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술꾼 아니랄까, 읽는 내내 군침이 꼴깍꼴깍 넘어간다. 설악산 맑은 물로 담근다는 속초 비닐천막 주막의 막걸리, 여수에서 배 타고 두 시간이나 들어가야 접할 수 있는 작은 섬의 막걸리, 그리고 60년 동안 전통 누룩과 엿기름으로 만들어온 밀양의 동동주는 첫맛은 은은하게 달면서도 뒷맛이 깔끔해서 웬만큼 마셔도 질리지 않는단다. 참새가 방앗간 생각을 멈출 수 있으랴. 입에 침이 고이는 것으로 모자라 엉덩이까지 들썩인다. 부럽다! 가보고 싶다! 맛보고 싶다!

조금 지나서야 글쓴이가 눈에 들어왔다. 어라, 여성이네? 이것 참, 놀랍다. 주당 인생 몇십 년에 여성이 쓴 술 이야기에 이렇게 달뜬 적이 있었던가.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김학민 출판인, 이은홍 만화가 등 장안의 내로라하는 ‘남성’ 술꾼의 책은 남부럽지 않게 섭렵했지만, 여성이 쓴 술 이야기는 어색하면서도 신선하다. 더욱이 와인도 칵테일도 아닌, 막걸리라니!

   
ⓒ시사IN 안희태
정은숙씨(위)는 막걸리를 ‘일기일회(一期一會)의 맛’이라고 표현한다. 그때그때 풍미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에게 막걸리란 날마다 새롭고 설레는 무엇이다.
몇 해 전부터 불기 시작한 막걸리 바람이 점점 거세지는 가운데 국내에서 처음으로 막걸리 관련 서적이 출간됐다. 전국 각지에 흩어진 양조장과 대폿집 이야기를 기행문 형식으로 엮은 <막걸리 기행>(한국방송출판 펴냄)이라는 책이다. 날고 기는 ‘술 이야기꾼’이 즐비한 한국 사회에서 책의 저자 정은숙씨(43)는 낯설다. 그도 그럴 것이 정씨는 지난 10여 년 동안 주로 일본에서 일했다. 관광학을 배우러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가 우연히 한국 문화를 소개하는 글을 쓰게 되었고, 아예 한 출판사의 전속 작가로 자리를 잡았다. 아사히신문 사이트에 한국 문화를 소개하는 칼럼 ‘스파이시! 서울’을 연재하고 있고, <지방마다 다른 한국인의 모습> <맛있는 한국음식기행> 등 한국 문화와 한국 음식을 소개하는 책과 번역서를 여러 권 펴냈다.

지난해 일본 내 막걸리 열풍을 주도한 것으로 한 방송 프로그램에 소개된 <막걸리 기행>이 바로 정씨가 쓴 책이다. 이번에 나온 <막걸리 기행>은 그 책의 한국어 번역본인 셈이다. 국내에서도 출간한 지 한 달 만에 벌써 재판을 찍었다. 비록 일본에서 먼저 출간되었지만, 책 속에는 어느 매체에서도 접할 수 없었던 막걸리와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술도가 대를 잇는 젊은이들 반가워”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씨는 “막걸리 기행이 아니라 막걸리 마시는 순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순례기로 읽혔다”라고 추천사를 썼다. 정씨와 추천사를 쓴 황교익씨를 서울 종로3가 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정씨는 존경하는 음식 평론가로 황씨를 꼽고, 황씨는 한·일 음식문화 교류에 징검다리를 놓을 사람으로 정씨를 평한다. 잘 삭은 홍어 삼합 안주를 앞에 놓고, 주인장이 직접 담근 막걸리를 마시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남성들은 술에 대해 허위의식이 있어요. 명주, 명문 술도가의 술… 안동소주가 어떻더라, 이강주가 어떻더라. 양주도 몇 년산이 어떻고…. 이게 다 허위의식인데, 정은숙씨 글에는 그런 게 없어요. 그러니까 막걸리 기행이 가능한 거야.”(황교익)

“맞아요. 제가 여성이어서 이런 책을 쓸 수 있었다고 봐요. 술집에서 만취하는 대신, 좀 더 섬세하게 대폿집을 관찰할 수도 있고…. 그런데 저는 술 마시는 게 사실 많이 남성화됐어요. 그러니까 거리낌 없이 대폿집 다니고, 아저씨들과 어울리고 그랬죠. 주량도 때에 따라 다르지만 2병 정도는 되죠(웃음).”(정은숙)

이날 홍어 음식점에서 맛본 막걸리는 범상치 않았다. 주인장이 치악산 아래에서 직접 담근다는 막걸리는 전통 누룩 향이 짙으면서도 쌀로 빚어 뒷맛이 텁텁하지 않고 깔끔했다. 언뜻 보면 빛깔이 노래서 밀가루로 담근 것인 줄 알았다. 기자가 “확실히 쌀로 빚어 깔끔한 것 같다”라고 말을 꺼내자 정씨가 다른 생각을 내놓는다.

“요즘 어디 가서 나 밀 막걸리 좋아한다고 하면 무시당하고는 하죠. 그런데 밀 막걸리도 미덕이 있어요. 굉장히 부드럽고 풍미가 좋죠. 양조장 분들은 밀가루가 좀 들어가야 더 구수하고 맛있다고들 해요. 밀 막걸리가 뒤끝이 안 좋다는 건 재료가 아니라, 제조와 유통 문제라는 거죠.”

신선한 이야기였다. 언젠가부터 주당들 사이에서는 밀 막걸리가 우리 술 문화를 망가뜨린 주범이라는 인식이 정설처럼 굳어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쌀로 술 빚는 것을 금지하면서 등장한 밀 막걸리에 대한 반감, 그리고 발효 속도가 빠른 밀 막걸리의 특성상 상한 술을 접할 위험성이 높은 현실 등이 뒤섞인 탓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밀 막걸리를 고집하는 지역 양조장 장인들은 억울하다는 생각이다. 빨리 술을 제조하기 위해 누룩을 과하게 넣거나, 충분히 숙성시키지 않아서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막걸리 기행>에도 지역 양조장 장인들의 이런 ‘항변’이 실려 있다. 황씨 역시 “우리 농민들 생각하면 쌀 막걸리를 마셔야 한다고 보는데, 사실 밀 막걸리가 더 맛있기는 하다”라고 거들었다.

정씨의 ‘밀 막걸리 사랑’은 지역 영세 양조장 사람들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되었다. 지역 양조장을 순례하면서 그는 많은 사연을 접했다. 사업에 실패한 후 고향에 돌아와 집안 양조장을 물려받은 이, 어릴 적 술도가에서 마시던 술맛을 잊지 못해 잘되던 사진 스튜디오를 접고 술 빚기에 나선 이 등. 그들의 공통점은 최근 막걸리 열풍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막걸리 열풍은 오히려 시골 구멍가게에까지 대기업 막걸리가 진출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최근에 지역 양조장 분들에게 연락해보니까 한숨만 쉬시더군요. 도태되어야 할 것은 도태되어야 한다는 논리 속에 문화적 가치가 있는 것들조차 사라질까 두려워요.”

그래도 정씨는 희망을 본다. 요즘 들어 가업을 물려받겠다는 양조장집 자식이 하나둘 늘어가고 있어서다. 정씨가 처음 막걸리 취재에 나설 때만 해도 대다수 양조장 주인들은 “이런 일을 어떻게 자식에게 물려주느냐”라며 손을 내저었다. 1년 내내 아침이고 밤이고 술독만 쳐다봐야 하는 이 궂은일을 물려받겠다는 자식도 없었다.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에서처럼 이제 우리나라에도 젊은 술도가 주인의 시대가 열리는 것일까.

   
ⓒ시사IN 안희태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씨(왼쪽)가 술자리에 동석해 이야기꽃을 피웠다.

정씨가 막걸리 책을 쓰기로 작정한 것은 2005년. 서울 한 대폿집에서 일본인 동료들과 막걸리를 마시다 요즘 일본에서 술과 술집 기행문이 인기를 끈다는 이야기를 나눈 게 계기였다. 당시만 해도 막걸리 붐을 감지하기 어렵던 시절이었다. 뜻밖에 일본의 한 기획사 대표 야마시타 씨가 흔쾌히 출간에 동의했고, 그때부터 정씨의 막걸리 기행은 시작되었다. 영화 <고래사냥> 주인공이 시골 주막에서 막걸리를 마시는 모습에 매료돼 진작부터 막걸리 마니아가 된 야마시타 씨와 함께였다. 그러니까 국내 최초의 막걸리 서적은 한·일 합작으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셈이다.

<막걸리 기행>에는 마니아라면 누구나 궁금해할 만한 여러 의혹(?)에 대해서도 다양한 견해가 펼쳐진다. 가령 전남 해남 산이양조장 주인은 요즘 막걸리 맛이 왜 이렇게 다디달아졌는지에 대해 “벼농사가 기계화되면서 남성 노동력이 줄어 그만큼 ‘노동주’인 막걸리를 마시는 남성도 줄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한다. 기계화하기 어려운 밭농사에 사람 손이 많이 가는데, 밭농사를 맡는 이가 대부분 여성이다보니 이들 입맛에 막걸리 맛도 맞춰졌다는 것이다. 막걸리 열풍이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불기 시작했음을 떠올리면 그럴듯한 설명이다.

양조장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이 책의 백미는 정씨가 일일이 발품을 팔아 직접 가본 지역의 대폿집 이야기다. 세상에 아직도 이런 곳이 있나 싶을 정도로 예스러운 대폿집들이 지금도 버젓이 문을 열고 손님을 맞고 있다는 사실은 반가움을 넘어 경이롭기까지 하다.

전북 남원시 대폿집 골목의 푸진 안주며 사랑가를 구성지게 불러젖히는 순천 대폿집의 여주인, 그리고 독재정권 시절 수배 중인 대학생을 숨겨준 대구 한 대폿집 할머니 이야기까지…. 우리네 이웃들의 절절한 사연과 정취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흠씬 묻어난다.

이를테면 부산 인근의 한 양조장을 찾아가기 위해 탄 기차에서 만난 전라도 출신 할머니들은 이런 예민한(?)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털어놓기도 한다. “부산도 이제 맛있는 집이 많이 늘었재. 근디, 옛날에는 형편 없었재. 여기 처음 와서 본께, 음식맛이 영 아니여라. 지금처럼 된 것도 전라도에서 온 사람들이 가르쳐놔서 그렇게 된 것이지라.” 타향살이 수십년 된 이 할머니들, 아마도 부산 토박이들에게는 쉽사리 꺼낼 수 없는 ‘속내’였으리라. 이런 속 깊은 이야기를 정은숙씨는 잘도 받아 적었다.

사라지는 것들은 모두 그립다. 정씨가 쓴 대폿집 이야기에 마음이 쏠리는 것은 그것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중이어서다. 막걸리 열풍과 함께 대를 잇는 술도가 자식들이 나타나듯 대를 잇는 대폿집 자식을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불을 밝힌 대폿집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한잔 술에 불콰해진, 그저 별일 없이 사는 우리 이웃의 얼굴도 그 대폿집 어딘가에서 밝게 빛나고 있을 게다.

“책을 쓰면서 일부러 대폿집 지도는 싣지 않았어요. 조금 헤매기도 하면서 찾아낸 대폿집과 그 집 막걸리 맛이 더 귀하게 느껴질 것이기 때문이죠. 아직도 지역에는 제가 못 가본 대폿집과 막걸리 양조장이 숱하게 남아 있을 거예요. 어때요, 막걸리 여행, 설레지 않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