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의 위험을 피해 물러나는 건 내겐 불가능한 일”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 <11>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나이가 들수록 『어린 왕자』의 독해가 더 힘들어진다. 생텍쥐페리는 진짜 사나이자 ‘영원한 어린이’였다. 그는 유일한 사랑을 갈구한 바람둥이요, 전쟁에 뛰어든 반전주의자였다.

김환영 | 제197호 | 20101219 입력
생텍쥐페리만큼 우정을 핵심 테마로 삼은 작가도 없다. 1m85㎝ 키에 건장한 체격인 그는 학창 시절 특이한 코의 생김새 때문에 놀림감이 됐다. AP=본사특약
서양과 달리 우리는 사랑보다는 ‘정(情)’을 중시해 왔다. 정은 서양 언어에는 없는 개념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을 주요 테마 중 하나로 삼은 서양 문학작품이 있다. 프랑스의 조종사·작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가 지은 어린 왕자(1943)다. 어린 왕자에는 프랑스어의 ‘길들이다(apprivoiser)’라는 동사가 특수하게 사용된다. 우리말로는 ‘정들다’로 번역해도 좋을 뜻을 담고 있다.

어린 왕자는 1억3400만 부가 팔렸으며 220개 언어로 번역됐다. 초기 반응은 뜨겁지 않았지만 어린 왕자는 생텍쥐페리 작품 중 가장 깊이 있는 책으로 점차 인정받게 됐다. 어린 왕자는 비행기 모터 고장으로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한 주인공이 소행성 B612에서 온 어린 왕자와 만나 우정·사랑·희망·지식·삶·죽음의 본질에 대해 배운다는 ‘지혜 문학’이자 ‘성인 동화’다. ‘인생은 도정(道程)이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동화 형식으로 돼 있지만 내용이 결코 쉽지 않다. 우수한 번역으로 인정받는 1943년 영문판에도 오역이 다수 발견됐을 정도다. “제대로 보려면 가슴으로 볼 수밖에 없다” “본질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제임스 딘이 좋아한 말)와 같은 작품 중 내용은 지식인층도 사로잡았다.

프랑스어판 『어린 왕자』의 표지.
생텍쥐페리의 정식 이름은 ‘앙투안 장밥티스트 마리 로제 드 생텍쥐페리’다. 그가 태어난 가문은 비록 몰락했지만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뼈대 있는’ 귀족 가문이었다. 어머니 마리 드 생텍쥐페리는 품위 있고 교양 있는 여성이었다. 남편이 병사하고 5명의 아이를 키워야 했지만 자녀 교육에 최선을 다했다. 그의 친정에는 음악가·예술가가 많았다. 예술가 기질을 타고난 그는 자녀들에게 음악·자연 교육을 시켰다.

어머니 덕분에 생텍쥐페리에게 유년기는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기간이었다. 생텍쥐페리는 13세에 ‘어느 모자의 오디세이아’라는 글로 상을 받고 글재주를 인정받았다. 편집장으로서 ‘메아리(L’<00E9>cho)’라는 학급 신문을 발행하기도 했다.

다른 많은 대문호의 경우처럼 생텍쥐페리의 모든 작품도 자전적이다.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와 우정을 나누는 조종사도 생텍쥐페리 자신을 투사한 것이다. 그는 비행기 조종사가 되기까지 낙방·실연·궁핍과 같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가 모든 고통을 잊을 수 있게 해 준 것은 비행이었다. 조종사가 된 뒤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마치 왕이 된 것처럼 행복합니다”고 쓰고 있다. 생텍쥐페리는 아프리카·중남미로 향하는 우편 항공노선을 개척했는데 당시 비행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비행기의 최고 고도보다 높은 산봉우리를 피해 비행해야 했다. 그는 세 번이나 비행 사고로 죽을 뻔했다. 그러나 생텍쥐페리가 그 어떤 문학사조에도 속하지 않는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비행 체험 덕분이다.

생텍쥐페리의 ‘장미’는 부인 콘수엘로
생텍쥐페리는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피터팬’이었다. 피터팬에게 웬디가 있었고 어린 왕자에게는 소행성에 두고 온 장미가 있었지만, 생텍쥐페리는 웬디를 찾지 못했다. 생텍쥐페리의 주변에는 어릴 때부터 항상 여자들이 있었다. 우선 그와 약혼하고 파혼한 루이즈 드 빌모랭이 있다. 한때 하늘을 향한 그의 집념을 꺾게 만든 계기가 되기도 한 여성이다. 어린 왕자에 나오는 장미와 가장 근접한 생텍쥐페리의 장미는 애증이 교차했던 아내 콘수엘로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가 유혹하고, 그를 유혹한 수많은 여자 있었다. 뉴욕에서 장기 체류하는 동안에도 생텍쥐페리는 그가 사교나 직업상 만나게 된 젊은 여성들과 친구나 연인 사이가 됐다. 러시아의 로마노프가 출신으로 배우였던 나탈리 페일리도 그중 한 명이다. 유럽으로 돌아온 생텍쥐페리는 미국에서 들고 온 어린 왕자로 어떤 여성을 ‘꼬이려고’ 한 적도 있다.

생텍쥐페리는 경제 생활에서도 어른이 되지 못했다. 어린 왕자에서 기업인은 소유한 것을 세느라 여념이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다. 생텍쥐페리는 항상 쪼들렸다. 유명 작가가 된 다음에는 많이 벌고 많이 썼다. 그는 진료비 지불 문제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쓰기도 했다. “친애하는 의사 선생님: 내가 지불해야 하는 돈의 잔금을 한 달에 30달러씩 분할해 지불하는 것을 제안합니다. 그 이상은 나로서도 어쩔 수 없습니다.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은행에 잔액이 한 푼도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사실 출판사 편집자가 선불로 준 돈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를 명상으로 이끈 사막의 침묵
어린 왕자의 배경 중 하나는 사막이다. 생텍쥐페리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사막에 대한 생텍쥐페리의 첫인상은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막은 그를 사로잡았으며 사막의 침묵은 그에게 명상을 할 수 있게 해 줬다. 생텍쥐페리는 사막에 사는 주민들을 적대시하거나 무시하는 게 아니라 이해하려 애썼으며 친교를 맺기도 했다.

생텍쥐페리는 팔방미인이었다. 비행 관련 특허를 10개나 내기도 했는데 일부는 전후 미국에서 실용화되기도 했다. 레이더의 원리 중 하나도 생텍쥐페리가 정립한 것이다. 그는 특허 갱신을 까맣게 잊어버리기도 했다. 내성적이었던 그는 사람들과 사귀기 위해 마술을 보여 주기도 했다.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의 삽화도 직접 그렸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편지에 작은 그림이나 만화, ‘그림 수수께끼(r<00E9>bus)’를 그려 넣는 습관이 있었다.

민간 항공기를 주로 조종하던 생텍쥐페리는 프랑스의 자유를 위해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한다. 그는 “전쟁은 모험이 아니라 질병이다”고 말한 평화주의자였지만 전쟁 속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생텍쥐페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쟁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눈앞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뒷전에 물러서 있는 것은 내게 불가능한 일이다.”

생텍쥐페리는 1940년 미국으로 건너가 모든 정치적 파벌의 프랑스인들을 한데 묶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프랑스가 우선입니다’는 제목으로 방송 연설을 한 적도 있다.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절규했다. “독일이라는 어둠이 프랑스를 뒤덮고 있습니다. 프랑스 민족이 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길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생텍쥐페리는 프랑스인들을 결집하는 데 실패했다. 그는 어린 왕자의 출간으로 왕정주의자라는 말까지 듣게 됐다. 그와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 샤를 드골의 관계도 껄끄러웠다. 생텍쥐페리는 권위주의적인 드골을 지지할 수 없었다. 생텍쥐페리는 독재나 권위주의에 반대하는 자유인이었다. 어린 왕자가 암시하는 것처럼 생텍쥐페리에게 터키의 혁명가 케말 아타튀르크(1881~1938)도 독재자에 불과했다. 생텍쥐페리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가 드골에겐 심각한 문제였다. 드골 측은 ‘생텍쥐페리는 독일 편’이라는 의혹을 공공연히 제기했으며 상심한 생텍쥐페리는 과음에 빠지기도 했다.

생텍쥐페리가 미국으로 간 이유 중 하나는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가를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어린 왕자에 나오는 ‘바오바브나무(baobab tree)’ 세 그루는 추축국인 독일·이탈리아·일본을 상징한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생텍쥐페리를 ‘참견꾼(interloper)’으로 간주했다.

어린 왕자처럼 자신의 죽음 예고
어린 왕자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다. 생텍쥐페리는 삶과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삶은 이렇게 흘러가는 것이다. 우리들은 풍요롭게 되고, 우리들은 여러 해 동안 나무들을 심는다. 그러고 나서는 죽음이 우리가 한 일들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우리가 심은 나무는 잘라 버리는 시절이 온다.” 생텍쥐페리는 아버지와 동생이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일찍 죽음과 대면했다. 조종사 동료들도 하나 둘 그의 곁을 떠났다.

동생의 죽음에 대해 생텍쥐페리는 이렇게 회상한 바 있다. “나는 14세 때 처음으로 배운 것이 있다. 그때 내 동생은 며칠 전부터 거의 살 가망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어느 날 새벽 4시쯤에 그의 간호사가 나를 깨웠다. ‘동생이 찾고 있어요’. ‘아픈가요?’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나는 급히 옷을 입고 내 동생에게 간다. 그는 평상시 목소리로 내게 말한다. ‘죽기 전에 형한테 말을 하고 싶었어. 나는 곧 죽을 거야’.”

“나는 죽은 것처럼 보일 거야, 사실은 아니지만 말이야.” 어린 왕자가 비행사에게 살짝 일러 준 말이다. 죽음을 앞둔 평온함은 생텍쥐페리가 사망하기 몇 년 전부터 그를 감싸고 있는 분위기였다. 자신의 동생이나 어린 왕자처럼 생텍쥐페리는 자신의 죽음을 친구들에게 예고했기 때문에 친구들은 그의 실종 소식을 듣고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는 1942년부터 안녕을 고하고 있었다.

1944년 7월 31일 생텍쥐페리는 미국산 쌍발기인 라이트닝 P-38을 개량한 정찰기를 몰고 코르시카의 비행장을 이륙했다.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레이더 스크린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가 죽음을 예고했기에 자살설이 제기됐다. 프랑스 사람들의 충격이 컸다. 생텍쥐페리는 2002년까지 프랑스 50프랑 지폐를 장식하기까지 한 국가적 영웅이었던 것이다.

한 어부가 1998년 생텍쥐페리의 신분 인식 팔찌를 발견했다. 2000년에는 정찰기의 잔해가 발견돼 2003년 인양됐다. 잔해가 발견된 곳이 원래 목적지와 멀리 떨어져 있고 정찰기가 수직으로 추락한 것으로 추정돼 자살설이 힘을 얻는 듯했다. 2008년에는 그가 독일 공군에 의해 격추됐다는 주장이 제기됐으나 독일·프랑스 측 조사는 결론을 내지 못했다.

생텍쥐페리는 자신의 이름을 표기할 때 일반적인 경우(Saint-Exup<00E9>ry)와 달리 하이픈(-)을 빼고 ‘Saint Exup<00E9>ry’라고 썼다고 한다. 하이픈을 빼면 ‘성(聖) 엑쥐페리’가 된다. 우리는 어린 왕자에서 어쩌면 완벽한 인간이 되고자 했던 ‘성인 엑쥐페리’를 만난다.

오랜만에 찾은 홍대앞 주말 밤 풍경

(아이폰4 촬영)

 

[icecake] 치킨의 경제학

 

[이데일리 이진우 기자] 뭐니뭐니 해도 먹고 사는 문제가 인류의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데 동의한다면, 20세기는 `치킨의 세기`라고 부를 만하다.

20세기 초 닭고기가 전세계 육류 소비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 미만이었지만 지금은 30%에 육박한다.

지금의 인류가 100년 전 인류와 다른 점을 식생활에 한정해서 찾는다면 닭고기를 입에 달고 산다는 게 가장 뚜렷한 차이점일 것이다.

닭고기가 주류 식품으로 떠오른 것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뛰어난 경제성 때문이다. 소의 체중을 1Kg 늘리기 위해서는 곡물을 평균 8kg정도 먹여야 하고 돼지는 4Kg 정도는 먹여야 하는데 닭고기는 그 수치가 2Kg 미만이다.

사료 배합기술이 뛰어난 닭고기 회사의 경우는 닭의 체중을 1Kg 늘리는 데 들어가는 곡물사료의 양이 1.3Kg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쯤 되면 닭은 곡물을 넣으면 비슷한 무게의 단백질로 바꿔서 토해내는, 살아있는 자판기에 가깝다.

닭고기의 경제성을 극대화하는 또 하나의 요인은 도축시점이다. 우리가 먹는 닭의 수명은 정확히 40일이다. 알에서 태어나 40일이 된 그 시점이 단위 사료당 체중 증가율이 극대화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 뒤로도 사료를 더 먹이면 체중이 늘긴 하지만 살이 빨리 찌지는 않는다. 사료의 `연비`가 떨어진다는 얘기다.

먹여봐야 살도 잘 안찌는 닭에게 사료를 주느니 그 닭은 잡아먹고 남는 사료는 다른 병아리들에게 먹이는 게 경제적이라는 판단에서 나온 인공적 수명이 바로 `40일`다. 자연 상태의 야생 닭은 평균 수명이 20년이 넘는다.

치킨 생산에 적용되는 이런 치밀하고 냉정한 경제학이 치킨을 분배하는 데는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건 대단히 유감이다.

정부의 `보이지 않는 손`은 롯데마트의 `통큰치킨`이 동네 영세상인의 생존권을 위협한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이 논란의 핵심은 대형 마트와 영세한 치킨집 사이의 충돌이 아니라 영세한 치킨집과 그보다 더 영세한 소비자들간의 갈등이다.

시장 원리보다는 영세한 치킨 업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상생(相生)의 논리를 받아들이더라도, 5000원짜리 통큰 치킨을 사먹는 소비자들 중에 그 영세한 치킨 업자보다 더 가난한 이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음을 보여준다.

롯데마트에서 5000원에 살 수 있는 치킨을 억지로 동네에서 1만5000원에 사먹어야 한다면 동네 치킨집에 마리당 1만원의 보조금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치킨세`를 가난한 이들에게도 일률적으로 걷는 게 합리적이냐는 논란이 남는다.

타협점이 없지는 않다. 영세한 동네 치킨집보다 더 어려운 서민들에게만 5000원짜리 통큰 치킨을 파는 것이다. 그걸 어떻게 구별해내느냐가 문제인데 시장은 이미 그 해답을 자연스럽게 찾아주고 있다. `얼리어닭터`라고 불리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얼리어닭터. 치킨을 사기 위해 마트에 아침부터 길게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일컫는 용어인데 이들을 조롱하는 듯한 용어의 뉘앙스가 불쾌하긴 하지만 어쨌든 이들은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기꺼이 저렴한 치킨을 구입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소비자들이다. 이들은 통큰 치킨을 시장에서 퇴출시킨다고 해서 바로 동네 치킨집으로 달려갈 소비자들이 아니다.

롯데마트에서 하루에 판매하는 `통큰 치킨`의 수량을 조절하면 영세한 치킨집 사장님보다 더 어려운 소비자들을 자연스럽게 골라낼 수 있다.

`누가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는가`를 관찰함으로써 혜택의 무임승차자(Free rider)들을 걸러내고 정말 그 혜택이 필요한 계층을 골라내는 방식은 노숙자 무료 급식이나 공공근로 사업, 영화관의 조조할인 등에도 이미 적용되고 있는 원리다.

시장원리도 해치지 않고 영세 치킨업자도 살리면서 그보다 더 어려운 소비자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갈 수 있게 하는 스위트 스팟(sweet spot)을 찾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여론의 우격다짐 속에서도 쉬운 길보다는 모두가 사는 길을 찾는 노력, 굳이 상생(相生)을 말하자면 그런 게 바로 상생이다.

MB와 박근혜, 화합 못한 건 혈액형 때문?

전·현직 대통령과 정치인들의 혈액형을 통해 이들의 국정운영 스타일과 성격을 엿볼 수 있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혈액형과 성격이 무관하다고 주장하지만 전·현직 대통령과 정치인들의 성격을 혈액형에 따라 나눠보면 흥미롭다.

우리나라 전·현직 대통령들의 혈액형을 보면 A형과 O형이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명박 대통령을 포함해 지금까지 전·현직 대통령은 10명이며, 이들 중 A형과 O형이 각각 세 명이었으며 B형과 AB형은 각각 두 명인 것으로 전해진다.

박정희(1963.12~1979.10 재임)·최규하(1979.12~1980.08 재임)·김대중 전 대통령(1998.02~2003.02
재임)은 A형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소심하지만 자존심이 강한 A형의 특징을 지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합리적이며 성실하고 신중한 성격의 소유자인 A형이라고 할 수 있다.

정동영 민주당 상임고문과 이해찬 전 국무총리 역시 A형 정치인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 통일부 장관을 지낸 정 고문과 이 전 총리는 업무를 꼼꼼히 수행했다는 평을 받았다.

    전두환 전 대통령(1980.09~1988.02 재임)과 이명박 대통령(2008.02~)은 B형이다. B형은 자기의 주관대로 움직이며 항상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살고 싶은 생각이 많다는 분석이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행동에 간섭하는 것을 싫어한다. 개성이 뚜렷하며 주관이 강하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나경원 한나라당 최고위원,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 등이 B형이다.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가 같은 B형이라 쉽게 화합을 이루지 못한다는 분석도 있다. B형은 자신의 주관이 강한 탓에 양보와 타협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승만(1948.07~1960.04 재임)·윤보선(1960.08~1962.03 재임)·노무현 전 대통령(2003.02~2008.02 재임)은 O형이다. O형은 목표가 정해지면 끝까지 밀고 나가는 스타일이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보스 기질이 강한 정열가다. 자잘한 일에는 구애받지 않는 통 큰 스케일이 장점이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은 냉철하고 현실적인 탁월한 정치가였으나 독선적이었으며 고집이 셌다고 평가받는다. 자신이 옳다고 판단한 것에 대해서는 절대 굽히지 않고 남을 인정하지 않는 완고한 O형 특징탓이다.

    노 전 대통령이 재임시절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 구설수에 오르기도 한 것도 혈액형과 무관하지 않다. 직선적이고 솔직한 것이 O형의 특징이다.

    정두언 한나라당 최고위원,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 미국의 클린턴 전 대통령과 부시 전 대통령도 O형이다. 고집 센 O형들끼리는 부딪칠 가능성이 많다.

    노태우(1988.02~1993.02 재임)·김영삼(1993.02~1998.02 재임) 전 대통령은 AB형이다. 냉정하고 침착하며 치밀한 분석력과 정확한 판단력을 지닌 합리주의자이지만 뒷심이 약한 것이 단점이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혈액형도 AB형이다.

    【서울=뉴시스】

[ESSAY] 47년 전 오늘, 우리는 파독(派獨) 광부가 되었습니다권이종 한국파독광부총연합회 부회장

 

공사판에서 대학생이 내게 한마디… '권형, 나하고 독일 갈 생각 없수?'
가난에서 벗어나려던 나…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실업자가 250만명이던 시절 하루 16시간씩 악착같이 일하며
'광부와 간호사'로 결혼식 치른 나는 '교수 광부'가 되었다

매년 찬바람이 부는 겨울, 12월이 되면 아득한 옛일이 떠오른다. 지금으로부터 47년 전인 1963년 12월 21일, 그날은 120명의 한국 광부가 외화벌이를 위해 이역만리 독일 땅을 처음 밟은 날이었다. 1977년까지 독일에 간 광부가 7968명.

파독광부(派獨鑛夫)! 지금의 젊은이들에겐 낯선 단어겠지만, 과거 우리나라는 자원은 물론 수출할 만한 기술력도 없었기에 인력(人力), 사람도 수출했다. 광부뿐이 아니라 간호사 그리고 군인까지.

나는 1940년 오지 중의 오지 전라북도 장수에서 태어난 ‘촌놈’이다. 또한 춘궁기 보릿고개를 ‘제대로’ 겪은 빈농의 자손이다. 날마다 10리 길을 걸어 학교에 다녀야 했고, 하루 두 끼 밥 먹기가 힘들어 칡뿌리·소나무 껍질·진달래꽃을 캐 먹어야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릴 적부터 간직해 온 교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전북 전주로 가서 중학교 시험을 쳤다. 그러나 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어머니는 쌀 한 가마니를 빌리려 동네 부잣집 앞마당에서 하루를 꼬박 버티셨다. 자식 사랑이 얼마나 깊고 넓으셨으면 그러셨을까? 돌아가시기 전 40여일이나 물 한 모금 못 넘기시면서도, 막내아들의 사진과 박사학위증을 품에서 안 놓으셨던 어머니였다.

간신히 고교를 졸업했지만 나이가 차 군입대 영장이 나왔고, 군복무를 마친 뒤 고향에 내려왔으나 가난의 그림자는 여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전 국민 2400만명에 실업자가 250만명이 넘던 시절이었다.

서울로 올라와 공사판에서 일하던 중 함께 일하던 한양대 공대생이 내게 한마디 던졌다. “권형, 나하고 독일 갈 생각 없수?” 파독 광부로 가자는 얘기였다.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가난에서 벗어나고, 해방되고 싶어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하지만 광산 일은 정말이지 너무 힘들었다.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헬멧과 안전화를 착용한 뒤, 4L 이상의 물통, 무릎보호대, 충전배터리 등으로 중무장을 하고 소위 ‘막장’이라는 지하 800m 이상의 갱도로 내려간다. 숨이 콱콱 막히는 지하갱도에서 땀이 밴 속옷은 뚝뚝 물이 떨어지고, 장화 안에 가득 고인 땀을 몇 번이나 쏟아내야 했다.
아무리 안전모를 쓰고 있지만 돌이 떨어지면서 팔과 얼굴, 등에 난 상처에 석탄가루가 박히면서 그 자리가 곪고 아물면서 석탄은 그대로 있었다. 광부 문신이다. 나는 몸에 박힌 석탄가루를 일일이 파내고 타월로 빡빡 문지르기도 했지만 지울 수 없었다. 지금도 내 얼굴에는 검은 점들이 검버섯처럼 남아있다.

그런 위험 속에서도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희미한 헬멧의 램프에 의존해 하루 16시간씩 연장근무를 하며 탄을 캐냈다. 막장일은 또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작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죽하면 “글뤽 아우프(Gl?jck auf)”라고 인사를 했을까. ‘죽지 말고 살아서 지상에 올라오라’는 뜻이다. 그렇게 악착같이 벌어서 국내로 보낸 돈이 당시 우리나라 외화수입의 3분의 1이 됐다니….

이렇게 힘든 3년이 지나 귀국을 앞둔 내게 독일 친구들 덕분에 공부할 기회가 주어졌다. 인생의 두 번째 기회였다. 독일 국립사범대인 아헨교원대에 입학한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은 여전했고, 불법 체류자 신분이 되어 강제 출국당할 위기도 여러 차례 겪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파독간호사 출신 한 여학생을 만나게 되었다. 아는 이 하나 없는 머나먼 타국에서 같은 고향사람을 만났으니 그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그녀를 보기 위해 40km나 떨어진 곳을 자전거로 왕복하면서 탈진해 쓰러지기도 했다. 2년 만에 우리는 황금커플이라는 ‘광부와 간호사’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고 주말이면 함께 된장국·청국장·김치찌개 등의 음식을 해 먹었다.

마냥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둘 다 아직 학생 신분인지라 집을 얻을 돈이 없어 처음에는 따로 살아야 했고, 간신히 합친 후에도 서로 학업과 생활에 바빠 아이를 독일인 가정에 맡겼다. 그러나 그만 사고로 생후 5개월 된 첫딸은 하늘나라로 갔다. 우리 부부는 아이에게 사랑을 제대로 베풀지 못한 죄책감에 서로 부둥켜안고 피눈물을 쏟았다. 나는 12년 만에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어 귀국했다.

‘교수가 된 광부.’ 파란만장하다고도 할 수 있는 나의 삶이지만 어느덧 고희(古稀)가 됐다. 지금도 나를 일깨워주는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눈물이었다.

함보른 탄광에 1964년 12월 대통령 부부가 찾아왔고 식순에 따라 애국가가 시작되자, 감격에 찬 광부와 간호사들이 흐느끼기 시작했고 곧이어 울음바다가 됐다. “가난 때문에 이역만리 지하 수천 미터에서 일하는 새까만 여러분 얼굴을 보니,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직까지 이렇게 못살지만, 후손들에게는 잘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 대통령의 연설에 우리는 울고 또 울었다. 육영수 여사도 한 사람 한 사람 껴안고 함께 울었다. 그날 흘렸던 뜨거운 눈물의 기억이 마치 엊그제 일처럼 나를 또 울린다.

차량 한 대가 10일(현지 시간) 러시아 크라스노야르스크의 눈 덮인 도로를 지나고 있다. 크라스노야르스크의 이날 기온은 영하 31도까지 내려갔다. /Ilya Naymushin ⓒ로이터

10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의 생 샤를 거리에 에펠탑 모양의 크리스마스 장식이 걸려 있다. /Mal Langsdon ⓒ로이터

 

사람들이 9일(현지 시간) 독일 베를린에서 눈 덮인 거리를 지나고 있다. /Tobias Schwarz ⓒ로이터

 

 9일(현지 시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네브스키 거리에 눈이 쌓여 있다. /Alexander Demianchuk ⓒ로이터

 

9일(현지 시간) 영국 오슬로항의 모습. /Toby Melville ⓒ로이터

 

마차를 탄 남성이 9일(현지 시간) 러시아 모스크바의 콜로멘스코예 공원에서 관광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Denis Sinyakov ⓒ로이터

 

생후 10개월 된 암컷 북극곰 ‘오로라(Aurora)’가 7일(현지 시간) 러시아 크라스노야르스크의 로예프 루체이 동물원에서 눈 위에 누워 있다. 오로라는 다른 암컷 새끼 북극곰과 함께 지난 5월 타이미르 반도에서 발견된 뒤 이 동물원으로 옮겨졌다. /Ilya Naymushin ⓒ로이터

 

말 두 마리가 7일(현지 시간) 독일 쾰른 동쪽으로 약 40km 떨어진 칼텐바흐에서 눈 위를 뛰어다니고 있다. /Wolfgang Rattay ⓒ로이터

[j Special] 축구·힙합에 푹 빠진 수학자, 서울대 수리과학부 강석진 교수

[조인스]
“쉽고 재밌는 건 없어요
수학·바둑·골프·축구
다 어려우니 재미있죠”
기사입력: 12.17.10 22:30

인터뷰 날 입고 나온 힙합동아리 점퍼 차림의 강 교수가 축구공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인터뷰 날 입고 나온 힙합동아리 점퍼 차림의 강 교수가 축구공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힙합 동아리 학생들과 무대에 선 강석진 교수(왼쪽 앞).
힙합 동아리 학생들과 무대에 선 강석진 교수(왼쪽 앞).
강석진 교수가 즉석에서 종이에 설명한 무한차원과 관련된 리 대수학 이론의 일부.
강석진 교수가 즉석에서 종이에 설명한 무한차원과 관련된 리 대수학 이론의 일부.
위당 정인보
위당 정인보
“펄펄 나는 20대 초반의 청춘들이 힙합 실력을 뽐냈다. 그 틈에 낀 중년 아저씨. 배가 나왔다. 그러나 손 뻗고 스텝 밟는 품새만은 예사롭지 않았다. 이어진 관객들의 한마디. ‘어, 누구야, 좀 추는데.’” 지난달 12일 서울대에서 열린 교내 힙합동아리 HIS(Hoofers in SNU·서울대 춤꾼들) 정기공연의 한 장면이다. 남자는 수리과학부 강석진(49) 교수. 이 동아리 지도교수다. 체면은 날려버리고 해마다 직접 무대에 뛰어든다.

글=김준술 기자 , 사진=박종근 기자

그의 튀는 인생은 유년 시절 시작됐다. 명문 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축구 선수가 되는 데 모든 걸 걸었다. 결국 포기했지만 지금도 서울대 자연대 축구부 감독을 맡아 열심히 ‘볼’을 찬다. 세계적 수학자가 된 지금은 입시철마다 학부모들이 가장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 중 하나로 꼽힌다. 올해처럼 수학능력시험 수리영역이 어려우면 더욱 그렇다. “성적 올리는 비결을 알려 달라”는 요청이 밀려든다. 수학과 축구·힙합을 버무린 세 박자 인생의 ‘명물 교수’를 13일 서울 관악구 봉천동의 서울대 연구실에서 만났다.

●‘수학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저도 수학이 싫어 문과로 갔는데 경제학을 전공해 생고생을 했죠. 대체 수학 잘하는 비결은 뭡니까.

 “프로가 되려면 결국 재능이 있어야 하죠. 그러나 노력도 필수예요. 사람들이 ‘쟤는 머리는 좋은데 공부는 안 해서’ 이렇게 말해요. 저는 농담으로 ‘그 애는 머리가 나쁘다’고 해요. 노력을 해야 되는 것도 모르는 머리가 좋기는 무슨. 재능이 모자란다면 수학을 수준에 맞게 즐겨야 합니다. 골프 같은 스포츠도 그렇잖아요. 즉 진도를 나가도 밀도가 다르게, 받아들이는 정도에 따라서 달리 공부해야죠. 같은 내용을 같은 속도로 배우면 수업에 만족하는 학생은 없어요. 내 수준에 맞게 즐기는 게 중요해요.”

●머리 좋은 사람만 수학을 잘한다는 얘긴 아니군요.

 “내가 ‘힘들게’ 생각해서 해법을 터득하는 게 중요하죠. 사실 힘들게 진이 빠질 정도가 돼야 재미도 느끼는 겁니다. 뭐든지 적당히 어렵지 않으면 재미가 없잖아요. 제가 수학을 전공한 이유도 어렵기 때문이었어요. ‘쉽고 재밌게 가르친다’, 이건 사실 불가능하죠. 사람들이 재밌다고 하는 걸 봐요. 바둑·골프·축구 모든 게 어렵고 조금씩 실력을 늘려 가는 맛이 있죠.”

●수학 우등생이 되려면 수식만 잘 풀면 됩니까.

 “생각은 국어로 하는 겁니다. 수학 문제는 보통 정확히 이해를 못 해서 못 풀죠. 근데 문제는 말로 써 있잖아요. 시적·감각적 언어 못잖게 ‘물리적·합리적 언어’를 잘 배워야 합니다. 물론 ‘감성적 코드’도 필요해요. 주어진 방식을 고집 않고 나만의 방식으로 풀 수 있다는 소리거든요. 저희 수학자들이 논문 쓸 때 최고로 추구하는 가치가 뭔지 아세요. 아름다움, 멋, 이런 겁니다. 논문을 평가할 때 ‘이건 큐트(cute·귀여운)하다’ 혹은 ‘저건 매그니피슨트(magnificent·감명깊은)하다’ 이렇게 등급을 매겨요.”

●그렇다면 어떤 수학책이 좋습니까.

 “저는 그림이 많고, 말로 된 설명이 많은 책을 추천해요. 생각이 중요하니까. 수식을 푸는 것도 좋지만 뭐가 문제인지, 어떻게 문제 형태를 만들지 모델을 만드는 과정이 더 중요하죠. 바로 그게 수학이에요. 근데 학부모들은 당장 수식 답안을 도출하고 점수 잘 나오는 걸 따지니, 참.”

●일상에선 사칙연산만 잘해도 되지 않나요. 수학을 어느 수준 이상으로 공부해야 되는 이유는 뭡니까.

 “그런 얘기가 나오면 농담처럼 하는 얘기가 ‘당신 매일 시계 보지 않느냐’고 해요. 시계 보는 건 언제 배웠을까요. 수학 시간이죠. 아침에 일어나서 시간 계획 세우고, 일의 순서를 정하고, 바로 ‘알고리듬(algorithm·문제해결 절차)’을 짜는 거죠. 판단이란 게 뭡니까. 우선권이 뭐고, 효과가 어떤 게 큰지 따지는 건데, 바로 이런 게 수리적 사고예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실 수학을 많이 써요. 재밌는 예가 있죠. 술값을 나눠서 낼 때 ‘N분의 1’로 말하는 사람은 한국인밖에 없어요. 여기서 N은 임의의 자연수겠고 2·3·4… 얼마든지 다양한 수가 올 수 있겠죠. 사실 수열 비슷한 건데요, 하하.”

●왜 그런 수학적 표현을 쓰는 겁니까.

 “먼저 예를 몇 가지 더 들어볼게요. 노사 타협 등에서 공통분모라고 표현하는데 이게 사실은 틀렸죠. 다른 주장 속에서 같은 걸 끌어내자는 것이니 최대공약수가 맞는 말이죠. 변곡점도 마찬가지예요. 주가가 바닥을 쳤을 때 변곡점이 아니라 극소점을 지났다고 해야 맞죠. 변곡점은 그냥 오목과 볼록이 바뀌는 건데요. 그럼 왜 이렇게 수학적 표현을 많이 쓰는 걸까요. 설득력이 있고, 시쳇말로 ‘뽀대가 난다’고 생각하는 거죠. 수학적으로 근거를 들면 설득력 있고 합리적이라고 받아들여진다는.”

●수식보다 생각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수학으로 유명한 인도 아이들은 19단을 외우지 않습니까.

 “그걸 왜 외우는지 잘 모르겠어요. 십진법을 쓴다면 구구단만으로 충분하다고 봐요. 물론 인도는 수학적 전통이 있죠. 얼마 전 인도의 수학자 대회에 갔더니 대통령부터 수학의 역사와 철학을 얘기하더라고요. 심지어 수학을 시(詩)로 표현한 옛 문헌까지 거론하면서요. 그러나 우리도 못 할 것 없다는 생각입니다. 우리 수학은 늦게 시작됐지만 잘하고 있어요. 한번도 겁 먹어본 적 없어요. 젊은 세대에 굉장히 기대를 겁니다.”

●2008년에 15세로 서울대 최연소 합격(수리과학부)을 했던 수학 천재 이수홍군 같은 학생을 말하는 겁니까.

 “사실 이군뿐이 아니죠. 서울대 수리과학부 상위권 학생들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자부합니다. 다만 어떤 목표와 야망을 갖고 역량을 계발하고 도전하느냐가 과제죠. 제가 학생들에게 ‘히말라야 가서 8000m 봉우리를 가리키고 나아가야지 왜 발밑만 보느냐’고 그래요. 제가 25년 전 미국 예일대로 유학 갈 때도 굉장히 겁이 났죠. 도망치고 싶었을 정도였어요. 하지만 수학 교과서에서 봤던 학자들과 밥 먹고 부대끼는 게 좋았죠. 국비장학생이라는 좋은 조건으로 갔으니 고생하며 유학생활 했던 선배들 부끄럽지 않게 성과를 내야겠다는 생각도 컸고요.”

●젊은이들은 순수 학문을 기피하는 풍조가 심합니다.

 “고집과 자부심, 고고함 이런 게 사라지는 게 아쉽죠. 강의 때 학생들이 질문해요. ‘선생님은 학자로서 언제가 제일 짜릿하냐’고요. 저는 ‘스타벅스에서 수학 공부하는데 지나가는 사람이 쳐다보면 짜릿하다’고 해요. 집안에 원래 인문학자가 많아서 어릴 때부터 인문대·자연대 1류, 사회대·공대 2류, 의대·법대는 3류 취급을 했어요.”

●학원 전단을 보면 명문대 수학과 출신의 강사가 많습니다.

 “교육은 기본과 본질에 충실하냐로 판단해야죠. 사교육에서 이걸 해준다면 사교육을 해야 하는 것이고요. 그런데 사교육은 본질적으로 성적과 문제풀이 기술을 강조하죠. 학원 강사 중엔 생계형도 많겠지만 너무 팽창했어요. 답답하죠.”

●지난해 7월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을 받았죠. 시상식에서 유치환 시인의 ‘깃발’을 읊어서 화제가 됐는데.

 “오만한 척, 잘난 척했던 거죠 뭐, 하하. 수학자로서 너무 외로워서, 제 마음을 자꾸 맑게 만들려는 뜻에서, 처음에 수학을 인생 동반자로 선택했을 때의 절박감 같은 걸 표현하려던 거였죠. 상금이 3억원이었는데, 반은 마누라 주고 반은 서울대와 대한수학회 등에 기부했어요. 아내에게 반 주니까, 나머지 반은 어디 갔느냐는 소리를 안 하더라고요, 크크.”

●그토록 원했다는 축구를 놔두고 수학을 택한 이유는 뭡니까.

 “초등학교 3학년 때 축구부에 들어갔어요. 아버지는 반대하셨죠. ‘서른 살 넘으면 할 일이 없어진다’면서요. 사실 그때만 해도 프로팀도 없었고. 어머니는 ‘남을 속이는 걸 왜 하느냐’고 하더라고요. 운동하려면 차라리 달리기를 하라고. 우리가 보통 축구 보며 ‘그림 같은 플레이, 마술 같은 플레이’ 이러는데 그걸 보고 오해를 했던 거죠, 하하. 그런데 중학교 2학년이 되니 체격도 그렇고 안 되겠는 거예요. 앞이 잘 안 보였고 그래서 포기했죠.”

●어린 시절이긴 하지만 쉽게 포기가 됩니까.

 “한참 방황했죠. ‘어떻게 살아야 되나, 유한한 인생을, 축구만 한 게 뭐가 있을까’ 하고요. 그런데 다른 건 몰라도 어릴 때부터 수학 잘하면 기분이 좋았어요. ‘너희랑 나는 달라’ 이런 우쭐한 생각도 하고요. 그래도 전공할 생각은 전혀 없었죠. 하지만 인생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한 축구를 포기하니 남는 게 많지 않더라고요. 결국 중3에서 고1 때 수학에 승부를 걸어 보겠다고 마음먹었죠.”

●자연대 축구부 감독을 맡은 건 그때 맺힌 한(恨) 때문인가요.

 “94년 감독으로 부임했죠. 지난 10년간 교내 축구대회에서 여섯 번 우승했어요. 뿌듯하죠. 제 인생 최고의 순간이 언제인지 아세요. 81년 자연대 축구부 2학년일 때 총장배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넣어서 2대0으로 이겼을 때였죠. 제가 14번을 달고 뛰었는데 네덜란드의 요한 크루이프 번호잖아요. 지금도 14번이죠. 당시 우승했을 때 공대 학장님이 ‘자연대 14번은 공대로 전학 오라’고 그러더라고요.”

●어떤 축구를 지향합니까.

 “제가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건 정정당당하고 아름다운 축구죠. 인생을 그렇게 살자는 거니까. 그런데 정작 학생들은 스페인 축구를 지향하면서 쇼트 패스 많이 하고 그러더라고요, 하하. 2002년 월드컵 때 제가 민간인으로 축구협회 기획자문위원을 맡았는데 이용수 기술위원장의 말이 지금도 뜨겁게 남아있어요. ‘16강은 겉으로 드러난 목표일 뿐, 내 꿈은 축구판을 바꾸는 것’이라고요. 지역별·연령별 리그 활성화 등에 미약하나마 힘을 보태려 했죠.”

●힙합은 언제부터 연마했습니까.

 “2000년에 선형 대수학을 가르칠 때 한 학생이 힙합동아리 회장이었어요. 저한테 지도교수를 맡아 달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보수적이라 처음엔 ‘남부 흑인의 저열한 문화를 왜 따라 하느냐’고 했죠. 그러다 하도 부탁하니 공연 하나만 참관해주고 관두겠다 생각했죠. 막상 가서 보니 흥이 나고 이게 재밌는 거예요. 음악을 탄다는 게 뭔지 느껴지더라고요. 멋있구나 생각했죠. 제대로 배울 만한 능력은 안 되고, 팝핀이며 왁킹 같은 힙합 동작을 학생들과 익혀서 해마다 정기공연 때 무대에 오릅니다. 그런데 갈수록 배가 나와서.”

●학자로서 가장 힘들 때는 언제입니까.

 “문제가 안 풀릴 때죠. 아니, 사실은 어떤 문제를 풀어야 할지 모를 때예요. 학생들에게 말하는 게 있어요. ‘수학을 선택해서 행복한지는 잘 모르겠는데, 다른 걸 선택했으면 불행했을 것 같다’고요.”

j 칵테일 >> 정인보 선생의 외손자, 불량 학생에게 ‘원터치’

강석진 교수의 집안은 명문가다. 외할아버지는 위당 정인보(1893~?) 선생. 일제 강점기의 교육자·민족사학자로 ‘국학(國學)’을 바로 세운 인물이다. 어머니는 한학자 정양완(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씨, 아버지는 국어학자 강신항(성균관대 명예교수)씨다.

●학자로 성공하는 데 가풍(家風) 영향은 없었나요.

 “분명히 있었죠. 반칙 안 하고 살자. 우리는 당당하게 살자 이런 마음가짐을 어려서부터 배웠죠.”

●외조부에 대해 기억나는 에피소드는요.

 “사실 제가 외할아버지 뵌 적이 없어요. 제가 태어나기 전 한국전쟁 때 납북돼 돌아가셨으니. 하지만 어른들은 제게 늘 외조부를 강조하며 머리에 각인시켜줬어요. 육당 최남선 선생이 절친이셨는데, 어머니께도 그랬다고 해요. ‘네가 많이 닮았는데 겉보다 속을 닮으라’고요. 제가 유학 갈 때 외조부의 후배 한학자께서 글을 써준 게 있어요. 박학독지(博學篤志)라는, 넓게 공부하되 뜻을 굳건히 하라는 것이었죠. 실제 그런 자세로 공부했고, 마음을 다잡는 데 도움이 많이 됐어요.”

●평범하지 않은 가족들 두는 게 편한 일은 아닌데요.

 “맞아요. 항상 비교가 되고 그러니까 부담스럽죠. 집안 망신을 시키면 안 되겠다 이런 생각도 많이 들고요.”

●그래서 어떻게 처신했나요.

 “그런데 제가 실은 여기저기 망신살이 많이 뻗쳤지요, 크크. 고교(홍대부고) 1학년 때엔 우리 반 양아치랑 옛날 말로 ‘원터치’를 깐다고 하나요. 아무튼 주먹으로 이빨을 날렸다가 돈을 물어줬어요. 친구들 돈을 뺏고 나쁜 짓 하던 녀석이었죠. 언젠가는 친구들과 농구장 갔다가 패싸움이 일어났어요. 저는 도망왔는데 친구들이 고자질해서 다 같이 정학을 받은 일도 있었죠.”

강석진 교수는 표현론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다. 서울대 수학과를 나와 예일대에서 박사를 딴 그는 무한차원에서 대수 구조를 연구하는 ‘리(Lie) 대수학’에서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한 업적이 있다. 또 그가 2002년 발간한 『양자군과 결정 기초 입문』은 예일대·하버드대 교재로 채택됐다. 리 수학을 알기 쉽게 설명해 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강 교수는 ‘3차원과 벡터, 무한차원’ 등을 종이에 열심히 그려가며 설명했다.

●이해가 쉽지 않군요.

 “사실 저도 몇십 년 동안 공부한 건데 쉽게 설명할 방법이…. 미치겠어, 하하. 제가 표현론을 공부하는데 제 성격에 맞아요. 인간은 자기 인생을 어떻게 구현해내느냐가 중요하죠. 표현론도 복잡한 대수적 구조를 알기 쉽고 다양하게 투영시켰을 때 나타나는 모습을 공부하는 것이니.”

●아무튼 저서 중 하나를 외국 유수 대학에서 교재로 쓸 정도면 대단하군요.

 “외국에 가면 제 책으로 공부했다는 소리를 들을 때 기분이 좋죠. 근데 화장실에서 그 얘길 많이 하더라고요. 볼일 보는데 학생들이 저를 알아 보고는. 창피하잖아요, 하하. 교본도 안 배웠나 봐. 화장실에서 경례하지 말라는….”

- 인왕산 鶴학巢소島도에서 최범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