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BIZ] '빛과 콘크리트의 건축가' 안도 다다오, 반전 드라마

건축을 뒤집다, 인생을 뒤집다
예술혼으로 똘똘 뭉친 게릴라… "도전, 또 도전만이 창조를 낳는다"
'빛'이 된 삶…프로 복서의 고단한 생활에서 독학으로 건축공부, 틀을 깨다
'콘크리트' 같은 집념…공모전 연전연패에도 포기안해"실패가 나를 단련시켰다" 도전

그는 오사카(大阪) 변두리 출신의 권투선수였다. 열일곱 나이에 프로복싱에 뛰어들어, 대전료를 받아 생계에 보탰다. 함께 사는 가족이라고는 외할머니밖에 없는 결손 가정의 청년에게 권투는 희망이었다. 한 경기 3회전에서 4회전, 6회전까지 점점 실력이 늘어갔다. 언젠가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두르리라는 꿈도 커져갔다.

하지만 최고와의 수준 차이를 절감하는 순간, 모든 희망이 날아가 버렸다. 권투에 입문한 지 2년 만이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회상했다. "당대 최고 복서의 스파링을 보고 기가 질려버렸다. 스피드, 파워, 회복력… 나와는 차원이 달랐다. 나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글러브를 벗고 취직을 했다. 공고를 졸업한 스무살 청년에게 주어진 일자리는 별볼일이 없었다. 불 같은 성미에 답답한 회사 생활을 견디지 못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뭘까.' 며칠 밤낮을 고민하다 집 짓는 일이 떠올랐다. 어려서부터 동네 목공소는 그의 놀이터였다. 문득 목수가 외할머니집 지붕에 만들어 준 창문을 통해 쏟아지던 새하얀 빛과 창문 너머로 펼쳐진 파란 하늘이 떠올랐다.

안도 다다오. /블룸버그

'빛과 콘크리트의 예술가'로 유명한 일본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安藤忠雄)의 인생 드라마는 이렇게 시작한다. 1960년대 초반 뒤늦게 건축업에 뛰어든 그는 건축에 대한 모든 것을 현장에서 독학으로 익혔다. 동네 가게의 인테리어나 가구를 만드는 일로 기초를 닦았고, 유명 건축가의 책을 닳도록 반복해 읽었다. 도면 하나하나를 베껴 그리기도 했다. 스물네살 되던 해에는 전 세계를 유랑하며 유명 건축가들의 작품을 둘러봤다.

이렇게 성장한 그는 1970년대 중반부터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노출 콘크리트 기법(외장재 없이 건물의 콘크리트벽을 그대로 드러냄)과, 실내에서 자연광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건물이 자연환경과 지역적 특색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하는 신선한 건축 양식을 내세워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그만의 독특한 건축 설계에 반대하는 정부 규제 당국이나 건축주와 잦은 승강이를 벌이면서 '투쟁하는 건축가'라는 이름도 얻었다. 1969년부터 최근까지 그가 휩쓴 세계적 건축상은 150여개. 그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건축가 중 한 사람이다.

Weekly BIZ는 지난 9일 그를 만나기 위해 오사카 시내 우메다(梅田) 인근의 '안도다다오건축연구소'를 찾았다. 낡은 서민형 주택들 사이에 자리 잡은, 콘크리트 원통을 세로로 잘라놓은 것 같은 건물. 불과 100㎡(30평) 남짓한 대지에 5층으로 쌓아올린 건물은 사방 벽면에 빽빽이 꽂혀 있는 책들이 점령했다.

이렇게 좁은데도 건물의 3분의 1쯤은 1층부터 5층까지 천장이 뻥 뚫려 쭉 이어져 있는 구조다. 그 밑바닥에 안도 다다오의 책상이 있다. 이 툭 터진 공간을 통해 건물 전체가 완전히 통해 있다. 목소리를 조금만 높이면 1층에 있는 사람이 4층에 있는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오사카 외곽 이바라키(茨木)에 위치한 빛의 교회. 안도 다다오의 1990년 작품이다. /안도다다오건축연구소 제공

뒤따라 올라온 안도 다다오는 인터뷰가 무척 익숙해 보였다. "어디서 왔느냐" "이번 인터뷰의 주제가 뭐냐"며 역(逆)질문공세를 펼쳤다. 유심히 보니 그의 모습은 귀와 이마를 완전히 덮는 덥수룩한 머리에, 셔츠 위에 헐렁한 재킷을 걸친 것까지 평소 사진에서 보던 것과 똑같았다. 외모에 신경 쓰는 시간이 아까워 똑같은 옷, 똑같은 헤어스타일을 고집한다는 한 물리학자의 얘기가 생각났다.

안도 다다오의 사무실 구조는 자신의 일하는 철학과 조직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일례로 그의 책상은 건물 출입구 바로 앞에 있어서 직원 중 누가 외출을 하고, 어떤 손님이 찾아오는지를 모두 알 수 있다.

30여명의 스태프는 따로 업무용 전화가 없다. 5대의 공용 전화가 있는데, 모두 안도 다다오의 책상 위에 있다. 전화를 걸거나 받으려면 안도 다다오가 지켜보는 앞에서 해야 한다. 한 직원은 "가끔 전화 통화가 길어지면 안도씨가 전화기를 빼앗아 들고 직접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사무실 안에서는 개인적인 이메일이나 인터넷, 휴대폰 사용도 제한된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갤러리 레스토랑‘글라스 하우스’. 제주 서귀포시‘휘닉스 아일랜드’리조트 내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해변 언덕에 있다. 인간과 자연, 공간의 조화점을 찾는 안도 다다오의 건축 양식이 잘 드러나 있다. /휘닉스아일랜드 제공

■나는 게릴라다

―직원들 입장에서는 답답할 것 같은데, 왜 이런 식으로 사무실을 운영하시나요.

"저 역시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직원들에게 노출되어 있으니까 사무실이 팍팍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창조적 예술가 조직으로서 계속 기능하려면 이런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저 나름의 생각은, 우리처럼 창조하는 조직은 '게릴라 집단'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지휘관 한 사람과 그의 명령을 따르는 병사로 이뤄진 군대 같은 조직이 아니라, 공통된 이상을 내걸고, 신념과 책임감을 가진 개인 하나하나가 목숨을 걸고 움직이는 게릴라 집단 말이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저와 스태프들 사이에 인식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서로 혼(魂)이 통해야 한달까요. 저는 우리 조직뿐만 아니라 구성원 개개인도 게릴라처럼 행동하기를 요구합니다. 자기 혼자 힘으로 정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신속하게 실행하며, 돌발사태에도 냉정하게 대처할 수 있는 유연한 사고 같은 것 말이죠."

개인이 조직의 일부로 기능하는 것이 군대다. 일본과 한국의 회사 조직도 대부분 비슷하다. 그래서 회사가 크면 클수록 개인이 부품화되기 쉽다. 안도 다다오는 자신의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의식을 가진 게릴라처럼 움직이기를 바랐다.

―그래도 인터넷이나 이메일 정도는 해도 되지 않나요.

"해도 됩니다. 하지만 최대한 절제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이나 이메일을 하다 보면 여기저기서 자꾸 연락이 와 시간을 뺏기게 되죠. 제가 우리 스태프들에게 자주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반드시 자기 의견을 확실하게 이야기하고, 또 듣자는 것이죠. 그래서 서로의 의견을 확실하게 이해하자는 겁니다. 이 회사는 저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 같이하는 것이니까요. 저는 인터넷과 컴퓨터 때문에 오히려 우리 사회가 소통의 부족을 겪고 있다고 봅니다. 지금의 인터넷 사회에서는 다들 상대의 의견을 안 듣고, 자기의 의견만 이야기하려고 하니까요."

그는 많은 일본인이 그런 것처럼 요즘도 편지나 엽서를 주된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이용한다. 그의 책상 위엔 세계 곳곳에서 온 엽서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는 통역이 자신의 말을 통역해 주는 짧은 짬에도 엽서에 일일이 에펠탑 같은 그림을 그리면서 사인을 했다.

미국 텍사스주 포트워스(Fort Worth)의 포트워스 현대미술관. 콘크리트와 유리로 만든 5개의 직육면체 건물이 얕은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다. 지붕의 차양을 열면 빛이 쏟아진다. /포트워스 현대미술관 제공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패배가 창조력의 원천

―독학으로 세계적인 건축가가 되셨는데, 비결이 있나요.

"각자가 자기 나름의 방법을 찾아가니까 '독학(獨學)'인 것입니다. 뭘 공부해야 할지,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도 모르죠. 뭔가 의문이 생겨도 이를 물어볼 선생님이나 의견을 나눌 동료가 없습니다. 비결이란 게 있을 수가 없죠. 저는 한때 건축학과 교과서를 잔뜩 사다가 밤에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면서 책을 읽었고, 르 코르뷔지에의 작품집은 달달 외울 정도로 열심히 보기도 했죠. 일본 일주에 나서 일본 근대 건축의 영웅인 단게 겐조(丹下健三)의 건축과 일본의 전통 건축물을 둘러봤고, 유럽 여행을 하면서 고대로부터 중세를 거쳐 근·현대에 이르는 수많은 건축물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가 서로 다른 개성을 갖고 있습니다. 저를 따라하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곤란합니다."

―지금까지 150건이 넘는 수많은 건축 작품을 선보여 왔는데, 마르지 않는 창조력의 원천은 무엇인가요?

"계속 도전하는 정신! 지난 40여년을 되돌아 보면, 제 생각과 현실의 여러 조건이 맞지 않아 항상 괴로워했죠. 건축 공모전에서도 대개 낙선을 하고, 돌이켜 보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패배를 체험했습니다. 연전연패(連戰連敗)였죠. 쓰러졌다 일어나기를 거듭해왔습니다. '이제는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하지만 도전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다양한 아이디어가 축적되어 나가는 것이죠. 이런 사고의 축적이야말로 창조를 가능케 하는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창조는 역경을 이겨내기 위한 싸움, 즉 도전을 계속 하는 정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매번 '이 기회를 놓치면 끝장'이라는 심정으로 작업마다 안간힘을 다했다"면서 "그런 역경 속에서 지속되는 긴장감을 견뎌낼 수 있는 강인함도 길러졌다"고도 했다.

요즘 그의 새로운 도전 대상은 지구 환경 개선이다. 지난 2007년부터 일본 도쿄만의 쓰레기 매립지에 나무를 심어 푸른 숲으로 재생하자는 우미노모리(海の森·바다의 숲)라는 프로젝트에 착수했는데, 1인당 1000엔씩, 총 50만명에게 기부를 받아 비용을 댈 계획이다. "왜 건축가가 나무를 심느냐"고 묻자 그는 "건물 짓기도, 숲 가꾸기도 다 환경에 개입하여 그 장소에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는 작업"이라고 했다.

제주 서귀포시 섭지코지에 자리한 명상 갤러리‘지니어스 로사이(Genius Loci)’. 안도 다다오 특유의 노출 콘크리트 건물을 제주의 상징인 돌담이 둘러싸고 있다. /휘닉스아일랜드 제공

■자연과 역사를 포용하는 건축

치열했던 70년 인생만큼이나 그의 작품 세계도 고정관념에 끊임없이 도전해 왔다는 점에서 게릴라적이었다.

―선생님의 건축을 '도시에 도전하는 건축'이라고 표현합니다.

"도미시마 주택이나 스미요시 나가야(住吉の長屋·1976) 등 제 초기 작품은 출입구를 빼놓고는 사방을 콘크리트벽으로 에워싸 완전히 밀폐된 공간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폐쇄된 벽 사이에서 풍부한 삶의 공간을 만들어내려고 했습니다. 폭 3.6m, 길이 14.4m의 좁은 공간에 중정(中庭)을 만들어 햇빛과 바람, 빗물 같은 자연을 집안 깊숙이 끌어들였습니다. 저는 이 집을 과밀화에 허덕이는 각박한 도시 환경에서 자연과 하나 된 개개인이 강인하게 뿌리내리고 산다는 의미를 담아 '도시 게릴라의 주거'라고 이름 붙였죠.

도쿄(東京)의 오모테산도힐즈(表參道ヒルズ·2006)도 같은 선상에 있습니다. 1927년 지어진 일본 최초의 아파트 단지 도준카이아오야마(同潤會靑山)를 재개발한 것인데, 이곳의 유서 깊은 풍경이 도쿄의 무자비한 재개발 붐에 맞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새로 짓는 건물의 높이를 이 거리의 상징인 느티나무 가로수보다 낮게 설계하고, 건물 남동쪽 끝에 있던 아파트 1개 동을 복원해 남겼죠. "

도쿄의 패션 거리인 오모테산도힐즈. 유서 깊은 아파트 단지를 허물고 재개발한 쇼핑센터로, 300m에 이르는 느티나무 가로수 등 예전 풍경을 보전하기 위해 낮고 길쭉하면서도 화려하지 않은 외형을 택했다./ 안도다다오건축연구소 제공


―자연과 역사, 지역과의 조화를 유난히 추구하시는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인간과 자연은 일체입니다. 이 세상엔 인간만이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 바람, 나무, 동물, 곤충…. 다양한 것들이 인간과 함께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죠. 서양의 문화는 그 모든 것 중에 인간만을 중시하는 문화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만물이 함께 공생(共生)하는 공간이며, 인간이란 그중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와 현재와의 연속성도 마찬가지지요. 제 건축은, 그런 가치를 추구합니다."


이런 고집 때문에 상업적인 요구를 하는 건축주와도 자주 마찰을 빚었고, "건축주를 교육시켜야 한다"는 발언을 해 논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오모테산도힐즈 건축 당시 100여명의 아파트 소유주들과 충돌하고, 설득하느라 4년이 걸렸다. 그는 자신의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건축주가 원하는 대로 그저 기능만을 충족하려고 하면 따분한 짓밖에 하지 못한다. 예산 제약은 어쩔 수 없어도, 그 밖의 사항은 안이하게 타협하려 하지 않았다. 건축주와 다투더라도 상대가 진저리를 내며 체념할 때까지 내 고집을 밀고 나갔다. 현장 시공팀에 대해서도 시공 결과가 나쁘면 멱살을 잡아서라도 재시공을 요구했다."

기자는 그의 주름진 얼굴 위에서 여전히 링 위에서 펀치를 내뻗는 권투 선수의 모습을 보았다. 공식적으로는 이미 40년 전에 끝난 경력이지만, 그는 여전히 매일 '건축'이라는 링에 올라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는 승부사의 삶을 살고 있었다.


■ 안도 다다오에게 한국은…
"내향적으로 침잠한 일본 도전적인 한국을 배워야"


도전적인 삶을 살아온 그에게 도전 의식이 없고 내향적인 일본 사회는 강한 불만의 대상이다. 그는 일본이 외향적이고 도전적인 한국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요즘 한국의 분위기가 아주 좋은 것 같아요. 세계화에 아주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아주 힘이 있다는 느낌입니다. 반면 일본은 내향적으로 침잠하고 있죠. 일본은 2차 대전 후 경제적으로 풍요해지고 사회적으로 안정되면서 지나치게 내부 지향적으로 되어 버렸어요.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일본을 찾은 외국인들은 '일본은 자연이 수려하고, 사람들이 감성적이며, 가족 중심적이고 지역사회를 중시한다'면서 매우 높게 평가했는데, 요즘은 가족이, 지역사회가, 자연이 붕괴되고 있습니다. 점점 개인의 책임감과 자립하겠다는 의식, 도전하겠다는 의식이 약해지고 있어요. 반면 한국은 외향적이고 도전적입니다.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국가에 대한 애정과 충성의 의식이 여전히 강해요. 그런 면에서 한국 사회는 더욱 견고해지고 있다는 느낌이랄까요. 저는 일본이 그동안 너무나 평화롭고 안정된 세월을 누려온 것이, 결국 국가와 사회의 위기를 초래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이 지은 미술관 덕분에 세계적 명소가 된 나오시마(直島)섬에 일본에서 활동 중인 작가 이우환(74)씨의 미술관을 지었다며 무척 자랑스러워 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이우환씨뿐만 아니라, 프랑스나 미국의 작가들의 작품도 전시됩니다. 이를 보는 어린이나 젊은이들은 '일본 땅 위에 한국 사람의 미술관이 있고, 여기에 또 프랑스 사람이 작품을 전시하는구나'라며 지구는 하나라는 것을 느끼게 될 겁니다."

 

안도 다다오는 누구

링에서 '건축 무대'로 대학 교수까지 올라

안도 다다오(安藤忠雄)는 1941년 일본 효고(兵庫)현에서 일란성 쌍둥이의 형으로 태어났다. 안도는 어머니의 성. 어머니의 성을 따른 까닭은 외동딸인 안도 다다오의 어머니가 출가하면서 첫 아이를 낳으면 안도 가문의 대를 잇기로 약속해, 태어난 직후 외가로 입적됐기 때문이다.

그는 이른바 나가야(ながや)로 불리는 일본식 목조 다세대주택이 밀집한 오사카 아사히(旭)의 시타마치(下町·서민동네)에서 외할머니 손에 자랐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공부와는 담쌓고 놀기만 했다. 아이들을 이끌고 야구나 딱지치기, 낚시 같은 것에 열중했다. 서로 옳다고 우기다 주먹다짐을 벌이기도 했다. 길가에서 싸움이 벌어지면 어김없이 그 주범은 나였고, 어른들은 '또 안도네 꼬마구나!'라고 혀를 찼다."

안도 다다오가 프로 복서로 데뷔한 직후 찍은 사진. /안도다다오건축연구소 제공

그가 살던 시타마치에는 목공소, 금형공장, 판유리공장 등이 널려 있었다. 이런 장인의 공방(工房)들이 어린 안도 다다오의 놀이터였다. 이곳에서 장인들의 어깨너머로 뭔가 만드는 것을 배우면서 지냈다. 특히 인테리어나 가구를 만드는 목공소를 좋아했다고 한다. 건축과의 인연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권투선수의 길로 들어선 것은 공고(工高) 2학년 때였다. 그는 "재미삼아 시작한 권투였지만, 한 달도 안 되는 연습량으로 프로테스트를 통과했으니, 적성에 맞았던 모양"이라고 말했다.

권투선수 생활을 접고, 건축에 흥미를 붙여 처음으로 맡은 일은 동네 술집의 인테리어를 설계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건축을 독학하던 20대 초반, 인테리어 설계와 가구 제작 등으로 모은 돈 60만엔을 들고 7개월간의 세계 여행을 떠나 유럽의 유명 건축물을 모두 둘러봤다. 그리고 평생 건축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1969년 오사카에 안도다다오건축연구소를 설립하고, 1970년 결혼했다.

건축에 대해 제도권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다는 한계를 딛고 1997년 도쿄대 공학부 건축학과 교수가 됐다. 가장 존경하는 건축가는 현대 건축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랑스의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그는 자신의 애견(愛犬)에도 똑같은 이름을 붙였다.

무더운 장마철에 핀 <자귀나무> 꽃

학소도 현관 앞에는 두 그루의 자귀나무가 옆에 나란히 산다

5~6년 전에 심었던 어린 묘목이 제법 많이 자라

금년엔 꽃이 정말 많이 피었다

[조용헌 살롱] [739] '건달'論

건달(乾達)의 기원은 불교의 건달바(gandharva)라고 하는데, 건달바는 제석천(帝釋天)에서 다른 일은 하지 않고 오로지 음악만 연주하는 신의 이름이다. 고려 때까지 불교가 국교였으므로 큰 사찰에는 각종 의례에 동원되는 악사(樂士) 집단이 있었다. 이들을 '건달바'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조선조에 들어와 불교세력이 약화되면서 이들 악사 집단인 건달바들은 졸지에 직장을 잃었고, 호구지책으로 이 동네 저 동네를 떠돌아다니면서 배운 재주로 품을 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들이 한국 건달의 원조가 되었다.

건달은 뚜렷한 직장이 없이 먹고 노는 사람을 일컫는다. 그러나 건달이 되어 보아야 인생을 안다. 돈이 없으니까 을(乙)의 심정을 안다. 을을 모르면 갑(甲)도 모른다. 먼저 을을 알고 그 다음에 갑을 알아야 정통코스를 밟는 셈이다. 출퇴근이 없으니까 여러 지역을 떠돌아다니면서 바람도 먹어 보고, 이슬을 맞으면서 잠을 자는 풍찬노숙(風餐露宿)을 경험한다. 풍찬노숙을 해봐야 세계의 다양성을 받아들인다.

공자도 55세부터 노나라를 떠나 천하를 떠돌아다니는 건달생활을 해보았기 때문에 불후의 고전인 '논어'가 나온 것이다. 공자가 직장생활만 했으면 결코 성인이 될 수 없었다고 본다. 경주에서 태어난 최수운(崔水雲)도 먹고살기 위해 20대 초반부터 30대 초반까지 약 10년에 걸쳐서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장사를 했다. 행상을 한 것이다. 말이 장사이지 내가 보기에는 건달생활과 다름없다. 이때 최수운은 천하의 민심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피부로 느꼈을 것이다. 이 10년의 낭인생활 체험에서 결국 양반 상놈 없는 '동학(東學)'이 나왔지 않나 싶다.

건달을 이야기하면서 대원군을 빼놓을 수 없다. 천대받던 건달시절에 읊었던 시가 이렇다. '부귀가 하늘을 흔들었지만 예로부터 죽어왔고, 빈천이 뼛속까지 이르렀어도 지금까지 살아왔네, 천억년이 가도 산은 오히려 푸르고 보름밤이 오면 달은 다시 둥글다네'. 원주에 살았던 무위당(無爲堂) 장일순도 직장 없는 건달이었다. "어이! 나는 건달이네, 그러나 세상일을 해보려면 건달이 되어 보아야 하네. 장바닥 뒷골목 시궁창 밑을 엎드려 기어 보아야 일을 할 수 있어." 그러고 보니까 이 칼럼 쓰는 일 빼고는 나도 거의 건달에 가깝지 않은가!

[Around the World] 애플지분 10%, 97만원에 팔아버린 사나이

잡스와 공동창업한 웨인미 네바다주(州) 한 호텔 카지노 단골인 70대 남성. 동전·우표 수집으로 버는 돈과 사회보장수당으로 근근이 생활하는 이 남성이 '시가총액 1위' 기업 애플의 공동창업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CNN은 애플 아이폰 4 출시 다음날인 25일, 스티브 잡스(Jobs)·스티브 워즈니악(Wozniak)과 함께 애플을 창업했으나 11일 만에 그만둔 론 웨인(Wayne·76)을 소개했다.

웨인은 잡스가 게임회사 아타리(Atari)에 다닐 때 직장동료로 친분을 쌓아 1976년 4월 애플 창업에 동참했다. 잡스는 그에게 문서 작업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애플의 첫 로고와 시스템 운용 매뉴얼을 만든 사람이 바로 웨인이다. 그 대가로 웨인은 애플의 주식 10%를 받았다. 잡스와 워즈니악이 각각 주식을 45%씩 보유하되, 만약 둘 사이에 문제가 생길 경우 웨인이 중재를 맡기로 했다. 웨인은 그러나 11일 만에 애플을 때려치웠다. 10% 주식을 반납하며 받은 돈은 고작 800달러(약 97만원). 애플 주식의 10%는 현재 220억달러에 달한다.

그는 "나보다 각각 20살, 15살 어린 잡스와 워즈니악은 불도저처럼 모든 것을 밀어붙였고 회사를 성공시키기 위해 무엇이든 할 기세였다. 그들과 일하다가는 돈은 많이 벌 수 있을지언정 금세 죽어버릴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그렇다고 후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돈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역사의 초점에 있을 때, 자신이 그 초점에 서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는 없는 법이죠." 웨인은 애플을 그만두고 슬롯머신 공장을 차렸다 실패한 후 엔지니어로 여러 회사를 전전했지만, 큰돈을 벌진 못했다.

[고전톡톡 다시읽기] (15) 호메로스 ‘오디세이아’

“내 삶은 내가 산다 신들은 지도일 뿐” 자연·죽음에 대한 공포 극복 통해 삶의 긍정성 부각

이따금 삶이 가혹하고 힘겹다고 느껴질 때, 우리의 마음은 한 장의 지도를 꿈꾼다. 내가 가야 할 길을 지시해 주는 그런 지도가 있다면, 용기를 갖고 흔들림 없이 인생의 길을 걸어갈 텐데. 그런 지도를 가졌던 시대가 있었다면 그 시대의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기원전 8세기 그리스 작가 호메로스는 그런 지도를 가졌던 시대와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 귀향한 오디세우스가 이타케의 구혼자들을 응징하는 화살을 날리고 있는 그림. 영어본 ´오디세이아´의 삽화다.

트로이 전쟁이 끝난 후 10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고향으로 돌아오는 오디세우스에게 그 지도는 하늘의 별이었고, 올림푸스의 신들이었고, 무엇보다도 그 자신의 삶에 대한 확고한 의지였다.

퀴클롭스에게 전우들을 잃고, 칼립소와 키르케의 유혹에 발이 묶이고, 세이렌의 노래와 스킬라의 광폭함에 마음이 흔들릴 때에도 그는 한순간도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의 옆에는 매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용기를 북돋아주던 아테네 여신이 있었고,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전우들이 있었으며, 낯선 이방인을 환대하는 마음씨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시대의 삶에 대해 헝가리의 문예학자 루카치는 이렇게 동경의 찬사를 보낸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올림푸스신은 공포 대상에 인간 형상 부여한 것

그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에 겸손했으나 삶 앞에서 수동적이지 않았으며, 신화적인 힘들을 존경했으나 인간적인 욕망을 당당하게 드러낼 줄도 알았다. 그들은 생각했다. 내 삶은 내가 산다. 신은 내 삶의 나침판이자 지도일 뿐이다. 호메로스는 ‘오디세이아’에서 이러한 그리스인들의 생각을 제우스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

“인간들은 걸핏하면 신들을 탓하곤 하지요. 그들은 재앙이 우리에게서 비롯된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들 자신의 못된 짓으로 정해진 몫 이상의 고통을 당하는 것이오.”

인간은 모두 자신이 행한 바에 의해 자기 삶을 스스로 축복하거나 저주한다. 자신의 의지와 정당한 노력으로 포세이돈의 저주를 뚫고 고향으로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그리고 한 나라의 왕으로서 행복한 삶을 완성한다. 반면 그가 집을 비운 사이 페넬로페에게 구혼을 한다는 핑계로 오디세우스의 재산을 먹어치우며 오만불손한 행패를 부리던 이타케의 구혼자들은 복수의 화살을 피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리스인들은 왜 올림푸스의 신들을 상상했을까.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인들은 삶의 공포와 전율을 알고 있었고 느낄 수 있었다. 요컨대 살기 위해서 그들은 올림푸스라는 꿈의 산물을 만들어 내야 했다.”

특히 그 시대의 인간들에게 자연은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이해 불가능한 공포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거기에 인간적인 형상을 부여함으로써 그 공포를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올림푸스의 신’이라는 예술적 서사를 통해 더 오래, 삶을 즐길 수 있는 방식을 발견했던 셈이다.

●모험담 통해 나그네 환대 대가 지불

그들에게는 모든 우주만물이 ‘신’이었다. 특히 인간의 형상을 한 신들은 매번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모습을 바꿔가며 인간들의 집을 찾아온다고 믿었다. 때문에 낯선 곳에서 오는 이방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환대는 기도를 하고 가축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의식과 함께 그들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오디세우스의 돼지치기는 떠돌이 노인의 모습으로 자신의 집에 찾아온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지만, 그를 성심껏 환대한다.

“나그네여! 그대보다 못한 사람이 온다 해도 나그네를 업신여기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요. 모든 나그네와 걸인은 제우스에게서 온다니까요.” 이런 말과 함께 돼지치기는 떠돌이 노인으로 변장한 오디세우스를 제우스처럼 환대한다. 자신이 갖고 있는 가장 좋은 음식을 대접하고 가장 좋은 잠자리를 제공하면서.

오디세우스나 그의 아들 텔레마코스가 여행을 하면서 만나게 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그들을 진심으로 환대한다. 낯선 자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 그들이 보여주는 공통적인 태도는 이방인에게 일단 ‘먹고 마시는 욕망’이 충족될 수 있도록 배려한다는 점이다.

손님이 어떤 신분인지, 누구인지를 묻지 않고 그가 누구든 무조건 환대한다. 주인과 손님이 함께 충분히 먹고 마시고 난 후, 비로소 주인은 손님에게 묻는다. 이방인이 떠나온 곳은 어디이며, 어떻게 이곳에 도착했으며, 그는 누구인지.

‘오디세이아’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인 오디세우스의 모험이 자신을 환대해준 파이아케스족의 왕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인에게는 자신을 찾아온 이방인을 무조건 환대할 의무가 있으며, 손님에게는 자신을 환대한 주인이 원하는 이야기를 들려줄 의무가 있다. 아니,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환대에 대한 일종의 답례인 것이다. 오디세이아는 오디세우스 이야기라는 뜻이다.

오디세우스의 귀향을 가능케 했던 ‘환대의 법칙’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이타케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중지된다. 자신의 정체를 밝힐 수 없었던 오디세우스는 그의 재산을 탕진하고 있던 오만한 구혼자들의 냉대와 모욕을 묵묵히 견뎌야만 했다. 이때 파탄난 환대의 법칙은 가혹한 복수에 하나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공포의 대상은 신이 아니라 죽음

호메로스의 인간들은 모두 언젠가 죽을 존재로서의 자신을 인정하고, 삶과 자기 자신을 일치시키는 방식으로 살았다. 때문에 그들에게 진정한 공포의 대상은 자연이나 신이 아니라 삶으로부터의 이탈, 즉 언젠가는 직면하게 될 죽음이었다.

‘오디세이아’에서 호메로스가 이야기의 중간 그리고 마지막에 ‘저승’의 에피소드를 삽입해 넣은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 즉 그 시대 그리스인들에게 공통적으로 내재돼 있던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고통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사시의 11권에서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귀향을 둘러싼 예언을 듣기 위해 저승으로 내려갔을 때, 그가 확인한 것은 삶이 죽음보다 좋은 것이라는 점이었고, 그러한 깨달음이 이후에 그가 겪게 될 고난이나 고통으로부터 그의 삶을 지켜준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전쟁의 영웅이었던 아킬레우스를 만나 그를 칭송하는 말을 건네자, 아킬레우스의 혼백은 쓸쓸한 표정으로 말한다.

“저승에서 사자(死者)들을 통치하느니 차라리 지상에서 머슴이 되어 농토도 없고 재산도 많지 않은 가난한 사람들 밑에서 품이라도 팔고 싶다.” 자연에 대한 공포나 죽음에 대한 불안을 극복하고 삶을 긍정하는 한 방식으로 그리스인들이 발견한 것은 신화 혹은 서사시라는 예술의 영역이었다. ‘오디세이아’에는 한 용감하고 지혜로운 그리스인의 여행담이라는 형식으로 이러한 내용들이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향한 용기와 의지를 버리지 않으며, 신을 섬기듯 낯선 자들을 환대하며, 일상을 축제로 즐길 줄 알았던 그리스인들의 머리 위에는 항상 반짝이는 별들의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권용선 수유+너머 남산 연구원

오디세우스 내세워 문명과 야만을 구분짓다
고전 오디세이 ④ 자연세계에서 국가로 가는 길

낯선 손님을 예의롭게 맞고
그가 곤경에 빠졌으면 돕고
신에 대해 두려워한다면 ‘문명’

서양에서 문명과 야만의 구분이 처음 등장하는 텍스트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이다. 여신 칼립소의 오기기아를 떠나 20일간의 항해 끝에 간신히 육지에 발을 디딘 오디세우스의 말이다.

손만 뻗으면 먹을 게 있어도
손님에게 잔인하게 굴거나
오만불손 무법천지라면 ‘야만’

손만 뻗으면 먹을 게 있어도
손님에게 잔인하게 굴거나
오만불손 무법천지라면 ‘야만’

서양에서 문명과 야만의 구분이 처음 등장하는 텍스트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이다. 여신 칼립소의 오기기아를 떠나 20일간의 항해 끝에 간신히 육지에 발을 디딘 오디세우스의 말이다.

나는 또 어떤 인간들의 나라에 온 것일까?

오만하고 야만스럽고 옳지 못한 자들일까?

이방인에게 친절하고 신을 두려워하는 자들일까?(<오디세이아> 6권, 119~123행)

흥미로운 고민이다. 고민의 한 편에 오만, 야만, 불의가, 다른 편에 관대, 친절, 정의가 서 있다. 이른바 문명과 야만의 대립이 처음 등장하고 있다. 문명에 대한 나우시카의 말이다.

손님이여, (…) 올림포스 제우스는 마음 내키는 대로/ 나쁜 사람이든 좋은 사람이든 모두 가리지 않고 행복을 나누어 주시지요./ 그대가 겪는 어려움도 그분이 주신 것이니 참고 견디어야 해요./ 지금 그대는 우리 도시와 나라에 오셨지요. 도움을 구하는 사람이 간청하는 옷과 그 밖에 다른 모든 것을 받으실 거예요. 도울 수 있는 처지라면 당연히 도와야 하니까요. (<오디세이아> 186~193행)

» 이탈리아 화가 미켈레 데수블레오(1602~1676년)의 〈오디세우스와 나우시카의 만남〉. 자연의 세계에서 문명의 세계로 귀환하는 오디세우스에게 문명의 상징인 옷을 전하고 있는 나우시카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문명의 기준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 기준은 손님에게 열린 마음과 어려운 이를 돕는 마음이다. 서양 고대 세계에서 손님에게 열린 마음은 아주 중요한 덕목이었다. 손님을 잘못 대접하거나 손님으로서 예의를 지키지 않는 일로 해서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트로이 전쟁이 대표적이다. 여러 원인이 있지만, 파리스가 손님의 예의를 지키지 않은 것도 주요 원인 가운데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손님 파리스가 주인 헬레네를 유혹해서 트로이로 데려가 버린 일은, 그들이 해당 국가의 왕자이고 왕비였다는 점에서, 개인적인 연애 행각으로 끝나지 않았고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런 이유에서 손님 대접에 관한 예의 일반에 대해서는 제우스가 직접 관장한다. “크세니우스 제우스”(Xenius Zeus)라는 별칭이 이를 잘 보여준다. “손님 환대의 예의를 관장하는 제우스”를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오디세우스의 “신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일까”라는 물음은 제우스에게 던지는 것이다. 적어도 신을 두려워하는 자라면, 그의 간청을 들어주어야 하기에 그렇다.

이에 대한 나우시카의 답이 흥미롭다. 불행과 곤경에 빠진 손님을 돕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인간은 제우스가 내리는 행복과 불행 앞에서 누구나 평등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언젠가 나도 그런 곤경에 빠질 수 있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지극히 인간적인 해명이다. 소위 “인간 조건”(conditio humana)의 뿌리가 여기에 있다 하겠다. 사람은 누구나 서로의 도움이 필요한데, 이것이 인간 조건이기에 그렇다. 이와 관련해서 손님에게 열린 마음과 어려운 이를 돕는 마음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하자. 오디세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낯선 손님을 돕는 것은 제우스의 뜻이다. 사정이 이와 같다면, 어려운 처지에 빠진 사람을 돕는 것도 아마도 제우스의 뜻이다. 어려운 처지에 빠진 사람은 모두 낯선 손님에 속하기 때문이다. 낯선 이도 돕는데, 아는 이를 돕지 않는 것은 더욱 큰 잘못이기에 그렇다. 원래 라틴어 호스티스(hostis)는 손님을 의미하기도 하고 적을 뜻하기도 한다.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는 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친구가 될 수도 있고 불구대천의 원수가 될 수도 있기에 말이다. 손님 환대의 규칙과 어려운 이를 돕는 마음은 논리적으로 이렇게 연결된다. 이를 통해서 어려운 이를 돕는 마음은 인간의 의무로 자리잡게 된다. 오디세우스의 간청이 신의 힘에 기초한다면, 나우시카의 답은 인간의 관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겠다. 이 두 가지가 충족되고 서로 잘 연결된 나라가, 타인에 대해 열린 마음과 어려운 이를 돕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곳이 이른바 문명 세계다. 이것이 호메로스의 생각이다. 이는 야만의 지역을 살필 때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키클롭스의 지역으로 항해해 보자. 오디세우스와 폴리페모스가 나누는 대화다.

혹시 그대가 환대해주거나 아니면 손님의 당연한 권리인/ 그 밖의 다른 선물을 줄까 해서 이리로 와서 그대의 무릎을 잡는 것이오./ 가장 강력한 분이여. 그대는 신들을 두려워하시오. 우리는 그대의/ 탄원자들이오. 제우스는 탄원자들과 이방인들의 보호자시며/ 존중받아 마땅한 손님들과 동행하시는 손님의 신이시오./ 이렇게 말하자 그자는 즉시 비정하게 대답했소./ “이봐, 나그네, 나더러 신들을 두려워하거나 피하라고/ 명령하다니 너는 어리석거나 멀리서 왔나 보군.”(<오디세이아> 268~274행)

도움을 청하는 오디세우스에게 폴리페모스는 아주 “비정”하게 거절하고 있다. 나중에 폴리페모스는 손님들에게 식인(食人)을 할 정도로 잔인하게 굴었다. 이 대목에서 문명과 야만의 구분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겠다. 인간적인 것과 잔인함의 대비가 바로 그것이라 하겠다. 문명의 형성에 대한 호메로스의 생각을 좀더 살펴보자.

오만불손한 무법자들인 키클롭스들의 나라에 닿았다. (…)/ 밀이며 보리며 거대한 포도송이들로 포도주를 가져다주는 포도나무하며/ 모든 것이 씨를 뿌리거나 경작하지 않건만, 그들을 위해 풍성하게 돋았다. (…)/ 그들은 회의장도 없고 법규도 없었다.(<오디세이아> 106~113행)

키클롭스 지역의 묘사가 매우 흥미롭다. 어찌 보면, 키클롭스의 지역이 바로 유토피아다. 유토피아(utopia)란 어디에도 없는 곳, 즉 ‘무토피아’(無土彼亞)다. 서양의 유토피아에 대한 생각의 뿌리가 여기에 있다 하겠다. 묘사에 따르면, 일단 부족한 것이 없는 곳이다. 일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먹을 것이 제공된다. 그야말로 부러울 것이 없는 그런 곳이다. 그러나 호메로스는 이곳을 무법천지에 불경스럽고 회의장도 없고 법규도 없는 곳으로 묘사한다. 단순 생존이 아닌 사람이 살기 위해 요청되는 제도와 조건들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생존과 생활의 구분이 처음 등장하는 대목이 여기가 아닌가 싶다. 아무리 먹을 것이 풍부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사람다운 삶을 채워주는 곳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셈이다. 결론적으로 단순한 생존(生存)이 아닌 생활(生活)이 있는 곳이, 국가라는 제도가 작동하는 곳이 문명의 세계라고 호메로스는 생각한 것 같다. 문명에 대한 호메로스의 이런 생각은 이후 내내 서양 역사를 지배하게 된다. 증인으로 키케로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무엇보다도 바로 말의 힘 때문에 인간이 짐승보다 우월하다. 흩어진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그들을] 야만의 거친 삶에서, 이곳 로마처럼,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문화와 문명의 세계로 이끌 수 있었던, 또한 국가가 이미 세워졌을 때, 입법과 사법 그리고 법에 입각한 권한과 법이 보장한 권리에 대한 규정과 틀을 마련하고자 할 때, 어떤 다른 힘이 가능했을까?(키케로, <연설가에 대하여> 제33장)

» 안재원·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키케로에 따르면,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존재일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자연 상태의 야만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문명의 틀 안에서 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를 가능케 해준 근본적인 힘이 말이라고 한다. 모여 살게 하고 거기에서 문명과 문화를 가꾸고 살도록 사람들을 설득한 힘이 말이기에. 키케로에 따르면, 이런 말의 힘에 기초해서 성립한 제도가 국가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문명 담론의 성격이 달라진다. 문명 담론이 폴리스(로마의 경우 키비타스(civitas))의 성립과 연결되어 논의되기 때문이다. 폴리스라는 말에서 국가의 개념이, 폴리스라는 말에서 모여 사는 곳의 의미인 도시의 개념이, 도시의 개념에서 세련됨이, 세련됨에서 닦음, 길들임, 수양과 예의의 개념이 흘러나온다. 이 반대, 곧 잔인하고 무례하며, 조야하고 거칠며, 들판과 산에서 흩어져서 살며 나라도 없는 곳이 바로 야만이 지배하는 곳이다.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고려 연꽃 씨앗 700년만에 꽃피웠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목간(木簡)이 출토된 경남 함안군 성산산성(사적 67호)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연꽃 씨앗이 700여년만에 꽃을 피웠다.
함안박물관에서 7일 자태를 드러낸 두 송이의 '아라홍련'은 성산산성에서 발견된 모두 10개의 연꽃 씨앗 중에서 발아에 성공한 3개의 연꽃 씨앗에서 꽃을 피운 것으로 현재 7개의 꽃대가 올라온 상태다.

지난해 5월 함안박물관과 농업기술센터에서 발아에 성공한 지 일 년여만의 결실이다.
함안박물관이 연꽃 씨앗 발아과정을 관찰한 기록에 따르면 지난해 5월8일 침종(씨앗 담그기)한 지 5일만에 싹을 내기 시작했고 같은 달 13일 첫번째 잎이 나온 이후 8월 하순까지 여러 개의 잎이 나오는 등 정상적인 성장을 보여왔다.
이후 다시 2포기로 나누어 심은 아라홍련에서 지난달 20일 첫 꽃대가 출현했고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한 나머지 5개의 꽃대에서도 조만간 활짝 꽃을 피울 것으로 박물관측은 보고 있다.

박물관 관계자는 "당초에 기대한 백련이 아닌 홍련이지만 다른 색이 섞이지 않은 선명한 붉은 색깔과 일그러짐이 없는 단정한 모양에서 우리나라 고유의 연꽃을 확인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특히 아라홍련은 700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지금의 다양한 연꽃으로 분화되기 이전의 모습이 그대로 살아 있어 향후 연꽃의 계통 연구에도 크게 이바지할 것으로 기대된다.
고려시대 연꽃 씨앗은 지난해 5월8일 가야문화재연구소가 주관한 제14차 성산산성 발굴조사현장에서 옛 연못의 퇴적층으로 추정되는 지하 4~5m의 토층을 발굴하던 중 발견됐다.
함안군은 10개의 연꽃 씨앗 중에서 표본 2개를 골라 대전과학단지 내 한국지질자원연구원 박중헌 박사에게 의뢰, 1개는 지금으로부터 650년 전, 나머지 1개는 760년 전의 고려시대 것으로 확인했다.

연구원의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 결과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군 관계자는 "아라홍련은 함안박물관에 2포기, 함안농업기술센터에 2포기 등 전국적으로 아직 4포기밖에 없다. 향후 다른 곳에 이식해 번식할 계획"이라며 "현재 120개가 넘는 많은 잎이 자라고 있어 내년에는 포기 수가 많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한편 함안 공설운동장 옆 11만3천914㎡에 이르는 천연습지를 연꽃테마공원으로 조성하고 있는 함안군은 내년 12월 수생식물생태체험공원이 조성되면 아라홍련을 주제로 한 테마관을 선보일 예정이다. [연합뉴스]

- 인왕산 鶴학巢소島도에서 최범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