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란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구도 우리 대신 가줄 수 없는 여정을 통해서,

누구도 우리 대신 해줄 수 없는 노력을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행복은 몸에 좋다.

그러나 정신의 힘을 길러주는 것은 고뇌다."

 

- 마르셀 프루스트

여름의 꽃 <능소화>

백목련과 자목련만 알던 사람이 천리포수목원에 오면 처음 보는 목련에 눈이 휘둥그레지기 마련이다. 연지색이나 노란색 꽃을 매단 목련이 있는가 하면, 겹꽃이 피거나 버드나무처럼 가지가 늘어진 것, 만개해도 오므린 봉오리 형태를 간직하는 것 등….

국제 목련학회 총회를 통해 진가를 인정받다

세계 최고 수준인 약 430개 품종의 목련이 앞다투어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는 천리포수목원을 찾았다. 밀러가든 들머리에서 주먹보다 큰 연분홍 꽃을 매단 ‘밀키웨이’가 방문객을 맞는다. 뉴질랜드에서 중국 원산의 목련을 교배해 만든 품종이다. 연못가로 내려가면 ‘벌컨’이 탐방객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밀키웨이’와 사촌간이지만 짙은 적색의 꽃이 화사하다. 자목련보다 색깔이 진하고 꽃잎 앞뒤의 빛깔이 같은 것이 특징이다. 김미정 수목원 코디네이터는 “벌컨이 필 때쯤이면 목련 마니아들로부터 개화 여부를 묻는 전화가 빗발친다”고 말했다.

1만3천여 종류의 식물을 보유하고 있는 천리포수목원의 전경. 전면의 나무는 진하고 큰 꽃이 피는 벚나무의 슈퍼바 품종이다.

일반에 공개되지는 않지만 목련만을 위한 별도의 공간인 목련원이 생태교육관 뒤에 마련돼 있다. 엘리자베스 품종이 탐스런 노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수목원 설립자인 고 민병갈(귀화 전 이름 칼 페리스 밀러)이 미국의 이모를 그리며 심었다는 글귀가 팻말에 적혀 있다. 옆에는 국화처럼 꽃잎이 많은 품종인 ‘파우더 퍼프(분첩)’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민병갈이 1973년 황폐한 모래언덕이던 이곳에 처음 심었던 나무가 목련이었다. 목련에 반한 그는 이후 사재를 털어가며 외국의 식물원과 양묘장, 목련 애호가로부터 목련 품종을 수집했다. 천리포수목원의 목련은 1997년 국제목련학회 총회를 유치함으로써 그 진가를 인정받았다.

400품종 이상의 목련을 갖춘 수목원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이은복 천리포수목원 이사장(한서대 명예교수)은 “400품종 이상의 목련을 갖춘 수목원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며 “특정한 식물군을 집중적으로 모아 비교연구할 수 있는 학술적 의미가 크고 조경과 원예에 활용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목련뿐 아니라 400여 종류가 있는 호랑가시나무류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이밖에 동백나무 380여 종류, 무궁화 250여 종류, 단풍나무 200여 종류 등 특정 분야에 다양성을 집중시킨 것이 이 수목원의 강점으로 꼽힌다. 목련은 생물다양성 보전과 관련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식물이다. 목련과 식물은 중생대 백악기인 9500만 년 전 꽃 피는 식물 가운데 최초로 지구에 등장했다. 꿀벌이 출현하기 전이어서, 꽃가루받이를 하는 딱정벌레가 손상을 입히지 않도록 암술이 단단하다. 꽃잎과 꽃받침의 구분이 어려운 것도 원시적 속성의 하나다.

400품종 이상의 목련을 갖춘 수목원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목련은 대륙이동과 조산운동, 빙하기 등 지질학적 사건을 거치며 살아남았다. 전 세계 245종 가운데 3분의 2가 아시아에 분포하는데, 특히 중국 남부에 40% 이상이 자란다. 아메리카 대륙에도 일부 분포하지만 목련 품종의 대부분을 개발한 유럽에는 자생종이 없다. 우리나라의 자생종은 한라산에만 있는 목련과 높은 산에 자라는 함박꽃나무(산목련) 2종이고, 흔히 재배하는 백목련과 자목련은 중국 원산이다. 국제식물원보존기구(BGCI)는 2007년 보고서를 통해 전 세계 목련의 절반 이상이 야생상태에서 멸종위기에 놓여 있다고 밝혔다. 목련은 원예종일뿐 아니라 지역사회의 목재, 식량, 의약품 원료이자 생태계 건강을 가리키는 지표종이기도 하다. 식물원이 목련의 유전자원 보존과 증식, 이용에 나선 이유이기도 하다.

멸종위기종 5종의 서식지외 보전기관

환경부는 2006년 천리포수목원을 가시연꽃, 노랑무늬붓꽃, 망개나무, 매화마름, 미선나무 등 멸종위기종 5종의 서식지 외 보전기관으로 지정했다. 마침 농약과 기계를 쓰지 않는 전통 영농을 하는 수목원 내 논에서 매화마름이 꽃을 피웠다. 매화마름은 모내기 철에 개화한다. 하지만 논을 가는 과정에서 허리가 여러 토막으로 잘리더라도 속이 비어 있는 줄기가 물에 떠 꽃을 계속 피우고 마디마다 뿌리를 내민다. 제초제를 뿌리지 않는다면 매화마름이 억센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음을 천리포수목원은 입증하고 있다. 또 다른 보호종인 가시연꽃에 대해서는 생활사 규명이 한창이다. 1994년 홍성 역재방죽에서 씨앗을 받아 온 가시연꽃이 연못 바닥에서 싹이 터 열매를 맺기까지를 꼼꼼히 연구하는 중이다. 종자가 물 위를 떠다닌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은 성과로 꼽힌다. 열매에서 빠져나온 씨앗을 감싼 투명하고 미끌미끌한 표피는 종자가 물에 떠 멀리 이동할 수 있게 해 준다. 물고기나 곤충이 표피를 뜯어먹어 부력을 잃은 종자는 연못 바닥에 안착해 이듬해 싹을 틔우게 된다.

이 연구를 맡고 있는 남수환(교육팀)씨는 “멸종위기종 복원은 생태적 특성을 정확히 알고 난 뒤에 해야 한다”고 말했다. 천리포수목원은 수집한 식물이 언제 어디서 왔고 어디에 심었는지 등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관리하기로 유명하다. 1974년부터 백엽상을 설치해 온도, 습도, 풍향, 풍속, 강우량 등을 기록한 것은 국립수목원에도 없는 자료이다. 1981년 5월27일 기록한 카드에는 고 이영로 박사가 오대산에서 채집한 노랑무늬붓꽃을 밸리베드에 심었다고 적혀 있다. 이런 자료는 기후변화로 인한 개화시기의 변화를 연구하거나, 멸종위기종을 증식해 복원할 기초자료가 된다.

금단의 정원 공개 1년

2009년 3월 일반에 공개되기 전 천리포수목원의 별명은 ‘신의 비밀정원’이었다. 허락을 받은 식물연구자나 후원회원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연간 1만 3천 명 정도이던 방문객 수는 지난 1년2개월 동안 19만 명으로 늘었다. 천리포수목원의 변신이 진행중이다. 천리포수목원을 지켜온 것은 “수목원의 주인은 사람이 아닌 나무”라던 설립자의 유별난 나무 사랑이었다. 미 해군 장교로 1945년 한국에 첫발을 디딘 24살의 칼 페리스 밀러는 인심과 풍광에 이끌려 이 땅에 뿌리를 내리기로 마음먹었다.

1만3천여 종류의 식물을 보유한 천리포수목원 전경. 지난해부터 일반에게 개방하고 있다.

한국은행에 근무하던 1962년 가난한 농민의 땅 2천 평을 사 달라는 부탁을 외면하지 못하면서 수목원 터 구입이 시작됐다. 소문을 듣고 너도나도 땅을 팔려 했다. 그는 1970년 본격적으로 수목원 조성에 나섰고, 1979년엔 민병갈이란 이름으로 한국 귀화 1호 미국인이 됐다. 그는 서울에서 주식투자로 번 돈을 모두 수목원에 쏟아부었다. 해마다 한두 번씩 미국의 묘목 경매에 참여해 돈을 아끼지 않고 신품종을 사들였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수목원은 재정난에 시달렸다. 2002년 민원장의 타계 이후에도 재정적 어려움이 계속돼 직원들 월급도 못줄 형편에 이르자 마침내 2008년 일반 개방을 결정하게 된다. 

이보식 신임 원장(전 산림청장)은 “꽃 한 송이가 밟히면 열 송이를 심겠다”고 선언했다. 개방에 따른 훼손을 적극적인 관리로 막겠다는 것이다. 새 직원을 뽑고 연간 1억 원이 드는 묘목구입을 재개했다.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도 따냈다. 이 원장은 “겨우내 꽃을 매다는 가을벚꽃 등 묘목 10만 그루를 양묘해 태안지역의 조경용으로 공급할 예정”이라며 “국민의 재산인 수목원을 활용해 지역사회에 기여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40여 년 만에 빗장이 풀리자 탐방객은 성수기 때 하루 3천 명에 이른다. 이들이 수목원을 밟고 다니고, 개중에는 희귀종을 채취해 가는 사람도 있어, 개방 후유증을 어떻게 막을지가 앞으로의 과제로 남았다. 

출처: 네이버캐스트

나의 보살핌도 없이 스스로 번식하고 열매까지 맺는다 <딸기>

<보리수 열매>

<앵두>

<방울토마토>

<살구>

<매실>

<사과>

금년 봄에 심은 <황금키위나무>

[ESSAY] 내가 강북 단독주택에 사는 이유

황건호 한국금융투자협회 회장

아파트에서 서울 연희동 산자락에 이사온 것은 15년 전
해가 잘 드는 마당 그 마당에 정원을 가꾸고픈 마음이었다
봄에 진달래 지면 철쭉·라일락이 핀다
여름 전령사 백일홍은 분홍 꽃망울 터뜨린다
매화는 매서운 추위와 겨울 바람을 견뎌내고
봄이면 잎새 도움없이 꽃을 피운다
나무와 꽃을 키우며 자연의 섭리와 인생을 배운다

내 집은 서울 강북의 단독주택이다. 15년 전 그간 살던 아파트에서 마당이 있는 집을 찾아 서대문구 연희동 산자락 아래로 이사 왔다.

부모님이 사시던 집도 아니고 굳이 아파트에서 단독주택으로 이사한 나의 선택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저녁에 참석하는 행사나 모임이 강남 중심으로 이뤄지는 경우도 많아 불편함을 느낄 때도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단독주택에서 살기로 한 나와 내 아내의 결심은 해가 잘 드는 마당, 그리고 그런 마당에 우리의 정원을 가꾸고 싶다는 절실한 바람에서 시작됐다.

그렇게 만들어진 정원에는 15년간 애지중지 키운 나무와 꽃들이 가득하다. 봄에 가장 먼저 봉오리를 틔워 올리는 매화와 진달래가 질 때쯤이면 철쭉과 라일락이 핀다. 모란과 장미가 기염을 토하면서 여름이 시작되면 키 큰 고목인 목 백일홍의 분홍 꽃망울이 터져 마당을 가득 채운다. 이런 가슴 벅찬 환희를 느끼면서 봄이 오기도 전부터 나와 아내는 봄꽃을 사기 위하여 경쟁적으로 은평구의 구파발 화원들을 드나든다.

내가 유난히 나무와 꽃을 좋아한 건 어려서부터이다. 어릴 적 고향 강원도 시골집에는 조그마한 화단이 있었다. 그 시절 다른 시골집들과 달리 어머니의 정성으로 나무와 꽃들이 아주 잘 어우러져 계절이 바뀔 때마다 서로 다른 빛깔의 고운 꽃들이 화단에 가득했다. 아버지의 전근으로 서울에 와서도 작은 집 마당 화단에는 꽃들이 탐스러웠다.

선친도 꽃과 나무를 참 좋아하셨다. 꼼꼼하시긴 해도 다소 무뚝뚝하시던 선친은 아침 일찍 작은 화단에 물 주는 걸로 하루를 시작하시고 좋은 비료는 수소문할 정도로 나무와 꽃에 정성을 들이셨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젊은 시절에는 나무나 화초에 관심이 없다고들 하지만 나는 20대에도 나무를 키웠다. 1975년 결혼 승낙을 받고 처가에 선물했던 군자란은 그 후 다시 내 손에 들어와 수 대에 걸쳐 번식시켜서 주위 사람들에게 선물을 하고 있다. 증권사 사장 시절에는 매년 질 좋은 칸나를 한 포대 수확해서 직원들에게 분양해주기도 했고 협회장 취임 후에는 삭막했던 회사 1층 로비에 대나무, 행운목, 군자란, 초화(草花) 등을 심어 실내정원을 만들기도 했다.

내가 특히 좋아하는 나무는 소나무다. 지금도 잘 자란 소나무를 보면 좋은 인연을 만난 듯 마음이 설렌다. 그래서 전국의 유명한 소나무 군락지를 찾아 탐목(探木) 여행도 한다. 해외출장이나 여행을 가도 짬이 되면 '보태니컬 가든(식물원)'부터 찾는다.

나무나 원예에 관심이 많다 보니 에피소드도 많다.

때늦은 한파가 몰아쳤던 어느 해 이른봄이었다. 술자리에서 며칠 전 서둘러 심은 장미가 퍼뜩 생각나는 바람에 허겁지겁 집에 돌아와 밤늦게까지 가시에 찔려가면서 장미에 신문지를 싸주고서야 잠자리에 든 적도 있다. 늦은 귀가를 걱정하는 아내보다도 나무가 더 신경 쓰이느냐는 아내의 타박도 무리가 아니었다.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변화무쌍한 자본시장에서 35년을 일해 왔고 젊은 시절 방랑 벽도 있었던 내가 원예에 몰두한다는 것이 어딘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정원'의 기원은 아라비아 유목민으로부터 비롯된다. 연못을 중심으로 설계된 정원의 절제미가 유명한 스페인 알함브라 궁전도 중세에 이곳을 지배한 이슬람왕조인 나수르 왕조가 수 대에 걸쳐 건설한 것이다.

17세기 초 최초의 자본주의적 투기대상이었던 네덜란드의 튤립도 터키를 통해 네덜란드에 전해져 당시 유럽인을 사로잡았다. 원예사에서 유목민의 족적이 이처럼 큰 걸 보면 원예와 방랑은 본질적으로 어딘가 통하는 게 있는 모양이다.

나무와 꽃을 키우다 보면 자연의 섭리와 인생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매화는 앙상한 가지로 겨울의 그 추위와 바람을 견뎌내고 봄이 되면 잎새의 도움도 없이 꽃을 피운다. 어떤 시련도 극복하지 못할 것은 없다는 듯이.

좋은 골프채나 첨단기기에 대한 욕심은 별로 없지만 마음에 드는 나무에는 욕심이 생긴다. 하지만 내 정원은 욕심껏 나무를 키우기엔 좁다. 결국 새 나무를 심으려면 전에 있던 건 뽑아내야 한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항상 좋은 걸 모두 가질 수는 없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 걸 알지만 말이다.

나무의 가지를 쳐주는 전정(剪定) 작업은 경영자로서 조직 관리에 대한 고민과 통한다. 때로는 나무가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 병든 가지, 혹은 멀쩡한 가지라도 정리해야 할 때가 있다. 애써 키운 것이 아깝지 않을 리 없지만 나무를 모양 좋게 잘 키우려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나무를 좋아하듯 사람을 좋아하는 나에게 그래서 사람을 정리하는 결단의 순간은 유난히 힘들다.

비슷한 시기에 심은 나무라도 기울인 정성에 따라 달리 자라난다. 정성을 기울인 만큼, 내가 노력한 만큼 성취하는 것이야말로 살아가는 보람과 즐거움이 아니던가.

가끔 정원 일을 하다 아들에게 도와달라고 하면 "약속이 있어 나가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40년 전 선친과 나의 모습처럼. 하지만 나는 안다. 내 아들들도 시간이 지나면 나처럼 나무를 돌보며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할 거라는 걸.
 

작가, 스승, 어머니 박경리
2주기 맞아 MBC 스페셜 2일 방영
주변인 회고 통해 생전 궤적 되짚어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이 말을 끝으로 2년 전 <토지>의 소설가 박경리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거대한 족적 아래에는 현대사의 비극과 어우러진 개인적 고통이 있었다. 문화방송 <엠비시 스페셜-내 어머니 박경리>(2일 밤 10시55분, 연출 최우철)가 박경리 주변 인물들의 회고로 인간 박경리의 삶의 궤적을 되짚는다.192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82년의 모진 세월을 살아낸 인간 박경리. 그는 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 촌부가 되고 싶은 소박한 꿈을 꾸는 새색시였지만 가만 놔두지 않았다. 살아생전 박경리는 말했다. “1·4 후퇴 직전에 남편이 서대문형무소에 있을 때 형무소를 다니는데, 너무 힘드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미끄러져서 한강에 빠졌으면 싶더라고….”

부모의 이혼으로 어려움을 겪은 박경리는 6·25 와중에 남편을 잃고 어린 아들마저 갑작스런 죽음을 맞는다.

“삶이 평탄했더라면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던 그의 고백은 역설적으로 문학이 없었더라면 외로움과 배고픔과 두려움 속에 살아남기 어려웠을 그의 삶을 설명한다. 독서광이었던 진주여고 학생 시절 문학은 외로운 그의 친구였고, 노모와 어린 딸을 부양해야 했던 시절 소설은 밥벌이가 되어주었다.

“꾹꾹 누르고 있다가 마지막 해를 넘기는 날 같은 때는 한 번씩 창자가 끊어지듯이 울던”(딸 김영주) 그는, 1950년대 말 <불신시대> <암흑시대>로 개인적 아픔을 글로 풀어냈고, 1962년 장편 <김약국의 딸들>을 비롯해 <시장과 전장> <파시> 등 사회 부조리에 각을 세운 문제작들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그리고 25년의 길고 긴 고행을 예고하는 대하소설 <토지>는 1969년 6월 집필이 시작된다.

작가 박경리의 집념과 끈기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박경리 선생님이 들어앉으셨다, 전화도 끊고 사람들과의 모든 걸 다 끊고 들어앉아서 <토지> 집필을 시작을 하셨다, 별 소문이 다 났어요. 너무 들어앉아 있어서 다리를 못 쓰고 걷지를 못한다더라….”(작가 오정희)

작가 박경리를 이끌어 준 것은 엄마 박경리였다. 딸은 1973년 김지하와 결혼하고, 사위는 도피와 수감생활로 한 시대를 보낸다. 그 역시 유신시대의 핍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지만, 딸과 부모의 부양자였던 그는 딸의 남편, 외손자의 아빠 노릇까지 떠맡아야 했다. “어머니가 저만 보면 엄청 화를 내셨어요. 왜냐하면 속이 상해서, 딸만 쳐다보면 속이 상하는 거예요.”(딸 김영주) 박경리는 후배 작가들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선생님 댁은 제 친정집이었고 선생님은 제 친엄마였습니다”(작가 박완서)라는 고백이 자연스러울 정도였다.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사진 문화방송 제공

 

“나무는 고수요”…화천 광덕산 자작나무숲에 사는 우종영씨


[한겨레]


가족은 멀리 떼어두고 일주일에 5일, 홀로 지낸다

12년전 젓가락만했던

묘목들이 놀랍게 울창한데

“나무처럼 살고 싶다? 건방진 소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로 건방진 소리를 한 것이지요.”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광덕산 자락 자작나무 숲 속. 낡은 컨테이너집 처마 밑 평상에 걸터 앉은 그가

잡초로 덮힌 마당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4년 전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는 책을

냈던 우종영(51)씨다.

책 제목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나무는 무기물을 유기물로 만드는 최초의

생산자입니다. 인간처럼 번잡하게 움직이지 않고, 하늘과 땅의 기운만 받아 어느

생명체보다 오래 살아가지요.” 이처럼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경지를 닮겠다는 것

이상의 오만이 어디 있겠느냐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난 주 하루 낮 밤을

함께하며 들여다본 그의 생활은 그 고백이 지나친 겸양에서 비롯된 것임을 드러내

주었다.

그는 집 주변 땅 2500여평에 직접 심어 가꾼 나무들과 더불어 세상 누구보다

‘나무처럼’ 살고 있었다. 의정부에 가족을 두고 그는 요즘 일주일에 5일은

광덕산 자락 자작나무 숲 속에서 홀로 지낸다. 그곳에서 마치 나무가 햇볕과 물과

이산화탄소만으로 살아가듯이 늘 직접 지은 밥과 반찬 한 가지로 끼니를 때운다.

이따금 지인들이 막걸리통을 들고 찾아오는 날은 나무로 치면 기름진 거름 세례를

받는 날인 셈이다.

그곳에서 그는 나무들이 건네는 이야기를 듣고, 나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다. 나무를 더 잘 이해시키기 위한 글을 쓰는 것도 주요 일과다.

15년 전부터 집 주변에 심기 시작한 20여종의 나무들은 이제 예전만큼 그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특히 12년 전 젓가락만한 묘목으로 심었던 자작나무들은 이제

꾀꼬리가 둥지를 매달 정도의 숲을 이뤘다.

나무에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 그는 ‘나무의사’로 불리는 유명인이다. 그런

별명이 붙은 것은 나무들의 호소를 읽어내는 눈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런 능력은

지난한 노력으로 얻어졌다. 그는 천문학자의 꿈을 키우던 소년이었다. 자신이

색맹임을 뒤늦게 안 소년에게는 하늘의 별이 모두 떨어진 듯했다. 다시 밤하늘을

올려다 보기 고통스러웠던 소년은 땅으로 눈길을 돌렸다. 거기에 땅의 별인 꽃과

나무가 있었다. 원예백과사전을 외울 정도로 매달렸고, 나무를 잘 돌본다는 이들을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구했다.

지금까지 살려낸 나무 중에 특히 기억에 남는 나무를 물었다. 아마 수십번도 더

받았을 질문일 터였다. 뜻밖이었다. 마지못해서 대답하는 투로 “살려냈다고

내세울 만한 나무가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사람들이 저를 찾는 것은 대개

나무의 병이 말기까지 진행됐을 때입니다. 그러다보니 죽어간 나무에 대한 기억이

더 많습니다. 응급치료로 살아난 듯 보여도 그것이 나무를 근본적으로 살린

것인지에 대해 자신할 수 없기도 하고요.” 그가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무의사’로 부르지 말아달라고 부탁아닌 부탁을 하는 것도 그런 연유다.

“동물과 달리 나무는 병에 걸려도 금방 표현을 못합니다. 잎이 지고 가지가

마르는 등 누가 봐도 병이 든 것을 알 수 있을 때는 이미 회복이 어려운 단계에

접어든 상태이기 십상이지요.” 그래서 그는 나무 한 두 그루를 잠시 구할 수 있는

‘의사’이기보다는 나무를 올바로 사랑하는 법을 전파하는 ‘전도사’로 불리기를

원한다. 사람들에게 나무의 병이 중병으로 진행되기 전에 알아챌 수 있는 눈을

길러주고 싶다는 것이다. 그가 나무를 소재로 동화 2권을 포함해 모두 5권의 책을

내고, 또 나무에 대한 종합 정보서를 준비중인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광덕산 자락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는 그를 아무 때나 밖으로 불러낼 수 있는

일이 하나 있다. 잠재적 가치가 뛰어남에도 수령이 200년이 안됐다는 이유로

보호수로 지정되지 못하는 나무들을 보호하는 일이다. 현재 보호수로 지정돼 있는

나무들은 아무리 보호를 잘해도 언젠가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금부터

미래의 보호수감을 찾아내 돌보지 않으면 후손들은 바라보고 보호할 만한 나무를

갖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걱정 때문이다.

그런 일 가운데서도 그가 특히 정성을 쏟는 것은 전국 여러 마을의 정자수와 좀

더 자라면 정자수가 될 가능성이 높은 나무를 돌보는 일이다. “여름철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는 정자수 아래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온 동네 사람이 모여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정자수를 가진 마을과 못 가진 마을은 그래서 분위기부터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나무 상당수가 1970년대 이후 개발 과정에서

죽어갔습니다. 마을길을 넓히는 와중에 뿌리를 다치거나 주변 땅이 콘크리트로

덮씌워진 것 등이 원인이 됐지요.”

점심 식사 뒤 시작된 그의 나무 이야기는 백두산을 거쳐 몽골의 초원, 텐샨북로로

밤 늦도록 이어졌다. “먼 옛날 지구에 나타난 최초의 생명체는 몸을 움직이는

쪽과 움직이지 않는 쪽으로 나뉘어 경쟁적으로 진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두

방향에서 각각 최고의 단계에 도달한 생명체가 인간과 나무입니다. 우리가 나무를

바라보는 것은 움직이는 쪽의 고수가 움직이지 않는 쪽의 고수를 바라보는

것이지요.” 기자를 배웅하며 그는 “사람들이 고수가 고수를 대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나무를 대해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화천/글 김정수 기자 jsk21@hani.co.kr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가지치기 잘못하니 썩는다

우종영씨는 “길거리에서 썩어가는 나무들을 살펴보면 가지치기 잘못이 원인이 된

것이 태반”이라고 안타까와 한다. 그가 어디를 가든 작은 톱을 지니고 다니는

것은 이런 안타까움에서다. 가지치기가 잘못돼 병들 우려가 큰 나무를 만나면

틈나는대로 ‘수술’을 해주려는 것이다. 그는 기회있을 때마다 사람들에게

“가지치기만 제대로 해도 많은 나무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다”며 다음과 같은

가지치기 방법을 ‘전도’하고 있다.

침엽수의 가지는 줄기에 바싹 붙여 자르면 된다. 문제는 활엽수다. 활엽수 가지를

자를 때는 잘라낼 가지에서 줄기쪽으로 비스듬하게 나 있는

‘수피융기선’(그림㉠)의 위에서 아래로 가상의 수직선을 그은 뒤, 수피융기선의

각도만큼 벌린 선(그림㉡)을 따라 잘라야 한다. 잘라진 가지의 남은 부분이 길면

줄기의 껍질이 잘린 부위를 덮는 ‘유합’이 잘 안돼 줄기까지 썩게 만들수 있다.

잘려나가는 가지의 무게 때문에 줄기가 찢어지는 일을 막기 위해 아래쪽부터 먼저

톱질을 해놓고 위쪽에서 아래로 자르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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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나무 의사 생활 20년 우종영씨…“울고 있는 나무 본 적 있나요”

그를 만나면 “본업이 도대체 뭐냐”고 묻는 이들이 많다. 오지에 가면 여행가,사진기를 들면 사진가,나무를 만나면 정원사,펜을 들면 작가가 된다는 사람,나무 의사 우종영씨(50)다. 아픈 나무를 치료하고 건강한 나무는 잘 자라도록 돌봐주는 것이 나무 의사인 그의 본업. 하지만 여행하며 나무를 만나고 사진 찍고 글 쓰는 일도 결국 나무를 지키는 일이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씨가 이번에는 나무의 1인칭 시점을 빌린 에세이 ‘나무야,나무야 왜 슬프니?’를 펴냈다. “고로쇠나무에 드릴로 구멍을 낸 뒤 수액을 빨아대는 사람들을 보며 문득 흡혈귀가 생각났다”는 우씨는 “무참한 살상 현장을 보고 며칠 몸살한 뒤 나무 입장에서 나무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결심했다”며 출간 이유를 설명했다.

눈 뜬 사람보다 나무의 상태를 더 잘 아는 서울 팔판동 맹인 할아버지,“죽은 내가 산 나무의 자리를 차지해서 되겠느냐”며 사후 매장을 거부한 천리포 수목원 민병갈 박사,경기도 하남의 나무 고아원에 모인 상처투성이 나무 등 20년 나무 의사로 일하며 만난 사람과 나무가 책의 소재가 됐다.

에세이는 픽션 형식을 가미했지만 실린 내용은 모두 실화. 강원도 산골 마을에서 서울 극장 앞으로 이사왔다가 석유 세례를 받고 죽을 뻔한 어린 소나무 이야기 ‘어느 한 가로수의 독백’(1장)은 서울 시내 모극장 앞 소나무를 모델로 했다. “도시 가로수는 벌레와 새가 이동하는 생태 네트워크예요. 느티나무 거리에 소나무를 끼워넣는 일은 있을 수 없죠. 근데 이 극장 앞 느티나무 중 한그루가 어느날 소나무로 바뀌어있더군요. 간판을 가리는 느티나무 잎이 눈엣가시였던 극장 주인이 손을 쓴게죠”

우씨의 원래 꿈은 천문학자였다. 중학교 때 이미 천체 망원경을 조립해 별을 관찰했을만큼 하늘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색맹이라는 사실을 알고 꿈을 접었다. 설상가상 어려운 가정 형편에 간신히 들어간 고등학교는 등록금이 없어 3개월만에 쫓겨났다. 절망 속에서 그가 찾아간 곳은 서울 방배본동 화훼단지. 유일한 위안이었던 나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원예대백과사전을 달달 외우며 중졸이라는 학력의 한계를 극복한 우씨는 ‘걸어다니는 식물 도감’으로 통할만큼 인정받았다. 군대 제대 후 중동 건설 노동자로 돈을 모아 시작한 농삿일이 실패한 뒤 그의 맘을 다잡게해준 것 역시 나무. 우씨는 85년 ‘푸른 공간’이라는 나무 병원을 세우고 나무 의사로서 새 삶을 시작했다.

지난 95년 우씨는 실크로드 종단 생태 기행을 덜컥 시작했다. 북만주에서 시작해 몽골까지 벌써 15번이나 오가며 나무와 야생화 등 식물 자료 사진만 6만장 가까이 확보했다. 올해는 카자흐스탄에서 시작해 터키까지 기행을 마무리하고 ‘실크로드 생태 도감’을 낼 계획이다. “지금은 다들 관심이 없지만 경의선 철도만 뚫리면 중앙 아시아가 바로 우리의 무대가 될 겁니다. 그 때를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버는 것 없이 쓰기만 하니 재산이 모일리 없다. “서울 정릉 고향에서 매년 1㎞씩 외곽으로 밀려나 이제 의정부에 살고 있다”는 우씨는 “그래도 평생 발품 팔아 다니며 본 산과 나무가 평생의 재산”이라며 껄껄 웃었다(우종영·중앙M&B).

이영미기자 ymlee@kmib.co.kr

[j Focus] 구보타 시게코 백남준의 부인 [중앙일보]

암 걸린 나에게 남준이 말했어요‘우리 결혼하자, 당장’

구보타 시게코(久保田成子·73)

시대를 풍미한 비디오 아티스트 고(故) 백남준 선생의 부인인 일본인. 우리가 알고 있는 구보타 여사에 대한 지식은 대충 이 정도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이 14점에 달하는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예술가 구보타’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적다(MoMA는 백남준의 작품도 14점 소장하고 있다). 그뿐이랴. 구보타가 미술학도였던 소녀 시절, 백남준에 관한 신문기사를 읽고 “훌륭한 예술가가 되어 이 남자를 잡고 말겠어”라고 다짐했으며 실제로 그 꿈을 이루었다는 이야기도 아직 귀에 설다.

뉴욕 웨스트베스 작업실에서의 백남준과 구보타 시게코. [톰 하르 제공]

이 모든 이야기를 속속들이 담은 책, 『나의 사랑, 백남준』(이순)이 나온 건 그래서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 ‘백남준’이라는 꿈을 향해 돌진해 그 꿈을 이루고 백남준과 어깨를 나란히 한 당당한 여성 예술가 구보타의 이야기를 담았다. 백남준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시게코, 젊었을 때 당신은 내게 최고의 연인이었소. 이제 늙으니 당신은 최고의 어머니, 그리고 부처님이 되었구려”라고 쓴 메모 등 흥미로운 자료도 그득하다. 구보타 여사가 “나의 친구”라고 부르는 본지 남정호 국제부장과 공동 집필했다. 출판을 기념해 한국을 찾은 구보타 여사를 숙소에서 만났다. 양손에 지팡이를 짚고 이동해야 할 정도로 몸이 불편하지만 눈은 초롱초롱했고 말은 다정다감했다. ‘백남준의 아내 구보타 시게코’가 아닌 ‘인간 구보타 시게코’를 소개한다.

글=전수진 기자

“남준은 나의 ‘욘사마’”
사진=박종근 기자
● 책 내용이 진솔합니다. 출판을 결심한 계기는 무엇인지요.

“내가 올해 일흔셋이에요. 남준이 (2006년에) 떠난 나이지. 빨리 뭔가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쓰면서 많이 울었지. 내 인생이 이랬구나. 어떤 친구들은 책 내지 말라고 했어요. 책 내용이 너무 솔직해서 나와 남준의 위신이 사라질 거라나 뭐라나. 하지만 우린 예술가인걸. 위신이 어디 있어. 남준의 지론이기도 하지만 예술엔 고급·저급의 구분이 없어요. 이 책은 내게 남준과 내 인생의 역사를 담은 소중한 박물관이에요.”

● 백남준 선생과의 첫 대면은 1964년 6월 요미우리신문 기사였지요.

“‘파괴의 미학’이라는 제목의 인터뷰 기사였는데 이 남자가 어찌나 영화배우같이 잘생겼던지(웃음). 남준은 나에게 ‘욘사마(한류스타 배용준의 일본 애칭)’였어요. 어떻게든 내 남자로 만들겠다고 결심했어요. 그 기사를 오려 책상 앞에 붙여놓고 매일 보며 기도했지요. 만나게 해 달라고. 간절히 바란다면, 기회는 반드시 와요. 사랑의 기회이든 성공의 기회이든.”

● 여사는 기회를 기다린 게 아니라 직접 만들었지요. 백남준 선생 도쿄 공연 관람 후 찾아가 함께 차를 한잔 하자고 하셨다면서요.

“기회는 누군가 거저 주는 게 아니에요. 포기하지 말아야죠. 내 기회는 내가 만들었어요. 그게 내 인생을 만들었고. 친구에게 ‘나도 유명한 예술가가 돼서 이 남자를 꼭 잡을 거야’라고 했었어요. 남준은 강한 여성을 좋아했어요. 그 뒤 약 1년 뒤 남준이 도쿄에서 전위예술 퍼포먼스를 했어요. 공연 후 용기를 내 친구들과 무대 뒤로 갔어요. ‘차나 한잔 하자’고 제의했지요. 그도 흔쾌히 응했지. 그런데 남준도 같은 해에 내 전시를 보러 온 적이 있더라고요. 나중에 뉴욕에서 만났을 때 ‘당신 전시, 참 좋았다’고 말해줘 알았어요. 남준은 ‘겹겹의 우연이 우리의 인연을 만들었다’고 말하곤 했죠.”

‘비디오 아트 커플’, 뉴욕서 맺어지다

● 뉴욕으로 이주할 생각은 어떻게 하셨나요.

“앞에서 언급한 내 전위미술 전시회를 보수적인 일본 미술계는 외면했지요. 답답했어요. 예술가로 성공하려면 뉴욕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현대무용을 한 이모 덕에 오노 요코며 전위예술 모임이었던 플럭서스 운동 동료 예술가들도 알고 있었고요. 64년 7월 미련 없이 비행기를 탔어요. 남준도 뉴욕으로 왔고, 자연스레 재회했어요. 그러다 어느 여름, 자연스레 연인이 됐고 곧 ‘남준의 실질적 아내’로 불리기 시작했지요.”

● 책에서 당시 백남준 선생은 피아니스트 샬럿 무어만과 순회 공연을 많이 다녔다고 하셨는데, 투명한 비닐만 몸에 감고 무대에 오르는 퍼포먼스 등이 많았다지요. 질투 안 나셨어요.

“왜 질투를 해요? 내가 그 여자보다 더 똑똑한데. 샬럿도 훌륭한 예술가였지요. 하지만 난 샬럿처럼 유명해지기 위해 옷을 벗고 술을 마시고 무대에 서진 않았어요.”

● 그러다 여사도 백남준 선생의 친구이기도 했던 유대인 작곡가 데이비드 베어먼의 청혼에 응하셨죠.

“질투는 하지 않았지만 외로웠어요. 가난한 예술가이니 생활은 어렵고, 언제까지 남준을 기다려야 하는지 괴롭기도 했어요. 남준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천재였지요. 사랑은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게임이고. 그러다 보니 나도 지쳤었죠. 그때 데이비드가 계속 청혼을 해왔고, 남준에게 물었더니 ‘그래, 데이비드와 결혼해. 난 결혼 같은 것과 맞지 않는 사람이야’라고 하더군요. 안타까움 속에 남준을 떠났죠.”

● 그러다 3년 만에 이혼하고 돌아오셨는데요.

백남준의 개인전 ‘일렉트로닉 아트 3’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존 레넌, 오노 요코, 백남준, TV 엔지니어 아베 슈야(왼쪽부터). [아베 슈야 제공]
“시댁과 갈등이 있었어요. 일본인과 독일인을 호전적이라며 내 앞에서 대놓고 욕하는 시아버지와 특히 사이가 안 좋았고. 결국 떠났어요. 그러곤 당장 남준에게 전화를 걸었죠. ‘당신이 있는 곳으로 당장 가겠다’고. 남준은 잠시 침묵하더니 ‘그래, 시게코 마음대로 해’라고 했죠. 남준의 곁으로 돌아간 밤, 긴 여행에서 돌아온 듯 아주 편하게 잘 수 있었어요. 남준과 저는 지그재그로 먼 길을 돌아온 셈이에요.”

슬픈 결혼식

● 그러다 76년 뉴욕 시청에서 결혼식을 올리셨어요. 백남준 선생이 결혼하겠다고 마음을 바꾼 계기는 무엇인지요.

“아기를 갖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이가 생기질 않아 병원엘 갔다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어요. 자궁암이라 자궁을 들어내야 한다고요. 엄청난 수술비·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어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짐을 싸는데 남준이 오더니 ‘시게코, 우리 결혼하자. 당장!’이라고 하는 거예요. 일순 ‘당신 결혼 퍼포먼스를 하려고요?’라고 물어볼 뻔했어요. 그런데 남준이 설명하길 결혼하면 자기가 들어놓은 보험 혜택을 볼 수 있다는 거예요. 괜히 부담주기 싫어서 거절했지요. 하지만 남준은 ‘시게코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야. 난 시게코가 떠나길 원치 않아. 난 아이 가질 생각도 없어. 예술 하는데도 시간이 모자란 걸’이라고 하더군요. 바로 다음날 식을 올렸어요.”

● 원했던 결혼이지만 행복하지만은 않았겠군요.

구보타 시게코의 작품 ‘비디오 체스’에 알몸으로 나온 백남준과 구보타. [구보타 시게코 제공]
“우울했죠. 하지만 남준은 덜컥 유부남이 됐다고 신기해하는 친구들에게 끝까지 의료보험 얘길 안 꺼냈어요. 내 자존심을 지켜주려 그랬던 것 같아요. 고맙죠.”

예술가 구보타

● 여사의 작품세계에 대해 얘기해 볼까요. 마르셀 뒤샹에게서 영감을 받은 ‘계단을 걸어오는 나부’ 등이 유명한데요. 유명 미술잡지 ‘아트 인 아메리카’에 백남준 선생보다 먼저 다뤄지셨죠.

“남준은 실험정신이 투철한 천재였어요. 그만큼 평론가들이나 대중이 소화하기에 난해한 부분도 있었어요. 하지만 난 조각을 공부했고, 예술품이 어떻게 보여지는지 세련되게 다듬을 줄 알았어요. 그런 점이 좀 달랐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중요한 건 우린 서로에게 아게만(あげまん·‘남편을 잘 되게 해주는 여자’란 뜻)이었다는 거죠. 서로에게 영감을 받은 작품도 많고.”

● 지금은 어떤 작업을 하고 계신지요.

“남준이 96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10년간은 돌봐주느라 바빠서 작품활동을 못했지요. 하지만 이젠 돌볼 남편도 없고. 나에겐 예술밖에 없어요. 이젠 시간도 많고. 맘껏 그림을 그리고 맘껏 조각할 거예요. 내년 6월쯤엔 서울에서 전시회를 열 계획으로 열심히 준비하고 있어요.”

● 뇌졸중으로 두 분 다 힘드셨을 것 같습니다.

뉴욕 웨스트베스 작업실에서의 백남준과 구보타 시게코. [톰 하르 제공]
“남준은 쓰러지고 나서 세상은 너무 불공평하다고 했어요. 하지만 몸의 왼쪽이 마비되고 오른손으론 자유롭게 작업을 하고 언어감각을 관장하는 우뇌도 무사해서 말하는 데 불편도 덜 했어요.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난 오히려 365일 24시간 남준을 온전히 내 남자로 둘 수 있던 시간에 행복감을 느끼기도 했답니다. 하지만 아직도 남준이 죽은 건 이해가 안 돼요. 난 사람들이 왜 죽어야 하는지 모르겠어. 삶이 이렇게도 멋진데. 하지만 삶은 항상 아름답지만은 않고, 그건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지. 죽으면 남준을 다시 만날 거라 믿어요. 만나면 또 예술에 대해 신나게 얘기해야지.”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1932.7.20~2006.1.29)

[PORTRAIT ESSAY] 이은주의 사진으로 만난 인연

| 제176호 | 20100724 입력
도쿄대와 뮌헨 루드비히막시밀리안대에서 수학했다.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미술집단 플럭서스(Fluxus) 일원으로 활동. 1963년 독일 부퍼달 파르니스 화랑에서 개최한 첫 개인전 이후 비디오 아트를 예술로 승화했다는 평을 받았다. 77년 위성TV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발표했다. 96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에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93년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 2000년 금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왼쪽 사진은 92년 가을 경주를 찾은 백남준. 오른쪽 사진은 뉴욕 자택에서 전자오르간을 치고 있는 모습.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천재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선생이 돌아가신 지 내년 1월이면 벌써 5년이다. 지난 20일은 백 선생님 생신이었다. 올가을부터 일본과 미국에서 5주기 추모전을 하기 위해 선생님 사진을 정리하다가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오르간을 치던 사진 앞에서였다. 당시 선생님은 나를 옆에 앉히고 ‘울밑에선 봉선화야’를 불러 주셨다. 고국에 대한 사랑과 향수가 전해졌다. 예술적 카리스마로 범접하기 어려울 것만 같은 백 선생님은 이렇게 소년 같은 순수함과 따뜻한 가슴이 있는 ‘오빠’ 같은 분이었다.

마지막 전시가 열렸던 2000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한국에서 온 여자 사진가가 내 작품을 찍을 수 있도록 부탁한다”는 친필 서신을 들고 이곳을 찾았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개장 시각인 오전 9시가 채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줄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니.

선생님은 장례식 때도 나를 다시 놀라게 했다. 장례식 자체가 하나의 공연이었기 때문이다. “은주, 사진 예쁘게 찍어 줘” 하시던 목소리와 웃음이 아직도 들려오는 듯하다.

 

[만물상] 침과 뜸

 
미국 샌디에이고 의대 교수를 지낸 산부인과 의사 폴 브레너는 1971년 스탠퍼드대에서 열린 침술 학술대회에 초청받아 갔다. 그는 거기서 중국의 침술 화면을 보고 기절초풍했다. 중국 의사들이 가정용 드릴로 환자 두개골에 구멍을 뚫으면서 마취라고 한 게 환자 왼손 엄지와 검지 사이에 은색 바늘 하나를 꽂은 게 전부였다.

▶환자는 무자비한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의식이 말짱한 채 지루해하는 표정이었다. 서양 의학이 전부라고 믿어온 브레너는 반신반의하며 실험을 해봤다. 두 의대생에게 전기저항계로 상대방 몸을 짚어가며 전기 저항력이 떨어지는 부위에 펜으로 점을 찍도록 했다. 점들의 위치는 4500년 전 중국 침술자료에 나온 경혈(經穴)과 거의 그대로 일치했다. 그는 현대적 과학 지식과 작별하고 침술에 몰입했다.

▶침이나 뜸, 명상, 최면술 같은 대체의학으로 난치병을 고친다는 명의(名醫) 얘기는 우리 주위에도 많다. 1906년생이라는 장병두옹(翁)은 40년 넘게 침으로 병을 고쳐와 전설적 명의 '화타'로 불렸다. 그러나 의료인 면허 없이 진료를 해왔다는 이유로 1·2심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대법원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침과 뜸으로 치료해온 1915년생 김남수옹도 재작년 서울시로부터 45일 동안 침사(鍼師) 자격정지를 당했다. 침사 자격만 있을 뿐 구사(灸師·뜸사) 자격이 없는데도 뜸을 떴다는 이유였다.

▶침·구사 면허제는 일제 때부터 있다가 1962년 의료법이 개정되면서 폐지됐다. 그 전에 침·구사 면허를 받은 사람들 말고는 한의사만 침뜸을 놓을 수 있다. 의료법엔 "한의사를 포함한 의료인이 아니면 의료행위를 할 수 없고 의료인도 면허된 것 이외의 의료행위를 할 수 없다"고 돼 있다. 현재 면허 없이 침뜸을 놓는 침구인이 30만명이라고 한다. 이들은 의료법이 위헌이라며 침구사 면허제 부활을 주장해왔다. 한의사들은 정규 한의학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의료행위를 허가해선 안 된다고 맞서 왔다.

헌법재판소가 어제 이 의료법 조항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말기암이나 불치병 환자들은 의사 면허에 상관없이 용하다고 소문난 사람에게 기대려 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의료인 자격의 물꼬를 마냥 터 버릴 수도 없다. 헌재가 이번에 한의사 쪽 손을 들어줬지만 '재야의 고수(高手)'들을 어찌해야 할지는 여전히 논란거리로 남았다.

- 인왕산 鶴학巢소島도에서 최범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