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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소도의 <클레마티스 Clemat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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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년 미국 코네티컷 주 출생인 "애니 레이보비츠"는

1970년부터 《롤링스톤》에서 상업사진가로 첫발을 내디뎠고

 1983년부터 《배니티 페어》, 《보그》 등 메이저 급 잡지에서 일해왔다.

 ‘감정을 가진 피사체’라는 인물사진의 특성을 탁월하게 표현하는

 그의 카메라에 사로잡힌 음악가, 배우, 무용가, 운동가, 정치인 등

저명인사들의 숫자는 셀 수 없을 정도다.

 

그 중에서도 미국으로 망명한 러시아 출신 무용수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의

백야 프로젝트 다큐멘트(1990)는 특히 인상적이다.

비록 잡지라는 대중적 매체를 통해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상업사진이지만,

신선하고 드라마틱한 구성 면에서 그의 사진은 어떤 예술사진 못지 않은 경지를 보여준다.

15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면서 생존작가의 작품을 거의 받지 않는

 미국 스미소니언 인스티튜션의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에

그녀의 작품이 소장된 점은 레이보비츠 사진의 작품성을 입증하는 한 예다.

 

애니 레이보비츠(Annie Leibovitz)의 사진세계

애니 레이보비츠(Annie Leibovitz, 1950~)는 아주 독특한 캐릭터를 가진 여류 사진가이다. 미국사람들에게는 애니라는 이름으로 친숙해 있으나 아무래도 우리에게는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는 이름이다. 그러나 그녀가 찍은 사진을 보면 "아! 이 사진"하고 금새 친밀감을 느낄 정도로 그녀가 찍은 사진들은 우리에게 낯익다.
애니 레이보비츠는 지금까지 주로 잡지를 위해 사진을 찍어왔던 사진가이다. 그녀가 지금까지 거쳐왔던 잡지들은 하나같이 미국 대중문화의 한 부분을 담당하는 비중 있는 것들로서 70년대에 관여했던 "롤링스톤(Rolling Stone)", 그리고 80년대(1983년) 이후부터 관여해온 "베니티 페어(Vanity Fair)"가 그 대표적이다. 이들 잡지를 위해 찍었던 사진들은 익히 알려진 바처럼 우리가 잘 아는 배우나 가수, 연주가, 운동선수, 그리고 정치가 등 거의 대부분이 유명인들이다.
애니 레이보비츠가 뉴욕 제임스 덴지거(James Danziger). 화랑에서 선보인 신작 "A Year Pictures"는 이전의 사진과 크게 다를 바 없으나 몇 가지 점에서 변모의 모습을 보였다. 우선 눈에 띄는 변화는 사진 포맷과 사진에서 풍기는 분위기였다. 전시된 사진들은 지금까지 그녀가 타켓으로 했던 유명인사들의 포트레이트였다. 현직 대통령인 빌 클린턴을 포함하여 각계의 거물급 스타들만을 찍은 그 사진들은 그 속에 끼지 못한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오프닝 리셉션장에는 몇몇 사진의 주인공이 참석했을 뿐만 아니라 영화나 T.V에서 볼 수 있는 대중스타들의 얼굴들도 눈에 띄었다.
비교적 흑백사진을 많이 선보인 제임스 덴지거에서의 전시는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순수사진의 성격이 강했다. 그 동안 에디토리얼 사진에 주로 쓰는 하셀 포멧(6×6)이나 마미아포멧 (6×7)을 대폭 줄이고 8×10이나 11×14의 대형 포멧을 사용한 이미지 컷을 내보였고, 화면을 꽉 채웠던 전형적인 포트레이트 스타일에서 화면을 넓고 여유롭게 보이게 하는 순수사진의 냄새가 났다. 전시된 몇몇 작품에서는 그녀가 70년대 35㎜ 카메라에 의해 제작했던 방식을 재 적용함으로써 당시에 느낌(정확히 말하면 그 시대의 향수)을 전해주려고 애썼다.
애니 레이보비츠는 동료 사진가들에 비해 전시기회가 많았던 사진가는 아니다. 항상 잡지를 통해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때문에 그녀는 특별히 전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가 전시를 하는 경우는 대개 회고전 형식이다. 제임스 덴지거에서의 전시는 회고전 성격은 아니나 기발표된 작품들도 눈에 띄었으며, 작품의 양태와 크기는 칼라와 흑백이 적절이 안배된 11˝×14˝였다.
애니 레이보비츠는 1970년 초반,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 시절에 사진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녀는 이미 60년대 말부터 사진을 시작했으며, 70년대 초반에 들어 연예오락 잡지의 대명사인 "롤링스톤"의 아트디렉서 로버트 킹스버리에게 발탁되어 본격적으로 사진찍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3년 후인 1973년, 잡지커버를 장식하는 수석(Chief) 사진가가 되면서부터 애니 레이보비츠는 본격적인 사진가 대열에 합류했다. 그녀의 초창기(롤링스톤이전)사진을 보면 대단히 휴머니즘적이었다. 사진을 시작한 60년대 말에 촬영된 사진이 바로 그녀의 작품집 "Annie Leibovitz,1970~1990)"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Clark Air Force Base, The Philippins, 1968"이 있고, 이 시기에 제작된 또 하나의 대표적 사진으로는 그녀가 이스라엘 키부츠 집단농장에 머물면서 찍었던 "Kibbutz Amir, Israel, 1969)"가 있다.
애니 레이보비츠는 그 시절 찍은 사진들 중에는 역시 여름방학을 맞아 필리핀에 거주하고 있던 가족과 머물면서 공군기지의 백인 병사들과 비행장 주변에 거주하는 흑인여인의 모습(당시에는 인종차별이 심했다)을 담은 "클라크 공군기지"가 가장 기념비적이다. 롤링스톤지에서 본격적인 사진활동(주로 인터뷰나 다큐멘터리)을 시작한 그녀는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사진스타일이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는 포트레이트임을 알았다. 그렇게 하여 만들어진 첫 사진이 1970년 "롤링스톤지"의 커버를 장식했던 가수 "John Lennon, New York City, 1970)"이다. 이 사진을 찍기 위해 뉴욕으로 날아갔던 애니 레이보비츠는 비로소 포트레이트 작업이라는 것이 단순히 한 사람의 아티스트의 얼굴을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개성을 포착해내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애니 레이보비츠가 찍었던 70년대 사진은 결코 잡지를 위해 찍었던 것만은 아니다. 순수사진의 이름으로 찍은 좋은 사진들도 꽤 있었다. 그녀가 잡지를 위해 찍었던 무수한 유명인들, 즉 이름께나 날리는 인사들의 사진 못지 않게 자신의 느낌을 솔직하게 표현하려 했던 사진들이 그것이다. 주로 다큐멘터리 느낌의 이 사진들은(왜냐하면 이 사진들은 취지를 위한 여행 중에 제작되었기 때문에) 감상적 분위기가 꽤 풍겨난다. 그 대표적인 사진이 1976년에 촬영됐던 "On the road with Jackson Browne, Iowa, 1976"일 것이다. 그러나 역시 1970년대 "롤링스톤"을 위해 제작했던 사진들이 애니 레이보비츠의 명성을 드높혔던 사진이고, 또한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밑바탕이었다. 1974년부터 롤링스톤지는 풀칼라(full color)제작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애니 레이보비츠는 점차 흑백에서 칼라로, 소형에서 중형포멧으로 바꿔나갔다. 뿐만 아니라 저널리즘적 특성에서 점차 조형적 특성을 강조하기 시작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사진계의 우상(특히 여성들에게)이었던 다이안 아버스나 밥 엘드만의 사진과 유사한 분위기의 사진을 만들기 시작했다.
80년대(정확히 1983년) 들어서 애니 레이보비츠는 10년 동안 몸담았던 롤링스톤을 떠나 생활패션 잡지로 유명했던 "베니티 페어(Vanity Fair)"로 옮겼다. 베니티 페어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주로 연예오락을 다뤘던 롤링스톤과는 성격이 다른 잡지였다. 베니티 페어는 연예오락보다는 생활과 패션 그리고 라이프 스타일이 더 강조된 잡지였다. 칼라페이지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패션을 위해서 중형카메라 사용이 일반화되었다. 애니 레이보비츠로 하여금 다시 한번 변신의 모습을 요구한 자극제이기도 했다.
80년대 베니트페어에서 발표한 애니 레이보비츠의 사진적 특징은 위트였다. 하셀브라드 포멧을 선호했던 애니 레이보비츠는 특유의 유머가 있거나 때론 서정적 분위기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애니 레이보비츠의 대표작이 대부분 80년대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면 쉽게 짐작이 갈 것이다. 특히 풀 프레임을 좋아했던 그녀는 이전 에디토리얼 사진에서 볼 수 없었던 화명구성의 다양함을 선보이기도 했다. 베니티페어를 위한 사진을 아니지만 1980년 12월에 제작된 유명한 "죤 레논과 오노 요꼬"는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80년대의 사진으로서, 이 사진은 레논이 살해당한지 수주일 후 롤링스톤의 표지를 장식했다. 이밖에 80년대의 사진들 중에서는 우리에게 익술한 "이사벨 로셀리니와 데이빗 린치, 1986" 또는 "말콤 멕라렌과 블루보이, 1985"가 있다.
애니 레이보비츠는 1980년대 말 (정확히 1988)부터 하셀 포멧에서 마미마 포멧으로 바꿨다. 그녀의 사진에서 포멧이 중요한 것은 그녀가 에디토리얼 사진가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에디토리얼 사진은 포멧이 중요하다. 풀 프레임을 쓸 경우에는 포멧이 이미지에 영향을 미친다. 가로세로(6×6센티)가 같은 하셀브라드의 정사각형 프레임에서 미미아의 6×7센티의 비례로의 전환은 우선 공간구성의 여유로움과 함께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제공한다. 마미아 포멧으로 찍은 대표적 사진들이 바로 영화배우 "조디 포스터, 1988", "로제나바와 톰 아놀드, 1990"와 같은 것들이다.
제임스 덴지거에서 선보인 신작들의 사진 포멧은 대개가 8×10 또는 드물게 11×14(폴라로이드 포함)의 대형 포멧을 구사한 것도 있었다. 애니 레이보비츠는 90년대 들어 주로 마미아 포멧과 드물게 대형카메라를 구사하기는 했지만 대형 포멧은 잡지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전시장에서 선보인 작품에서 보여지듯이 대형 포멧의 사진은 과거의 에디토리얼 포멧과는 조금은 다른 데가 있다. 즉 잡지를 위한 에디토리얼 사진에서 벗어나 철저히 개인적인 시작과 느낌을 만들고자 결정한 포멧이다. 1993년에 찍은 흑백사진 "신디 크로포드"가 바로 그중 한 예이다. 사진에서 보여지듯이 그녀가 지난 20년 넘게 찍어온 에디토리얼 사진과 바로 구별될 만큼 예술적 이미지가 넘치고 있다.
제임스 덴지지거에서 애니 레이보비츠는 확실히 중년의 이미지를 풍겨냈다. 그러나 사진에서만큼은 마흔다섯의 나이를 잊으려는 듯 스무살 시설의 이미지를 꿈꿨다. 가수 바바라 스트라이센드를 연상시키는 그녀의 외모에서, 그리고 전시장 벽을 수놓은 40 여점의 사진들에서, 스무살 시절, 그 "롤링스톤"의 추억을 그리워한 흔적이 역력했다.

Personal life

Leibovitz had a close romantic relationship with noted writer and essayist Susan Sontag. They met in 1989, when both had already established notability in their careers. Leibovitz has suggested that Sontag mentored her and constructively criticized her work.

After Sontag's death in 2004, Newsweek published an article about Leibovitz that made reference to her decade-plus relationship with Sontag, stating that "The two first met in the late '80s, when Leibovitz photographed her for a book jacket. They never lived together, though they each had an apartment within view of the other's."[22]

Neither Leibovitz nor Sontag had ever previously publicly disclosed whether the relationship was familial, a friendship, or romantic in nature. However, when Leibovitz was interviewed for her 2006 book A Photographer's Life: 1990-2005, she said the book told a number of stories, and that "with Susan, it was a love story."[23]

In the preface to the book, she speaks in greater detail about her romantic/intellectual relationship with Sontag, briefly discussing a book they were working on together and describes how assembling A Photographer's Life: 1990-2005 was part of the grieving process after Sontag's death. The book and accompanying show include many photographs of Sontag throughout their life together, including several on her deathbed.

Leibovitz acknowledged that she and Sontag were romantically involved. When asked why she used terms like "companion" to describe Sontag, instead of more specific ones like "partner" or "lover," Leibovitz finally said that "lover" was fine with her.[24] She later repeated the assertion in stating to the San Francisco Chronicle: "Call us 'lovers'. I like 'lovers.' You know, 'lovers' sounds romantic. I mean, I want to be perfectly clear. I love Susan."[25]

Leibovitz is Jewish and nonobservant. Asked if being Jewish is important to her, Leibovitz replied, "I'm not a practicing Jew, but I feel very Jewish."[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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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tag, born Susan Rosenblatt, was born in New York City to Jack Rosenblatt and Mildred Jacobsen, both Jewish Americans. Her father ran a fur trading business in China, where he died of tuberculosis when Susan was five years old. Seven years later, her mother married Nathan Sontag. Susan and her sister, Judith, were given their stepfather's surname, although he never formally adopted them.

Sontag did not have a religious upbringing. She claimed to have not entered a synagogue until her mid twenties.[1]

Sontag grew up in Tucson, Arizona, and, later, in Los Angeles, where she graduated from North Hollywood High School at the age of 15. She began her undergraduate studies at Berkeley but transferred to the University of Chicago in admiration of its famed core curriculum. At Chicago, she undertook studies in philosophy and literature alongside her other requirements (Leo Strauss, Richard McKeon and Kenneth Burke were among her lecturers) and graduated with an [Arteum Baccalaureus] A.B.[2] She did graduate work in philosophy, literature, and theology at Harvard with Paul Tillich, Jacob Taubes and Morton White et al.[3] After completing her Master of Arts in philosophy and beginning doctoral work at Harvard, Sontag was awarded a University Women's Association scholarship for the 1957-1958 academic year to St Anne's College, Oxford, where she had classes with Iris Murdoch, J. L. Austin, Alfred Jules Ayer, Stuart Hampshire and others. Oxford did not appeal to her, however, and she transferred after Michaelmas term of 1957 to the University of Paris.[4] It was in Paris that Sontag socialised with expatriate artists and academics including Allan Bloom, Jean Wahl, Alfred Chester, Harriet Sohmers and Maria Irene Fornes.[5] Sontag remarked that her time in Paris was, perhaps, the most important period of her life.[6] It certainly provided the grounding for her long intellectual and artistic association with the culture of France.[7]

At 17, while at Chicago, Sontag married Philip Rieff after a ten-day courtship. The philosopher Herbert Marcuse lived with Sontag and Rieff for a year while working on his book Eros and Civilization.[8] Sontag and Rieff were married for eight years throughout which they worked jointly on the study Freud: The Mind of the Moralist that would be attributed solely to Philip Rieff as a stipulation of the couple's divorce in 1958.[9] The couple had a son, David Rieff, who later became his mother's editor at Farrar, Straus and Giroux, as well as a writer in his own right.

The publication of Against Interpretation (1966), accompanied by a striking dust-jacket photo by Peter Hujar, helped establish Sontag's reputation as "the Dark Lady of American Letters." Movie stars like Woody Allen, philosophers like Arthur Danto, and politicians like Mayor John Lindsay vied to know her.

Private life

Sontag became aware of her attraction to women in her early teens and wrote in her diary aged 15, "so now I feel I have lesbian tendencies (how reluctantly I write this)." Aged 16, she had her first sexual encounter with a woman: "Perhaps I was drunk, after all, because it was so beautiful when H began making love to me .... It had been 4:00 before we had gotten to bed ... I became fully conscious that I desired her, she knew it, too...."[22][23]

In the early 1970s, Sontag was romantically involved with Nicole Stéphane (1923-2007), a Rothschild banking heiress turned movie actress.[24] Sontag later engaged in a committed relationship with photographer Annie Leibovitz, with whom she was close during her last years; choreographer Lucinda Childs, writer Maria Irene Fornes, and other women.[25]

In an interview in The Guardian in 2000, Sontag was quite open about her bisexuality:[26]

"Shall I tell you about getting older?", she says, and she is laughing. "When you get older, 45 plus, men stop fancying you. Or put it another way, the men I fancy don't fancy me. I want a young man. I love beauty. So what's new?" She says she has been in love seven times in her life, which seems quite a lot. "No, hang on," she says. "Actually, it's nine. Five women, four men."

Many of Sontag's obituaries failed to mention her significant same-sex relationships, most notably that with Leibovitz. In response to this criticism, The New York Times' Public Editor, Daniel Okrent, defended the newspaper's obituary, stating that at the time of Sontag's death, a reporter could make no independent verification of her romantic relationship with Leibovitz (despite attempts to do so).[27] After Sontag's death, Newsweek published an article about Leibovitz that made clear reference to her decade-plus relationship with Sontag, stating: "The two first met in the late '80s, when Leibovitz photographed her for a book jacket. They never lived together, though they each had an apartment within view of the other's."[28] Susan Sontag's son, David Rieff, the executor of Susan's estate, has stated that only sentimental items were bequeathed to Leibovitz.[29]

Sontag was quoted by Editor-in-Chief Brendan Lemon of Out magazine as saying "I grew up in a time when the modus operandi was the 'open secret'. I'm used to that, and quite OK with it. Intellectually, I know why I haven't spoken more about my sexuality, but I do wonder if I haven't repressed something there to my detriment. Maybe I could have given comfort to some people if I had dealt with the subject of my private sexuality more, but it's never been my prime mission to give comfort, unless somebody's in drastic need. I'd rather give pleasure, or shake things up."

Grave of Susan Sontag

In her prime, Sontag avoided all pigeonholes. Like Jane Fonda, she went to Hanoi, and wrote of the North Vietnamese society with much sympathy and appreciation (see "Trip to Hanoi" in Styles of Radical Will). She maintained a clear distinction, however, between North Vietnam and Maoist China, as well as East-European communism, which she later famously rebuked as "fascism with a human face."

Sontag died in New York City on 28 December 2004, aged 71, from complications of myelodysplastic syndrome which had evolved into acute myelogenous leukemia. Sontag is buried in Montparnasse Cemetery, in Paris.[10] Her final illness has been chronicled by her son, David Rieff.[11]

John Lennon and Yoko Ono: Photographed by Annie Leibovitz - 8th December 1980


Taken by Annie Leibovitz in 1980 for Rolling Stone Magazine... four hours before he was shot apparently. It ended up being the front cover after his death with only the Rolling Stone logo at the top. A great picture. Rolling Stone Magazine, Issue #335 (Jan. 22, 1981)

"What is interesting is she said she'd take her top off and I said, 'Leave everything on' -- not really preconceiving the picture at all. Then he curled up next to her and it was very, very strong. You couldn't help but feel that she was cold and he looked like he was clinging on to her. I think it was amazing to look at the first Polaroid and they were both very excited."

펠레·마라도나·지단이 한 곳에 모인 까닭은 [중앙일보]

 

세계적 사진작가인 애니 레이보비츠(오른쪽에서 둘째)가 지네딘 지단(맨 오른쪽)과 펠레(오른쪽에서 셋째)에게 테이블 축구대 앞에서 어떻게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광고에 함께 출연한 디에고 마라도나는 지단의 오른쪽에 있어 보이지 않는다. 작은 사진은 결과물로 나온 루이뷔통의 광고.

 

스페인 마드리드의 한 바 ‘카페 마라비야스’. 마라도나가 등장해 말한다. “이것은 펠레와 지단의 기념비적인 경기입니다.”

“펠레와 지단, 누가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어 펠레와 지단이 테이블 축구를 한다.

살아있는 ‘축구의 전설’ 펠레(70·브라질), 디에고 마라도나(50·아르헨티나), 지네딘 지단(38·프랑스)이 한자리에 모였다. 최근 선보인 루이뷔통의 광고에서다.

루이뷔통은 그동안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러시아 대통령, 프랑스 영화배우 카트린 드뇌브, 영국배우 숀 코너리, 록밴드 롤링스톤스, 기타리스트 키스 리처즈 등 정치·연예계의 유명인사를 주로 광고 모델로 써왔다. 그런 루이뷔통이 현재 축구에서 최고 인기 선수인 리오넬 메시(아르헨티나)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포르투갈)가 아니라 이들 3인을 모델로 쓴 이유는 무엇일까. 루이뷔통 측은 “전설이 된 사람과 일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라고 설명한다. 특히 축구선수를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축구가 모든 사람에게 희망을 안겨주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11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개막하는 2010년 FIFA 월드컵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이 광고는 ‘지단과 펠레같이 다른 시대에 살았던 최고의 선수가 경기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상상력에서 출발했다. 이런 상상이 현실화된 것이 바로 테이블 축구다.

‘축구의 전설’ 3명은 촬영 기간 내내 일과 축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펠레는 “내가 지단 같은 선수에게 도움을 받았다면 아마 내가 만든 골보다 2배는 더 기록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단은 “축구를 진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펠레·마라도나에게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 그게 최고”라고 말했다. 마라도나도 “잘하면 경기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이다. 페널티다, 자살골이다 그런 걸로 경기에서 이긴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광고는 세계적인 작가인 애니 레이보비츠가 촬영했으며 이달부터 국내에 선보였다.

루이뷔통 모에헤네시(LVMH) 그룹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의 아들이자 루이뷔통의 커뮤니케이션 디렉터인 앙투안 아르노는 “진정한 축구 팬들도 이 세 명의 살아있는 전설이 함께 경기하는 모습을 보게 되리라 생각해 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창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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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고집 - 들꽃에 미쳐 30년 '종자 대왕' 장형태

구례 땅에 반해버린 묘목업자의 아들
'이름없는 들꽃'들을 농장에 모셨는데… 그렇게 수집하고 연구한 꽃이 700종
그가 이름을 붙여주자 들풀은 그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
2002년 서울에서부터 하나하나 생겨난 도심 '야생화 정원'엔 그의 땀방울이…장형태(張亨泰·56)는 농부다. 잡초 취급받던 우리 들꽃에 미쳐 하늘이 가르쳐준 대로 꽃 기르고 씨앗 내는 법을 깨쳤다. 온몸으로 배운 천기(天機)를 모든 이에게 누설하며 그는 명장(名匠)이 됐다. 2002년이다.

장형태는 3년 넘게 노동부가 매달 선정하는 기능한국인 39명 중 유일한 농부다. 그가 말했다. "농업은 애시당초 기술이다. 쌀 미(米)자를 보라. 얼마나 많은 기술이 필요하면 여든여덟 번 손이 가야 쌀 한톨이 나온다고 하겠는가."

들판이 좋아서 구례로 갔다

아버지는 묘목업자였다. 경북 영주에서 사과랑 배, 복숭아 묘목을 길러 농가에 팔았다. 사업이 번창했던지라 전북 전주에도 농장을 차리고 전국적으로 묘목을 판매했다. 장형태는 그 아버지를 보고 자랐다.

행동보다 입이 먼저인 자들을 제외하고 사명감은 함부로 생기지 않는다. 장형태는 입보다는 행동이 먼저였다. 훗날 가지게 된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내지는 농업부국(農業富國) 같은 큰 뜻은 전혀 없었다. 고향 영주전문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1975년 육군으로 입대해 광주 상무대에 배치될 때까지는.

"헌병으로 근무했는데, 출장이 잦았다. 그때 구례라는 곳을 처음 가봤다. 와, 산 많은 경상도에 비해 어찌나 들판이 넓은지!"

그 광활하고 기후 좋은 땅에 빠져 이 묘목업자의 아들은 1978년 제대하자마자 구례에 땅 1000평을 사 묘목을 길렀다. 대한종묘원이다. 훗날 "알고 보니 내가 본 들판이 구례에 있는 들판의 전부였더라"고 자백했지만 장형태는 구례 땅에 완전히 매료됐다.

그가 말했다. "고향에서 시작했으면 편했겠지. 하지만 선조 대대로 살아온 땅에서는 그 틀을 깨뜨리기가 굉장히 어렵다. 객지(客地)는 틀 자체가 없으니까 내 맘대로 할 수 있다. 알력? 당연히 있었다. 하지만 어디서나 다 있는 그런 알력이지 다른 건 없었다."

장형태가 구례 종묘원에 있는 흰줄무늬큰갈대밭에 서 있다. 가르쳐준 사람 하나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연구해 성공한 갈대 재배다. 아무도 돌보지 않은 들풀들이 그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 / 구례=김영근 기자 kyg21@chosun.com
키위 묘목을 키웠다

지리산은 가슴이 넓다. 사투리 다르고 산과 무관한 일을 하려는 20대 젊은이는 지리산 생활에 쉽게 적응했다. 적응하다 못해 장형태는 산으로 산으로 포섭되어갔다.

"논농사만으로는 절대 미래가 없더라. 힘만 죽어라고 들어가고 소출이 없으니, 돈 되는 작물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첫 번째 작품이 양다래, 그러니까 키위 묘목이다. 1979년 뉴질랜드 특산인 키위가 대인기를 끌 때였다. 키위는 뉴질랜드 농가가 독점 생산하는 뉴질랜드 특산물이다. 묘목 한 뿌리가 그때 돈으로 6000원 나갔다.

장형태는 한국 토종인 양다래(키위와 그 근원이 같은 식물이다)를 개량해 키위 종묘를 만들어 시장에 내놨다. 판매가는 3500원. 절반 가격에 생존율이 훨씬 높은 이 묘목은 큰 인기를 끌었다.

신이 난 장형태는 이후 10년 동안 각종 묘목을 개발해나갔다. 그런데 "묘목은 10년 지나야 결과가 나오는 불안정한 상품"이라는 결론이 나오더라는 것이다. 어렵게 개발해도 소비자들 입맛이 변해버리면 몇억원어치 묘목도 불쏘시개감으로 생을 마쳐야 하니 그때의 억울함과 비통함이란!

장형태의 손에 황기 씨앗이 놓였다. 하얀 꽃이 지면 그 뿌리는 약으로 쓴다.
애기똥풀을 키웠다

농부가 땅으로 회귀(回歸)했다. 지리산이다. 그가 말했다. "내겐 식물 수집벽(癖)이 있었다. 구례에 정착한 이래 늘 등산을 다녔는데, 등산로에서 들꽃이 보이면 그걸 흙째 채집해 농장에 길렀다."

얼레지, 매발톱, 며느리밑싸개, 애기똥풀, 명아주 기타 등등 지리산자락에 피어나는 들꽃은, 그 당시에는 '이름 없는 들꽃'으로 치부되던 그렇고 그런 잡초들이었다. 특이하게 보이는 야생초들은 어김없이 농장으로 모셔왔다.

모셔온 들풀들은 박제되어 공책 틈으로 가는 대신에 농장 한쪽에 마련된 온실 화분에 뿌리를 내렸다. 장형태가 말했다. "채종(採種)을 하면 본질적인 지식을 얻게 된다. 풀이 사는 곳의 태양, 기후, 바람, 습도, 뿌리 상태, 뿌리가 내린 땅의 토질 그런 요소들을 내 눈과 손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꽃은 소우주(小宇宙)였다. 그 오묘한 세계에 점점 더 빠져들었다."

기화묘초(奇花妙草)가 난난무무하는 세상에서 이름 없는 들풀에 대한 참고서적은 전무했다. 장형태는 그렇게 산에서 채집한 들꽃에 일일이 각주와 미주를 달아 기록을 한 뒤 사진을 찍고 구례 농장에 그 환경을 그대로 재현해 들꽃들을 이주시켰다.

죽은 꽃들보다 살아난 꽃들이 훨씬 많았다. 훗날 헤아려보니 구례 생활 10년 동안 수집한 우리꽃들이 700종이 넘었다. 700종에 대한 자료는 문을 제외한 구례사무실 세 벽면을 가득 채웠다.

매출 100만원을 올렸다

묘목을 포기한 장형태가 말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도시 가로를 채운 조경화들은 다 서양 종자들이었다. 팬지, 메리골드, 사루비아(샐비어) 기타 등등 일년초들을 심어서 다음해에는 또 종자들을 수입해서 심었다. 이게 말이나 될 소리인가. 그래서 우리꽃으로 도시를 조경하면 여러 가지로 좋겠다고 생각했다. 막말로 나는 우리꽃에 대해 당시에는 최고였으니까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약간은 무모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굉장히 무모한 짓이었다. 그 누구가 잡초를 돈 주고 사서 도시 미관을 해치려 들겠는가! 더군다나 산에서 불법채취해 증식한 잡초를. 지리산자생식물연구원을 만들고, 야생화 종자와 종묘를 처음 출하한 1995년도 매출은 100만원을 겨우 넘었다. 아무도 사지 않았다. 전직 묘목업자요 자칭 야생화 전문가는 돈을 까먹어나갔다.

1 금낭화. 2 노란붓꽃. 3 애기달맞이꽃. 4 패랭이꽃.
야생화 문화를 키웠다

그가 말했다. "섬진강변에 심은 매화나무 대부분이 우리 종묘원에서 생산한 묘목들이다. 경남 하동이 원래 매실산지였는데, 지금은 강 건너 전남 광양이 주산지다. 왜? 거기 청매실농원 여주인 홍쌍리가 '돈'이 아니라 '문화'를 만들었기 때문 아닌가. 땀냄새 분분한 사람의 문화가 있기 때문에 매실 하면 광양이고 매화 하면 광양이 되었다. 하동은 그 문화를 외면하고 돈만 생각하다 좌절한 케이스고."

농부 아닌 기업인 장형태가 덧붙였다. "시장이 없으면 만들면 된다. 시장에 끌려가서는 절대로 성공 못 한다." 농부는 야생화 문화 전파에 운명을 걸었다. 자생화동호인을 모아 연구회를 만들었다. 관공서랑 기업, 학교를 찾아다니며 우리꽃을 알렸다. 키 낮은 들풀을 지칭하는 '지피식물 가이드북'을 만들어 펴냈다. 이 책은 지금도 한국 자생식물학계의 교본으로 꼽힌다.

1995년 구례 농장에 7000평짜리 야생화 육묘장을 만들었다. 할미꽃, 구절초, 꽃향유 등 들에서밖에 볼 수 없었던 우리꽃들이 30만 송이나 피어났다. 광주비엔날레, 광주 중외공원에 그냥 꽃들을 보내 심었다.

관광지, 심지어 명산 대찰(大刹) 앞마당까지 점령한 외래종을 거둬들이고 거기 야생화를 보냈다. 논 뒤집어엎으려는 농민들에게 "논을 놀리느니 식물을 심어 지력(地力)을 보존하시라"며 종자 나눠주고 야생화 생산에 끌어들였다.

정부를 규탄했다

"들어간 돈? 생각하지 않는다. 농업이 어디 자고 일어나면 바뀌어 있는 IT산업인가? 길게 봐야지, 길게. 하는 놈이나 정부나."

옛날을 회상하던 장형태가 느닷없이 정부 규탄 모드로 전환했다. "국가 농업연구소들이 성과가 없다고 다 없앤단다. 말이 되나. 한 달 주고 일년 주고 종자를 개발하라고? 그러니 우리 농업이 이 모양으로 결딴났지."

잠시 2010년으로 돌아와 명장과 기능한국인이 된 농부 장형태의 말을 들어본다. "한식 세계화? 웃긴다. 김치 만드는 고추, 배추, 무 이거 몽땅 종자는 외국 종묘회사가 가지고 있다. 농업 헌신짝으로 여길 때 한국 종묘회사들이 허덕대다가 다 팔아버린 거지. 한국 인건비 비싸니까 중국에서 기른 종자 들여와 개수까지 세며 파는 고추 배추 무 씨앗으로 김치 만드는 나라가 돼 버렸다. 그래서 지금 한국종묘라고, 안 팔린 회사가 하나 남아 있는데 그 회사는 '민족종묘'라고 자위하며 버티고 산다."

월드컵, 그리고 성공

불만과 규탄의 씨앗은 이미 젊을 적에 파종됐다. 젊은 장형태는 불만을 생산적으로 풀어나갔다. 금낭화, 붓꽃, 구절초, 범부채 따위 야생화들이 지자체 지원 연구비로 대량생산이 이뤄졌다.

중국 약초 도감인 본초강목(本草綱目)이 유일한 식물분류학 문헌인 이 척박한 야생의 세계에서 장형태는 걸어다니는 야생화 도감으로 성장했다. "내가 배워야 할 지식은 100% 땅이 가르쳐줬다"는 말이 허언(虛言) 같지 않다.

마침내 2002년 "빵 터졌다". 2002년 월드컵 때 서울시가 전역을 야생화로 꾸미기로 한 것이다. 이름 없는 들풀이 그제야 이름을 갖고 그제야 이름을 불러준 그에게로 가서 꽃이 된 것이다.

이후 전국 각지 도시들이 서울을 벤치마킹해 장형태를 찾았다. 야생화에 관한 노하우와 대량생산 능력을 가진 종묘장이는 오로지 장형태밖에 없었고, 지금도 없다. 대한민국 땅에서 인공으로 조성된 야생화 정원은 장형태표 종자라고 보면 대충 옳다.

어깨를 짓누르는 사명감

100만원 갓 넘던 매출은 14년 만에 2009년 25억원으로 2500배 뛰었다. "구례가 아니라 도시 근교에 땅을 샀다면 돈은 더 벌었을지 모르겠지만, 돈도 벌고 사람 살기 좋은 세상 만드는 일은 못 했겠지"라고 했다.

틀림없이 개발 붐 타고 땅 팔아서 거부(巨富)가 되어 떵떵거리며 남몰라라 살고 있을 거라고 했다. 수집벽이 잉태한 일이 어느덧 사명감 가득한 사업으로 변해 어깨를 짓누른다.

그래서 토종식물이 외국 재산으로 등록되기 전에 국가 주도로 뭔가 대책을 내야 한다고 소리치고, 돈 좀 생기면 종자은행(Seed Bank) 만들어서 종자 전쟁에서 승리하겠노라 작전을 짠다.

"4대강 사업 다 좋은데, 왜 생태 전문가들 미리 참여 안 시켜서 희귀종 대책 없이 말썽을 피우냐"고 힐난도 한다. 온 세계 돌아다니면서 문익점처럼 지갑에 넣고 들어와 품종 개량 중인 외국 종자도 수천 종이다. "토종과 교배해서 새 품종 나오면 그건 대한민국 재산"이라고 자신만만이다.

나이 47세 되던 2001년 장형태는 호남대 환경원예학과에 입학했다. 지금은 단국대 환경조경학 박사과정에 있다. 2녀1남 가운데 아들 승일(28)은 아버지로부터 모진 기합 받아가며 구례 농장에서 일하고 있다.

아버지는 "대를 잇겠다고 한 건 그 친구지 내가 강요한 적은 절대로 없다"고 강변했다. "보아하니 나보다 훨씬 나은 놈이 될 거 같다"는 팔불출(八不出)적인 자랑도 빼놓지 않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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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메발톱>

<창포>

<초롱꽃>

학명
Campanula punctata
분류
현화식물문 > 쌍떡잎식물강 > 초롱꽃목 > 초롱꽃과
형태
여러해살이풀
자생지
산지의 풀밭
분포지
한국, 일본, 중국
원산지
한국
크기
40~100cm
꽃말
감사
꽃색깔
흰색옅은 붉은색을 띤 자주색
개화시기
6~8월
개화계절
여름

높이 40~100cm이고 전체에 퍼진 털이 있으며 옅으로 뻗는 가지가 있다. 뿌리잎은 달걀상 심장모양으로 잎자루가 길고 줄기잎은 어긋나며 삼각상 달걀모양으로 가장자리에 불규칙한 거치가 있으며 날개가 잎자루에 날개가 있거나 없다. 꽃은 6~8월에 피며 흰색 또는 옅은 붉은색을 띤 자주색의 바탕에 붉은색을 띤 보라색의 반점이 있고 종모양으로 긴 꽃자루의 끝부분에 밑을 향해 달린다. 꽃받침은 털이 있고 5개로 갈라지며 갈라진 조각 사이에 뒤로 젖혀지는 부속체가 있다. 수술은 5개이고 암술은 1개이다. 열매는 삭과로 8~9월에 익으며 거꾸로 된 달걀모양이다.
다년생 초본으로 원산지는 한국이고 한국, 일본, 중국 등에 분포하며 산지의 풀밭에서 서식한다.

출처: Naver 식물정보

<패랭이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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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노회찬과 진보신당에게 돌을 던지나

[주장] 보수양당체제 넘어야 사회는 변화하고 진보하는 것

 

우선 오해를 피하기 위해 밝혀둬야 할 것이 있다. 필자는 민주노동당 당원이다. 그리고 이런 얘기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개인적으로 노회찬 후보에게 그다지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은 편이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MB정부 심판을 전면에 내걸고 민주당 후보들이 곳곳에서 당선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서울에서 한명숙 후보가 박빙의 차이로 낙선한 것에 대해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한명숙 패배 아쉬움 속에 진보신당 게시판 '시끌'

지금 진보신당 게시판은 외부 방문객들의 글폭풍으로 난리다. 한나라당 2중대, 노회창(노회찬과 이회창의 합성어) 등의 용어가 난무하고 있다. 한마디로 진보신당 노회찬 때문에 민주당 한명숙이 떨어지고 한나라당 오세훈이 당선됐다는 것이다.

실제 노회찬이 얻은 3,2%의 14만 3천여 표는 한명숙이 당선에 모자란 2만 5천여 표를 훨씬 상회하는 수치이고, 정치적 성향으로 보았을 때 노회찬 후보가 사퇴를 했다면 상당수가 한명숙의 지지표로 옮겨 갔을 것이다.

게다가 노회찬의 완주는 같은 당 소속 심상정의 후보 사퇴와 맞물려 더욱 주목(?)받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서울시에서 MB정부 심판이라는 '대의명분'을 거스른 진보신당과 노회찬은 졸지에 역적으로 몰리고 있다.

물론 최후까지 피 말리는 접전을 펼치다가 정말 간발의 차이로 고배를 마신 한명숙 후보를 지지했던 분들의 그 애타는 마음을 무엇에 비할 수 있을까. 서울에서도 민심은 MB정부와 한나라당의 역주행에 확실한 경고장을 보여주기를 원했고, 한명숙 후보가 당선됐다면 그것보다 더 확실한 경고장은 없었을 것이다. 그 절절한 안타까움이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로, 진보신당 노회찬 후보 1인에게 집중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손에 들고 있는 돌을 노회찬 후보 1인에게 던지기 전에 한 가지는 꼭 고려했으면 좋겠다. 노회찬 후보는 1인이지만 그에게 투표한 서울시민은 14만3천명을 넘는다는 사실이다. 물론 한명숙 후보에게 투표한 205만9천여 명에는 크게 못 미치지만, 분명 단순히 노회찬 1인과 그를 지지한 14만3천여 명은 그 무게감이 다르다.

 

노회찬 지지한 14만3천표는 정말 사표인가

  
노회찬 진보신당 서울시장 후보가 1일 저녁 서울 명동입구에서 마지막 선거유세를 하며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 권우성
노회찬

그러면 이 14만3천여 명이 노회찬을 지지한 이유는 무엇일까? MB정부 심판을 방해하고 오세훈을 당선시키겠다는 굳은 결의로 노회찬을 지지했을까? 진보신당의 노회찬 후보에게 돌을 던지기 전에 이 14만3천여 명의 고민에 대해 진심으로 이해하려고 생각해 본 적은 있는지 묻고 싶다.

진보신당 노회찬에게 투표한 14만3천여 명이 MB정부 심판을 방해하고 오세훈을 당선시키겠다는 일념으로 투표장에 나서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노회찬을 지지한 14만3천여 명 대부분은 그 누구보다도 더 가열차게 MB정부의 미국산 광우병 위험 소고기 수입에 반대하고 4대강 삽질에 분노하며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것에 분노하는 사람들일 게다.

하지만 그들은 MB정부의 그런 작태들에만 분노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미국산 광우병 위험 소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만큼 노무현 정부의 한미FTA 추진에 반대했고, 4대강 삽질에 반대하는 만큼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부역하는 노무현 정부의 이라크 파병에 반대했으며,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대량해고에 슬퍼하는 만큼 노무현 정부 때 경찰에 맞아 사망한 두 농민의 억울한 죽음에 슬퍼했다.

그렇다. 진보신당 노회찬을 지지한 14만3천여 명은 MB정부 심판이라는 다른 이의 '대의명분'이 아닌 보수양당체제 심판이라는 자신들의 '대의명분'으로 노회찬을 지지한 것이다. 설사 한나라당의 오세훈이 당선되는 한이 있더라도 '보수양당체제'를 심판해야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진보할 수 있고 희망찬 미래가 가능하다는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 것이다.

14만3천여 명의 씨앗, 우리 사회 진보 위한 밑거름

현재 전 세계는 기존의 보수양당체제가 무너지는 양상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일본에서는 자민당 정권이 몰락한 데 이어 민주당 정권마저 지지율이 바닥을 치며 하토야마 총리가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영국에서도 최근 총선에서 보수당과 노동당 양당체제가 균열이 일어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진작 보수양당체제가 무너진 중남미에서는 진보정권들이 도미노처럼 당선되어서 무상의료 무상교육의 진보세상을 열어가고 있다. 전 세계 곳곳에서 민중들이 기존의 정치구조로는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기존의 구태의연한 양자택일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선택을 할 때 사회는 변화하고 진보하는 것이다.

진보신당과 노회찬 1인에게, 아니 '보수양당체제'를 끝장내야 우리에게 더 나은 미래가 가능하다고 믿는 14만3천여 명에게 과연 돌을 던질 수 있는가? 당신이 든 그 돌이 진정 다양한 의견을 품을 수 있는 '민주주의'를 위한 돌인지 묻고 싶다. 단순히 보수양당 중 다른 쪽을 지지해 주는 것이 MB정부 심판의 모든 것은 아닐 테다. 오히려 '보수양당체제'를 거부하고 새로운 미래에 투자한 저 14만3천여 명의 씨앗이 오히려 우리 사회의 진보를 위한 진정한 밑거름이 될 수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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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pecial 인터뷰] 고추상추 키우는 재미, 톱 스타의 소박한 삶 하춘화 [중앙일보]

 
MB·전·YS-이희호·권양숙 여사, 내 공연 초청해 어울리게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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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오전 서울 청계산 밑자락의 주말농장. 청바지 차림에 호미를 든 50대 여인이 나타났다. 생기 있게 밭을 누비는 그는 가수 하춘화(55)였다. ‘무대의 여왕’으로 불리는 그는 6세에 데뷔해 내년이면 마이크를 잡은 지 50년이 된다. 세상은 그를 ‘화려한 조명’과 함께 기억한다. 그러나 ‘인간 하춘화’의 삶은 소박했다. 오전 5시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결혼 15년째 남편(61)의 아침상을 직접 차린다.

아파트의 11년 이웃인 유영희(60·여)씨의 귀띔이다. “흔한 명품백 한번 들지 않아요. 종이 한 장 허투루 버리는 것도 못 봤어요.” 그의 질박한 삶과 ‘도시 농사꾼’으로의 변신은 애초부터 맞닿아 있던 걸까. 밭 한편에서 잔치국수 한 그릇을 나누며 농부를 꿈꾸는 톱스타의 속내를 들어봤다.

글=이진주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하춘화는 5년 전 앞집의 의사 부부에게서 상추 한 봉지를 받았다. 밭에서 방금 따온 것이었다. “잎이 아기 속살처럼 보드랍고 향기로웠어요.” 그는 케이크로 화답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채소와 답례가 오가길 몇 번, 하춘화는 작정했다. 올봄 청계산 주말농장에 10만원을 내고 9.9㎡(3평)짜리 밭을 분양받은 것이다. 첫 농사에 상추·열무·치커리와 고추·가지·방울토마토까지 심었다.

● 유기농 채소라면 사다 먹어도 될 텐데요.

“제 이름이 춘화(春花)잖아요. 원래 식물을 좋아했어요. 식단도 채소와 과일 위주고요. 친정 어머니가 채식주의자예요. 와인 애호가들이 맛을 잘 구분하듯 저도 ‘풀맛’은 좀 알죠. 직접 키워보고 싶은 욕심이 컸어요.”

● 드레스만 입을 것 같은데 상상이 잘 안 됩니다.

“이 나이에 제 별명이 공주라데요? 저도 처음엔 엄두가 안 났어요. 그런데 쉰다섯 살이 되니 하고 싶은 일은 미루면 안 되겠더라고요. 남편이 경기도 일산에서 자라 농사를 잘 알아요. 제 과외 선생님이죠.”

정말 그랬다. “뿌리가 상하지 않게 조심해서 돌리듯 따요.” “흙까지 젖도록 물은 충분히 주고….” 남편이 속삭이듯 훈수를 뒀다. 그는 얼마 전까지 모 지상파 방송국의 행정부서 간부였다. 최근 장인 하종오(90)옹의 육영사업을 물려받았다. 남편을 만난 건 16년 전. 같은 방송국에 다니던 언니의 친구가 소개했다. 별명이 ‘영국 신사’라더니 너무 숫기가 없었다. 프로듀서(PD)였던 언니 친구가 남편을 대신해 하춘화가 좋아하는 ‘흑장미 백송이’를 보냈다. 그게 프러포즈였다.

● 옆에서 보니 마치 아이를 다루듯 농작물을 매만집니다.

하춘화가 마이크 대신 호미를 들고 농장에 섰다. 청바지가 화려한 드레스를 대신했고, 따뜻한 봄 햇살은 무대 조명이 됐다.
“남편이 더 열심이에요. 농작물을 ‘얘네들’이라고 부를 정도니까요. 집에서도 눈앞에 아른거린대요. 곧 전원주택을 짓고 마당 있는 집에서 살기로 했어요. 경기도 양평이나 파주로 가려고요. 저는 원래 도시를 더 좋아했는데, 요즘 자꾸 마음이 흔들려요. 정원에서 제가 좋아하는 부추나 쑥갓도 키워보고 싶고요. 막상 밭일을 해보니 얼마나 신기하고 재미있는지 몰라요. 며칠 전엔 처음으로 상추를 뜯어다 먹었어요. 딸 때는 너무 예쁘고 아까워 손까지 떨리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그에겐 아이가 없다. 아주 없었던 건 아니었다. 신혼 무렵 한 생명이 잠시 머물다 갔다. 결혼 생활과 빡빡한 공연 스케줄, 다시 시작한 공부까지 모든 것을 움켜쥐고 뛰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그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임신한 줄도 몰랐다. 조직검사를 하고서야 유산이란 걸 알았다. 그 뒤로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 “화려한 무대에서 내려와 여자로 돌아오는 밤이면, 잃어버린 아이에 대한 회한이 뼈에 사무쳤지요.” 그런 그를 지탱한 건 노래였다.

● 아이 때문에 많이 힘드셨겠군요.

“집착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죠. 사실은 2년 전까지 시험관 시술을 받았어요. 제가 올해로 쉰 다섯인데, 쉰 셋이 되도록 포기를 못했던 거죠. 너무나 아이를 원했고, 간절히 기도하면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안 되더라고요.”

그의 눈에도, 목소리에도 물기가 어렸다. 꾸미기 어려운 게 목소리다. 국수 그릇 사이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 어릴 때 세례를 받았다는데 신을 원망하진 않았나요.

“처음엔 그랬어요. 영화 ‘밀양’의 전도연씨처럼 가슴을 치며 신께 대들기도 했죠. 그런데 생각해보니, 저는 참 많이 받은 사람이었어요. 노래만이 아니고요. 그런데 딱 한 가지, 아기만 안 주신 거예요. 죽을 만큼 애썼는데 안 된다면 뭔가 뜻이 있겠죠. 작고한 코미디언 이주일씨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다 키워서 잃었어요. 그때도 제 일처럼 울었지요. 주었다 도로 거두는 뜻은 또 뭔지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 그리 간절했다면 입양은 생각 안 했나요.

“아이를 얻을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연구했어요. 그런데 인연이 안 되더라고요. 어느 분이 보다 못해 말했지요. 꼭 ‘내 자식’으로 키울 생각하지 말고, 멀리서 많은 아이들을 도와주라고요. 보육시설에 있는 아이들처럼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 말이에요. 사실 제가 ‘제자와 후배, 아이들’ 복이 많아요. 큰언니네 조카 둘은 ‘하춘화에게 애가 있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애지중지 키웠고요. 그럼 된 거죠.”

배로 낳은 자식은 없지만 유쾌한 밭농사처럼 그는 늘 씩씩하다. ‘마음의 자식’을 낳을 준비에 더욱 그랬다. “제 모든 걸 쏟아부어 하춘화 음악학교를 만들 겁니다. 미국의 줄리아드같이 이름을 날리는 음악학교를 세우는 게 꿈이에요. 우리 대중음악이 더 귀하게 평가받는 토대가 됐으면 좋겠어요. 조만간 선보일 거예요.”

● 가수 해서 번 돈으로 학교를 세우면 무엇이 남을까요.

“내 인생이 행복해지는 거죠. 참 잘 살았다는 행복감.”

● 그만하면 편하게 살아도 될 텐데, 모범생 숙제하듯 살아온 삶이 억울하진 않나요.

“하루의 일이 밀리면 평생의 삶이 늦춰져요. 모든 것이 무너지죠. 단 한 번도 발 뻗고 누워서 쉬어본 일이 없지만, 그게 편해요.”

그런 열정에 박사 학위도 취득했나 보다. 하춘화는 2006년 성균관대에서 예술철학 박사를 땄다. 네 자매 중 그를 포함해 셋이 박사다.

● 가족들 성격이 모두 비슷한가요.

“네 자매 중 제가 아버지를 빼닮았어요. 아버지는 77세일 때 제 인터넷 홈페이지를 직접 만들어 주셨어요. 구순인 지금까지도 손수 관리할 정도로 철저하고요. 아버지가 녹화한 테이프와 신문·잡지 스크랩만도 가요사 80년의 절반을 아우르는 방대한 분량이에요.”

● 그중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들려주세요.

“동양방송(TBC) 시절 ‘방송가요대상’ 내부 규정을 깨고 4회 연속으로 ‘여자 가수상’을 받았어요. ‘다른 여가수를 압도하는 득표수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취지의 심사평이 발표될 정도였죠. TBC 소유의 ‘연포 해수욕장’은 당대 최고의 휴양지였는데, 제 노래 ‘연포 아가씨’가 종일 흘러 나왔대요. 아버지가 모은 역사적인 방송 자료들은 중앙일보가 새 방송을 시작하면 기증할 생각이에요.”

● 스캔들 한번이 없었습니다.

7세 때의 하춘화
“아버지 가르침이 엄격했어요. 본격적으로 인기를 얻은 16세 때부터 기부를 시작한 것도 그래요. 아버지는 대중의 사랑만 훔치는 ‘딴따라’가 아니라, 그걸 사회에 돌려주는 ‘문화예술인’이 되라고 늘 강조하셨죠.”

실제 하춘화는 의미 있는 공연마다 기부에 적극 나섰다. 1974년 첫 ‘리사이틀’을 연 뒤엔 안양의 나환자 자녀들에게 당시 돈으로 500만원을 건넸다. 서울의 330.6㎡(100평)짜리 집 한 채가 200만원일 때였다. 2006년에 열린 가수 데뷔 45주년 공연의 무대 수익금 1억5000만원은 서울시 환경미화원 자녀들에게 전달했다. 내년 설쯤 무대에 올릴 50주년 행사도 사회봉사공연으로 꾸밀 계획이다.

어느새 국수 그릇을 비운 하춘화가 다시 상추를 다듬었다. 마치 밭에 심은 작물들에게 들으라는 듯, 아기들을 어르듯 그가 호미를 들고 한 곡조 뽑았다. “사랑이 야속하더라~, 가는 당신이 무정하더라~.” 옆에서 남편이 채워준 물뿌리개를 받아 고루 물도 줬다. “아, 열무 싹 예쁜 거 봐요” “다음 주엔 토마토 지지대 세워야겠네.” “고추는 언제 열리지?” 즐거운 인생, 소녀가 따로 없었다.

j 칵테일 >> ‘대통령과 나’
하춘화는 6명의 대통령과 인연이 있다. 무대를 50년간 주름잡은 여왕답다. 1970년대 전성기에 그를 ‘보배’라고 부르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언젠가 공연이 끝나고 메모지를 내밀었다고 한다. “‘강원도 아리랑’ 노래를 좋아하는데 도대체 어디서 숨을 쉬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하소연이었다. “대통령이 일개 유행가 때문에 고민하는 모습이 마냥 신기했지요.” 85년 일본에서 활동할 무렵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귀국하라”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뜻이 전해져 왔다. 분단 40년에 치러지는 ‘남북 예술인 교환공연’에 여가수 대표로 평양 무대에 서라는 전갈이었다. 전 대통령은 하춘화의 노래 중 ‘영암 아리랑’과 ‘무죄’를 가장 좋아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애창곡은 알려진 대로 ‘베사메무초’다. 하춘화는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듀엣으로 이 노래를 불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하씨의 노래에 관심이 없었다. 공연 초대장을 들고 청와대를 찾아가자 거절하면서 한마디 했다. “나는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데.”

서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야인’ 시절 처음 만났다.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집필하던 김 전 대통령이 하씨의 공연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자신의 노래는 아니었지만 ‘목포의 눈물’을 신청하기에 진심을 다해 불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만난 적이 없다.

이명박 대통령은 서울시장 재직 때 알게 됐다. 2006년 45주년 공연이 끝난 뒤 시장실에서 환경미화원 노조위원장에게 성금 1억5000만원을 전달하자, 당시 이 시장은 “하춘화의 팬이 되겠다”며 고마워했다. “전직 대통령과 이희호·권양숙 여사, 이명박 대통령을 모두 공연에 초대해 미움을 풀고 한데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내년 데뷔 50주년을 맞는 하춘화의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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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금이요?"… "아니, 뇌물이요"

'대한민국 사진大展' 대상 3000만원, 우수상 1500만원, 특선 700만원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대한민국 사진대전' 등에서 상(賞)을 주는 대가로 수억원을 챙긴 혐의로 한국사진작가협회 사무처장 김모(55)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밝혔다. 조선닷컴 5월 13일

2008년 5월 1일 저녁 서울 강북구 번동의 모텔. 바닥에 그림엽서만 한 사진 30여장이 뒤섞여 있었다. 작가협회 사무처장 김씨가 백발이 성성한 심사위원 4명에게 물었다. "아까 말한 대상(大賞) 작품이 어느 것이지요?"

한 심사위원이 대장간 풍경이 담긴 사진을 가리켰다. 김씨는 환하게 웃으며 "맞다"고 했다. 그는 다른 심사위원에게 "이번엔 특선작 잡아보세요"라고 물었다. '수상작 고르기 게임'은 한동안 계속됐다.

심사위원 대부분이 70세 안팎이다 보니 사진을 미리 보여주고 수상 등급을 외우게 하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심사위원이 엉뚱한 작품을 고르면 김씨는 "이 사진은 특선이지, 입선이 아니다"라고 주의를 줬다.

'특별교육'을 마친 김씨는 "내일은 절대 실수하면 안 된다"며 "잘 모르겠으면 협회 여직원을 잘 지켜보라"고 한 뒤 모텔을 떠났다. 다음날 오후 '대한민국 사진대전' 심사가 종로구 동숭동 예총회관에서 열렸다.

전시실은 사진작가협회 소속 회원들과 전국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이 응모한 1200여점의 사진들로 가득 찼다. 7명의 심사위원들이 출품작을 둘러보며 1차 통과 작품을 추려내고 있다.

모텔방에서 본 낯익은 사진이 보이면 심사위원들은 "음, 여기 괜찮은 게 있군"이라는 찬사와 함께 '컷오프'를 통과시켰다. 이어 실시간 채점을 하면서 진행되는 2차 심사가 열렸다.

2008년 대한민국사진대전 대상을 수상한 ‘협동’이라는 작품(부분). 뇌물 3000만원을 챙긴 협회 간부와 모텔방에서 은밀한 교육을 받은 심사위원들 그리고 심사장에서 몸짓으로 사인을 준 여직원의 ‘협동’으로 대상을 받았다. / 연합뉴스

칸막이가 설치된 개별 심사위원석의 위원 7명이 전시대에 차례로 올라오는 사진을 보고 점수를 매겨 합산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런데 심사위원들 눈길은 사진보다 전시대 옆 책상에 앉아 있는 여성에게 쏠려 있었다. 채점 끝난 사진을 전시대에서 가져와 뒷면에 점수를 적는 게 그녀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책상에서 일어서기만 하면 전시대에 오른 작품의 점수가 솟구쳤다. 심사위원마다 10점 만점 등 후한 점수를 줬다.

반면 그녀가 계속 앉아 있는 가운데 전시대에 오른 작품은 아무리 좋아 보여도 낮은 점수가 주어졌다. 지금 전시된 사진이 '모텔방 작품'임을 심사위원에게 다시 한번 환기시켜주는 게 그녀의 '진짜 업무'였다.

이렇게 선정된 사진들이 '대한민국 사진대전'에서 각종 상을 휩쓸었다. 김씨는 사진대전이 열리기 한 달 전쯤 대학로 카페에서 사진작가 진모(63)씨로부터 '대상'으로 뽑아달라는 청탁과 함께 3000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남의 사진으로 특선에 입상한 작가협회 회원도 있다. 전모씨는 "난 누드사진밖에 없는데 상을 받고 싶다"고 부탁했더니, 사무처장 김씨는 "사진대전에 누드는 안 된다"며 어디선가 사진 한점을 구해와 출품하라고 시켰다.

이 작품도 모텔방을 거쳐 특선에 뽑혔고 그 대가로 750만원이 오갔다. 경찰은 "일부 작품은 포토샵 처리가 심했고 합성 흔적까지 있지만 그런 건 당락과 관련 없고 오로지 김씨에게 준 돈에 따라 수상작이 결정됐다"고 했다.

도대체 사무처장인 김씨가 어떤 인물이기에 고령의 심사위원들이 꼼짝도 못했을까. 김씨는 원래 사진과 아무 인연이 없는 공기업 직원이었다. 불명확한 사유로 퇴직한 뒤 사진작가협회에 들어와 17년간 근무했다.

협회 이사장은 3년을 마치면 물러나기 때문에 진짜 실세는 임기가 따로 없는 사무처장 김씨라는 것이다. 현재 이사장 윤모씨도 선출 과정에서 김씨에게 2000만원의 뇌물을 줬다고 한다.

김씨는 회원 6800명을 둔 단체가 주최하는 각종 사진전을 기획했고 행사도 총괄해왔다. 사진작가들이 학원 차리고 출강하려면 유명 대회 심사위원을 역임해야 하는데 김씨의 눈 밖에 나면 심사위원 되기가 힘들다고 한다.

그래서 김씨가 고르는 작품을 밀어줄 수밖에 없다는 게 심사위원들의 변명이었다. 경찰은 "실력·덕망과 무관한 일부 심사위원의 경우 눈이 침침하고 귀가 어둡거나 기력이 부족해 심사장에 앉아 있기도 힘들어 했다"고 말했다.

김씨에게 돈을 준 작가들도 똑같았다. 사진 찍는다고 우쭐대고 싶은데 실력은 모자라고 돈은 있다 보니 대상(3000만원) 우수상(1500만원) 특선(700만원) 입선(100만~300만원) 등급에 맞춰 김씨에게 뇌물을 바쳤다.

입건된 한 작가는 "언제 그런 상 타보겠냐. 돈이 아깝지 않았다"라고 진술했다. 경찰은 이런 방식으로 최근 3년간 김씨가 받은 돈이 4억원 정도 된다고 밝혔다.

더 큰 문제는 사진대전만 복마전(伏魔殿)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달 28일 서울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는 돈을 주고 산 남의 그림을 출품해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에 입상한 재미교포 김모씨를 불구속 입건했다.

김씨는 재작년 12월 2000만원을 주고 구입한 화가 조모씨의 한국화를 출품시켜 대상 후보작까지 올랐고 결국 특선에 입상했다. 김씨는 지금까지 남의 그림으로 각종 미술대회에서 8차례나 상을 탄 것으로 조사됐다.

대학 졸업장이 없는 김씨는 자기 그림으로 번번이 낙선하자 남의 그림을 출품했다. 김씨에게 그림을 판매한 일부 화가 중에는 한국미술협회 이사도 있는데 이들은 김씨가 상을 받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사진대전 비리에 등장한 '모텔방 합숙'은 3년 전 미술대전 비리사건을 모방한 것이었다. 다른 게 있다면 사진대전 심사위원들은 강북구 번동 모텔을, 미술대전 심사위원들은 서초구 서초동 모텔을 이용한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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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로] '내 아버지의 헛소리'

이철민 <조선비즈> 디지털뉴스부장

이번 주 뉴욕타임스의 논픽션(non- fiction) 베스트셀러 목록 6위에는 재미있는 책이 올랐다. 올가을부터 미국 CBS 방송의 시트콤으로도 제작돼 매주 목요일 방영될 예정이다.

점잖게 번역하자면, 이 책의 제목은 '내 아버지의 헛소리'. 그러나 CBS측은 차마 드라마 제목에 's'로 시작하는 욕설을 쓸 수 없어서, 온통 부호($#*! My Dad Says)로 처리했다. 그리고 이 드라마 제목을 읽을 때는 첫 단어를 '블립(bleep·부적절한 어구를 삭제하는 전자음 '삑'을 의미)'으로 읽기로 했다고 밝혔다.

1년 전 여자친구와 헤어져 부모 집으로 돌아온 한 29세의 아들은 이 책에 74세의 전직 의사 아버지가 일상에서 쏟아내는 욕설이 섞인 생활 경구(警句)를 여과 없이 담았다. 이전까지 자신이 만든 TV 쇼에 대본 한번 써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이 아들은 작년 8월 친구의 권유로 '욕쟁이' 아버지가 쏟아낸 위트(wit)를 140자로 한정된 트위터에 옮겨 적기 시작하면서, 불과 수개월 사이에 트위터 스타가 됐다. 트위터에서 그의 아버지의 욕설(辱說)을 접하려고 팔로워(follower)로 등록한 사람이 무려 135만명에 달한다. 지금까지 게재된 트윗(tweet)은 119건. 물론 온갖 욕이 하도 많이 뒤섞여 있어서, 그대로 옮길 수 있는 것이 드물 정도다.

그의 아버지가 한 이야기를 최대한 순화(純化)해서 옮기자면, 이런 식이다. "휴대폰 자랑 좀 그만 해라. 네가 만든 거냐? 산 거잖아." "140억년 된 우주에서 해마다 새해를 기념한다는 것은, 소변볼 때마다 퍼레이드하는 꼴 아닐까?" "엄마가 전화하면, 나는 화장실에 있다고 해라. 결혼이란 그런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긴 하다만…" "저런, 우리가 먹을 시리얼(cereal)이 다 떨어졌네. 미안, '네가 먹을 것'이 떨어졌네. 남은 건 내꺼다" "성(聖)밸런타인데이? 그가 누군지는 모르겠다만, 사람들이 자기를 생각하며 이 따위로 놀기를 원했을까?"….

아들이 책이 발간됐다고 말했을 때, 그 아버지의 반응은 이랬다. "뭐, 네가 이제 저자(著者)가 됐다고? 인터넷에선 어떤 머저리도 아무 헛소리든 쓸 수 있다더니…" "네 엄마가 네 책을 35권이나 주문했더구나. 난 돈 내고 살 생각 없다. 내건 공짜다."

누구든 스스로가 매체가 될 수 있다는 인터넷에서도, 트위터에 쓴 글들이 결국 미 3대 공중파 방송 중 하나의 프라임 타임 드라마로 진출하게 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사람들은 이런 매우 일상적인 일들에 왜 이렇게 열광하는 것일까. 그의 트위터에 한 사람은 "내 아버지가 우리 사회의 '정상적인 멤버'라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썼다. 미국인들은 이 아버지의 가식(假飾) 없으면서도 위트가 넘치는 글에 열광했다. 그러나 트위터가 없었어도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내 아버지의 헛소리'가 1년 새 트위터에서 책을 거쳐 TV 드라마로 진출하기까지, 연령의 장벽은 전혀 없었다. 이 디지털 사회에선 대중의 인기도 과거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방식으로, 너무 다른 대상으로 모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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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왕산 鶴학巢소島도에서 최범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