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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피어난다!


우리 곁에서
꽃이 피어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생명의 신비인가. 곱고 향기로운 우주가
문을 열고 있는 것이다. 잠잠하던 숲에서
새들이 맑은 목청으로 노래하는 것은
우리들 삶에 물기를 보태주는
가락이다.


- 법정의《산방한담》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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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의 꽃망울이 3월의 눈과 얼음을 견디어내고 있다

황금회화나무의 노란 가지들과 흰 눈

아! 산수유

그대 이름은 모란(목단)

보너 덕에 엉망이 된 앞뜰을 눈이 살짝 감춰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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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학소도에 핀 첫 꽃 - 영춘화

역시 매발톱!

겨울 동안 덮고 있던 낙옆을 뚫고.....<지중해의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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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물건들을 정리하다 발견한 우표 -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 우체국을 드나들다 산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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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산책] “내가 앉은 자리가 꽃자리가 되려면” [중앙일보]

 

눈을 뜨자마자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뭔가요? 어떤 이는 정신 없이 일어나서 식사 준비, 출근 준비로 바쁘게 하루를 시작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명상이나 참선·묵상 등으로 마음을 챙기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저는 새벽 공기를 마시며 고요하고 평화로운 호흡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죠. 마음의 기도를 올리면서 말입니다. “이 세상 모두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간절히 기도하죠. 그러고는 아는 사람의 얼굴을 한 분씩 떠올립니다. 그분들의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함께 기원해 드리면서 말입니다. 그게 다입니다. 저를 위한 기도는 따로 하지 않죠. 그런데 기도를 할수록 묘한 일이 벌어집니다. 제 삶이 더 고요하고 평화로워질 뿐 아니라, 새로운 변화의 계기도 일어나더군요.

요즘, 제 차 트렁크를 보는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묻습니다. “어머, 이게 다 뭐예요?” 지난달에 한방건강TV를 그만두면서 사무실에서 쓰던 짐들을 가득 실어놨거든요. 어디에 둬야 할지 여기저기 생각해보다가 마땅치 않아서 그냥 차에 싣고 다니고 있죠. 일반적으로 제자리를 찾지 못한 물건이나 상황은 불안정하고 불편합니다. 물건뿐만이 아니죠. 이 세상 모든 생명과 사람, 마음과 관계 등이 그 ‘있어야 할 자리’를 찾지 못하면 불편하고 불안한 게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서 있는 자리는 어떻습니까? 사람이든 물건이든 ‘있어야 할 자리’에서는 편안하고 행복합니다. 엄마 품에 안긴 어린아이처럼 평화롭죠. 하늘을 나는 새처럼 자유롭습니다. 또 있어야 할 자리에서는 은혜롭고 아름답죠. 제자리를 지키는 등대가 있어 밤배들이 순항할 수 있고, 철 따라 제자리를 지켜주는 꽃과 나무가 있기에 산이 아름다울 수 있듯이 말입니다.

[그림=김회룡 기자]
얼마 전 잠실역 화장실에서 주인을 잃은 휴대전화를 발견했습니다. ‘다시 찾으러 올 수 있으니까 그냥 둘까?’ ‘아니야, 잃어버린 사실을 알았을 땐 이미 너무 멀리 있을지도 몰라?’ 순간 전화기를 들고 밖으로 나왔죠. 통화 기록을 확인하고 연결 버튼을 눌렀습니다. 놀이공원에 놀러 갔던 딸아이의 어머니라며 전화를 받으시더군요. 마침 일행이 분당 가는 길이라 휴대전화는 곧 주인을 만났습니다. 주인을 찾아가는 휴대전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는 지금 있어야 할 자리에 서 있는가?”

지금 트렁크에 실려 있는 저 짐들은 언제 그 ‘있어야 할 자리’를 찾게 될까요? 얼핏 보면 제자리가 아닌 듯한 이 짐들을 보며 지난 시간들이 떠올랐습니다. 사실 저는 잦은 인사이동을 했습니다. 제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이동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옮긴 경우도 많았죠. 그러면서 어느 날 문득 삶이란 ‘환상을 깨는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옮길 때마다 어떤 환상을 갖고 출발하지만, 실제로 가보면 여지없이 예상 밖의 문제들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제는 압니다. 결국 어떤 곳을 가더라도 문제 없는 곳이 없고, 애로 없는 곳이 없다는 것을 말이죠. 또 한편으로 삶은 ‘끝없는 여행’입니다. 아무리 그 자리에 안착하려 해도 계속해서 떠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때가 되면 우리 안의 욕구가 꿈틀대고, 밖의 상황이 우리를 가만두지 않으니까요. 그러니 저 트렁크 속의 짐들도 언젠가는 어디엔가 자리를 잡겠지만, 때가 되면 또다시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 떠나게 됩니다. 끝나지 않을 여정인 거죠.

그렇다면 정말 우리 각자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일까요? 쉽게 답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그곳은 내가 원하는 자리, 내게 주어진 자리가 되겠죠. 말하자면 ‘나만의 맞춤자리’인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어떤 자리’에 대한 환상을 좇는 경향이 있죠.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 자리를 향해 같은 방향으로 달리고 있죠. 성공과 부와 명예를 보장해줄 거라 믿으면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남과 비교하고 경쟁하고 눈치를 보게 되는 거죠.

정작 우리가 ‘있어야 할 그 자리’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죠. 어떤 식의 삶의 방식도 택할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아 보이는 자리라 하더라도 근원적인 평화와 행복과 맞닿아 있지 않다면 언제든 흔들리게 됩니다. 사실은 ‘있어야 할 자리’에 대한 우리의 편견과 집착만 내려놓는다면 거기가 어디든 ‘지금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입니다. 우리의 환상과 기대를 놓고 온전한 본성에 입각한 자리, 진리에 입각한 자리, 생명 평화와 맞닿아 있는 자리라면 그 자리가 어디든 바로 꽃자리인 거죠. 그렇게 보면, 막상 제 트렁크의 짐들도 있어야 할 자리에 제대로 실려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그 앉은 자리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 최선일까요? 그건 아니죠. 때가 되면 옮겨가야죠. 그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우연처럼 운명처럼’ 새로운 자리가 열리게 됩니다. 그때는 또다시 바람처럼 자유롭게 가뿐하게 떠나야죠. 떠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나는 자의 뒷모습이 아름다운 건 바로 이런 때죠.

혹시 지금 자리 때문에 고민하고 계신가요? 남의 자리가 더 좋아 보여서 엉덩이를 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비교하거나 좌절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조금만 더 연봉이 높다면, 조금만 더 좋은 학교를 나왔더라면 하면서 말이죠.

남의 자리를 기웃거리거나 지금 자리에 집착하면 고통이 시작됩니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행복하면서도 있어야 할 자리로 이동하는 일에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수행도 삶도 결국 머무름이 없는 여행입니다.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서도 있어야 할 자리로 끊임없이 떠나는 여행 말이죠. 결국 이 여행에서는 있는 그 자리가 있어야 할 자리가 되고, 있어야 할 자리는 지금 있는 이 자리와 맞닿아 있죠. 이렇게 있어야 할 자리에서 평화롭고 행복하려면 마음도 열려 있어야 하고, 행동도 따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매일 아침 기도합니다. “오늘도 이 세상 모든 생명이, 마음이, 관계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지금 있는 그 자리가 꽃자리가 되시라고. 바람이 불면 또 새로운 꽃자리를 찾아, 그 있어야 할 자리를 찾기 위해 오늘도 한 걸음 내던지라고 말이죠.

김은종 (법명 준영) 원불교 교무·청개구리선방
그림=김회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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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장 작은 사진 모자이크, 가장 세밀한 지구 사진 공개돼

 

미국 NASA 고다드 우주 항공 센터가 최근 공개한 위 사진은 사상 최고의 해상도를 자랑하는 지구 사진이다. ‘파란 구슬’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지구 사진은 수 천 장의 위성사진을 몇 달에 걸쳐 모자이크해서 만든 것이다. 과학자들과 시각화 전문가들은 지표면, 바다, 얼음, 구름 등의 이미지들을 하나하나 봉합하듯 이어 붙여 우리 행성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맑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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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김옥균과 본인방 슈에이 [중앙일보]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구한말의 풍운아 김옥균이 정변에 실패하여 인천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떠난 것은 1884년 12월이고, 일본 정부에 의해 남쪽 절해고도(絶海孤島)인 오가사와라(小笠原) 제도로 유배된 것은 1886년 8월이다. 이 짧은 기간에 일면식도 없던 김옥균과 일본 최대 바둑가문인 본인방가의 수장 슈에이(秀榮·1852~1907)가 어떤 경로로 그처럼 속 깊은 ‘친구’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본인방 슈에이가 본토에서 1100㎞나 떨어진 오가사와라까지 찾아와 석 달이나 머문 것을 볼 때(돛단배를 타고 폭풍우 속을 20일이나 가야 하는 곳이다) 이들의 우정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슈에이는 김옥균이 홋카이도(北海道)로 옮겨질 때 그를 마중하러 배에 올랐다가 차마 내리지 못하고 홋카이도까지 가고 만 일도 있다.

김옥균의 친화력은 실로 놀랍다. 놀라운 매력을 지닌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는 상하이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되던 1894년까지 불과 10년간 일본에서 살았을 뿐이지만 이 동안 거물 정객, 외교관 등 수많은 명사들과 사귀고 수많은 지인, 추종자들을 두었다. 아들딸도 여럿 낳았다. 김옥균이 죽은 후 그의 위패를 모시겠다고 나선 여인만도 7명이나 되었다고 한다(이종호, 『김옥균』).

본국에서 온 자객들을 피해야 하고, 고종에게 상소도 올리고 일본 정부와도 싸우고, 자신의 사상도 설파하고 유배도 다니면서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사귀었는지, 더구나 외딴 영역인 일본 바둑계와는 어떻게 그리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는지 좀체 상상이 안 된다.

김옥균은 바둑을 잘 두었다. 슈에이와의 5점 접바둑 기보(碁譜)를 보면 지금 실력으로 아마 3단 정도 된다(이 기보는 한국인 기보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김옥균은 메이지 유신으로 단기간에 나라를 일으켜 세운 일본을 근대화의 모델로 생각했다. 반면 300년 전통의 본인방가는 메이지 유신으로 파탄에 직면했다. 봉록이 끊기면서 막부시대의 황금기는 종막을 고하고 4대 바둑가문 중 최고인 본인방가조차 가난과 파벌 싸움에 빠졌다. 유망 제자들이 떠났다. 훗날 본인방가의 대통을 이어받게 되는 다무라 호주도 이때 가문을 떠났다.

이런 난리 중에도 슈에이는 김옥균에 대해선 불원천리(不遠千里) 마다하지 않았다. 한쪽은 가문의 쇠락에 가슴 아파하는 본인방가의 수장이자 당대의 최고수. 다른 한쪽은 망해가는 나라를 되살리고자 혁명을 꿈꾸며 세상을 떠도는 가난한 망명객. 그들 사이엔 특별한 교감과 특별한 위안이 존재했다고 믿어진다.

김옥균은 후계자 문제 등 본인방가의 내부에도 깊숙이 개입한 흔적이 있다. 김옥균은 바둑을 포기하고 미국행을 도모하던 다무라를 설득해 본인방가로 돌려보냈고 그가 훗날 불패의 명인이자 최후의 본인방인 슈사이(秀哉)가 된다. 노벨상 수상작가인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소설 『명인』에 나오는 바로 그 사람이다.

삼일절이 되면 이상하게 김옥균이란 이름이 떠오르곤 한다. 일본과 한국, 그 애증의 세월이 그와 더불어 엉켜 있는 느낌이다.

박치문 바둑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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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달 많이 땄다고 '국격' 올라가나

지나친 국가대결의식-황색 저널리즘-1등주의 "불합격"
게걸스럽고 천박한 자만심 버리고 절제-인격-품위 닦아야

작년에 시카고 어느 결혼식장에서였습니다.
리셉션이 시작됐는데도 수십 명의 하객들이 축하연 자리에 들어가지 않고 로비에 있는 텔레비전 앞에서 웅성 거렸습니다.
골프 게임을 보면서 환호를 하기도 하고 아쉬운 소리를 지르기도 했습니다.
화장실 가는 길에 이 광경을 보면서 무슨 경기냐고 물었더니 "양용은이 타이거 우즈를 이기는 게임"이라고 말했습니다.
세계 최고의 골퍼인 타이거 우즈를 누르는 한국 선수 양용은의 쾌거에 미국에 사는 동포들인들 환성과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흥미진진한 경기라고 해도 결혼식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습니다.
결혼식에 축하를 하러 왔으면 골프 궁금증으로 몸이 쑤셔도 축하연 자리를 지켜주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일 것입니다. 이런 하객들은 결혼식에 오지 말고 집에서 골프 경기를 보는 것이 본인을 위해서나 신랑 신부 측을 위해서 좋았을 것입니다.
스포츠와 인간에 대한 기본 인격이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밴쿠버 올림픽과 국민의 '격'

캐나다 밴쿠버에서 개최되었던 동계 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들이 놀라운 기량을 발휘했습니다.
금메달 6개, 은메달 6개, 동메달 2개로 종합 순위가 5위라니 찬탄과 감격을 금할 수 없습니다.
스포츠는 국력이라고 할 만큼 그 나라의 힘을 과시하는 것이기에 한국의 힘이 이제 세계를 향해 부상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시켜 주었습니다.

미국에 사는 동포들도 모국 선수들의 눈부신 활약에 어쩔 줄 모르면서 박수를 보냈습니다.
쇼트랙 경기를 할 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한국 선수의 동작에 따라 몸이 움직이면서 전율하고, 김연아 경기를 보면서 아내는 안절부절못하며 응원을 하고, 저도 조바심으로 손에 땀을 쥐며 경기를 관전했습니다. 참으로 장하고 아름다운 경기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올림픽을 보도하는 한국의 언론이나 거기에 반응하는 국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너무 지나치게 국가주의로 흐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포츠 본래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국가라는 집단성을 투입시켜 국민들이 열광하고 있었습니다.

해외동포들도 감격 감동 행복했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국민들이 열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남의 잔치처럼 멀리 있었던 동계 올림픽에서 메달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면서 흥분하지 않은 코리언의 가슴은 없을 것입니다.
이제 코리아는 셀 폰이나 자동차나 예술에서만 세계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동계 올림픽에서도 세계 톱 그룹으로 발돋움 하고 있습니다. 골프, 축구, 야구가 세계적 수준으로 뛰어 올랐고 수영에 이어 빙상 경기에서도 한국의 힘을 보여 주었습니다.
올림픽 선수들은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만들어 주었고, 우리가 노력하면 못 이룰 것이 없다는 가능성의 희망을 심어 주었고, 당당하고 발랄한 새로운 세대에 대한 밝은 장래에 기대를 걸게 했습니다. 이들을 지켜보는 해외 동포들의 마음도 행복했고, 감격과 감동이었습니다.

있는 그대로 감상 못하는 집단주의

열광할 수밖에 없는 국민들의 감격과 감동을 이해하면서도 이것을 지켜보는 마음은 스포츠를 대하는 국민들의 격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수들은 나라의 위상을 높여주었는데 선수들을 응원하는 국민들의 격은 높지가 않았습니다.
양용은 선수의 쾌거는 장하지만 결혼식장에 온 미주 동포들의 스포츠 정신이나 인격이 낙제점이듯이 올림픽을 국가의 대결장으로 과열시키는 한국 국민의식과 언론들의 보도 태도는 후진 것입니다.

특히 일본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태도는 우리들 의식 속에 아직 식민지 시대의 열등의식이나 분노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게 했습니다.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의 경기를 국가 간의 대결로 유도하는 언론의 책임이 컸습니다.
이런 국가 대결은 이미 축구나 야구 등 많은 경기에서 식상할 정도로 되풀이 되어 왔습니다.
김연아의 아름답고 놀라운 스포츠 예술을 있는 그대로 감동하지 못하는 집단주의 의식이 너무 지나쳤습니다.

한국 언론의 '천격' 황색 저널리즘

국민들 전체의 반응을 해외에서 가늠하는 것은 오류가 있겠지만 인터넷 언론으로 측정되는 한국의 올림픽 반응은 선진적이지 못했습니다.
"영웅들의 귀환! 그대들 있어 한국이 빛났다" 면서 과장되게 국가주의를 부채질하는 편협성에서부터 "화장기 없는 맨 얼굴로 공항에 도착한 김연아", "선수단 이코노미석, 김연아 홀로 1등석", "메달 못 딴 곽민정은 쪼그려 앉아...", "김연아 예쁘지만 나만의 매력 있다", "나도 피겨할걸 그랬나..." 같은 허접스런 가십 기사들이 버젓이 톱 제목으로 눈길을 끌게 했습니다.
이 같은 기사들이 연예 스포츠 신문이나 센세이셔널한 주간지라면 몰라도 한국 최고의 언론들의 톱기사라는데 문제성이 있습니다.
이런 채신없는 호들갑 보도가 민망스러움에 그치지 않고 국민 의식을 황색 저널리즘 수준으로 끌어 내린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김연아만 특별대우는 '격'에 안맞아

누구 얼굴이 예쁜 것이 올림픽 선수에게 무슨 상관이 있고, 김연아가 1등석을 타고, 김연아가 화장을 하지 않고 귀국한 것이 어떻게 톱기사 대열에 설수 있습니까.
거기에다 메달을 못 딴 어린 곽민정이란 선수가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을 부각시켜 왜 상처를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김연아 1등석 탑승사실을 부각시킴으로서 결과적으로 김연아의 이미지를 깎아 내렸습니다. 혼자만의 1등석은 잘못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연아 혼자서 귀국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올림픽 선수들이 함께 귀국하는 단체 행동에 김연아만 특별대우를 하는 것은 결국 금메달을 딴 다른 선수가 "나도 피겨할걸 그랬나..." 하는 푸념을 나오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김연아를 위해서나, 스포츠를 위해서나, 나라를 위해서나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격'입니다.

올림픽에 나타난 한국의식에는 집단주의, 국가주의가 넘치고, 1등 주의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올림픽은 이기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가하는데 있다는 정신은 너무 고전적이라 인용하는 것이 쑥스러울 정도로 퇴색하고 있지만, 그래도 스포츠의 순수성과 비정치성, 우정의 경쟁은 계속 강조되어야 올림픽의 권위와 아름다움은 미래가 있을 것입니다.
지나치게 금메달에 집착하고, 일본이 금메달이 하나도 없는 것을 고소하다는 듯이 보도하고, 은메달이나 동메달을 차별하는 것은 스포츠의 품위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메달 많다고 '국격' 높아진 것 아니다

박용성 대한체육회 회장은 선수단의 성과는 국격을 높여 주었다고 선수들을 치하했으나 선수들의 성과는 국격을 높여준 것이 아니라 국위를 높여준 것입니다.
국위를 선양시키는 것과 국격을 높이는 것은 다릅니다.
올림픽에 금메달이 쏟아지면서 세계인들의 머리에 코리아가 각인되고 코리아의 기량과 국력이 인상적으로 제고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코리아나 코리언의 국격과 품격을 높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돈을 많이 벌고, 권력을 잡으면 사회적 신분 상승이 되지만 여기에 인격이 수반되지 않으면 돈과 권력은 힘의 상징으로 끝나고 그것을 가진 사람이 존경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흥청망청하는 천박한 졸부들과 거드름을 피우면서 으스대는 뻔뻔한 권력자들을 존경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금메달을 받은 것이 그 선수의 위상과 인지도를 높여 주고, 금메달을 많이 딴 한국의 위상을 높여 주었지만 그것이 존경으로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승자의 자만심에 '품격' 없으면 '국격'도 추락


힘이나 명성을 얻은 사람이 존경받기 위해서는 인격이 있어야 하고, 승자와 패자의 인격은 겸손에서 나옵니다.
이번 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에서는 젊은 세대를 "G세대", Global 세대라고 부르면서 지나치게 미화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이것은 성급하고 경솔한 잔치입니다.
젊은 세대의 당당함과 발랄함, 역동성을 고무시켜, 그것을 도전하고 성취하는 희망과 용기의 동력으로 삼는 것은 나라의 힘입니다.
그러나 자만심을 키우고 당돌함을 고취시키는 것은 잘못 된 것입니다.
자만심과 자신감은 백지 한 장 차이가 될 수 있지만 개인과 국가의 이미지와 격을 천양지차로 만듭니다. 자만심에 인격이 배양될 때 자만심은 자신감으로 승화될 수 있습니다.
승자와 메달 수상자의 영광은 메달에 승자의 겸손과 절제력을 내연화시킬 때 진정한 메달로 빛날 수 있습니다.
메달을 받은 수상자와 스포츠 선진국이 된 국가가 승자의 감정을 절제하고 승리감에 균형을 찾지 못하면 위상은 올라갔으나 격을 올리지 못하고, 격을 올리지 못하면 올라갔던 위상도 떨어집니다.

누구를 영웅으로 만들 것인가

그리고 G세대에는 메달 수상자처럼 뛰어나고 장한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낙오되고 좌절하는 젊은이들도 많습니다.
사회가 지나치게 승자의 영웅주의에 열광하고 1등주의에 환호하는 것도 격이 떨어지는 것이고, 격이 떨어진 사회는 균형을 잃고 갈등과 위화감을 크게 하고, 결국은 나라의 국격을 실추시킵니다.
눈물 나는 좌절과 혹독한 연습을 통해 승리를 획득한 승자에게 보내는 박수가 성공과 성취에 대한 것이기 보다는, 목표와 성취를 위해 불굴의 정신으로 도전한 투지와 기개에 있을 때, 그 사회와 나라의 격은 올라갑니다.
그 사회가 누구를 영웅으로 만들고, 무엇이 영웅을 만드느냐에 따라 국민 의식과 시대 의식이 달라집니다. 영웅 정신이 사회를 빛나게 할 수 있어야 역사가 빛날 수 있습니다.

외국방송의 칭송은 '한국 칭송' 아님


한국의 스포츠 캐스터가 해외 방송인들의 반응을 전하면서 "유럽의 방송인들이 계속 우리를 보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고, 여성 캐스터는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고 말한 것을 마치 외국인들이 한국을 칭송하는 것으로 왜곡시키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한국인들의 아전인수입니다.
해외 방송인들은 한국을 칭송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고 놀라운 스포츠 예술을 칭송하고 축하하는 것입니다. 김연아의 경기를 보면서 눈가에 눈물을 짓는 여성 방송인은 김연아의 놀랍고 아름다운 경기에 감탄하고 감동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스포츠 정신의 아름다움이 있고, 스포츠의 인격이 있고, 방송인의 인격이 있고, 방송인이 속한 나라의 국격이 있습니다. 자기 나라 선수가 금메달을 따고 잘해야만 눈물을 흘리고 열광하는 것은 스포츠 인격이 아직 뒤진 것이고 국격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게걸스럽고 천박해지지 말아야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위대한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감동하는 것은 그것을 쓴 사람의 국적이 아니라 연주와 작품입니다.
한국은 모든 분야에서 눈부신 국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가 국격을 자리매김하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교만과 국가주의와 1등주의는 절제시켜야 합니다.
세계의 강국으로 승승장구하는 한국의 위상을 존경받는 선진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국격을 신장시켜야 합니다.

월드컵의 광적인 붉은 악마적 응원은 세계인들의 호기심을 끌 수는 있지만 존경받고 사랑받는 나라가 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배고픈 사람이 음식상을 대하면 게걸스러워 지고 체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물질적으로 잘 살고 올림픽에서 메달이 쏟아질 때 자칫하면 정신과 의식이 게걸스럽고 천박해 질 수 있습니다.
승자가 될 때 품위가 나타나고 국격이 보입니다.
승리감을 절제하고 균형 시키는 것이 승자의 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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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인구 2018년부터 감소..5가구 중 1가구 `솔로`(수정)

 

- 2009 한국의 사회지표 발표..통계청

- 2050년 650만명 감소..실버세대 취업자 440만명 돌파

- 100명 중 98명 휴대전화..자살자 10년 동안 크게 증가

 

[이데일리 윤진섭 기자] 우리나라의 저출산 및 노령화 현상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2018년부터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해 2050년에는 현 시점보다 650만명이나 줄어들 것으로 예측됐다.

 

고령화 추세의 진전에 따라 55세 이상 실버세대의 취업자수가 440만명을 넘어섰고, 뇌혈관질환이나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자는 줄었으나 대신 자살이 크게 늘었다. 또 우리나라 5가구 중 1가구는 나홀로 가구인 것으로 파악됐으며, 100명 중 98명꼴로 휴대전화를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통계청은 4일 노동, 인구, 주거 등 총 11개 부문에 걸친 각종 통계지료를 이용해 우리 국민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2009 한국의 사회지표를 발표했다.

`2009 한국의 사회지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7월 1일 현재 우리나라 총인구(장래추계인구)는 4874만7000명으로 전년대비 0.29% 늘었다.

인구 1000명당 출생아 수를 말하는 조(粗)출생률도 2008년 9.4명에서 지난해 9.0명으로 0.4명 줄었다. 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추정되는 출생아 숫자인 합계출산율은  2008년 1.19명에서 지난해 1.15명 내려앉았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 인구성장률은 올해 0.26%, 2015년 0.10%를 기록한 뒤 2018년부터 줄어들기 시작해 2020년에는 -0.02%로 마이너스를 기록할 전망이다. 특히 2050년에는 -1.07%를 나타내, 전체 인구는 올해보다 650만 명이 줄어든 4234만3000명을 나타낼 것으로 통계청은 예측했다.

낮은 출산율로 인해 인구 성장률은 둔화될 것으로 예상되지만 인구 고령화는 거침없는 속도로 진전되는 추세다. 14세 미만 인구 대비 65세 이상 인구비중을 나타내는 고령화지수는 2000년 34.3에서 지난해에는 63.5로 2배 가까이 높아졌고, 전체에서 65세 이상 인구 구성비도 7.2%에서 10.7%로 높아졌다.

15~64세 인구 대비 65세 이상 비중을 의미하는 노년부양비도 10.1%에서 14.7%로 높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55세 이상 실버세대의 지난해 취업자 수는 443만2000명으로 전년보다  2.9% 늘어났고 전체 취업자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8.9%로 0.6%포인트 증가했다.

 

지난 10년간 한국인의 사망원인에서 가장 두드러진 증가세를 보인 것은 자살로, 1998년 인구 10만 명당 18.4명이었던 자살 사망률은 2008년 26.0명으로 늘었고, 사망원인 순위도 7위에서 4위로 뛰었다.

암 사망률이 같은 기간 108.6명에서 139.5명으로 늘어나며 사인 1위 자리를 고수한 가운데 1998년 10만명당 23.8명으로 가장 큰 요인이던 위암이 2008년 20.9명으로 줄어든 대신, 폐암은 20.5명에서 29.9명으로 급증하며 암 가운데 사망률 1위를 기록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가구 수는 1691만7000으로 전년에 비해 1.5% 증가했으며, 이 가운데 5가구 중 1인가구는 341만5000가구(20.2%)에 달했다.

2009년 이동전화 가입자수는 4794만4000명으로 전년 대비 5.1% 늘면서 10년 전(2344만3000명)의 2배를 넘었다. 인구 100명당 이동 전화 가입자수는 98.4명에 달했다. 초고속인터넷 가입자수도 2009년 1547만5000명으로 전년보다 5.1% 늘고, 100명당 가입자수는 31.8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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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세대 겨냥한 '영상소설'인기 상한가


한국인이 좋아하는 외국 번역 작품은…

오쿠다·히가시노·기욤뮈소 등 뚜렷한 개성 가진 작가들 최근 블루칩으로 떠올라

하루키·베르베르·에코 등 1세대 문인들 베스트셀러 쏟아내

90년대 후반부터 요시모토·코엘료 등 작품 잇달아 빅히트

40대 직장인 이지영(40) 씨가 주로 읽는 책은 외국 번역 작품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 <향수>에서 시작된 그의 독서 편식은 아멜리 노통브와 하루키까지 이어진다.

“번역 소설은 80년대 후반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당시 국내 소설은 분단이나 독재와 같이 심도 깊은 내용과 무게 있는 메시지가 많았어요. 외국 소설은 이에 비해 내용이 가볍죠. 이국적인 환경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고요.”

이에 반해 20대 대학생 장일호(25)씨가 ‘꽂힌’ 작품은 훨씬 감각적이다. 오쿠다 히데오와 게쿠니 아오리 등 2000년대 출간된 일본 소설을 거의 다 섭렵한 그는 다시 프랑스 작가 기욤뮈소에 푹 빠져있다.

“싸이월드, 블로그에 돌아다니는 ‘멋진 말’ 중 대부분이 외국 소설에서 발췌된 내용이거든요. 마음을 건드리는 멋진 말이 많아서 읽기 시작했어요. 한국문학과 달리 외서, 특히 일본 소설은 굉장히 사적인 주제, 소설이 안 될 것 같은 주제로 작품을 만드는 데 이런 점도 맘에 들었고요.”

앞의 두 사례는 ‘외서’라 불리는 번역 작품의 트렌드 변화를 그대로 보여준다. 40대 직장인 이지영 씨가 외국 작가로 알랭 드 보통을 기억하고 있다면, 20대 대학생 장일호 씨는 히가시노 게이고를 외친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외서에는 어떤 특징이 있는 것일까? 국내에서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외국 작가와 작품에는 시대별 특징이 있다.

■ 하루키부터 기욤 뮈소까지

80년대 하루키와 움베르토 에코로 주목받기 시작한 국내 번역 소설은 요시모토 바나나와 파울로 코엘료를 거쳐 현재 기욤 뮈소가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다.

영미문학이 주를 이루던 국내 외서시장에서 일본과 프랑스 등 다른 국가의 작품이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이다. 가장 먼저 반향을 일으킨 것은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출신 작가 움베르토 에코. 1327년 멜크 수도원의 살인사건을 다룬 소설 <장미의 이름>이 86년 국내 출간되면서 그의 작품은 단숨에 ‘스테디셀러 목록’에 올랐다.

일본소설 열풍은 하루키가 원조다. 1989년 한국에서 <상실의 시대>가 출간됐고 ‘하루키 열풍’이 시작됐다. 이 작품은 전공투 세대(1960년대 후반 일본에서 일어난 학생 운동과 이 학생운동을 주동한 세대)가 18년 전을 회상하는 후일담 연애소설로 당시 개인주의로 향하고 있던 386세대의 트렌드와 맞아 떨어지면서 국내 큰 반향을 일으켰다.

프랑스 작가 베르베르 역시 한국인이 편애하는 외국 작가 중 한사람이다. 93년 국내 출간된 <개미>는 지금까지 100만부 정도가 팔렸고 <뇌>가 70만부, <아버지들의 아버지><타나토노트>이 10만부, <천사들의 제국>이 8만부 이상 팔렸다.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한국사회에서 반향을 일으킨 이들 1세대 외서들의 특징은 전문성과 깊이, 전세계적인 감수성을 들 수 있다. 베르베르는 뛰어난 상상력과 치밀한 과학적 분석으로 철학적 주제를 추리소설처럼 쉽게 풀어낸다.

움베르토 에코는 미스터리 추적물을 엮어가며 철학과 기호학, 역사학을 넘나든다. 하루키 작품은 영화, 팝뮤직, 재즈 등 세계적인 문화코드를 사용하며 작품 속 주인공들은 각자가 가진 특성, 특히 상실감이 부각된다.

한편,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 대 초반에는 요시모토 바나나와 에쿠니 가오리, 파울로 코엘료 등 가볍고 감각적인 성향의 작품이 사랑받았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은 99년 한국에 출간되며 그해 30만부가 팔렸다. 2000년 출간된 에쿠니 가오리의 <냉정과 열정 사이: 깬내>의 경우 4년간 베스트셀러 순위에 머물렀다.

2000년대 외국 작가군에 파울로 코엘료를 빼놓을 수 없다. 2001년 12월 출간된 <연금술사>는 120만부 이상이 팔리며 밀리언셀러를 기록했고 이어 출간된 <11분><오 자히르><포르토벨로의 마녀>등이 연이어 히트행진을 했다.

이들 2세대 외서의 특징은 감성적인 성향의 작품이 주를 이룬다는 점이다. 에쿠니 가오리와 요시모토 바나나는 감각적이고 감성적인 문체로 젊은 여성의 인생과 연애를 말한다.

파울로 코엘료의 작품은 우화로 된 자기계발서를 읽는 느낌이다. 단순한 문장과 인생의 동기를 불어 넣어주는 희망찬 메시지로 20대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문학평론가 강유정 씨는 이들 소설에 대해 “문체가 아주 단순하다. 그리고 무거운 주제를 감각적으로 다룬다. 양가적 감정을 요구하는 순수문학에 비해 이 소설들은 한 가지 감정, 즐거움과 슬픔을 깊이 있게 표현한다”고 분석한 바 있다.

■ 영화 같은 소설이 대세

최근 국내에서 인기 있는 작가로 오쿠다 히데오, 히가시노 게이고와 기욤뮈소를 들 수 있다. 2005년 국내 소개된 <공중그네>가 30만부 이상 판매고를 올리며 단숨에 인기 작가 대열에 오른 오쿠다 히데오는 <걸><남쪽으로 튀어> 등을 잇달아 히트 시켰다.

<레몬><호숫가 살인사건><게임의 이름은 유괴>등 추리소설로 이름을 알린 히가시노 게이고는 치밀한 구성과 대담한 상상력, 속도감 있는 스토리 전개로 마니아층을 형성했다.

세련된 영상기법을 선보이며 10대에서 20대 여성독자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기욤뮈소는 <구해줘><사랑하기 때문에><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까지 연달아 3권이 성공하며 올해 최고의 블루칩 작가로 떠올랐다.

이들 작가는 각기 뚜렷한 개성을 갖고 있다. 오쿠다 히데오는 유머, 히가시노 게이고는 추리, 기욤뮈소는 영화 같은 전개가 특기다. 이들은 독자의 기대치를 잘 알고 이를 충족시켜 주는 작품을 꾸준히 발표한다. 새로운 작품을 발표할 때 마다 조금씩 다른 느낌을 보여준다.

3세대 외서의 특징은 ‘영상소설’이란 점이다. 기욤 뮈소의 <구해줘><사랑하기 때문에>를 펴낸 출판사 밝은 세상의 신선숙 외서팀장은 “영상세대라 불리는 요즘 사람들은 한 시라도 지루한 전개가 끼어들면 책을 끝까지 붙잡고 있지 않는다. 기욤 뮈소의 작품이 성공한 것은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 듯한 ‘영상 소설’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공감하는 화해, 사랑 등 감동코드가 영화적인 서사방식으로 전개된다”고 설명했다.

속도감 있게 읽히는 문장 역시 최근 인기 있는 외서의 특징이다. 예스 24의 문학담당 이지영 대리는 “히가시노와 오쿠다 히데오는 쉽고 빠르게 읽히는 작품이다. 전문성 보다는 대중성이 강세로 보인다”고 말했다.

영상적, 감각적인 외국 문학의 인기는 국내 문단에도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인다. 문학평론가 이명원 씨는 “최근 국내 문학에서도 사회적 메시지를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전개하는 오쿠다 히데오식의 문학 작품 경향이 나온다. 이런 경향은 중견 작가보다는 신인작가 또는 예비 문인에게서 많이 보여진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이전 한국문학과 외국문학의 경향이 달랐지만 라이프스타일이 전 지구화되고 유사해지면서 문학의 경향도 유사해지고 있다. 획일화, 규범화된다고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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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인터뷰] 이해인 수녀, 스님을 말하다 [중앙일보]

 
‘중이 수녀 찾아간다는 게 왠지 쑥스러웁디다’ 며 웃던 그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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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수녀님!” 이제 자유의 몸으로 돌아간 법정 스님은 평소 이해인(65·사진) 수녀를 이렇게 불렀다. 이 수녀의 세례명이 ‘클라우디아’이기 때문이다. 스님은 ‘클라우디아’에서 영어 단어 ‘클라우드(Cloud·구름)’를 떠올렸다. 그만큼 법정 스님과 이해인 수녀의 친분은 두텁다. 출가자로서, 작가로서, 수도자로서 공유점이 적지 않다. 법정 스님은 불교계의 가장 대중적인 아이콘이고, 이 수녀는 ‘가톨릭의 가장 대중적인 아이콘’이다. 그래서 이해인 수녀에게 법정 스님의 추모 인터뷰를 청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는 1976년에 출간됐죠. 어디서 어떻게 읽으셨나요.

“76년은 제가 종신서원을 했던 해죠. 책이 나온 지 얼마 안 돼 금방 읽었어요. 당시 너도 나도 그 책을 읽으려고 했던 기억이 새롭네요.”

-읽고 나서 소감은요.

“저 역시 수도자 신분이다 보니 내용들이 다 맘에 와 닿았죠. 책의 ‘난(蘭) 화분’ 이야기를 읽고 개인적으로 집착하기 쉬운 취미는 안 가지게 된 것 같아요.”

-법정 스님과 언제 처음 만나셨나요.

“국어교사였던 제 친구가 송광사 불일암의 주소를 줬어요. 제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꼭 한 권 보내라고 권하더군요. 책과 함께 편지를 드렸는데 즉시 답신이 왔어요. 그리고 78년쯤 부산 광안리의 우리 수녀원(성베네딕도 수녀원)을 방문하셨어요. 그 뒤에 수녀원에 하루 묵어가신 적도 있고요.”

-기억나는 풍경이 있으세요.

“수녀원에 오셨을 때 제가 광안리 바닷가를 함께 걷자고 했죠. 순순히 따라 주셨어요. 제가 주웠던 조가비를 드리니 주머니에 넣으셨어요. 비구 스님과 수녀가 바닷가를 걷자니 좀 쑥스러우셨던 것 같아요. 그 뒤에 불일암에서 어느 보살님과 제가 하루를 묵은 적이 있어요. 보살님은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한다고 저를 순천까지 데려다 주시라고 부탁하고 갔어요. 몇 시간 적막한 산중에서 스님과 단둘이 있으려니 어색했죠. 스님도 계속 헛기침을 하시며 절더러 포도를 씻어오라 하시더니 마치 성난 사람처럼 집어 드시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아마 그 시절엔 스님도, 저도 젊었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부산엔 종종 오셨나요.

“부산에 자주 오시라고 하면 ‘거 참 중이 수녀 보겠다고 찾아간다는 것 자체가 왠지 쑥스러웁디다’라며 너털웃음을 짓곤 하셨죠. 자주 뵙진 못해도 늘 든든한 버팀목 같은 분이셨어요.”

-법정 스님은 김수환 추기경과도 친분이 무척 두터우셨죠. 김 추기경 선종 1년여 만에 법정 스님도 입적하셨어요.

“정말 슬픕니다. 성당에 앉아 있는데 눈물이 나더군요. 86년도 쯤인가…, 제가 유명세 때문에 괴로워할 적에도 법정 스님은 제게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어요. 오늘은 스님께서 제게 보내주신 피카소의 ‘전쟁과 평화’란 그림엽서를 한참 들여다 봤어요.”

-‘시인 이해인’이 보는 ‘수필가 법정’은 어떠합니까.

“그 분의 글은 한마디로 시원한 동김치(동치미) 같아요. 읽을수록 감칠 맛이 납니다. ‘같은 표현이라도 어쩜 이렇게 하실까?’하고 감탄할 적이 많죠. 개인적으로 저는 『영혼의 모음』과 『서있는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수도자 이해인’이 보는 ‘수행자 법정’은 어떤가요.

“어찌 보면 좀 냉정하리만치 철두철미한 분으로 여겨졌어요. 그러나 실은 속정이 많은 분이셨죠. 타 종교를 이해하는 폭도 넓으시고, 늘 책을 가까이하며 진리를 탐구하는 구도자의 모습이셨죠.”

11일 오후 1시10분 병세가 위독해진 법정 스님이 두 달째 입원 중이던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나와 성북동 길상사로 거처를 옮겼다. 상좌들과 의료진이 침대에 누운 법정 스님을 구급차에서 내려 길상사 주지실로 옮기고 있다. 눈물을 글썽이던 50여 명의 길상사 신도들이 법정 스님을 향해 합장하고 있다. 법정 스님과 대중이 만나는 마지막 모습이다. 40분 후에 법정 스님은 입적했다. [백성호 기자]
-법정 스님 하면 ‘무소유’가 떠오릅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에서도 ‘무소유의 영성’은 각별한 의미가 있지 않나요.

“‘무소유’는 말로 강조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무소유는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되었을 적에야 비로소 가능한 경지인 것 같습니다. 진정한 겸손과 사랑이 없는 무소유는 공허할 뿐이죠. 때론 훌륭한 일을 하면서도 영적 우월감에 빠질 수 있고, 때론 자기 방식의 무소유를 강조하며 남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죠. 이 길은 참으로 큰 숙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법정 스님 위중 소식을 듣고 성당에서 기도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저뿐 아니라 스님을 아는 다른 수녀님들도 같이 기도를 했을 겁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잘 선종(열반)하실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법정 스님은 장례식도 하지 말고, 다비만 조촐히 하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대단하시다’는 말밖에 안 나오네요. 여러 사람에게 폐 안 끼치고, 번거로운 절차를 피하고, 극히 단순하게 하라는 메시지를 남기신 거잖아요. 당신의 평소 성격 그대로의 유언으로 여겨집니다.”

-마지막으로 이 거대한 자연의 품으로, 생명의 품으로 돌아가신 법정 스님께 수녀님께서 보내시는 작별인사를 듣고 싶습니다.

“스님께선 이젠 정말로 스님의 본래 뜻대로 완전한 무소유가 되셨네요. 스님께서 그리고 꿈꾸시던 정토에서 부디 행복하세요. 스님께서 그토록 좋아하셨던 ‘어린 왕자’처럼 별나라에 가시거든 종종 꿈에라도 잠시 오시어 더 아름답게 사랑하는 법을, 길들이는 법을 일러주세요. 길들인 것과의 이별이 쉽지 않은 우리에게 잘 이별하는 법도 가르쳐 주세요.”

글,사진=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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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법정 스님을 추모하며

 
박청수 원불교 원로교무

마르지 않는산 밑의 우물 山中 친구들에게 공양하오니
표주박 하나씩 가지고 와서 저마다 둥근달 건져가소서…
다실 벽에 걸려있는 글귀를 읽어보면서
스님의 다실에 고여 있는 한적함과 청정함은
스님의 내면적 투명함에 연유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법정 스님을 지금부터 꼭 19년 전에 처음 만났다. 나는 일행과 함께 불일암에 당도하였음을 어떻게 알릴까 하고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 무렵 손수 군불을 지피고 나서 부엌문을 열고 나오던 스님이 아래채에 서 있는 우리를 보고 "아! 어서 오십시오" 하고 반겨주셨다. 한 번도 뵌 일은 없지만 그렇게 말하는 분이 법정 스님임을 멀리서도 알 수 있었다.

"불일암에 올 때는 미리 송광사에 전화연락을 하라"는 당부를 지켰기 때문에 아마 스님도 불일암 길손에 대한 전갈을 받으셨음에 틀림없었다. 우리가 묵을 처소인 아래채 쪽마루에 짐을 놓고 갖고 온 호접란을 들고 위채로 올라갔다. 스님은 꽃부터 반기셨다. "내가 LA 있을 때 많이 보던 꽃이구나. 멀리 오느라 애썼다" 하시며 꽃과 대화하는 사이 나는 매화나무 곁으로 갔다. 아래채에서 위채를 올려다보았을 때, 정적 속의 불일암 뜨락에 피어 있는 매화는 참으로 그윽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매화 가지에 꽃망울이 조금씩 부풀어 오르고 댓잎이 부서지는 봄햇살이 향기롭습니다. 꽃가지에 향기 번질 때쯤 다녀가십시오'라는 스님의 편지를 받고 나선 길이었다. 겉봉에 '순천 91. 3. 4.'라는 소인이 찍혀 있었다. 나는 시절을 딱 맞추어 온 것이다. 내 곁으로 다가온 스님은 "얘들이 겨울부터 꽃망울을 서서히 부풀리면서 참으로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피었어요. 그렇게 오래 망설였다 피니까 이렇게 향기도 좋은가 봅니다"라고 했다. 스님은 만개(滿開)한 나무를 가리키며 "저것은 이제 혼이 다 빠져나가 버렸어요" 하면서 허허로운 미소를 지었다. 깨끗한 얼굴의 삽이 서로 등을 맞대고 걸려 있었다. 호미와 괭이, 쇠스랑, 크고 작은 톱 등 스님의 살림살이에 소용되는 연장들이 아래채 곳간 안에 질서 정연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불일암 사랑채 뒤뜰에는 작고 예쁜 항아리들이 나란히 묻혀 있었다. 저 독 속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 하는 호기심 때문에 살며시 뚜껑을 열어보았다. 그 속에는 빨간 글씨로 '열어보지 마시오'라고 쓰고 다시 그 아래에 검정 글씨로 '91년 여름에 먹을 짠무지'라고 쓰여 있었다. 불일암 나그네들의 버릇이 비슷하기에 스님이 이러한 조치를 해 놓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불일암은 자연의 아름다움이 우거진 곳에 정결과 질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 정결과 질서가 스님의 일상이라고 생각하니 잠시 무서운 긴장감까지 느껴졌다. 그 모두는 스님의 자기 자신에 대한 엄격함이었다.

'수류화개실(水流花開室)'로 불리는 스님의 다실에서 그날밤 차를 마셨다. 스님은 전깃불을 끄고 운치 있는 촛대에 촛불을 켰다. 그러나 촛불의 불빛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을 한동안 바라보다 "촛불도 시끄러워"라고 했다. 그러고는 말간 기름이 담긴 하얀 백자 등잔 위로 살짝 올라온 가느다란 까만 심지에 불을 댕기고 촛불을 켰다. 밝음의 강도가 한결 낮아진 방안은 그지없이 아늑해졌다.

일러스트=김현지 기자 gee@chosun.com

스님은 이야기하는 동안 처음에는 차향(茶香)이 그윽한 녹차를, 두 번째는 구수한 우롱차를, 그리고 세 번째는 홍차를 내놓았다. 차의 종류에 따라 다기(茶器)도 바뀌었다. 여러 종류의 차를 음미하면서 마시니 차향과 차 맛이 더욱 향기로웠다.

마르지 않는 산 밑의 우물

山中 친구들에게 공양하오니

표주박 하나씩 가지고 와서

저마다 둥근달 건져가소서.

다실 벽에 걸려 있는 글귀를 다시 읽어보면서 스님의 다실에 고여 있는 한적함과 청정함은 스님의 내면적 투명함에 연유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법정 스님을 '무소유의 실천자'라고 일컫지만 나는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한 엄격한 관리자라는 점에서 무릎을 꿇게 된다.

내가 불일암으로 법정 스님을 방문했던 1991년은 히말라야 설산에 학교를 설립하려 애쓰던 시절이었다. 왠지 친근한 마음이 들어 얼마 뒤 설산학교 설립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랬더니 스님께서 편지로 "거들고 싶다"고 하시더니, 내가 있던 원불교 강남교당에 오셔서 100만원을 내놓으시며 "원고료요" 하셨다. 내가 힘들어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일을 하고 힘이 남아 있으면 되느냐. 큰일을 했으면 힘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고 위로해 주셨다.

1997년 길상사가 문을 열 때 스님은 봉축위원에 나를 넣으셨다. 그래서 개원식날 갔더니 스님 옆에 김수환 추기경님과 내 자리가 있었다. 아마도 스님은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 추기경님을 초청하셨고, 남녀의 차별도 넘어선 분이라 나도 부르셨던 것 같다.

스님은 내 저서 '나를 사로잡은 지구촌 사람들'에 실린 추천의 글에서 이렇게 썼다. "박청수 교무님 하면 나는 문득 천수천안(千手千眼) 관세음보살을 연상한다. 불교경전에 나오는 천수관음은 두 손과 두 눈으로는 모자라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을 지니고 한량없고 끝없는 구제를 펼친다. 종교의 본질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따뜻한 가슴과 자비의 실천에 있다."

스님의 귀한 격려 말씀을 세세생생 실행할 것을 명심하면서 스님의 참열반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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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최영훈]비구 법정, 바보 추기경


5, 6년 전인 것 같다. 선배를 따라 길상사로 갔다. 그곳에서 뵌 법정 스님의 첫인상은 대꼬챙이였다. 꼬장꼬장하고 빈틈이 없어 범접하기 힘들었다. 다소곳이 앉아 스님이 손수 우려낸 차만 마셨다. 문무의 고수()는 원래 글자랑 힘자랑을 않는 법. 스님은 선배와 다방 한담만 나눴다. 마음이 놓였다. 차츰 스님에게서 맑고 따뜻한 기운과 다향이 느껴졌다.

썩지 않을 가르침 남기신 두 분

그즈음 후배가 어느 자리에서 한마디 던졌다. “(용기를 내어)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자신의 화두라고 했다. 스님이 편저한 책에 나온다고 했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사상가 폴 발레리의 말이었다. 듣는 순간엔 별 감흥이 없었다. 그러나 헤어져 집으로 가는 길에 되씹어 보니 섬뜩했다. 자칫 베일 수 있는, 날이 시퍼렇게 선 화두였다. 얼마 후 그 후배는 회사를 떠났다.

스님의 법구()를 불사르던 13일, 기자는 눈 덮인 치악산에 있었다. 구룡사 입구에서 호랑이 가죽 무늬를 한 금강소나무를 보았다. 하늘 높이 솟은 그 모습은 생사여일() 무소유를 실천한 스님의 현신()인가. 터벅터벅 산을 오르는 동안 계곡 아래선 물소리가 들린다. 내려다보니 눈 녹은 물이 쉴 새 없이 흐른다. 맑고 깨끗하게 살다 간 스님이 생각났다. 눈시울이 잠시 아릿해졌다.

구룡사 일주문 두 기둥엔 ‘천겁이 지나도 낡지 말고(), 만년 동안 항상 오늘같이 길이 남으라()’고 적혀 있다. 스님의 무소유 정신도 천년만년 길이 남기를 두 손 모아 빈다. 눈을 돌리니 앙상한 나무가 보인다. 가지를 넣으면 물이 파랗게 된다는 물푸레나무다. 그러고 보니 스님은 우뚝 솟은 적송()이 아니다. 낮은 곳에서 자신을 꺾어 탁한 기운을 정화하는 가녀린 물푸레나무다.

험한 사다리 병창을 넘어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쯤 정상(비로봉·1288m)에 섰다. 사방이 수묵화처럼 거뭇거뭇한 연봉들로 꿈틀거렸다. “저기가 오대산이다.” 누군가 동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세상을 피해 스님이 기거했던 화전민 오두막이 있는 곳이다. 스님은 지난해 2월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을 조문하지 못했다. 그때 이곳에서 아픈 몸을 추스르고 있었다. 한 길이나 쌓인 눈 때문에 몸이 성했어도 못 갔을지 모른다.

대신 글로 조문했다. “나와 만난 자리에서 그분은 ‘다시 태어나면 추기경 같은 직책은 맡고 싶지 않다. 그냥 평신도로서 살아가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하심(),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의 실천자임을 느낄 수 있었다. 하느님을 말하는 이가 있고, 하느님을 느끼게 하는 이가 있다. 하느님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지만, 그 존재로써 지금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있음을 영혼으로 감지하게 하는 이가 있다. 우리는 지금 그러한 이를 잃은 슬픔에 젖어 있다. 그 빈자리가 너무 크다….”

다시 만나 반갑게 인사 나누셨나요

생전에 바보 추기경은 길상사 법회에 갔고, 비구() 법정은 명동성당 미사에 왔다. 두 사람은 “더 단순해지고, 더 온전해지라. 사랑은 단순한 것이다”라고 세상에 말했다. 높은 곳에서 내려와 약하고 억눌린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애써 다가왔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고 노래한 천진무구()의 시인 천상병 같은 사람들을 사랑했다.

며칠 전까지 내 컴퓨터를 켜면 추기경이 그린 바보 자화상이 떴다. 1년 스무하루 만에 이 바탕화면을 스님의 흑백사진으로 바꿨다. 두 분 역시 인간인지라 숨을 거두기 전 육신의 지독한 고통에 시달렸다. “어서 오세요.” 먼저 하늘나라로 간 추기경님이 스님을 반기는 소리가 허공에서 들리는 것만 같다. 스님의 49재가 지나면 몇 년 전 성당에서 두 분이 손을 맞잡았던 사진을 올려놓아야지.

최영훈 편집국 부국장 tao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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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초(慧超, 704~787)는 신라 시대의 승려이다. 밀교를 연구하였고, 인도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남겼다. 719년 중국의 광주에서 인도 승려 금강지(金剛智)에게 배웠고, 723년경에 4년 정도 인도여행을 한 뒤, 733년에 장안의 천복사에 거주하였으며, 780년에는 오대산에서 거주하였다.

불교의 본고장으로 향한, 순례자의 길

전인미답(前人未踏), 아무도 밟지 않은 길을 걸어간 사람의 전통이 있다. 우리 역사에서 이런 전인미답의 경지를 개척한 전통을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구도(求道)의 길을 따라 인도까지 걸어서 갔다 온 순례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신라 사람 아리나발마는 처음에 불교의 본디 모습을 보러 중국에 들어갔는데, 용기가 더욱 솟아 결국 오천축국까지 이르렀다. 오천축국이란 인도 북부 지방에 있었던, 부처님이 나신 나라를 비롯한 다섯 천축국을 말한다. 중천축국과 동서남북의 넷, 그래서 오천축국이다. 아리나발마는 나란타사에 머물며 ‘율론을 많이 열람하고 패협에다 베껴 썼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웬만한 학문적 성취를 이루어 낸 모양이다.

패협은 패엽이라고도 쓰며, 경전을 기록하는 기다란 나뭇잎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나뭇잎을 재료로 한 고급 종이인데, 살생을 금한 불교의 법칙에 따라 동물 가죽 대신 썼던 것이다. 지금도 남아있는 패협은 무척 고급스럽게 보인다. 가난한 순례자들은 제 몸의 치장 대신 이 종이를 사는 데 재물을 모두 바쳤으리라. 나란타사는 중인도 마갈타국에 있던 절인데, 5세기에서 12세기까지 불교를 가르치던 대학이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서유기]로 잘 알려진 손오공의 스승 현장도 이 절에서 5년간이나 머물며 공부했다.

이 같은 이야기를 일연은 중국 승려 의정의 [구법고승전]에서 전적으로 인용해 [삼국유사]에 적어놓았다. 본디 이름이 [대당서역구법고승전]으로, 7세기 말 의정이 스스로 인도순례를 하며 지은 책이다. 인도까지 구법 여행을 한 승려들의 전기를 실은 것인데, 아리나발마를 비롯한 모두 60인이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동국(東國)인 곧 신라 사람이 무려 9명이나 된다. 산술적으로 계산해도 15%에 달한다. 한편 각훈의 [해동고승전]에는 의정의 승전에 없는 현조와 현대범이란 이름이 보인다. 의정의 승전에 나오는 현태와 구본이 이들일 가능성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숫자는 더 불어난다.

귀(歸), 한번 가서 돌아오지 못한 순례자들

그러나 [왕오천축국전]의 지은이인 혜초는 어느 기록에도 보이지 않는다. 인도로 가는 그 길이 얼마나 험했는지,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구체적으로 전해주는 사람이 혜초인데 말이다. 먼저 [왕오천축국전]에 실린 그의 시 한 편을 읽어보자.

  차디찬 눈은 얼음과 엉기어 붙었고
  찬바람은 땅을 가르도록 매섭다
  넓은 바다 얼어서 단을 이루고
  강은 낭떠러지를 깎아만 간다

사실 이 책은 그 전부가 남아있지 않아 그의 여행경로며 보고 들은 자세한 것을 다 알 수 없다. 둔황 석굴의 깊은 곳에 묻혔다가 세상의 빛을 다시 본 것이 겨우 100여 년 전, 그것으로 신라 출신이라는 사실 말고는 고향이며 죽은 곳도 알 길 없지만, 719년 열다섯 살의 나이에 중국에 들어가 5년 동안 수학한 다음 결행한 4년간의 인도 여행을 어렴풋이 전해준다.

겨울날 투가라국에 있을 때 눈을 만나 그 느낌을 읊은 이 시에서 우리는 무시무시한 고행의 한 단면을 읽을 뿐이다. 시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용문(龍門)엔 폭포조차 끊기고 말았으며
  정구(井口)엔 뱀이 서린 듯 얼음이 얼었다
  불을 들고 땅끝에 올라 노래 부르리
  어떻게 저 파밀고원 넘어가리오

뱀이 서린 듯 얼어붙은 얼음길을 오르는 그의 가슴 속에는 불 같은 열정이 가득 차 있다는 뜻일까? 그럼에도 파밀고원은 멀기만 하고 생사를 오가는 여행길은 불안하기 그지없었으리라. 그런데도 두려운 마음을 때로 기도하며 때로 노래하며 풀어내고, 사막과 얼음 구덩이로 발걸음을 옮긴 그들에게 도대체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다는 것일까? 같은 길을 따라 거슬러 왔던 전도자들을 생각하며 걸었던 것일까?

해동의 작은 나라 신라에서 출발한 순례자들이 아리나발마처럼 처음에는 중국까지만 가려다가 인도까지 가게 된 것인지, 아니면 애당초 인도 여행을 목적으로 출발한 것인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모두 한 번 가서 돌아오지 못했음은 분명하다. 아니 돌아오지 못해도 좋다는 각오가 서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삼국유사]에서 일연이 이들의 기록에다 ‘귀축제사(歸竺諸師)’라 제목을 붙인 것은 깊은 의미를 지닌다. 귀(歸), 가고서는 끝내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곳이 진정 돌아갈 곳이었는지 모른다. 


중국 정통 밀교의 법맥을 이은 혜초

아리나발마는 ‘돌아오고 싶은 마음 간절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나란타사에서 죽는다. 그의 나이 70세였다. 현태는 그나마 중국까지 돌아온다. 그러나 그 역시 어디서 죽었는지 전해지지 않는다. 순례자의 마음이지만, 범인(凡人)의 그것에 조금이나 가까운 것이 있다면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수구초심(首丘初心) 하나일까? 혜초는 다른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내 고향은 하늘 끝 북쪽
  땅 한 모서리 서쪽은 남의 나라
  남천축 해 떠도 기러기 한 마리 없어
  누가 내 집으로 돌아가리

기러기 발목에 편지를 묶어 날렸다는 고사가 있거니와, 그런 기러기조차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막막한 심정이 잘도 그려져 있다. 혜초가 언제 어떤 연유로 중국을 가게 되었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기록으로 그가 중국 밀교의 초조(初祖) 금강지의 문하에 들어간 것이 719년, 곧 그의 나이 열다섯 살일 때인 것으로 알려졌다. 금강지는 인도 출신의 승려이다. 스승의 문하에서 5년을 수학한 혜초는 감연히 인도 여행을 떠난다. 갈 때는 해로로, 돌아올 때는 육로를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가 남긴 [왕오천축국전]은 오늘날 우리에게 8세기경, 인도 풍경을 소략하게나마 전해주는 유일한 기록이다. 물론 그의 존재는 1908년 프랑스 탐험가 펠리오(P. Pelliot, 1878~1945)의 둔황 석굴 발견과 1909년 중국인 나진옥(羅振玉)의 손을 거쳐, 1915년 일본인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의 노력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천 년 세월의 긴 잠을 잔 책이 바로 [왕오천축국전]이다.   
                                             
  그대 서번이 멀다 한숨짓는가
  나는 탄식하네, 동쪽 길 아득하여
  길은 거칠고 설령(雪嶺) 높은데
  험한 골짝 물가에 도적떼 소리치네

  새는 날아가다 벼랑 보고 놀라고
  사람도 가다 길을 잃는 곳
  한 생애 눈물 닦을 일 없더니
  오늘은 천 갈래 쏟아지네.

 

‘서번 가는 사신을 만나’라는 제목의 시이다. 서번(西蕃)은 서쪽 오랑캐 나라인 토번이다. 지금의 서장이라 부르는데, 이때는 인도와 중국 사이에서 두 나라의 문물을 교류하며 번성하였다. 설령(雪嶺)은 눈 쌓인 봉우리이지만, 여기서는 히말라야 산맥을 일컫는다.

한참 인도 여행이 무르익을 무렵, 혜초는 우연히 서번으로 가는 중국 사신을 만나게 된다. 설령은 도적떼 출몰하는 계곡이었기에 대국의 사신답지 않게 코를 빼고 가고 있다. 처량한 모습이다. 그러나 하늘 나는 새마저 놀라는 길을 사람이 무슨 재주로 편히 지날 수 있겠는가. 승려인 혜초마저 펑펑 눈물을 쏟는다. 그런 고행의 대가(代價)였을까, 혜초는 귀국하여 스승의 총애 아래 수행 정진하여, 중국 밀교의 정통으로 일컬어지는 금강지 불공(不空) 법맥을 잇는 제자로 우뚝 섰다.

 

고향에선 주인 없는 등불만 반짝이리

혜초가 남긴 몇 편의 시를 통해 우리가 받는 감동은 단지 전인미답의 길에서 정진한 그의 용맹함 때문만은 아니다. 도리어 약하고 쓸쓸한 심정을 숨김없이 내보이는 그 솔직성 때문이다. 지극히 인간적이다. ‘슬픈 죽음’이란 시는 그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이다. 

 

  고향에선 주인 없는 등불만 반짝이리
  이국 땅 보배로운 나무 꺾이었는데
  그대의 영혼 어디로 갔는가
  옥 같은 모습 이미 재가 되었거늘

  생각하니 서러운 정 애끊고
  그대 소망 이루지 못함을 슬퍼하노라
  누가 알리오, 고향 가는 길
  흰 구름만 부질없이 바라보는 마음.

 

혜초는 동천축국과 중천축국을 지나 남천축국으로 향하였다. 그의 나이 이십 대 초반. 막 스물 접어들어 여행을 떠나 동서남북중의 다섯 군데로 나뉜 인도를 4년에 걸쳐 여행했다. 이미 동천축국과 중천축국에서 쿠시나가라바라나시라자그리하룸비니 등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불교의 성지를 둘러본 다음이었다. 그리고 혜초가 북천축국에 이르렀을 때 여행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그곳의 한 절에서 덕망 높은 승려 한 사람이 고국으로 돌아가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는 말을 듣는다. 위의 시는 그에 대한 뜨거운 애도의 노래이다.

 

일연의 [삼국유사] 가운데 ‘귀축제사’ 조의 일부를 앞서 소개했다. 인도기행을 떠난 승려들의 아름답고도 장한 이야기가 자세히 실려 있다. 요즈음도 인도기행이 상당한 붐을 이루지만, 당대 승려들의 여행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것이었다. 목숨을 건 여행의 시종기(始終記), 그러나 거기에는 어떤 스릴러 영화의 라스트 신과 달리 살아남은 주인공이 아무도 없다. 일연은 ‘귀축제사’ 조의 끝에 이런 시 한 구절을 남겼다. 

  외로운 배 달빛 타고 몇 번이나 떠나갔건만
  이제껏 구름 따라 한 석장(錫杖)도 돌아오지 못했네
 
달빛 타고 떠나간 순례자(석장) 가운데 구름 따라 돌아온 이 아무도 없다. 혜초는 “고향에선 주인 없는 등불만 반짝이리”라는 첫 행부터 사람의 애를 끊는 표현으로 시작하였다. 이 한 줄로 그 심정을 헤아리기에 족하다고 본다.

고운기 /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글쓴이 고운기는 삼국유사를 연구하여 이를 인문교양서로 펴내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필생의 작업으로 [스토리텔링 삼국유사] 시리즈를 계획하였는데, 최근 그 첫 권으로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을 펴냈다. 이를 통해 고대의 인문 사상 역사를 아우르는 문화사를 쓰려한다.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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