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가을에 떨어진 낙옆이 마르지 않고 봄까지 대지를 덮고 있었다면,

이 튤립의 연약한 새잎은 과연 흙을 벗어나 햇빛을 볼 수 있었을까

흐르는 작은 물줄기가 바위를 뚫듯,

살아 몸부림치는 튤립의 새잎은 조용히 성장하며 힘을 모아

마침내 낙옆에 구멍을 내고 힘껏 들어올리기도 한다.

인간에게는 종이장보다도 가벼운 낙옆 한 장이,

여리기만한 어린잎에게는 결코 만만한 장애물은 아닐텐데...... 

학소도 앞뜰에서 펼쳐지는 자연의 순리.

자연의 강인함이 나에게도 온몸으로 전해지는 것 같아

생명 앞에서, 살아 숨쉬는 자연을 느끼며 뭉클한 가슴으로 감사하게 되었다.

봄의 출발신호탄 <영춘화>

<살구꽃>

<홍매화>

<할미꽃>

<가시오갈피>

<개나리>와 <산수유>

<수선화>

<청매화>

<홍매화>

<능소화>

<히어리>

<수양매화>

아무리 흔하다 해도 봄의 상징은 역시 <개나리>

장미 키우기의 모든것

1. 장미가 좋아하는 환경
2. 심는 시기와 품종의 선택
3. 심는 요령과 밑거름
4. 전지(가지치기)와 도장지 손질
5. 물주기오 멀칭
6. 병충해 방제, 소독
7, 월동관리

1. 장미가 좋아하는 환경

1) 토양
입자가 미세한 것 보다는 약간 굵은 흙이 좋다. 또한 적당한 수분을 지니는 보수성과 비료성분이 유실되지 않는 보비성을 갖추고 배수가 잘되며 뿌리에 공기 유통이 잘 되어야 한다. 오랫동안 장미 또는 다른 묘목을 심었던 흙보다는 처녀지흙이 퇴비만 좀 보충한다면, 미량요소를 골고루 갖추고 있어 화색면에서도 월등히 좋다.

2) 심는 위치
장미는 적당한 일조시간과(생육기인 4월~10월에 2년생은 1일 최소한 4시간 이상)맑은 공기를 좋아하므로 양지바르고 통풍이 잘되는 곳에 심는 것이 좋다. 바람이 거센 언덕바지나 담벼락 밑, 큰 나무의 사이 또는 그늘진 곳에서는 애써 가꾸어도 별신통치 않으며 겨울에 동해를 입어 죽는 수가 많다.
2, 심는 시기와 품종의 선택

얼어 붙었던 땅이 녹고 새움이 트는 3월 중순부터 4월 하순경이 서울 중부지방에서는 적기가 되며, 남부지방에서는 11월 하순부터 4월 중순경 까지이다. 뿌리감기가 되어 있는 묘목은 5월~6월까지도 가능하나, 정상적인 생육이나 월동피해의 위험을 생각한다면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품종의 선택이라는 것은, 위치나 토양의 선택과 더불어 장미를 키우고자 하는 분들의 승패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최초의 선택이라 하겠다. 정확한 계통과 품종명, 화색이 표시되어 있는 묘목을 구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품종에 따라 제각기 자람새가 다른 것이 장미의 특색이다)2~3년생이 적당하다. 가지가 굵다고 해서 절화용 폐목을 사다 심는 우를 범해서는 안되겠다. 가지가 좀 가늘더라도 젊고 단단한 것은 당년에 그 몇배나 굵게 잘 자라주기 때문이다. 오히려 너무 굵은 것은 노인처럼 힘이 없을 수도 있다.
3. 심는 요령과 밑거름

구덩이는 크고 깊이 팔수록 좋으나 최소한 직경 35~40cm, 깊이 40~50cm 크기는 되어야 한다. 그리고 좋지 않은 땅일수록 처음 심을 때 밑거름을 넣고 심는 것이 중요하다.
밑거름의 재료로는 우분이나 계분, 왕겨, 골분, 어분, 깻묵, 콩깻묵, 낙엽 등이며 반드시 썩혀 쓰는 것이 좋다. '오스모코트'와 같은 지효성 화학비료를 적량 섞어 쓸 수도 있다.
제일 먼저 구덩이를 판 후 적량의 밑거름을 넣고 흙을 1~2삽 넣어 거름과 섞은 후, 그 위에 20cm 정도의 흙을 덮고 그림과 같이 묘목의 뿌리를 고르게 편 후 흙을 8할만 채운다. 물을 주었을 때 나무가 넘어지지 않게 위에서 힘껏 누른 다음 양동이로 듬뿍 물을 준다. 물이 다 스며들고 난 후 나머지 2할의 흙을 채워준다.(그림1)
이듬해부터 덫거름을 주는 위치는 위 (그림 1)과 같다.
4. 전지(가지치기)와 도장지 손질

1) 봄 싹트기 전
장미는 해마다 첫 꽃이 지고난 후 지표부분(아접부위)에서 굵은 햇순(도장지)이 몇 개씩 힘차게 자라는 반면 묵은 가지는 점차 세력을 잃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햇순이 해마다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생육에 이상이 있다는 증거이다. 이 굵은 도장지(전년도 여름에 자람)3~4개를 남겨두고 나머지 약하거나 세력을 잃은 묵은 가지는 밑부분에서 깨끗이 잘라버리고 남겨둔 가지도 2년생은 지면에서부터 25~30cm, 4년생 이상은 30~40cm 정도를 남겨두고 잘라준다. (그림2 - 전지한모습) 또 주의 중심에서 원을 그렸을 때 외곽으로 향한 눈위에서 자른다.

2) 개화기
HT계는 한가지에 통상, 꽃송이 바로 밑에 1매엽 1개. 3매엽 2~3개 그 밑에 5매 본엽 6~8개 마지막 기부에 약한 3매엽 2개를 가지는데 꽃이 질 무렵 기부에서 보아 4번째 5매 본엽 바로 위에서 잘라준다.(그림3) 그러나 어린묘나 약한 묘에서 도장지를 키우고자 할 때는 한 두잎 더 남기기도 한다. 그냥 봉오리만 따주기도 한다. FL 계는 전지부위를 낮출수록 초장이 길게 자란다.

3) 도장지 손질과 봉오리 따주기
첫꽃이 지고 난 후 바로 또는 장마철 전후하여 뿌리부분(아접부위)으로부터 세력이 왕성한 굵은 햇순이 2~3개 힘차게 자라나는데 이것을 도장지(Shoot)라고 한다. 이 가지는 그 해 여름, 가을 그리고 이듬해 봄에 가장 탐스러운 꽃을 피우는데 이것을 소중히 가꾸는 것이 장미 재배에 있어서 가장 긴요한 일이다. 그냥 방치해 두면 빗자루 모양의 형태로 생각보다는 빈약한 꽃이 여러개 달린다. 그와 같이 방치 상태로 꽃을 피우게 되면 더 잘자라지도 않고, 그 도장지는 세력이 약해져서 겨울에 동해를 받기도 쉽고, 이듬해 봄 전지할때 보면 별 쓸모없는 가지로 되는 수가 많다. 30cm전후로 자랐을 때 윗순을 조금 잘라주면(순치기=적심)2~3개 정도로 분지가 되면서 계속 튼튼히 자라 좋은 꽃을 피우게 되는데 그 이후의 전지는 앞항 개화기 전지와 같은 요령이다.
다음에는 곁봉오리 문제인데 HT계는 주봉을 남겨두고 곁봉오리를 따주면 더 크고 탐스러운 꽃을 볼 수 있고, FL계는 세력이 강한 가지나 도장지의 제일 윗봉오리가 녹두알만큼 커졌을 때 그 주봉을 따주면 곁봉오리들이 엄청나게 불어나서 한가지에 50~100송이 까지도 피울 수 있다.

4) 가을꽃을 위한 전지
우리나라의 가을 날씨는 장미꽃을 보기에는 세계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기후라고 할 수 있는 데도 여름넘기기와 가을 꽃을 위한 전지를 소홀히 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 짝이 없다. 8월 10일~ 8월 20일(목표개화 시작일로부터 역산해서 약 45일전)사이에 올해 봄부터 여름사이에 자란 가지들 중 아주 약한 가지는 기부에서 잘라버리고 나머지를 주 전체의 2/3나 3/5높이에서 적당히 전지해 주면, 9월 20일부터 10월 5일 사이에 봄 첫꽃보다 훨씬 탐스럽고 화려한 색깔의 장미를 관상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때 주의할 것은 나무 전체로 보아 건강한 5매엽을 60%정도를 남겨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름에 하엽이 지지 않게 잘 가꾸어야 하는 것이다.
주간온도,20~25˚C, 야간온도, 10~15˚C에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진짜 장미꽃의 진가를 보게 될 것이다. 이꽃을 보기 위해서 로-즈 마니아(Rose-mania)들은 여름철의 그 기나긴 시간들을 장미잎이 떨어지지 않게 땀 흘리는 것이다.
왜냐? 건강한 장미잎은 곧 탐스러운 아름다운 장미꽃 바로 그것이기 때문에...

5. 물주기와 멀칭

장미꽃과 물과는 너무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장미의 대목인 찔레나무(Rosa-multiflora)가 들판의 개울가를 따라가면서 무성하게 잘 자라고 있는 것을 눈여겨 보면 뿌리의 한쪽부분이 거의 물에 잠기도록 뻗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장미가 잘 자랄수 있도록 이상적인 토양을 조작한다면, 60~70cm 지하에 자갈을 깔고 항상 물이 흐르도록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장미가 심겨진 토양은 인위적으로 토양 습도를 유지 하게끔 하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너무 자주 물을 주면 땅이 단단해져 갈라지기도 하고, 뿌리부분이 과습하여 썩거나 호흡이 곤란해지기도 하고, 초봄이나 늦가을에는 지온이 급격이 떨어지므로 발근이 오히려 늦어질 수도 있다. 초봄의 이식기, 5월 건조기, 8월 고온기의 관수가 가장 중요한 것인데, 한 두번을 주더라도 뿌리 주변의 흙이 충분히 젖도록 듬뿍 준다.
이와같은 물주기 외에도 제초, 밭갈기, 병충해 방제, 고온기 지온상승 억제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멀칭'을 한다. 뿌리주변 반경 30~40cm의 부분을 곱게 밭갈기한 뒤 약간의 둑을 만든후 짚이나 가마니, 바크(수피), 잔디 깍은 것, 왕겨, 낙엽, 퇴비 등으로 적당히 표토를 덮어주는 것이다.
6. 병충해 방제, 소독

1) 진딧물류 : '아타라', '란네이트' 또는 '코니-도'수화제를 초봄 싹틀 첫꽃이 피기 직전, 7월중순, 9월중순경에 각1회 살포.

2) 잎말이 나방류, 송충이 - 심식충류 : 1)항의 살포 시기에 '란네이트', '다이메크론' 또는 '디디브이피'유제를 1,000배~1500배 비율로 추가로 혼합 살포.

3)응애류 : 살비왕 + 사란, 또는 '올스타'를 7월 초순, 8월 중순경에 각 1회 살포

4) 흰가루병(Mildew) : 석회유황합제 7배액을 후면기인 12월~2월 사이에 1~2회 살포
생육기에는 발생시 '트리후민' 1,000~2,000배액(고농도이므로 정확히 계량)를 봉오리와 스템, 신초의 앞, 뒷면에 고르게 살포.

5) 노균병(Downy Mildew) : '이코션' 2,000배, '미칼+로브랄', '알리에트'등을 교대살포

6)흑반병(Black Spot) : 밴레이트1,000~1,500배+포리람 500배 비율로 혼합살포, 6월 중순~ 9월 중순까지 매월 2회씩 주기적으로 살포하되, 특히 장마철 고온시 비 그친 뒤에 매번 살포.

7) 총채벌레 : '아센드'(리전트) 또는 '에이팜'을 3日 간격으로 2회 살포

* 흰가루병, 흑반병 기타 병원균의 예방을 위해서는 동기에 석회유황합제 살포를 꼭 실시하고, 멀칭을 해주며, 너무 밀식하거나 통풀이 잘 안되는곳의 식재를 피한다.
* 위에서 1,000배액이라 함은 물20ℓ(1말)에 약량 20cc 또는 20g을 탄 비율을 말한다. 여기에 전착제를 10cc비율로 넣고, '하이포넥스' 또는 '피터스'를 20g 비율로 넣어주면 좋다.

7. 월동관리

내한성이 강한 품종들은 예외로 하고, 거의 대부분의 품종들은 서울 외곽 및 중부지역에서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월동에 신경을 쓰는 것이 안전하다. 나무장미는 초겨울 서리 맞고 영하 4~5도 정도의 기온이 되는 11월 중순경, 지표에서부터 50cm정도의 위치에서 예비전지한 후 적당히 가지를 묶어서,

1) 지면위 30cm이상 흙을 단단히 덮어 주거나
2) 짚으로 두텁게 싸매주는데 밑부분을 잘 여미어 준다. 표토부분을 약 15cm복토해 주면 더욱 좋다.
3) 군식포 등은 부직포로 장미 위에 그냥 한 벌 덮고, 다시 그 위에 30cm 띄워서 활대나 굵은 철사 등 보조재료를 사용하여 얽은 뒤, 또 한 벌 덮어 2중으로 밀폐한다.
4) 덩굴장미는 지표에서부터 1m이상 부분의 굵은 줄기들을 짚으로 두텁게 잘 싸매고, 뿌리 주변에 가능한한 복토를 높이 해주며, 높은 부분의 가지들도 3)항과 같이 해주면 안전하다.

* 이듬해 3월초 해동이 되는 즉시, 피복재료나 복토한 흙을 제거한다.

떠도는 망명객, 뉴욕서 울면 한그릇 나눠먹고

<오늘 이승만135세 생일>독립운동도 굶기 예사
59세 재혼후에야 생일상, 6.25땐 인절미 몇개

1912년 생일날 33년간의 망명길 떠난 이승만

올해 3월 26일은 이승만 박사 탄신 135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씨 가문의 6대 독자로 태어난 이승만 박사는 주위의 많은 사람, 특히 부모와 누님들로부터 금지옥엽(金枝玉葉)으로 사랑받으며 자랐다.
아버지 경선공은 보학과 풍수지리에 조예가 깊은 유교적 선비였으나 넉넉한 재산이나 생계수단이 없었다. 양녕대군의 16대손이라고는 하지만 이승만 박사의 집안은 오랫동안 벼슬길이 막혀 몰락한 양반이나 다름없이 빈한했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학식이 높았던 어머니는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며 아들의 교육을 위해 전력을 다했다. 아무리 어려운 때라도 어머니는 아들의 생일이면 미역국과 흰쌀밥을 해줬고, 수수팥단지와 튀각을 빠트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승만 박사가 본격적으로 개화·계몽운동에 뛰어든 이후로는 제대로 된 생일상을 받아보지 못했던 것 같다.

▶굶기 예사였던 망명객, 중국집 알바 최용진씨 찾아 허기 채워

이승만 박사는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사과 한 개로 하루를 견디며 끼니를 거를 때가 많았고, 심지어는 생일에도 굶은 적도 많았다.
미국 유학과 독립운동 시절에 몹시 배가 고플 때면, 뉴욕의 어느 중국집에서 일하며 고학하던 독립운동 동지 최용진(崔容鎭) 씨를 찾아가 요기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둘이 울면 두 그릇을 시켜놓고 생일 파티를 하며 고향집을 그리워했다.

프란체스카 여사와 결혼한 1934년 이후부터는 조촐하나마 생일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프란체스카 여사의 회고에 의하면 결혼 후부터는 생일만은 꼭 미역국과 쌀밥, 잡채와 물김치를 차려주었다고 한다.

▶혼식 장려하던 시절 "사진 촬영 말고 간단히"

대통령이 된 후에도 이 박사는 친구나 친척들만 경무대로 초대하는 조촐한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이 박사가 대통령이 된 후 처음 맞았던 생일, 생일상을 차릴만한 마땅한 친척이 없자 비서들이 걱정했다. 그 때 이 대통령의 몇 안 되는 친척 가운데 경무대에 자주 드나들던 외척 누님의 손자 우제하 씨가 이 박사의 생일상을 준비하겠다고 했다.
대통령은 사양했으나 우제하 씨가 모실 사람도 없으니 자신이 하겠다고 우겨 대통령의 승낙을 받았다. 그러나 쌀이 모자랄 때라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쌀밥만 먹지 말고 보리쌀도 섞어 먹도록 하라"고 혼식을 장려하고 있을 때인지라 프란체스카 여사가 난색을 표했다. 국민들에게는 혼식을 장려하면서 쌀이 주가 되어 차려지는 큰 상을 받을 수 없다고 반대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사진 촬영도 하지 말고 우리끼리만 간단하게 하자는 조건을 전제로 한 프란체스카 여사거 받아들여 생일상이 차려졌다. 비록 하객도 없이 조촐하게 맞은 생일이지만 이 대통령은 퍽 기뻐했다고 한다.

▶6.25전란 중 인절미 나눠먹고 "그 떡 참 맛있네"

프란체스카 여사는 6.25전란이 한창이던 1951년, 부산 임시관저에서 맞은 이 대통령 생일을 잊을 수 없다며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이 대통령은 미역국과 안남미(인도차이나 산 맛없는 쌀) 쌀밥 외에는 단 한 가지도 생신음식을 더 장만해서는 안 된다는 엄명을 내렸고, 생신 선물도 일체 사절했다.
당시 많은 전재민들이 굶주리고 있었고, 날마다 처참한 부상병들이 신음하며 후송되어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대통령과 경남 지사인 양모 지사가 거제도를 비롯하여 남해안 여러 곳을 시찰했을 때 양 지사가 인절미를 가지고 와 배에 탄 대통령과 일행에게 조금씩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한참 후 대통령이 “양 지사, 아까 그 인절미 참 맛있던데. 그 떡 정말 맛있어”하며 넌지시 남은 떡이 있으면 조금 더 내놓으라는 눈치를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남은 떡은 하나도 없었고, 대통령이 실망하는 눈치여서 송구스럽게 생각한 양 지사는 생신날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말라는 엄명이 있었으나 인절미만은 대통령께 드려도 별 탈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가져왔다.’ 
76세의 노구를 이끌고 전선을 누비며 승전을 독려했던 노 대통령의 인절미 이야기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잊지 못할 마지막 생일상, 하와이 동지들의 축하연

그후 뭐니 뭐니 해도 1961년 하와이 교민들이 베푼 이 박사의 생신축하연이 프란체스카 여사에게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하며 망명기간 대부분을 보냈던 하와이 평생 동지들이 베푼 생신축하연이었고, 그것이 생전에 건강한 모습으로 맞은 마지막 축하연이 되었으므로….  다음해 이 박사는 3월17일 귀국길에 나섰으나 마지막 순간에 한국정부의 거부통보를 받고 쓰러지고 말았다. 그후 요양원의 병상에서 망향의 눈물 속에 맞았던 생일이 세번, 1965년 7월19일 만90세 생일이 지난지 4개월만에 대한민국 건국대통령은 그렇게 눈을 감았다.

기사본문 이미지
이 박사의 86회 생신축하연(1961.3.26).
하야 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처음 맞은 생일, 하와이 교민들이 베푼 축하연에서 기뻐하는 이박사 내외.

■ 건국대통령 이승만 / 3월의 발자취

1875. 3. 26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능내동에서 출생. 호는 우남(雩南). 양녕대군 16대손으로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1839-1912), 어머니 김해 김씨(1833-1896) 사이에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
1912. 3. 26  1년 5개월의 한국 생활을 마감하고 미국으로 망명.
‘105인 사건’에 뒤이은 체포의 위협이 있자, 미네아폴리스에서 열릴 ‘국제기독교 감리회 4년 총회’의 한국 평신도 대표로 참석하도록 선교사들이 주선함으로써 체포를 면함.
1919. 3. 21  노령(러시아령) 임시정부에서 국무경(국무 및 외무총장)으로 추대됨.

1920. 3   서재필과 함께 찰스 토마스, 존 쉬로스 미 상원의원으로 하여금 한국독립승인 안을 미 의회에 상정케 함, 상원 본회의에서 아일랜드 독립지지안과 함께 상정되었으나 34:46으로 부결됨. 
1939. 3. 30  제2차 대전의 발발 가능성이 보이자 워싱턴D.C.에서 구미위원회 활동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호놀룰루 출발.

1942. 3. 23   미 국무장관 코델 헐에게 임정 승인을 요청.
1943. 3. 30   미 육군장관 헨리 스팀슨에게 하와이 한인동포들을 일본인과 같은 적성국민으로 대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냄. 육군장관으로부터 한인을 다르게 취급하겠다는 회신을 받음. 
1945. 3. 8    미 국무장관 에드워드 스테티니우스에게 4월에 열릴 샌프란시스코 유엔창립 총회에 임정 대표를 초청하도록 요구. 
 
1945. 3. 9    루즈벨트 대통령 부인 엘리노어 여사를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면담.
1947. 3. 10   미 정부 관계자로서는 유일하게 힐드링 국무차관보가 이승만의 독립정부 수립안을 지지하는 발언.
1948. 3. 30   정부수립을 위한 선거 연기설을 비난.
1949. 3. 23   필리핀 퀴리노 대통령이 제안한 반공적인 태평양동맹안 지지
1950. 3. 4    내각책임제 개헌 여부는 국민투표로 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
         3. 10   농지개혁법 개정법 공포, 봉건적인 지주-소작인 관계의 사회를 자작종-자유인의 사회로 바꾸는 혁명적인 계기가 됨.

1951. 3. 24   한만국경까지 진격하기 전에 정전은 안 된다고 담화.
1954. 3. 5    국제반공십자군 창설 제의
      3. 27   일제상품 몰수 지시
      3. 28   국군 증강 보장하면 제네바 정치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겠다고 미국에 통고.

1956. 3. 5    자유당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자 불출마 서한 전달.
      3. 17   덜레스 미 국마장관의 한국 방문, 이 대통령과 통일방안 협의.
      3. 25   공보실 통해 재출마 결의 담화.  
      3. 30   학도징집보류 전폐 등 국민 개병의 원칙 표명.

1957. 3. 21   82회 탄신기념일을 맞아 우남장학회 발족.
      3. 26  국회의장 이기붕의 장남 이강석을 양자로 맞음.
      3. 28  미국과 서방측의 중동문제 치중에 경고.
1958. 3. 8   북한에 납북된 KNA 민간여객기 기체 송환을 요구.
      3. 28  일본 기시(岸信介) 수상의 한일회담 재개 요망 친서에 동의.
      3. 31  미국 기자와의 회견에서 인도차이나에 한국군 파견 용의 표명.

1959. 3. 1   3·1절 기념식에서 일본에 대항할 안전보장이 긴요함을 역설.
      3. 25  남북통일을 위한 미국의 결단 촉구.
      3. 29  자유진영의 단결을 위해 미국의 강경정책이 필요하다고 미 국민에 호소.
1960. 3. 6   기자회견에서 연내 참의원 구성 언명.
      3. 15  선거에서 대통령 4선 확정.
      3. 28  선거부정에 대한 논란이 커지자 자유당 간부들을 불러 민심수습 5개 항목을 지시.
1962. 3. 17  귀국을 희망했으나 한국정부의 반대로 좌절, 마우나라니 요양원 입원.

[강준식의 정치비사] 대통령 스토리 이승만②

이승만과 반공주의
해방 전의 반공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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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배재학당에 다닐 때만 해도 평민주의자의 한 사람이었던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주요 가치가 되는 평등사상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1898년 11월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도입하려 했다는 혐의로 윤치호·이상재·남궁억 등 독립협회 간부 17명이 체포되자 그는 배재학당 학생과 대중 수천 명을 이끌고 경무청과 평리원(고등법원) 앞에서 철야농성을 벌였다.

석방을 요구하는 집회가 밤낮으로 계속되자 그의 아버지가 찾아왔다. “선친은 내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승만아, 너는 6대 독자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하셨다. 17명은 종내 석방되고 말았는데, 그날 밤 나는 참으로 득의충천하였었다. 민주주의를 위한 위대한 승리를 이룩하였던 것이다”라고 이승만은 자서전에 썼다.

또 황실이 조종하는 황국협회가 독립협회 회원들을 습격해 김덕구(金德九)라는 사람이 죽었을 때 수천 명의 민중이 그 장례식에 참여했는데 이승만은 바로 이들 집단의 리더이기도 했다. 이처럼 당시로서는 진보적이었던 그가 보수적 생각을 갖게 된 것은 미국으로 건너간 뒤부터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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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군부 지도자들의 신년하례를 받고 찍은 기념사진.

1908년 전명운·장인환 의사가 친일파 미국인 더햄 스티븐스를 샌프란시스코에서 암살해 미국 법정에 서게 되었을 때, 이승만은 자신에게 들어온 법정 통역의 요청을 거절하면서 “예수교인으로서 사람을 죽인 이의 통역을 원치 않는다”고 했는데, 우리는 이 발언을 통해 그가 공산주의를 싫어하게 된 배경이 공산주의를 사탄시하는 기독교의 영향 때문이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실제로 그가 공산주의자와 처음 부닥치게 된 것은 1921년 상하이 임시정부에서였다. 당시 국무총리 이동휘는 공산주의자였다. 비록 그가 제기한 문제는 위임통치국 청원에 대한 것이었지만, 벌떼처럼 달려드는 공산주의자와 그 동조세력들에게 크게 시달렸다.

하와이로 건너간 이승만은 공산주의에 대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평등주의는 당(當)하나 ①재산 분배 ②자본가 폐지 ③지식계급 폐지 ④종교단체 혁파 ⑤국가 소멸의 5가지는 부당(不當)하다는 글을 발표한 일이 있다(이승만,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 <태평양잡지>, 1923년 3월호). 이는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인식을 표현한 글로, 이때만 해도 공산주의 자체를 혐오하는 수준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1933년에는 소련에 도움을 구하러 간 일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소련 비자를 얻어 기차를 타고 소련으로 갔다. “(만주사변 후) 일본의 영토 확장이 중국과 마찬가지로 소련에도 위협이 되므로 그는 서방에서보다 더 환대를 받지 않을까 희망했다. 그러나 소련인들은 소련과 만주지역의 한인들에 아주 적절한 발판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의 말을 가장 듣지 않을 것 같은 이 망명분자를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Richard Allen,, 1960)

그 해 7월20일 모스크바역에 도착한 이승만은 즉시 추방되는 수모를 당했는데, 이것이 공산주의라면 넌더리를 치는 계기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1945년 5월 연합국 대표들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유엔 창립총회를 열었을 때 미 국무부는 중국 외교부장 송자문(宋子文)을 시켜 한인 각파 지도자들로 하여금 한국통일위원회를 구성하게 하여 좌우 연립을 종용했다.

당시 이 복안에 앞장섰던 인물은 대일 첩보로 미 국무부의 호감을 사고 있던 한길수(韓吉洙)와 중도파의 김용중(金龍中) 등이었다. 이승만은 임정 대통령을 지낸 자신과 이들을 동격으로 취급하는 국무부의 태도에 화가 났다. 게다가 자신의 지지세력과 상대방이 세 대결에 들어가면 결코 유리한 상황도 아니었다.

이에 이승만은 그런 식으로 연립하게 되면 한국을 공산주의에 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단호히 거부했다. 그의 참모인 올리버가 이승만의 지도력은 이것으로 끝이라고 한 국무부 관리들의 말을 전하자 워싱턴으로 돌아온 이승만은 그럴지도 모른다면서 “그러나 나 좋자고 한국을 파느니 나는 차라리 아이오와의 작은 양계장으로 은퇴하겠소”라며 국무부가 종용한 연립안에 강한 거부감을 피력했다. 이처럼 이승만의 반공투쟁은 미국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해방 후의 반공주의

1945년 10월16일 귀국한 이승만은 남한의 좌우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이 모두 그의 지도를 받기 위해 모여든 것에 크게 고무되었다. 미 군정 또한 그의 지도력을 원했다. 이에 이승만은 10월21일 ‘공산당에 대한 나의 감상’이라는 방송 연설을 통해 “나는 공산당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 주의에 대하여도 찬성하므로 우리나라의 경제대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를 채용할 점이 많이 있다…”라고 하여 공산주의를 포용하겠다고 선언했다(<매일신보>, 1945년 10월22일).

다분히 공산당을 의식한 일종의 제스처였을 것이다. 좌파는 환호했다. 아직 수락하지는 않았지만 이승만은 이 시점에서 그들이 세운 인민공화국의 주석이기도 했다. 연설 직후인 10월23일 각 정당·단체 대표 200여 명이 모여 이승만을 정점으로 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구성하기로 했는데, 여기에는 조선공산당 등 좌파 단체들도 모두 포함돼 있었다.

10월31일 이승만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을 돈암장에 불러들였고, 두 사람의 이날 회담은 원만하게 타결된 듯 보였다(<매일신보>, 1945년 11월2일). 그러나 회담에서 논의된 친일파 배제문제가 공전하자 박헌영이 반기를 들었다.

이에 이승만은 11월21일 ‘공산당에 대한 나의 관념’이라는 방송 연설을 통해 “악독한 왜적의 압박 하에서 지하공작으로 절(折)불굴하고 배일항전하던 공산당원들을 나는 공산당원으로 보지 않고 애국자로 인정한다”면서, 자신은 근로대중에게 복리를 주는 경제정책을 펴자는 공산주의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찬성하지만, 경제정책은 어찌 되든지 공산정부만 세우자고 선동하는 공산주의자에 대해서는 “나랏일에 손해를 끼치는 이들이니 이 분자가 참으로 염려된다”고 말했다(<서울신문>, 1945년 11월23일). 좌익을 둘로 나누어 한쪽은 인정하지만 다른 한쪽은 인정할 수 없다는 연설이었다.

그러나 좌파의 정당·단체들은 그 최고사령탑인 박헌영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정도 유연성을 보이던 기타 좌익단체들이 독립촉성중앙협의회로부터 모두 탈퇴하자, 이승만은 12월17일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방송 연설을 통해 “공산분자들이 러시아(露國)를 저희 조국이라 부른다니 과연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요구하는 바는 이 사람들이 한국에서 떠나 저희 조국에 들어가 저희 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기라고 하고 싶다”며 공산당과 완전 결별을 선언한다(<서울신문>, 1945년 12월21일).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승만은 “무기 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서울신문>, 1946년 6월4일)라고 저 유명한 ‘남선단정’ 발언을 감행하게 된다.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그러나 그의 발언은 단순히 정권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대로 두면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니 남한만이라도 건져야 하지 않느냐는 절박한 심정에서 나온 것이었다는 해석이 점차 유력해지고 있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것이 당시 이승만이 사용한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라는 용어다.

여기서 ‘위원회’는 다분히 그 해 2월 성립된 북한의 임시인민위원회를 의식한 단어로, 소련이 사실은 단독정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냐고 이승만은 의심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의혹은 1993년 공개된 소련문서에 의해 사실로 입증되었다. 즉, 스탈린은 이미 1945년 9월20일 극동군 총사령관 및 제25군에게 “북조선에 반일적 민주주의 정당·단체들의 광범위한 동맹에 기초하여 부르주아 민주정권을 수립하는 데 협조하라”는 지령을 보냈고, 이에 따라 소련은 북조선5도행정위원회→북조선5도행정국→임시인민위원회를 통해 이미 북한의 단독정권을 구축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공산주의와 협력이나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이승만의 지론은 1921년 이동휘 등과 마찰, 1933년 소련 방문 때 당한 모욕, 1943년과 1945년 좌우 연립을 둘러싼 갈등과 미 국무부의 진보적 관리들로부터 받은 수모 등 자신의 개인적 체험에 바탕을 둔 것이기도 했다.

또 그는 2차대전 후 연립정권을 구성했지만 좌우 연립은 명목이었을 뿐 결국 공산정권이 되고 만 폴란드의 사례에서 공산주의와 타협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재확인했는데, 이 점은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그의 라디오 담화문 속에 잘 드러나 있다(<서울신문>, 1945년 12월21일). 통일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는 점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반공주의적 시각에서는 역시 보는 눈이 남달랐다고도 할 수 있다.

그의 반공주의의 완결편은 일제의 치안유지법을 거의 그대로 옮긴 국가보안법 제정이었다. 이 법에 의해 반공은 대한민국의 국시(國是)가 되었던 것이다.

7전8기의 신화-밀서 품은 이승만
거듭되는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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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직후 이승만 대통령이 군부대를 방문해 훈련받는 사병들을 돌아보고 있다.

서재필은 이승만을 가리켜 “독립운동보다 한평생 대통령운동을 한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대통령 꿈을 갖지 않고 어떻게 대통령이 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중학교 때부터 벽에 써 붙이고 살았다는 김영삼, 정적들로부터 ‘대통령병’ 환자라는 소리를 들었던 김대중 등의 사례를 알고 있다. 꿈을 현실로 만드는 것은 결국 그 자신인 것이다.

이승만의 경우는 조국의 독립운동과 자신의 대통령운동이 겹쳐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이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성공시키는 전략으로 그는 미국의 힘을 이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과정은 험난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미국정부는 이승만을 도와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고종의 밀서를 품고 미국으로 건너간 이승만은 1905년 7월6일 아침 뉴욕 오이스터베이 별장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던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났다.

한국의 독립을 도와달라는 청원서를 받아든 루스벨트는 잠시 문서를 들여다보더니 “당신 나라를 위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면 좋겠소. 다만 이 청원서가 공식계통을 밟아 올라오기 전에 나로서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소”라고 이승만에게 말했다. 사실상의 거절이었다. 이것이 미국정부와 접촉에서 이승만이 겪은 첫 번째 좌절이다.

두 번째 좌절은 1차대전 직후에 있었다. 전후 파리강화회의가 열린다는 뉴스를 접한 미주 교포들은 1918년 11월25일 대표자회의를 소집해 이승만·정한경(鄭翰景)·민찬호(閔贊鎬)를 파견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미국정부에서 출국허가를 내주지 않으므로 이승만 등은 1919년 2월25일 윌슨 미 대통령 앞으로 청원서를 보냈다.

내용은 한국을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두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정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대통령 면담 신청도 받아주지 않았다. 이승만으로서는 프린스턴 시절의 은사였던 윌슨 대통령과 개인적 친분에 희망을 걸고 접근해보았지만 국제정치의 현실은 냉정했다.

세 번째 좌절은 1921년 11월12일부터 미국 워싱턴에서 열리는 태평양군축회의에서였다. 이승만은 임정 대통령으로서 한국대표단을 구성하고 워싱턴회의에 한국문제를 상정하기 위해 총력외교를 펼쳤다. 미국 각처의 한국친우회도 한국대표단을 측면지원했다. 이에 상하이의 임정은 정쟁을 중단하고 이승만에 대한 기대감을 다시 높였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대표단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나아가 미국은 일본과 새로운 협력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소위 워싱턴체제를 출범시켰다. 네 번째 좌절은 1942년에 있었다. 이승만은 그 해 1월2일 무기대여법(Lend-Lease Act)에 의한 원조를 받기 위해 국무부를 방문했다. 그러나 국무장관 특별보좌관 앨저 히스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의 말은 이승만이 정말 한인들의 지지를 받는지 미국정부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승만은 일본이 패전하면 오랫동안 부동항을 갖고 싶어했던 소련이 끼어들 것인데, 이를 막자면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미리 승인해주는 길밖에 없다는 논조를 폈다. 그러자 앨저 히스는 책상을 치며 “미국의 주요 맹방인 소련을 공격하다니 도저히 들어줄 수 없소” 하고 쏘아붙였다.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것이 미국정부에 대한 네 번째 좌절이다.

눈물의 편지

1943년 여름, 이승만은 미 대통령에게 한국 지하운동 조직망의 설계도를 작성해 보냈다. 이에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워싱턴에 와 있던 중국 외교부장 송자문(宋子文)에게 한인 저항운동의 능력을 평가해달라고 부탁했다. 조사해보니 이승만은 안창호 계열(국민회·흥사단)이나 중도파(한길수·김용중)나 좌파(연안독립동맹) 등 적이 너무 많았다.

송자문은 한길수·김용중 등과 제휴하라고 권유했으나 이승만은 반목하는 제휴에서 무슨 지도력이 나올 수 있느냐며 거절했다. 그러자 송자문은 한인들이 너무 분열되어 있어 무기 원조를 받을 가치가 없다고 루스벨트에게 보고했고, 이에 임시정부는 미국의 승인이나 무기원조를 받을 기회를 상실하고 말았는데, 이것이 다섯 번째 좌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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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18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고려대생들이 데모를 하고 있다.

1945년 5월 연합국 대표들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유엔 창립총회를 열었을 때 이승만은 한국 독립의 보장을 획득하기 위해 전력투구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한인 지도자들을 모두 불러 샌프란시스코의 마우리스호텔에 본부를 설치하고 유엔 창립총회 사무총장 일을 보게 된 국무부의 앨저 히스에게 한국도 옵서버 자격을 갖게 해달라고 요구했으나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이것이 여섯 번째 좌절이다. 1945년 8월15일 마침내 일본이 항복했다. 그는 하루빨리 귀국하고 싶었으나 국무부가 비협조적이었다. 전시 중 인연을 맺은 OSS가 도움을 주어 겨우 여행증을 받았으나 얼마 후 다시 취소되었다. 이유는 그가 임정 고등판무관(High Commissioner) 자격으로 한국에 들어갈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구원의 손길은 다시 군부로부터 왔다. 구체적 인맥은 OSS 차장으로 승진한 굿펠로 대령이었다. 정보기관 부책임자의 추천은 맥아더에게도 무게 있게 받아들여졌다. 그로부터 한 달. 이승만은 도쿄(東京)행 군용기를 얻어 타게 되었다. 10월4일, 그는 배웅나온 임병직에게 편지를 한 통 건넸는데, 거기에는 그동안 그가 국무부에 ‘왕따’당한 피눈물 나는 설움이 이렇게 피력되어 있다.

“미쥬를 떠나는 나 리승만은 새벽 등불 하에서 두어 줄 글로 미포(美胞) 1만 동포에게 고별함니다. 40년 동안 혈젼고투하든 우리로 필경 왜 멸망하고 우리가 살아서 고국산쳔에 발을 다시 드려노케 되니 엇지 깃분 감상을 늣기지 안으리요만은 이때 나의 심회는 도로혀 억울통분하여서 찰하리 죽어서 아모 것도 모르고 십흠니다….”(<북미시보>, 1945년 11월1일).

귀국한 그는 하지의 정치고문으로 서울에 온 굿펠로 대령을 도와 1946년 2월14일 ‘민주의원’을 발족시켰다. 그러나 미 국무부는 어떤 종류의 좌파도 포함되지 않은 우익만의 ‘민주의원’은 쓸모가 없다면서 그 의장과 부의장에 취임한 이승만과 김구에 대해 “망명의 배경 때문에 중국 국민당 지원을 받고 있는 것이 분명한 김구나 다년간 국무부가 협상해본 결과 만족스럽지 못했던 이승만 그룹에 대하여 어떤 애정도 표시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육군부→맥아더를 경유해 하지에게 전달했다(, 1946년 2월28일). 그의 일곱 번째 좌절이었다.

하지와 불화

군인으로서 하지는 반공에 대한 생각이 이승만과 같았지만, 통치자로서 하지는 국무부의 지령을 수용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여기서 하지는 목하 진행 중인 미소공동위원회를 염두에 두고 이승만에게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비난을 자제하도록 종용했다. 이승만은 불만이었다. 그러나 하지는 국무부의 지령에 따라 극좌·극우세력을 배제하고 중도파의 김규식·여운형을 앞세운 좌우합작운동을 출범시켰다.

미 군정의 1차 목표는 이승만의 민주의원을 대신할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설립이었다. 이에 이승만은 자파 세력을 ‘입법의원’에 많이 진출시키기 위해 전국적으로 위원회를 조직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고 11월 선거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었다. 그러나 민선의원 45명과 별도로 관선의원 45명을 중도파로 선임한다는 계획을 듣고 이승만은 하지를 방문해 그 계획을 철회하도록 촉구했다.

그러자 하지는 이승만의 집권을 도울 생각이 없다고 퉁명스럽게 말했고, 발끈한 이승만은 “앞으로는 당신을 공개적으로 반대하겠다”고 응수했다. 그러자 하지는 “당신이야말로 미국의 계획에 협력하지 않으면 매장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위기감을 느낀 이승만은 대미국 로비를 위해 그 해 12월2일 출국한다.

G-2문서를 보면 이승만의 미국 내 활동을 하지에게 보고한 첩보기록물이 많이 발견된다. 1947년 2월 워싱턴을 방문한 하지는 미국 고위층·국회의원·언론이 자신을 “친공적 인물로 보는 바람에 변명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윌리엄 H. 드레이퍼 육군차관과 대담에서 밝혔다(‘하지와 드레이퍼 육군차관 일행의 대담, 1947년 9월23일9시’, Lt. Gen John R. Hodge Official Files, 194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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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의 마우 날라니 요양병원에서 입원 중이던 이승만 전 대통령 부부와 주치의인 박만상 박사(오른쪽), 이승만 대통령은 군사정부로부터 귀국이 거절되자 충격을 받고 쓰러져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망명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승만은 미국 내 참모 8명(임병직·임영신·로버트 T. 올리버 교수·굿펠로 대령·프레드릭 B. 해리스 목사·존 W. 스태거즈 변호사·제이 J. 윌리엄스 기자·에머리 우들 대위)을 불러 모아 활동을 전개해보았지만 대미 로비는 그의 입장에 우호적인 존 R. 힐드링 차관보를 만난 정도에서 그쳤다.

국제정치의 벽은 높았던 것이다. 이에 비해 하지는 손쉽게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를 건의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미국은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재개한다는 데 소련과 합의한다. 이승만에게는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그러나 낭보도 있었다. 그것은 1947년 3월12일 트루먼 대통령이 의회 연설을 통해 미국은 앞으로 공산주의에 대항해 싸우겠다는 ‘트루먼독트린’을 발표한 일이었다.

이승만은 트루먼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내고 “공산주의와 연립하는 신탁통치를 폐지하고 한국에 이 독트린을 적용하시라”고 당부했다. 4월 하순 중국 상하이를 경유해 귀국한 그는 미국 특파원들에게 “신탁통치를 안 하는 것이 더 이익이 많다”고 호언했다. 그러나 5월21일 서울에서 열린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어느 정도 진척을 보이자 이승만의 반탁진영은 붕괴하기 시작했다.

맨 먼저 한독당에서 참가파가 갈라져 나가더니 우익의 중추인 한민당이 “이 박사는 끝났다!”며 떨어져나가자 우익 59개 단체를 장기판 위의 말처럼 호령하던 이승만 본영(本營)은 위세를 잃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돈암장을 빌려준 해주 재벌 장진영조차 빨리 집을 비워달라고 성화였다.

이 무렵부터 이승만은 하지가 보낸 미군 헌병들의 감시를 받아 사실상의 가택연금에 들어갔다. 시련의 계절이었지만 그는 이철승 등 반탁 학생간부들을 독려해 미소공동위원회를 방해하는 반탁운동을 끊임없이 벌여나갔다. 그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잘 나가는 것 같던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8월 들어 결렬되었다.

이에 마셜 국무장관은 신탁통치안을 포기하고 한국문제를 유엔총회로 이관했다. 11월14일 유엔 위원단 감시하의 남북총선거 실시안이 43대 0으로 가결되었다. 이렇게 하여 신탁통치 문제는 결국 이승만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그야말로 7전8기였다. 그는 미국정부를 움직일 힘을 가졌던 것은 아니지만 결과론적으로 미국이 그의 구상을 수용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셈이었다.

정략가

1948년 5월10일 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198명의 제헌의원이 선출되었는데, 이 가운데는 말년에 아버지가 살았던 동대문갑구에서 단독출마한 이승만도 포함되어 있었다. 5월31일 개원한 제헌국회는 이승만을 의장으로 뽑았고, 이승만 의장은 헌법기초위원을 임명했다.

7월20일 대통령에 선출된 이승만은 부통령선거 직전에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부통령에 김구가 나오면 합작할 의사가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없다”고 자신의 단정안에 반대해 평양을 다녀온 김구에게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 대신 임정을 대표한다는 차원에서 이시영을 언급했고, 이런 이승만의 의향이 의원들에게 영향을 주어 결국 이시영이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승만은 배반은 철저히 징계하고, 자신을 넘보는 세력은 철저히 견제하는 성격이었다. 이 무렵 이승만을 떠받들어온 한민당은 안국동 윤보선 집의 사랑방에 본부를 설치하고 섀도캐비닛(Shadow cabinet)이라고 할 수 있는 속칭 ‘안동내각(安洞內閣)’을 꾸미고 있었다. 한민당 영수인 김성수를 국무총리로 하고, 그 밑에 내무장관·외무장관·재무장관·상공장관 등 최소한 주요 자리 4개는 차지한다는 복안이었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이승만에게 한민당의 효용가치는 임정과 마찬가지로 이미 끝난 것이었다. 그는 1948년 7월27일 국회 본회의에 출석해 북한의 대표성을 보완한다는 의미에서 평안도 출신 이윤영(李允榮)을 국무총리에 임명했다. 아연실색한 것은 그의 우군이던 한민당이었다. 의당 김성수를 택할 줄 알았는데 엉뚱한 기독교 목사를 택하자 한민당은 일치단결해 총리 인준을 부결시켰다.

이에 어부지리로 민족청년단의 이범석이 초대 국무총리가 되었다. 그리고 총리를 기대했던 김성수의 거부로 재무장관 자리는 김도연(金度演)에게 돌아갔는데, 한민당에서 입각한 사람은 12각료 중 그 하나였다. 이는 김구의 임정세력(→한독당)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권력을 넘보는 한민당을 토사구팽한 것이었다.

또한 1947년 한민당이 자신을 배반하고 미 군정의 좌우합작운동에 가세했던 것에 대한 징계적 성격도 있다. 그렇지만 초기의 이승만이 반드시 파당적으로만 인사를 했던 것은 아니다. 초대 내각은 각계각층에서 유능한 인재를 간추린 거국내각 비슷한 것이었는데, 그 대표적 사례가 농림장관 조봉암(曺奉岩)이다.

즉흥적으로 기용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1946년 봄 조봉암이 박헌영과 결별할 때 쓴 ‘3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글에 날카로움이 있는 것을 보고 찜해 두었다고 한다(김석영, <경무대의 비밀>, 1960).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지주가 중심인 한민당(→민국당)의 저항을 뚫고 농지개혁을 밀어붙이기 위해서는 과거 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 같은 인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좌파의 공세도 차단하고 한민당의 경제기반도 약화시키며 농민의 지지도 확보하는 1석3조였다. 그 효과는 6·25 때 농민들이 인민군에 호응하지 않았던 점으로도 입증된다.

더불어 이승만이 역점을 둔 것은 이후 한국 근대화의 원동력이 될 교육이었는데, 의무교육제를 도입해 교육기반을 확충시킬 문교장관에 독일 박사 출신의 안호상(安浩相)을 기용했다. 1948년 8월15일 그는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의 나이 74세 때였다. ‘늦게 왕을 계승한다’는 그의 이름(承晩)처럼 늦게 권좌에 올랐다.

그러나 흔히 알려진 것처럼 미국의 덕을 본 것이 아니다. 미국은 장사꾼 논리다. 늘 이긴 자와 손잡는다. 그게 ‘안전빵’이기 때문이다. 이승만도 자기 힘으로 대통령 자리에 올라갔기에 미국이 손을 잡아준 것이다. 그가 대외적으로 역점을 둔 것은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이었다. 이를 위해 이승만은 장면(張勉)을 단장으로 하고 올리버를 고문으로 하는 강력한 대표단을 유엔에 파견해 승인을 받았다.

이 승인을 받아놓았기에 뒤에 발발하는 6·25 전쟁 때 유엔군의 신속한 파병이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국제정치의 묘미를 알고 있던 이승만다운 솜씨였다.

 

석죽과 한해살이 식물인 안개꽃(학명: gypsophila paniculata)에 백혈병 치료에 혁명을 불러올 수 있는 강력한 항암물질이 들어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고 영국의 BBC인터넷판 등이 29일 보도했다.

영국 사우샘프턴 종합병원 백혈병연구소는 안개꽃에 들어있는 사포닌(saponin)이라는 분자가 백혈병세포에 흡수된 뒤 암세포 막에 구멍을 뚫어 항암제가 들어가기 쉽게 만들어 항암제의 효능을 “100만배 이상” 증폭시킨다고 밝혔다.

따라서 독소가 첨가된 항체를 이 분자와 함께 투여하면 백혈병세포를 뚫고 들어가 훨씬 빨리 암세포를 죽일 수 있다고 연구팀을 이끈 데이비드 플라벨(David Flavell) 박사는 밝혔다.

첫 실험에서는 이 항체가 주입된 지 몇 시간 안에 백혈병세포의 99.9%가 죽은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이 결과에 너무 놀라 실험장비가 손상된 것으로 의심했으나 수십 번 실험을 반복해도 똑같은 결과가 나왔다고 플라벨 박사는 밝혔다.

그는 이 새로운 치료법이 백혈병만이 아니라 많은 다른 종류의 암에도 효과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 실험결과는 임상시험을 통해 확인하려면 앞으로 3-5년이 걸릴 것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플라벨 박사는 20년 전 아들 사이먼이 백혈병으로 죽자 백혈병연구협회(Leukemia Busters)를 만들어 백혈병 치료법을 연구해 오다가 사우샘프턴 종합병원에 백혈병연구소를 차렸다.

이 연구결과는 지난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미국암연구학회(American Association for Cancer Research) 연례회의에서 발표되었다.

 

- 인왕산 鶴학巢소島도에서 최범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