라는 사진작가가 한국의 풍물 특집을 하기 위해 한국에 왔습니다. 이분이 제 사진집 <영실>을 보고 찾아왔어요. 영실은 오백 장군의 얼굴 형상을 한 돌을 찍은 겁니다.

파리에서는 매년 10월부터 두 달간을 ‘사진의 달’로 정해놓고 각국의 사진작가들을 초청해 행사를 하는데, 이분의 추천으로 1988년 한국인 사진작가로는 최초로 제가 초청됐습니다. 그런데 또 거기에서 <세계사진사>를 저술한 사진평론가이자 국립도서관 사진국의 큐레이터로 있는 장클로드 뉴마니를 만났습니다.

뉴마니가 제 사진을 보고는 ‘돌을 찍은 것이 아니라 돌의 영혼을 찍었다’고 해서 얼마나 기뻤던지…. 사실 제가 그 사진집을 내놓고 국내 사진작가들한테 얼마나 비웃음을 샀는지 몰라요. 핀트가 안 맞았다고 말이에요. 오백 아들의 슬픔을 담아내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찍은 것이거든요. 눈에 눈물이 고이면 흐릿하게 보이잖습니까? 결과적으로 한국에서 무시당하던 제 사진을 프랑스인이 알아준 거죠.

제주의 설화 속으로 들어가

뉴마니가 사진을 기증할 수 없느냐고 해서 전시를 마치고 귀국해 <영실> <영실Ⅱ>, 그리고 <목석원에서 만난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사진집을 만들어 각각 50장씩 모두 150장을 프랑스로 보내줬습니다. <목석원에서 만난 사람들>에 실린 사진은 한 곳에서 8년간 찍은 사진으로는 아마 세계에서 유일할 것입니다.

거기에다 파리에 체류하는 동안 찍은 <파리에서 만난 사람들>까지 모두 200점이 소장돼 있습니다. 그곳의 소장 작품 중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 브레송의 작품이 250장으로 제일 많다고 해요. 보통은 한두 점이 고작이죠. 뿐만 아니라 뉴마니의 추천으로 ‘현대작가 104인전’에 참가하게 됐고, 이를 계기로 프랑스 네 곳에서 순회전시도 했습니다. 취미로 시작한 것인데 외국에는 목석원보다 외려 사진으로 더 알려지게 됐죠.”

제주돌문화공원 조성사업은 백씨의 감성으로 엮어내는 대역사(大役事)다. 현재 있는 것만 해도 600억원이 투입된 엄청난 규모지만, 기본 얼개를 갖춘 정도로 전체 공정의 절반밖에 안 된다. 나머지 절반은 2020년까지 설문대할망전시관·예술인촌·제주학연구단지를 꾸미는 일이다.

특히 공원 한가운데 6만여m2(2만 평) 부지에 들어설 설문대할망전시관은 설계 단계부터 알려진 구성이 워낙 경이로워 벌써부터 기대를 모은다.

“머리 부분에 일출봉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안에 서커스 공연도 가능한 대극장(실내 높이만 40m)을 만들 계획입니다. 특히 실내와 실외가 통하고, 무대와 관객석이 180도 전환 가능하도록 설계했어요. 아마 무대와 객석이 바뀌는 극장은 세계 최초일 것입니다. 몸 부분에는 천장을 열어 햇볕이 들고 비가 내리게 해 풀과 나무가 자라는 자연상태 속에 시대별 문화를 배치할 것입니다. 발 부분에는 한라산의 물장오리연못을 재현해 발목까지 잠긴 형상으로 만들 것이고요. 전시관에 들어가려면 그 물속을 통해 할망의 자궁으로 들어가는 구조가 될 것입니다. 물속을 통과해 햇빛을 받으며 자궁으로 들어가 한 바퀴 돌고 다시 자궁으로 나오도록 설계돼 있어요. 설문대할망이 제주도를 만들었으니 제주의 모든 문화를 할망의 자궁 속에 넣어보자는 것입니다. 동화 같은 발상이죠. 이게 바로 제주의 아름다운 설화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자 문화를 배우는 길입니다.”

기막힌 착상이다. 제주돌문화공원에 가면 규모에 놀라고, 백씨 때문에 놀란다더니…! 문화유산을 자연과 교직해 예술로 승화하는 솜씨야말로 과연 제주를 창조한 설문대할망의 후예답지 않은가?

글 이만훈 월간중앙 편집위원 [mhlee@joongang.co.kr] 사진 최재영 월간중앙 사진부장 [pressco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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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 코리아] 약초 캐는 연구원… 토종 식물은 신약의 원천

 고양시 서울대 약대 부설 약초원 르포
4만㎡에 1100종 식물 키워… 자연서 추출한 '천연물 신약'은
비용 적게 들고 개발 기간 짧아 대량 생산 어려운 게 남은 과제지난 22일 경기도 고양시의 한 온실. 밖에는 한파가 몰아치고 있었지만, 온실 내부는 섭씨 18도로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야 할 정도로 따뜻했다. 온실에서 귀한 대접을 받고 자라는 것은 예쁜 꽃이나 과일나무가 아니라 온갖 잡초들이었다. 사람을 구할 신약 물질이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 약대 부설 약초원 온실은 각종 신약을 낳을 토종(土種) 식물이 자라는 보고(寶庫)였다.

◆약초 캐러 다니는 약대 연구원

서울대 약대는 경기도 파주·고양·시흥 등 총 3곳에 약초원을 운영하고 있다. 고양 약초원에는 부지 약 4만㎡(1만2000평)에 1100종의 식물을 키우고 있다. 국내 식물이 총 3300종이니 3분의 1을 약초원이 키우고 있는 셈이다.

약초원 연구원에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풀·나무가 단순한 식물이 아닌 질병 치료의 원천이다. 서울대 약대에서는 해마다 2~3회씩 학생·연구원·교수 20여명이 지리산·덕유산·한라산 등을 훑는다. 심마니가 산삼을 찾듯이 약초가 될 수 있는 풀·나무를 캐기 위해서다. 차이가 있다면 산삼은 발견 즉시 돈이 되지만, 풀·나무가 약초가 될지는 추가 작업이 필요하다. 서울대 약대 양희정 연구원은 "채집 대상 식물들이 대부분 산등성이에 있어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다"며 "채집한 식물을 특수 비닐 백에 담아 3일 이내에 약초원에 배달한다"고 말했다.

경기도 고양에 있는 서울대 약초원 온실에서 연구원들이 약초들이 제대로 자라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최근 토종 식물이 미래 신약의 원천으로 주목받고 있다. / 고양=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약초원은 채집한 식물을 미리 개간한 땅에 뿌려 수를 불린다. 종자를 많이 확보하기 위해서다. 겨울의 한파를 이길 수 없는 풀·나무는 온실로 옮겨 새로운 봄을 맞도록 해 준다. 얼핏 보면 약초원이 하는 일은 농사와 비슷하다. 서울대 약대 김영중 교수는 "나무·풀을 약재로 바꾸는 일은 많은 시간과 땅이 필요하다"며 "바꿔 말하면 후발 주자가 단번에 선발 주자를 따라잡기 어려운 분야가 천연물 신약 개발이다"고 말했다.

◆치매 치료할 천연물 신약 개발 중

현재 서울대 약대는 국내 기업과 공동으로 국내 토종 식물에서 뽑아낸 물질로 치매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현재 환자 대상 임상 2상 시험을 하고 있다.

획기적인 치매 치료제를 내 놓는다면 타미플루 못지않은 매출을 올릴 수 있다. 신종플루 치료제인 타미플루 역시 원료를 자연에서 얻었다. 재일교포 과학자 김정은 박사가 미국에서 개발한 타미플루는 중국산 스타아니스라는 나무에서 채취한 원료를 바탕으로 개발했다.

천연물 신약 과정은 식물에서 약효가 있는 물질을 추출하는 작업에서부터 시작된다. 산과 들의 평범한 나무·풀이 약초가 되려면 질병을 치료하는 효능이 있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이때 조상의 지혜를 빌리기도 한다. 서울대 약대 성상현 교수는 "중국의 본초강목, 우리의 동의보감은 천연물 신약 개발의 보고"라며 "약효를 가진 물질을 어떤 풀·나무에서 얻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된다"고 말했다.

신약 개발에서 임상시험은 성별·인종에 상관없이 신약을 복용해도 안전한지를 검증하는 작업이다. 이런 점에서 과거 선조가 풀·나무에서 채취한 물질의 효능을 일정 정도 검증했다는 점도 임상시험의 부담을 덜어 준다.

또한 자연에 없는 물질을 인위적으로 만든 합성 신약보다 자연의 풀·나무에서 채취한 원료로 제조되는 천연물 신약이 인체에 더 적합하다.

이런 안전성 차이는 개발 비용의 절감으로 이어진다. 합성 신약은 임상에서 시판 승인되기까지 평균 11년 6개월이 걸리고, 2000여억원이 투자된다. 천연물 신약 투자비는 60억~100억원 정도. 여기에 개발 기간까지 7년 7개월에서 10년 1개월로 합성 신약에 비해 짧다.

◆세계 각국에서 천연물 신약 개발 경쟁

천연물 신약은 적은 투자비로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지름길이다. 독일·미국·중국 등 세계 각국이 앞다퉈 천연물 신약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성상현 교수는 "국제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천연물 의약품 시장은 600억 달러(약 66조원) 이상이며, 매년 평균 15% 이상 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천연물 의약품이 성장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최대 난관은 안정적인 원료 공급이다. 풀이나 꽃에서 원료를 추출하다 보니 대량으로 생산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생산 확대를 위해 공장 세우듯이 전국 곳곳에서 재배할 수도 있지만, 이러면 원래 얻었던 약효가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같은 지역에서도 기후에 따라서 약효가 달라진다.

그러다보니 땅값과 인건비가 싼 해외로 재배 지역을 확대하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천연물 신약이 자연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이 임상 시험 검증에는 강점으로 작용하지만, 대량 생산에는 약점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김영중 교수는 "천연물 약품의 단점을 해소하기 위해 약초원은 수확시기, 비료, 토양 성분을 달리하면서 최적의 약효를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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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대희 코너] 쾌락인가, 생식인가?


인류 초기의 성은 인간사회를 엮어서 가족을 형성하는 원초적 수단이며 그 자연스러운 도구였다. 그런데 성과 생식에 각기 혁명이라고 하는 문자가 붙으면서 성과 생식을 둘러싼 풍경에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성과 생식이 분리되어 아기를 낳는 기계(?)였던 여성이 이제는 임신과 출산의 걱정 없이 성적 자유를 구가하는 생활이 가능해졌다. 정자와 난자를 체외에서 수정시키는 체외수정은 자연의 혜택이던 생식을 인공생식으로 전환했다.

이런 성 혁명에 큰 역할을 한 것이 다름 아닌 경구피임약의 보급이었다. 1960년대 후반은 미국에서 첫선을 보인 피임약이 피임의 주력부대로 업그레이드된 시기다. 생식혁명의 원동력이 된 체외수정은 1978년 영국에서 성공한 이래, 그런 방법에 의해 자식을 얻은 수가 세계적으로 수백만 명에 이른다.

아기 출산을 기피하는 일본에서도 2004년, 1년 동안에 태어난 체외수정아 수가 무려 1만7000명을 넘었다고 한다. 잃은 것도 적지 않지만 성의 혁명을 통해 얻은 과실은 매우 달고 그 사이즈도 컸다. 여성이 피임약 복용으로 스스로의 의사에 의해 피임을 선택함으로써 원하지 않는 임신과 출산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자기결정의 확립은 성을 지배하는 입장에서 군림하던 남자와, 지배당하는 측의 여자의 관계를 변환시킨 모멘트로서 작용하기 시작했다. 남자에게 의존해 온 수태조절이 여성에 의해 관리되기 시작함으로써 수태생리의 독립이 선언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성 혁명의 먼동이 튼 것은 1948년 미국에서 발표된 킨제이 보고서에서 점화되었다.

약 1만8000명의 미국 남성과 여성의 성 행동을 면밀히 조사한 결과, 얻은 데이터는 세간의 상식을 뒤엎는 적나라한 성생활, 가톨릭 교회나 신사숙녀가 그리는 금욕적 섹스하고는 전혀 다른 성의 기호나 불순한 성교가 만재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몸에 나쁘다’ ‘비도덕이다’ 등의 이유로 금지된 당시 미국 사회에서 많은 남성과 여성이 마스터베이션에 빠져있다는 예상외의 실태가 하나도 감추지 않고 투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 후, 매스터즈 존슨에 의한 클리토리스 쾌락설의 대유행 등 미국은 앞서가는 성의학의 장대한 실험장이 되어 갔으며, 거기서 얻은 결실은 세계 속으로 파급되어갔다.

한편, 생식의학이나 의료의 발달은 고래로 짜여 내려온 자연생식과 반대방향을 지향하는 결과가 되었다. 체외수정을 기본으로 한 불임치료 생식보조의학은 다태임신(多胎姙娠)이라고 하는 귀자(鬼子)를 만들고, 의사는 이 필요 이상의 다태아를 감수(減數)하는 수술을 일상화하게 되었다.

물론 폐경한 여성이 아기를 낳는 기적과 같은 신비한 현상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이런 생식의료의 연장선상에는 클론 인간의 탄생이라고 하는 역겨운 악몽도 있다. 복제인간을 만드는 이 기술은, 단 하나의 줄기세포를 만능세포로 성장시켜 장기이식에 필요한 어떤 장기, 기관으로 자기조직을 만들어낸다는 기대에 부풀게 하는 재생의술의 기술과 표리일체의 관계다.

이 재생의료는 생명과학에서 하나의 꿈이지만, 여분의 수정란을 원재료로 한다는 점에서 인간생성의 가능성을 포함해서 생명윤리라는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이처럼 성의 영역은 매우 넓고 또한 깊다. 이런 분야를 고찰하고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성과학은 당연히 그 행간이 넓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성과학을 모호한 과학이라고 야유하는 소리도 자주 듣는다.

곽대희 비뇨기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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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열세 살 무릎제자 山

 

강우방 미술사가·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고려청자 강연회에 한 어린이가 앉아 있었다.
지난 열두 달 매주 빠짐없이 내 강의를 들었다.
사찰·궁궐 답사에도 늘 따라다녔다…
산이와 함께 다니면 모두가 손자인 줄 안다.
산이는깊은 山이 되었으면 한다.꼭 한 해 전, 다음과 같은 인사말을 나의 연구원 홈페이지를 통하여 받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방학을 맞아 행복하게 '미의 순례'를 하고 있는 김산입니다. 선생님 덕분에 영기(靈氣·우주에 충만한 신령스러운 기운)와 보주(寶珠·여래나 보살이 받들고 있는 신비한 구슬)를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용과 연꽃을 아주 많이 사랑하게 되었지요. 친하다고 해야겠지요. 그 생명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꿈까지 용꿈을 꾸고요. 아, 정말 기찬 일이에요. 저는 용입니다. 하하! 매일 해 뜨는 아침부터 달 뜨는 저녁까지 저는 영기무늬(불꽃·구름·풀 등의 형태로 신령스러운 기운을 표현한 무늬)를 찾아 열심히 백묘(白描·동양화에서 선만으로 그리는 화법)를 뜨고, 또 채색을 하고 있어요. 장인의 숨결을 고스란히 느끼면서요. 어떨 때 흥이 솟구치면 직접 디자인하기도 해요. 히히…."

의정부시 용현초등학교 13살 5학년생, 이름은 김산(金山)이라고 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답장을 보냈다.

"뜻밖의 편지를 받아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먼 동네 초등학생인데 나의 세계 깊숙이 들어와 '채색분석법'을 계속 시도해 오고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한 번도 만난 적도 없고 내 강의를 직접 들은 적도 없고, 더구나 초등학교 학생이 최근 다지고 있는 나의 새 학문세계를 체험하고 있다니 믿기지 않아요."

그 이후 홈페이지에서 산이와 함께 장난치며 신나게 놀았다. 산이는 집에서 연구원 강의 숙제를 하고는 그 답을 보내왔다. 옛날 무늬를 알기 쉽게 채색하는 것인데 그 솜씨가 비범했다. 일단 그려본 그림을 바탕으로 새로이 자유롭게 그림을 그려서 그 창작품을 홈페이지를 통하여 보내왔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얼마 후 2월 6일, '고려청자의 화려한 탄생'이란 주제로 기획전 기념 학술강연회가 국립박물관 강당에서 열리게 되었다. 청중이 강당 가득했는데, 맨 앞줄 어른들 사이에 앳된 어린이가 단정히 앉아 있었다. 한눈에 그가 산이임을 알았다. 그 강연은 통념을 깬 내용이었고 도자기가 어떻게 해서 탄생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다룬 것이었는데 산이는 끝까지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경청했다.

그다음 달부터 그는 이모님의 손을 잡고 이곳 연구원까지 매주 수요일과 목요일 두 번씩 와서 두 시간 동안 강의를 들었다. 의정부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지하철을 바꾸어 타고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와야 한다. 왕복 네다섯 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이고 저녁 7시에 시작하니 집에 돌아가면 밤 12시가 되는 날이 많았다. 지난 열두 달 동안 매주 한 번도 빠트리지 않고 경청하였는데 강의 요점을 적으며 때때로 강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리기도 했다.

대학교수, 화가, 조각가, 섬유미술가, 미술사 전공 석사와 박사 과정 학생들 틈에 끼어서 듣는 산이의 눈동자는 초롱초롱 빛났다. 책상이 너무 높아서 그를 위한 낮은 책상을 따로 사서 놓아주었다. 장난꾸러기인데도 강의시간만큼은 꼿꼿이 앉아 귀를 기울였다. 건축을 비롯하여 복식·금속공예·회화·조각 등 모든 장르를 강의하는데 그는 모든 것을 소화했다.

그 뒤에는 이모님이 있었다. 산이는 대단한 독서가인 이모님을 따라 함께 다니며 가르침을 충실히 받았으므로 독서량이 상당했다.

산이는 내가 하는 학술 강연들은 물론, 화엄사·선암사·통도사·내소사 등 사찰건축과 창덕궁과 경복궁 등 궁궐건축 답사를 항상 따라다녔다. 지난 여름 경주에서 사천왕사 출토의 작품으로 강연할 때에도 혼자 경주까지 와서 들었다. 지난달 새해를 화엄사에서 맞이하며 지내려고 아내와 함께 갔는데 내심은 건축을 조사하려고 간 것이었다. 산이는 혼자서 광주를 거쳐 화엄사까지 8시간 걸려 찾아왔다. 언덕 위 석탑에서 조각을 살피는데 문득 저 아래 적막한 대웅전 앞에 어린아이의 모습이 나타났다.

"산아! 빨리 올라와, 지금 해가 지는 광선이 좋아서 음악을 연주하는 서쪽의 비천(飛天·하늘을 인격화한 것으로 법당을 장엄하게 표현하는 형상) 모습들이 분명하지? 지금 빨리 찍지 않으면 금방 해가 지나간단다." 우리는 함께 설경의 석탑과 석등을 사진 찍었다. 산이는 내가 바라보지 않는 각도에서 찍기도 했다. 하긴 산이가 채색 분석한 숙제를 보고 내 실수를 여러 번 고치기도 했었다.

싯다르타 태자는 참된 깨달음에 이르러 악마의 방해를 받는다. 대지의 신을 불러내어 참된 깨달음이라는 것을 증명한다면 물러나겠다고 악마는 말한다. 그때 신이 땅에서 솟구쳐 나와 태자의 깨달음이 올바르다는 것을 증명했다. 산이와 그 이모님이 나에게는 마치 대지의 신과 같다.

산이와 함께 다니면 모두가 손자인 줄 안다. 그러나 70세 노학자에게는 13세의 초등학생 산이는 나의 사숙(私塾) 공간을 넘어서서 이루어진 무릎제자이다. 나는 등산을 좋아하여 항상 깊은 산을 마음에 품어왔다. 산이 높다고 말하기보다 깊다고 해야 한다. 산이는 그런 깊은 산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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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옛 사진 몇 장

나의 어머니의 젊은시절 사진

옛 학소도에 모인 친척들 - 외할머니도 보이고 지금도 학소도에 걸려있는 내 그림도...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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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내가 학소도로 귀향한 직후의 텃밭과 앞뜰 모습

최근 모습과 대조가 많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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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왕산 鶴학巢소島도에서 최범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