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박혜경]마르지 않는 모성적 포용력… 결코 늙지않을 ‘박완서문학’

불과 몇 달 전까지도 왕성한 작품활동을 해오던 작가의 갑작스러운 타계 소식은 한동안 머리를 멍하게 할 만큼 깊은 상실감을 안겨준다. ‘영원한 현역’이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언제까지나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질 것 같았던 박완서의 문학세계가 갑자기 종결되어 버린 순간 비평가로서 느끼는 막막함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한국의 비평가치고 박완서의 문학을 한 번이라도 발언하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작가란, 그것도 뛰어난 작가란 자신의 글을 통해 인간에게 주어진 유한한 생명 너머를 살아가는 존재”라는, 몇 년 전 어느 글에선가 썼던 문장이 지금에 와서 새삼 가슴을 친다.

한국문단에서 누구보다도 탁월한 사실주의 문학의 범례를 보여주었던 박완서의 문학은 한국사회를 종횡으로 질주하는 강력한 서사적 에너지의 산실이었다. 종으로는 한국사회의 내부 깊숙이 가라앉은 참혹했던 역사의 상처들을 되살리고, 횡으로는 동시대의 현실 이면에 놓인 세속적 욕망의 메커니즘을 날카롭게 파헤치며 한국사회의 변화에 누구보다 기민하게 대응했던 작가의 작품들은 역사나 정치 등과 관련된 굵직굵직한 소재들을 일상의 생활공간 속으로 끌어들여 구체적인 경험의 질감으로 풀어내는 능수능란한 이야기꾼의 재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특히 박완서의 소설은 남성작가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져 오던 6·25전쟁이라는 역사적 소재를 여성의 시각과 감성으로 쓰인 여성의 이야기로 바꾸어놓음으로써 남성적인 힘의 논리에 바탕을 둔 거시적인 역사해석 뒤에 가려져 있던 개인의 깊고 내밀한 상처를 다양하고도 풍부한 서사적 질감으로 그려 보여주었다.

작가가 여러 곳에서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기질이라고 말했던 풍부한 이야기꾼의 재능은 작가 특유의 거침없고 시원시원한 문체와 더불어 박완서의 문학을, 마치 나이 들어서도 소녀의 웃음을 잃지 않던 작가 생전의 모습처럼, 영원히 늙지 않는 문학으로 만들어 놓았다. 작가의 노년기에 그 정신의 젊음은 세간의 돌아가는 켯속을 명징하고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노년의 혜안과 만나면서 나이 들수록 더 아름다워지는 박완서 문학의 진경을 펼쳐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속악하고 이기적인 욕망의 세계를 신랄하게 까발리면서도 인간의 나약하고 어리석은 삶을 따뜻하게 끌어안는 냉()과 온()의 절묘한 조화는 인간을 욕망의 속물로 만들어버리는 현실에 대한 냉정한 관찰자의 시선과 그럼에도 현실로부터 상처받은 인간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는 작가의 모성적 포용력이 빚어낸 박완서 문학의 마르지 않는 창작의 원천이었다.

작년에 출간된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 ‘못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펼치니 “스무 살에 성장을 멈춘 영혼이다. 80을 코앞에 둔 늙은이이다. 그 두 개의 나를 합치니 스무 살에 성장을 멈춘 푸른 영혼이, 80년 된 고옥에 들어앉아 조용히 붕괴의 날만 기다리는 형국이 된다. 다만 그 붕괴가 조용하고 완벽하기만을 빌 뿐이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코끝이 시큰하다. 작가의 스무 살은 6·25전쟁이 발발한 해이다.

스무 살에 성장을 멈췄던 작가의 생은 나이 마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생의 또 다른 성장을 시작한다. 작가의 스무 살과 80 사이, 그 세월은 우리가 박완서 문학과 함께했던 세월이자 함께할 세월이기도 하다. 작가는 가도 작가의 작품 속에서 ‘스무 살에 성장을 멈춘 푸른 영혼’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있지 않은가.

삼가 박완서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아는 분이 우리 마당에 어떤 꽃들이 피는지 물었다.

나는 으스대며 백 가지도 넘는 꽃이 있다고 말했다.

그건 누구한테나 그렇게 말하는 내 말버릇이다.

그러나 거짓말은 아니다.

듣는 사람은 아마 백화난만한 꽃밭을 생각하겠지만

그것들은 한꺼번에 피지 않고 순서껏 차례차례 핀다.

그리고 흐드러지게 피는 목련부터

눈에 띄지도 않는 돗나물 꽃까지를 합쳐서 그렇다는 소리다.

그런데 어떻게 그 가짓수를 다 셀 수 있느냐 하면

그것들은 차례차례로 오고, 나는 기다리기 때문이다.”


-박완서 산문집 『호미』(열림원) 중에서

 

여러분은 풍수(風水)하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자손이 조상의 덕을 보려고 묏자리나 찾는 미신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그래서 현대와는 맞지 않는 구닥다리 관습이라고 말입니다. 풍수론에는 분명 비합리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풍수론 전체를 버리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풍수론은 우리 조상들이 천 년 이상 의지하고 살았던 자연관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지금도 많은 한국인들이 풍수론을 신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적지 않은 교습소가 있어 풍수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풍수론에 아직도 경청할 만한 정보가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풍수의 가장 중요한 원리 : 바람을 갈무리하고 물을 얻는 것

그런데 여러분들이 풍수에 대해 찾아보면 천편일률적으로 어렵게 씌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이기(理氣)풍수론이니 형기(形氣)풍수론이니 하는 등 어려운 개념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원리는 간단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어려운 개념은 빼고 가장 기본적인 것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 정도만 보아도 우리 조상들이 자연을 어떻게 보았고 우리는 이것을 현대에 어떻게 되살릴 수 있을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장풍득수의 원리를 따른 명당인 서울시, 서울은 뒤로는 북한산, 앞으로는 한강이 있어 배산임수의 대표적인 지형이다.
<출처 : hojusaram at ko.wikipedia.com>

사실 풍수론은 중국에서 형성된 사상입니다. 그런데 중국보다는 우리나라에서 더 인기를 끌었던 것 같습니다. 풍수란 한 마디로 인간이 살기 좋은 땅을 찾다 나온 생각입니다. 이 풍수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는 ‘장풍득수(藏風得水)’라고 합니다. 이것을 그대로 해석하면 ‘바람을 갈무리(저장)하고 물을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풍수’라는 말은 바로 이 장풍득수를 줄인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풍수는 인체 이론을 자연에 적응한 것

사실 인간이 사는 데에 공기(바람)와 물은 없어서는 안 될 지극히 중요한 것입니다. 따뜻하고 좋은 공기가 있어야 하며, 물도 쉽게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산과 강이 매우 중요하게 됩니다. 산은 찬 공기를 막아주는 등 공기 또는 바람의 흐름을 조절해줍니다. 반면 물을 얻게 해주고 운송을 편하게 해주는 강이 중요한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따라서 산과 강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곳이 풍수론이 찾는 땅이겠지요. 여기서 명당의 개념이 나옵니다. 명당이란 땅 가운데에 인간이 살기에 뛰어난 곳을 말합니다.

 

그런데 옛 조상들은 이렇게 보이는 외양만 중시했던 것이 아닙니다. 풍수론이 중국인을 포함해서 우리 조상들의 독특한 자연관이라는 것은 자연을 살아 있는 것으로 보았다는 점 때문입니다. 이른바 생기론(生氣論)입니다. 여러분은 한의학에서 인간의 몸에는 ‘기’라는 생명의 기운이 경락을 따라 흐르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 몸에는 약 360개에 달하는 혈 자리가 있다고 하지요. 혈이란 기운이 모이는 중요한 곳으로 경락을 ‘기차 길’에 비유한다면 혈은 ‘역’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병들었을 때 침이나 뜸을 바로 이 혈 자리에 놓기 때문에 이 혈은 아주 중요한 곳입니다.


명당을 찾을 때, 사용하는 풍수 컴파스
<출처 : Benjwong at en.wikipedia.com>

 

풍수론은 바로 이 이론을 그대로 자연에 적용한 것이라 보면 됩니다. 자연에는 산이나 강의 형세에 따라 생기가 흐르고 있는데, 이 기운이 많이 모이는 곳이 명당입니다. 명당은 바로 우리 인체의 혈에 해당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명당자리에 무덤을 만들거나 집을 지으면 그곳에 있는 좋은 기운을 인간의 것으로 만들 수 있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 풍수론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좀 더 정교하게 설명하기 위해 음양오행론이 동원됩니다.

조상을 잘 모셔서 그 기운을 받고자 하는 음택풍수

풍수는 크게 보아 ‘음택 풍수’와 ‘양택 풍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말이 어려워서 그렇지 음택은 무덤을 말하고 양택은 주택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 되는 게 지금도 맹위를 떨치고 있는 무덤에 관한 풍수입니다. 특히 권력이나 부를 가진 이들이 더해서 대통령 후보로 나왔던 사람 중에 조상들의 묘를 이장했다고 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보도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죽은 조상의 몸을 이용해 덕을 보겠다는 겁니다.

 

왕실의 무덤은 풍수의 원리를 따라 좋은 명당자리에 들어섰다. 일반인들도 조상의 덕을 보기 위해, 풍수에서 말하는 명당을 조상의 묘 자리로 선호했다.
<출처 : Brandon Butler at ko.wikipedia.com>


이 음택 풍수에는 동기감응론(同氣感應論)이라는 재미있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왜 명당자리에 묘지를 쓰면 자손들이 복을 받는지 궁금하지요? 이것을 설명하는 게 바로 동기감응론입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명당에는 아주 좋은 기운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 곳에 조상의 몸을 묻으면 그 기운을 자손의 것으로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조상과 자손은 같은 기운(동기)을 갖고 있어 감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연결 역할을 하는 것이 뼈입니다. 조상의 뼈가 땅의 기운을 받아서 자손의 뼈로 전송하면 자손이 하는 일마다 잘 된다는 것이지요. 이때 뼈라는 것은 ‘뼈대 있는 집안’이라고 하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상으로부터 면면히 전해지는 생명의 진수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그것을 안테나 삼아서 기운을 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 생각에는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조상의 뼈가 그런 역할을 한다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식물들도 살아 있을 때나 땅의 기운을 받는 것이지 죽게 되면 그저 무정물에 불과한 것인데 같은 상태가 된 시신의 뼈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화장이 대세가 되어가니 이런 이론이 발붙일 곳이 더더욱 없어집니다.

주거지를 고르는 양택풍수의 핵심은 배산임수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풍수론이 전부 무익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주거지를 고르는 양택 풍수는 대단히 훌륭한 이론입니다. 이 이론에 따라 고른 땅은 아주 아름답고 실용적입니다. 그래서 그런 곳에 사는 인간은 계속해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앞에는 물을 두고 있는 땅은 분명 사람이 살기 좋은 땅입니다. 이것을 두고 배산임수(背山臨水), 즉 산을 등지고 물에 접해 있다고 합니다.

 

배산임수의 원리를 충실하게 따른 서울의 명당, 경복궁
<출처 : 네이버 지도(http://map.naver.com)>

우리의 서울이 바로 이런 명당에 속합니다. 조선의 위정자들이 경복궁의 위치를 정할 때 이 풍수론에 의거했습니다. 그래서 경복궁의 주산은 북(北) 현무인 ‘백악산’이, 남(南) 주작은 관악산이, 좌청룡은 대학로 뒷산인 낙산이, 우백호는 인왕산이 맡았고 물은 장대한 한강이 담당했습니다. (남산은 위의 네 산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했다고 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정한 서울은 지금도 수도의 역할을 훌륭하게 하고 있고,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산과 강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수도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우리가 서울을 조상이 물려준 대로 보존했다면 서울은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도가 되었을 겁니다.

풍수론을 어떻게 응용할 수 있을지는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

우리는 앞으로 풍수론을 적극적으로 해석해 땅의 기운에 지배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뜻과 의지를 더 중요하게 여겨 의도적으로 좋은 땅을 만들어간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현대인들은 하루에 땅을 한 번도 밟지 않을 정도로 땅과 자꾸 멀어질 터인데 그런 시대에 이 풍수론을 어떻게 응용할 수 있을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하국근의 풍수기행] <55> 창녕군 창녕 성씨 시조묘 | 매일신문 2010-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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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6>-풍수지리 | 세계일보 2010-04-06
‘건축’이란 본질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은 번역이라고 할 수 있지만 창조라고 보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것들’이란 구체적으로는 땅과, 그곳에 살고자 하는 사람의 희망과...
[신의 정원 조선 왕릉⑥] 왕과 왕비 혼령 이동 조선왕조 최초의 합장릉 | 주간동아 2010-04-28
경기도 여주군에 있는 영릉(英陵)은 조선 제4대 왕 세종(世宗, 1397~1450)과 정비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 심씨의 능으로, 조선시대 최초의 합장릉이다. 세종은 1397년 5월 15일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이름은 도(), 자는 원정(元正)이며...
글∙사진∙그림 최준식 /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한국학과 교수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템플대학에서 종교학을 전공하였다. 한국문화와 인간의식 발달에 관심이 많으며 대표저서로는 [한국인에게 문화는 있는가], [한국의 종교, 문화로 읽는다] 등이 있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은 1805년 4월 2일, 덴마크 제2의 도시 오덴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구두수선공이고 어머니는 세탁부였으며 집안 형편은 늘 어려웠다. 외아들 한스 크리스티안은 밖에서 뛰어놀기보다는 혼자 인형놀이를 즐기는 내성적이고 예민한 성격이었다. 그가 11세 때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하자 가족의 생활고는 더욱 심해진다. 일찌감치 노래와 연기에 재능을 보인 소년 한스 크리스티안은 오덴세의 유력자 가문을 찾아 다니며 재주를 선보여 명물이 되었으며, 그렇게 모은 돈을 가지고 몇 년 뒤에는 본격적인 연기자의 길을 걷기 위해 혼자 무작정 상경한다.

  

1819년, 14세의 나이로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 도착한 안데르센은 여러 극단을 찾아가 입단을 요청하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는다. 연기에 재능이 있긴 하지만 아주 뛰어나지는 않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였다. 다행히 안데르센은 당시 정계의 실력자이며 예술 애호가인 요나스 콜린의 눈에 들게 된다. 일단 기본 학력이 있어야만 훗날 뜻을 펼치는 데에도 유리하리라는 조언과 함께, 콜린은 안데르센에게 왕실 후원금을 얻어주며 우선 수도를 떠나 중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돌아오도록 독려했다. 1822년에 안데르센은 코펜하겐에서 멀리 떨어진 슬라겔세로 갔고, 동급생들보다 대여섯 살이나 더 많은 17세의 나이로 다시 학교에 입학한다.

 

재학 중에 <죽어가는 아이>라는 제목의 시를 발표해 의외로 호평을 받은 안데르센은 연기자에서 작가의 길로 선회한다. 1828년, 23세의 늦깍이 학생 안데르센은 6년간의 공부 끝에 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했고, 이듬해에는 첫 저서인 <도보여행기>를 발표한다. 1833~4년에는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를 여행했고,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자전적인 요소가 깃든 장편소설 <즉흥시인>을 발표해 격찬을 받는다. 그리고 1835년에는 <아이들을 위한 동화>라는 제목으로 첫 번째 동화집을 펴낸다. 그의 동화를 읽은 어느 지인은 “<즉흥시인>이 자네를 유명하게 만들었다면, 이 동화는 자네를 불멸의 작가로 만들 것”이라고 격찬했다.

1835년에 발표한 <공주와 완두콩>(왼쪽),1836년에 발표한 <인어공주>의 본문에 삽입된 환상적인 그림

이후 안데르센은 <엄지 공주> <꿋꿋한 양철 병정> <인어공주> <벌거벗은 임금님> <성냥팔이 소녀> <눈의 여왕> <전나무> <나이팅게일> 같은 대표작을 비롯해 200여 편의 동화를 꾸준히 발표한다. 그보다 한 세대쯤 전에는 독일의 언어학자인 그림 형제가 민담을 수집, 정리해서 발표해 큰 호응을 얻은 바 있었다. 1812년에 처음 출간된 <그림 동화집>은 1857년까지 일곱 차례나 개정판이 나오면서 작품 숫자도 늘어나고 표현도 약간씩 달라졌다. 안데르센의 동화도 초기에는 그림 형제의 동화처럼 민담을 토대로 삼았지만 나중에는 순수 창작품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교훈의 전달보다는 환상적 묘사에 치중한 안데르센의 동화는 발표 당시에만 해도 종종 혹평을 받기 일쑤였다.

 

1843년에 나온 새로운 동화집에는 그의 최고 걸작인 <미운 오리 새끼>가 수록되어 있었고, 이 작품이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안데르센의 명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확고해진다. 1846년에는 덴마크 국민으로선 최고의 영예인 단네브로 훈장을 받았고, 왕족과 귀족을 비롯한 상류층 인사들과 교제하는 명사가 되었다. 고국인 덴마크에서는 종종 혹평을 받아 가뜩이나 예민한 마음이 크게 상했던 안데르센이었지만, 오히려 독일이나 영국 같은 외국에서는 더 일찍부터 명성을 얻은 바 있었다. 가령 영국의 경우에만 해도,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소설가 찰스 디킨스가 특히 안데르센의 열성 팬이 되어서 여러 번에 걸쳐 만나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을 정도였다.

 

1860년대에 들어서 덴마크는 연이은 전쟁의 와중에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를 독일에 빼앗기는 등 적잖은 굴욕을 겪었지만, 이미 덴마크의 최고 명사가 된 안데르센은 평온하고도 영광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1867년에는 반세기만에 고향 오덴세를 찾아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1869년에는 그의 코펜하겐 입성 반세기를 축하하는 대대적인 행사가 열렸다. 말년의 안데르센은 류머티즘에 시달리며 종종 병상에 누워 있었고, 창작은 눈에 띄게 줄었다. 1875년 8월 4일 오전 11시 5분, 안데르센은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딱히 가족이라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8월 11일에 열린 장례식에는 덴마크 국왕과 황태자를 비롯한 수백 명이 찾아왔지만, 정작 그와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안데르센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그림 형제와 함께 동화의 대명사이며, 특히 창작 동화 분야에서는 그야말로 일인자에 해당한다. 그림 형제의 동화가 언어학과 민담 채집이라는 학술 연구 과정에서 생겨난 부산물로 간결하고도 직설적인 형식을 지녔다면, 안데르센의 동화는 기발한 상상력과 화려한 묘사와 독특한 내용이 돋보이는 본격적인 문학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안데르센의 이전이나 이후에도 동화를 쓰는 사람은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이 장르에서 그처럼 독보적인 지위에 오르지는 못했다. 따라서 안데르센이야말로 본격적인 아동문학의 창시자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내가 살아온 인생사가 바로 내 작품에 대한 최상의 주석이 될 것이다.” 안데르센의 말마따나, 그의 동화는 굴곡 많은 본인의 인생을 상당 부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전기 작가 재키 울슐라거에 따르면 안데르센은 “성공한 ‘미운 오리새끼’이며, 고결한 ‘인어공주’이다. ‘꿋꿋한 양철 병정’이자, 왕의 사랑을 받는 ‘나이팅게일’이며, 악마 같은 ‘그림자’이다. 우울한 ‘전나무’이기도 하고, 불쌍한 ‘성냥팔이 소녀’이기도 하다.” 또 한편으로 안데르센의 동화는 그 당시에 유행했던 낭만주의의 환상적인 작품 세계를 계승한 것이어서 항상 행복한 결말을 약속하지는 않으며, 또한 비교적 덜 유명한 작품 가운데에는 의외로 음산하고 기괴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들도 없지 않다.

1867년의 안데르센(왼쪽), 1848년에 발표한 <성냥팔이 소녀>의 본문 삽화.
그는 동화 속 주인공 '성냥팔이 소녀'처럼 외롭고 버거운 삶을 꿋꿋이 이겨내며 살아왔다

비록 동화 작가로서 불멸의 명성을 얻긴 했지만, 사실 동화는 안데르센의 수많은 작품 가운데 일부분에 불과했다. 그는 시와 소설, 기행문과 희곡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했고, 특히 극작가로 성공하기를 원했지만 평생 뜻을 이루진 못했다. 나아가 안데르센은 '아동문학가'로만 낙인찍히는 것을 싫어했으며, 말년에 자신이 아이들과 함께 있는 모습의 동상을 세우려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기도 했다. “나는 한 번도 아이를 내 등에 태우거나 무릎 위에 올려놓은 적이 없다. 내가 쓴 이야기들은 어린이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어른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어린이들은 단지 내 이야기의 표면만을 이해할 수 있으며, 성숙한 어른이 되어서야 온전히 내 작품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오늘날 코펜하겐에 있는 안데르센 동상들은 모두 그 혼자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재키 울슐라거는 안데르센의 성격 자체가 무척이나 모순적임을 지적한다. “일생 동안 그는 전형적인 아웃사이더였다. 그는 비천한 배경과 불확실한 성적 정체성, 그리고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싸웠으며, 그로 인해 괴로워했다. 그는 못생긴 데다 눈치도 없는 사람이었다.” 안데르센은 어려서부터 줄곧 자기보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우월한 사람들의 앞에 나가 시선을 끌어 모음으로서 생계를 유지하고 출세한 바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내면에는 불안감과 자괴감, 그의 외면에는 출세욕과 허영심이라는 모순적인 감정이 공존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순진무구함은 남다른 동화를 쓸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던 반면, 가끔은 마치 어린애 같은 자기과시욕으로 나타나 비난을 자초했다. “25년 전에 나는 작은 짐 꾸러미 하나를 들고 코펜하겐에 왔다. 그때는 가난한 이방인 소년이었다. 그런데 오늘 나는 식탁에서 왕과 여왕을 마주하고 앉아 함께 코코아를 마신다.” 안데르센은 겨우 27세 때인 1832년에 처음으로 자서전을 발표했고, 이후 거의 10년 단위로 그 증보판을 펴내며 자신의 성공담을 구구절절 묘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가난한 구두수선공과 빨래하는 여인의 아들인 내게 러시아 황제의 손자가 입을 맞추고 있다 생각하니 눈물이 쏟아져 내린다. 서로 완전히 다른 존재가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는 백조가 된 이후에도 미운 오리새끼 시절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일까.

1860년의 안데르센. 1835년에 발표한 <엄지공주>의 삽화(오른쪽)

재키 울슐라거는 안데르센의 생애에서도 그간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그의 성 정체성 부분에 주목한다. 안데르센이 평생 독신이었던 까닭은 그가 마음을 둔 여성들로부터 번번이 청혼을 거절당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처럼 여겨져 왔는데, 한편으로는 그가 동성애자였다는 설도 있다. 오늘날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안데르센은 평생 여러 번에 걸쳐 여러 남성에게 사랑 고백을 했고, 실제로 육체관계를 맺기도 했다. 심지어 남매지간인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동시에 사랑한다고 고백한 적도 있었는데, 일면 엉뚱한 듯한 느낌까지 주는 이런 애정행각은 “안데르센은 우정과 성애를 확실히 구분하지 못했다”는 울슐라거의 지적처럼, 어쩌면 평생 대인관계에 서툴렀던 특유의 성격에서 비롯된 감정의 혼란 때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편으로 안데르센은 평생 사람과 가족의 정을 그리워한 고독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그가 어린 시절에 다른 남자와 재혼했으며 그나마도 사춘기 이후로는 줄곧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그에게는 평생 가족이 아무도 없었다. 대신 안데르센은 주위의 지인이며 후원자들에게서 일종의 대체 가족을 찾으려고 시도했는데, 대개는 그의 눈치 없는 적극성이 역효과를 나타내어 도리어 불편한 관계가 되기 일쑤였다. 어려서부터 주위 사람들의 호감을 사서 후원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도가 튼 안데르센이었지만, 정작 누군가와 진실한 인간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는 영 서툴렀다는 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예술을 제외한 다른 분야에서는 무능한 것이 예술가의 특징이라면, 안데르센이야말로 초일류급 예술가인 셈이었다. 재정 관리는 물론이고 원고 정리조차도 남의 손을 빌려야 했고, 특히 은인인 요나스 콜린의 아들 에드바르 콜린에게 안데르센은 만사를 전적으로 의지했다. 평소에 안데르센은 절친한 사이인 에드바르 부부와 죽어서도 나란히 묻히고 싶다는 소원을 피력했고, 그의 말대로 훗날 세 사람은 같은 묘지에 나란히 묻히게 되었다. 몇 년 뒤에 콜린 가문의 후손들이 에드바르 부부의 무덤을 이장함으로써 그때부터는 안데르센 혼자 남게 되었지만, 그래도 그는 전혀 외롭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사후로부터 지금까지 이 ‘미운 오리새끼’의 무덤은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일종의 순례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안데르센의 전기로는 아동문학 연구자인 재키 울슐라거의 <안데르센 평전>(전선화 옮김, 미래M&B, 2006)이 있다. 87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 속에 안데르센의 생애와 시대 배경, 주요 작품 분석, 아울러 그의 성격과 성 정체성 등 민감한 주제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내용을 수록했다. 위의 본문도 이 책의 내용을 주로 참고했다. 국내 저자의 전기로는 박기원 편저의 <즉흥시인의 초상>(이목구비사, 1996)이 있다.


안데르센 평전안데르센과 함께 코펜하겐을 산책하다안데르센 자서전

안데르센 평전 안데르센과 함께 코펜하겐을 산책하다 안데르센 자서전

울리히 존넨베르크의 <안데르센과 함께 코펜하겐을 산책하다>(김수은 옮김, 갑인공방, 2005)는 제목 그대로 안데르센의 주요 활동 무대가 되었던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 곳곳의 풍경을 사진과 함께 소개하는 특이한 구성의 전기 겸 안내서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그 내용의 신빙성 여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안데르센의 자서전은 그의 생애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일차적인 자료가 된다. 일각에서는 저자가 솔직한 이야기보다는 당대의 유명인사와의 교우를 자랑하는 데 치중했다고 비판하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이 책에 수록된 갖가지 일화가 읽는 재미를 더해주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말 번역본은 <안데르센 자서전 : 내 인생의 동화>(이경식 옮김, Human & Books, 2003)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다.

 

안데르센의 작품 가운데 ‘동화’의 번역본은 워낙 많지만 성인 독자가 읽을 만한 충실한 번역본으로는 <(어른을 위한) 안데르센 동화전집 >(윤후남 옮김, 1999)을 추천할 만하다. 이 책에는 안데르센이 평생 발표한 212편의 동화 가운데 156편이 수록되어 있다. 동화 외에는 안데르센의 출세작인 장편소설 <즉흥시인>(김석희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05)과 1840~1년까지의 여행기인 <안데르센의 지중해 기행>(송은경 옮김, 예담, 2001)이 나와 있다.

 

아쉽게도 위에 소개한 안데르센의 주요 저서들은 모두 덴마크어가 아니라 영어 등에서 중역한 것이다. 재키 울슐라거의 지적처럼 영어나 독일어로 번역된 안데르센의 작품이 그의 생전부터 종종 오류나 누락, 또는 임의적 개작으로 인해 본 모습과는 멀어진 경우가 있었음을 상기해 보면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언젠가는 우리나라에도 덴마크어에서 번역된 ‘정본’ 안데르센 작품집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박중서 / 출판번역가, 장서가
박중서 씨는 '약소국 그랜드 펜윅'시리즈인 <뉴욕 침공기, <월스트리트 공략기>를 비롯해, <해바라기>, <셰익스피어&컴퍼니>, <끝없는 탐구:칼 포퍼 자서전>등을 번역했다. 집안 가득 책을 쌓고 살며, 새 책을 기획하는 일을 한다.

[풋볼리스트] '왕의 귀화' 이충성 스토리 | "내 조국은 둘이다"

기사입력 2011-01-30 07:52 |최종수정 2011-01-30 08:09

축구전문가 서형욱 기사목록|기사제공 : 축구전문가 서형욱

거액을 차버린 美남성…새 여자 생겨 이혼 직후 전처 240억 로또 당첨

복권

지난 여름 제이미 아이젤은 매우 행복했다. 아내와의 결혼생활을 끝내고 새 연인을 찾아 떠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반면 아내 트리샤는 매우 불행했다. 그는 세 아들을 둔 남편과의 이혼으로 자신의 삶을 비관했다.

하지만 이들의 운명은 뒤바뀌었다. 트리샤가 지난해 12월 2150만 달러(약 240억 원)의 로또에 당첨됐기 때문이다. 철강 노동자로 일하면서 부업으로 시간제 바텐더로 일하는 아이젤은 전처의 행운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그는 아내 트리샤와의 사이에 낳은 코리(9)와 라이언(7), 리암(4) 등 3명의 아들을 자신이 키우고 있음을 들어 전처로부터 얼마간이라도 돈을 받을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아이젤은 새로운 사랑을 얻었는지는 모르지만 거액의 재산을 발로 차버린 셈이라고 영국 데일리 메일은 30일 보도했다.

트리샤가 로또를 구입한 것도 극적이다. 남편과의 이혼에 실망해 우울한 삶은 살아가던 트리샤는 지난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고향 아일랜드를 찾으려 했다. 아일랜드 출신인 트리샤는 미국에 온 후 16년 간 고향을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그러나 올 겨울 유난히 극성을 부린 폭설로 아일랜드행 비행기 운항이 중단됐다. 쓸쓸하게 발길을 돌리던 트리샤가 우연히 로또 판매점에서 구입한 복권이 그만 덜컥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트리샤의 이웃들에 따르면 아이젤과 트리샤는 이혼 후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트리샤는 복권 당첨 후 고급 호텔에서 자축 파티를 열었다. 그녀는 그러나 파티에 친정 어머니와 친정 형제들만 불렀을 뿐이다. 아이젤은 초청조차 받지 못했다.

미용사로 일하던 트리샤는 거액의 로또에 당첨됐지만 아직 생활을 크게 바꾸지 않았다. 트리샤는 그러나 이제 집세를 내는 것만은 그만 두고 싶다며 정원이 딸린 집 한 채를 우선 구입하겠다고 말했다.

마크 주커버그가 1억 달러를 내놓은 곳은
<박영숙의 미래뉴스>2020 미래사회 10대 트렌드에 ´기부문화´ 포함돼
"같은 값이면 ´의미있는 물건´을 사자" 미국 부자 절반이 기부 동참
박영숙 유엔미래포럼대표 (2011.01.30 08:4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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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셜네트워크 ´페이스북´을 만든 마크 주커버그는 지난 2010년 9월 뉴욕 공립학교 발전을 위해 1억 달러를 기부했다. ⓒ인터넷 화면 캡처
미래 기부문화가 바뀐다. 신세대들은 이왕이면 같은 값이라면 의미 있는 물건을 산다고 한다. 돈과 명예도 중요하지만 개개인의 삶을 즐기려는 신세대들은 삶의 의미를 찾아 그런 것에서 자신의 성취감을 찾기 때문에 같은 물건이면 조금 더 주더라도 의미가 있는 즉 남을 도울 수 있는 물건을 사며 기부하려 한다고 한다.

특히, 지구촌의 문제해결에 대한 교육이 성행하면서 기후변화의 대안, 지속가능한 삶, 쟁애인을 돕는 일, 불우이웃돕기, 재해재난에 관한 두려움, 글로벌화로 인한 지구촌의 문제에 더욱더 신경을 쓰는 신세대들이 되며, 이는 교육과정에서 강조가 되기 때문이거나 유학이나 어학연수를 다녀온 아이들이 타 국가의 삶이나 사고의 행태를 배워오기 때문이다.

2020 미래사회 10대 트렌드로 aging 고령화, blending 융합, climate change 기후변화, digitalization 디지털화, energy/environment 에너지와 환경, female 여성성강화.. 등에서 philanthropy 즉 기부문화가 포함된다. 신세대들은 기부에 대한 남다른 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미국 부자의 절반이 기부하고 있다고 한다.

빌리언에어 클럽 즉 빌게이츠와 워렌버핏이 이끌고 있는 기부클럽 'Giving Pledge'에 최근 페이스북 오너 마크 주크버그가 가입하면서, ”늙을 때까지 기다려서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젊은 갑부들은 젊어서 기부한다“고 말했다. 마크 주크버그는 2010년 9월에 1억달러를 뉴욕의 공립학교의 발전을 위해 기부한 바 있다.

헤지펀드(Hedge)는 금융계의 큰 손으로 한국의 IMF 경제위기를 불러왔던 조직이다. 이 펀드의 데이빗 하딩(David Harding)은 Philanthropist라는 조직을 구성하여 물리학이 지구를 살린다면서 캠브리지대학교의 미래 기후변화대안을 물리학으로 해결해달라고 2000만 달러를 기부하였다.

피터 디엘(Peter Thiel) 회장은 미래에 기부하는 프렌드 즉 'Thiel Foundation'을 만들어 MIT에서 시작된 X Prize 즉 모든 분야 과학자들이 융합기술로 지구촌과제를 해결하기위해 내건 상금을 내놓았다. 그는 또 미래예측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미래의 도전과 문제점을 미리 알면 대안이나 해결방안이 나오므로 미래예측을 하는 기구나 기관들을 돕기위한 기부금을 위해 Foresight Institute를 지원하고 있으며 Seasteading Institute 등 해양거주 주택건설등을 연구하는 재단에도 거금을 기부하고 있다.

버진항공 회장인 리차드 브랜슨경은 영국의 버진항공, 우주관광선 버진 갤럭틱 등을 개발한 사람으로 Philanthropy Business라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기부기업클럽에 많은 기업들이 참가하도록 독려하고 있다. 그는 기후변화상황실(Climate War Room)을 영국에 만들어 이제 기후변화는 지구가 맞선 전쟁이라고 강조하면서 매년 기후변화를 해결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사람에게 300억원의 상금을 주고 있다. 그는 2010년 10월에 이미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제거하는 기술을 개발한 사람에게 1회 상금을 수여한바 있다.

미국 국립기부트러스트에서 발표한 통계자료를 보자. 미국가구 65%가 기부를 하며, 연간 가구당 기부금은 2213달러며 평균은 870달러다. Giving USA라는 기부단체에 따르면 2009년에 기부금액은 3040억달러에 달하지만 2008년의 3150억달러에 비해 3.6% 감소한 이유는 금융위기 때문인 듯하다. 이로서 미국역사상 2008년 기부금액이 최대치였다. 2007년에는 3170억달러였다.

2009년에 기부금액중 5.5% 즉 144억달러가 기업이 기부한 금액이며, 재단에서 기부한 금액이 429억달러로 9.4%, 그리고 미국기부금액의 최다 인구는 개개인으로 2274억달러로 전체기부의 75%를 차지한다. 그 다음이 재단이다,

2009년 기부의 최대 수혜자는 종전처럼 종교단체가 33%, 교육기관이 13%, 그랜트재단에 10%, 보건복지에 9%가 갔다. 대부분의 기부금이 줄었지만 보건복지분야의 기부액은 증가한 것으로 드러났다. 기부금액은 2009년 GDP의 2.1%이다. 역사적으로 증권시장의 3분의 1 정도에 따라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래예측에서는 2052년 55조4천억달러까지 기부금액이 증가할 것으로 보고 있다.

2055년에는 약 41조달러가 다음세대를 위해 기부가 될 것으로 예측된다. 98%의 부유층이 기부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으며, 부유층에서의 기부의 이유는 사회환원(giving back to the community)이라고 답했다. 81%의 부유층은 빈곤층을 돕는 기관에 기부하며, 78%는 교육에, 68%는 복지와 종교에 기부한다. 필란드로피 크로니클지가 조사한 바로는 2009년에 온라인기부가 5% 증가한 것으로 드러났고 소셜네트워크 즉 페이스북을 통한 기부가 대표적이라고 발표하였다.

미국에 자선기관은 2009년에는 123만 8201개가 있으며 이는 2008년에 비해 4% 증가, 지난 10년간은 57%가 증가하였다. 종교집단은 이중에서 35만 5000여개가 자선기관으로 등록되어있다. 2009년에는 세금면제기관의 수익이 1.9조달러, 자산은 4.2조 달러가 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세금감면기관들 중 프로그램 서비스를 하는 곳이 69.26%, 선물이나 그랜트 수여기관이 22.75%, 세일즈나 타 수익금은 5%, 투자수익금은 2.71%, 이벤트수익금은 0.28%로 대부분의 자선기관은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자선기관의 증가율은 1980년이래 242%가 증가하였고 2000년이래 33.6%가 증가하였으며 2005년이래 6%가 증가한 꼴이다. 세금면제기관에서 1천만명정도를 고용하여 미국노동력의 6.9%를 고용하고 있다.

또 2009년 6340만명이 자원봉사를 하였고 이는 전미국민의 26.8%가 자원봉사를 한 꼴이며, 돈으로 따지면 시간당 20.85달러를 기부한 것이다. 미국민이 8억시간을 기부하여 1690억원을 자원봉사로 기부한 꼴이 된다.

자원봉사 영역으로 기부금모금 26.6%, 식품 분배 23.5%, 교통등 일반노동 20.5%, 교육 19.0%다. 종교단체에 자원봉사한 것이 35.6%, 교육기관자원봉사가 26.6%, 사회복지기관 13.8%, 의료보건기관 8.3%이다. 자원봉사지원기관이 미국에서 4만5천개가 존재하며 자산은 760억달러 정도다.

글/박영숙 유엔미래포럼 대표

버라이어티 코리아

남윤호의 시장 헤집기

남윤호중앙일보 경제선임기자yhnam@joongang.co.kr | 제203호 | 20110130 입력
각자 따로 노는 개인주의, 한데 뭉치기 좋아하는 집단주의. 어느 쪽이 경제성장에 유리할까. 지도자 아래 똘똘 뭉쳐 경제개발에 성공한 우리의 경험상 집단주의가 나아 보이긴 한다. 일본도 그랬고, 지금의 중국도 그렇다. 반면 산업화를 먼저 이룬 선진국들을 보면 생각이 흔들린다. 풍요로운 나라일수록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지 않나.

이에 대한 ‘정답’을 통계와 수식(數式)으로 찾은 사람이 있다. 미국 버클리대학의 유리 고로드니첸코와 제라드 롤랜드 교수다. 두 사람이 지난해 공동 발표한 논문은 문화와 성장의 상관관계를 밝힌 것으로 유명하다. 복잡한 수식은 제쳐놓고 결론만 말하면 이렇다. 개인주의가 강한 나라일수록 1인당 국민소득과 생산성이 높고, 특허 보유건수도 많다는 것이다. 집단주의가 일정한 발전단계에선 효율적일 수 있어도 긴 안목에선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다. 개인주의 예찬론이라 할 정도다.

“개인주의는 자유로운 발상을 북돋워 기술혁신, 창조적 발견, 예술적 실험에 유리하다. 반면 집단주의는 조직의 단합과 공동목표 달성엔 효율적이지만, 개인이 튀는 걸 억누른다.”
그럼 어떤 나라가 얼마만큼 개인주의 성향을 지니는 걸까. 이에 대해선 네덜란드의 사회심리학자 기어트 호프스테드가 자신의 홈페이지(www.geert-hofstede.com)에 권위 있는 분석을 내놓았다. 같은 잣대로 세계 56개 지역에서 의식조사를 해 지표로 표시했다. 100에 가까울수록 개인주의적이고, 1에 가까울수록 집단주의적이다.

개인주의 성향이 가장 강하다고 꼽힌 나라는 미국(91)이다. 가장 집단주의적인 나라는 과테말라(6)다. 한국(북한 제외) 점수는 18이다. 아시아 평균치 24에 못 미친다. 중국은 20, 일본은 46이다. 우리는 아시아에서도 비교적 강한 집단주의 성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고로드니첸코와 롤랜드에 따르자면 이는 경제성장에 불리한 요소다.

우리로선 받아들이기 불편한 결과다. 무엇보다 금융위기 이후의 한국의 높은 성장률은 어찌 설명할 건가. 두 교수는 한두 해의 기록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친 장기 데이터를 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또 개인주의가 성장을 촉진하기보다, 성장이 결과적으로 개인주의를 키우는 건 아닐까. 살림에 기름기가 돌면 자연스레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지지 않나. 그러나 두 교수는 이게 통계적으론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창의적 혁신엔 집단주의보다 개인주의가 유리하다는 건 충분히 설득력 있는 얘기다.

그렇다면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문화를 바꿔야 하는가. 참 어려운 일이다. 다만 문화도 절대불변은 아닐 터. 지금도 우리의 문화는 조금씩 개인주의로 흐르고 있지 않나. 획일적인 집단결속보다 각 분야의 다양성이 중시되는 추세를 보면 그렇다.

사실 그동안 우리가 자랑스레 내세운 ‘다이내믹 코리아’엔 왠지 신흥국 냄새가 풍기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젠 ‘버라이어티(다양성) 코리아’에도 신경 쓸 때가 됐다. 성숙한 선진국이 되려면 말이다.

기계보다 정확한 '개 코'…최대 98% 대장암 진단뉴시스

2011.02.02 12:56

▲ 1일(현지시간) 일본 연구팀에 의해 래브라도 리트리버가 냄새로 대장암을 조기 진단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래브라도 리트리버가 호흡을 통해 암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은 95%, 대변 샘플을 통해 암을 인지할 수 있는 정확도는 98%에 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사진 출처 : 英 오렌지뉴스 웹사이트>  /뉴시스

[화제] 조선 선비들은 왜 산에 올랐을까?
입산은 ‘超道(초도) 거쳐 동천 이르는 길’로 여겨
<선비를 따라 산을 오르다>의 저자 나종면 박사에게 듣는 산 이야기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왜, 어떤 자세로, 어떻게 산에 올랐을까? 등산할 때 지금과 다른 점은 무엇이고, 당시 선비들이 산에 갈 때 가지고 갔던 것은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

매년 등산객이 크게 증가하는 요즘 과거 선비와 평민들의 등산형태를 지금 상황과 비교해 보면 여러 재미있는 유사점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이었고 유도회(儒道會) 협동번역사업 책임연구원으로 있는 나종면(55) 박사와 같이 북한산에 오르며 그가 쓴 책 <선비를 따라 산을 오르다>에 대해  얘기를 듣고, 과거와 지금의 등산행태에 대한 의견을 들어봤다. 

조선의 선비들에게 입산은 영(靈)의 응결처를 경험하는 것이고, 정신적 자유의 실현으
로 봤다. 당시까지만 해도 산에 영(靈)이 있어 심신이 허약한 사람은 도깨비나 귀신에 홀리므로 입산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특별히 선택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었다. 따라서 산은 현실세계(속세)의 연장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였다. 입산하는 사람은 속세의 허상을 버리고 정화된 신성한 공간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로 간주했다.  

선비들에게 입산은 산의 입구에서부터 시작된다. 평지와 산이 만나는 접점, 즉 산의 입구를 초도(超道)라 불렀다. 이는 속세의 질긴 인연을 뛰어넘는 것으로부터 올바른 수양이 시작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오감을 억지로 차단하지 않아도 초도를 건너는 것 자체가 외부를 차단하며 끊는 것이다. 산에 들어가 신선한 기운을 받아들여 몸에 축척하면 호연지기가 저절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의미였다.


▲ 송음진하, 여름날 솔그늘에서 더위를 식히는 장면. 나박사의 책에 나오는 용인대 백범영 교수의 그림이다.
산 입구가 현실과 이상의 경계인 초도

선비들의 입산에 대한 의미는 조호익(1545~1609년)의 <유향풍산록(遊香楓山錄)>에 잘 나와 있다.

‘푸른 산 두른 속에 작은 동천 열렸는데 / 저 멀리 골짝에서 물 흐르는 소리 오네 / 숲 사이로 걸어가자 구름 가리나니 / 산 밖의 풍진 세상 몇 겹이나 막히었나’

동천(洞天)은 속세와 다른 신선이 사는 세계다. 그는 산을 동천으로 파악함으로써 깨달음이 초도를 넘는 순간 갑작스럽게 이루어진다고 봤다. 초도는 현실세계와 이상세계의 경계이며 분기점이다. 다시 말해 초도를 통과하자마자 저절로 동천에 이른다는 것이다.

선비들이 그렇다고 신선의 세계만 머무른 것은 아니다. 동천에서 발을 딛고 세속을 돌아보니 얽히고설킨 인연이 몇 겹이나 보였다. 이는 선비들이 초도를 비장하게 건너 산에 들어가 ‘속세의 부정’을 겪고 난 후 다시 ‘속세의 부정’을 부정하고 속세로 돌아오는 순환과정을 거친다. 결국 선비들은 세상을 버리지 않았고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선비들만 산에 갔던 건 아니다. 평민과 하인들도 갔다. 그러나 목적과 사회적 배경이 달랐다. 목적이 다르면 행위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다. 평민과 하인은 하나의 노동행위로 산에 갔고, 선비들은 수행과 유람으로 산에 갔다.

선비들의 입산이 수양과 수행의 측면인 정신적 행위에 가까웠다는 점에서는 요즘 등산행위와 사뭇 다르다. 요즘은 일상의 스트레스 해소와 건강증진이 주목적이며, 정신과 육체가 둘이 아니고 구분도 안 된다. 현대인들에게 등산은 속세와 선계를 구분하는 이분법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생활을 연장시켜주는 하나의 수단과 도구의 공간으로 존재한다. 과거 선비들이 가졌던 산의 이상성이나 고결성을 잃은 데 반해 산의 현실성과 친근성을 얻은 셈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선비들이 산에 갈 때 오늘날과 다른 여러 가지 준비와 지참물을 가져갔다는 점이다.

첫째 재계(齋戒)를 했다. 부추나 마늘 등과 같은 오신채(五辛菜, 마늘·달래·무릇·김장파·실파와 같은 자극성 있는 다섯 가지 채소류)나 비린내 나는 물고기 등을 먹지 않고 속된 사람들과 교류를 삼갔다. 재계하는 기간은 7일 또는 100일 등으로 잡았다.

둘째, 산에 들어가는 날짜는 길흉에 따라 취사선택했다. 나쁜 날에 입산하면 도사라고 해도 호랑이나 늑대, 또는 독충 등의 피해를 입을 수 있어 수행을 망친다고 여겼다.

셋째, 우보법(牛步法)에 통달해야 했다.

▲ 나종면 박사가 그가 쓴 책에 그림을 그린 용인대 백범영 교수와 산행을 하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커피를 마시고 있다. 사진 김승완 기자
이처럼 준비를 마친 입산 예정자가 꼭 챙겼던 것은 다름 아닌 거울과 부적이다. 거울은 단장용이라기보다는 선비들의 신분과시용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적과 같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적은 영묘하고 불가사의한 힘을 가져 귀신뿐만 아니라 맹수나 독충까지도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부적은 입산 목적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다. 영지를 캐러 갈 때는 영보부(靈寶符)라는 부적을 지니고 흰 개와 흰 닭, 하얀 소금 한 말을 꼭 챙겨갔다고 기록에 남아 있다.

일반 산행인 경우는 승산부(乘山符)를 가지고 갔다. 오악진형도라는 부적을 가지고 가면 바위나 나무의 도깨비, 산이나 하천의 정령도 사람을 범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산중에서 약을 만들 때는 노군입산부(老君入山符)를 챙겼다. 이는 복숭아나무 판자 위에 붉은 글씨로 부적문자를 가득 차도록 크게 써놓은 것이다. 집이나 문, 실내의 사방 모서리나 도로의 요소요소에 붙여 놓으면 그곳을 기준으로 50보 이내에는 도깨비나
산의 정령 따위가 침입할 수 없다고 한다.

그 외에도 맹수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한 부적, 살모사를 물리치기 위한 부적 등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이는 산에 올라가는 목적이 꼭 수양과 수행만이 아니었던 점도 고려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박사의 책에 언급된 선비들은 문무자 이옥, 월사 이정구, 번암 채제공, 미수 허목,
율곡 이이, 해좌 정범조, 삼연 김창흡, 수당 이남규, 아계 이산해, 남명 조식, 한강 정구, 퇴계 이황, 면암 최익현, 어당 이상수, 지산 조호익, 보만재 서명응 등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사대부들이다. 방내와 방외를 가리지 않고 두루 산에 올랐고, 그들이 남긴 기록을 정리했다.

▲ 나종면 박사의 책에 나오는 용인대 백범영 교수의 그림이다. 운해, 땅에도 바다가 있고, 하늘에도 바다가 있다. 땅의 바다는 무엇이든 받아들이지만 하늘의 바다는 무엇이든 다 덮는다(왼쪽). 추월만공산, 만산이 다 스러진 비산을 채우는 것은 가을의 환한 보름달뿐이다. 그림 용인대 백범영 교수(오른쪽).
산행 갈 때 거울과 부적은 꼭 챙겨

나박사가 조선 선비들의 산행에 관심을 가지된 계기는 1985년 서른의 나이에 뒤늦게 대학에 들어가 한국문학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비롯된다. 당시 어느 강의에서 사마천의 <史記(사기)> ‘봉선서’편을 인용하면서 천자와 태산의 관계에 대해 배웠다. 대충의 내용은 ‘황제가 태산에 올라 봉선을 행하고, 기이한 물건에 치성을 올려 신과 통하고자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통해 입산이란 문제는 현실세계와 이상세계의 대척점에서 이해해야 하고, 특정한 산은 특정한 인물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으로 짐작했다. 이 일이 ‘옛사람의 명산 유람을 어떻게 이해하고 연구할까’라는 문제의식을 가지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 후 공부를 하면서 조선시대 선비들이 우리 산천을 유람하고 ‘遊記(유기)’라는 작품을 아주 많이 남긴 사실을 알게 됐고, 2000년 들어서부터 본격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어 ‘숲과 문화연구회’에서 발간하는 <숲과 문화>에 선비들의 산과 수양에 관한 내용으로 4년여 글을 쓰면서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책을 쓰는 틈틈이 산에 다니는 일도 빼놓지 않았다. 그는 부인과 용인대 백범영 교수, 세종대 이경룡 교수 등과 함께 산에 간다. 주로 부인과 함께 가지만 디른 이들과 시간이 맞으면 언제든지 같이 등산할 준비는 돼 있다.

그의 집도 북한산 지산인 아미산 언저리에 있다. 이른바 초도에 걸쳐 있는 것이다. 언제든 세속을 벗어나 선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경계에 살고 있다.

그는 이들과 함께 한 달에 한두 번밖에 산에 못 가지만 우리 등산문화가 이젠 대중문화에서 고급문화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때가 됐다고 판단한다. 1,500만 명을 넘어서 2,000만 명을 바라보는 등산인구가 ‘양질전화(良質轉化)’할 때가 됐다는 것이다. 양적 팽창은 질적 성장을 가져온다는 법칙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등산객 스스로 자연과 환경을 생각하는 고급문화를 주도할 시기라고 판단한다. 지금 일고 있는 ‘둘레길 붐’도 그 일환이지 않나 싶다고 한다.

그는 선비들의 산행문화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십승지와 선비들의 음식과 운동 등에 관한 책도 계속 발간할 계획이다. 십승지는 직접 현장을 답사한 뒤 완성할 것이며, 접근하면 할수록 풍수에 더욱 더 매료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과거 문헌과 기록을 통해 과연 선비들의 문화가 어느 정도 그의 요리솜씨를 통해 대중의 입맛에 맞아떨어질지 자못 궁금하다.


/ 글 박정원 부장대우 jugnwon@chosun.com
 
 
 
 
 
오랜만에 학소도 거실이 반가운 손님들로 북적였다.
 
 
 
 
 

- 인왕산 鶴학巢소島도에서 최범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