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봄 학소도의 첫 꽃 <영춘화>

텃밭 고르기 - 봄 농사의 시작

1차 채소 모종

채소밭에서 씨앗을 쪼아먹던 산비둘기

고려장 풍습이 있던 고구려 때 박정승은
노모를 지게에 지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가 눈물로 절을 올리자 노모는
'네가 길을 잃을까봐 나뭇 가지를 꺾어
표시를 해두었다' 고 말합니다.



박정승은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을 생각하는
노모를 차마 버리지 못하고 몰래 국법을 어기고
노모를 모셔와 봉양을 합니다.



그 무렵 당나라 사신이 똑같이 생긴
말 두 마리를 끌고 와

어느 쪽이 어미이고 어느 쪽이 새끼인지를 알아 내라는 문제를 냅니다.
못 맞히면 조공을 올려 받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로 고민하는 박정승에게
노모가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말을 굶긴 다음 여물을 주렴,
먼저 먹는 놈이 새끼란다."



이러한 노모의 현명함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
왕을 감동시켜 이후 고려장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그리스의 격언에
'집안에 노인이 없거든 빌리라' 는 말이 있습니다.
삶의 경륜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잘 보여 주는 말입니다.

가정과 마찬가지로 국가나
사회에도 지혜로운 노인이 필요합니다.



물론 노인이 되면 기억력도 떨어지고,
남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고,
자신의 경험에 집착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 대신 나이는 기억력을 빼앗은 자리에
통찰력을 놓고 갑니다.

노인의 지혜와 경험을 활용하는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국가는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집 안에 노인이 없거든 빌려라 (그리스 격언)



[만물상] 일본인의 시민의식

정우상 논설위원 imagine@chosun.com

우리 말도 떼지 못한 딸 아이가 일본에 살며 세 살 때 배운 말은 차례, 순서를 뜻하는 '준반(順番)'이었다. 이 말을 가르쳐준 건 보육원 교사가 아니라 또래 아이들이었다. 놀이터에서 미끄럼을 타려던 아이들은 다투지 않고 "준반, 준반"을 외치며 줄을 서 차례를 기다렸다. 먼저 미끄럼을 타려던 딸도 어느새 '준반'을 외치며 줄을 섰다. ▶일본 엄마들은 "남에게 폐(迷惑·메이와쿠) 끼치지 말라"는 말로 가정교육을 시작한다. 지하철에선 "다리를 꼬거나 뻗으면 남에게 폐가 됩니다"라는 안내 방송이 하루 종일 나온다. '국화와 칼'의 저자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인들은 남이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에 민감하다"고 했다. 남을 배려하고 자신은 절제하는 '수신(修身)문화'다. 일본 47개 도도부현(都道府縣)에는 '메이와쿠 방지 조례'라 하여 '남에게 현격히 폐를 끼치는 행위'는 법으로도 금하고 있다.

▶2009년 11월 부산 사격장 화재로 10명의 일본인 관광객이 숨졌을 때도 부산에 온 가족들은 통곡 대신 침통하게 무릎을 꿇은 채 흐느낄 뿐이었다. 자신의 슬픔을 드러내는 것조차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일본의 장례식은 조용하고 차분하다.

▶3·11 대지진에서 일본인이 보여준 배려와 시민의식에 세계가 감탄하고 있다. 외신들은 일본인의 인내와 질서를 '인류정신의 진화'라며 극찬했다. 다리를 다친 환자는 구조대가 도착하자 미안해하며 "나보다 더 급한 환자가 없느냐"고 물었다. 생필품이 부족해도 약탈이 없고, 수퍼마켓 앞에는 수백 m의 줄이 이어졌지만 새치기가 없다. 도쿄전력은 14일부터 지역별로 나눠 강제 정전을 하기로 했지만, 이날 오후까진 그대로 전기를 공급했다. 지하철 회사는 운행을 제한했고, 시민들이 가정과 직장에서 절전(節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네티즌들은 "파친코와 유흥업소 사장님들. 조금만 참자"는 메시지를 올렸다.

▶"남편과 연락이 안 된다"며 애끊는 구조 요청을 할 때, 피난소 여인은 절규 대신 고개만 숙였다. 도로가 망가져 차가 다니지 않는 센다이 도로에선 시민들이 지금도 파란 불을 기다렸다가 길을 건너고 있다. 공영방송 NHK는 흥분하지 않고 뉴스와 피난 정보만 신속히 전했다. 일본인들은 지금 속에서 터져나오는 피눈물을 억누르며, 놀라운 의지로 시련을 견뎌내고 있다.

 

[최보식이 만난 사람] NHK 출신 후지모토 도시카즈 경희대 초빙교수

최보식 선임기자 congchi@chosun.com

"순응은 몸에 전해온 DNA… 일본인이 갑자기 진화한 것 아니다"

일본인들은 종종 "슬프지만, 할 수 없어"라는 말을 잘 쓴다
자주 겪었기 때문에…일본 대참사를 다룬 숱한 기사 중에서 국내 한 언론사 특파원이 쓴 르포는 특히 인상적이었다. 이런 내용이다.

'아키타현의 한 호텔은 정전(停電)으로 암흑처럼 변했다. 호텔로비에 사람들은 줄을 서 기다리고 있었다. 호텔 측이 "정전으로 저녁을 제공할 수 없다"며 긴급용으로 우동 10그릇을 가져왔다. 모두 굶주린 사람들이었다. 앞줄에서 먼저 우동그릇을 받은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우동을 뒤로 돌렸다. 다른 사람들의 허기를 걱정하는 양보의 릴레이가 이어진 것이다.'

극한 상황에서 눈앞에 밥그릇이 있다. 일부 수행자들은 그 욕망을 참고 밥그릇을 뒤로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수행의 목적이 그런 것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 대다수는 수행자가 아니다. 밥그릇에 얼굴을 파묻고 일단 자신의 굶주림부터 해결할 것이다. 배가 부른 뒤에야 잠깐 정신차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껏 나는 인간을 이렇게 이해해왔다. 일본인들만 예외적인가.

후지모토 도시카즈(藤本敏和·62)씨를 만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NHK에서 아나운서와 프로듀서를 했다. 고베대지진(1995년) 때는 현장에서 보도를 한 적이 있었다. 현재 경희대 초빙교수로 와있다.

―그 상황에서 당신 앞으로 우동그릇이 온다면 어떻게 하겠나?

“가장 필요한 사람인 노약자나 어린이에게 줬을 것이다. 이는 한국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아마 우리는 자기 입부터 생각할 것이다.

“쓰나미가 덮칠 때 한 여인이 양로원 앞을 그냥 지나쳤다. 그 안에는 할머니들이 있었다. 할머니들을 돕다가 자신도 죽게 된다. 여인은 나중에 이 사실을 고백했다. 그러면서 할머니들이 모두 죽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내 목숨이 달린 아주 위급한 상황이라면 나도 도와줬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동그릇이라면 서로 양보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그 상황에서 내 앞에 온 우동을 먹으면 어떻게 되나?

“일단 일본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일본에는 ‘세켄(世間)’이란 말이 있다. 사회의 시선이라고 할까, 늘 이를 의식하며 살고 있다. 자신의 욕망과 행동을 제약한다. 한국식으로는 눈치를 본다고 할까. 항상 주변의 공기를 읽는다. 슬픈 일이 닥쳐도 너무 과도하게 울지 않는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이다.”

―왜 남의 시선을 그렇게 의식하는가? 가끔은 자신의 본능에 충실해야 하지 않는가?

“본능적으로 하면 창피하지 않은가. 인간이 본능으로만 살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저마다 그렇게 살겠다면 서로 갈등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 ‘화(和)’다.”

후지모토 도시카즈씨는“일본인들은 남들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교육을 받아왔다”고 말했다./정경열 기자 krchung@chosun.com

―나는 인간의 욕망이 크게 다르다고 보진 않는다. 그럼에도 일본인이 다르다면 이는 후천적 교육의 힘인가?

“한국은 대륙에 붙어 있어 갈 데가 있다. 일본은 도망칠 수 없는 섬나라다. 그 안에서 사이좋게 지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같은 섬나라인 영국은 다르지 않은가?

“영국은 일찍 바깥으로 나갔지만, 우리는 섬 안에서 농사를 짓는 공동체를 유지해왔다. 그런 부모들로부터 이어내려온 ‘DNA’가 있는 것이다. 나는 규슈 출신으로 도쿄에서 유학했다. 나를 떠나보낼 때마다, 어머니는 ‘하고 싶은 것은 다 해도 되지만 남에게 절대 메이와쿠(迷惑·폐)를 끼쳐선 안 된다’고 당부했다. 폐를 끼치는 것은 나쁜 일이다.”

―살다 보면 남에게 신세를 질 수도 있다. 이는 자연스럽지 않은가?

“우리에게는 그것이 몸에 배여 있다. 가령 교실에서 선생님이 질문한다. 우리는 알고 있어도 손을 안 든다. 남들도 다 아는 것을 내가 손들면 잘난 척하는 것처럼 되기 때문이다. 이는 분위기를 깨는 것이다. 고2 때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친구가 들어왔다. 선생님이 ‘아는 사람?’ 하자, 이 친구가 손을 들었다. 그래서 왕따가 됐다. 우리 질서를 이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대체 당신들과 함께 생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1980년 연세대 어학당에서 미국 학생들과 한국어를 배웠다. 선생님이 ‘모르는 것 있으면 물어보라’고 했다. 일본 학생들은 질문을 안 한다. 모르는 것이 있어도 안 묻는다. 자기는 몰라도 남들은 알고 있을 수 있다. 그걸 질문하면 남들에게 폐가 된다. 우리는 집에 가서 자기 혼자 알아본다. 그런데 미국 학생들은 자기가 모르는 걸 다 물었다. 그때마다 우리는 ‘그건 너만 모르는 것이니 너 혼자 공부해라’며 속으로 화가 났다. 이들에게서 나쁜 인상을 받았다.”

―이번 재난 지역에서는 생수 한 통을 사려고 수퍼마켓에 줄이 길게 이어졌다. 주유소에 약간의 기름을 넣는데 1~2시간씩 기다렸다. 참을 수 없을 것 같은데 ‘폭발’하지 않는다.

“그렇게 성미가 급한가. 줄서서 기다리지 않아도 되면 서둘 것이다. 다른 도리가 없지 않은가. 일본에는 거지가 동냥할 때도 ‘한 푼 줍쇼’ 하고 너무 안달하면 끝내 못 받는다는 속담이 있다. 그런 모습은 보기에도 안 좋을 수 있다.”

―만약 새치기를 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가?

“새치기하는 사람이 없겠지만, 만약 있다면 지탄받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때리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질서를 파괴하는 사람에 대해 벌을 줬다. 옛날 마을에서는 ‘무라하치부(村八分)’라는 말이 있었다. 공동체 규칙을 어기는 사람이 있다면 단지 불이 났을 때와 장례식 때만 도와줬다. 다른 여덟 가지에서는 왕따시켰다. 새치기하는 사람도 질서를 파괴하는 사람이니까 집단 왕따를 당할 것이다.”

―영국의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는 재난 속 일본인의 이런 모습에 ‘인류 정신의 진화’라고 경탄했다. 이런 평가를 어떻게 받아들이나?

“바깥에서는 감동을 느낀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 눈에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일본인들은 으레 그렇게 할 것으로 나는 생각했다.”

―인류 정신의 진화는 맞을까?

“약탈과 방화, 무질서가 일어난 것과 비교하면 진화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2차 세계대전과 일본군위안부 등 많은 나쁜 짓을 해왔지 않는가. 아주 훌륭한 민족이라는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런 우리가 갑자기 ‘진화’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번 모습은 과거부터 쭉 계속 내려온 것이다. 일본 사람만큼 자연재해를 많이 받은 민족도 없다. 그 앞에서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걸 안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우리 DNA 속에는 어찌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순응과 체념이 있는 것이다.”

―쓰나미가 덮쳐 실종된 남편이 시신으로 발견됐다. 무너진 폐허 속에서 찾아낸 것이다. 그 현장에서 부인은 구조대원들에게 ‘남편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내게는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었다.

“일본인들은 종종 ‘슬프지만, 뭐 할 수 없잖아’라는 말을 잘 쓴다. 자주 그렇게 겪어왔기 때문인지 모른다.”

생필품을 사기 위해 늘어선 줄
―일본인들은 죽는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정리가 돼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죽고 난 뒤의 세계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죽음은 두렵다. 하지만 인간은 다 죽어야 하니까. 빨리 죽으나 늦게 죽으나 같다고 받아들인다. 슬프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 같은 나라에서 구호물품이 전달 안 돼 이재민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떠는 것은 순응의 차원은 아닌 것 같다.

“쓰나미가 예상 밖에 커서 도로가 끊겨 교통수단이 없었을 것이다.”

―도로가 끊겼으면 헬기로 공수(空輸)하면 되지 않는가?

“그건 생각해본 적이 없다. 위에서 뿌리는 것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고베 대지진 때도 헬리콥터로 왜 소화활동을 안 했느냐고 나중에 비판을 많이 받았다. 매뉴얼에 없었다고 했다.”

―일본은 정해놓은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매뉴얼 사회’라서, 이번에도 그것만 고수하다 신속히 대응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다.

“매뉴얼로써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그럴 경우 결단을 내리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지금 일본에서는 그런 리더가 없다. 2차대전 전범 재판 때 사형선고를 받았던 도고 시게노리 외상이 ‘왜 전쟁에 반대하지 않았느냐’는 신문에, ‘개인적으로는 반대였지만 그때 추세가 그랬다’고 답했다. 이른바 추세가 메뉴얼이다. 이는 집단이 만들어놓은 것인데 무조건 그걸 따른다는 것이다.”

―한국 같았으면 온 국민들이 벌써 우르르 몰려가 재난 구호를 했을 것이다.

“일본은 자원봉사에 아직 익숙하지 못하다. 원전(原電)과 여진 문제로 정신이 없는 면도 있지만, 자발적으로 현장에 가면 그쪽에 ‘폐’를 끼치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다. 하지만 정부에서 ‘지시’가 있으면 다 갈 것이다.”

―당신은 고베 대지진 때 현장에서 리포트를 한 적이 있다고 들었다. 이번 NHK 재난방송은 인상적이었다.

“일본에서는 생방송 진행자가 지진을 느껴도 ‘스튜디오도 많이 흔들리고 있다’는 식으로 하지 않는다. ‘흔들림은 도쿄에서도 감지됐습니다. 자세한 정보는 기상청 발표가 있는 대로 전해드리겠습니다’고 한다. ‘아주’ ‘굉장히’ ‘세게’ 같은 감정이 들어가는 표현은 안 쓴다. 그건 듣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판단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지진 강도의 객관적 수치만 말할 뿐이다.”

―그러면 실감이 덜 하고 시청률이 떨어지지 않을까, 한국의 공중파는 이를 걱정한다.

“한국 방송을 보고 있으면 무엇이 일어날지 불안하다. 오열하는 유족에게도 마이크를 들이댄다. 그 순간에는 인터뷰할 단계가 아니다. 안 들어도 그 대답은 예상되는 것이다. NHK 보도는 한국인 눈으로 보면 촌스러울지 모른다. 하지만 뉴스 보도는 재미있게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40년 전 NHK에 들어갔을 때 말하는 스타일이 지금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사실을 정확하고 차분하게 전달해온 것이 방송의 신뢰를 높여왔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한국인에게서 ‘이해가 안 되는’ 점은 어떤 것인가?

“어떤 여론조사에서 한국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로 ‘세다’가 나온 적 있다. 한국 드라마를 보면 젊은 여자가 감정이 격해 탁자 위를 확 휩쓸어버린다. 고함을 지르고 울부짖는다. 그런 장면을 보면 우리는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의아해진다. 전철에서 한국인들은 크게 떠들고 통화도 한다. 일본의 전철 안에서는 통화하는 사람이 없다. 한국인은 거절할 때도 상대를 별로 배려하지 않는다. ‘안 된다’ ‘못 하겠다’고 잘라버린다. 살살 거절해줬으면 좋겠는데.”

―일본인에 대해서는 ‘혼네’(속마음)와 ‘다테마에’(겉표현)가 다르다고 지적한다. 소위 이중적 인간이라는 뜻이다.

“이는 공동체 유지를 위해 ‘립서비스’가 필요하다는 뜻도 된다. 직접 거절하면 인간관계가 어려워진다. 우리는 늘 ‘어렵네요, 노력해보겠습니다’고 말한다. 본인으로서는 관계를 좋게 하려고 하는 것뿐이다. 실제로는 못 해줘도 말만으로도 서비스를 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안 해주는 것보다 낫지 않나. 그게 일본 사람들의 생각이다.”

―남의 기분을 너무 의식해야 하는 사회에 살면 ‘스트레스’가 많지 않겠나?

“일본인을 ‘텐션(tension·긴장) 민족’이라고 한다. 한국인은 화병을 내세우지만, 일본인의 국민병은 ‘견비통’이다. 아직 젊거나 여성 중에도 어깨가 결린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만물상] NHK 재난 보도

김태익 논설위원 tikim@chosun.com

일본 공영방송 NHK 기자들이 지진과 태풍 같은 재난을 당한 사람을 취재할 때 맨 먼저 하는 말이 있다. "어려운 일 당해 고통이 많으시겠습니다" 또는 "힘 내십시오"다. 기자들은 재난 피해자 사진을 찍을 땐 허락을 받고 찍는다. 도시락은 취재원 눈에 띄지 않게 차 안에서 먹는다. 공중전화는 재난 피해자가 먼저 써야 하므로 휴대전화를 쓴다. 'NHK 재난 취재·보도 매뉴얼'에 세심하게 마련된 현장취재 규정들이다.

▶매뉴얼은 재난을 보도하는 요령도 자세히 정해 뒀다. 앵커나 기자는 무심코라도 '크다(大)' '심하다(激)' '매섭다(烈)'는 표현이 들어간 말을 써선 안 된다. 시청자들을 흥분시키고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지진은 '상당한 진동' '강한 지진' 정도의 표현까지만 할 수 있다. '○○할 것 같다'는 불확실한 표현, '전멸(全滅)' 같은 과장된 표현도 쓰면 안 된다.

▶NHK는 국민이 내는 시청료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인 만큼 재난이 일어났을 때 신속·정확하게 보도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내세운다. 재난 보도의 목표는 재난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효율적이고 모범적인 재난 보도 요령을 몸에 익히기 위해 매일 밤 NHK 뉴스센터에선 가상 재난 보도 훈련이 벌어진다. NHK 도쿄 본사의 재난 보도 책임자들은 비상시 달려올 수 있도록 회사로부터 반경 5㎞ 안에 살아야 한다.

▶일본 사상 최악의 3·11 대지진에서도 NHK의 재난 보도는 빛났다. NHK 앵커와 기자들은 수만 명이 죽거나 실종되고 50만 이재민을 낸 참극을 전하면서도 여느 때처럼 목소리가 조용조용했다. NHK 화면에는 시뻘건 불길이나 가족을 잃고 울부짖는 사람의 모습이 비치지 않았다. 대신 수도·전기·가스·교통·병원 정보와 주민 대피에 필요한 정보는 몇 번씩 반복해 내보냈다.

▶일본의 재난에 더 흥분한 것은 한국의 방송들이었다. 공영·민영 할 것 없이 '통곡' '궤멸' '아비규환' '아수라장' '초토화' '유령도시' '쑥대밭' '암흑천지' 같은 말들이 넘쳐났다. 도로는 '완전히' 제 기능을 잃었고, 해일은 '엄청난' 파괴력을 보였으며, 도시는 '통째로' 사라졌다고 했다. 일본 국민이 대재앙에 침착하고 차분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며 외신이 "인류 정신의 진보를 봤다"고 한 데엔 일본이 좋은 공영방송을 지닌 덕도 클 것이다.

일본 최악의 강진, 바다 생물은 알고 있었다?!

[중앙일보]
멕시코 남부에 있는 휴양지 아카풀코 인근의 리조트다. 지난 11일에는 보이지 않았던 원해어종 물고기 떼가 몰려 들었다. 일본 대지진의 영향으로 이곳 해안까지 떠밀려 온 것으로 보인다.
바다 생물들은 대지진을 미리 감지할 수 있을까. 일본에서 최악의 강진이 발생하자 네티즌은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 “바다 생물들은 지진을 미리 알고 대피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글들을 올렸다. 일본 도호쿠지방 미야기현 센다이시 동쪽 130km 해저에서 규모 8.8의 강진이 발생하기 5일 전, 혼슈지방 이바라키현에서 고래 50마리가 죽은 채 해안에 밀려왔었다.

당시 언론들은 “강진의 전조가 아니겠느냐”는 의심을 품었지만 지진 전문가들은 “대지진의 징조라고 볼 수 있는 과학적 근거는 전혀 없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네티즌은 “바다 속에서 해저 지반이 찢어질 조짐을 보이는데 고래가 미리 아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또 “북미판이나 태평양판이 움직일 것을 알고 이상징후를 포착해 다른 곳으로 피하다 ‘사고’를 당했다”고도 했다.

9일엔 미국 캘리포니아 남부 해안에서 100만 마리의 정어리가 떼죽음을 당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악취가 진동하는 레돈도 비치를 보면 종말의 날이 다가왔다는 소리를 실감나게 한다”고 전하면서 “그러나 현지 관리들은 캘리포니아 사상 최대의 정어리 떼죽음 사태가 강풍에 의한 자연재해라고 결론내린 것 같다”고 보도했다. 이 사건의 경우 정어리가 한꺼번에 일정 장소에 몰리는 바람에 산소가 부족해 떼죽음을 당했다는 전문가 분석이 있다. 네티즌은 “왜 갑자기 이상 행동을 했겠나. 다 근거가 있다”고 말했다.

일본 대지진이 발생하기 전인 9일 미국 캘리포니아 레돈도 비치 일대에 먼 바다에 서식하는 정어리 떼 수백만마리가 몰려와 폐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 당국이 조사에 나섰으나 원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 7일엔 뉴질랜드 남부도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큰 지진이 발생했었다. 이로부터 20일 전 뉴질랜드 남쪽 스튜어트 섬 해안가에 고래 107마리가 배를 드러낸 채 발견됐다. 구조대가 도착했을 당시 대부분은 이미 죽은 상태였다. 당시 현지 과학자들은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고래 떼의 우두머리 무리가 길을 잘못 인도한 것 같다”고 말했었다. 이를 두고도 “고래는 지진을 알고 대피하고 있었다”는 네티즌 댓글이 올라왔다.

한편 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후 멕시코 남부에 있는 휴양지 아카풀코 인근의 리조트에는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원해어종 물고기 떼가 몰려들었다. 전문가들은 “지진을 미리 감지해 이곳으로 피신왔거나 아니면 떠밀려온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지은 기자

[곪은 성역, 교수사회] <4ㆍ끝> 한국 교수사회 어떻게 바꿀 것인가
'부교수 되면 정년보장 떼놓은 당상'… 철밥통 깨기가 1순위 과제
재임용 기준 느슨… 논문도 年1, 2편이면 충족
사실상 퇴출 무풍지대… 강의 평가 등 신경 안써
"학생 돕는 서비스맨 자처 영미교수 정신 본받아야"

남상욱기자 thot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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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사립대 A교수는 소위 인기 교수다. 강의에는 항상 학생들이 넘쳐난다. 그의 강의에는 매 학기 수강신청 전쟁이 반복된다. 수업 내용이 어렵지 않을뿐더러 학점도 후해서다. 하지만 그의 어떤 강의든 내용은 몇년째 똑같았고 시험 문제도 매 학기 별반 다를 게 없다.

자주 휴강을 한다. 수강생들은 "뭘 배우는지 모르겠다"면서도 "일단 수업 부담이 없다"고 이구동성이다. A교수는 지금 정부 요직에 있다. 일부 동료 교수와 학생들은 "그렇게 원하더니 결국 꿈을 이뤘다"고 했다. 한 대학원생은 "A교수가 정부 일을 잘할만한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솔직히 의문"이라며 쓴소리를 했다.

학문을 갈고 닦아 그 깊이를 더하고 인재를 키워 세상에 이바지하는 게 교수의 본업이다. 하지만 한국의 교수사회는 거꾸로 가고 있다. 학문연구는 어느 틈엔가 뒷전이 됐고,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학문외적인 일에 더 열성인 경우가 적지 않다. 교수가 인재를 키우기는커녕 자신의 수족으로 전락시키는 풍토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교수 신분의 철밥통 구조에 그 원인이 있다는 지적이 많다.

한번 교수는 영원한 교수

대학마다 기준이 조금씩 다르지만 정년을 보장받는 교수직을 얻기 위해 걸리는 시간은 통상 임용 후 3년에서 7년 정도. 조교수로 임용된 뒤 이 기간 내 재임용 심사를 통과해 부교수가 되면 사실상 정년을 보장받는다. K대 문과대 L교수는 "재임용 심사에서 탈락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특별히 밉보이지 않는다면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되는 구조"라고 했다.

재임용 심사 기준도 엄격하지 않다. 연구실적 75%, 기타실적 25% 식의 기준이 있지만 그대로 적용되는 경우는 드물다. 또 이러저러한 정상 참작 요소에다 특정 논문을 연구실적으로 인정할지 여부도 심사교수의 재량에 많이 좌우된다. Y대의 한 조교수는 "보통 조교수들의 연구실적이 부족할 경우 학과 선임 교수의 뒤치다꺼리나 행정 일을 얼마나 열심히 했느냐가 심사에서 참작되는 경우가 많다"고 귀띔했다. 지난 2008년 카이스트가 25명의 재임용 신청 교수 중 6명을 탈락시킨 것이 한국 교수사회에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정년 보장을 받은 이후부터는 사실상 '무풍지대'다. 일부 대학에서 연구 실적이 부족할 경우 지도 학생 수를 제한(고려대 등)한다든가, 성과급 차별을 통해 제재(서울대 등)를 가할 뿐이다. 서울대 이과계열 S교수는 "승진할 때나 교수평가를 신경쓰지, 정년 보장받고 나면 아예 신경을 안 쓴다"고 털어놨다.

그렇다면 선진국의 대학들은 어떨까. 영국 세인트앤드류스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있는 유학생 이모(34)씨는 "이곳에서는 임용 후 15년 정도가 돼야 정년을 보장받는다. 이 기간 안에는 언제든 '잘릴 수 있다'는 긴장감이 있다"고 했다. 논문 평가는 물론, 강의 평가가 수시로 이뤄지고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즉각 조사위원회가 열려 제재가 가해진다는 것이다. 실제 지난 학기 학생과의 상담 기준(최소 10회)을 채우지 못한 이씨의 지도교수는 "왜 6번밖에 학생과 상담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학교 본부의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미 하버드대는 정년 보장 심사 대상자와 전공분야가 비슷한 세계 20위권 대학의 교수 3~5명의 연구업적과 발전 가능성을 비교해 정년 보장 여부를 결정한다. 교수가 자기 학문분야에 매진하지 않을 수 없는 구조다.

교수 평가는 사실상 무용

우리는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에 정년 보장이 이뤄지지만 연구실적과 강의평가 위주로 행해지는 교수 평가를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니다. 연구실적은 사실상 최소한의 평가대상이고 강의를 포함한 교육활동 평가는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 많다. K대 정경대학의 한 대학원생은 "연구실적은 1년에 1~2편의 논문 발표 수준"이라며 "이것도 안 하면 솔직히 학자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꼬집었다.

학생들이 하는 강의평가는 사실상 눈 가리고 아웅 식이다. 제자가 지도교수의 수업에 '동원'되는 일이 비일비재한 대학원 수업에서는 냉정한 평가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박사과정의 한 대학원생은 "모 교수가 강의하는 수업의 수강생 8명 중 반 이상이 직속 제자들"이라며 "안 좋은 평가가 내려지면 지도교수가 이들을 소집해 캐묻기도 한다"고 털어놨다.

반면 미국 하버드대 대학원생인 K씨는 "문화 차이일 수 있지만, 이곳에서는 가끔 교수가 학생의 눈치를 보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라고 말했다. 교수와의 상담 횟수, 수업 중 프레젠테이션 사용 횟수, 만족도 등 꼼꼼한 평가가 진행되며 학교가 제시한 기준에 미달될 경우 교수는 즉각 소명서를 작성해야 한다는 게 K씨의 설명이다.

영국 유학생 이씨는 "학생들의 강의평가가 3년 연속 기준 이하로 떨어지고 연구실적까지 부족하면 교수로서의 생명은 끝"이라며 "교수들이 학생들의 질문이나 요구에 즉각 반응하는 등 학생 중심의 교육이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이씨의 지도교수는 평소 이씨에게 "나는 당신이 논문을 잘 쓰도록 봐주는 서비스맨"이라고 자주 말했다고 한다. 인재 양성의 책임을 진 한국의 교수사회가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W이론' 이면우 교수의 '한국 교육·한국 사회 뒤집기'

"우리 사회에 지진 일으킬 '活단층' 있다면 그건 기득권층"
"교수는 논문 건수만, 학생은 학점만, 총장은 글로벌 랭킹만 쳐다봐…
지금 대학은 이기적 기득권층만 양산…
사법연수원생들 떼쓰는 것 한번 봐라 싹수가 노랗지 않은가"
1990년대 초 대한민국은 거대한 정신혁명을 경험한다. 기폭제는 1991년 서울공대 백서 폭로, 이어 92년 백서 작성의 주역 이면우 교수가 '신바람'을 주창한 'W이론을 만들자'를 펴내 50만부 이상이 팔렸고 93년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은 신경영을 주창하는 프랑크푸르트선언을 발표했다. 그리고 95년 3월 조선일보와 이어령 교수는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고 선언했다. 그 정신혁명의 선도자 이면우(李冕雨·65)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가 지난주 41년을 지켜온 서울대 강단에서 내려왔다. 이어령이 '인문학의 앨빈 토플러'라면 그는 '이공계의 토플러'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거침없는 화법과 달변 그리고 시대에 대한 진단과 문제의식은 조금도 녹슬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날카로웠고 고민도 깊었다. "그동안 외형은 나아진 듯한데 스피릿(spirit·魂)은 죽었어. 한국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서울대도 마찬가지야." 서울대 엔지니어하우스에서 만난 이 교수는 아직 인터뷰 시작도 안 했는데 커피잔을 들자마자 걱정부터 쏟아냈다.

이면우 교수는 250여종의 특허도 갖고 있고 직접 벤처회사도 여러 개 설립해 경영하고 있다. 본인이 주장하는 하이터치 기술을 적용한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다.“ 돈 벌려는 건아니고 세상에 존재하지않았던 제품을 만들어 세 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시장을 만들어내는 것을 학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다. 올해부터는 돈도 될 것 같다.”/ 이명원기자 mwlee@chosun.com
"인재(人災)는 분란을, 천재(天災)는 단합을 가져온다."

―일본의 비극에서 이야기를 시작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재(人災)는 분란을 가져오고 천재(天災)는 단합을 가져온다. 이번 일본 비극에는 이 두 가지가 다 있다. 천재는 지진과 쓰나미이고 인재는 원자로 연쇄 폭발이다. 지진과 쓰나미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숙적(宿敵) 감정마저 녹여내고 있다. 반면 원자로 폭발은 일본 내부에서도 이미 논란이 되고 있고 결국 전 세계적으로 원자력 발전의 안전 논란으로까지 확대될 것이다."

―공학도로서 이번 일본의 사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하다.

"우리는 일본이 이같은 공포와 충격을 어떻게 극복해가는지 유심히 지켜보고 배워야 할 것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솔직히 그런 일이 지금 우리에게 일어났다면 우리가 어떤 수준의 모습을 보이게 될지는 다 아는 것 아닌가? 그것을 생각하면 좀 두렵기까지 하다.

그런데 나는 지진의 원인으로 지목된 활(活)단층의 작용을 보면서 우리 사회 내부를 생각했다. 땅속뿐만 아니라 인간사회에서도 단층이 있고 그 중에서도 사회의 근본을 뒤흔들 수 있는 활단층, 즉 단층화를 주도해 급기야 지진을 일으키는 단층이 있다고 본다. 이 사회 기득권층이다. 사법연수원생들 떼쓰는 것 봐라. 싹수가 노랗다."

―그게 무슨 소린가?

"1997년 IMF 금융위기는 엉뚱하게도 이공계의 위기를 초래했다. 그때 가장 먼저, 가장 많이 잘린 사람들이 바로 엔지니어들이다. 그때부터 엔지니어 출신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이공계 공부해봤자 밥 굶는다며 아이들을 고소득 전문직으로 몰아세웠다. 서울 공대 학생 중 100명 이상이 해마다 사법고시에 응시하게 된 것도 그때부터다. 고소득 전문직의 관심 범위는 자기 자신과 가족을 넘어서지 않는다. 단층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다음에 안전한 대기업에 일부 들어가고 나머지는 동네에서 구멍가게 하다가 대형마트 들어선다는 소식 들리면 주먹 쥐고 데모에 앞장선다. 우리 사회에 3개의 단층이 형성된 것이다."

―그러면 서울 공대 교수는 기득권층 아닌가?

"부정하지 않겠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기득권층의 범위는 훨씬 크다. 지금 우리 교육제도가 이기적인 기득권층을 양산해내고 있다. 고등학생 부모들, 교육제도가 어쩌니 하며 불만인 듯하지만 결코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아이들이 볼모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기 아이 대학 들어가고 나면 입 싹 씻어버린다. 그러면 그 과제는 고스란히 중학생과 그 학부모들에게 옮겨간다.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교육당국도 이제 학생과 학부모 다루는 데 도가 텄다. 해마다 입시제도 바꾼다 해도 누구 하나 제대로 대들 수가 없다. 그때마다 '고기 냄새나는 걸레'(새 입시제도) 하나 던져주면 서로 뜯어먹으려고 난리피우다가 결국 당국의 손에 놀아난다. 그런 과정을 통해 공대에 할당된 '얼(spirit) 빠진 학생' 4년 학점 관리해서 내보내면 나 같은 공대 교수의 '임무'는 끝이다."

―사회 위기, 교육 위기, 이공계 위기를 말하는 건가?

"그렇다. 총장은 글로벌 랭킹 높이기에, 교수는 논문 발표 '건수'에, 학생은 학점과 '스펙' 관리에 정신이 없다. 정작 대학에 교육이 없고 배우고 가르치려는 혼이 빠져 있다. 위기가 오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이대로 가면 우리는 조만간 공동체 붕괴를 목격하게 될 것이다. 자연의 쓰나미는 공동체 의식이라도 강화시키지만, 사회의 단층화로 인한 인공 '쓰나미'는 공동체를 갈기갈기 찢어놓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나서질 않는다. 사회과학 공부한 교수들 뭐하나?"

"대학생 때 공부 빼곤 다 해봐서 공부하러 대학원 갔다."

―너무 무겁다. 가벼운 이야기 좀 하자. 튄다. 원래 그랬나?

"행동? 아니면 복장? 좋아, 행동부터 말하지. 어려서부터 운동 좋아했고 화가가 되고 싶어 미대 가려 했다. 그런데 중학교 때 미술부 선배란 놈들이 하도 패서 그만뒀다. 빙상반과 스키반으로 옮겨다녔다. 경기고등학교 다녔는데 반에서 중간쯤 했다. 그래도 반에서 50명까지는 서울대 이름 붙은 과에는 가던 시절이라 당시 잘나가던 섬유공학과 무난히 합격했다. 대학 시절이 좀 엉망이었지. 이 부장은 충무로 '신상사파'라고 들어봤나? 당대 최대의 조폭. 걔들하고 어울려 좀 놀았고 흥신소 아르바이트도 해봤고. 그때 세상이 배신과 배반으로 돌아간다는 걸 봤지. 학점이야 당연히 C, D, FFF…. 그것 때문에 대학원 갈 때나 교수 임용될 때 고생 좀 했지."

―멋쟁이다. 지금 넥타이도 만만치 않은데.

"일부러 멋을 부리는 건 절대 아니고. 내가 색감이 좀 있거든. 그래서 내가 맘에 드는 옷이나 넥타이는 남 눈치 안보지. 하긴 대학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장발 고집하고 그때 벌써 (오른쪽 팔을 내밀며) 이거(팔찌) 하고 다닌 데다가 구두는 이태리제를 신었으니 튀긴 했지. 교수 임용 당시 '선비' 교수님들이 '저 망둥이 하나가 서울대 교수의 권위를 무너뜨린다'고 걱정들이 많았지. 지금 생각하면 그분들한테 조금 미안하긴 한데. 뭐 어쩌겠어, 그렇게 생겨먹은걸."

―교수를 목표로 대학원에 간 것 아닌가?

"솔직히 말하면 그냥 간 거다. 그동안 안한 공부란 게 뭔지 좀 알아보려고. 그러나 교수를 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지. 사실 교수를 목표로 공부하는 게 말이 되냐, 좋아서 해야지. 그때 꿈은 섬유 오퍼상이었다. 어느날 오퍼상 하는 선배 사무실에 놀러 갔는데 어딘가 전화 한 통화 하더니 1년 먹을거리는 챙겼다고 하는 거야. 순간 저거다, 가장 적은 노력으로 큰돈을 벌 수 있겠구나. 섬유야 내 전공이잖아. 그러다가 생각이 바뀌어 구색 갖추기 차원에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이게 쉽지 않은 거야. 오기가 발동했지. 일단 공부를 만족할 수준까지는 해보고 그만두자고. 그래서 유학갔지."

―유학을 두번 했다는 건 무슨 말인가?

"미국 미시간대에서 인간공학으로 박사 과정을 마쳤는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군미필 유학생을 다 불러들였어. 난 아버지가 돌아가신 데다 2대독자였기 때문에 해당이 되지 않는데도 귀국하라는 거야. 13명 중에서 2명만 합격한 박사 과정 시험도 통과해놓고 얼결에 불려들어와 방위까지 마쳤다. 그 무렵 서울대에서 산업공학과를 만든다고 커리큘럼을 짜달라는 요청을 받아 1970년 스물다섯에 최연소 서울대 교수가 됐지. 그런데 학위에 대한 미련이 남아 후배 교수 들어올 때까지 5년간 기다렸다가 다시 나가서 과정 공부 처음부터 반복하고 1979년에 학위 받고 돌아왔어. 미시간에 남으라는데 미국이 싫더라고."

―명강의에 실력 있는 교수로 명성이 자자했다던데.

"운이 좋았던 거지. 사실 교수로서 열정은 별로였지만 최소한의 의무는 해야 하니까 열심히 가르쳤지. 젊기도 했고 새로운 이론을 제대로 공부해온 덕도 있었고."

―서울대 교수가 전국 육체미대회에 출전하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텐데.

"그게 어어 하다가 그렇게까지 된 건데. 마흔쯤 되니 배도 나오고 해서 운동을 해야겠더라고. 골프는 시간이 많이 들고 테니스는 짝을 맞춰야 하니 쉽지 않을 것 같고. 그래서 강남의 한 호텔 헬스클럽에서 운동 삼아 한 게 보디빌딩인데. 마침내 박사 논문이 근육피로현상을 수학 모델로 설명한 것이라 근육에 대해 좀 알았지. 좋은 코치를 만나기도 했고. 요즘 '몸짱' 연예인들 王(왕)자는 그때 나한데 비길 게 못돼. 나는 王자 사이에 근육의 주름과 결까지 생생했으니까. 그러다가 88년쯤인가 코치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해 동네 대회에 이어 전국대회에까지 나갔는데 덜컥 장년부 1등을 했지. 아마도 육체미에 대해 무식한 운동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불식시키려 교수인 나를 내보냈는데 그렇게 된 거지. 아, 그랬더니 동남아대회에도 나가라네, 그런데 그 정도 하려면 교수직 내놓고 직업 바꿔야 돼. 그래서 동남아대회는 접었지."

지난주 이면우 교수는‘크고 오래된’대학을 떠나‘작고 새로운’대학으로 옮겼다. 그는“나는 계속 올라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 이명원기자 mwlee@chosun.com

'서울공대 백서'와 'W이론' 발표로 유명세를 타다

―1992년 여름 펴낸 책 'W이론을 만들자'를 빼놓고 이면우 교수를 이야기할 수 없다.

"그보다 1년 전인 1991년 서울 공대 백서와 W이론은 돌이켜보면 짝을 이룬다. 백서는 서울 공대의 비참한 실상을 고발한 것이고 W이론은 범위를 조금 넓혀 우리 사회가 가야 할 방향을 짚어본 것이다."

―그 시절에 백서를 내게 된 경위가 궁금하다.

"당시 공대학장이 백서 발간을 제의해 6명의 교수가 선정이 돼 실태 조사를 했다. 한심했다. 공대 예산의 86%가 교직원 인건비로 나가고 있었다. 그걸로 교육이 가능하겠는가? 실험기자재도 폐품에 가까운 미국과 일본의 한물간 기자재들이 전부였다. 그나마 들여와도 '촉수불가(觸手不可)'였다. 교수가 멀리 서서 저 기계는 이러저러한 것, 저 기자재는 이러저러할 때 쓰면 되는 것이라고 하면 끝이었다. 한강의 기적이니 아시아의 4마리 용이니 하며 들떠 있을 때 서울 공대 수준이 그랬다. 이대로 깔 것인가 내용을 완화해야 할 것인가로 6명의 백서위원이 3대3으로 갈렸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다른 데서는 매파가 이기지만 대학에서는 비둘기파가 이긴다. 마지막에는 나 혼자 남았다. 이건 아니다 싶어 내부 고발을 하기로 결심하고 자료를 내 책상에 두었는데 당시 조선일보 기자가 우연히 내 방에 들렀다가 그 자료를 갖고 가서 특종을 했다."

―결과적으로는 잘 된 것 아닌가?

"즉각 '남산(안기부)'에 끌려갔다. 묻지도 않고 패는데 미치겠더라. 뭐라 물어야 거짓말이라도 하지, 그냥 '이 새끼 어디 빨아먹을 돈이 없어 늙은 과부 돈을 빼먹으려 하느냐'는 거야.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소용없었어. 이유는 한참 있다 알았지. 당시 일본과의 무역 역조 시정을 위한 조치의 하나로 우리 정부가 일본에 첨단기술 이전을 요구하고 있었는데 내가 백서 84쪽에서 이렇게 지적했거든. '적장에게 우리는 병력이 없으니 우리에게 병력을 달라는 꼴과 같다. 이 어리석은 장수는 예산만 없는 것이 아니라 스피릿(spirit)도 없다.' 그걸 내 앞에 들이대며 '당신이 생각하는 어리석은 장수가 누구냐?'고 따져물어. 당시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을 지칭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절대 아니라고 싹싹 빌고 나올 수 있었다."

―그걸로 끝이었나?

"그나마 정치인들은 나라 생각 좀 하더라. 뒤에 'W이론을 만들자'가 반향을 일으키니까 청와대에서 보자는 연락이 왔다. 뭐가 문제냐고? 그래서 돈을 달라고 했다. (창에 비치는 앞의 공학관 건물 301동과 302동을 가리키며) 저거 그때 내가 받아온 700억원으로 지은 거다. 매값치고는 좀 받았지. 그래서 콩나물 다가구주택에 살다가 연립주택으로 옮길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교수들의 반응이 차가웠다. 동료 교수들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연·고대나 카이스트, 포스텍 등의 교수들까지 '서울 공대가 그 정도라고 까발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며 나를 몰아세웠다. 아이들 교육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교수들이 그래서는 안 되지."

―20년이 흘렀다. 그때의 문제제기로 인해 얼마나 좋아졌나?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가 백서에서 '씹을' 당시 서울대 랭킹이 400등 정도였는데 지금은 47등까지 올랐으니 많이 좋아졌다. 하드웨어가 그렇다는 말이다. 소프트웨어는 아직 멀었다."

"대학은 썩을 대로 썩었다."

―41년 교단에서 서울 공대생들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60년대 선배들과 우리들은 뚜렷한 목표는 없었지만 최고의 열정으로 뭔가를 해보겠다는 흥분 상태였던 것같다. 국가와 사회 건설에 일조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70년대와 80년대 학생들은 우리만큼 고생은 안 하고 컸지만 산업의 역군이라는 정신이 있었다. 2000년대부터는 학점 관리의 도사들이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학생들 탓할 수도 없다. 공대 학부생 5500명 가운데 10% 이상이 고시 유혹에 흔들리고 있다. 물리학과 다니던 학생이 다시 입시를 봐서 서울 의대에 입학한다. 고시 공부를 하고 있는 자연대와 공대생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일찌감치 돈 잘버는 변호사 의사 한의사 되겠다고 작심한 아이들에 비하면 미련한 '최후의 변절자'에 불과하다. 오히려 딱해보이기도 한다. 눈치 빠르게 진작 돈 버는 쪽으로 갈 것이지 서울 공대는 왜 들어왔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서울음대 문제로 시끄럽다. 공대라고 예외는 아닐 텐데. 이런 문제는 일회성인가 구조적인가?

"난 구조적인 측면이 강하다고 본다. 교수란 어떤 사람인가? 어려서부터 공부 잘했고 최단거리로 공부해서 교수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세상 그 어떤 갑(甲)을(乙)관계도 교수와 학생만큼 종속적이지는 않을 거다. 제자 인생의 목줄을 쥔 사람들이 교수다. 학부모들이 아무리 힘이 세도 자식 앞날 때문에 교수 앞에서는 숨을 죽인다. 교수와 학생 사이에는 감사도 없고 지적사항도 없고 규제도 없다. 이렇게 20년쯤 교수 하고 나면 유아독존이다. 게다가 교수 사회는 옆 동료 상관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내가 이 동네(교수사회) 있어본 경험으로는 이런 문제 일으키는 교수들은 자신들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도 모른다. 마비상태다. 자정능력이 전혀 없다. 앞으로도 계속 터질 것이다.

그런데 학생들도 잘못이다. 교수가 때려 맞았다. 그런데 왜 가만 있나? 앞으로 잘 풀려보려고 그러는 거다. 어쩌다 교수의 비리를 고발하는 '돌출'학생이 있으면 그 학생은 적어도 그쪽 동네에서는 두고두고 매장된다. 그래서 우리도 미국처럼 '대학윤리위원회'설치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존경받는 교수들이 중심이 돼 있고 여기에는 교수가 학생을, 학생이 교수를, 교수가 동료교수를 기탄없이 고발할 수 있고 보안이 유지된다. 다만 우리 대학들에 그런 존경받는 교수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다."

―서울대가 이 정도라면 다른 대학들, 혹은 사회전반에 부패와 리더십 부재가 만연해 있다는 뜻이기도 한데.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 스님 세상 떠나고 나니 사람들이 믿고 의지할 지도자가 없어 정신적으로 방황하고 있다. 김동길 교수가 정치에 몸을 담그지 않고 한 길을 걸었더라면 지금쯤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많이 아쉽다. 김용옥씨는 처음에는 주목을 했었는데 언제부턴가 시류에 영합하고 매스컴에 충성(?)하다가 망가져버렸다. 한 사회의 지도자란 창의적인 생각을 갖고서 고행도 감내하고 주변과 갈등을 겪으면서도 이를 이겨내고 미래를 위한 토대를 만드는 사람이다. 권력과 대중의 눈치를 보지 않아야 한다. 창피한 일이지만 이 동네(서울대)에는 그런 마인드를 가진 젊은이들이 들어오질 않는다. 경제논리로 무장한 학생들, 부모의 투자를 받았으니 반드시 고소득 전문직이나 안정된 직장에 들어가 상환해야 한다는 논리를 갖춘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학생들에게 롤모델로 제시하는 인물들은 누군가?

"간디, 호찌민, 체 게바라, 백남준, 마틴 루터 킹 등이다. 새로운 삶의 패러다임을 만들어낸 정신적 지도자들이다. 내가 강조하는 창의성과 리더십을 한몸에 갖춘 인물들이니까."

―자녀들 교육은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다.

"2남1녀인데 큰아들은 록밴드를 하는 작곡가다. 작은아들은 여기(서울공대) 나와서 지금은 미국에서 뮤직테크놀로지 공부하고 있다. 모바일폰으로 오케스트라를 꾸미고 아이폰으로 심포니를 만들고. 딸애는 가야금 했는데 지금은 주부로 잘 살고 있다. 아이들 키울 때 자기들 의견 존중해주고 자유방임으로 키웠다."

―왜 학과 창설교수가 명예교수는 사양했나?

"지난번 정년기념식장에서 나는 이런 말을 했다. '누가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거든 관악의 하늘을 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관악의 하늘을 보았더니 다음 세 가지가 보였다. 첫째 대학은 글로벌 랭킹에만 눈이 멀었고 교수는 SCI(과학기술논문 색인지수)에만 온 신경이 가 있고 학생들은 학점관리에만 혈안이 돼 있구나.' 이런 동네에서 무슨 미련이 있어 명예교수까지 하겠나. 41년이면 족하다. 지난주부터 울산과기대 디자인 인간공학부 석좌교수로 나가는데 느낌이 좋다. 인간공학이 원래 내 전공이라 더 그런 것 같다. 그동안 '크고 오래된' 대학에 줄곧 있었는데 그 학교는 작지만 젊다. 거기서 학생들에게 혼을 불어넣어보려 한다. 첫날부터 아이들을 '짓이겨' 놓았지. '내 수업 들으면 다른 과목 2~3개는 포기해야 한다. 까딱 잘못하면 장학금 날아간다'고 겁을 줬거든.그런데도 20명 중 단 한 명도 수강신청 정정 안했더라."

인터뷰를 마친 이 교수는 공학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교수가 우리 사회의 정상궤도를 이탈한 괴짜인가 아니면 우리 사회가 궤도에서 벗어나다 보니 정상궤도를 달려온 이 교수가 괴짜로 보이는 것인가?"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이건희를 건드리니, 주변이 온통 적이 됐다"

[인터뷰] 이동걸 前 금융연구원장 "강만수 중용, 한탕하고 탈출하자?"

돈 앞에서 체면 따지는 사람은 없다. 이자를 0.1%라도 더 쳐주는 은행에 돈을 맡기려는 마음은, 누구나 똑같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런 마음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게 세상의 원리라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마음이라고 인정한다. 이처럼 벌거벗은 욕망들이 알알이 모이고 부딪혀 거품 일으키며 흐르는 바다가 바로 '금융'이다. 아무런 가식 없는, 실용의 세계다.

'금융'과 '선비'의 조합이 영 어색해 보이는 것은 그래서다. 벌거벗은 욕망을 그대로 인정하는 선비라니,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가만히 따져보면, 욕망이 날카롭게 부딪히는 곳일수록 '선비'처럼 올곧은 심판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큰 돈이 오가는 거래일수록 규칙이 엄해야 하는 법. 그렇지 않으면, 타짜들이 날뛰고, 결국 판 자체가 깨진다.

무턱대고 '실용'만 쫓는 논리가, '실용' 그 자체를 위해서도 해로운 이유다. 한마디로, 금융에도 선비가 필요하다. 그리고 여기, 선비 같은 금융인이 있다.

"연구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한갓 쓸데없는 사치품 정도로 생각하는 왜곡된 '실용' 정신, 그러한 거대한 공권력 앞에서 이제는 제가 더 이상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기보다는 짐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금융연구원을 떠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연구원을 정부의 Think Tank(두뇌)가 아니라 Mouth Tank(입) 정도로 생각하는 현 정부에게 연구의 자율성과 독립성은 한갓 사치품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동걸 한림대 재무금융학과 교수가 2009년 1월에 쓴 글이다. 당시 이 교수는 한국금융연구원 원장이었고, 임기를 1년6개월 남긴 상태에서 갑작스레 사표를 냈다. 이 글은 당시 이 교수가 금융연구원 직원들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일부다. 금산분리 완화, 자본시장통합법 시행 등 현 정부의 금융정책에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하게 밝혀왔던 그는 정부로부터 다양한 압력을 받았고, 결국 자기 발로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한참 동안 야인 생활을 했다.

당시 그를 보며, 많은 이들이 '선비'를 떠올렸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직언을 하는 모습이 딱 '선비'라는 게다. 그런데 그에겐 이런 일이 이게 처음이 아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 8월에도 그는 금융감독위원회(현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자리를 스스로 박차고 나왔었다. 역시 자신의 소신 때문이다. 실용만 쫓는 이들에겐 '물 좋은 자리'를 제 발로 걷어차는 그의 모습이 그저 어리석게만 비칠 게다. 하지만, 이런 불합리한 행동이 우리 경제를 조금 더 합리적으로 돌아가게끔 해 왔다.

묘한 것은 두 차례의 갑작스런 사퇴가 모두 삼성 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금융연구원장에서 물러나는 계기가 됐던 '금산분리 완화' 문제는 삼성 지배구조 문제와 긴밀히 맞물려 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1%대의 지분으로 삼성그룹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삼성에버랜드 → 삼성생명 → 삼성전자 → 삼성카드 → 삼성에버랜드'로 이어지는 순환출자구조 때문이다. 그런데 금산분리 관련 규정은 이런 순환 고리를 끊는 역할을 한다.

2004년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 자리를 떠난 것도 삼성 문제 때문이다. 당시 금감위는 생명보험사 상장 기준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었는데, 당시 부위원장이던 이 교수는 생명보험사 상장 이익에서 보험 계약자 몫을 보장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생명보험사가 '상호회사(고객에게 소유권과 이익이 분배되는 회사)'라는 속성을 갖고 있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당시 금감위 안에서 소수파가 아니었다. 오히려 다수파였다. 금감위 안에서는 계약자 대 주주 몫이 7 대 1 또는 8 대 1까지 거론됐었다.

그런데 이 교수는 당시 삼성생명의 변칙적인 회계처리 사실을 밝혀냈다. 삼성생명이 수년간 보험감독 규정을 어기고 거액의 투자유가증권 평가이익을 주주 몫으로 계상한 사실을 파악해 공개한 것이다. 보험계약자에게 돌아가야 할 이익이 이건희 회장 등 고(故)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후손 몇몇에게 돌아갔다는 것.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생겼다. 이 교수가 삼성생명의 변칙적인 회계처리를 공론화하자, 주변 관료들 대부분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이 교수는 "그 순간, 모든 사람이 내 적이 됐다"고 말했다. 결국, 그는 자리를 떠났다. 생명보험사 상장 차익에서 보험 계약자의 몫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쪽으로 결정됐다. '7 대 1 또는 8 대 1'이 아니라 '0대 10'이 된 것이다.

이를 놓고, 이 교수는 "노무현 정부의 최대 실패작"이라고 평가했다. 1990년대 말까지 생명보험사 상품은 모두 배당보험이었는데, 배당보험은 생명보험사가 손해를 보면 보험 계약자가 배당을 덜 받게끔 돼 있다. 보험 계약자가 회사의 손실을 메워주는 구조다. 일종의 '상호회사' 방식이다. 그런데 막상 상장이익이 생길 것 같으니 '회사는 주주의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우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게 이 교수의 입장이다.

이런 입장과 정반대 편에 서서, 생명보험사 상장차익을 모두 주주에게 돌리는 쪽으로 방향을 튼 것은 윤증현 당시 금감위원장이었다. 이명박 정부에서 기획재정부 장관을 맡고 있는, 바로 그 윤증현이다. 윤 장관 덕분에, 이건희 회장은 약 4조6000억 원의 상장차익을 얻게 됐다.

윤 장관은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에서 계속 고위직을 맡았고, 이 교수는 두 정부에서 모두 중도 사퇴 이력을 남겼다. 윤 장관과 이 교수의 이런 대조적인 이력은, 적어도 재벌 문제만큼은 노무현 정부와 현 정부가 별 차이가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지난 14일, 이 교수를 만났다. 서울시 종로구 옥인동 <프레시안> 편집국에서 만난 그는, 금융 현안에 대해 거침없는 의견을 쏟아냈다. 또 과거 금감위 부위원장 시절의 경험도 솔직하게 털어놨다. 이날 나눈 이야기를 정리했다. <편집자>


"측근부터 시작된 MB레임덕…'한탕'하고 탈출하려는 이들만 많다"

▲ 이동걸 한림대 교수ⓒ프레시안(김윤나영)
프레시안:
이명박 대통령과 소망교회에서 인연을 맺었던 강만수 씨가 산은금융지주 회장에 임명됐다. 현 정부 들어 이런 일이 잦았다. 이보다 앞서 이 대통령의 고려대 경영학과 동문인 어윤대 씨가 KB금융지주 회장이 된 일도 있다. 현 정부의 정책 기조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다 자리에서 물러난 입장에선 할 말이 많을 듯 하다.

이동걸: 강만수 씨가 산은금융지주 회장에 내정됐다는 보도를 보고 '레임덕이 측근부터 시작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대통령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대통령 임기 끝나기 전에 한탕 하고 탈출하자'라는 심리가 번지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면서 점점 불길해졌다. 그렇다면, 과연 현 정부는 경제정책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을 것인가. 측근부터 탈출할 궁리만 하고 있는데 말이다.

더구나 강만수 씨는 금융 전문가가 아니다. 세제 전문가일 뿐이다. 오로지 충성심을 기준으로 해당 분야에 전문성이 없는 인사를 임명하는 일이 현 정부에서 반복되고 있다. 예컨대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도 통화정책 전문가는 아니다. 그는 노동정책 전문가에 가깝다.

물론 어느 정부나 다 이런 면이 있다. 내가 김대중 정부에서 1년, 노무현 정부에서 1년 반 동안 대통령을 지켜봤다. 결국 인사는 충성심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그게 너무 심하다.

"산은 민영화, 결국 낙하산 자리 여럿 만들겠다는 것 아닌가"

프레시안: 산업은행과 관련해서는 쟁점이 많다. 대표적인 게 '민영화' 논란이다.

이동걸: 산은 민영화, 나는 도무지 이해 못하겠다. 만약 정부가 정책금융의 필요성을 부인한다면 산은 전체를 민영화하면 된다. 그런데 정책금융의 필요성은 인정하지 않는가. 그러니까 정책금융공사를 새로 만든 것 아닌가.

정부는 경쟁력 있는 종합금융사 하나 더 만들겠다고 한다. 만약 정부가 종합금융그룹을 제대로 만들 자신이 있다면, 굳이 민간에 넘기지 말고 자기들이 계속 끌고 가면 된다. 왜 민영화를 하겠다는 건가. 정부의 방침은,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결국 낙하산 자리 여러 개 만들겠다는 것 아닌가.

정부가 억지로 종합금융그룹을 만들려 하니,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우선, 산은은 자생력이 없다. 지금까지는 산업금융채권(산금채)로 자금조달을 했지만, 민영화 이후엔 산금채 발행을 못한다. 그럼 어떻게 자금을 조달할 건가.

은행이 자금을 구하는 통로는 전국에 깔려 있는 지점망이다. 그런데 산은은 지점망이 없다. 그래서 자생력이 없다는 게다. 그러니까 우체국금융이나 우리은행, 기업은행 등을 집어삼킬 궁리만 한다. 그러나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졌다. 자생력 없는 기관을 민영화한다는 발상 자체가 이미 모순이다. 이게 만약 성공한다면, 결국 정부가 특혜를 줬기 때문일 게다. 이런 민영화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

▲ 이동걸 한림대 교수ⓒ프레시안(김윤나영)

"메가뱅크 있어야 원전 수주?…60~70년대 발상일 뿐"

프레시안: 이른바 '메가뱅크(Mega Bank. 초대형 은행)'도 쟁점이다. 이번에 산은금융지주 회장이 된 강만수 씨가 대표적인 메가뱅크 예찬론자다.

이동걸: 메가뱅크는 한마디로 1960~70년대식 발상이다. 과거에는 국내 은행들의 규모가 너무 작아서 '어느 정도 커야 규모의 경제가 실현되고, 포트폴리오도 제대로 구성할 수 있다'라는 식의 주장이 먹혔다. 그러나 지금은 국내 은행들이 충분히 크다. 우리, 국민, 신한, 하나가 200조 원(약 1800억 달러)이 넘는 규모다. 이 정도면 미국에서도 7, 8위권이다. 미국에서도 1조 달러가 넘는 곳은 제이피모건(JP), 씨티, 웰스파고 등 네 곳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다 3000억~2000억 달러 수준이다. 규모가 작기 때문에 국제경쟁력 없다는 얘기는 말이 안 되다.

경제 규모도 고려해야 한다. 미국은 국내총생산(GDP)이 한국의 10배가 넘는다. 한국에서 250조 원 은행이면, 미국에선 2500조 원 은행과 같은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런데 미국에도 2500조 원이 넘는 은행은 없다. 어떤 기준으로 보건, 규모가 작아서 경쟁력이 없다는 논리는 성립하기 힘들다.

'메가뱅크' 주장이 나와서는 안 되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대형 은행이 얼마나 위험에 취약한지는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확인된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규모가 아니라 내실이다. 위험 관리를 제대로 하고 진짜 실력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

대통령 측근인 강만수 씨가 산은금융지주 회장으로 가는 것도 문제지만, 그가 가진 힘을 이용해 메가뱅크를 무리하게 추진할까봐 더 걱정스럽다.

이명박 정부가 하는 일을 보면, 모든 게 굉장히 과감하다. 지금까지 제대로 해놓은 게 없기 때문인지,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야한다는 조바심이 대단해 보인다. 산은 민영화도 그래서 하는 것 아니겠나.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이 최근 인터뷰에서 이 대통령에게 '성공한 대통령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고 했던데 그 말이 맞다고 본다.

프레시안: 이명박 정부는 지난해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주를 계기로 메가뱅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당시 이 대통령은 원전 수주와 관련된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자 그 해법으로 국내은행간 인수합병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동걸: 세계적으로 자산순위 50위 안에 들어가는 은행이라고 해서 혼자서 국제자금 조달을 하는 곳은 없다. 신디케이트(공동판매회사)로 하거나 채권을 발행해서 투자자 모은 후 들어간다.

원전 수주 등 대형 사업에 필요한 자금 수주는 은행의 규모 문제가 아니다. 국제금융의 바닥에서 인맥과 노하우를 쌓는 게 필요하다. 그게 없는 상태에서 덩치만 키우자는 주장은 전혀 현실성이 없다.

"리먼브라더스, 만약 인수했다면 결국 빈 책상만 남겼을 것"

▲ 이동걸 한림대 교수ⓒ프레시안(김윤나영)

프레시안: 정부 당국자들 역시 국제 금융계에서 인맥과 노하우를 쌓을 필요는 인식하고 있다.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면서 중단됐지만, 현 정부 초기 산업은행이 리먼브라더스를 인수하려 할 때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었다. 리먼브라더스와 같은 대형 투자은행을 인수하면, 한국 금융계에 부족한 인맥과 노하우를 짧은 시간 안에 흡수할 수 있다는 게다.

이동걸: 그래서 내가 그런 소리하는 사람들을 금융 비전문가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정을 해보자. 리먼브라더스가 망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걸 우리가 인수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리먼브라더스가 갖고 있는 인맥과 노하우가 우리의 것이 됐을까. 그래서 우리는 단숨에 국제금융계의 중요한 플레이어가 됐을까. 절대로 그럴 리 없다.

투자은행(Investment bank)의 인재들은 엄청나게 빨리 턴오버(Turnover, 인사교체) 된다. 우리가 리먼브라더스를 인수한 뒤에, 세계경제가 조금만 살아나는 기미가 보였다면, 리먼브라더스의 인재들은 다른 곳으로 다 스카우트 돼 갔을 게다. 그러면 거액에 인수한 리먼브라더스에는 책상전화기만 남는다.

투자은행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 거기서 일하는 이들은 이력서에 얼마나 직장을 여러 번 옮겼는지를 적는 게 자랑거리다. 실력 있는 사람은 한 곳에 일 년 반 이상 머물지 않는다. 이런 인재들을 끌고 갈 리더십이 있어야만, 투자은행을 경영할 수 있다.

내가 농담 삼아 하는 말이 있다. "은행(Commercial bank)은 장치산업"이라는 말이다. 은행은 지점이라는 네트워크가 있어야만, 운영이 된다. 그런데 그 지점이라는 건 제3자가 은행을 인수하더라도 철수시키기 어렵다. 영업 기반이 그대로 유지되고, 따라서 사람들도 그 기반을 따라 움직인다. 은행(Commercial bank)이 투자은행(Investment bank)과 달리 스카우트가 적은 이유다. 씨티은행을 인수한다면 그곳의 지점망과 인재 대부분이 유지될 것이다. 하지만 투자은행은 다르다. 투자은행은 전부 팀 단위로 움직인다. 그 팀이 가진 네트워크에 따라 업무가 돌아간다. 이런 팀들을 제대로 이끌 능력이 없다면, 투자은행 인수는 헛일이다. 그리고 지금 수준에서 한국이 투자은행을 인수해서 세계 금융의 중심부로 진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명백한 증거가 일본이다. 일본이 돈이 없어서 투자은행을 못하나. 아니다. 아무리 돈을 쏟아 부어도 안 되는 것이다. 20~30년을 투자하고도 미국계 유대인이 중심인 국제 금융의 '이너서클'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가 갑자기 회사 하나 인수한다고 되겠나. 그렇게 생각한 것 자체가 이 정부가 아마추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만약, 국내 금융을 굳이 해외로 진출시키고 싶다면, 우선 은행을 인수하는 게 낫다. 그 다음이 보험이다. 그 뒤에나 고려해 볼만한 게 투자은행이다. 그나마 KB금융은 카자흐스탄 은행 인수했다가도 손들고 나오지 않았나. 국내 금융계의 실력이 그렇다. 그런데 투자은행 인수라니, 말도 안 된다. 

"'론스타 문제', 공적자금 투입 못한 게 원죄다"

프레시안: 금융이 제대로 성장하려면, 결국 감독당국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한국은 약점이 많다. 특히 '론스타' 문제는 한국의 금융감독체계가 가진 문제점을 적나라게 보여준다.

이동걸: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하도록 인가한 사람이 바로 나다. 그래서 나는 론스타 문제에 대해선 대단히 복잡한 감정이 있다.

외환은행 문제에는 원죄가 있다. 바로 공적자금 투입을 못한 게 원죄다. 2003년에 공적자금 2조 원만 있었어도 외환은행과 LG카드를 사서 정상화 시킨 후 정부가 큰 돈을 벌었을 것이다. 그런데 투입할 공적자금이 없었다.

당시 실무진한테서 '외환은행을 론스타에 매각하는 양해각서(MOU)를 작성한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내가 한 첫 마디가 '이건 이정재 금감위원장이 정책적 판단을 할 수밖에 없겠구나'였다. 두 번째로 한 말은 '산업은행이나 기업은행이 인수하는 방법을 검토해보라'였다.

둘 중 하나, 특히 산은은 외환과 결합하면 완벽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실무진의 검토의견이 '적어도 정부가 5000억 원 이상은 재정확충을 해줘야 하는데, 조달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포기했다. 다른 방법이 없어서 할 수 없이 론스타에 줬다.

왜 굳이 사모펀드에 넘겼느냐고 비판하겠지. 당시 생각은 이랬다. 장기적으로 보면 우리나라의 메이저 은행을 외국은행이 너무 많이 장악하는 게 큰 문제가 되리라고 봤다. 안 그래도 스탠다드차티드(SC), 씨티(Citibank) 이런 은행들이 속속 들어왔지 않은가. 그러니 '차라리 돈 왕창 벌고 나가더라도 펀드에 넘겼다가 국내에서 되사는 게 낫겠다'라고 판단했다. 우리의 능력이 부족해서 남이 돈 버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이건 이차적인 이야기다. 가장 좋은 대안은 공적자금을 투입해서 국가에 이득이 되게끔 하는 것이다. 이게 두고두고 아쉽다. 하지만 공적자금을 못 쓴 데는 이유가 있다.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보자.

"외환은행 문제, 한나라당도 책임 있다"

2002년 말에 한나라당이 워낙 거세게 공격해서 진념 당시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공적자금을 종료했다. 상환기금을 만들고 완전히 문을 닫았다. 당시 공적자금 상환 방안을 만든 게 나다. 금융연구원 사상 최대 규모의 작업이었다. 박사만 9명이 투입됐고, 회계법인 여러 곳이 동원됐다.

당시 재경부에서 공적자금 상환대책을 만들어 달라며 연구원에 왔었다. 당시 연구원 측은 '공적자금을 완전히 닫으면 안 된다. 돈이 더 필요하다. 외환은행, 현대투자증권 등 몇 곳에 넣을 돈 2~3조 원이 더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내 일도 아닌데 재경부 쫓아다니고 기획예산처 찾아다니고 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한결같았다. 정치적으로 안 된다는 거다. 야당과 공적자금을 닫기로 합의해서 어쩔 수 없다고.

그래서 내가 2003년 1월에 노무현 정권 인수위에 들어가서 하나 '빵' 터뜨렸다. 당시 <경향신문>이 1면 톱에 쓴 "공적자금 8조 원 필요해"라는 기사가 그렇게 나왔다. 그걸 보고 노 당선자가 '필요합니까'라고 물었다. 그래서 내가 '있어야 될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결국 못했다. 정치적 부담이 너무 컸던 게다. 그 뒤, 2003년 4월에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이정재 당시 금감위원장에게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기자실에 가서 폭탄 하나 터뜨리겠습니다. 공적자금 8조 원이 필요하다고 얘기하고 사표 쓰겠습니다. 그러면 4조 원은 안 만들어주겠습니까."

공적자금 4조 원만 조달하면 김대중 정부 때 해결 못한 외환은행 문제, 새로 터진 카드문제 싹 다 처리할 수 있었다. 공적자금이 들어가는 게 최선이었다.

그런데 결국 못했다. 온 사방이 적이었다. 당장 한국은행이 "통화정책의 근간이 무너진다"며 결사반대했다. 그랬던 사람들이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공적자금을 비정상적으로 빌려주는 걸 보니 굉장히 씁쓸했다. 2003년에 공적자금이 있었으면, 지금 이런 문제가 안 생겼을 텐데.

그래서 나는 외환은행 문제에 대해서 한나라당도 자유롭진 않다고 본다. 자신들을 마치 책임 없는 양 행세하는데, 무책임하다. 1997년 외환위기를 깨끗이 마무리 짓지 못한 상태에서 억지로 (공적자금 투입을) 닫아버려서 할 수 없이 생긴 부분이 있는데 말이다.

론스타와 관련해서, 주가조작 등 그 이후에 터진 사건들은 잘 모른다. 다만 내 의견을 말하라면 적격성 심사는 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도 안다. 일단 금융감독당국이 인가해줬는데, 나중에 '안 된다'고 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외환은행 문제는 조금 '쿨하게' 봤으면 좋겠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지만 말이다. 그 동안 론스타가 잘못한 걸 바로잡는 건 옳다. 그런데 그들이 돈을 많이 벌었으니 배 아프다? 이건 아니다. 우리가 아쉽지만 깨끗이 잊어버리는 수밖에 없다. 금융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 약자는 손해 보고 강자가 돈 벌게 돼 있다.

법적으로 봐도, 론스타 관계자들을 감옥에 넣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이런 상황에서 시간만 끌면, 결국 론스타에게만 좋은 일이다. 그들이 3년 전에 나갔다면, 3조 원만 벌어서 나갔을 텐데, 시간 끌어서 5조 원을 벌게 됐다.

돈은 아깝지만, 국내은행이 빨리 인수하는 것 외에는 해결 방안이 없다고 본다. 물론, 내가 이 사건 관련자이므로 어느 정도 '편향'이 있다는 것, 분명히 인정한다. 그러나 결국 우리가 실력이 없어서 외환은행을 론스타에 준 것이라는 생각도 분명하다.

안타깝기는 LG카드도 마찬가지다. 금감위 부위원장 시절, 이 문제 처리할 때 '개혁적 학자라더니 결국 관치하느냐'라는 욕을 참 많이도 들었다. LG카드 역시 자금만 투입하면, 회생 가능한 회사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런 종합적인 판단을 실현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됐다. 굉장히 아쉽다.

"'저축은행 부실, 지옥에 가서라도 물어내게 한다'더니, 그 약속 어디로…"

▲ 이동걸 한림대 교수ⓒ프레시안(김윤나영)
프레시안:
저축은행 부실이 심각하다. 결국 사실상의 공적자금이 투입될 예정이다.

이동걸: 그 동안 저축은행들이 한 일이 후순위채(발행기관이 파산했을 경우 가장 마지막에 투자금을 상환받을 권리를 가진 채권. BIS 자기자본비율 산정시 자본 계정으로 계상되기 때문에 재무제표를 왜곡시킨다)를 높은 금리로 발행해서 돈을 끌어온 후 더 높은 금리로 빌려주는 짓이었다. 부실이 오래 전부터 생겼는데 오래 끌다가 더 커진 것이다. 정부가 건설경기를 부양하려고 저축은행에 문제가 없다고 선전하다 이렇게 됐다. 구조조정은 지연한다고 좋은 게 아닌데 말이다.

정부가 대응책으로 은행권 공동계정을 만든다고 했는데 이는 반대한다. 저축은행의 부담을 다른 은행에까지 전가시키는 것으로, 은행 예금자가 저축은행을 도와주는 꼴이다.

저축은행에 사실상의 공적자금이 투입되게 됐으니 공적자금 상환대책도 미리 만들 때가 됐다. 예금보험료만으로는 안 된다. IMF 구제금융 사태 당시에도 같은 이유로 공적자금을 남겨둬야 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당시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이 '저축은행 부실은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물어내게끔 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고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한다. 이래서야 되겠나.

지난해 말 저축은행 부실지원액이 7조 원이다. 이 중 다른 금융권에서 전용한 게 벌써 3조5000억 원이나 된다. 이번에 공동계정을 만들어 저축은행 문제를 푼다는 것은, 이걸 상환할 생각 없이 더 가져다 쓰겠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덮고 가면 안 된다. 공적자금을 제대로 투입하고, 이를 투명하게 감시해야 한다.

"미국 재무 장관 전화에 '예스, 서'라고만 한 강만수, 안타깝다"

프레시안: 기준금리가 2년 3개월 만에 3%로 올랐다. 한은 금통위의 결정을 어떻게 보나?

이동걸: 너무 늦게 올렸다. 2009년 여름부터, 늦어도 가을에는 기준금리를 올려야 한다고 말해 왔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당시 우리는 위기의 진원지가 아니었다. 잘 했느니 못 했느니 말이 많지만 그래도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공적자금을 투입한 덕분에 금융기관 건전성이 상당히 좋아졌다. 우리 기업체도 부실하지 않았다. 이게 미처 나빠지기 전에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았다.

뜯어보면 우리가 받은 충격은 글로벌 경기침체 영향뿐이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버티기가 쉬웠다. 유동성을 늘리고 재정자금을 투입해서 경기를 부양했다.

문제는 국내 문제가 아니었다. 외국의 문제로 달러가 빠져나가면서 문제가 생겼다. 금융연구원장을 지낼 때는 강만수 당시 기획재정부 장관과 얘기할 위치가 아니었지만, 주변에 내가 한 얘기가 딱 하나 있었다. '우리나라가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응해서 할 일은 딱 한 가지뿐이다. 달러와 통화스왑하면 된다'는 거였다.

우리나라가 국제 기축통화라면 외환문제 자체가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달러가 빠져나가서 생기는 문제는 기축통화가 아니라서 겪는 어려움이었다. 그러니 위기 때 원화를 일시적으로 달러처럼 쓰면 문제가 해결된다. 우리의 외환보유고, 외환유동성에 문제가 안 생긴다.

그런데 강만수 장관이 어떻게 했나. 2008년 페니메이(Fannie Mae, 미국의 국책 모기지 업체, 이게 무너진 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가 터졌다)가 망했을 때, 헨리 폴슨 미국 재무부 장관이 세계 각국 경제 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국 국채(T-Bond)를 팔지 말아달라는 전화였다. 강 장관도 받았다. 그런데 그가 곧장 한 말이 '예스, 서(Yes, Sir)'였다고 한다.

잘못된 대응이다. 당시 우리가 보유한 외환보유고가 2000억 달러가 넘었다. 이 가운데 반만 풀어도 국제금융시장이 뒤집어진다. 이런 힘을 배경으로 미국에 당장 통화스왑을 하자고 했어야 했다. 당시 미국으로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페니메이가 망하자마자 그렇게 했으면, 2009년부터 한국은 문제가 생길 게 없었다.

그런데 당시 한국은 기회를 놓치고 한참 기간을 끈 뒤에야 간신히 통화스왑을 했다. 그것도 구걸하다시피해서 말이다. 그때는 이미 미국이 유럽과 무제한적인 스왑을 체결한 상태였다. 한국을 비롯한 4개국만 맨 마지막에, 고작 400억 달러 수준으로 스왑을 맺었다. 때를 놓치는 바람에 외환위기가 길어졌다.

"때를 놓친 출구전략"…"한은 금통위원 3분의 1, 야당이 뽑자"

그걸로 끝이었나. 아니다. 그 후 유동성을 엄청나게 늘리느라 재정건전성이 악화됐다. 출구전략을 마련해야 할 때가 됐는데도, 알아보지 못했다. 결국 시기를 놓쳤다.

2009년 3분기가 경기 바닥이었다. 경기상승기에 선행해서, 기준금리를 끌어올렸어야 한다. 경제학의 기초공식(MV=PQ)만 봐도 알 수 있다. 당시는 정부의 유동성 공급으로 통화량(M)이 늘어나는데도 경기가 나빠 화폐 유통속도(V)가 떨어지니까 경기가 나쁜 상황이었다. 총통화량(MV)는 크게 늘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경제가 좋아지면 V가 굉장히 빨리 늘어난다. 그럼, 바로 인플레이션이 된다. (가격(P)이 오른다는 뜻)

한마디로, 너무 풀린 유동성이 폭탄이었다. 그런데 이 문제를 미리 차단하지 못한 탓에,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 수준에서 7% 수준으로 튀어 올랐다. 이렇게 과열되는 게 경제운용을 잘 한 건가? 빵점이다. 진작에 통화량만 제대로 흡수했어도 경기과열도 없었고 물가대란도 없었고, 당연히 경기운용이 훨씬 쉬웠다.

그렇다면 한국은행이 왜 때를 놓쳤을까. 실력이 없어서? 아니라고 본다. 청와대의 눈치를 보느라 못한 거다. 통화금융당국이 정치적으로 변할 때, 독립성을 잃을 때 생기는 폐해를 우리가 지금 생생히 지켜보고 있다.

한국은행을 개혁해야 한다고 본다. 그 사람들이 청와대 지시대로 움직이느라 금리 낮춰야 할 때 오히려 올려버리고, 올려야 할 때 낮추는 황당한 짓을 하도록 해선 안 된다. 한은 직원이면 대단한 엘리트 아닌가. 그들의 자존심을 생각해서라도 개혁할 때가 됐다. 그리고 지금 벌어진 일에 대한 책임은 김중수 총재가 져야 한다.

▲ 이동걸 한림대 교수ⓒ프레시안(김윤나영)

프레시안: 한은 개혁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건가

이동걸: 물론, 제도적 개혁이라는 게 정답은 없다. 다만 지금의 금융감독기구가 정부 눈치만 보고, 할 일은 안 하고 있으니, 금융감독기구를 한은 밑에 넣자는 게 내 생각이다. 금융 부문에 대한 모든 감독권한을 한은에 집중시키고, 한은을 집중적으로 감독하자는 것이다. 한은이 지금도 사실상 유동성을 조절하면서 은행뿐 아니라 비은행 부문까지 제어하고 있지 않은가. 안될 것도 없다고 본다.

이렇게 통화금융 및 감독 권한을 한은에 주고, 금통위원의 3분의 1은 야당이 임명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야당 몫 금통위원도 있어야 한다. 헌법재판소 재판관도 일부를 야당이 지명하지 않는가. 그리고 이들 금통위원들이 국회에 정기적으로 보고를 하도록 하는 게 좋다. 어차피 한은이 정치적으로 논란을 낳고 있으니 정치적으로 해결해서 집중 감시하는 게 옳다. 

"마지막 보루는 결국 재정 건전성…감세 후유증이 두렵다"

프레시안: 기준금리와 맞물린 문제가 가계부채다. 지금처럼 늘어난 가계부채는, 설령 현 정부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터질 수밖에 없다.

이동걸: 가계부채가 아직 국가 경제를 위협할 수준은 아니라고 본다. 잠재적으로 상당수 부실이 생길 수 있고, 이로 인해 소형금융기관의 부실화가 이어질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한국경제저축은행 한두 곳이 넘어간다고 망할 수준은 아니다. 가계부채 문제를 단기적으로 개선하기 힘들지만 적어도 지금보다 더 나빠지지는 않게끔 하는 조치는 필요하다.

그리고 문제가 더 커지기 전에 단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가계부채 자체만으로는 치명적이지 않지만, 이게 재정건전성 문제와 겹치면 상당히 위험할 수 있다.

언제나 마지막 보루는 재정 건전성이다. 1998년, 김태동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과 함께 일할 때다. 당시는 IMF 구제금융 사태 직후라서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외국 투자자들이 청와대로 왔다. 당시 그들에게 투자유치를 할 때마다 우리가 한 얘기가 '우리나라의 재정 건전성을 보시오. 공적자금 집어넣어서라도 당신들이 손해 안 보도록 하겠습니다'였다. 그 말 한마디면 다들 '오케이' 했다. 재정 건전성이란 게 이렇게 중요하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만약 지금, 재정 건전성이 아주 좋다면 가계부채 문제가 심각하게 터져도 해결이 가능하다. 공적자금을 넣거나, 세금을 투입하면 된다. 그런데 지금 사정이 점차 안 좋아지고 있다. 외환위기 당시는 기업부실이 문제였고, 이게 해결되고 나니 가계부채로 전이됐다. 여기에 다음 정부는 과잉 부채 문제까지 짊어지게 된 형국이다.

기준금리를 제때 올리지 않아서 가계부채가 너무 늘어난 것, 또 현 정부의 부자 감세 정책으로로 재정 건전성이 나빠진 것 등이 서로 결합하면, 분명히 위험해진다.

▲ 이동걸 한림대 교수ⓒ프레시안(김윤나영)

'젊은 대기업'이 계속 생기는 미국 vs '젊은 기업'은 클 수 없는 한국

프레시안: 현 정부가 고집한 '저금리' 기조와 짝을 이루는 게 '고환율' 기조다. 이런 기조가 물가에 부담을 준다는 지적이 많다. 또 외환시장 관계자들은 정부가 고환율을 유지위해 시장개입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이동걸: 미국 내부 문제로 달러가 빠져나가면서 환율이 오르는 건 불가피하다. 그런데 중장기적으로 보면, 한국이 계속 엄청난 무역 흑자를 내면서 외환보유고가 늘어나는 상태인데도 고환율이 유지된다는 것은 너무 인위적이다.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정말 고환율로 수출 경쟁력이 유지 되나. 이것도 따져봐야 한다. 나는 아니라고 본다. 정부의 고환율 정책으로 대기업만 배불리고, 중소기업과 서민은 피해를 입는 것은 결코 정상이 아니다. 대기업은 이제 스스로 경쟁력을 높일 때가 됐다. 어차피 지금도 정부의 연구개발 지원은 대부분 대기업이 혜택을 누리게끔 돼 있지 않은가. 여기에 가격 경쟁력까지 정부가 챙겨줄 필요는 없다. <포춘>이 선정한 500대 기업 목록을 보면, 창업주 당대에 이 리스트에 들어온 미국 기업이 월마트, 마이크로소프트 등 5~60곳이 넘는다. 이게 미국의 경쟁력이다. 반면, 한국은 새로 창업한 기업이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어느 수준 이상은 크질 못한다. 전부 재벌이 쌓아놓은 기득권의 벽을 넘을 수 없다.

또 원화 평가절상을 해야 해외투자에도 좋다. 이 부분까지 염두에 두면 무작정 고환율을 고집하는 게 옳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전에는 '아' 했던 정부가 이제 와서 '어' 한다. 이게 '법치국가'인가?"

▲ 이동걸 한림대 교수ⓒ프레시안(김윤나영)

프레시안: 공직에 있을 때 금산분리 완화, 생명보험상장삼성과 관련된 쟁점에 많이 개입했다. 그러다가 결국 임기를 못 채우고 자리를 떠났다.

이동걸 : 금산분리 원칙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선 워낙 말을 많이 했다. 이젠 딱 한마디만 하고 싶다. 재벌이 금융기관을 거느리면, 시장경제가 왜곡된다. 평가받는 쪽이 재벌이다. 반대로 평가하는 쪽이 금융기관이다. '평가받는 쪽'이 '평가하는 쪽'을 인수하는 게 선수가 심판을 매수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이렇게 되면, 중소기업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국가경쟁력을 위해서도 몹시 해롭다.

노무현 정부 시절, 금감위 부위원장 직을 사퇴한 것은 구체적으로 삼성생명의 변칙적인 회계처리 때문이었다. 삼성생명이 보험감독 규정을 어기고 투자유가증권 평가이익을 주주몫으로 계상한 사실을 밝혀냈다. 이 문제를 제기하자, 주변 사람 대부분이 내 적이 됐다. 그래서 결국 자리를 떠났다.

삼성생명 상장 문제를 놓고도 대립이 있었다. 나는 생명보험사 상장 기준 문제가 노무현 정부의 최대 실패작이라고 본다. 이는 결국 생명보험사상호회사냐 주식회사냐의 문제다. 그런데 한국은 생명보험사를 주식회사로 시작했음에도 김영삼 정부 때까지 사실상 상호회사처럼 운용해 왔다. 김영삼 정부는 보험 계약자가 부담을 지는 대신 그들의 몫도 인정받는다고 이야기했었다. 생명보험사가 상장하면, 계약자에게 상장차익을 돌려줘야 한다는 주장은 그래서 나왔다. 계약자들이 실제로 부담을 짊어졌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생명보험사는 주식회사이므로 상장차익은 오로지 주주에게만 나눠져야 한다고 한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마치 상호회사처럼 보험 계약자가 부담을 짊어져야 한다던 김영삼 정부나, 주식회사이므로 보험 계약자에게 돌아갈 상장 차익은 없다던 노무현 정부 가운데 하나는 국민에게 사기를 친 셈이 된다. 정부의 말을 그대로 믿었던 보험 계약자들만 억울하게 됐다.

이런 역사를 경제부처에서 오래 일했던 관료들은 아주 잘 알고 있다. 이헌재 전 장관이 생명보험사 상장차익을 계약자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말했던 것은 이런 역사를 알기 때문이었다. 윤증현 장관이라고 해서 김영삼 정부 시절 보험 계약자들에게 했던 약속을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윤 장관은 과거 일은 전혀 모른다는 듯, 상장차익에서 보험계약자 몫을 싹 무시했다. 그리고 그 결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포함한 삼성생명 주주들은 횡재를 했고 보험계약자들은 눈물을 흘렸다. 나는 지금도 궁금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왜 윤증현 장관을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에 임명했는지, 그리고 윤 장관은 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말이다.

법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설령 정권이 바뀌더라도 정책에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민이 법과 제도를 신뢰할 리가 없다.

그런데 삼성생명 상장 문제나 저축은행 공동계정 문제를 보면, 예전에는 '아' 했던 정부가 이제 와서 '어'하는 형국이다. 이게 과연 법치국가인가 싶다. 

 

- 인왕산 鶴학巢소島도에서 최범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