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연회비 350만원짜리 '럭셔리 목수클럽'

 "골프보다 나무 냄새·땀 냄새가 좋더라"연회비 350만원! 이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하고 당신은 기꺼이 '목수'가 되겠는가. '웬 미친 소리?' 하겠지만, 이 정도 목돈을 주고 육체노동, 일명 '노가다'의 땀과 고통을 구매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명품' 목공소 얘기다. 4~5년 전부터 우리 사회에 불어닥친 'DIY(Do it yourself)' 목공 바람이 비즈니스맨, 혹은 전문직 종사자들의 고급스러운 취미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이제 골프는 갔고 목공이 대세"라고 단언하는 남성들도 있다.

골프는 한물가고 목공이 대세?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에 자리한 '더 우드 스튜디오'. 조남룡·허호·김명성 등 목공의 매력에 빠진 중견 사진작가 셋이 의기투합해 2005년 문을 연 목공소다. 이곳은 '연회비'를 받는 럭셔리 공방으로 DIY업계에 유명하다. 젊은이들 사이엔 '영화배우 강동원 목공소'로 이름이 더 알려져 있다. 실제로 강동원은 지난해 12월 공익근무를 하기 전까지 촬영 틈틈이 이곳을 찾아 나무를 깎았다.

“나무에게서 위안을 받지요.” 목공소 ‘더 우드 스튜디오’의 단골 멤버들. 최근 들어 월(月)회원제도 부분적으로 실시하면서, 주말이면 20대 직장인들도 목공소를 찾아온다. /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20여명 회원들 대부분이 의사·회계사·세무사·교수·디자이너·호텔리어 등 중년의 전문직 종사자나 중소기업 CEO들이다. 3년차 베테랑 목수인 사업가 김태길(59)씨는 서울 삼성동에서 일주일에 두세 번 목공소를 찾는다. "여행·등산·낚시 안 해본 취미생활 없지요. 그런데 목공 만한 게 없습디다. 골프도 건강엔 좋지만, 육체노동의 대가로 얻는 생산물이 당장 눈앞에 놓이는 목공의 희열엔 비할 수가 없지요."

골프 대신 목공에 연회비를 투자하는 이곳 회원들은 다른 공방들처럼 제2의 직업, 혹은 생업을 목표로 나무를 깎는 게 아니다. 그들은 '목공이 갖는 심리치료 효과'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나무가 주는 관용, 위안이라고 할까요. 나무의 따뜻한 촉감, 가공할 때 번지는 향기, 2~3㎜ 틀려도 대충 맞춰 끼울 수 있게 배려하는 나무의 미덕에 숨통이 확 트이는 걸 느끼지요." "우리 일과라는 게 얼마나 기계적이고 빡빡합니까. 나무먼지, 톱밥을 뒤집어쓴 채 무아지경으로 나무를 깎고 땀을 흘리다 보면 모든 잡념이 사라지고 마음이 정결해지지요." 조남룡(52)씨는 "머리로만 살아가는 최첨단 시대에 몸을 혹사시키면서 얻는 쾌감, 성취에 목공의 마력(魔力)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플러스 알파'는 인맥

더 우드 스튜디오의 또 다른 특징은 강의 위주 교육이 아니라는 점이다. 김명성(49)씨는 "한마디로 어른들을 위한 즐거운 목공 놀이터"라고 말했다. 이론 강의가 따로 없이 첫날부터 실기로 직진한다. 가르치는 사람, 배우는 사람이 따로 없다. '고참' 회원들이 나무 다루는 모습을 어깨너머로 배우고, 베테랑이 신입회원에게 톱질과 대패질의 시범을 보이는 식이다. 일주일에 4일간 자유롭게 목공소를 이용할 수 있는 것도 연회원 목수들의 이점.

연회비로 목공소를 운영하는 이유에 대해 조남룡씨는 "배타성 때문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진짜 목수 일이 좋은 사람, 나무를 통한 창작의 기쁨을 진심으로 즐기면서 오랜 교류와 친분을 지속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게 좋다고 생각했지요."

회원들 또한 연회비가 비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목공 이외의 '플러스 알파'가 있기 때문. 바로 인맥(人脈)쌓기다. 서울 송파에서 갤러리 아트숍을 운영하는 김상일(39)씨는 "단순히 나무만 깎는 게 아니다"고 말한다. "여기 와서 처음 만난 분들이지만, 저로서는 인생 선배들이라 비즈니스 노하우부터 삶의 지혜까지 배우는 게 너무나 많습니다. 제가 전혀 몰랐던 분야에 대한 지식도 얻고요. 결국은 사람 아닙니까?"

공사장 인부들처럼 '작업'이 끝나면 목공소 인근 밥집에서 술 한잔 기울이는 재미도 일품. 이들의 '로망'은 자기만의 공방, 목공놀이터를 갖는 것이다.

‘무소유’ 법정 떠난지 1년도 안돼…길상사 ‘소유욕’ 다툼
덕현스님 “사람들 욕망 시기심 어려웠다” 주지직 사퇴
운영문제로 내부갈등 빚은 듯…법정 추모법회 예정대로
한겨레 조현 기자기자블로그
» 덕현 스님
1년 전 법정 스님의 법구가 장작불 속에서 한줌의 재로 타들어가는 순간 상좌(제자)를 대표해 ‘화중생련’(火中生蓮·불속에서 연꽃을 피움)을 외쳤던 덕현 스님이 자신을 옥죄는 욕망의 불꽃을 견디지 못한 듯 길상사를 떠났다. 오는 28일(음력 1월26일) 법정 스님 1주기를 1주일 가량 앞둔 시점이다.

덕현 스님은 일요일인 지난 20일 짐을 챙겨 길상사를 떠나면서 홈페이지에 ‘그림자를 지우며’라는 글을 올려 “우리는 누구나 각자의 인연을 따라서 자신의 길을 가야 하는 인생들”이라면서 떠나는 소회를 밝혔다. 그는 먼저 “현대의 도심생활에 쫓기고 지쳐가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되고 활로를 열어 주어야 할 큰 절의 주지 소임을 임기 도중에 그만두는 것이, 순수한 희망으로 배움과 수행의 길을 같이하려 했던 많은 어진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될지 생각하면 가슴이 몹시 아프다”면서 사죄의 변으로 시작했다. 그는 “스승의 유언과도 같은 마지막 분부를 거역할 수 없어 그 동안 여기 있었고, 지금은 설령 법정 스님 당신이라 해도 여기를 떠나는 것이 수행자다운 일일 것 같아 산문을 나선다”고 밝혔다.

서울대 법학과 재학시절 대학에 초청된 법정 스님의 강의를 듣고 감동해 출가를 결심한 덕현 스님은 지난 90년 법정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짧은 법랍에도 불구하고 선방에서 안거(여름과 겨울 3개월씩 하는 선방의 참선정진)를 8번이나 참여한 선승이었다. 법정 스님의 7명의 상좌 가운데 4번째인 그가 갑자기 서울로 불려와 길상사 주지를 맡은 것은 법정 스님이 암으로 와병중이던 지난 2009년 3월이었다. 지난 2000년부터 2009년까지 길상사 주지를 맡아 길상사를 반석에 올려놓은 맞상좌 덕조 스님이 갑자기 주지직을 그만두면서 길상사 주위에선 법정 스님과 덕조 스님의 불화설이 터져나왔다. 덕조 스님이 ‘길상사’에 욕심을 내면서 법정 스님이 진노해 주지를 바꿨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법정 스님이 상좌들에게 남긴 유언 가운데 ‘맞상좌 덕조 스님’ 대목은 ‘자중하라는 경계성’에 가깝다. 법정 스님은 유언에서 ‘덕조는 맞상좌로서 다른 생각하지 말고 결제 중에는 제방선원에서, 해제 중에는 불일암에서 10년간 오로지 수행에만 매진한 후 사제들로부터 맏사형으로서 존중을 받으면서 사제들을 잘 이끌어주기 바란다’고 썼다.

(사)‘맑고향기롭게’도 법정 스님의 유지를 받들어 덕조 스님이 아닌 덕현 스님을 2대 이사장으로 추대했다. 덕현 스님은 법정 스님 앞으로 보시된 길상사를 스승의 본찰인 순천 송광사의 말사로 등록함으로서 길상사에 개인절이 아니라 공찰(公刹)임을 못박았다. 하지만 덕조 스님을 따르던 길상사 신도들과 또 (사)맑고향기롭게 기득권 세력들에 의해 덕현 스님이 적지않게 시달렸다는 내용이 덕현 스님의 고별 글에 포함돼 있다. 덕현 스님은 “가장 어려웠던 것은 멀고 가까운 사람들의 정제되지 않은 욕심과 야망, 시기심, 그리고 무리의 중심에 있는 사람의 고충과 충심을 헤아리지 않고 그 결정과 처신을 무분별하게 비판하고 매도하는 말들, 그 뒤에 숨은 아상(我相)들이었다”며 “나는 ‘맑고 향기롭게’의 몇몇 임원들이나 길상사나 ‘맑고 향기롭게’ 안팍에서 나와 선의를 가진 불자들을 힘들게 했던 사람들에게는 할 말이 거의 없다. 이 무상의 흐름 속에서 그들은 그들 스스로의 자각을 이룰 것이다”고 썼다. 덕현 스님은 길상사를 떠나기 전에 ‘맑고 향기롭게’의 이사장직에서도 사퇴할 의사를 표명한 것을 전해졌다.

길상사 홈페이지 게시판엔 법정 스님의 1주기도 안돼 정작 그의 주위에서 길상사라는 도심 거찰과 ‘맑고 향기롭게’란 조직의 명예를 두고 다툼이 나온 것을 두고 탄식의 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인간의 역사를 소유사이며 끝없는 인간들 간의 싸움의 원인과 고통이 소유욕 때문이라며 평생 무소유를 실천하고 열반해서도 관도 덮지않은 채 그대로 태우고 자신의 책마저 더 이상 팔지 말라고 유언하고 떠났던 법정 스님의 1주기 추모법회가 오는 28일 오전 11시 길상사 극락전에서 봉행될 예정이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장하준 칼럼] 무상 복지, 부자 복지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경제학

부자 편드는 사람도 재산세·누진세 필요 인정
빈곤층 편들어도 간접세 철폐 주장 안해…
복지 논쟁, 이념 벗어나 구체적 사안들 토론해야

미국이나 영국에서 상속세에 반대하는 일부 사람들은 이를 '사망세(death tax)'라고 부른다. 상속세라고 하면 재산을 물려받아 '불로소득'을 한 자식에게 초점이 맞추어진다. 그렇게 되면 부모가 자식에게 재산을 남겨주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임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도 상속세를 없애자고 하기가 힘들어진다. 그러나 이를 사망세라고 부르면 초점이 부모에게로 옮겨가서 죽는 것도 억울한데 거기에 세금까지 매긴다는 공격을 통해 그 세금의 정당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 이렇게 논쟁을 할 때 어떤 이름을 붙이느냐가 논쟁의 승패를 가르는 데 굉장히 중요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논쟁의 상대들이 서로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름을 붙이는 과정에서 충분히 타협점을 찾을 수 있는 문제들이 극단적인 대립관계에 있는 것으로 잘못 인식되기가 쉽다는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복지문제가 좋은 예이다.

시민권에 기반한 보편적 복지의 확대를 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무상 복지'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무상(無償) 복지란 있을 수 없다. '무상' 교육이나 '무상' 진료를 받을 때 당장 돈을 내지는 않지만 결국은 세금으로 그 대가를 치르기 때문이다. '공구'(공동 구매)이지 '공짜'가 아니다. 소득세나 재산세를 안 내는 가난한 사람한테는 공짜가 아니냐고 생각하겠지만 그들도 부가가치세 같은 간접세는 내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

반대편도 마찬가지이다. 그들 중 일부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지 혜택을 주면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부자들까지 덕을 보는 '부자(富者) 복지'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재산세와 같이 부자들만 주로 내는 세금이 있고 소득세같이 돈을 많이 벌수록 비율적으로 많이 내야 하는 누진세가 있는 상황에서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똑같은 복지 혜택을 받는다면 그들은 같은 상품에 대해 몇 배 돈을 더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편적 복지를 통해 부자들이 혜택 보는 것이 그렇게 못마땅하면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거두면 된다.

이렇게 볼 때 한쪽은 누구나 돈을 내게 되는데 마치 가난한 사람은 돈 하나도 안 내고 혜택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호도하고, 다른 쪽은 혜택은 똑같이 보고 돈은 더 내야 하는 부자들이 더 크게 덕을 보는 것으로 왜곡하는 것이다.

개념적으로는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가 나누어지지만 누구도 완전한 선별(選別)이나 완전한 보편성을 주장하지 않는다. 아무리 선별적 복지를 주장하는 사람도 공공 초등교육에 반대하지 않으며, 아무리 보편적 복지를 주장하는 사람도 성형수술비를 공공 의료를 통해 제공하자고 주장하지 않는다. 재원 조달의 문제에 있어서도 부자 편을 드는 사람들도 재산세와 누진세의 필요성을 인정하니 부자들이 조금이라도 높은 세금부담을 져야 한다고 인정하는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 편을 드는 사람들도 부가가치세 등 간접세를 철폐하자고 주장하지 않으니 가난한 사람도 조금은 세금을 내야 한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원론적으로 보편적 복지가 맞느냐 아니냐를 이야기하는 것보다 구체적인 타협을 하는 것이다. 어떤 질병에 대해 의료비 중 얼마를 본인이 부담해야 하는가, 어떤 수준까지의 교육이 세금을 통해 제공되어야 하는가, 노후연금은 몇 살부터 얼마나 받아야 하는가, 실업보험 급여가 실직 전 보수에 연동되어야 하는가 등 구체적인 문제가 토론되어야 한다. 세원(稅源) 조달문제도 현재 우리 소득 수준에 비해 낮은 담세율(擔稅率)을 얼마나 올려야 하는가, 직접세와 간접세의 비율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어떤 세금을 얼마나 올리고 어떤 것을 얼마나 내릴 것인가, 복지 지출을 늘리는 대신 기존 정부 지출 중에 줄일 것은 없는가 등등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야 한다.

물론 보편적 복지, 선별적 복지와 같은 기본적인 개념 논쟁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논쟁은 불필요하게 대립만 악화시키기 쉽다. 이제 그런 논쟁은 일단 접어두고 구체적인 논쟁을 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타협할 수 없는 원칙의 차이, 메울 수 없는 이념의 간극으로 보이던 것들 중의 많은 부분이 충분히 타협이 가능한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문제들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그러면서 많은 분야에서 생산적인 타협이 나올 것이다.

"굶어죽을 때까지 뭐했냐고? 영화판을 아는가?"

[인터뷰] "'싸가지 없다'는 말 두려워 무보수로 일하기도…"

이규한(37) 씨는 10년 넘게 충무로 바닥에서 촬영스태프로 '굴렀다'. 그는 현재 일을 하지 않고 있다. 2009년 개봉한 영화 <차우> 이후부터 쉬기 시작했으니 2년이 다 되어간다.

"꿈이 촬영감독이 돼서 영화를 찍는 거예요. 그걸 위해 이리저리 여러 방법을 모색 중인 셈이죠."

10일 만난 그는 현재의 휴식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만만치가 않다. 일을 그만 둔 후 1년 동안 집에서 두문불출했다. 그때는 하루하루 산다는 게 벅찼다. 당장 생활할 생활비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씨는 "얼마 전 돌아가신 최고은 씨가 어떤 심정이었을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고 했다.

이 씨는 "최고은 씨의 죽음을 두고 일부에서는 '굶어 죽을 때까지 뭐했냐'라고도 한다"며 "하지만 영화판 일이라는 게 언제 어떻게 일이 생길지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일을 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 씨는 "영화에 대한 꿈을 버렸다면 다른 일이 아니라 허드렛일도 할 수 있다"며 "하지만 꿈이 있고 그 꿈을 위해 노력하는 상황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했다.

현재 이 씨는 이래저래 지인들의 촬영을 돕기도 하며, CF 촬영장에서 일을 하기도 한다. 올 4월에는 이 씨가 촬영에 참가한 저예산 영화 <회초리>가 개봉된다. 이 씨는 "힘들지만 꿈이 있기에 감내하고 있다"며 "언젠가는 꿈을 이를 수 있지 않겠냐"고 웃었다.

▲ 영화 촬영 현장의 스텝들. (이 사진은 기사 내용과 상관이 없습니다) ⓒ연합뉴스

흥행 대박 영화으로 보너스? 언감생심


이 씨가 처음 영화 쪽에 발을 들인 건 군대를 제대한 1998년이었다.

"학창시절부터 영화에 관심이 많았어요. 집안 형편이 어려워 영화 관련 쪽 공부는 하지 못했지만요. 그러다 군대 제대 이후 무작정 충무로 문을 두드렸죠."

그렇게 촬영부 막내로 처음 찍은 영화가 1999년에 상영됐다. 하지만 3개월 동안 일하면서 받은 돈은 10만 원이 고작이었다. 이 씨는 "그래도 좋았다"며 "아카데미 등에서 촬영 기술 등을 배우려면 되레 돈이 들지만 이곳에서는 돈까지 주면서 기술을 가르쳐준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라고 웃었다.

박봉인 막내 스태프 생활을 몇 년간 계속했다. 이 씨는 당시를 두고 "영화판 일이 고되다는 건 이미 정평이 나 있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고된 일이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씨가 무엇보다 힘든 건 계약 기간이 지났음에도 제작사가 보수 없이 추가 촬영을 강행할 때였다. 이 씨는 "다음 작품도 해야 하는데 추가 촬영으로 인해 스케줄 자체가 아예 엉켜버리는 경우가 몇 차례 있었다"며 "하지만 이를 거부할 순 없었다"고 말했다.

"제작사의 열악한 상황 때문에 보수 없이 추가 촬영을 할수밖에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로 인해 다른 작품을 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쉬어야만 하는 상황에 몰리면 정말 난감하죠. 물론 거부를 할까도 생각해보지만 손바닥 보다 작은 충무로 바닥에서 '싸가지 없다'는 평이라도 나면 이후엔 일을 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거절하기 어려워요."

영화가 대박으로 흥행해도 보너스는 '주면 감사한 것'에 불과한 것도 문제였다.

"2001년 개봉된 <두사부일체>를 5개월 동안 찍었는데, 이 영화가 대박으로 흥행하자 영화 스텝으로 일한 이후 처음으로 보너스가 나왔어요. 이 영화를 찍고 받은 돈이 300만 원인데, 보너스가 30만 원이 나왔습니다."

당시 '두사부일체'는 관객 350만 명을 동원했다. 이 씨는 "하지만 그나마 일이라도 하는 것에, 적지만 보너스를 주는 것에 감사해야만 했다"며 "일조차도 못하는 날이 부지기수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이 없을 때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근근이 버텼다"고 했다.

이 씨는 그러다 2006년 개봉한 <맨발의 기봉이>부터 촬영부 '퍼스트(First)'로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퍼스트'로 일을 하면 형편이 나아질 줄 알았지만 생활고는 여전했다. '퍼스트'는 촬영부에서 첫 번째 서열로, 연출부에 비유하자면 조감독과 비슷하다. 이 씨는 "6개월 동안 영화 한 편을 촬영한다고 해도 자신이 받는 돈은 1000만 원 안팎이었다"고 설명했다.

"힘들다고 여기서 멈출 순 없잖아요"

'퍼스트'가 되자 일은 더 많아졌다. 영화 종사 관계자도 만나야 했고 '오야지' 즉, 촬영감독 수발도 들어야 했다.

"새벽 3시에 촬영감독이 '술값이 없으니 와서 술값을 내라'고 해서 자다가 황급히 달려간 경우도 있었어요. 도제식을 고수하는 영화판에서 '오야지'에게 깍듯해야 하는 건 기본이죠. 자칫 눈 밖에라도 나면 다른 촬영팀과도 영화 작업을 할 수 없게 때문이죠."

그런 생활을 2009년 개봉한 영화 <차우>를 끝으로 청산했다. 이 씨는 당시 선택을 두고 "이대로 있다가는 자신이 꿈꾸는 촬영감독을 할 수 없겠다는 판단에서였다"고 했다.

"'퍼스트' 역할만 하면 평생 이것만 하게 될 거 같았어요. 그래서 촬영팀을 떠났죠. 그 이후 지금까지 촬영감독이 될 수 있는 여러 방안을 모색 중입니다."

물론 쉽지가 않다. '배고픈 인생'에서 보다도 더 팍팍한 인생으로 내려가고 있다. 그렇다고 다른 일을 하기도 어렵다. 촬영감독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고지가 눈앞에 있다고 생각해요. 여기만 넘으면 내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믿어요. 힘들다고 여기서 멈출 순 없잖아요."

영화 스태프들은 대표적인 '워킹푸어'에 속한다. 조사에 따르면 2000년 이들의 평균소득이 337만 원이었고, 2009년도에도 623만 원에 그쳤다. 월급으로 치면 52만 원이 채 안 돼 최저임금수준에도 미치지 못 한다. 그 사이 우리 사회는 저임금 소외계층을 위한 사회보장 제도정비해 왔지만, 이들은 여전히 사각지대로 밀려나 있다.

2007년부터 제작사별로 4대 보험지급하고 있지만 제각각인데다, 실업급여도 180일(6개월) 동안 고용보험을 납부해야 한다는 규정으로 인해 보통 3~5개월 작업하는 스태프들은 혜택을 거의 못 받고 있다.

이에 영화산업노동조합은 단기고용계약인 경우 직군을 분리해 12개월 이내 피보험기간이 90일이상 180일 미만인 경우 실업급여를 45일분 지급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507시간 이상 일하면 실업급여를 243일 동안 제공하는 예술인을 위한 실업급여 제도(엥떼르미땅)를 운영하고 있다.

영화산업노조는 성명을 통해 "최소한의 생계를 위해 반복되는 실업기간 동안 실업부조금을 지급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자는 요구를 수없이 해왔다"며 "2006년 스크린쿼터 축소의 대안으로 영화발전기금 신설을 제시하던 정부가 지금까지 집행된 영화발전기금의 몇 %나 이런 목적에 썼는지 답답하다"고 비판했다.

노조는 "만약 실업부조제도가 현실화 되어 고인이 수혜를 받았더라면 작금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며 "최고은 씨의 죽음은 사회적 타살이 아니라 명백한 '타살'"이라고 주장했다.

** 아래 글 세 꼭지는 김영하 작가 개인 홈페이지(http://kimyoungha.co.kr)에서 옮겨온 글이다.

 

 

오래 고민하다 이 글을 씁니다.

제가 생각이 짧고 성격이 비뚤어져 이런 난리를 초래했습니다. 저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수많은 블로그 포스트와 댓글, 트윗들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게 어디서 왔겠습니까. 다 저로부터 비롯된 것이지요.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렇게 믿었다고 하지요. 성격이 곧 운명이라고.

논쟁을 함께 해온 평론가 소조님께 사과합니다. 논쟁의 파탄은 다 제 책임입니다. 다른 이들과 지금의 그 고민을 잘 이어가시기 바랍니다. 소조님의 글에 호감이 없었다면 아마 이 논쟁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어쩌면 조만간 소조님은 문학판을 바꿀지도 모르겠습니다. 벌써 한 작가가 오래 견지해온 철학에 균열을 내셨을 뿐 아니라 여러 동지들을 규합하셨으니까요. 소조님께 부탁 하나만 드리겠습니다. 소조님의 블로그에 모아놓으신 제 글(특히 불완전한 버전으로 가져가신 글을 비롯한 모든 글)은 편집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소조님의 글만으로도 뜻이 충분히 전달될 것입니다.  

그리고 최근에 제가 쓴 일련의 글로 상처입었을 모든 이들에게 사과합니다.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작가가 이 정도도 예상 못했다면 누구의 책임이겠습니까. 바로 저 자신의 책임입니다.

무엇보다도 죽은 고은이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고은아, 미안하다. 살아서도 별로 도움이 못 되는 선생이었는데 가고 나서도 욕을 보이는구나. 정말 미안하다.

마지막으로 고은이에 대해 한 가지만 말하고 갈까 합니다.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을 것 같아서입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고은이가 굶어죽었다고 당연히 믿고 있다는 데 놀랐습니다. 아마도 최초로 보도한 한겨레신문의 선정적 기사 때문일 겁니다. 신문에서 보도한 쪽지도 사실과는 조금 다릅니다. 물론 그녀가 풍족하게 살아갔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의연하고 당당하게 자기 삶을 꾸려갔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직접 사인은 영양실조가 아니라 갑상선기능항진증과 그 합병증으로 인한 발작이라고 고은이의 마지막을 수습한 친구들에게 들었습니다. 게다가 고은이는 우울증도 앓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친구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많은 개인적 사물들이 정리돼 있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삶에 대한 희망을 서서히 놓아버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진실은 아직 누구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편한대로 믿고 떠들어댑니다. 갑상선 기능항진증이 어떤 병인지 아시나요? 아무리 먹어도 허기가 지고 그러면서 몸은 바싹 말라가는 병입니다. 불면증도 뒤따르고 이 불면증은 우울증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진실은 외면한 채 고은이를 아사로 몰고 가면서 가까웠던 사람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고은이는 재능있는 작가였습니다. 어리석고 무책임하게 자존심 하나만으로 버티다가 간 무능한 작가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녀가 대학을 다닐 때 어떻게 학비를 벌었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하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다들 믿고 싶은대로 믿을 테니까요. 어쨌든 이번 일을 계기로 마음의 병이든 몸의 병이든 우리 사회가 서로 살피고 돌보는 계기가 되면 그녀의 죽음이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를 예술의 순교자로 만드는 것도, 알바 하나도 안 한 무책임한 예술가로 만드는 것도 우리 모두가 지양해야할 양 극단이라는 것만은 말해두고 싶습니다.

어쨌든 최근의 사태와 관련된 모든 분들께 사과를 드립니다.

블로그를 닫고 트위터를 그만두겠습니다. 1년 전 트위터와 블로그를 함께 시작할 때, 어떤 희망이 있었습니다. 고립된 작업실에서 나와 사람들과 어떤 대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저라는 인간은 그런 건강한 소통이 불가능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가장 사랑하는 책상 앞으로 돌아가 글만 쓸까 합니다. 사실 거기 있을 때 저는 가장 행복합니다. 이런 자기만족적이고 '낭만주의적인 예술관'을 타인에게 설득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런 저를 비판하셨던 분들은 앞으로 나아가 세계를 바꾸고 현실과 대결하십시오. 부족한 저는 골방에서 저의 미성숙한 자아와 어두운 욕망을 돌보겠습니다.

언젠가부터 몇몇 동료작가들의 면면이 트위터에서 안 보인다 했더니 그들은 저보다 훨씬 지혜로웠던 것 같습니다. 작가가 있어야할 곳은 여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겠지요. 여러가지로 부끄럽습니다.

1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트위터와 블로그에서 만나온 많은 분들, 멘션과 댓글로 저에게 말을 걸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문학판에 거의 나가지 않는 터라 트위터에서나마 동료작가들과 마음을 나눌 수 있었는데 이제 작품으로 만나는 수밖에는 없겠군요.

댓글이나 방명록에 글을 남긴 분들이 자기 흔적을 찾아가실 수 있도록 며칠은 블로그를 열어놓겠습니다.

어디 예술가들만 힘들겠습니까. 길고 험난한 인생 길에서 다들 승리하시길 빕니다.

2011년 2월 14일

김영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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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최고은의 선생이었다.

이 첫 문장을 쓰기가 힘이 들었다. 지금도 그렇다. 고은이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지난 설이었다. 고은이와 함께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이 내게 이메일로 부음을 알려왔다. 그들은 비통해하고 있었다. 누구도 내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이메일에서 나는 애써 감춘 비난의 뉘앙스를 읽었다. ‘고은이가 그렇게 될 때까지 선생님은 뭘 하셨나요?’ 또한 자책의 마음을 동시에 읽었다. 함께 수업을 듣고 영화를 만들고 밥을 먹었던 그들로서는 그런 비참한 죽음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내 컴퓨터에는 고은이가 쓴 글들이 들어있다. 부음을 들은 날 밤에 나는 그녀가 과제로 낸 글들을 찾아 다시 읽었다. 맥락이 달라져서일까. 모든 게 달라보였다. 글 속에서 고은이는 어느 가난한, 가스요금도 못 내는 시나리오 작가가 맞고로 떼돈을 버는 이야기를 유머러스하게 풀어놓고 있기도 하고, 가슴이 물리적으로 너무 아파 방바닥을 기어다니는 사람의 이야기를 쓰고 있기도 했다. 죽은 제자의 글을 읽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다 읽었다. 그리고 추모행사를 준비한다는 친구들에게 보내주었다. 마음들을 잘 추스르라고 말했다.

고은이는 두 학기 동안 내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수업을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밝고 붙임성이 있는, 그러나 어딘가 어두운 그늘이 있는 친구였다. 다른 학교를 졸업하고 들어왔던 터라 이미 이십대 후반이었다. 당시 나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의 교수였는데, 전공이 서사창작인지라 영상원 학생들도 많이 들었다. 한예종에는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온다. 영상원도 마찬가지다. 영상원의 입시에는 글쓰기도 포함되어 있다. 영상으로 학생을 뽑기는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글을 통해 학생의 재능을 가늠하자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의 인기가 높고 지원자들이 몰려들면서 예기치 않은 결과가 나타났다. 그것은 영상원에 글을 잘 쓰는 학생들이 본의 아니게 늘어난 것이다.

고은이도 그런 학생 중의 하나였다.

꿈은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것이었지만 문학도 좋아했다. 글도 뚝딱뚝딱 잘 썼다. 유머가 있었고 비애가 있었고 통찰이 있었다. 다른 학생들의 글도 만만치 않게 좋았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이렇게 글을 잘 쓰는데 왜 영화들을 하려고 하니? 따뜻한 방에서 별로 돈 안 들이고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그때 슬며시 웃던 것이 기억난다. 영화라는 잘나가는 장르를 질투하는 소설가의 시샘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마 고은이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 한 명은 내 말을 들었다. 그녀는 영화를 포기하고(자기 말로는 영화에 원래 큰 관심이 있지도 않았다고 한다) 연극원으로 과를 옮겼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 반 년 후에 한 문예지의 신인상을 통해 등단했다.

그녀가 김사과다.  

고은이는 남았다. 그리고 단편을 만들었다. 영상원 영화과에서는 누구나 단편을 찍어야한다. 고은이도 찍었다. 그리고 영화제에 가서 상도 받았다. 그게 <격정소나타>다.

그 다음 해인가. 평소 알고 지내던 영화 제작자가 시나리오를 고칠 작가를 추천해달라고 했다. 고은이를 소개시켜줬다. 그러나 계약은 성사되지 않았다. 제작자는 고은이가 제시한 액수가 너무 크다고 말했다.

“그 삼분의 일만 줘도 하겠다는 애들이 널렸어요.” 라고 제작자는 말했다. 지금 내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고은이가 제시한 금액은 한 재능있는 작가의 시간을 하염없이 저당잡을만한 큰 돈이 아니었다는 것이다(내가 얼마인지 말하면 아마 다들 놀랄 것이다. 그리고 실은 그 절반밖에 못 받고 대부분의 일이 끝난다는 것을 알면 더 놀랄 것이다). 내가 고은이는 그만한 재능이 있으니 믿고 맡겨보라고 하자 제작자는 이렇게 말했다.

“김작가님이 영화판을 모르셔서 그래요.”

맞다. 나는 영화판을 모른다. 어떻게 지금껏 잘 돌아가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머리로는 납득이 돼도 마음으로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전혀 인연이 없던 판은 아니어서 ‘전혀 모른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내가 서 있는 바닥 아래에 갤리선의 노잡이들이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다들 알다시피 영화계는 화려한만큼 그늘도 깊다. 영화계에서 일하는 작가들의 가장 큰 고통은 만족감의 부재다. 소설은 자기의 의지가 굳기만 하다면 끝은 낼 수 있다. 그것을 주변에 돌려 읽힐 수도 있고 잘 제본해서 책꽂이에 꽂아놓을 수도 있고 자비로 출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나리오는 그 자체로는 완성품이 아니다. 운이 좋은 몇 편의 시나리오만이 수많은 단계를 거쳐 비로소 영화가 된다. 많게는 수십 차례를, 몇 년 동안 고친 시나리오들이 영화화 무산과 함께 허공으로 날아간다. 게다가 그 바닥은 여성에게는 더욱 가혹하다. 남성 시나리오 작가는 감독을 겸업하는 대안도 생각해볼 수 있지만 여성 작가들은 그 대안을 섣불리 선택하지 못한다.  

고은이가 가고 한참이 지나서야 신문에 기사가 떴다. 난리가 났다. 온 세상이 말을 쏟아냈다. 나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참았다. 그렇게 가장 힘든 시간은 지나갔다. 부끄러웠다. 내가 고은이의 선생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사건은 우리 모두의 추문이다. 김현은 오래 전에 썼다. “문학은 억압과 억압에 의해 야기된 불행을 대상으로 삼아 그것을 드러내어 추문으로 만든다.”고. 고은이 사건은 문학이 그것을 드러내기도 전에 먼저 추문이 되었다. 지금 나는 그 추문을 ‘대상으로 삼'지 못하고, 그것을 앞질러 가지 못하고 여전히 그 추문과 함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다소 엉뚱한 사건 때문이다. 지난 1월 1일 신춘문예 발표일을 맞아 내가 블로그에 올린 글이 있었다. 그 글에 평론가 소조님이 반박의 글을 보내왔고 그에 따라 나도 또 글을 쓰고 이러면서 글타래가 이어졌다. 주제는 작가지망생들이 어떻게 스스로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예술가로 살아갈 것이냐에 대한 것이었다. 설이 지날 무렵, 소조님의 글이 올라왔지만 그때 나는 이미 고은이의 일로 깊은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공교로운 일이었다. 예술가 지망생이 이 엄혹한 예술계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지키고 재능을 꽃피울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던 와중에, 고은이가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나는 고은이가 쓴 글을 내가 진행하는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에서 낭독할까도 생각해보았다. 그녀가 무능해서, 글을 잘 못 써서 이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나는 과제 폴더를 열어 그녀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보았다. 다 훌륭한 것은 아니었지만 몇 편은 이름을 가리고 내놓는다면 기성작가가 썼다고 해도 믿을 글이었다. 그래, 팟캐스트의 제목은 <무명작가 최고은>이라고 하자. 그러나 나는 그 팟캐스트를 녹음하지 못했다. 그랬다. 못했다. 할 수가 없었다. 소리내어 읽을 수가 없었다. 마이크를 치웠다.

시간이 흘러갔다. 그리고 한겨레신문의 기사가 떴다. 그날도 어디에든 뭔가 한 마디 쓰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소조님이 트위터로 올린 글이 갑자기 화제가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트위터는 140자라는 한계가 있다. 이어 써도 읽는 사람은 잘 이어 읽지 않는다. 오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그 이후의 소조님의 대응에는 좀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떤 주제는 140자로도 오해없이 전달이 가능하다. 채근담 류의 공자님 말씀, 자기계발서 카피 같은 글들이 그렇다. 그런데 어떤 주제는 독자를 설득하는데 최소 2000자의 공간이 필요하다. 또 어떤 민감한 주제는 책 한 권이 필요하다. 예컨대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같은 책의 문제의식을 140자로 전달할 수는 없다. 과학의 역사가 점진적이 아닌 계단식으로, 어떤 충격적 기점들을 거치며 폭발적으로 변화해왔다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책 한 권이 필요하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기가 설득하려는 주제가 그 미디어에 맞는지를 세심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여성작가에 대한 그의 트윗이 문제가 되었을 때, 소조님은 “맥락을 살펴달라"고 거듭 강조했지만, 맥락을 잘 살펴야할 사람은 평범한 독자라기보다는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고 그 중에서도 비평가여야 마땅하다. 비평가야말로 타인이 써놓은 글, 예컨대 소설 같은 복잡한 글을 숨겨진 컨텍스트까지도 섬세하게 살피며 읽어야하는 직업이 아닌가.

독자에게는 숨겨진 맥락을 살필 것을 주문하면서 소조님 자신은 더 큰 맥락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날은 아침에 한겨레신문 기사를 필두로 온 포털에 글들이 깔리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큰 비통과 슬픔에 빠져 있었다. 모두들 이 추문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고 더 일찍 그 비운의 젊은 예술가를 위해 무언가를 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그녀가 감독한 단편영화와 인터뷰 영상들을 찾아보며 한 재능이 어떻게 사라져갔는가를 죄스럽게 훔쳐보았던 것이다. 나는 그날 소조님이 잃은 것은 신망이라기보다는 기대였다고 생각한다. 연예저널들의 자극적인 헤드라인에 낚여 들이닥친 이들은 차치하자. 그들이 전부는 아니다. 그들을 빼고도 그날 많은 이들은 소조님께 실망했던 것이고 그 실망은 이 아웃사이더 비평가가 혹시 공감의 능력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성질의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소조님은 거기에 더해 “내가 공격당한 배경에는 최고은씨의 죽음이 있는 같은데,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아이러니컬한 상황이다. 왜냐하면 따지고 보면 나만큼 문화계(문학계) 불공정함을 문제삼은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지만 이것 역시 독자들에게 ‘소조님의 인생'이라는 긴 맥락까지 살펴달라는 과한 주문일 뿐이다. 자신이 약자이거나 아웃사이더이기 때문에 그 어떤 말도 용납된다는 발상은 다소 위험하다. 다층적인 사회에서는 경우에 따라 누구든 상대적으로 약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식의 반응은 자기반성이나 내성을 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다. 평론가가 내성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논리가 무너진다. 이 부분에 대해서 잠시 후에 말하기로 하자.

어쨌거나 소조님이 문제의 트윗을 방어하면서 이 모든 일은 ‘김영하와의 논쟁'과 관련이 있다고 거듭 말하는 바람에 논쟁의 성격도 이상해져 버렸다. 그리고 생각지도 않던 독자들마저 이 논쟁의 귀추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 논쟁을 이어가자면 나는 고은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는데, 정말이지 그러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마침내 이렇게 책상 앞에 앉아있다. 그리고 내게 보낸 소조님의 글을 다시 읽어보고 고은이 사건이 있기 전에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적는다. 아무래도 지금 적고 지나가지 않으면 영영 못 쓸 것 같아서이다. 이제 소조님이 쓴 글을 보자.

이 글은 이상하다. 처음 볼 때부터 어리둥절했다. 다시 읽어도 그렇다. 소조님의 글은 크게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잘 나가다가 갑자기 마지막인 4장에 이르러 돌연 엉뚱한 곳으로 초월해버린다. 예를 들어 다음 문단을 보자.

“김영하님은 “세계를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신을 바꿔야한다"고 주장하는데, 자신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가장 힘든 일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나는 나의 노력에 의해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계가 바뀌는 만큼만 바뀔 뿐입니다. 사실 이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세계와 씨름을 해온 이유이기도 합니다.”

겹따옴표를 쳐놨기 때문에 저 문장은 마치 내가 직접 쓴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가 않다. 원래의 내 글은 “예술가 개인은 시장의 규모도, 진입장벽의 높이도, 정치 제도도 바꾸지 못한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당분간 오직 우리 자신뿐이다.” 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분간'이라는 부사이며 이 글이 작가지망생들, 즉,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는 예술가 지망생들에게는 보내는 글임을 감안할 때, ‘당분간'이라는 부사는 더욱 중요해진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세계를 일단 변화시키고 보라'는 식의 충고는 무책임하다고 나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가장 힘들다'는 그 다음 문장도 납득하기 어렵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140자로 설득할 수 있는 주제가 있고 한 권의 책이 필요한 주제가 있는데 저 문장이야말로 한 권의 책이 필요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한 사람이 담배를 끊는 것이 전 국민이 담배를 끊게 하는 것보다 쉽다. 나 한 사람이 책을 많이 읽는 것은 새해 결심만으로 충분할 수 있지만 전 국민이 책을 많이 읽게 만들려면 엄청난 예산과 캠페인, 교육제도의 개혁이 필요하다. 이런 상식을 설득력 있게 뒤집으려면, 토마스 쿤처럼 한 권의 책을 써야한다. 그런데 소조님은 갑자기 ‘왜냐하면'으로 앞 문장을 기정사실화하면서 ‘왜냐하면 나는 나의 노력에 의해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계가 바뀌는 만큼만 바뀔 뿐입니다'라고 써나간다. 그가 ‘인간은 환경과 교육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는 빈서판이라는 식의 환경결정론'을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믿는 게 아니라면 이 문장은 접수하기가 어렵다. 우선 나부터가 세계가 바뀌는 만큼만 바뀌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이 무슨 단순한 결정론이란 말인가.

그런데 소조님이 이렇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장의 연쇄로 결론격인 4장을 시작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그 이후에도 논리라기보다는 선언에 가까운 글들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문장들을 통해 소조님은 ‘나는 그냥 선언을 해버리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만 바꾸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결국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합니다.” 라는 문장이 또한 그렇다. 소조님의 문체는 잠언과도 같은 선언을 던진 후에, 바로 ‘왜냐하면'이나 ‘그렇다면'으로 그 앞 문장을 기정사실화한다. 아니나다를까, ‘그렇다면 이런 ‘제자리걸음'이야말로 문학(예술)의 가장 큰 적이 아닐까요?”라는 문장이 이어진다.  

나로서는 거의 모든 문장에 고개를 가로젓게 만드는 이 4장 부분을 읽고 있노라면 반론을 할 의지를 잃고 만다. 개인을 바꾸는 것이 세계를 바꾸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명제 하나만 가지고도 우리는 지난한 철학적 토론을 벌여야한다. “모든 예술가는 혁명가”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예술사 전반을 검토해야한다. 이런 글들로 이루어진 성급한 ‘선언문'을 가지고는 대화가 불가능하다.

내가 기대했던 것은 이런 글이 아니었다. 내 세번째 글을 읽어보면 작가인 내가 소위 ‘문학어'를 버리고 비평가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독자들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작가로서 익숙하고 안온한 ‘문학어'의 세계에서 걸어 나와 스티븐 래빗이나 라즐로 바라바시의 연구 결과를 인용하며 학자의 언어로 말한 것은 평론가인 소조님에게 나름의 예의를 차린 것이다. 그런데 소조님은  갑자기 시의 언어, 선언의 언어로 퇴각해버렸다. 나는 학자나 평론가가 엄정한 언어를 쓰지 않으면 신뢰를 못한다. 작가에게 기대하는 것이 놀라움이라면 평론가에게 기대하는 것은 독자를 차분히 설득하는 섬세한 논리적 설득력이다. 작가가 평론을 쓰든, 평론가가 소설을 쓰든 마찬가지다.

지난 글에서 나는 현실의 높고 잔인한 벽에 직면한 예술가 지망생들에게 그 벽에 가서 정면으로 부딪치지 말고 예술가를 하나의 대안적 정체성으로 생각하라고, 예술을 삶의 일부로 즐기면서 운을 기다리라고 말하고, 왜 그럴 수밖에 없는가를 학자의 언어로 논증과 팩트를 들어 말했다. 그러나 소조님이 보내온 이 게으른 글을 보니 뺨을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논증도 없고 제대로된 반박도 없는, 감정적 수사로 가득한 선동에 가까운 글이 소조님의 진심이라면 대화는 불가능하다. 선언을 하고 싶다면 나를 걸치지 않고 바로 하면 된다. 소조님이 늘 얘기하는 ‘새로운 (문학) 제도’를 창안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잘 만들면 작가들이 모일 것이다. 4.19 세대들이 그렇게 했듯이. 그러나 섣부른 선언 이전에 뜻을 함께 하는 작가와 비평가를 먼저 규합했다. 그것을 잊으면 곤란하다.  

문학은 개인적인 예술이다. 아직도 전 세계의 소설가들은 혼자 쓴다. 늙어죽을 때까지도 혼자  쓴다. 영화와 TV 드라마, 애니메이션까지 서사창작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협업이 이루어지지만 소설만은 예외다. 작가를 꿈꾸는 이들은 이것이 뭘 의미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봐야한다. 문단이라는 제도가 엄연히 존재하지만 그 제도는 보기보다 간단하지가 않다. 프로야구처럼 커미셔너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고전음악계처럼 대학에서 일정한 훈련을 거친 사람들만 모여있는 것도 아니다. 장정일처럼 중졸에 소년원 출신인 작가도 있는가하면 원래는 극작과에서 희곡을 쓰다가 어느 재단에서 하는 대학생 공모에 소설을 보내면서 작가가 된 김애란 같은 이도 있다. 진입하는 경로도 다양하고 인적 구성도 단일하지 않고 지도부도 없다. 몇 개의 출판사가 잘 나가는 작가들을 독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그 작가들이 거기 전속인 것도 아니다. 카르텔을 형성해 새로운 작가들의 진입을 막고 있지도 않다. 문창과 출신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다수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소조님의 지난 10년간의 문단 공격이 별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면 그것은 문단이 강고하게 단결해 소조라는 이를 왕따시킨 탓이라기보다는 아픈 지점을 정확하게 타격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소조님이 이번에 쓴 글과 같은 글을 계속 쓴다면 문단은 별로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곳은 언어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개인들의 느슨한 리좀적 연대로, 허술한 언어에는 잘 움직이지 않는다. 비약이 잘 허용되지 않는 비평가들의 세계는 더욱 그렇다. 문학사와 문학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던 4.19 세대 비평가들의 글을 보라. 그들의 기획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한 가지는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다. 백낙청, 김병익, 김현, 김우창 등의 글에는 섬세하고 치밀한 논리와 사유가 있다.  

그리고 소조님은 세계를 바꿈으로서 비로소 자기를 바꾸는 데 성공한 작가들에 대해 친절하게 예를 좀 들어주었으면 좋겠다. 적어도 소조님의 글 3장에 등장하는 플로베르는 그런 작가가 아닐 것이다. 혹시라도 내가 그에 대해 몰랐던 면이 있다면 알려주시기 바란다. 플로베르를 제외하고라도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소조님이 예로 든 그런 영웅적인 작가들의 면면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내가 아는 작가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자기 내면과 싸우다 “결과적으로 혹은 어쩌다보니” 세상을 바꾼 사람들 뿐이다. 그들이 바꾸었다는 세상도 현실의 세계라기보다는 문학적 지형이라는 일종의 가상세계였다. 그것이 쿤데라가 말하는 ‘개개의 작품은 세상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 시대의 작품들에 대응한다'는 테제일 것이다.

문학의 흥미로운 점은 그것을 둘러싼 바로 그런 무수한 아이러니들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도박빚을 갚기 위해 쓴 소설이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품이 되기도 하고, 단지 한 여자를 미혹하기 위해 쓴 연시가 대대로 애송되기도 한다. 도둑놈, 건달, 망명객, 마약중독자, 바람둥이, 정신병자, 살인자가 걸작을 쓰는가하면 가장 좋은 대학을 나온 최고의 인재가 범작만 쓰다 인생을 종치기도 한다. 톨스토이는 러시아를 개혁하겠다는 꿈을 품고 소설을 썼고 그 결과 <안나 카레니나>의 상당 부분은 작가의 정치적 견해와 계몽적 사상으로 점철돼 있지만, 오늘날 모든 독자와 비평가가 사랑하는 것은 톨스토이가 힘을 주었던 그 장광설이 아니라 “그 여자는 너무 지긋지긋하다"고 작가 자신마저 진절머리를 냈던 안나 카레니나의 혼란스런 행동과 심경을 묘사한 부분이다. 다시 말해, 문학은 의도와 결과가 모든 분야에서 어긋나는 장이다. 선의를 투입한다고 좋은 결과가 나오지도 않고 엄청난 노력을 쏟아붓는다고 대작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술에 취해 휘갈겼다고 다 쓰레기가 되는 것도 아니다. 작가가 겨냥한 지점과 전혀 다른 지점에서 절창이 나오기도 하며, 작가가 실패작이라고 버린 소설을 후대에서는 걸작이라고 칭송하기도 한다. 또한 한 세대가 입이 마르게 고평했던 소설이 작가가 죽자마자 쓰레기 취급을 받기도 한다. 이런 예는 무수히 많다.

그러므로 지금 작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이토록 이상한 일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원칙도 없이 일어나는 문학이라는 행성에 대해 겸허한 마음으로 알아나가야한다. 한국문학계만 그런 것도 아니다. 전 세계 문학계가 이렇게 느슨한 개인들이 종횡으로 얽히면서 서로 경쟁하고 존중하며 살아간다. 즉, 문학계라는 곳은 소조님이 몇 줄로 간단하게 ‘세계를 바꾸면 된다'고 말한다고 바뀌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나는 문학계에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있되, 매우 복잡한 방식으로 해결해가는 곳이라는 뜻이다.

미학에는 아직 해명하지 못한 질문들이 무수히 많다. 예를 들어, 도대체 어떤 작품이 궁극적으로 정전이 되는가, 라든가, 어떤 작가가 좋은 작가이고 어떤 작가가 나쁜 작가인가, 젊은 날에 좋은 작품을 쓰던 작가가 늙어서는 그렇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반대로 젊은 날에는 별볼일 없던 작가가 늙어서 갑자기 걸작을 쓰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들이 좋은 작품이라고 말하는 기준은 왜 자꾸 바뀌는가, 그런데도 몇 천 년 동안 정전으로 내려오는 <오딧세이> 같은 작품은 도대체 그 안에 어떤 요소가 있기에 그러한가, 그런 걸작들을 쓰려는 작가가 준비해야하는 것은 무엇인가, 연애와 알코올은 작품의 창작에 도움을 주는가 아니면 방해하는가, 인간들은 도대체 왜 그토록 먹고 살기 어려운 예술에 몸을 던지는가, 광기는 예술의 본질인가 아니면 한때의 유행인가, 남성/여성 호르몬의 분비와 창작의 양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작가의 도덕적 선의가 작품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가, 전세계에는 단 하나의 ‘문학'이 있는가 아니면 나라마다 다른 일종의 ‘리그'가 있는가. 이밖에도 무수한 미학적 질문들이 해명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작가가 되고자 하는 이는, 그리고 현재 작품을 써나가고 있는 현업 작가들은 이 모든 질문들과 결국은 맨몸으로 대결하게 된다. 그러니 간단하게 뭔가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화려한 말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예술가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모든 이들은 ‘나는 과연 작품을 써낼 수 있는가'부터 시작해 ‘어떤 작품이 과연 좋은 작품인가' 같은 질문에 다다를 것이고, 그 과정에서 간단없이 엄숙한 삶의 시련을 겪어야한다. 생계와 결혼, 육아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가 널려있다. 이 문제들을 간과한다면,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예술가도 인간이고 결국은 죽는다는 것. 그것은 예술가를 성숙하게도 하고 좌절하게도 하고 조급하게도 하고 모든 것을 문득 긍정하게도 만든다. 어떤 역할을 하든 죽음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그러므로 예술가들은 그 어떤 손쉬운 해결책에도 현혹되지 말고 냉철하게 현실을 살펴야한다. 때로는 자신을 격려하고 자기 내면의 어린이/괴물을 발견해 그것으로 예술활동의 자양분으로 삼으면서도 현실감각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육신은 연약하고 쉽게 병든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얘기 하나만 할까 한다. 나보다 어려운 작가들이 부지기수인데 아무래도 엄살 같아서 그동안 잘 하지 않았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등단을 하자마자 나는 결심을 하나 했다.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심을 지켰다. 아이를 양육할 돈으로 더 오래 작가 노릇을 하기 위해서였다. 나처럼은 아니겠지만 내 동료작가들 역시 어떤 식으로든 뭔가를 희생해 지금 여기에 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쨌든 문학이 나를 받아주는 한, 나는 그저 쓸 것이다. 그리하여 가늘고 길게 살아남을 것이다. 다행히 운이 좋아 지금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문학적 유행은 자주 바뀐다. 내 소설을 읽던 독자들은 언젠가 다른 작가의 책을 읽게 될 것이고 내 소설은 잊을 것이다. 아니, 아예 아무도 소설책이라는 것을 사지 않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나는 그때의 생존을 늘 고민한다. 살아있어야 쓸 수 있으니까. 소조님은 이런 발언을 작가들의 낭만주의적 허세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작가라는 존재를 잘 모르는 거다. 잘 모르는 대상은 공격할 수도 없고 하물며 바꿀 수는 더욱 없다.

할 말은 많지만 그만 써야겠다.몸과 마음이 힘들다. 다만 수많은 고은이들의 건투를 빈다. 영악하게 살아남아 예술이 허락한 기쁨과 고통을 누리시라. 세상이 곧 바뀐다는 풍문에 속지 마시라. 타인의 인정이라는 가혹하고 희귀한 복권에 제 운명을 맡기지 말고 자기 소명을 찾으시라. 그리고 부디 살아들 남으시라. 부디.


덧붙여 : 또다른 고은이가 나오지 않도록 제도의 개선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안다. 나도 한 마디 보태고 싶지만 오늘은 힘들어 여기서 그만 접는다. 그러나 한 마디만 할까 한다. 그 어떤 대책이 되든 첫 발걸음은 영화계 혹은 예술계가 어떤 곳인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다. 그제 내가 참석한 행사의 한 청중이 한때 영화계에 몸담았던 내 동료작가에게 물었다. “그렇게 성공하기 힘든 영화판에 그렇게 많은 지원자가 몰려드는 이유가 뭔가요?” 그도 나도, 적절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예컨대 우리는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부터 준비해야한다. 간단한 것은 하나도 없다.

두번째로 덧붙여: 이 글을 기사로 쓰지 말았으면 좋겠다. 당신이 누구든.

세번째로 덧붙여: 상상력이 풍부한 이들이 몇 있는 것 같다. 고작 소조와의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이 글을 썼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니 놀랍다. 독해력이 부족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가련하다. 어쩌다 그렇게들 망가졌을까. 그리고 내가 그를 이겨서 뭘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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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블로그에 올린 <작가는 언제 작가가 될까>라는 글에 대한 평론가 소조님이 반론을 올렸다.

소조님의 글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말한 에토스의 측면, 즉, '누가' 말하는가에 대한 것으로 시작한다. 주지하다시피 에토스는 연설/글의 설득력이 '누가' 말하는가에 따라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하는 측면을 일컫는 용어다. 신춘문예 당선자의 발표일을 맞아 작가를 지망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내 글은 소조님이 보기에 에토스의 측면에서 설득력이 떨어지는 글이었던 모양이다. 요컨대, 이미 성공한 작가의 원론적인 말씀은 공허하다는 것. 소조님과는 반대로 '김영하가 말했기 때문'에 그 글의 설득력을 더 높게 본 사람도 물론 있었을 것이다. 발화자가 신분을 숨기지 않는 이상, 이 에토스에 근거한 과소평가와 과대평가는 피할 수가 없으나, 이를 정면에서 거론하는 것은 잘못하면 우물에 독타기로 흘러갈 소지가 있다. '어린 놈이 뭘 알아' 와 '배부른 자의 오만'은 그런 측면에서 동일한 논리적 공격술일 것이다.

소조님과는 작가라는 '직업'에 대해 애초에 내가 트위터에 글을 올렸을 때부터 관점에 흥미로운 이견이 있었다. 직업을 '먹고 사는' 문제로 바라보는 소조님과 일종의 선언적/대안적 자기 정체성으로 생각하는 나와의 차이인데, 둘이 동의하는 것은 있다. 그것은 작가로는 밥을 먹고 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이다. 작가는 고래로 늘 누군가의 두번째 직업인 경우가 많았다. 작가가 글로만 밥을 먹고 사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드문 일종의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역시 등단 초기에는 한국어학당에서 하루에 네 시간씩, 일주일에 닷새를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그밖에도 나는 이런저런 직업들을 전전했다. 문창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고 번역을 하기도 했고 라디오를 진행하기도 했다. 비교적 성공적으로 데뷔한 작가였음에도 글에서 나오는 수입만으로는 살림을 꾸려가기가 쉽지 않았다. 연금을 받는 직업도 아니고 미래가 보장된 것도 아니었다. 내가 전업작가가 된 것은 불과 삼 년전의 일인데 영구적으로 그럴지는 아직 모를 일이다.

지금 작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분명히 명심해야할 것은, 글을 써서 먹고 살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로또를 기대하고 이 세계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 대신 작가를 일종의 대체 정체성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지난 여름 TEDxSeoul 강연에서 말했듯이("예술가가 되자, 지금 당장.") 예술을 자격 시험을 통과하여야만 시작할 수 있는 일로 여기지 말고 지금 당장 자기 즐거움을 위해 시작하라는 것이다. 대신 그런 길을 택한 이들은 소중한 휴일이나 휴가, 모두가 잠든 한밤의 시간들을 보상이 전혀 없을지도 모를 일에 바칠 각오를 해야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분명 창작의 즐거움이라는 큰 보상이 있다. 이런 기쁨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즉 문학을 밥벌이나 입신양명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 길에 들어서지 않는 것이 좋다. 성공의 확률이 너무, 너무 낮기 때문이다.

소조님은 '외부의 인정이 없이 자기만의 가치를 고수하는 것을 나르시시즘이라고 부른다.'고 비판하고 있으나, 예술가는 바로 그런 정신적 어린이들이 나르시시즘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는 힘들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나는 위대한 예술가'라는 과대망상, '모두가 나의 재능을 시기하고 있고 그것이 내가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라고 믿는 피해망상도 예술가라는 이 힘들고 답이 안 나오는 일을 지속하게 만든다. 그렇다. 예술가들은 일종의 환자다. 그들이 앓는 질병은 독초에서 추출한 약물처럼 '결과적으로' 이 세계를 풍요롭게 한다.

소조님이 작가지망생들에게 주는 충고는 매우 현실적이다. 새겨들을만 하다. 그러나 현실을 냉정하게 보는 것은 평론가나 사무원의 일이다. 그와 달리 예술가는 어마어마한 자기확신을 가지고 현실의 풍차를 향해 돌진할 필요가 있다. 소조님은 '재능'을 강조하고 있지만 내가 볼 때, 예술계에서 더 중요한 것은 운이다. 그 운이 올 때까지 자신을 지탱해줄 강력한 자기확신이 필요하다. 내게도 오직 과대망상만이 유일한 후원자였던 세월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이라고 그 과대망상이 필요없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나는 현실을 뛰어넘는 과대망상을 감당하기위해 책상 앞에 앉는다. 그리고 실패하고 또 실패한다. 그렇지만 계속 써나간다.

소조님은 작가지망생들에게 냉정한 자기 인식'과 '길드'를 권한다. 여기에서 나와 길이 갈라진다. 냉정한 자기 인식은 예술가가 아니라 증권시장의 투자자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다. 그의 말대로 새로운 '길드(제도)'를 조직하는 것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미래를 만드는 것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시스템을 만드는 자가 승자라는 것은 문학계의 4.19 세대들이 이미 보여준 바 있다. 현재의 등단 제도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나중에 더 자세히 쓸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등단제도가 견고하게 유지되는 것은 그것이 문학제도 전반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가 개인에게 당장 시급한 것은 자신의 가능성을 믿어줄 좋은 친구/후원자이고 그 첫번째 후원자는 언제나 예술가 내면에 숨어있는 과대망상의 어린 자아일 것이다.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얘기다. 새로 시작하는 예술가에게 세상물정에 밝은 현실적 어른은 필요없다. 자기 세계를 창조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대체로 어린이들이며 예술계의 혁신자들은 바로 이런 정신적 어린이들이었다. 그 어린이들은 '현실적인' 어른들이 하는 '현실적인' 조언을 얼마간은 귓등으로 흘려들을 필요가 있다. 비현실적 망상이 대단히 낮은 확률로 현실이 되는 세계, 그것이 예술이기 때문이다. "예술가여, 미쳐라" 혹은 "예술가는 아이가 되어야한다" 는 말이 낭만주의적 헛소리가 아니라 가장 현실적인 조언인 까닭이 거기 있다.

[face] 인기 소설가 김영하, 블로그·트위터 절필 선언… 그는 갑자기 왜…

"예술가의 밥은 누가 책임지나"
김영하 "스스로 책임져야" 주장에
평론가·작가 반발… 인터넷 절필 선언
"나는 최고은을 가르쳤다… 그녀는 굶어 죽은게 아니다"
글 올리며 감정적 대립 격화

소설가 김영하

한국문학의 중심 작가로 뉴욕에 체류 중인 소설가 김영하(43)씨가 14일 블로그·트위터 절필 선언을 했다.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모두에게 사과드립니다. 다들 안녕히 계십시오'라는 200자 원고지 15매 분량의 글을 통해서다. 그간 작가·평론가와 트위터·블로그로 논쟁을 벌여온 김씨는 "그동안 논쟁을 해 온 평론가 소조, 작가 김사과에게 사과하고 죽은 고은이에게 용서를 구한다"면서 "블로그를 닫고 트위터를 그만두겠다. 앞으로는 사랑하는 책상 앞으로 돌아가 글만 쓰겠다"고 했다. 그의 트위터 팔로어(구독자)는 약 3만명. 국내 최고 지명도를 가진 작가 중 하나가 인터넷에서 절필을 선언했다는 사실 자체로 이날 인터넷 공간에서 화제가 됐다.

일견 작가의 개인적 다짐에 불과한 것으로 보일 만한 이 '인터넷 절필' 선언이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까닭은 이 선언이 "예술가의 밥(생존)은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라는 예술가 생존권의 문제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아주 거칠게 표현하면, 김씨는 '예술가 밥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안타깝지만 사회가 그렇다'는 쪽이었고, 반대론자들은 '사회 구조를 먼저 개혁해야 한다'는 쪽이었다.

당초 신춘문예 등단제도를 둘러싸고 작가 지망생을 응원하기 위해 시작했던 글은 '작가의 정체성'에 관한 문학논쟁으로 이어졌고, 최근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씨가 '굶어 죽었다'고 알려지면서 "예술가의 생존을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의 현실적 논쟁으로 확대됐다. 이 와중에 김영하씨가 최씨의 선생(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최고은은 아사(餓死)한 게 아니다"라는 요지의 글을 올렸다. 여기에 최씨와 함께 한예종 수업을 들었던 김씨의 제자 김사과(27·소설가)씨가 13일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글에서 "예술의 순수성을 과잉해서 옹호하는 것도 왜곡"이라는 취지로 스승 김영하의 입장을 비판하면서 논쟁은 더 뜨거워졌다.

김영하씨의 입장은 예술가 개인이 냉철하게 스스로 살아가야 한다는 쪽이었고, 논쟁 상대편인 문학평론가 소조(38·본명 조영일)는 '예술은 인생보다 짧다'는 쪽이었다.

논쟁 상대편에게 '낭만적 예술지상주의자'로 낙인찍혔지만, 김영하의 현실인식은 냉정했다. 그는 문학·영화·음악계는 원래 소수가 부를 독점하는 영역이라고 진단했다. "소수가 부를 독점하는 곳에 진입 장벽까지 낮으면 지원자는 끊임없이 몰려든다"며 "당분간은 어려운 경제적, 사회적 처지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쪽이었다. 반면 소조는 이 입장에 대해 "예술은 운동"이라며 "가령 영화계 스스로 불공정한 관행을 고치기 전까지는 절대 한국영화를 보지 말자는 운동이라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건국대 신경정신학과 하지현 교수는 "우리 사회의 소통과 토론문화의 근본적 결핍이 또 한 번 드러난 일이라 안타깝다"고 분석했다.

카페인은 득일까 독일까
신경계 자극해 각성효과 탁월
많이 먹으면 부정맥 등 일으켜

커피 하루 3잔 이상 넘지 말고
임신부는 1잔이내로 제한해야

‘주중엔 멀쩡했는데 주말에 왜 더 피곤하지?’ 직장인이라면 한번쯤 이런 의문을 품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대다수는 주중에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 수면 부족 때문이라고 넘어간다. 한데 주초가 되면 또 다른 의문이 든다. ‘주말 내내 쉬었는데, 왜 피로가 안 풀리지?’

이에 모두 해당할 경우 당신의 하루 카페인 섭취량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주중에 커피나 녹차, 홍차 등을 습관처럼 마셨는데, 주말에 마시지 않았다면 각성 효과가 반감된 것이 원인일 가능성이 있다. 니코틴(담배)이나 알코올(술)과 더불어 대표적인 기호식품인 카페인. 중독성이 있음에도 담배나 술만큼 유해하지 않다는 이유로 많은 이들이 카페인을 즐긴다. 직장인들의 경우 하루 서너 잔은 보통이고, 임신부조차 하루 커피 한두 잔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과연 카페인은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 카페인 함유 음식

■ 카페인의 정체는? 카페인은 해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식물이 분비하는 일종의 해충제다. 커피나무, 카카오, 차, 콜라나무, 마테나무, 구아버나무 등 60여가지 식물에서 추출하는데 카페인 자체는 쓴맛을 지닌 백색의 가루다. 카페인이 현대인의 일상 속에 깊이 파고들 수 있었던 건 중추신경계 자극물질로 단기적 각성 효과 덕분이다. 불면증, 이뇨작용, 체중감량을 촉진하며, 진통효과를 증강시킬 뿐 아니라 스트레스 호르몬인 부신피질 호르몬을 분비시켜 순환기계 운동을 촉진하고 기관지 확장, 혈관수축, 담낭수축, 위장관의 운동성을 증가시킨다고 알려져 있다.

■ 유해한가? 무해한가? 예부터 잠을 쫓을 때, 혈압이 낮을 때, 신체의 기능을 향상시킬 때, 진통제의 보조제로 카페인이 널리 쓰였다. 바쁜 일상에서 피로와 스트레스, 과한 업무, 수면부족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이 카페인 유혹에 쉽게 빠져드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카페인 자체가 피로를 회복시키는 건 아니다. 각성 효과로 피로를 적게 느끼게 하는 것뿐이다. 카페인의 기운을 빌려 일이나 학습을 했을 경우 없는 에너지를 더 짜내 사용한 것이므로 이후 더 지치게 된다. 집중력은 카페인 섭취로 증가하므로 기억력과 학습효과는 단기적으로 높아질 수 있다. 카페인은 필요 이상으로 과하게 섭취하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 유해한 성분이 아니다. 최근에는 파킨슨병, 당뇨병, 간암 예방 효과가 확인되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 얼마나 섭취해야 하나 전문가들은 하루 200~300㎎(커피 2~3잔) 정도를 적정 카페인 섭취량으로 꼽는다. 과하게 섭취하면 자극과민 불안, 수면 장애, 두통, 얼굴 상기, 구역이나 설사 등의 위장관 자극 증상, 가슴 두근거림, 부정맥 등을 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한다. 하루 10g 이상(커피 100~120잔) 섭취 시에는 간질발작, 호흡곤란, 심지어 사망까지 이를 수 있다. 박현아 서울백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커피로 인해 위궤양, 십이지장궤양, 위암이 생기지 않으며, 협심증이나 풍과 같은 심혈관계 질환에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며 “프림을 넣어 마시면 콜레스테롤이 증가할 수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하지만, 장운동을 촉진시키는 작용도 한다”고 말했다.

임신 가능성이 있거나 임신부라면 카페인 섭취를 하루 200㎎(커피 1잔) 이내에서 제한하는 것이 좋다. 카페인은 기형을 유발하는 물질의 작용을 강화하고 불임, 자연유산, 저체중아 출산 등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권길영 을지의료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커피를 절제하는 것이 어렵다면 이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 것보다 하루 한 잔을 마시며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 것이 엄마와 아이한테 더 좋다”고 말했다.

 
■ 섭취량 이렇게 조절하라 평소 과하게 카페인을 섭취하고 있다면, 하루 섭취하는 음식물 속 카페인의 양을 확인하면 도움이 된다. 알게 모르게 음식물에는 카페인이 다량 숨어있는데, 불필요한 카페인 섭취를 줄일 수 있다. 카페인은 두통약(30㎎), 종합감기약(10~15㎎), 자양강장제(30㎎) 같은 약은 물론 커피맛이 식품에 두루 포함돼 있다. 카페인 섭취량을 줄일 때는 조금씩 줄어야 금단증상을 예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하루 카페인 음료의 섭취를 한 잔씩 줄이거나, 커피 마니아라면 디카페인 커피나 음료를 선택해서 마시는 방법이다. 내리는 커피는 가능한 짧은 시간에 내려마시고, 티백을 마실 때는 물에 담가 두는 시간을 짧게 한다. 약을 선택할 때는 성분표를 보고 카페인이 없는 제품을 선택한다. 졸리거나, 몸이 피곤하고 나른하게 느껴질 때 피로회복제나 커피 대신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바람을 쐬거나 운동을 하는 습관을 갖는 것도 잊지 말자.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도움말: 박현아 서울백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권길영 을지의료원 가정의학과 교수, 심경원 이화의료원 가정의학과 교수

IT 전도사는 왜 인터넷을 배반했나

 IT업계 선도자 니콜라스 카 "온라인은 단편적 정보만 모아 인간의 창조적 사고를 방해"
첨단 뇌과학까지 논거로 들며 인터넷의 유해성 낱낱이 고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니콜라스 카 지음|최지향 옮김|청림출판|364쪽|1만5000원

"그는 자기가 늘 미행당한다고 생각해 집으로 갈 때면 늘 내게 먼저 가라고 하고 뒤처졌다. 그러고는 매번 전화가 왔다. 길을 잃었으니 데리러 와달라는 것이었다." 위키리크스의 2인자였던 다니엘 돔샤이트-베르크는 최근 책에서 '사이버 전사' 줄리언 어산지의 이런 일화를 소개했다. 세계 전산망을 종횡무진하는 '천재 해커'가 정작 육로에서는 지독한 '길치'였다. 올 초 유럽의 한 자동차보험회사 통계에도 비슷한 내용이 잡혔다. 젊은 세대가 나이 든 세대보다 길을 더 잘 잃는다. 이유는 GPS(위성항법장치)에 의존하다 보니 방향감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도구를 만들지만 그다음 도구들은 우리를 만든다"는 말로 문명 이기(利器)의 패러독스를 요약한 이는 1967년 예수회 사제인 존 컬킨이었다.

IT업계 구루인 니콜라스 카(Carr·51)의 최신작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원제 The Shallows)'은 이 오랜 딜레마를 인터넷 시대 버전으로 되살렸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부제에 담겨 있다. '인터넷이 우리 뇌를 얕게 만들고 있다.' 그저 인터넷의 폐해에 대한 경고 정도라면 새삼스러울 게 없다. 컴퓨터에 빠진 아이를 걱정하는 엄마도 그 정도는 안다. 저자는 이런 현대인의 병증을 다양한 고전의 통찰과 현대 최첨단 뇌과학까지 동원해 심층진단하고 문명 비판론의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린다.

청림출판 제공
출발점은 미디어 이론의 선구자 마샬 맥루한의 통찰이다. "모든 새로운 미디어는 인간을 변화시킨다."

저자는 현대사회의 뉴미디어이자 '모든 것'이 되어버린 인터넷이 인간의 가장 고유한 능력까지 앗아갈 지경에 이르렀다고 진단한다. 그것은 오래 집중하고 깊이 사색하는 능력이다. 인터넷은 하이퍼링크로 연결된 텍스트와 이미지, 동영상을 끝없이 메뚜기처럼 옮겨다니게 한다. 이런 산만하기 짝이 없는 인터넷 환경은 뇌의 신경회로까지 바꿔놓는다. 여기서 동원되는 키워드는 '스키마(schema·계획이나 이론의 윤곽)'. 흩어진 정보 조각을 지식의 패턴으로 조직해 사고에 깊이와 풍부함을 제공하는 사고 틀을 말한다. 인간의 지적(知的) 기량은 대부분 오래 걸려 획득된 스키마에서 나온다. 이런 스키마 형성을 위한 뇌 능력을 컴퓨터가 감퇴시킨다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카는 지난 5세기 독서를 통해 길러진 인류의 선형적·문학적 사고를 중시한다. "예리하고 유연한 이 사고방식은 르네상스를 낳은 상상력이었고, 계몽주의를 낳은 이성적 사고였으며, 산업혁명을 이끈 창조적 사고였다. 모더니즘을 낳은 전복적 사고이기도 했다." 반면 인터넷 웹서핑은 숱한 소스로부터 단편적 정보를 신속 산만하게 수집하는 습관을 낳았을 뿐, 창조적 사색을 방해한다. 그 결과 "예전에 나는 말의 심해저를 헤엄치는 스쿠버다이버였다면 지금은 수면 위를 스쳐 질주하는 제트스키어로 전락했다"고 저자는 탄식한다.

인터넷 폐해론은 구글 비판론에서 절정에 이른다. 저자는 "구글의 온라인 세상에는 깊이 있는 읽기를 위한 사색에 잠긴 침묵이나 명상의 애매모호한 우회성이 들어설 여지는 거의 없다. 모호함은 통찰력을 위한 출발점이 아니라 고쳐져야 할 버그"라고 꼬집는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예언적 영화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의 마지막 장면의 비유는 압권이다. 인공지능 컴퓨터인 '할(Hal)'이 반란 끝에 결국 회로가 끊기면서 생명이 꺼져가는 순간 이렇게 읊조린다. "느낄 수 있어요. 느낄 수 있어요. 두려워요." 저자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컴퓨터에 의존하게 되면서 인공지능으로 변해버리는 것은 바로 우리의 지능"이라고 탄식한다.

저자는 독서야말로 최고의 지적 활동이란 점을 입증해 보이려는 듯 논거를 다양한 역사적 사례와 최신 과학의 성과에서 길어온다. 소크라테스부터 마르틴 하이데거에 이르는 철학자의 통찰을 인용할 때는 책이 지성사 같다. 고대 문자부터 지도, 인쇄술, 시계의 발명이 인류에 끼친 영향을 말할 땐 생활문명사다. 프리드리히 니체나 T S 엘리엇이 타자기를 쓰면서 겪은 문체 변화의 체험 같은 일화를 소개할 때는 글쓰기의 역사에 접근한다.

지난해 영미권에서 먼저 출간됐을 때 '우리 시대 가장 중요한 주제를 진지하고 섬세하게 다뤘다'는 평이 주조를 이뤘다. 다만 인용된 뇌과학 연구 결과에 대해서는 반론이 있었다. 이 문제에 정통한 작가인 조나 레러는 뉴욕타임스 서평에서 웹서핑이나 컴퓨터 게임이 인간의 지력을 증진하기도 한다는 사례를 소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 역시 카가 인터넷의 유용성을 부인하는 반(反)기계론자(Luddite)는 아니며 균형잡힌 접근을 했다고 평했다.

이 책은 여러 면에서 역설적이다. 원제는 '얕음'이지만 내용물은 더없이 묵직하다. 더 한 대목은 이것이다. 저자는 책을 쓰기 위해 휴대폰, 트위터, 페이스북, 이메일이 안 되는 콜로라도 산밑으로 이사 간다. 몇 달간 금단 현상에 시달린 끝에 '사람다운 모습'을 되찾고 책을 마쳤다. 하지만 책을 끝낼 무렵 그는 다시 인터넷 생활로 돌아갔다. "이 기기들 없이는 살 수 없을 것만 같다"는 게 그의 고백이다.

니콜라스 카는 누구?

그가 주목받는 것은 일찍이 IT 분야에서 인정받아온 세계적 컨설턴트이면서 스스로 IT 물신주의에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코노미스트가 뽑은 글로벌 CEO 132인 중 한명이자 2007년 ‘e위크’가 선정한 ‘IT업계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들었다. 그는 늘 업계의 최전선에서 논의를 선도해왔다. 2003년 IT업계가 호황에 들떠 있을 때 ‘그 전략적 중요성이 떨어졌다’는 글을 발표해, 업계 CEO들과 논쟁이 붙었다. 2008년 ‘구글은 우리를 바보로 만들고 있나?’라는 제목의 글이 발표됐을 때도 화제였다. 위키피디아를 비판하면서 ‘위키크라트’(위키피디아 관료)란 신조어를 유행시켰다. 명쾌하면서도 심도 있는 글과 빼어난 언변으로 유력지를 장식하고 초청연사로도 인기 높다. 다트머스대와 하버드대 대학원을 나와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편집장을 지냈다. 현재 세계경제포럼 클라우드 컴퓨팅 프로젝트 운영위원이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자문 편집위원이다.

“남자 왜 만나?”…103세 ‘모태솔로’ 할머니

[서울신문 나우뉴스]

“장수비결은 남자를 만나지 않은 것”

결혼은 커녕 남자와 단 한번도 연애를 한 적 없는 103세 ‘모태솔로 할머니’가 장수의 비결로 평생 남자를 만나지 않은 것이라고 밝혀 눈길을 모으고 있다.

최근 영국의 한 요양센터에서 103번째 생일을 맞은 영국인 글레디스 고프 할머니는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장수비결을 묻지만 남다른 점은 2개 밖에 없다.”면서 “평생 남자를 만나지 않은 것과 무슨 일이 있어도 식사를 거르지 않는 점”이라고 말했다.

고프 할머니는 1997년 여동생 에드너가 사망하기 전까지 함께 살았다. 역시 평생 솔로였던 여동생과 고프 할머니는 보통 자매보다 더욱 끈끈한 관계였다. 여동생 생전에 두 사람은 홍콩, 스위스 등 전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여행을 다닌 것으로 전해졌다.

고프 할머니는 “결혼이나 연애에 옭아매어 있지 않으니, 남자 때문에 골머리를 썩는 일이 한 번도 없었다.”면서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인데 나는 평생 혼자 지냈기 때문에 불필요한 고민을 해본 적이 없다.”고 설명했다.

대신 할머니는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식도락을 즐긴 점을 장수비결로 꼽았다. 할머니는 “어디를 가든 맛있고 몸에 좋은 음식을 먹었다.”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식사를 꼭꼭 챙겨먹었기 때문에 이 나이까지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할머니의 간병인 샤론 롤슨은 “글라디스 할머니는 남자친구는 한번도 사귀어 본 적 없지만 유머 감각이 뛰어나고 정말 매력적인 여성”이라면서 “할머니가 앞으로도 건강하게 장수하길 바란다.”고 소망을 말하기도 했다.

사진=데일리메일

작가와 사랑에 빠진 스타들

최지우, 유지태 주연의 <스타의 연인>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시청률은 높지 않았지만, 오수연 작가의 따뜻한 감성이 묻어나는 작품이었다. 톱스타 여배우와 가난한 소설가 지망생의 사랑을 다룬 이야기로,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는 편인데도 이 드라마는 꼬박꼬박 챙겨 보았던 기억이 있다. 과연 이런 사랑이 현실에서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에 더욱 빠져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사람 사는 세상에서 그 어떤 일이라고 없을 쏘냐! 작가를 사랑한 배우, 배우를 사랑한 작가들을 모아보았다.


빅토르 마리 위고와 쥘리에트 드루에의 사랑




이백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빅토르 마리 위고가 있다. 인간의 본성을 탐구한 진지한 작품을 썼던 그는 왠지 바른 생활 사나이일 것만 같은데 이성관계는 다소 의외의 면이 있다. 배우 레오니 당트와의 밀애로 간통혐의로 경찰에 체포되기도 하고, 불륜 상대 여인의 하녀와 애정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위고의 바람기는 평생 계속되었고 부인 아델 푸쉐는 맞바람으로 응수한다. 불륜으로 얼룩진 결혼생활이었지만 그들은 이혼하지 않고 가정을 유지한다. 1833년 위고는 평생의 반려자를 만나게 되는데, 배우 쥘리에트 드루에가 그 주인공이다. 재능이 없는 자신을 위해 희곡을 쓰고 무대에 설 수 있게 도와준 위고에게 고마움을 느낀 그녀는 배우 생활을 접고 죽는 날까지 위고를 위해 헌신한다. 위고는 레오니 당트와의 간통 사건 후 <레 미제라블>의 집필에 몰두하는데, 이를 정서한 이가 바로 쥘리에트이다. 위고의 거듭되는 애정행각에도, 일련의 정치적 사건으로 망명하는 와중에도, 가족 모두가 위고의 곁을 떠나 쓸쓸한 말년을 보낼 때에도 그녀는 그의 곁을 지켰고 1883년 사망한다. 2년 뒤 위고는 폐렴으로 사망한다. 불륜을 미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참 뚝심 있는 사랑을 했던 것 같다.


아서 밀러와 마릴린 먼로의 사랑




오십 년 전으로 시계바늘을 돌려보면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작가였던 아서 밀러와 뭇 남성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섹스 심벌이었던 마릴린 먼로가 있다. 날카로운 이미지의 밀러와 백치미의 먼로, 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커플은 의외로 제법 잘 어울렸다. 이들은 1951년에 영화감독 엘리아 카잔의 소개로 처음 만났고 서신을 교환하는 정도였다. 먼로는 야구 선수인 조 디마지오와 결혼하고, 9개월 만에 이혼한다. 이후 둘은 뉴욕에서 재회하고 사랑에 빠진다. 유부남이었던 밀러는 곧 이혼하고 먼로와의 결혼을 발표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다. 밀러 옆에 환하게 웃고 있는 먼로의 모습은 사랑에 빠진 행복한 여인의 모습 그 자체이다. 그러나 신은 이 여인에게 소소한 행복 따위는 선물하지 않았다. 먼로가 결혼 생활의 환상이 깨진 것은 밀러의 일기장 때문이었다. 그는 거기에 먼로를 사랑이 아닌 동정의 대상으로 적어놓았고,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의 사이는 소원해지고 만다. 이후 두 번의 유산 끝에 둘은 이혼에 합의한다. 이는 먼로의 생애에 가장 긴 결혼 생활이었다. 1950년대 할리우드에 몰아닥친 매카시 열풍으로 아서 밀러가 FBI로부터 감시와 협박, 추궁을 받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랬기에 아서 밀러와의 결혼은 마릴린 먼로의 용기 있는 선택으로 회자된다.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사랑




미국에 밀러와 먼로가 있다면 프랑스에는 로맹 가리진 세버그가 있다. 로맹 가리가 로스앤젤레스 프랑스 영사관에서 근무할 당시 진 세버그를 만나 사랑에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은 각자의 배우자와 이혼한 뒤 스물 네 살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1962년 결혼한다. 작가와 배우의 결합이 의례 그런 것이라고 말하는 듯 이들의 결혼 생활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미국보다 유럽을 무대로 활동하면서 진보적 성향의 인물들과 접촉이 많았던 진 세버그는 흑인 인권 운동 단체인 ‘블랙 팬더’를 후원했고 이로 인해 FBI의 요주의 인물이 된다. 매일 집안에 흑인 인사들이 드나드는 것으로 부부는 다투었고 그녀의 이런 열정적인 활동은 로맹 가리와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생후 이틀 만에 죽은 둘째 니나를 낳았을 때는 흑인의 아이라는 루머에 시달려야 했다. 얼마 후 그들은 이혼했고, 진 세버그는 1979년 실종된 지 열흘 만에 파리 근교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사인은 약물 과다복용이었다. 로맹 가리는 흑인의 아이를 낳았다는 루머를 퍼뜨린 FBI를 고소하고 자신은 1980년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자신의 자살이 진 세버그 때문은 아니라고 했지만 ‘아니라고’ 하니 더욱 그런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김한길과 최명길의 사랑




그렇다면 한국이라고 그런 커플이 없을 쏘냐! 소설가이자 전 국회의원인 김한길과 배우 최명길이 그 주인공이다. ‘길’자가 들어간 이름에서부터 같은 해에 데뷔한 이력까지 묘하게도 닮아있다. 1981년에 김한길은 <바람과 박제>로 등단했고, 최명길은 <성난 눈동자>라는 드라마로 데뷔했다. 베스트셀러 작가와 최고 여배우의 결혼은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지적인 여성의 대명사였던 최명길은 소설가를 남편으로 맞이해 그 이미지가 더욱 공고해졌다. 그들의 첫 만남은 라디오 방송이었다. 김한길은 최명길이 진행하던 라디오 영화음악 프로그램의 초대 손님으로 나왔고, 그 후 영화 <장미빛 인생>으로 프랑스 낭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최명길이 김한길이 진행하던 토크쇼 <김한길과 사람들>에 출연해 화답했다. 그들 사이에는 이미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세간의 이목을 피해 전화로 밀어를 주고받던 그들이 우여곡절 끝에 만나 김한길이 최명길에게 건넨 첫 마디는 ‘뽀뽀나 한 번 합시다.’였다고 한다. 김한길이 첫 결혼에 실패한 후 자신의 에세이에서 (값비싼) 성공을 위해 값싼 행복을 무시했던 결과가 이혼이었다고 썼다. 그 실패의 경험이 현재의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는 동력인 듯. 이 커플, 영원히 행복하기를 바란다.


나카야마 미호와 츠지 히토나리의 사랑




한때 전 국민의 유행어였던 ‘오겡끼데스까’의 주인공 나카야마 미호. 일본 영화 <러브 레터>의 한 장면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다름 아닌 츠지 히토나리로 <냉정과 열정사이>, <사랑 후에 오는 것들> 등의 작가이다. 그는 자신의 소설을 프랑스판 출판을 위해 찾은 프랑스에서 처음 나카야마 미호를 보았는데, 직접 만난 것은 아니고 그저 혼자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던 것이라고 한다. 짧은 몇 초의 만남에서 그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찌릿함을 느꼈고 이후 11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인 구애 끝에 결혼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때의 경험으로 <언젠가 안녕>이라는 소설을 썼는데, 이는 한국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고 그의 아내가 주연을 맡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츠지 히토나리는 한 번의 이혼 경력이 있는데 전 부인 역시 미나미 카호라는 배우였다.


레베카 밀러와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사랑




이번엔 작가(남)-배우(여)라는 도식을 깨는 커플을 소개한다. 레베카 밀러(시나리오 작가 겸 감독)와 다니엘 데이 루이스(배우)이다. 나이가 조금 있는 사람이라면 레베카 밀러를 배우로도 기억할 것이다. 그녀는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마라> 등 영화에 출연했다. 그러나 그녀는 90년대 중반 연기를 그만두고 시나리오 작가 겸 감독으로 전향한다. 영화 <Proof>, <피파 리의 특별한 로맨스>, <The ballad of Jack and Rose>의 각본을 쓰거나 감독을 겸했다. 둘의 만남은 영화 1997년 작인 <크루서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이 작품의 원작자인 아서 밀러를 만나기 위해 그의 집을 찾았고 이때 레베카 밀러와 조우한다. 그렇다. 레베카 밀러는 마릴린 먼로의 세 번째 남편이었던 아서 밀러가 세 번째 부인인 디트로이트 모라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었다. 아버지 아서 밀러의 세기의 러브 스토리에 비하면 레베카 밀러의 인지도가 살짝 떨어지지만, 작가-배우 커플의 계보를 이은 셈이다. 임신한 이자벨 아자니를 버리고 줄리아 로버츠 등의 여러 여배우와 염문을 뿌리며 독신을 고집하던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거짓말처럼 레베카 밀러에게 정착하고 은퇴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그를 한 곳에 뿌리내리게 한 레베카의 매력은 무엇일까? 그건 예술가 집안에서 자란 두 사람의 정신적 교감이 가장 큰 이유는 아니었을까.

(글/사진 인터파크도서 북& 4기 신금숙)

[만물상] 캘텍(Caltech) 농구팀

 미(美)대륙 동쪽에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이, 서쪽에는 캘리포니아공과대학(CIT)이 있다. 세계 대학평가에서 늘 10등 안에 드는 명문들이다. 1861년 보스턴 찰스강가에 MIT가 세워진 30년 뒤, 에이머스 트루프(Throop)라는 시카고 사업가가 로스앤젤레스 북동쪽 작은 마을 패서디나에 '트루프 공예학교'를 열었다. 한 해 10명 남짓 엔지니어를 졸업시키던 직업학교가 서부 최고 대학으로 도약하는 데 2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1907년 윌슨산천문대 건설로 유명한 천문학자 조지 헤일이 막대한 기금을 모아 경영진에 합류했다. 1917년엔 MIT의 세속적 운영에 반발한 화학자 아서 노이즈도 옮겨왔다. 이들은 MIT를 본떠 학교 이름을 CIT(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 약칭 캘텍으로 바꿨다. 캘텍은 종합대학을 지향하는 MIT와 달리 자연과학 외길을 추구하는 전략을 택했다.

▶개교 후 2만5000명의 졸업생을 내는 동안 캘텍은 노벨상 31명, 국민과학훈장 수상자 65명을 배출했다. 화학상과 평화상을 함께 받은 라이너스 폴링, 아인슈타인의 인기에 버금갔던 로버트 파인만, 양전자(陽電子)를 발견한 칼 앤더슨이 캘텍에서 연구하고 가르쳤다. 숫자만 보면 노벨상 73명, 퓰리처상 4명의 MIT에 밀리는 것 같지만 학교 규모가 5배나 차이 나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캘텍은 캠퍼스 끝에서 끝까지 15분이면 걸어가는 '작은 대학'이다. 학생 수도 학부 950명, 대학원 1100명 정도다. 신입생은 매년 250명쯤만 뽑는다. 성적과 재능·자질 말고 다른 어떤 요소도 안 본다. 하버드·예일 같은 곳에 다 있는 동문자녀우대(Legacy)도 없다. 이렇게 바늘귀를 뚫고 들어온 학생들이 일주일에 50시간, 많게는 100시간씩 '목숨 걸고' 공부한다.

▶운동부가 10여개 있기는 해도 체육특기생은 당연히 없다. 이 학교 농구부가 엊그제 대학농구 3부리그에서 26년 동안 이어오던 310연패(連敗)를 끊고 첫 승을 올렸다. 12명 선수 중에 고교 농구팀이나마 뛰어본 선수가 절반밖에 안 됐다고 한다. 미국 매스컴과 학교 홈페이지에서 난리가 났지만 정작 선수들은 축하파티 대신 밤샘 공부로 돌아갔다. 날로 상업화하는 학교스포츠의 현실 속에서 오랜만에 들려온 상큼한 소식이다.

 

- 인왕산 鶴학巢소島도에서 최범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