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20대 60%가 동거 찬성

 "내가 그 기집애와 동거생활을 시작한 방은 우물보다 낮은 방이었다." 소설가 최인호가 1977년 발표한 중편 '두레박을 올려라'는 가출한 남자 대학생이 소매치기 여자와 지하실에서 동거하는 이야기다. 동거를 죄악시한 기성사회에 던지는 독설과 냉소가 소설 전편에 버무려져 있다. 그러나 소설은 반항아였던 남자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면서 마무리된다. '돌아온 탕아(蕩兒)'라는 구도가 소설의 밑그림으로 깔려있다.

▶2000년대 한국 소설에서 동거는 '방탕한 죄'가 아니다. 정이현 장편 '달콤한 나의 도시'에선 30대 여성이 일곱 살 어린 남자와 부담없이 함께 산다. '연하 남자친구가 끓여놓은 김치찌개'를 먹으며 행복해한다. 김사과 장편 '풀이 눕는다'에선 20대 여자가 부모에게 남자랑 동거하러 간다고 거침없이 선언한다.

▶TV 드라마에선 2003년 '옥탑방 고양이'부터 얼마 전 '개인의 취향'까지 젊은이의 '동거 로맨스'가 단골 메뉴다. '우리 결혼했어요'라는 프로도 미혼 남녀 연예인들이 알콩달콩 살아가는 동거생활 이야기라서 '동거 권하는 TV'라는 소리를 들었다. 이런 문화환경 때문에 요즘 대학가 원룸이나 자취방에선 '동거 커플'이 낯설지 않다고 한다. 한 사이트가 대학생 1167명에게 물었더니 43%가 '이성친구와의 동거'에 찬성했다.

통계청이 엊그제 발표한 2010년 사회조사에서 20대 59.3%가 '결혼하지 않더라도 함께 살 수 있다'고 답했다. 남자가 44.6%로 여자 36.6%보다 조금 높았다. 2008년 어느 결혼정보회사 조사에서도 59%가 혼전 동거에 찬성했을 정도로 세태가 변했다. 실제로 동거 커플은 방값을 나눠 부담해서 좋고, 외식비와 유흥비도 줄어 일거양득(一擧兩得)이라고 한다.

프랑스에선 1980년대부터 동거 커플이 늘어났다. 성개방 풍조 때문만이 아니라 취업난으로 결혼과 육아 능력이 없는 커플이 는 탓이다. 프랑스 정부가 99년부터 동거 3년이 넘은 커플은 사실혼관계를 인정해 주는 '시민연대협약'을 펼친 이후 세금과 출산 정책에서 결혼한 부부와 동거 부부 차별이 없어졌다. 우리 사회 동거 풍조에는 청년실업 증가와 여성의 결혼 기피증이 맞물려 있다고 한다. 이대로 가다간 주머니 사정 때문에도 동거를 선택하는 커플이 늘어나게 된다. 한국판 '시민연대협약'이 등장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느낌이 든다.

[태평로] '못난 남자'와의 결혼을 許하라

  박은주 문화부장

"내 딸이 저렇게 되면 좋겠지만, 내 아들이 저 꼴 되는 건 싫어."

며칠 전 방한한 호주의 줄리아 길라드 총리는 정말 '잘난 여자'다. 이민자 광부의 딸로 태어나 호주 사상 첫 여성·이민자 출신 총리가 됐고, 성향은 페미니스트에 용모는 수려하다. 누구나 그런 딸을 갖고 싶어할 만하다. 그런 그녀는 외국 순방을 다니면서 '동거남'과 동행한다. 2006년 미용사와 손님으로 만났는데, 남자가 미용사였다. 그 남자가 이번에 한국에도 따라왔다.

정치인이 동거를 한다는 것은 호주에서도 흔쾌히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은 문제인 것 같다. '동거남' 팀 매티슨은 총리를 만나러 유효기간이 지난 출입증을 들고 국회의사당에 갔다가 출입을 저지당한 적도 있다. 누군지 뻔히 알면서도 '총리 동거남'을 출입정지시킨 그곳 공무원의 고지식함이나, 그런 불편에도 불구하고 법률혼을 거부하는 옹고집이나 둘 다 용호상박(龍虎相搏)이다.

한국이라면 어땠을까. 동거는 꿈도 못 꿀 일이고, 혹 남자 직업이 변변치 않았다면 누군가 기업체 고문 자리라도 하나 만들어주며 '신분 세탁'을 권했을 것이다. 한국 재벌가도 빈한한 사돈을 맞으면 납품업체라도 하나 차려줘 '사장님' 명함을 파게 만든다. 길라드 총리의 동거남 역시 얼마 전 부동산개발회사 판매직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새 직업도 사회적 통념상 총리 남편 직업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걸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호주는 참 희한한 나라'라고 했다. "잘난 마누라 따라 저렇게 다니고 싶을까" 하는 얘기도, 심지어 "남자 망신"이라는 말도 나왔다. 주로 남자들 반응이 그렇다.

자, 그럼 이것이 단지 한국 마초(남성우월주의자)만의 반응일까. 지난 1985년 여성지를 달군 '사건'이 있었다. 명문여대 졸업생과 초등학교 중퇴 풀빵장수가 부부가 된 것이다. 두 사람의 사연은 매스컴에서 떠들썩하게 다뤄졌는데, 이 학교의 일부 학생들은 "우리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이라며 풀빵 불매 운동을 벌였다고 한다. 매우 우스운 일화지만, 이게 그저 과거지사만은 아니다.

지난해 미국에서는 석사학위 이상의 학위를 취득한 여성의 누적 숫자가 1057만명으로 남성(1048만명)을 앞섰다. 우리나라에서도 석사학위 소지자 비율은 남성과 여성이 51% 대 49%이고, 이 수치는 곧 역전될 가능성이 크다. 한마디로 여성들의 가방끈이 유례없이 두꺼워지고 길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여성들의 가방끈이 길어질수록 비혼(非婚) 비율은 높아진다. 25~29세 여성의 비혼 비율은 1975년 11.8%였으나 2005년에는 59%로 높아졌다. 지금은 그 비율이 더 높아졌을 것이다. 결혼보다 자기실현이 더 좋아서, 결혼해서 얽매이고 싶지 않아서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러나 '솔직히' 털어놓는 이유 중 하나는 '나보다 잘난 남자가 없어서'다. '대졸 남자와 중졸 여자' 혹은 '고졸 남자와 국졸 여자'의 결혼은 우리 아버지 세대에서는 결코 낯선 모습이 아니었다. 신붓감은 남자보다 좀 못한 듯해야 양가(兩家)가 만족해했다. 그러나 여성의 학력과 지위가 이렇게 비약적으로 높아지는 상황에서 여자 입장에서 '여자보다 조건이 나은 남자'를 찾기란 쉽지 않다. 고학력 집단 여성들의 사내결혼 비율과 비혼 비율이 높은 게 이를 반영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남녀평등을 향해 수직상승하고 있는 여성들이 결혼만은 아직도 '꽃가마'의 추억을 잊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20대富農들 `농업의 재발견` 자부심
한손엔 삽ㆍ한손에 태블릿PC로 매출10억 "아그리젠토 코리아 우리가 주도"
"음료에 균이" 따지던 외국인이 나중엔 "원더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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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오후 서울 양천구 목1동에 있는 한 사무실에서 "젊은 부농" 송새롬 씨(가운데)와 올해 이 회사에 입사한 직원들이 상품을 들어보이며 웃고 있다. <김호영 기자>

"농업에 미래가 없다고요? 희망이 없었으면 애초에 시작도 안 했을 겁니다. 농사꾼은 옛말, 농민은 이제 `농업 경영인`이고 농장은 `농업 기업`입니다. 더 많은 젊은 농부들과 힘을 모아 농촌을 새롭게 바꾸고 싶습니다."

최근 경북 안동시 풍천면에서 만난 농업인 유화성 씨(28). 흙이 잔뜩 묻은 작업복 차림인 그의 손에는 태블릿PC 갤럭시탭이 들려 있었다. 태블릿PC로 온라인 쇼핑몰에 올라온 상품 주문을 처리하고 택배 배송을 확인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유씨는 농지 약 13만㎡(4만평)에서 마(麻)를 연간 150t 생산해 15억원대 매출을 올리는 젊은 부농(富農)이다.

2006년 말부터 마 재배에 나선 그는 시행착오 끝에 2008년 `마 캐는 젊은 농부들`이라는 브랜드를 론칭하고 인근 20대 젊은 마 재배농가 5곳과 함께 온ㆍ오프라인 시장 확보에 나섰다. 비싼 마를 품질별로 세분화해 `알뜰마` `꼬마` 등 이름으로 출시해 온라인 쇼핑몰에서 대박을 터트리는 등 작년 매출액은 15억원에 달한다. "농촌엔 할 일이 무궁무진합니다. 생산ㆍ유통ㆍ홍보ㆍ회계 등 분야별 전문성을 높여 100억원대 매출을 달성하는 `농업 오너`가 될 겁니다."

`스마트한` 20대 부농들이 등장했다. 사양산업이라 여겨지던 농업 분야에서 남다른 도전정신과 아이디어, 스마트함으로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해 부를 일구는 젊은 농부들이 늘고 있다. 이들은 생산에만 집중했던 예전 농민과 다르다. 체계적인 영농기술을 익히는 것은 기본. 경영인 마인드로 무장하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활용해 마케팅을 벌인다. 국내는 물론 외국까지 유통망과 판로를 개척하며 `영업맨`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전남 보성군 보성읍에서 약초를 재배하는 송새롬 씨(29ㆍ여). 법조인을 꿈꾸는 법학도였던 송씨는 2009년 8월 벤처 농업인으로 변신했다. 산에서 채취한 50여 가지 약초를 전통 옹기 1000여 개에 3~6년간 숙성시킨 전통음료 `산야초`가 주요 상품. 농민 딸인 송씨는 창고에 재고가 잔뜩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세계시장에서 먼저 인정받겠다`는 결심으로 겁 없이 국외 영업에 뛰어들었다.

송씨는 직접 제작한 제품 카탈로그, 제조ㆍ생산공정 설명서를 들고 지난해 한 달에 세 번꼴로 중국 일본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국가뿐 아니라 발효식품에 익숙지 않은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 바이어를 직접 만났다. 대형 마트에서 시음료ㆍ판촉 행사도 벌였다.

"문전 박대도 수없이 당했고 `음료에 어떻게 균(菌)이 있느냐. 비위생적이다`고 항의하는 외국인 바이어한테 너무 화가 나서 호텔 로비에 따로 불러내 발효식품이 건강에 얼마나 좋은지 조목조목 따졌죠. 나중엔 `원더풀`이라며 사과하더군요."

지난해 수출액 100만달러(약 10억원)를 올린 송씨는 "프랑스 독일 등 유럽시장을 반드시 뚫고 싶다. 올해는 최소 150만달러 수출을 달성할 것"이라며 "농촌엔 젊은 친구들이 많이 필요하다. 20대와 함께 농업 아이템으로 사업을 확장해 나갈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그 첫 시도로 송씨는 지난해 중반 서울 양천구 목동에 사무실을 차리고 올해 초 법인을 설립해 20대 직원 3명을 고용했다. 이곳에서 일하는 김현우 씨(25ㆍ중앙대 식품공학과 졸업)는 "농업은 시장성이 충분한 분야"라며 " `뷰티`와 `헬스`를 키워드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겠다"고 말했다.

젊은 부농들에겐 열정과 긍정적인 사고라는 DNA도 빼놓을 수 없다.

전북 김제시 소재 2만1400㎡(약 6500평) 규모 농장에서 토마토를 재배하며 매일 땀을 흘리는 허정수 씨(24). 올해 매출 10억원을 목표로 하는 허씨는 "농민들은 정부 지원을 받는 보호 대상이라는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항상 새로운 트렌드를 확인하고 공부한다. 농촌 미래를 짊어진다는 자부심으로 일한다"고 말했다.

유씨도 "젊은 농부일수록 세계를 무대로 승부해보겠다는 도전적인 사고를 가져야 한다"며 "농업은 2차 가공식품뿐만 아니라 관광이나 레저 등과 연계해 문화상품으로도 개발할 수 있고, 농업을 소재로 `삼성 에버랜드` 같은 문화레저 단지를 만들지 말란 법도 없다"고 말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작년 말 농가 가구당 소득은 3212만원. 한국 농수산대학교에 따르면 `20대 농부` 작년 평균 소득은 7447만원으로 집계돼 2배가 넘었다.

김윤식 경상대 농업경제학과 교수는 "농업은 미래가 밝은 산업이고, 일본 원전 방사성 물질 누출 사건에서 알 수 있듯 안전한 먹을거리에 대한 소비자 관심은 앞으로 더 커질 것"이라며 "고급 농산물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어 고부가가치 농수산식품이 성공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고 있다"고 말했다.

장광진 한국농수산대학 특용작물학과 교수는 "농업 성공 사례만을 벤치마킹하는 것이 아니라 체계적인 농업 교육 프로그램이 마련돼야 한다"며 "처음 농업을 시작한 3~4년간은 농업 기술과 이론을 현장에 접목시킨다는 생각으로 장기 플랜을 짜야 한다"고 조언했다.

매일경제신문은 농업 분야 경쟁력 제고를 위해 농림수산식품부ㆍ농수산물유통공사(aT)와 함께 오는 6월부터 매달 혁신성이 우수한 농수산식품을 선정해 `아그리젠토상(賞)`을 시상한다. 농수산식품 분야에서 신기술 제품을 발굴하고 판로를 개척하기 위한 것이다. 수상 대상은 최초 판매일 3년을 경과하지 않은 신제품과 신기술로 원예 축산 수산 식품 등 농수산식품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

[임영신 기자]

 

 

[국가상징거리 보면 그 나라가 보인다] 광화문광장엔 '대한민국'이 없다

 2011.04.24 11:23 / 수정 : 2011.04.24 13:17
영국 트라팔가 광장에서 본 국가상징거리. 넬슨 동상이 국회의사당과 빅벤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서울 광화문광장의 분수가 다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시원하게 솟구치는 물줄기만 보고 있어도 가슴이 상쾌해진다. 2009년 8월에 탄생한 광화문광장은 국가상징거리의 출발점이자 중심이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국가상징거리는 광화문에서 한강까지 7㎞ 구간. 이 중 광화문광장은 서울시장 오세훈의 작품이다.

국가상징거리의 핵심은 광화문광장에서 시청 앞 서울광장에 이르는 구간이다. 광화문광장에 대한 비판이 3년째 끊이지 않고 있다. “광화문광장의 정체성이 의문시된다” “광화문광장에서 대한민국은 완전 실종되었다”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무엇을 보여주려고 하나?” 등이 비판의 주된 흐름이다. 광화문광장은 무엇 때문에 이런 비판을 듣게 되는 것일까. 광화문광장에서 빠져 있는 것은 무엇일까.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트라팔가 광장까지


영미식 국제 질서를 만들어낸 영국 수도 런던으로 가보자. 런던의 국가상징거리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옆길에서 시작해 트라팔가 광장에 이르는 약 1㎞ 정도의 길이다. 이 거리가 화이트홀(white hall)이다. 영국의 국가상징거리는 트라팔가 광장에서 완성된다.

한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했던 영국의 국가상징거리를 걸어보자.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주로 왕족의 유해가 묻혀 있는 성스러운 공간. 그 옆에는 팔리아멘트 광장이 있다.

팔리아멘트 광장에는 영국사에서 중요한 인물의 동상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동상이 윈스턴 처칠 총리다. 프록코트를 걸친 채 지팡이를 짚고 있다. 노년의 처칠 그대로다. 처칠 동상의 진수는 뒤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굽은 허리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처칠의 시선은 국회의사당을 향한다.

처칠 동상을 뒤로 하고 트라팔가 광장을 향해 걸어간다. 도로 양옆에는 재무부, 외교부, 다우닝가, 국방부, 해군성, 트라팔가 극장이 몰려 있다. 다우닝가(街) 10번지는 영국 총리의 관저. 다우닝가로 들어가는 입구는 언제나 철문으로 잠겨 있다. 총리가 드나들 때만 이 철문이 열린다.

화이트홀 거리의 중앙 분리대에는 두 개의 기념비가 있다. 다우닝가 못 미쳐, 즉 외무성 앞에 있는 기념비는 세노탑(cenotaph)이다. 영국을 위해 희생한 사람 중 유해를 외국에서 영국으로 봉환하지 못한 이들을 기리는 탑이다. 두 번째 기념비는 다우닝가 입구를 지나 정부 청사 앞에 있다. 2차 세계대전 여성 기념비(Monument to the Women of World War 2). 영국 총리는 관저를 드나들 때 반드시 두 탑 중 하나를 볼 수밖에 없다.

런던 시민들은 국가적 경사가 있을 때 화이트홀 거리에 운집한다. 물론 최종 목적지는 트라팔가 광장이다. 1945년 5월 7일 그날도 그랬다. 독일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날이다. 2차대전 승전일에 런던 시민들은 화이트홀에 몰려들어 “빅토리(승리)”를 외치고 영국 국가를 부르며 트라팔가 광장까지 행진했다.

트라팔가 광장. 섬나라 영국은 두 번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트라팔가(trafalgar)는 이베리아반도 끝에 있는 곶. 1805년 넬슨 제독은 함대를 이끌고 트라팔가 곶에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의 연합함대와 건곤일척의 해전(海戰)을 벌였다. 넬슨은 세계 해전사에 길이 빛나는 승리를 거뒀고 기함(旗艦)에서 영웅적인 최후를 맞았다.

트라팔가 해전의 승리가 없었다면 대영제국 건설은 꿈도 꾸지 못했다. 영국 정부는 1830년대에 트라팔가 광장을 조성했다. 중심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넬슨 동상을 얹어 놓았다. 넬슨 제독은 화이트홀 거리를 응시하는 모습이다.

대영제국은 2차 세계대전을 끝으로 해체되었지만 영국은 여전히 영연방을 이끌고 있다. 제국주의 시절 영국의 식민지로 있었던,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나라들이 영국을 중심으로 뭉친다.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영연방 체육대회가 대표적이다.

팔리아멘트 광장에 있는 처칠은 나치 독일의 히틀러에 당당히 맞서 영국을 구한 2차대전의 영웅이고, 트라팔가 광장의 넬슨은 나폴레옹으로부터 영국을 지켜낸 바다의 영웅이다. 영국의 오늘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워싱턴 기념탑에서 본 회상의 연못과 링컨기념관(좌)·워싱턴 국가상징거리 개념도

미국, ‘내셔널몰’ & 펜실베이니아 애비뉴

미국의 수도 워싱턴DC로 시선을 옮겨 보자. 워싱턴의 상징거리는 두 개이다. 두 개의 상징거리는 모두 국회의사당에서 출발한다. 하나는 국회의사당에서 링컨기념관에 이르는 ‘내셔널몰’이고, 다른 하나는 의사당에서 백악관에 이르는 펜실베이니아 애비뉴이다.

국회의사당에서 링컨기념관에 이르는 넓은 길로 접어들어가 보자. 웅대한 공공건물이 여유있는 간격으로 늘어서 있다. 항공우주박물관, 허시혼미술관, 자연사박물관, 예술산업관, 아메리카역사박물관, 홀로코스트기념박물관이다. 20세기 세계제국을 이끌어온 미국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방문객의 옷깃을 여미게 하는 공간은 건국 대통령 조지 워싱턴을 기리기 위해 세운 워싱턴기념탑(Washington Monument). 고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본떠 만들었다. 높이는 168m. 워싱턴기념탑 위에는 기다란 직사각형 연못이 있다. 회상의 연못
(Reflecting pool)이다.

왜 회상을 요구할까. 연못 왼쪽, 그러니까 백악관이 있는 쪽에는 베트남전 전몰자 위령비가 조성되어 있다. 연못 오른쪽에는 한국전쟁 전몰자 위령공원이 있다. 우중에 판초를 입고 행군하는 미군들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이곳에 오면 국가는 왜 협회와 다른지가 오감으로 느껴진다. 또 애국심은 어떻게 생성되는지 깨닫게 된다.

링컨기념관은 내셔널몰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 계단을 올라 링컨기념관 입구에서 내려다보면 연못과 워싱턴기념탑이 보인다. 링컨기념관은 규모와 위치로 인해 보는 이로 하여금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1922년에 세워진 링컨기념관은 당대 미국 최고의 건축가, 조각가, 화가가 공동으로 참여했다. 미국인이 16대 대통령 링컨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이 기념관에 녹아들었다. 링컨은 자동차, 지폐 등에 이름과 얼굴을 빌려주고 있다. 미국인은 하루도 링컨을 만나지 않고 살 수 없다는 말은 이래서 나왔다. 링컨기념관 뒤편은 포토맥강. 이 강변에는 제퍼슨기념관, 루스벨트기념관, 케네디센터 등이 위치했다.

다른 하나는 펜실베이니아 애비뉴. 이 길은 국회의사당에서 출발해 1600번지의 백악관까지 이어진다. 미국 대통령이 때로 큰 기념일에 걷기도 하는 길이다.

이 구간에는 다른 나라의 상징거리와 마찬가지로 국립미술관, 노동부, FBI(연방수사국), 법무부, 상무부 등 주요 공공기관이 들어서 있다. 펜실베이니아 애비뉴 한복판에 국가기록원(NARA)을 두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점이 많다. 미국이 기록문화를 얼마나 중시하는지를 보여준다.

국가기록원 길 건너에는 미해군 기념공원이 보인다. 미해군, 해병대, 해경, 그리고 상선 선원을 기리는 공간이다. 이 기념공원에서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조형물은 ‘고독한 선원(The Lone Sailor)’ 동상. 배에서 막 육지에 내린 선원. 고대하던 뭍을 밟았으나 어디로 가야할지를 모르는 표정이 물씬 배어나온다. 바다를 무대로 생애를 보낸 사람들은 누구나 여기서 위로를 받게 된다.

법무부 옆에 있는 ‘역사적 장소(Historic Site)’는 1865년 포드극장이 있던 곳이다. 링컨 대통령을 아는 사람이라면 ‘1865년 포드극장’이란 말에 금방 어떤 일이 일어난 장소인지를 상상할 수 있다. 대통령 링컨은 1865년 4월 14일 포드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하다 남부 지지자의 총을 맞고 사망했다.

펜실베이니아 애비뉴에서 미국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은 자유광장(Freedom Plaza). 웨스턴광장이라고도 불리는 이 공간은 마틴 루터 킹 목사를 기리기 위해 조성됐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나에게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로 세계를 감동시킨 흑인인권 운동가. 그는 1963년 8월 28일 연설원고를 광장에서 가까운 윌라드호텔에서 작성했다. 현재 자유광장은 이름처럼 정치 집회장소로 유명하다. 댄 브라운의 밀리언셀러 소설 ‘잃어버린 심벌’에서 이 공간이 묘사된다.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거리. 콩코르드 광장에서 본 개선문.


프랑스, 개선문에서 콩코르드 광장까지

프랑스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는 국가상징거리로 가장 자주 언급된다. 서울에 국가상징거리 조성을 추진하는 정부 당국도 샹젤리제 거리를 연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표적인 구간은 개선문에서 콩코르드 광장에 이르는 샹젤리제 거리.

먼저 개선문과 그 주변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개선문 둘레는 샤를 드골 광장이 조성되어 있고, 샤를 드골의 동상이 서 있다. 샤를 드골은 개선문 앞에서 1945년 파리 해방을 선언했다. 1차대전 승전 퍼레이드가 개선문을 지났고, 빅토르 위고의 시신이 이 문을 지났다. 개선문 바닥에는 1차대전 참전 무명용사들의 무덤이 조성되었다. 개선문에서는 12개의 도로가 방사형으로 뻗어나간다. 12개 도로의 이름은 전쟁을 지휘한 장군들의 이름을 붙였다.

샹젤리제 거리와 콩코르드 광장이 만나기 직전에 작은 광장인 클레망소 광장이 있다. 클레망소는 ‘프랑스의 호랑이’라고 불렸던 정치인 겸 언론인이자 1차 세계대전 당시 육군 장관으로 프랑스를 승리로 이끈 인물. 클레망소 광장은 2차대전 당시 독일에 점령당했던 파리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준다. 전시장 ‘그랑 팔레’를 둘러싼 길에는 연합국이었던 영국과 미국에 대한 감사를 드러낸다. 당시 미국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이름을 딴 지하철 역사와 거리가 있다. 미국의 전쟁 영웅인 아이젠하워가도 보인다.

영국을 구한 영웅 윈스턴 처칠 거리도 있다. 우방국 지도자에 대한 경의를 프랑스는 이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콩코르드 광장은 파리에서 가장 큰 광장. 프랑스대혁명 이후 기요틴(단두대)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혁명광장으로도 불렸다. 이후 화합이라는 뜻의 콩코르드 광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샹젤리제 거리는 프랑스대혁명(1789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20세기까지의 프랑스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프랑스대혁명, 나폴레옹 시절,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파리 해방이 동상, 거리 이름, 지하철 역사 이름 등으로 남아 끊임없이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다.

캐나다, 국회의사당 앞의 웰링턴가

캐나다의 수도는 오타와. 미국과 전쟁을 벌이기 전 캐나다의 수도는 킹스턴이었지만 수도가 미국 국경 코앞에 있어 방어에 취약점을 드러냈다. 그래서 내륙 쪽으로 수도를 옮긴 게 지금의 오타와이다. 즉 오타와는 행정수도이다.

오타와의 상징거리는 국회의사당이 있는 팔리아멘트 힐(의회 언덕)의 앞길인 웰링턴가(街). 캐나다는 의원내각제 국가이므로 총리 집무실이 국회의사당 내에도 있다. 총리가 국회의사당 내 집무실에서 정면으로 걸어나오면 웰링턴가와 만난다. 총리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대법원이 보인다. 대법원 바로 옆에 법무부가 자리잡고 있다.
다시 시선을 왼쪽으로 돌리면 전쟁기념탑(Memorial War Tower)이 보인다. 이 탑 주변에는 365일 붉은 양귀비꽃 화환이 서너 개쯤 놓여있다. 기념탑의 3면에는 1차대전, 2차대전, 한국전쟁에서 자유를 위해 희생한 이들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 기록돼 있다. 2차대전 전승기념일(5월 7일), 6·25전쟁기념일 등에 탑 앞에서 기념행사가 벌어진다. 또한 매년 6월 25일 국회의사당 앞 잔디광장에서는 캐나다연방 국방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6·25전쟁기념행사가 성대하게 치러진다.

캐나다는 외침을 받아본 일이 없는 평화로운 나라다. 캐나다가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일원으로 국제 사회에서 역할을 한 것은 1차대전부터다. 이후 캐나다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도 참전해 자유를 지키기 위해 피를 흘렸다. 캐나다는 공산 침략을 받아 공산화 직전에 놓인 한국을 지키기 위해 516명이 목숨을 바쳤다. 그런 대한민국이 전후 세계사에 빛나는 성공을 이룬 것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긴다.

캐나다 총리 관저는 서섹스로(路) 24번지에 있다. 서섹스로는 오타와강을 따라 사행(蛇行)하듯 굽어져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한다. 총리 관저로 가려면 전쟁기념탑을 오른편에 두고 좌회전해야 한다. 리도운하 옆에는 고딕식 고색창연한 호텔이 있다. 오타와에서 가장 고급인 샤토 로리에 호텔이다. 로리에는 캐나다의 총리를 지낸 인물. 총리관저로 가는 길목에 정부 부처 건물인 코넛빌딩이 보인다. 이 빌딩을 조금 지나면 미대사관 건물이 있다. 미대사관 건물에는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전쟁박물관이 있었다. 전쟁박물관은 공간이 협소해 신축건물을 지어 이전했다. 전쟁박물관 뒤쪽으로 국
립현대미술관이 자리잡고 있다.
텐안먼 광장에서 국기게양식을 하는 모습

중국, 장안대가의 톈안먼 광장엔…

21세기 패권국가로 급부상 중인 중국 베이징으로 장소를 옮겨본다. 베이징의 국가상징거리는 장안대가(長安大街). 그 핵심 구간은 동단(東單)과 서단(西單) 사이다. 이 거리에 인민대회당, 톈안먼, 자금성, 마오쩌둥기념당, 국가박물관, 공안국, 국가대극원(오페라하우스), 왕푸징 거리가 있다.

베이징에 반나절만 머무는 관광객이라도 반드시 안내되는 곳이 톈안먼 광장이다. 마오쩌둥 초상화가 걸려있는 곳이 톈안먼. 그 앞쪽이 톈안먼 광장이다. 베이징의 국가상징거리에서 중국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은 역시 톈안먼 광장이다. 톈안먼 광장 한복판에는 인민영웅기념비가 있다. 톈안먼 입구와 인민영웅기념비 사이의 일직선상에 국기게양대가 있다.

10월 1일은 국경절.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 날이다. 중국인들은 이날을 전후해 일주일가량을 쉰다. 국경절 행사의 꽃은 톈안먼 광장 국기게양식과 3군 퍼레이드이다. 국기게양식은 오전 10시에 시작한다. 5분 전쯤 국기보위대 20여명이 입장하고 맨앞에 선 군인이 국기를 쫙 펴는 세러머니를 연출한다. 오성홍기가 천천히 게양대에 올라가는 광경을 후진타오, 원자바오 등 국가최고지도부가 지켜본다.

게양대에 나부끼는 오성홍기(五星紅旗). 이것을 시작으로 국경절 행사가 개막된다. 퍼레이드를 위해 장안대가 전 구간의 교통이 차단된다. 육·해·공군 병기 퍼레이드는 장안대가 동쪽 끝에 있는 국제무역센터 앞길에서 출발해 장안대가를 행진해 톈안먼 광장에 와서 집결한다. 10월 1일 국경절 행사의 총감독은 중국이 낳은 세계적 영화감독 장이머우. 중국 정부가 이 행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5년째 베이징에 거주하고 있는 직장인 유서영씨는 국경절 오성홍기가 게양되는 장면을 여러 번 보았다. 유서영씨는 그때의 느낌을 이렇게 전했다.

“국기게양식을 보기 위해 매년 10만명의 인파가 톈안먼 광장을 찾을 정도다. 기수가 게양대 아랫부분에 묶여있는 오성홍기를 푸른 창공 속에 던지면 붉은 깃발이 한 치의 구김 없이 창공에 나부낀다. 이때 비장한 표정의 후진타오 국가주석, 원자바오 국무총리를 비롯한 국가 수뇌부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을 기린다. 이 장면에 현장에 있는 10만명의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국기게양식은 텔레비전으로 중계된다. 톈안먼 광장에 배치되어 있는 공공건물인 인민대회당, 마오쩌둥기념당, 국가박물관(혁명박물관)은 국기게양식의 배경화면이 된다. 아주 자연스럽게 이런 공공건물이 카메라 앵글에 들어와 시청자들의 의식에 박힌다. 마치 컴퓨터 게임의 PPL 광고처럼 말이다.

톈안먼 광장 주변의 공공건물 중 가장 최근에 생긴 게 2007년 말에 준공한 국가대극원(國家大劇院)이다. 우리말로 하면 오페라하우스다. 국가대극원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개관했다. 오페라는 음악, 연극, 미술 등이 결합된 대표적인 종합예술.

중국 정부가 장안대가에 오페라하우스를 지은 것은 문화·예술 또한 발전시키겠다는 선언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톈안먼 광장에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있다. 톈안먼 입구에 걸려 있는 마오쩌둥 초상화. 톈안먼 광장에 들른 관광객들이 반드시 둘러보는 곳이 자금성. 중국 황실의 옛 궁전을 보려면 마오 초상화 밑으로 난 문을 통과해야 한다. 이것은 서울의 광화문광장에서 경복궁을 보려면 광화문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과 같은 구조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지도자로 평가받는 사람이 청나라 황제 강희제. 중국 정부는 강희제 동상을 톈안먼 광장에 세우지 않았다. 강희제는 중화인민공화국과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자금성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마오의 거대한 초상화를 배치해 청조시대와 분명한 구분을 짓고 있다. 마오는 중국의 조지 워싱턴이다.

영국, 미국, 프랑스, 캐나다, 중국의 국가상징거리를 살펴보면 한 가지 결론이 도출된다. 국가상징거리는 그 국가의 탄생 역사, 전몰·희생자에 대한 감사, 국가의 이념과 가치, 그리고 미래비전을 보여주는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광화문 광장 전경. 현재 세종대왕 동상 뒤편의 꽃밭은 철거되었다.


한국, 국가상징거리로 육조거리 복원?

이런 관점에서 광화문광장을 보면 어떤가. 이순신 동상 뒤에 세종대왕 동상이 들어서면서 국가상징거리가 조선왕조시대로 회귀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가 없게 됐다. 육조거리 복원은 대한민국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광화문광장에는 대한민국 60년의 빛나는 역사가 없다. 공산세력의 침략에 맞서 자유 대한을 지키기 위해 피흘린 이들에 대한 감사도, 전쟁의 폐허 위에서 대한민국을 건설한 위대한 지도자에 대한 경의도 찾아볼 수가 없다.

김문수 경기지사는 지난해 여러 차례 광화문광장의 정체성 상실을 비판한 바 있다. 김문수 지사는 “2차대전 후 전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므로 광화문광장에 이승만·박정희 대통령 동상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로 언론인 손세일씨는 전화통화에서 “광화문광장은 대한민국의 심장이기 때문에 동상은 현대 한국의 상징물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들기로 하고 현재 문화관광부 자리에 박물관 공사를 진행 중이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국가상징거리가 시작하는 지점에 어울리는 공공건물이다. 하지만 국가관 부재가 빚어낸 광화문광장은 어찌할 것인가.
기자는 광화문광장을 볼 때마다 존 F 케네디의 말을 떠올린다. 케네디는 1963년 10월 27일 애머스트칼리지를 찾아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를 추모하는 추도사를 낭독했다. “어떤 나라는 그 사회가 기념하고 기억하는 인물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Why] 쫓겨나고 눈총받고… '드레스 코드'가 뭐기에

신라호텔 뷔페 레스토랑을 찾았던 한복 디자이너 이혜순씨가 한복 차림을 이유로 입장을 거부당하는 바람에 한동안 '드레스 코드(dress code)'를 둘러싼 논란이 뜨거웠다. 몇 년 전 국회에서도 강기갑 의원의 한복 차림, 유시민 의원의 흰색 면바지에 초록색 티셔츠 차림이 논란이 된 적도 있다. 드레스 코드란 자리의 목적에 따라 갖춰야 할 옷차림새다. 각계의 드레스 코드를 살펴보았다.

유시민 의원이 지난 2003년 국회 본회의장에 면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등원한 모습.
외교·국빈만찬

노태우 대통령 시절 남미 정상을 위한 청와대 만찬의 드레스 코드는 '세미 정장'이었다. 그런데 당시 김영삼 민자당 대표는 비서진이 드레스 코드를 잘못 이해해 혼자 배에 붉은색 띠를 두른 연미복 차림으로 행사장에 나타났다. 주한외교 사절 등 참석자들은 넥타이도 매지 않은 편안한 복장이었다. 만찬 후 상도동 자택으로 가던 김영삼 대표는 한강대교를 지나던 중 앞자리에 앉은 비서에게 "차 세워라. 뛰어내려라"고 했다는 일화는 지금도 종종 회자된다. 조태용 외교통상부 의전장은 "국빈만찬 등 연회 때 드레스 코드는 정장이 기본이며, 여자들의 경우 우리나라는 한복이나 정장드레스를 한다"고 말했다.

국회

2003년 재·보선에서 당선된 유시민 전 의원은 의원선서를 위해 등단했다가 의원들이 그의 복장을 문제삼으며 30여명이 퇴장하는 일도 있었다. 그로 인해 국회뿐만 아니라 방송 시사토론에서도 이 문제를 앞다퉈 다룰 만큼 드레스 코드 논란은 한동안 계속됐다. 신중돈 국회 홍보기획관은 "국회 본회의 출입을 위한 특별한 드레스 코드는 없다"며 "양복에 넥타이를 매는 게 관례였지만 강기갑 의원이 한복으로, 유시민 의원이 캐주얼 차림으로 등단하면서 복장 관행을 깼다"고 말했다.

호텔

신라호텔은 지난해부터 뷔페식당을 이용할 때 한복 입은 고객들을 대상으로 주의를 당부해왔다. 호텔 측은 뷔페식당 특성상 고객들의 불편을 줄이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한복치마가 길어 종종 다른 손님이 밟게 되고, 처진 소매가 음식에 닿는 등 불편함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번 논란과 관련해서도 호텔 측은 "입장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다"며 "직원이 주의사항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한복은 위험하다'는 말을 하는 바람에 문제가 커진 것"이라고 해명했다.

신라호텔뿐만 아니라 국내 고급호텔의 대부분 식당들은 복장 규정을 두고 있다. 제삼자에게 불편을 주거나 혐오감을 주는 차림은 제한한다. 슬리퍼나 핫팬츠 차림이 대표적인 경우다. 특히 프랑스 식당의 드레스 코드는 엄격하다. 그랜드힐튼 호텔 프랑스식당 '시즌즈'는 정장 차림이라야 입장이 가능하다. 23년 전 개장 때부터 입구에 드레스 코드를 명시해온 그랜드 하얏트호텔 클럽 'JJ마호니'는 군복이나 찢어진 바지 차림을 금한다. 그랜드힐튼 김정기 상무는 "호텔이 대중화되면서 특별한 복장 규정도 사라지는 추세지만 고급식당은 예약과 동시에 드레스 코드에 대해 묻는 것이 에티켓"이라고 말했다.

공연장

공연장에서도 복장을 두고 관객 출입을 제한하지는 않지만 세미정장 차림의 관람을 유도한다. 오페라나 클래식 공연에도 복장 제한규정은 없다. 하지만 핫팬츠나 힙합스타일의 복장을 하고 입장하는 관객들에 대해서는 주위를 환기시킨다.

골프장

골프장도 드레스 코드가 엄격한 편이다. 남자들의 경우 반바지 차림, 여자들은 지나치게 짧은 치마 차림은 제한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최근에는 반바지 차림에 대해 규정이 다소 완화되는 분위기다. 하지만 라운딩시 반바지를 입은 남성 골퍼는 반드시 긴 양말로 종아리를 가리도록 하고 있으며, 여자 골퍼들의 민소매 차림도 제한된다.

간호섭 홍익대 섬유미술패션디자인과 교수는 "드레스 코드는 서구만의 문화가 아니다. 우리나라도 예부터 의관정제(衣冠整齊)라는 드레스 코드가 있었다"며 "특정한 장소나 행사에 가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기본적인 차림을 하는 것이 서로에 대한 배려"라고 말했다.

 

“신도 ○○명, 권리금 ○천만원” 교인들도 놀라는 교회매매
일그러진 실태 살펴보니
‘교회 개척해서 되팔기’ 은밀한 거래 횡행
시설비용·신도수·위치 따져 ‘권리금’ 산출
인터넷에 매물 홍수…신도와 법적다툼도
한겨레 이충신 기자 메일보내기

부산의 ㅈ교회에서는 목사가 교회를 다른 목사에게 파는 과정에서 잡음이 일면서 목사와 신자가 법정 다툼을 벌이고 있다. 이 교회 사아무개 담임목사는 2009년 10월 교회를 2억5000만원에 팔기로 매매 계약을 했다가 파기했다. 한달 뒤 사 목사는 남아무개 목사에게 다시 1억원에 팔기로 하고 6000만원의 계약금을 받았다. 하지만 사 목사는 계약 이후 남 목사와 교회 신자와의 불륜을 폭로했고, 남 목사가 잠적하자 계약금만 챙기고 매매 계약은 없던 일로 해버렸다. 두번씩이나 교회를 팔려고 했던 사 목사는 결국 지난해 8월 이 교회를 2억500만원에 이웃 교회 목사에게 넘겼다. 사 목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ㅈ교회 인근에 같은 이름의 교회를 새로 개척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교회를 또 다른 목사에게 팔았다. 교회가 팔린 뒤 대부분의 교인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지금은 6명만이 남아 각 가정집을 돌며 예배를 보고 있다. 이 교회 한 집사는 “교회를 여러 차례 팔았다는 게 처음에는 소문인 줄 알았는데, 사실로 확인하고 나서는 너무 황당했다”며 “목사가 신앙이 아니라 직업으로서 목회직을 선택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한 집사는 사 목사가 교회를 파는 과정을 문제 삼다 사 목사에게 협박·공갈 혐의로 고소당했다.

최근 몇년 사이에 개신교계에서 교회를 사고파는 일이 크게 늘고 있다. 교회 신자 수까지 계산해 ‘권리금’을 받고 팔기도 하는 등 교회 매매가 일반 사업체를 사고파는 일 못지않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한겨레>가 19일 교회 부동산을 전문적으로 거래하는 인터넷사이트 ‘기독정보넷’(www.cjob.co.kr)을 살펴보니, 지난해 한해 동안 810여건에 이르는 교회 매물이 올라와 있었다. 올해 1월부터 4월14일까지 등록된 매물만 270건에 달했다. 이 사이트에 올라온 글은 크게 ‘교회 팝니다’와 ‘후임자 모십니다’로 나뉜다. 기독정보넷 관계자는 “‘교회 팝니다’는 교회 건물을 파는 것이고, ‘후임자 모십니다’는 교인들도 함께 거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모두 목사들이 내용을 올리고 연락처도 직접 적어놓는다”고 덧붙였다. 교회 부동산 매수자나 후임자를 찾는 인터넷사이트는 기독정보넷 외에도 기독나라, 기독교벼룩시장 씨에이플랜 등이 있다.

후임자를 찾는 글을 올린 목사들은 대부분 시설비를 요구한다. 시설비는 교회를 처음 세울 때 교단, 의자, 난방기 등을 설치하면서 들어간 비용이다. 시설비와는 별도로 ‘권리금’을 요구하기도 한다. 음식점 같은 일반 상가를 팔 때 길목이 좋은지, 손님들이 얼마나 찾아오는지를 반영해 권리금을 받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경기도 성남의 한 교회 목사는 교회 건물을 30억원에 내놨다. 이 교회는 대지면적 515㎡,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이다. 이 교회 목사는 ‘교회를 사고 싶다’는 기자의 전화에 “교인들도 이 건물에 다시 교회가 들어오면 마음이 편할 것”이라며 “교인 50여명도 (가격에) 포함됐다”고 말했다. 서울 송파구에 있는 개척한 지 1년 된 한 교회 목사는 보증금 2000만원, 월세 150만원에 세들어 있던 교회를 내놨다. 이 목사는 “처음에 교회 시설할 때 (돈이) 좀 많이 들어갔다”며 “교인 10명을 포함해 시설비와 권리금을 합쳐 1000만원”이라고 말했다.

인천 계양의 한 교회 목사는 “이번에 부천 쪽으로 가려고 했다가 취소했다”고 말했다. 자신은 부천으로 옮기고, 부천에 있던 목사는 인천으로 옮기려고 했는데 가격이 안 맞아 성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교인 수가 70여명인 이 교회 목사는 시설비로 7000만원을 고수했다가 얼마 전 6000만원으로 내렸다.

교회 ‘권리금’은 민감한 부분이어서 대부분의 목사들이 공개적으로 말하기를 꺼려, 직접 만나 비밀스럽게 흥정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재수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화해중재원 사무처장은 “교회 매매와 관련해 상담을 한 교인 사례가 두어 건 정도 있었다”며 “일부 목사가 교회를 개척하다 안되니까 투자한 자금을 받아서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문에 갈 데가 없어진 교인과 갈등이 더러 생긴다”고 말했다.

 

[기획 특집]시인의 집, 시 속의 집(1)
계간 시인세계
<기획 특집> 시인의 집, 시 속의 집(기사제공: 계간 시인세계)

오늘의 한국 시인들은 어디에 살고 있으며, 그들이 살고 있는 집의 의미는 무엇일까? 시인에게 시창작의 공간은 과연 몇 평이면 족할까? 시인이 거주하는 삶의 공간(집)이 창작의 공간과 같을 수는 없겠지만, 세계와의 유대와 자기 동일성이 형성되는 실존의 중심공간임은 분명할 것이다.

《시인세계》가 기획특집으로 마련한 <시인의 집, 시 속의 집>은 1500여 명에 달하는 시인들의 거주 현황을 확인 분류해보았다. 또한 고전시가를 포함한 한국시에 나타난 집의 변천과 의미를 살피고, 삶의 거처이자 창작공간으로서의 집에 대한 시인들(김영승, 함민복, 최영철, 장석남, 함성호)의 생각을 들어 보았다.

물론 이런 시인 지리지地理志가 시인의 내밀한 상상공간까지 그려내 보이지는 않겠지만, 주거와 창작공간으로서의 집(방)에 대한 시인들의 지리(공간)인식을 어느 정도 가늠해 보게 할 것이다. 아울러 온라인상에 새롭게 지어지기 시작한 시인들의 집(홈페이지, 블로그)도 탐방해 보았다.

가상과 현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혼재된 사회에서의 상상력을 미학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얻게 되는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이 새로운 가상의 집에서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시인과 시의 지리지地理志>
시인과 시의 지리지地理志


우 대 식

『산해경』을 번역한 정재서 선생은 Edward W. Said가 말한 상상적 지리(imaginative geography)라는 개념을 빌어와 『산해경』의 표층 체계를 설명하고 있다. 사이드에 의한 상상적 지리 인식이란 자신에게 가까운 것과 먼 것 사이의 거리와 차이를 극화劇化시켜 자기 중심의 사고를 강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신화적이고 설화적인 지리 인식이 오늘날 가당키나 한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시적 상상력이야말로 시공의 경계를 무화시키고 극화시킨다는 점에서 상상적 지리라는 개념은 우리 시를 이해하는 하나의 개념이 될 수도 있다.

시인에게 공간의 의미는 무엇이며 더 나아가 자신이 거주하는 집의 의미는 무엇인가? 개인적 경험에 의하면 시인들만큼 공간에 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진 자들도 드물다.

더불어 건축에 관한 관심이 전문가의 수준에 이른 시인도 적지 않다. 언젠가 내 손으로 집을 짓고 그 안에서 시를 쓰겠다는 욕망은 고전적이면서도 미래 지향적인 생의 지표를 보여준다. 그들이 지금은 어디에 살고 있는가? 어디에 살면서 상상적 지리 인식을 통해 공간을 무화시키고 극화시키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시인들이 지닌 공간에 대한 욕망의 지형도를 살피는 일이 될 터이다.

『택리지』야말로 조선 후기 사대부의 공간에 대한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명저일 터이다. 이중환은 실학의 대가 성호 이익의 재종손으로 30여 년의 긴 방황을 했던 인물이다. 이 책의 서문과 발문을 보면 당시 사대부들의 지리에 관한 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 성호 이익은 아래와 같은 서문을 썼다.

내가 늙어 죽게 되어 담비가 죽을 때 머리를 자기가 살던 둔덕 쪽으로 두는 것처럼, 쥐가 제 구멍을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이 강변 비습한 땅을 떠나지 못해 사대부가 살기 알맞은 곳으로 가지 못하니, 자기 자신을 쓰다듬어 더욱 서글퍼짐을 저절로 깨닫지 못한다.

사대부가 살기 알맞은 곳을 찾아 떠나지 못하고 생을 마치게 될 자신에 대한 연민을 이 글은 보여준다. 아마 많은 시인들이 지리地理에 대한 열망과 그 열망의 사그러짐 사이에서 갈등하고 시를 쓰고 있을 것이다. 사실 더 딱한 것은 당시 이중환의 처지이다. 목회경은 발문에서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청화자(필자 주:이중환의 호인 청화산인淸華山人의 준말)는 명문 자제로 젊은 나이에 과거에 올라, 문학과 재략이 온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진실로 왕업을 빛나게 하고 국론을 도울 만하였다. 벼슬길 또한 평탄할 것 같았는데, 불행하게도 문장 때문에 운명이 해를 받았음인가. 귀신이 시기하여, 먼 길 가는 수레를 문득 얽매어 죄는 것 같았고,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어 살 집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소론과 노론의 정쟁 속에서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지고 유배와 방랑을 거듭하며 평생을 살았던 이중환에게 자신이 이르는 땅은 바로 인심의 척도를 보여주는 기준점 역할을 했을 것이다. 오늘날 시인들도 많은 이동을 보여준다. 자신의 자리에서 그들이 느끼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문제는 인문지리에 해당하는 따라서 좀 더 큰 자리에서 다루어야할 과제이다.

이 글은 시인들의 거주지를 확인하고 그 의미를 소략하게 살펴보는 것이다. 주요 시인들이 활동하고 있는 한국시인협회의 주소록과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제공하는 문인수첩을 참고로 시인들의 거주현황을 분류해보았다. 여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음을 먼저 밝혀둔다.

일단 주소가 맞지 않는 부분도 여러 군데가 있어 아는 범위 내에서 수정하였다. 시인들 역시 살림살이를 하는 사람들이라 많은 이동이 있음을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다. 또한 직장으로 주소를 명기한 분들도 많이 있었음을 밝혀둔다. 그럴 경우 필자가 분명히 아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그대로 직장 주소를 집으로 수용하였다.

또한 동명이인의 경우가 있어 통계에 실수가 있을 수 있음도 밝혀둔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여기서 누락된 시인들이다. 즉 두 주소록에 없는 시인들은 통계 대상과 논의에서 제외되었다. 이러한 문제까지 염두에 두다 보니 애초에 논의를 진행할 수 없겠다 싶어 오로지 두 주소록을 바탕으로 글을 작성하였음을 먼저 밝혀두는 바이다.

지역 시인 수
서울 547
경기 274
대전 39
충남 38
충북 32
광주 50
전북 51
전남 26
제주 19
인천 37
강원 34
경북 31
경남 102
대구 69
부산 85
합계 1434

거주지 조사 대상 전체 시인은 총 1,500여 명이었다. 그 가운데 서울 거주 시인이 547명으로 전체 시인의 약 35%를 차지하고 있었다. 강남, 서초, 송파에 약 100여 명이 거주하고 마포, 영등포, 강서, 양천의 경우도 약 100여 명의 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도봉, 성북, 강북, 노원, 서대문, 동대문 등 강북 지역에 가장 많은 시인들의 주소가 산재해 있었다.

지역적으로 면적이 가장 큰 때문이라 생각되었다. 어쨌든 숫자상으로 서울은 시인들의 공화국인 셈이다. 따라서 일일이 거론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오장환은 해방 공간에서 병든 서울을 노래했다. 유하는 90년대 초반 시집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에서 세속도시의 징후를 적나라하게 풍자함으로써 탁월한 예지력을 보여준 바 있다. “투입구의 좁은 문으로 몸을 막 우겨넣는구나 글쟁이들과 관능적으로 쫙 빠진 무용수들과의 심리적 거리는, 인사동과 압구정동과의 실제 거리에 비례한다/걸어가면 만날 수 있다 오, 욕망과 유혹의 삼투압이여”(「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2」 부분).

유하가 이 시를 쓴 지 20여 년이 다 되어 가는 오늘날도 그 심리적 거리가 좁혀졌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작년에 시집 『곰곰』을 펴낸 안현미는 시구문에서 착란을 꿈꾼다. “나는 착란에 휩싸여요 죽은 사람들만 불러모아 사망자 주식회사를 만들고 영원히 죽고 싶은 나는, 시구문 밖, 봄 활짝 핀 착란이 그리워요”(「屍口門 밖, 봄」 부분).

시인은 어느 날 신당동에서 왕십리로 빠져나가는 시구문에서 푸른 하늘 아래서 모두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기이한(?) 광경을 목격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다짐한다. 서울에서 시인들이 부르는 노래는 불우의 연주이다. 그들은 현대적 의미의 유목민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잠시 딛고 있는 공간을 노래할 때면 벌써 눈이 충혈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경기도에는 약 270여 명의 시인들이 거주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그 가운데 일산이 40여 명으로 경기도에서 가장 많은 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인근의 고양, 파주의 시인까지 합한다면 그 수는 더 늘어날 것이다. 안양, 분당, 용인, 안산 등에 20여 명 안짝의 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미 타계한 기형도는 시흥 소하리 자신의 집으로 가는 안양천변을 묘사한 시 「안개」에서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고 쓴 바 있다. 개인적으로 ‘모두들’이라는 시구 앞에서 늘 나를 포함한 세계에 대해 연민을 갖게 되는 것은 내 못된 시 감상법 때문일 것이다. 경기도 일대에 많은 공장 지대들이 산재하고 있는 것은 산업화의 효율성 때문일 것이다.

『다시 쓰는 택리지』에서 신정일은 아래와 같이 일산을 묘사하고 있다.

고양시 일산구는 옛 시절 서울과 개성을 잇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1905년 경의선이 개통되었으나 일산 토박이들은 그 덕을 보지 못했다. 나라 안에서 실리와 계산이 가장 빠르다고 소문난 개성과 서울 상인들 때문이었다. 그 때 떠돈 말이 ‘실속 없는 일산 사람들’이었고, 일산 사람들은 두 도시 사람들로부터 받은 시달림으로 인해 말을 잘 듣지 않는 사람을 보면 “저놈을 개성으로 보낼까 서울로 보낼까”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도 옛말이다. 일산은 상전벽해, 그 말이 가장 적합하다 할 정도로 급속도로 도시화되었고 자유로를 통하여 서울로 들어오는 길은 가장 큰 규모의 국도를 뽐내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실정이다. 일산이라는 신도시에 많은 시인들이 거주하고 있지만 그곳이 고향인 시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공광규, 김사인, 김승희, 김지하, 문성해, 문태준, 박남희, 유종인, 유형진, 윤제림, 이문재, 이병률, 장무령, 조현석, 차창룡, 함성호, 배문성 등등 쟁쟁한 시인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손택수는 일산에 거주한 지 얼마 되지 않은가 보다.

“부산에서 일산까지/택배로 건너온 달,/환하게 기운 쪽에서 울컥/찡한 시장기가 치민다”(「대보름, 환하게 기운 쪽」 부분). 택배로 받은 대보름 부럼과 찰밥을 먹고 찌그러진 사과를 깎다가 씨앗을 먹이기 위해 사과 스스로가 찌그러졌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리고 찌그러진 달을 본다. 누군가 시인을 먹이기 위해 찌그러졌다면 그 사람은 단연 부모님일 것이다. 어찌 시장기가 치밀지 않겠는가?

안성에는 고은이 오래 전부터 터를 잡고 있고 장석주도 수졸재를 지키고 있다. 용인에는 박이도, 김윤배, 박해람, 박후기 등의 시인들과 분당에는 김태동, 심언주, 이나명, 이향지, 장인수, 박홍점 등의 시인들이 살고 있었다. 양평에는 박용하와 최근 이사를 한 장석남이, 안산에는 권형현, 배용제, 윤의섭 등이 있었으며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시인들이 경기도에 거주하고 있었다.

참조로 한 주소록에는 인천에 약 40명 남짓의 시인들이 있었다. 김영승, 박청륭, 이가림, 이경림, 장종권, 정공채, 김영산, 이세기, 주종환, 함민복 등의 시인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인천시 강화군에 거처하는 함민복의 시집 『말랑말랑한 힘』은 강화도 삶에 대한 보고서라 할 만하다. “옛날에 아버지는 숭어가 많이 잡혀/일꾼 얻어 밤새 지게로 져 날랐다는데 아무 물때나/물이 빠져 그물만 나면 고기가 멍석처럼 많이 잡혀/질 수 있는 데까지 아주, 한 지게 잔뜩 짊어지고/나오다보면 힘이 들어 쉬면서 비늘 벗겨진 놈/먼저 버리고 또 힘이 들면 물 한 모금 마시면서/참숭어만 남겨놓고 언지, 형님도 가숭어 알지 아느시껴”(「어민 후계자 함현수」 부분). 강화 사투리의 진득한 맛과 뻘밭의 생태를 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반도의 중앙에 해당하는 대전에는 40여 명 시인의 주소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김완하, 박진성, 손종호, 양애경, 이면우, 임강빈, 최원규, 황희순, 홍희표 등의 시인이 개인적으로 낯익은 이름들이었다.

일찍이 눈물의 시인인 박용래가 오류동 엽전을 노래한 곳이 바로 이 대전이었다. 오래된 시집 속에서 홍희표 시인의 「신탄진 장날」을 다시 만났다. “봄나물 앞에 쭈그리고 앉은/일흔 넘은 할머니의 한 마디/“워디 사람이 애초에 높낮이가 있남?”/인형가게 옆에 쭈그리고 앉은/일흔 넘은 할아버지의 한 마디/“워쪄 막걸리나 한사발 때려봐?””. 저 삶의 때가 그냥 벗겨져 나오는 장터야말로 우리가 잃은 것 가운데 가장 값진 공간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충남 역시 대전과 비슷한 40여 명 시인들의 주소지가 있었다. 천안, 공주, 서산, 논산, 홍성, 보령 등이 주요 주소지였다. 구재기, 김기중, 김순일, 나태주, 안수환, 유용주, 이정록, 임영봉 등의 시인이 낯익은 이름들이었다.

특히 서산 출생으로 서산에 관한 많은 시를 써온 김순일의 시는 서산의 여항 시정을 잘 담고 있다. “갯가 안흥 색시가 근친을 왔다 새 신랑의 품속에서/야들야들해진 갯가 색시가 생글생글 근친을 왔다/바다가 달을 품고 응어리진 멍울을 푸는 밤 갯가 처녀들이 모여앉아 첫날밤 얘기를 졸랐다/<보리누름에 우럭은 그래도 눈이나 뜨고 먹지…눈도 못뜨겠더라>/갯가 처녀들은 가쁜 숨을 감추며 군침만 삼키고 있었다”(「서산 사투리·4」 부분).
첫날 밤 이야기를 바닷가 풍물에 빗댄 이야기는 전통 서정의 해학적 정서를 잘 전달해주고 있다.

충북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낯익은 이름들은 김신용, 송찬호, 오탁번, 최금진, 함기석, 허의행, 도종환, 양문규, 이안 등의 시인들이다. 김신용은 최근 치열한 시정신을 쏟아놓고 있으며 오탁번은 제천 원서문학관에 터를 잡았다. 함기석은 청주에서 지속적으로 전위적인 시 작업에 총력을 쏟고 있으며 도종환은 문화예술위원회 시 집배원을 통해 시를 대중들과 함께 나누고 있다.

특히 도종환은 속리산 산방에 은거하여 아픈 몸을 치유하며 깨달은 「해인으로 가는 길」에서 “지난 몇십 년 화엄의 마당에서 나무들과 함께/숲을 이루며 한 세월 벅차고 즐거웠으나/심신에 병이 들어 쫓기듯 해인을 찾아간다/애초에 해인에서 출발하였으니/돌아가는 길이 낯설지 않다”라고 노래한다. 지친 육신으로 바라보는 절체절명의 세계가 잔잔하게 펼쳐 있는 역설적 비감을 맛보게 한다.

강원도에 주소를 둔 시인은 35명 안짝으로 집계되었다. 강릉과 춘천에 가장 많은 거주지가 있었다. 고진하, 김선우, 박기동, 송준영, 이상국, 권혁소 등의 시인들을 확인하였다. 이미 타계한 이성선이 “가장 추운 곳, 외로운 곳/말을 버린 곳에서/무일푼 거지로/최후를 마치리.”(「절정의 노래 1」 부분)라고 비장한 노래를 부르던 곳이 바로 강원의 땅이다.


이십 년이 다 된 권혁소의 시집 『논개가 살아온다면』의 후기에서 권혁소는 “누님, 저는 강원도가 되겠어요. 하늘을 믿고 땅을 믿으면서 비교적 연약한 저는 누님, 그래도 강원도가 되겠어요. (중략) 끈끈한 눈물로 시를 쓰면서 누님, 저는 건강한 강원도가 되겠어요”라고 다짐을 하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상응하는 자기 응시라고 오래 전 생각했었다.

경북을 주소로 한 시인들의 수는 32명이었다. 안동, 포항, 경주, 구미, 영주 등이 주요 주소지였다. 권선희, 서지월, 손진은, 안상학, 이위발, 권석창, 김만수, 배창환, 이종암 등이 개인적으로 낯익은 이름들이었다. “나는 요즘 주막이 그립다./첫머리재, 한티재, 솔티재, 혹은 보나루/그 어딘가에 있었던 주막이 그립다”(「안동소주」 부분)라고 노래한 안상학 시인이 안동에 있다.


2002년 경북작가회의 시선집을 펼쳐보면 곳곳에 바다가 출렁이고 있다. 이종암의 「수평선 다방」, 권선희의 「북어의 노래」가 그렇다. 특히 권선희의 사투리는 서정시의 진경을 보여주고 있다. “마르지도 젖지도 못한 사람들이 동동거린다”(「피데기」 부분)라고 구룡포 연작 시리즈에서 권선희는 바닷가 소식을 전해준다.

경남에는 많은 시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울산, 진주, 마산, 사천, 밀양, 창원, 경산, 거창 등에 100여 명의 주소지가 확인되었다. 서울과 경기를 제외하면 가장 많은 시인들의 주소지가 경남에 있었다.


강희근, 김언희, 김은정, 김이듬, 박태일, 배한봉, 엄원태, 유홍준, 이달균, 이영수, 이우걸, 정일근, 고증식, 박남준, 박서영 등의 시인들이 경남을 주소로 하고 있었다. 김언희는 여성과 몸의 문제를 첨예하게 다루어 왔고 정일근은 은현리에 칩거하면서 서정시의 날을 더욱 곧추세우고 있다. 유홍준은 최근 시를 통하여 극한의 서정시를 실험하는 중이다. “저 왁새들/완창 한 판 잘 끝냈다고 하늘 선회하는/그 소리꾼 영혼의 심연이/우포늪 꽃잔치를 자지러지도록 무르익힌다”(「우포늪 왁새」 부분)라고 노래한 배한봉의 시는 생태시에 대한 새로운 지경을 열고 있다.

대구에서는 70여 명의 시인 주소를 확인했다. 강문숙, 강현국, 구석본, 김용락, 류인서, 문인수, 박정남, 배영옥, 송재학, 송종규, 여정, 이규리, 이기철, 이동순, 이성복, 이태수, 이하석, 장경린, 장옥관 등 우리 시단에 굵은 힘줄을 새겨놓은 여러 시인들이 있었다.


이성복이 남겨놓은 상처는 오래도록 시를 꿈꾸었던 문학청년의 고뇌로 전이되었던 한 시절이 있었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서 시작하여 『남해 금산』, 『그 여름의 끝』, 『호랑가시나무의 기억』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편들은 문청들의 텍스트가 되었다. “세 사내는 친하다. 작당이 아니라 모국어처럼/합수처럼 친하다. 1955년생, 동갑내기에 똑같이 삼형제 중 장남이다. 세 사내는/오늘의 시 동인이다. 표정이 비슷하다./그늘이 깊다./나고 자란 이야기가 애솔 같아서 과목이 같은 침엽의 어둠이 전신에 예민한 것이겠다. 나는/세 사내의 성명 첫 글자를 따 장엄송이라 부른다.”(「장엄송」 부분)


문인수는 장옥관, 엄태원, 송재학 등 3인의 시인들을 함께 노래하며 ‘장엄송’이라는 탁월한 기지를 발휘한 적이 있다. 대구 특유의 정서를 어느 술자리에선가 ‘아나키스트’라고 칭한 적이 있었다. 팽팽한 긴장과 단절 그리고 직입直入을 대구 시인들의 시에서 느낄 때가 있기 때문에 선뜻 동의했던 적이 있다.

부산에서는 90여 명의 시인 주소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강경주, 강영환, 김경삼, 김경수, 김석규, 김언, 김종미, 김참, 김형술, 노혜경, 박강우, 서규정, 안효희, 유병근, 정익진, 조말선, 최영철, 허만하, 김수우, 신진, 손순미 등의 시인들이 낯익은 이름이었다.


사실 부산은 어느 지역보다 전위적 글쓰기를 선도해 온 곳이다. 사실 전위란 늘 불안하고 항상 새로운 전위에 의해 밀려날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전위를 실천한다는 것은 첨예한 시대의식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너무도 괴로운 작업이다.

부산의 시인들이 전위의식의 줄을 늘 놓지 않고 끌어가고 있다는 것은 기억할 만한 사실이다. 더불어 기억해야 할 것은 허만하의 시편들이다.


갈수록 생의 비의에 대한 묘사는 섬뜩한 칼날과도 같이 번뜩이고 있다. 새로 창간된 잡지 《유역流域》을 읽다가 허만하의 산문을 만났다. 남명 조식의 강학당인 뇌룡정에 대한 그의 이야기에서 그의 시론을 엿볼 수 있었다. “산이 크고 맑은 지리산 자락에서 내가 읽었던 것은 풍경이 아니라 방울과 칼의 의미였다. 그날따라 이마에 흰 눈을 이고 천왕봉에서 내리치는 재넘이는 차갑지 않았다. 시를 쓴다는 일은 과연 무엇인가, 누군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나에게 따지고 드는 듯했지만 그것은 쏴하고 땅을 구르는 가랑잎 소리임이 분명했다.” 남명 조식이 옷 띠에 방울을 달고 그 소리를 들으며 자신을 성찰했듯이 방울과 칼로 상징되는 시의식이 그를 사로잡고 있는 듯했다.

광주에서는 50명 남짓의 시인 주소를 확인하였다. 강경호, 강인한, 곽재구, 김규성, 김미승, 김영박, 나희덕, 문병란, 범대순, 신덕룡, 염창권, 이대흠, 이은봉, 정영주, 정윤천, 송기흥, 허형만 등이 낯익은 시인들이었다.


일찍이 요절한 김만옥이 무등산에서 움막을 짓고 살던 아픈 추억이 전설처럼 전해지거니와 문병란이 「직녀에게」를 통하여 맑고 곡절하게 민족통일에 대한 바람을 간절히 노래했고, 곽재구가 「사평역에서」를 통하여 쓸쓸한 그리움을 전해준 바 있다.


도시 저류에 흐르는 반항의 혼을 이 자리에서 말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닐 터이기에 생략하기로 한다. 단지 염창권의 시에 나타난 기존의 시의식과는 다른 저항의 혼을 간단히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내 행적이 변방을 떠돌다/이곳 소슬한 정자에 이르러,/한낮의 정적 가운데 위리안치圍籬安置되는구나./내 여정이 귀양지를 찾고 있으니/이제 감히 내 마음속의 그대에게 묻겠다.”(「면앙정에서」 부분)

여기에서 염창권이 묻는 것은 송순에 대한 예찬이나 찬양이 아니다. “노래로써 세상을 다 채울 수 없는/진득한 허기가/사람들을 가득 채우고 있음을/그대 깨닫기나 했었던 것인가”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노래일지라도 사람들의 허기를 채울 수 없다면 그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을 핍진하게 그리고 있다.

전북에서는 50여 명 남짓의 시인 주소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주를 주소로 한 시인의 수가 가장 많았다. 익산, 남원, 고창, 완주, 임실, 무주, 부안 등 전북 전역에 분포도를 보여주었다. 강연호, 김용택, 박성우, 송반달, 안도현, 정양, 복효근, 심호택 등의 주소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유명한 섬진강 시편을 보여주었던 김용택, 늘 가지지 못한 자들의 입장에서 따뜻한 정서와 변혁을 꿈꾼 안도현 등의 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터이다. 젊은 시인 박성우는 쓰리고 아픈 시를 쓰고 있다. 탄일종이 울리는 성탄전야에 “아버지 안녕히 가세요/인공호흡기 뽑는 일에 동의했어요”(「친전」 부분)로 시작하는 시편은 고통스러운 가족사를 냉철하게 묘사함으로써 더 가슴 아픈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전남을 주소로 한 시인들의 수는 30명 남짓이었다. 고재종, 김선태, 송수권, 김경윤, 김해화, 나종영, 박관서, 이원규 시인 등이 낯익은 이름들이었다. 남도의 한스러운 가락을 깊이 힘줄에 새겨놓은 송수권, 노동의 고통과 힘을 노래한 김해화, 자연을 탁발하고 있는 이원규 시인을 떠올릴 수 있다. 순천, 목포, 담양, 무안, 해남, 곡성, 구례, 영광 등이 주요 주소지였다.


남도의 풍광에 대해 말해 무엇하겠는가만은 특히 정자가 펼쳐진 광주 외곽과 담양의 정취는 아프도록 그윽한 것이다. 빼어난 문체로 세상을 묘사한 김훈의 『풍경과 상처』에서 담양 수북 마을 대밭을 아래와 같이 묘사하고 있다.

대숲에 내리는 눈은 숲의 연두를 지우지 않는다. 그 눈은 연두의 모든 속성과 모든 다양성을 한꺼번에 드러내 주는 것이다. 연금술이 깨져버린 땅 위에서 대나무 숲을 견디면서 건너가는 자들의 위엄으로 고요하다. 수북水北의 넓은 들판에서 대숲은 섬처럼 듬성듬성 들어서서 집과 마을들을 감싸고 있다.

이 수북은 고재종의 고향이다. 시 「사람의 등불」에서 고재종은 다음과 같은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시를 썼다. “저 뒷울 댓이파리에 부서지는 달빛/그 맑은 반짝임을 내 홀로 어이 보리//섬돌 밑에 자지러지는 귀뚜리랑 풀여치/그 구슬 묻은 울음 소리를 내 홀로 어이 들으리”.

제주에서는 20여 명의 시인 주소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찍이 문충성은 제주바다에서 삼신할망과 김통정 그리고 바다의 통곡을 노래했다. 고정국, 변종태, 윤석산, 정찬일, 한기팔, 문충성 등의 이름이 낯익었다.


일찍이 추사가 대정마을에 유배되었을 때 제자인 이상적에게 보낸 세한도는 오늘날도 시인들의 정신적 좌표가 되고 있거니와 아름답지만 먼 섬 제주도의 시정은 끊임없이 뭍에 대한 그리움과 반항의 질서로 작용해왔다. “이승의 아픔 훌훌 벗어 내놓고/ 남 다 잠든 밤 외로우면/졸졸 물소리나 내지르며/서귀포西歸浦 남쪽 바다/지금까지 아무도 모르던 세상으로 가서/물 소리 나라나 세울거나”(「정방폭포正房瀑布」 부분).


문충성이 노래한 제주의 모국은 바로 물소리의 나라였다. 서귀포 팔십리가 그들의 나라였던 것이다.

앞에 말한 두 주소록을 바탕으로 수박 겉핥기식으로 시인들의 거처를 살펴보았다. 이 자의적인 작업은 큰 의미나 가치가 있을 수 없다. 앞에 말한 한계가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의 거주지는 고향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고향에 대해서는 의식의 지향이 있다면 고향을 떠난 공간에 대해서는 의식의 배타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 아스팔트컨트에게는 고향이란 것도 그다지 큰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그런 의미로 서울살이를 유목적 삶이라 칭했던 것이다. 공간과 삶의 지향이 빚어내는 불일치야말로 어쩌면 시의 원동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시인이여, 그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리.


우대식 1965년 강원도 원주 출생.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 산문집 『죽은 시인들의 사회』.

주거와 창작공간으로서의 시인의 방

박 래 부

모든 것으로 미루어 낙천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인류 고통에 대한 통렬한 조롱이다. 일몰을 바라보는 것은 감옥에서나 궁궐에서나 마찬가지다.
―― 쇼펜하우어

염세적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의도했든 안 했든, 시를 쓰는 것은 장엄한 일몰을 바라보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이런 해석을 더 연장하면, 시 쓰기에 적합한 환경과 공간은 궁궐이나 감옥이나 별 차이가 없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창조를 위한 공간적 차이가 얼마나 좋은 시로 나타나느냐는 점이 아니라, 어떤 성격과 유형의 시로 발전하느냐는 점일 것이다.

쇼펜하우어 말에 적합한 시인으로 릴케와 김남주를 떠올려 본다. 릴케는 중세풍의 우아한 고성古城을 떠돌며 순도 높은 존재론적 시를 남겼다. 궁핍 속에서도 새로운 연인을 만나 아드리아 해변의 두이노성과 뮈조트성으로 방랑하며 신과 고독, 절망 등 형이상학적 문제와 정면으로 대면하며 감동적인 시를 생산해 냈다. 40대 후반에 쓴 그의 시 『두이노의 비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등은 우리 전시대의 시인들에게 차원이 다른 명상의 흔적을 남겼다.

김남주는 10년 동안 감옥에 갇힌 채 혁명을 꿈꾸는 뜨겁고 육성적인 시를 썼다. 그처럼 오래 자신의 사상이나 활동으로 인해 감옥생활을 한 시인도 없고, 옥중시가 자신의 대표시가 된 시인도 없다. 그가 남긴 시 470여 편 가운데 300여 편이 감옥에서 씌어졌다. 시집 『진혼가』 『사랑의 무기』 등에 실린 많은 시들은 연필 토막 하나 가질 수 없는 감옥을 온갖 방법으로 뚫고 나와 햇볕을 본 시들이다.

때로 시는 범상치 않은 공간에서 태어난다. 또 다른 환경도 있다. 이해인 수녀는 정갈한 시로 수녀원 담장 밖의 독자를 감동시켜 왔다. 19세 때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 들어간 그는 『민들레의 영토』 『내 혼에 불을 놓아』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등의 시집을 펴내며 많은 세속의 독자를 거느린 이채로운 시인이 되어 있다. 그의 원고료 수입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신앙공동체인 수녀원으로 귀속되는 것이기도 하다.

2006년 문화관광부 조사에 따르면 문인의 월평균수입은 100만 원 이하가 40%로 가장 많다. 그러나 65%의 문인은 문학 활동에 만족하고 있다. 많은 시인은 저마다 현재의 공간을 견뎌내며 좋은 시를 써왔고, 또 쓰기를 꿈꾸고 있다. 그것은 시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열망 때문이거나, 자신의 운명일 것이다.

부산의 최영철은 20년 넘게 38평짜리 집에 살다가 3년 전 도심을 벗어난 수영만 쪽의 40평 집으로 옮겼다. 2평이 넓어졌으나 커다란 변화다. 전에는 4가구가 한집에 살았는데 지금은 그가 한 집을 다 쓰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아이 둘까지 거느리고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해 한다. 그는 “아이가 잘 곳이 없어 다락방에서 자고 그랬다”며 웃는다.

지금도 살림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의 시 「자동납부 너」를 보면, 자동납부로 내는 월 5,000원 회비가 봄부터 가을 사이에 그를 세 번이나 빈털터리로 만들었다. 5월 24일 지급금액 2,996원 잔액 0, 7월 26일 지급금액 1,122원 잔액 0, 9월 26일 지급금액 4,032원 잔액 0… 누가 볼까 돌아서서 통장을 살피는데 그래도 그렇지, 단돈 몇 원까지 깡그리 털어 달아난 자동납부 너 이놈, 눈물이 찔끔 났다…….

함민복은 10년 전 강화도 마니산 자락에 들어가 농부처럼, 혹은 수도승처럼 혼자 살고 있다. 보증금 없이 월 10만 원을 내는 허름한 농가에서 고욤나무를 벗하여 텃밭에서 농사도 짓는다. 동네사람과 어울려 조개, 낙지, 망둥이, 새우 등도 잡고 해가 저물면 소줏잔을 나눈다.

중방에 얹혀 있는 애기보가 샌 빗물에 삭아 부러졌다. 중방이 내려앉아 미닫이 유리문을 여닫기 힘들었다. 집아, 끼기익― 삑, 네가 아파 내는 소리 내 모르겠는감, 속말을 하며.
(사진 제공 : 김수우 시인)

조은도 궁핍을 두려워하지 않는 시인이다. 그의 산문집 『벼랑에 살다』는 여성시인이 도시에서 홀로 사는 아슬아슬한 기록이다. 그는 광화문에 이웃한 종로구 사직동에서 개 한 마리를 키우며 산다. 희한하게도 개발이 되지 않아 거의 몇십 년 전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동네의 14평 크기의 낡은 한옥이다. 똑같이 가난하지만 거친 동네 여인들과 때로는 사소한 일로 부딪치기도 한다.

태릉의 부모 집을 떠나 독립하던 날 그는 기뻐 날아갈 것 같았다. 그러나 10여 년이 지난 지금은 걷잡을 수 없이 그날의 슬픔이 밀려온다고 한다. 이 집에는 여러 명의 친구가 찾아와 자고 가기도 한다. 그의 코딱지만한 방에서는 오래 된 찻잔과 낡은 창에 붙여 놓은 그림, 착착 개어놓은 옷 등이 정겹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제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친구는 몇 안 되는 시인들뿐이다. 시를 쓰는 어떤 친구들은 나보다 가난하고 현실감각이 없다. 그들은 가난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 책에는 황인숙 얘기도 나온다. 그도 용산구의 오래된 동네에서 비슷하게 살며 시와 산문을 열심히 쓴다. 그는 개 대신 고양이를 키운다. 신문에 연재한 산문을 보면, 글쟁이끼리 국내외 여행도 자주 하며 꽤나 바빠서 쓸쓸할 시간도 별로 없을 것 같다.

어린 딸과 사는 씩씩한 ‘싱글맘’ 신현림은 지난해 4월 수원 아파트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정독도서관, 선재아트센터에서 가까운 곳을 찾다가 종로구 체부동의 한옥에 전세를 들었다. 그 한옥에는 책을 보관하는 문간방, 욕실, 침실, 주방을 겸한 긴 방 등이 골고루 있어서 매우 만족하고 있다. 중국차를 파는 찻집에서 보이차를 마시고, 저녁에는 경복궁 산책로에서 운동을 한다. 딸은 골목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다.

조은은 시인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하나, 바로 자신에게 용납되지 않은 자기 자신이다.” 단순성, 순수성, 결벽성 등이 시인을 시인답게, 혹은 가난하게 하는 것 같다.

시인은 애초에 방랑 유전자를 많이 지니고 태어나는 듯하다. 유럽의 음유시인부터 그렇다. 그리스 시대의 떠돌이 서정시인과 중세기에 연애시나 민중적 노래를 부르면서 각국을 편력하던 시인들이다. 동양의 두보나 김시습 김병연 등도 정착을 거부한 시인이었다. 시대를 뛰어넘는 방랑기질이 시인의 집을 남루하게, 또는 남루에 스스로 개의치 않게 하는 것 같다. 함민복 황인숙 조은의 방은 현실에서 공간의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어도, 그들의 정신은 공간에 매이지 않고 이 도시와 산하를 방랑하는 것 같다.

굳이 비교해 보면, 시인은 평균적으로 소설가보다 독립적이고 독선적이고 때로는 다혈질적이다. 술자리 싸움도 소설가보다는 시인 주석의 활극이 볼만하다. 시인은 대체로 소설가보다 벌이가 시원찮고, 또 예술가 중에서도 가장 경제적 무능력자층에 속할 것이다.

먹고 자는 현실의 집과 방 외에, 심리적·정서적 공간도 있다. 시대적 우울이 감염되는 마음 속의 공간이다. 김정환은 여기서 얻는 병을 울화병이라고 불렀다. 그는 얼마 전 소주를 마시다가 “지금쯤 박영근이 죽을 시간인데…”라며 한숨을 쉬었다. 병원에서 산소 마스크를 떼기로 예정한 시간이라는 것이다. 치사량의 시대고와 울화병에 스러진 문인으로 김관식 천상병 조태일 박영근 등을 꼽을 수 있다. 가난, 우울, 울분과 더불어 사는 시인이 많다. 조심해야 한다. 김정환 자신은 울화병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에 술로 응어리를 풀며 산다고 했다.

물론 시인이 모두 가난한 것은 아니다. 얼마 전 방문한 강은교 김용택 등의 집과 방은 모두 검소하긴 해도 궁핍해 보이지는 않았다. 책들을 보면 오히려 그들의 방은 부유했다. 학교라는 직장이 그들의 생활을 버텨주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학교는 가장 익숙하고 생산적인 직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많은 시인의 처지는 우리 사회의 통점인 비정규직 노동자와 유사하다. 그들에게는 제도적 보살핌이 필요하다. 정식 등단을 하고 일정한 기준과 자격을 갖춘 출판사에서 시집을 낸 시인은, 국가에 의해 최소한의 창작활동과 생활이 보호되어야 한다. 평화와 명예를 존중받아야 한다.

마침 시인 화가 등 예술인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예술교육 지원법안이 국회에서 논의 중이다. 외국에서와 같이 정규 교사가 아니지만 실력 있는 예술가들을 각급 학교 교육에 참여시켜, 예술교육의 질도 높이고 예술가의 생활도 보호해 주는 것을 제도화하는 법안이다.

그러나 막상 논의가 진행됨에 따라 강사풀제의 공정한 운영, 현행교육제도와의 결합, 기존 교사와의 관계 등이 복잡하게 드러나 쉽게 결말을 못 보고 있다. 좀더 서둘러 반드시 입법화해야 한다.

우리나라에 유일한 명예시인이 있다. 시와 시인에 대한 사랑이 유별나고, 시와 관련된 많은 활동과 업적을 남긴, 한국일보 선배인 김성우 명예시인이다. 그는 얼마 전 고향인 남해 욕지도에 집을 지었다. “돈이 모자라 크게 짓지는 못했지만, 평생 하고 싶었던 샤토를 지었다”고 아쉽고도 흐뭇해 했다. 샤토는 고풍스러운 성이나 저택을 가리키는 프랑스어다. 그의 샤토가 구체적으로 어느 규모인지, 어떤 양식인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명예시인이 귀거래하기에는, 또 그의 친한 시인들이 무시로 놀러 가기에는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정태춘이 작사·작곡한 <시인의 마을>은 다소 구투이긴 하지만 뛰어난 서정의 노래다. 그 ‘시인의 마을’이 어디쯤 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가슴을 한 구석을 따스하고도 쓸쓸하게 훑고 지나간다. “…나는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 상념 끊이지 않는 번민의 시인이라도 좋겠소/ 나는 일몰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고행의 수도승처럼/ 하늘에 비낀 노을 바라보며/ 시인의 마을에 밤이 오는 소릴 들을 테요”

김 명예시인의 ‘샤토’나 정태춘의 ‘시인의 마을’을 떠올리면, 시인이 좀더 예술가다운 주거 환경에서 살고 시를 쓰게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모아진다. 시인협회가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와 협의하여 시인의 집을 건설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 집은 소박한 규모라도 릴케가 거주하던 두이노성처럼 해변이나 숲 등 자연과 이웃한 마을이 좋을 듯하다. 또한 도시 한 모퉁이라도 평화와 안전을 느낄 수 있는 동네라야 할 것이다. 시를 생산하는 농장이나 작업장이기도 한 그 집들은 영구 거주든, 임대 형식이든, 단기간 이용하는 별장식이든 상관이 없을 것이다. 또는 이것들의 혼합형태라도 무방할 듯싶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천사만려했던 철학자의 말처럼, 시인이란 가슴에 심각한 고민을 품고 탄식과 흐느낌을 아름다운 노래처럼 부르는 입술을 가진 불행한 인간인지도 모른다. 시인의 삶과, 그들의 시적 충동에는 불가사의한 수수께끼와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이 있다. 시인에게 시를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은 가혹한 형벌이며, 아무리 훌륭한 공간이라도 시가 생산되지 않는다면 한낱 고통스런 불모의 땅일 뿐이다.

인의 처소는 그들로부터 시적 열망과 치열함을 앗아가거나 무디게 하지 않는 공간이어야 한다. 정부나 사회가 지금 시대에 맞게 시인의 집과 방에 대해 배려를 해야 마땅하지만, 그것은 지극한 섬세함이 전제돼야 한다.

박래부 1951년 경기 화성 출생. 현재 한국일보 수석논설위원. 저서 『한국의 명화』 『김훈 박래부의 문학기행- 제비는 푸른 하늘 다 구경하고』 『작가의 방』 등.

풍월주인風月主人의 누실陋室

심 경 호

고전시가에 나타난 집은 가족의 주거 공간이라는 의미가 강하지 않다. 고전시가는, 한시든 시조든, 시인의 집을 세속의 먼지로부터 격리시켜둔다. 다만 그 집은 세속의 바깥인 청산에 위치할 수도 있고, 세속의 안쪽인 성내에 위치할 수도 있다. 시인의 정신적 경계가 자신의 집을 세속으로부터 격리시켰던 것이다. 그러한 격리를 통해서 거꾸로 시인은 무엇을 얻었던 것일까?

중국 북주北周 때 유신庾信은 「소원부小園賦」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게는 서너 이랑 크기의 허름한 집이 고즈넉하게 세속의 바깥에 있기에, 짐짓 여기서 살면서 바람과 서리를 피할 수가 있다. 안영晏嬰이 그랬듯이, 저자 가까이 살더라도 아침저녁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반악潘岳이 그랬듯이, 도성에 임하여 거처하더라도 한가한 생활의 즐거움을 누리련다.” 나의 집을 세속으로 격리시킴으로써 옛시인들은 한가한 생활의 즐거움을 얻었다.

전근대 이전의 옛시인들은 대부분 정치인이었다. 교양을 갖춰 조정에 나아가 자기의 보편이념을 정치에서 실현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 물러나고자 하였다.


특별히 시절이 어두울 때는 세속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하여 처사(處士,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자신의 덕을 함양하는 존재)나 일민(逸民, 세속을 의도적으로 등진 존재)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정치를 담당하고 있는 그 순간에도 그가 시인인 한에는 처사나 일민의 삶을 꿈꾸었다. 그들은 동진 때 도연명陶淵明이나 송나라 때 임포林逋의 은둔 방식을 본받고자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집을 도연명의 집이나 임포의 집과 같은 공간으로 만들려고 의도하였다. 그들이 꿈꾼 집은 세속의 바깥에 위치해 있고, 산수자연과 연속되어 있는 그런 집이었다.

이를테면 정조 연간의 남인 정치가이자 시인이었던 정범조(丁範祖, 1723-1801)는 벼슬길에 나갔어도 처사의 풍모를 지녔기 때문에 사람들이 산야인山野人이라 불렀다. 그는 41세 때까지 고향 원주 법천동에서 지내다가, 벼슬살이를 시작한 뒤에도 체직될 때마다 고향으로 돌아가 동산을 가꾸었다. 그는 그곳에‘청시야초당淸時野草堂’이란 이름의 집을 두었다. 시절이 지극히 맑지만 자신은 재야에 있으면서 초당을 짓고 살겠다는 뜻을 부친 것이다.

「푸른 둥지를 얽고搆靑巢」라는 장편 고시의 일부를 보면, 그의 초당이 어떠한 구조인지 잘 알 수 있다.

庭中有奇松 정원 가운데 기이한 소나무
半畝垂翠旓 반이랑 밭에 푸른 깃발 드리워
淸陰接瞑壑 맑은 그늘이 어두운 골짜기에 이어지고
秀色浮春郊 아름다운 빛은 봄들에 넘치나니
攬結爲我屋 그 가지를 엮어서 내 집 만들고
戶牖排蒼梢 푸른 가지들 밀쳐두고 창문과 문을 내었네.
傴僂入其中 몸 굽혀 안으로 들어가면
枕席幽而凹 잠자리는 조용하고도 우묵하나니.
玲瓏知月窺 영롱하게 달빛이 엿보고
颼飅有風敲 솔솔 바람이 두드리네.
四大於此寓 땅, 물, 불, 바람으로 이루어진 몸을 여기에 부쳐
萬緣亦已抛 세간 인연을 모두 버리련다.

정범조는 도연명의 고향이자 은거지인 시상촌柴桑村과 임포의 고산孤山을 그린 <시상고산도柴桑孤山圖>를 거처에 걸어 두었다. 도연명은 진晉이 망하려 하므로 두 성姓을 섬길 수 없기에 기미를 보고 떠나서 절개를 온전히 하였고, 임포는 송나라 진종眞宗이 좌도(불교)에 미혹되어 바로잡기 어려웠기에 세상을 떠난 것이라고 그는 해석하였다. 그 역시 정치현실에 불만을 지녔기에 어쩔 수 없이 은둔을 택한다는 뜻을 넌지시 드러낸 것이다.
그렇다면 옛시인의 집에는 무엇이 반드시 있어야 하였던가? 조물주의 다함없는 창고였다. 곧, 바람과 달로 형상되는 자연이었다.

조선 중기의 문인 조찬한(趙纘韓, 1572-1631)이 지었다는 시조에 보면, 옛시인은 물욕을 버리고 풍월주인風月主人을 자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단, 이 시조는 유자신이 지었다고도 한다.

빈천을 팔랴 하고 권문에 들어가니
치름 없는 흥정을 뉘 먼저 하자 하리
강산과 풍월을 달라 하니 그는 그리 못하리

가난하고 천하게 사는 것이 지긋지긋해서, 그것을 팔아보려고 권세가를 찾아갔더니, 턱없는 흥정을 한다. 저쪽에서 강산풍월이라면 사겠다고 하지만 그것만은 안 되겠다고 했다. 강산풍월만은 돈이나 권세와도 바꿀 수가 없다고, 시인은 풍월주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지켰다.

이 시조의 정신은 실은 송나라 때 문호 소식(蘇軾, 동파)의 「적벽부赤壁賦」에서 나타난 자유인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다. 「적벽부」를 보라. “무릇 천지 사이의 만물은 각각 주인이 있으니, 진실로 나의 소유가 아니라면 비록 터럭 하나라도 가질 수 없으나, 오직 강가의 맑은 바람과 산간의 밝은 달은, 귀로 그것을 들어 소리가 되고 눈으로 그것을 보아 색을 이룬다. 그것을 취하여도 금함이 없고, 그것을 써도 다하지 않으니, 이는 조물주의 다함없는 창고요, 나와 그대가 함께 즐기는 것이다(且夫天地之間에 物各有主라 苟非吾之所有인댄 雖一毫而莫取로되 惟江上之淸風과 與山間之明月은 耳得之而爲聲하고 目遇之而成色이라. 取之無禁하고 用之不竭하니 是造物者之無盡藏也요 而吾與子之所共樂이니라).” 옛시인들은 바로 자신의 집에 조물주의 다함없는 창고를 갖추었던 것이다.

물론 옛날에도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빈부의 차이가 집의 규모나 구조를 결정지었다.
조선후기의 이른바 경화세족에 속하는 시인들은 세간 규모가 컸다. 골동과 서화도 갖추었다. 다만, 그 시인들도 집의 구조만은 늘 주체의 함양 공부와 연결시켜 생각하였다.

조선후기의 문인 홍길주(洪吉周, 1786-1841)는 「집터를 고르며 간단히 쓰다卜居識」라는 수필에서, 재동 집을 지을 때 방과 정원에 모두 이름을 붙여, 세상에 나가 자신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한 마음 자세를 다잡았다. 곧, 바깥에서부터 안으로 이르는 순서대로 보면 이러하다.

바깥문은 원득문爰得門. 배움을 통해 도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문 안의 빈터는 만간대萬間垈. 처음 배울 때 길을 개척하고 식견을 넓힌다는 뜻이다.
가운데 문은 용중문用中門. 식견이 넓어진 뒤 중도를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가운데 문 바로 안쪽의 마당은 허백정虛白庭. 중도를 따른 뒤 마음을 비워 이치를 터득해야 한다는 뜻이다.
안마당 지나 마루는 관원헌觀遠軒. 마음을 비워 밝아지면 먼 곳도 모두 살피게 된다는 뜻이다.
마루 지나 서재는 수일재守一齋. 멀리 보더라도 지키는 것이 전일해야 한다는 뜻이다.
서재의 곁방은 지사료持思寮. 지킴이 전일해도 사려가 항구적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안채의 문은 요락문聊樂門. 사려가 정심해지면 도가 갖추어져 즐거움이 생겨난다는 뜻이다.
안채의 마당은 식란정植蘭庭. 내면이 충실하면 아름다운 광채가 뿜어져 나온다는 뜻이다.
안채의 정원은 견산대見山臺. 광채가 뿜어져 나오더라도 존엄하게 행동하여 남이 경외하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안채 대청은 아우당我友堂. 고상하기만 해서는 안 되고 벗을 구해 어울려야 한다는 뜻이다.
서쪽 침실은 영수실永綏室. 벗이 생기면 오래 함께 하여 편안하게 여기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동쪽 채는 정수각靜壽閣. 고요하게 심신을 기르고 장수하며 그곳을 누린다는 뜻이다.

지나치게 조도(造道, 도에 나아감)의 차례로 이상화하기는 하였으나, 옛시인들은 이러한 집 구조를 이상적으로 생각하였고, 또 그런 집 구조에서 내면의 함양 공부를 연상하였던 것이다.

부유한 사람들은 대개 경기지방에 세거지로서 전장을 두었고, 서울에는 벼슬살거나 일을 보러 올 때 머무는 교거僑居를 마련하였으며, 때로는 경강(京江, 한강 가운데 광나루부터 마포까지의 지역) 부근에 별장을 지었다. 또한 그런 사람들은 대개 집에 반드시 정자나 규모가 큰 누헌樓軒을 두고, 자연을 감상하면서 시주詩酒를 즐겼다.

이에 비하여, 가난한 시인은 거주지의 집 이외에는 달리 교거나 별장을 마련할 수 없었다. 집의 규모도 작았으므로, 중문이고 대청이고 곁채를 갖출 수가 없었다. 실제로 위에 든 홍길주의 경우, 재동에 이사하기 전에는 북산(北山, 인왕산) 기슭에 작은 집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 집은 겨우 방이 두 칸이었다. 다만, 그 집은 산과 들과 산기슭과 숲이 보이고 방은 조용하고 밝아서, 그 가운데서 책을 읽기에 알맞았다. 홍길주는 그 집에서 우주만물의 이치와 교감하여 그것을 지킨다는 뜻에서, 편액을 ‘수일守一’이라 하였다.

그런데, 옛시인들은 부유하든 가난하든 대개 정원이나 화초밭을 집안에 두었다. 특히 가난한 시인들은 화초밭을 좋아하였다. 조선전기의 자유인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예를 상기하라. 사육신의 죽음 이후에 관서, 관동, 호남을 떠돌던 그는 28세 되던 1462년부터 37세 되던 1471년 봄까지 경주 금오산에 정착하였다.


그 때 머문 곳은 용장사의 승료이거나 그 부근의 초가였지만, 그는 매화를 심고 차나무를 길렀다. 더구나 성균관 시절 한 담요에 앉아 형님 동생 하였던 고태필高台弼이란 사람에게 화원의 꽃을 재배하는 방법을 알려줄 수 있을 정도로 그는 화초 재배에 일가견이 있었다.


곧, 1472년, 고태필이 동지중추부사에 갓 임명되었을 때 화원에 꽃 기르는 방법을 자문하자, 김시습은 사계화(장미)·여뀌꽃·국화·자지紫芝·파초芭蕉·원추리·해당화·작약·아가위꽃[棠花]·달꽃[月花]·푸른 연[淸蓮]·목련木蓮·서향화瑞香花·배추꽃[菜花]·흰 국화·붉은 여뀌[紅蓼]·토끼풀·산삽주[山薊]·황정(黃精:둥글레)·승검초[當歸]·생강[子薑] 등의 꽃과 풀, 약초를 재배하는 방법을 하나하나 시로 적어 보냈다. 게다가 가산假山을 만들고 자분瓷盆에 꽃을 심는 방법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고태필에게 정원과 분재의 방법까지 가르쳐 주었다.

1471년 이후 김시습은 서울 동쪽의 수락산에 거처를 정했는데, 1483년 49세로 서울과 완전히 결별하기 전까지 그곳에 머물며 농사를 지었다. 그의 집은 지인이었던 남효온南孝溫도 제대로 찾지 못할 정도로 깊은 곳에 위치하였다. 그런 곳에서 김시습은 도연명을 본떠서 작물의 성장에서 생명의 운동을 감지하고, 노동의 의미를 되새겼다.

다만, 부유하든 가난하든, 옛시인들은 이것만은 잊지 않은 것 같다. “진실로 뜻에 맞고 그 몸에 편안하다면 낮은 처마에 좁은 방이라도 천하의 넓은 집[광거廣居]이 되기에 족하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고래등 같은 큰 집에 아름다운 기둥을 가진 집이라도 굴속같이 낮은 집만도 못하다.” 그렇기에 시인들은 자기 서실을 누실(陋室, 누추한 방)이라든가 용안실(容安室, 무릎을 들여놓을 정도의 작은 방)이라고 부르고는 하였다.

그런 관념은 당나라 시인 유우석劉禹錫의 「누실명陋室銘」과 통한다. 이 글은 『논어』 「자한子罕」편에서 “군자가 거처한다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君子居之 何陋之有?”라고 하였던 뜻을 부연한 것이다.

산이 대단한 것은 높다는 점에 있지 않으니, 선인이 살고 있으면 유명하게 된다. 물이 대단한 것은 깊다는 점에 있지 않으니, 용이 살고 있으면 신령한 곳으로 간주된다. 이것이 나의 누추한 집이기는 하지만, 다만 나의 덕성만큼은 향기가 높다. 반점 같은 이끼는 계단 위에 초록빛이고, 풀빛은 주렴 너머로 푸르게 눈에 들어온다. 담소하는 사람들은 큰 학자들이고, 왕래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흰 옷 입은 천한 자가 없다. 이 누실에서는 흰 거문고를 타고 곡조를 가다듬어 연주할 수 있고, 황금처럼 귀한 경서를 읽을 수도 있다. 현악기나 관악기의 요란한 음이 귀를 어지럽히는 일도 없고, 또 관청의 공문서나 편지로 신체를 피로하게 하는 일도 없다. 남양의 제갈량 초려나, 촉 땅 서쪽에 있었던 양웅의 재주정載酒亭 등 예전 명사들의 그윽한 암실에 비교되지 않겠는가. 거기에 사는 사람에게 군자의 덕이 있을 때에는 공자도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지 않았던가.
山不在高, 有仙則名. 水不在深, 有龍則靈. 斯是陋室, 惟吾德馨. 苔痕上階綠, 草色入簾靑. 談笑有鴻儒, 往來無白丁. 可以調素琴, 閱金經. 無絲竹之亂耳, 無案牘之勞形. 南陽諸葛廬, 西蜀子雲亭. 孔子云, ‘何陋之有?’

옛시인들은 집 안에서의 가족생활에 대해서는 그리 시문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가족에 대해 애정이 없거나 가부장의 권위에 사로잡혀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이를테면 도연명은 부인 적씨翟氏와의 사이에 다섯 아들을 두었다. 정약용은 부인 홍씨와의 사이에 열 명의 자제를 낳아, 그 가운데 셋을 건졌다. 도연명이 귀거래를 감행하고 정약용이 긴 유배 기간 동안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각기 부인의 현명한 내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도연명은 「자식들을 꾸짖는다責子」 시에서, 아들 다섯이 모두 지필紙筆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 제6련에 “아들 통通은 아홉 살이나 먹었으면서, 찾는 것이라곤 배와 밤이라네[通子垂九齡 但覓梨與栗].”라고 한숨지었다. 그러한 시를 남겼다는 것 자체가 가족생활의 안온함을 거꾸로 드러낸다. 두보杜甫도 사천 일대를 유랑할 때 가족들을 이끌고 다녔고, 가족의 곤궁함에 안쓰러워하는 시를 남기지 않았던가.

내 생각에 옛시인들은 속세와의 결별에 온 신경을 집중하였던 까닭에, 집을 가족의 주거공간으로 파악하지 않았다고 본다. 가족 구성원 사이에 균열이 없었거나, 오늘날과는 달리 그런 문제가 불거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심경호 1955년 충북 음성 출생. 현재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저서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 『다산과 춘천』 『한국한시의 이해』 『한문산문의 내면풍경』 『한시의 세계』 『간찰, 선비의 마음을 읽다』 등이 있음.

집을 즐거워하라

장 석 주

먼 곳을 떠돌다가 돌아왔을 때, 창문이 환하게 비쳐나오는 집의 불빛은 우리를 행복감에 젖게 한다. 그 떠돎이 곤핍한 것이었다면 귀소歸巢의 기쁨은 더욱 커져 자기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하게 젖을 것이다. 그 집은 안방, 건넌방, 사랑방, 마루, 툇마루, 부엌, 아궁이, 굴뚝, 마당, 뒤란, 헛간, 장독대, 우물, 닭장을 두루 갖춘 온전한 집이다. 저 아늑한 거소!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라는 노래가 실감나는 상황이리라.

그 불빛이 한 점 의혹도 없는 투명한 기쁨으로 빛나는 것은 그것이 조난과 표류에 마침표를 찍는 신호인 까닭이다. 부엌 창으로 음식을 만드느라 분주한 어머니의 그림자가 비치고, 환한 거실 창으로는 아버지와 형제들이 담소를 나누는 모습과 어린 누이들이 깔깔거리며 뛰어다니는 광경이 홀연히 나타난다. 그때 우리 심장은 더 빨리 뛰고 가슴은 벅찰 것이다.

1920년대 김소월의 시에서 집은 잃어버린 존재의 거처, 돌아가야 할 시원이다. 「집 생각」·「우리 집」·「옷과 밥과 자유」·「두 사람」 등의 시편에서 한결같이 시의 화자들이 집을 떠나 있는 상황이 제시된다. 집을 떠난 게 자의에 의한 것이든, 주체가 어찌할 수 없는 더 큰 힘의 강제에 의한 것이든 그것은 외로운 심사와 슬픔, 집을 향한 그리움을 자아낸다.

“꿈에도 생시에도 눈에 선한 우리 집”(「우리 집」), “타관만리에 와 있노라고 / 산중만 바라보며 목메인다”(「집 생각」), “집을 떠나 먼 저 곳에 / 외로이도 다니던 심사를!” (「두 사람」). 김소월 시 전체를 물들이고 있는 슬픔과 정처없음의 심리는 바로 이 집 떠나 있음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1930년대의 백석에게 집 없음의 상황은 더욱 구체적이며 사실적인 세목으로 제시된다. 「고향」·「북방에서」·「흰 바람벽이 있어」·「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信義州 柳洞 朴時逢方」 등이 대표적인 시다.

“난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누어서”(「고향」), “아득한 녯날에 나는 떠났다 / 부여扶餘를 숙신肅愼을 발해渤海를 여진女眞을 요遼를 금金을 / 흥안령을 음산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북방에서」), “이 흰 바람벽에 /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흰 바람벽이 있어」),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등의 시구들은 시의 화자가 집없이 타지를 떠도는 삶의 고달픔을 말하고 있다.


「북방에서」를 보면 집은 ‘나’라는 주체를 감싸안는 태반과 같은 것이어서 그것을 빼앗긴 것은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의 원인이 된다. ‘나’는 타관을 떠돌다가 문득 고향 집에 돌아와 보지만, 이미 조상들과 형제, 일가친척, 정다운 이웃, 그리운 것과 사랑하는 것, 우러르는 것, 나의 자랑이며 힘이었던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그리하여 ‘나’는 “해는 늙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 것을 바라본다. 넋없이 떠도는 보래구름은 집과 고향을 잃고 떠도는 ‘나’의 마음의 표상이다.

「흰 바람벽이 있어」는 타관의 낯선 집에 머물며 흰 바람벽을 보며 집없는 제 처지를 쓸쓸하게 돌아보는 시다. 그러다 문득 노모와 아내, 새로 태어난 아이가 함께 하는 정겨운 광경을 환몽처럼 그려보며 쓸쓸해진 심사를 담담하게 술회한다.
집은 실존의 중심 공간이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집에 실존의 중심을 두고 거처한다는 뜻이다. 집을 중심으로 생활세계가 꾸려짐으로써 세계와의 유대와 자기동일성이 형성되는 것이다.

백석의 「가즈랑집」·「외가집」 등은 그 사실을 잘 말해 준다. 집은 거주공간이면서 친족과의 살뜰한 관계와 음식 섭취와 같은 감각적 경험이 이루어지는 기초공간이다. 집을 잃는다는 건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이다. 집을 잃은 자는 길로 내몰리고 길에 선 자는 불가피하게 삶의 무정향성을 내재화할 수밖에 없다. 그 고통은 실질적인 것이다.

집없음의 처지에서 비롯된 떠도는 삶은 고단하고 쓸쓸하며 감내하기 힘든 고통을 준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를 보면, 그 고통은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극심한 고통이다.

1920년대와 1930년대의 두 대표적인 시인들이 집없음에서 빚어진 삶의 무정향성과 그 정서를 노래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집 없음을 굳이 나라와 주권을 잃은 식민지 변방 소지식인들의 피폐한 정서적 표상으로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다.

철학자들 중에 현대인을 ‘집 없는 인간’이란 은유로 현대인이 처한 실존적 상황을 표현한 이들도 있다. 집 없는 사람은 외톨이요, 이곳저곳을 떠도는 방랑자이기 십상이다. 집-없음이란 실존적 토대의 부재를 뜻한다. 집-없음의 상황이란 안식처와 피난처가 없는 매우 불안정한 상황이다. 산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집에 산다는 것을 뜻하고, 따라서 집은 그 집에 거주하는 자의 육체이면서 동시에 영혼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집 없이는 삶도 없다. 집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삶이 있는 것이다.

무더운 자연 속에서
검은 손과 발에 마구 상처를 입고 와서
병든 사자獅子처럼
벌거벗고 지내는
나는 여름
석간에 폭풍경보를 보고
배를 타고 가는 사람을
습관에서가 아니라 염려하고
3년 전에 심은 버드나무의 악마 같은
그림자가 뿜는 아우성소리를 들으며
집과 문명을 새삼스럽게
즐거워하고 또 비판한다
하얗게 마른 마루틈 사이에서
들어오는 바람에서
느끼는 투지와 애정은 젊다
자연을 보지 않고 자연을 사랑하라
목가가 여기 있다고 외쳐라
폭풍의 목가가 여기 있다고 외쳐라
목사여 정치가여 상인이여 노동자여
실업자여 방랑자여
그리고 나와 같은 집없는 걸인이여
집이 여기 있다고 외쳐라
하얗게 마른 마루틈 사이에서
검은 바람이 들어온다고 외쳐라
너의 머리 위에
너의 몸을 반쯤 가려주는 길고
멋진 양철 채양이 있다고 외쳐라
―― 김수영, 「가옥 찬가家屋讚歌」1)

「가옥 찬가家屋讚歌」는 1959년도에 발표된 시다. “병든 사자獅子처럼 벌거벗고” 나는 여름 어느날 폭풍경보가 내려진다. 마루틈으로 바람이 새들고, 버드나무는 그림자를 흔들며 아우성을 친다. 악마처럼 검은 그림자를 흔드는 그 버드나무가 3년 전에 심었다는 걸 봐서 이 집은 적어도 시인이 3년 이상 거주한 집이다. 폭풍 때문에 온 세상이 난리를 치르는 그런 밤에 ‘나’는 신문을 읽으며 “배를 타고 가는 사람”의 안위를 걱정하고, 새삼 “집과 문명”이 보장하는 안전을 온몸으로 느끼며 즐거워한다.

마루의 작은 틈으로 파고드는 바람에서조차 젊음의 “투지와 애정”을 느낀다고 쓴다. 위험이 배제된 안전한 거소에 머무는 자의 여유가 없었다면 가질 수 없는 정서다. “자연을 보지 않고 자연을 사랑하라”라거나, “폭풍의 목가가 여기 있다고 외쳐라”라는 시구는 집 가진 자의 보람과 기쁨이 한층 격앙되는 것을 보여준다. 폭풍을 피할 수 있는 집을 가진 소시민의 뿌듯한 보람이 화자의 심정을 들뜨게 했을 것이다. 그 들뜬 심정은 시의 후반부에 나오는 “집이 여기 있다고 외쳐라”, “멋진 양철 채양이 있다고 외쳐라”에서 정점에 다다른다.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다. 그저 “멋진 양철 채양”을 달았을 뿐이다. 그런데도 ‘나’의 마음은 기쁨으로 차고 넘친다. 그야말로 ‘가옥’을 ‘예찬’하는 마음의 격앙으로 터져나오는 이 외침은 뿌듯함을 넘어서서 환희 그 자체를 전달한다.

집은 눈과 비바람, 폭풍을 피할 수 있는 하나의 공간, 혹은 장소 이상이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을 우연적으로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라고 말한다. 그 내던져진 존재를 품어 안는 것이 집이다. 집은 존재의 요람이요, 보금자리다. 아울러 집은 길 위를 떠도는 모든 존재가 돌아가 쉬어야 할 궁극의 피난처이자 은신처이다.

집은 모든 ‘바깥’의 위험과 덫을 피할 수 있는 ‘안’이자, 실존의 뜻을 세우고 의미를 일구는 곳이다. 내가 나고 자란 집,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형제가 있는 집은 우리 존재의 시원始原이다.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겠네
저 비탈 바다 온통 단풍 불붙을 때
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배어든 연기가 매워서
집이 없는 사람 거기서도 눈물 잣겠네
쪽문을 열면 더욱 쓸쓸해진 개옻 그늘과
문득 죽음과, 들풀처럼 버틸 남은 가을과
길이 있다면, 시간 비껴
길 찾아가는 사람들 아무도 기억 못하는 두천
그런 산길에 접어들어
함께 불붙는 몸으로 골짜기 가득
구름 연기 첩첩 채워 넣고서
사무친 세간의 슬픔 저버리지 못한
세월마저 허물어버린 뒤
주저앉을 듯 겨우겨우 서 있는 저기 너와집
토방 밖에는 황토 흙빛 강아지 한 마리 키우겠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아주 잊었던 연모 머리 위에 별처럼 띄워놓고
그 물색으로 마음은 비포장도로처럼 덜컹거리겠네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
매봉산 너머 원당 지나서 두천
따라오는 등 뒤의 오솔길도 아주 지우겠네
마침내 돌아서지 않겠네
―― 김명인, 「너와집 한 채」2)


「너와집 한 채」는 저 산골 오지에 있는 집의 한 원형을 보여준다. 시인이 상상으로 찾은 그 집은 아무도 찾지 않는 강원도 어느 산골 골짜기에 버려진 너와집이다. 그 너와집은 누군가 살았던 집이다. “사무친 세간의 슬픔 저버리지 못한” 세월이 모질었나 보다. 빈 너와집은 그걸 버티고 “주저앉을 듯 겨우겨우 서 있”다. 그 빈 집은 쓸쓸한 개옻 그늘, 썩은 나무껍질에도 배어든 매운 연기, 토방 밖에 뛰노는 황토 흙빛 강아지 한 마리,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들로 인해 돌연 산 것들이 내는 왁자함과 움직임의 활기로 가득 찬 아늑한 거소의 공간으로 바뀐다.


그 아늑함과 은밀함이 ‘나’로 하여금 그곳으로 들어오는 길을 지우고 수제비 뜨는 처녀의 외간 남자로 붙박혀 살겠다는 결심을 자아내게 했을 것이다. 너와집은 세간붙이 없이 간소하게 사는 삶, 쌓아둔 재물 없이 원초의 삶을 일구기에 마춤한 집이다. 세상의 명리에 휘둘리는 저 번잡한 도시문명의 삶을 등지고 나이 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로 숨어 살만한 집을 찾는 꿈은 곧 존재의 시원을 향한 꿈과 통한다.
어디 그런 꿈을 김명인 시인만 꾸었을까? 서정주는 이 시가 나오기 쉰 해 전쯤에 이미 「수대동시水帶洞詩」에서 이렇게 노래한 바 있다.

흰 무명옷 가라입고 난 마음
싸늘한 돌담에 기대어 서면
사뭇 숫스러워지는생각, 고구려에 사는듯
아스럼 눈감었든 내넋의 시골
별 생겨나듯 도라오는 사투리.
등잔불 벌서 키어 지는데……
오랫동안 나는 잘못 사렀구나.
샤알·보오드레―르처럼 설ㅅ고 괴로운 서울 여자를
아조 아조 인제는 잊어버려,
인왕산그늘 수대동水帶洞 14번지
장수강長水江 뻘밭에 소금 구어먹든
증조曾祖하라버짓적 흙으로 지은집
오매는 남보단 조개를 잘줍고
아버지는 등짐 서룬말 젔느니
여긔는 바로 10전 옛날
초록 저고리 입었든 금녀女, 꽃각시 비녀하야 웃든 3월의
금녀女, 나와 둘이 있든곳.
머잖어 봄은 다시 오리니
금녀 동생을 나는 얻으리
눈섭이 검은 금녀 동생,
얻어선 새로 수대동水帶洞 살리.
―― 서정주, 「수대동시水帶洞詩」3)

「수대동시水帶洞詩」는 1941년 에 남만서고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화사집花蛇集』에 들어 있다. 그러니까 이 시는 적어도 1941년 이전에 씌어진 시다. 「수대동시」의 중심 공간은 “인왕산그늘 수대동 14번지”에 “증조하라버짓적 흙으로 지은집”이다. ‘나’는 어쩐 일인지 이 시골구석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오랫동안 나는 잘못 사렀구나.”와 같은 반성 끝에 “샤알·보오드레―르처럼 설ㅅ고 괴로운 서울 여자”를 완전히 잊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는다.


이 수대동의 흙집은 남보다 부지런해서 조개를 잘 줍는 어머니와 등짐 서른 말을 거뜬히 지는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집이자, 어린 시절 이웃집 금녀와 놀았던 추억이 깃든 집이기도 하다. 금녀는 새색시가 되어 떠나고 없지만, ‘나’는 봄이 오면 순박한 시골처녀인 금녀 동생을 얻어 가족을 이루고 수대동 흙집에 살겠다는 다짐을 한다.


이 수대동 집은 ‘나’의 기억 속에서 흙의 소출에 기대 사는 건강한 삶의 터전이다. 어디서 살겠다는 장소와 거주공간의 선택은 곧 어떻게 살겠다는 의식이 떠미는 선택이다. 그 선택은 곧바로 현존의 테두리를 규정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말할 것도 없이 문명을 등진 소박하고 건강한 삶에의 동경이 잘 드러나 있는 시다. 그 동경의 중심에 있는 게 사람의 마음을 온통 “숫스러워지는생각”으로만 채우게 하는 시골의 흙집이다.

집은 잠자고 식사를 하고 아이를 키우는 곳이다. 집은 어느 곳보다 아늑한 생활과 안식의 공간이다. 아울러 쉬고 기력을 재충전하는 공간이요, 가족 공동체가 거주하는 신성불가침의 내밀한 공간이 바로 집이다.

일찍이 서정주는 「무등無等을 바라보며」라는 시에서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엔 없다.”고 노래한 바 있다. 집은 청산이요, 자식들은 그 무릎 아래 키우는 지란이다. 집을 가진 자만이 가족을 이루고 자식을 낳아 기를 수 있다. 시인은 같은 시에서 “지어미는 지아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 지아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라고 했는데, 이렇듯 지아비와 지어미가 서로를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곳도 집이다.

이렇듯 집은 사적 경험과 기억의 공간이요, 인격을 키우고 다듬는 곳이다. 집은 탄생이나 죽음과 같이 중요한 실존적 사건을 경험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한 인간의 역사가 만들어지는 곳이다. 이렇듯 집은 인간 실존의 의미를 규정하는 근원적 공간이다.

집을 짓는 데 필요한 것은 건축자재만이 아니다. 집을 짓는 데 필요한 것은 거기에 몸담아 사는 이들의 기억과 추억, 그리고 그것을 키워온 세월이다. 세월이 없다면 집도 없다. 프랑스 시인 루이 기욤은 “오랫동안 난 널 지었다, 오 집이여!”라고 노래한다. 집에 딸린 방들은 거기 사는 이들의 꿈과 행복을 배양하고 추억들을 간직한다. 그래서 모든 집은 존재의 집이요, 기억의 집이다.

우리 조상은 집의 기본적 구조에서 우주의 원리를 읽어냈다. 전통가옥에서 지붕은 하늘, 기둥은 사람, 주춧돌은 땅이다. 집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다. 그 집에는 수호신들이 깃들어 산다. 지붕과 부엌과 우물에는 각각 다른 신이 산다. 우리 조상들은 그 신들이 가족에게 미치는 길흉화복에 개입한다고 믿었다.

집은 인간 본질의 실현을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잘-존재함은 집과 더불어서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집은 누구나 누려야 할 천부의 권리다. 집은 투자의 대상도 아니고 신분의 상징도 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집을 투기의 수단으로 삼는 것은 탐욕스럽고 부도덕한 짓이다. 어떻게 타인의 ‘영혼’이며 ‘우주’를 담보로 사사로운 이익을 취할 수 있는가! 집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곳, 꿈을 키우고 추억을 만드는 곳, 삶을 누리고 향유하는 장소다. 집과 더불어 우리는 비로소 사람이다.

1) 김수영, 『김수영-한국현대시문학대계 24』, 지식산업사, 1981
2) 김명인시선집, 『따뜻한 적막』, 문학과지성사, 2006
3) 서정주시집, 『花蛇集』, 문학동네, 2001

장석주 1979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문학평론으로 등단. 최근에 시집 『붉디붉은 호랑이』와 평론집 『풍경의 탄생』, 『들뢰즈, 카프카, 김훈』, 『장소의 탄생』을 연이어 내놓은 바 있다. 계간 《시인세계》 편집위원 역임.

☞ 삶의 향기가 가득한 문화예술전문분야의 선두주자“문화저널21”

 

비싼 와인·싼 와인 맛 실제론 잘 구별못한다

英, 일반인에 실험해 보니
보통 사람들이 비싼 와인과 싸구려 와인의 맛 차이를 정확하게 구별할 수 있을까? 영국 과학자들은 최근 실험을 통해 싸구려 와인과 비싼 와인의 차이를 제대로 알기는 어려우니 비싼 와인을 마시는 것은 돈 낭비이자 시간 낭비란 결론을 내렸다고 영국의 텔레그래프가 13일 보도했다.

영국 허트포드셔대학 심리학과 리처드 와이즈맨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은 최근 열린 에든버러 과학페스티벌에서 일반인 578명을 상대로 3~4파운드(약 7000원)짜리 싸구려 와인과 10~30파운드(1만8000~5만원)짜리 중급 와인(레드와인과 화이트 화인 각각 4종)을 놓고 블라인드 테스트(눈을 가리고 맛을 비교하는 실험)를 실시했다.

와인 시음자에게 어느 쪽이 더 비싼 와인인지 맞혀보게 했다. 비싼 와인을 구분해낸 사람의 비율은 평균 50%였다. 둘 중 아무거나 하나를 골라 정답을 맞힐 확률과 차이가 없었다는 얘기다.

심지어 3.49파운드(6000원)짜리와 15.99파운드(3만원)짜리가 비교 대상이 된 프랑스 보르도산(産) 레드 와인의 경우, 더 비싼 와인을 제대로 맞힌 정답자는 39%에 그쳤다.

와이즈맨 교수는 "요즘 같은 불황기에 이번 실험이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싸구려 와인이나 비싼 와인이나 맛은 똑같다(그러니 싼 와인을 마셔라)"고 말했다. 하지만 와인잡지 편집장 가이 우드워드는 "어차피 맛은 주관적인 것이다. 비싼 와인이 주는 즐거움 중 하나는 그것이 비싸다는 사실 그 자체"라고 반박했다.

오늘 곡우…경북에선 '부부관계 없는 날'

20일은 ‘봄비가 내려 곡식을 기름지게 한다’는 곡우(穀雨)이다. 24절기 중 여섯 번째 절기이자 봄의 마지막 절기인 곡우는 청명(淸明)과 입하(立夏) 사이에 있으며, 음력 3월 중순경으로, 양력 4월 20일 무렵에 해당한다.

우리 조상에게 곡우는 볍씨를 담그는 등 한해 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날이었다. 따라서 곡식·농사와 연관된 세시 풍속도 많다.

농부들은 볍씨를 담아두었던 가마니를 솔가지로 덮었다. 초상집에 가거나 부정한 일을 당하거나 부정한 것을 본 사람은 집 앞에 불을 놓고 그 위를 건너게 하여 악귀를 몰아낸 다음 집 안에 들였고, 집 안에 들어와서도 볍씨를 보지 않게 한다. 부정한 사람이 볍씨를 보거나 만지게 되면 싹이 잘 트지 않아 그 해 농사를 망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경북 지역에서는 이날 부부가 함께 자지 않는다. 부부가 잠자리를 하면 토신(土神)이 질투하여 쭉정이 농사를 짓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경기 김포에서는 곡우가 지나면 나물이 뻣뻣해지기 때문에 나물을 장만해 먹는다.

‘곡우에 모든 곡물이 잠을 깬다’, ‘곡우에 가물면 땅이 석 자가 마른다’ 등도 모두 곡우가 그해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날이란 의미를 담은 속담들이다.

곡우 무렵에는 흑산도 근처에서 겨울을 보낸 조기가 충청남도까지 올라와 조기가 많이 잡힌다. 이때 잡힌 조기를 ‘곡우 사리’라고 한다. 살은 적지만 연하고 맛이 있다.

기상청은 20일 중국 상하이 부근에서 동진하는 고기압의 영향으로 전국이 맑겠다고 밝혔다. 아침 최저기온은 0도에서 8도, 낮 최고기온은 14도에서 21도로 일교차가 크겠다.

로또 당첨금은 '주택 마련과 빚 청산' 용도
리뷰조선 review.chosun.com

누구나 한 번쯤은 돈다발이 떨어지는 일확천금을 노리거나, 인생역전을 꿈꾸기 마련이다. 2008년부터 다시 증가하고 있는 로또 판매금액은 2010년 한 해에만 2조 4316억 원에 이르고 있다. 이는 금융위기 이후 경제상황이 더 어려워진 서민들이 당첨금이 많은 로또에 거는 기대심리가 커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장조사전문기관 트렌드모니터에서는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로또 구매와 관련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로또 구매의 가장 큰 이유는 역시 혹시나 하는 기대(44.4%) 때문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로또 구입 후 당첨발표를 기다리는 동안 갖는 기대감이 주는 행복(19.5%)을 위해 구매한다는 의견도 상당했다.

로또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을 살펴본 결과, 로또를 합법적인 도박으로 바라보는 의견은 전체 56.6%에 이르렀다. 또한 절반가량(50.6%)은 로또 당첨을 예측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로또가 도박의 일종이라는 것에는 상당수가 공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종의 놀이(54.6%)로서 심리적인 위안을 받는다는(55%) 긍정적인 의견 역시 많은 것으로 나타나, 사행성 조장(40.5%) 논란에도 불구하고 로또를 통해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을 얻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로또 구매시 주변의 눈치를 보거나, 로또 구매자들이 한심해 보인다는 의견은 각각 14%와 16.5%로 매우 낮아, 로또 구매 자체에 대한 거부감은 거의 없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한편 기부행위로서의 로또 구매에 대해서는 17.3%만이 동의를 보여, '나눔로또'라는 본래 취지가 무색하게 '나눔'보다는 '로또'의 의미에 더 치중되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었다.

로또 구입자 10명 중 4명은 로또를 정기적으로 구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기 구매 빈도는 매주 구입(59.8%), 주 1회 이상(17.3%), 월 2~3회(18.1%) 순서였다. 정기적인 로또 구입자의 대부분이 거의 매주 로또를 구매하는 것으로, 서민들이 6개 숫자에 거는 기대심리가 상당함을 반영한다.

로또 당첨 확률에 대해서는 전체 응답자의 46.2%가 꾸준히 구매하면 언젠가 행운이 찾아올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당첨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대답(28.2%)도 적지 않았지만, 절반 가량은 로또를 통해 대박을 꿈꾸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편 설문에 참여한 패널들에게 로또에 당첨될 경우의 당첨금 사용용도를 묻자, 주택 마련(33.8%)과 가계 빚 청산(29.3%) 등의 현실적인 목적으로 이용하겠다는 의견이 많았다. 이는 현실에서 서민들이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어려운 가계살림과 주택난 등 서민경제의 어두운 그림자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로또 당첨 후 현재 하는 일과 학업의 지속여부에 대해서는 전체 74.4%가 그대로 지속하겠다고 답변했다.

‘쥐그림’ 3차 공판, ‘개콘’보다 웃겨라
검사 “피고는 국민으로부터 청사초롱과 번영에 대한 꿈 강탈한 것… 징역 10월 구형”
‘그래피티 활동가’이자 ‘남편’의 공판 지켜본 영화평론가 황진미의 관람기
하니Only
» 박씨가 그려넣은 쥐 그림
 4월22일 서울 지방법원 5시, G20 포스터 쥐 그림 사건의 3차 공판을 보러갔다. 쓰나미급 연예 스캔들이 터진 마당에, 과거 서태지의 열혈 팬이자, 정우성의 기럭지를 몹시도 사랑하는 영화인의 한사람으로서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인터넷 기사를 클릭질하며 놀란 가슴을 마사지하고 있을 시간에 내가 친히 재판정까지 납신 이유는, 피고가 나의 가족이기 때문이다. 서태지-이지아 커플도 아니고, ‘듣보잡’ 부부가 못 밝힐 게 뭐 있나. 그렇다, ‘쥐 그림’ 박정수와 영화평론가 황진미는 법적·사실적 부부이다.

 앞서 두 번의 공판이 있었지만, 본격적인 양측 심문과 구형이 3차 공판으로 미뤄진 상태여서 약간의 기대가 있긴 했지만, 이런 불세출의 쇼를 구경할 줄 어찌 알았으랴! 80분이 넘게 펼쳐진 이번 공판은 코미디 애호가인 나에겐 빅 재미를 선사한 개그 콘서트 번외편 공개방송이자, 최고의 코미디를 보면서도 절대 웃으면 안 되는 변태스러운 규칙으로 고문당하는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 검사 “쥐와 같이 불길한 존재를 그려넣고…” (아윽, 웃으면 안 돼, 절대 안 돼~) 

출석확인과 더불어 검사의 심문이 시작되었다. “피고는 작년 10월 30일 롯데백화점 앞에서 G20 홍보물을 스프레이 등으로 훼손한 일이 있나요?” 하고 추상같이 물으며 압수된 증거물을 떡하니 책상 위에 올려놓으신다(그림0). 인터넷 화면으로 익히 보아왔던 바로 그 그림. 나도 실물로 보긴 처음이다. 왠지 아우라가 느껴져 “푸핫” 웃음이 터졌다. 평소 시사회에서 약간의 코믹장면에도 큰 웃음을 터뜨려 주변의 빈축을 사는 나로서는 정말이지 어쩔 도리가 없는 반사작용이었다. 판사님 근엄하게 주의를 주신다. “재판정에서 웃으면 안 돼요.” 아차, 잘못하다간 법정소란 혐의로 감치처분을 받겠구나, 싶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방귀 참기보다 힘들다. 그 시각 피고석의 박정수는 자신의 답변보다 내가 또 웃어서 감치당하면 ‘애는 누가 보나’ 조마조마 했더란다.

 심문은 계속됐다. “피고는 ○○○, ○○○ 등과 더불어 사전에 모의한 일이 있습니까?” 박정수는 모의라기보다 내가 그라피티 작업을 할 거라고 말한 적은 있다고 답한다. 검사, 아랑곳하지 않고 준엄한 음성으로 몰아 부친다. “피고 박정수는 ○○○, ○○○ 등과 더불어, 치밀한 사전 준비를 통하여 야간에 비밀 작전을 수행하듯이, 세계정상을 맞이하는 G20행사에 계획적, 조직적으로 여러 장의 포스터에 쥐와 같이 불길한 존재를 그려 넣다가 경찰에게 발각되어 도주하다가 체포되었습니다. 이것은 통상적인 예술행위가 아니라 조직적 범죄행위에 해당됩니다.” 진부한 레퍼토리 반복. 아, 검사가 생각하기에도 쥐는 불길한 존재가 맞구나. 불길해....뭐 그런 잡생각을 하다가 검사 옆 의자를 보니 서류 뭉치가 한 상자이다. 저따위 맥 빠진 심문을 준비하느라, 산더미 같은 서류를 읽었을 너도 참 욕본다, 저걸 일일이 만든 사무직 노동자는 또 얼마나 고달팠을꼬 생각하니, 원수를 사랑하고픈 마음이 절로 솟는다.

# 변호사 “왜 하필 쥐를 그렸죠?”

이어지는 변호인 쪽 심문. 스크린에 준비한 사진을 비추어 보여준다.

“피고 박정수는 평소에도 주위의 생활공간을 버려진 물건들을 활용하여 꾸미는 일들을 해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연구실 주위의 작은 놀이터에 피고가 만들어놓은 것들입니다. 피고, 이건 무슨 의미로 만든 거죠?” 화면엔 박정수가 요즘 꼭두새벽에 일어나 공들여 가꾸는 일명 ‘갤러리 텃밭’이 나온다. “저것은 아이들이 펜스를 위험하게 넘어다는 것을 막기 위해 여수장우중문 시를 패러디하여(텃밭1,2)… 저것은 버려진 변기에 수련을 심은 것으로 뒤상의 변기에서 착안하여 ‘마농의 샘’이라고 제목을 붙였으며(텃밭3)… 저것은 남자 청바지에 흙을 채워 고추를 심고 ‘남자의 부푼 꿈’이라고 제목을 붙여(텃밭4)… 저것과 한 쌍이 되는 작품으로… 여자 청바지에 토마토를 심고 ‘여자의 열매’라고 제목을(텃밭5)… 그러니까 남자의 꿈이 열매를 맺어서…”

 

이거 뭥미. 웬 아기자기 음담패설 돋는 작품 설명회인가. 그런데 듣다 보니 묘하게 몰입되네, 또 해봐, 싶은데 변호사가 대뜸 끊고, “이런 작업에 대해 최근 구청에서 조사가 나왔지요?” 묻는다. 박정수는 동네의 소외된 아이들과 같이 작업을 하며, 아이들도 재미있어하고 정서에도 도움이 되는데, 구청에서 허가되지 않은 설치물이라 위험하다며 당장 철거를 하라고 해서, 담당 공무원을 만났다고 했다.

 변호사가 다시 쥐 포스터 얘기로 돌아가 물었다. “쥐는 왜 그린 거죠?” 박정수는 ‘쥐’의 의미를 조목조목 밝힌다. “그래피티 작가 중에 유명한 뱅크시 작품의 상당수가 쥐 그림입니다. 그것을 보고 영감을 얻었고, 도안도 따왔습니다. 쥐는 또 G20과 발음이 같고요. 당시 G20행사를 준비하면서, 정부가 88올림픽 때처럼 외국인을 만나면 인사를 하라느니 40조의 국가수익이 난다고 하며 마치 행사만 끝나면 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양 홍보하고 있었고, 저는 그에 대해 나름대로 아이디어를 내어 풍자적인 의미로 가필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범죄에 해당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나요?” “그라피티 작업이 일종의 서브컬처로, 길거리 비보잉처럼 경찰과 마주치는 일이 생길 수는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훈방 정도로 처리될 줄 알았지, 구속영장이 청구되어 70시간이나 유치장에 구금이 되고, 이렇게 재판을 받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공공물을 훼손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공물 즉 어느 누구의 것이 아닌 모두의 재산인 저 포스터에 시민의 일원으로서 일종의 참여를 한 것입니다.”

# 피고 “예술과 법은 다른 차원으로…”  

검사는 이런 분위기 참을 수가 없다는 듯, 아까보다 훨씬 격앙된 목소리로 묻는다. “놀이터에 화분은 설치했다 치울 수 있지만, 포스터의 쥐 그림은 분리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명백한 훼손 아닙니까? 그리고 놀이터에 넘어다니지 말라는 의미의 설치물을 만드는 건 놀이터의 취지에 맞지만, 이 포스터에 불경한 쥐를 그려넣은 건 포스터의 취지에 반하는 것 아닙니까? 게다가 주민의 신고로 체포되었는데, 그들이 보기에도 이것은 예술이 아니라 범죄라는 증명이지 않습니까?”

 정곡을 찌르는 질문으로 분위기를 반전시켰다고 득의양양해하는 검사와는 달리 피고의 답변은 시큰둥하다.

 “글쎄요. 관의 입장은 둘을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던데요. 이것은 관에서 설치하고 홍보하는 것이니, 민은 이의를 제기하거나 어떠한 다른 것도 덧붙이지 말고 그냥 설치해준 대로 이용하고 홍보하는 대로 따르라는 것입니다. 저는 거기에 제 나름의 의견을 유머러스한 예술의 방식으로 표현하여 시민적 참여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신고한 주민이 시민사회 전체의 의견을 대변한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검사의 분노 게이지가 급상승했는지 거의 샤우팅 수준으로 외쳐댔다. “피고는 예술을 운운하면서, 예술행위를 법보다 우위에 놓인 새로운 입법자로 간주하며, 불법적 방법으로 의사 표시를 하였습니다. 그리곤 뱅크시의 권위에 기대어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뭐 이런 뜻의 말인데, 검사 스스로 말을 하다고 꼬여서, 알아듣기 곤란한 이상한 문장이 되어버렸다. 유감스럽게도 그 괴상한 비문을 정확히 옮기진 못하겠다.)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예술이 법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법과는 다른 차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법의 기준이 아닌 시민 사회적 기준에서 용인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한 2년 전엔 공영방송 KBS에서 그래피티를 소개하는 프로그램도 했고요. 서울시 디자인 사업을 홍보하는 포스터에 재미있게 말풍선을 집어넣은 친구들에게도 1천만원의 벌금을 물리겠다는 으름장을 놓긴 했지만, 처벌되지 않았던 예도 있구요. 제가 뱅크시의 권위에 기댔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뱅크시가 영국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그라피티 작가이긴 하지만, 기존 사회나 예술계에 어떤 권위를 가진 존재는 아니고요. 저는 다만 뱅크시의 작업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저의 작업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 판사 “포스터에 너도나도 코끼리를 그려넣는다면…”(“음… 괜찮다~”)  

이때 판사가 개입하였다. “피고가 쥐를 그려넣음으로써 저 포스터를 원래 그린 사람의 예술작업이 침해됐다는 생각은 안 하나요? 그리고 피고가 쥐를 그려넣은 것처럼, 또 누군가는 저기에 코끼리를 그려넣는다거나 하면 본래의 포스터로서의 가치가 상실되어버릴 텐데, 그것은 공공물 훼손이 된다고 생각되지 않나요? 놀이터에도 피고처럼 또 다른 사람들이 모두 무엇인가를 설치하겠다고 하면 공공성이 훼손되지 않겠어요? 그리고 뱅크시가 아직도 익명으로 활동을 하는 건 그것이 범죄라는 것을 방증하는 것 아닌가요?”

 판사의 질문은 나름 신선했다.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이라고 말하던 칸트식으로 사고해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판사가 말한 상황을 상상해보더라도 과히 나쁠 것 같진 않다. 물론 그런 장이 열린다고 해서 모두가 뭔가를 그려넣거나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능력이나 욕구가 되는 사람들이 그런 행위를 할 것이요, 적당한 자정적 도태과정을 거쳐 걸러질 것이다.

 왜 제재가 없으면 무질서가 온 세계를 뒤덮을 것이라 생각하지? 왜 질서는 관의 강제에 의해서만 유지된다고 생각하지? 그러니까 법의 논리는 ‘공공(public)=관(government)’으로 사고하는 것이고, 쥐 그림이나 갤러리 텃밭은 공공을 시민자율(civil)의 차원에서 사고하자는 정치철학적 의미가 있구나 뭐 그런 상념에 빠져 있는데, 피고가 답변을 한다.

 “세계 최고의 경찰력과 CCTV를 보유한 영국에서 뱅크시가 계속 활동할 수 있는 것은 그를 잡지 못해서가 아니라 잡지 않기 때문입니다. 뱅크시가 익명을 유지하는 것은 범죄성 때문이 아니라, 그래피티 작업이 지닌 게릴라적인 성격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고, 또 자기 이름으로 작품을 소유하고 판매하는 작가가 되길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공공성으로 작품을 시민사회에 돌려주고 싶은 것이죠. 또 쓸데없는 유명세로 성가심을 당하고 싶지 않아서겠지요.”

 오호, 내 남편이 언제 뱅크시에 대해 저렇게 공부를 많이 했나, 신통방통해하는 찰라 검사가 최대한 언성을 높여 말한다. 이 법정에서 자꾸만 뱅크시가 언급되는 것이 이상한 술수에 말려드는 느낌이 든다는 듯 아주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 검사 “청사초롱과 번영의 꿈을 빼앗고 강탈한 죄, 징역 10개월 구형!” (허걱~)  

“이 포스터를 보십시오. 청사초롱은 예부터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쓰는 물건입니다. 그런데 이 청사초롱을 마치 쥐가 들고 있는 것처럼 그림을 그려 넣었습니다. 원래 포스터에는 누가 청사초롱을 들고 있는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누구인지, 누구여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G20 대회를 통해 선진국으로 도약하고 국가의 번영을 이루겠다는 우리 국민들, 우리의 아이들이 있어야 할 자리입니다. 피고 박정수는 우리 국민들과 아이들로부터 청사초롱과 번영에 대한 꿈을 강탈한 것입니다. 빼앗은 것입니다! 이런 피고인 박정수에게 징역 10개월을 구형합니다. 함께 범행을 모의하고 현장 부근에서 박정수와 연락을 취했던 피고 ○○○에게는 징역 8개월을 구형합니다.”

 검사는 목소리가 갈라져 음이탈이 될 정도로 열변을 토하였다. ‘빼앗기고 강탈당한 꿈’ 운운에서 희극성은 절정에 달했다. 순간 장엄한 애국가가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듯한 환청이 들렸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손발이 오글거리는데 한편으론 묘한 감흥에 소름이 돋았다. 아, 이 컬트적인 느낌은 뭐지? 쥐가 놓인 그 자리, 선진국으로 도약, 국가의 번영, 아이들의 꿈, 강탈, 그리고 뭐 뭐 징역 10개월? (말이면, 다 하냐? 애는 네가 와서 봐줄래?)

 아, 검사는 정말로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을 믿는 것인가, 아니면 믿는 척 연기를 하는 것인가. 수사과정에서 악감이 쌓인 수사검사도 아니고, 수사검사가 올린 서류만 보고 공판을 하는 공판검사에게 저런 종류의 분노는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이데올로기적 확신? 그런데 검사는 지금 쥐 그림이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라는 논박을 하는 중 아닌가? 하지만 저 검사의 말보다 더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말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니까 국가주의 이데올로기 말고는 어떤 이데올로기도 용납할 수 없으며 이를 표현하면 범법행위가 된다는 뜻?

 와… 저 장면을 그대로 찍은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린다면 서태지 스캔들과 함께 검색어 순위를 다퉈볼 수 있었을 텐데, 아깝다. 누군가 <100분 토론>에 시민논객으로라도 나와서 저런 논리와 말투로 웅변을 해댔다면 다음날 ‘병림픽 스타’로 급부상 했을 텐데. 가만, 이걸 단편 극영화로 재현해보면 어떨까. <우익소년 윤성호> 같은 블랙코미디? 이 장면을 장편 극영화에 삽입하면 어떨까. 누군가 그렇게 영화를 찍으면 나 같은 평론가로부터 ‘검사를 너무 유치하게 그림으로써 첨예한 정치적 갈등을 검사의 인격 문제로 환치시키며 논의를 저열하게 축소시켜버렸다’며 욕먹기 딱 좋은 설정 아닌가.

 역시 현실은 영화를 압도하는구나. 뱅크시의 공공예술이 어떻고, 공공성과 시민적 참여가 어떻고 하는 수준 높은 예술적·정치적 담론이 이 자리에는 참 어울리지 않는 뻘소리였구나 하는 생각과 더불어, 그러니까 여기는 G20으로 선진국이 되어보려 안달을 해대는 후진국 대한민국이 맞구나 하며 정신이 번쩍 났다.

# 피고인 최후진술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습니다!”

 판사가 “피고, 최후진술하세요”라고 진행을 했다. 박정수가 말한다.

 “포스터에 대해서건 텃밭에 대해서건 제 행위에 대한 관의 반응은 한 가지입니다. 국가가 하는 일에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저 주는 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포스터에 쥐를 그려넣은 행위가 징역 10개월에 해당된다니, 법 앞에 선 일반인으로서 몹시 당황스럽고…… 겁이 납니다. 그렇다면… 저는…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겠습니다. 아무것도!”

 이건 또 뭔 소리인가? 앞으론 범법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반성인가, 아니면 너희가 그 따위이면 나도 그만두겠다는 냉소인가? 내용상 반성인데, 말의 형식은 이상하게 삐친 것 같고 뭔가 달래거나 붙잡아야 될 것 같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판사는 저 말을 반성으로 알아들으려나, 아니면 뭐 꼭 다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고… 왜, 더 해보시지, 이거 섭섭한걸, 하고 받아들이려나.

 선고는 5월13일로 미루어졌다. 법정 바깥으로 나오니, 80분 동안 억지로 참았던 웃음이 터져나와 깔깔거렸다. 다른 이들은 징역 10개월을 구형받았는데 뭐가 좋아 웃느냐 묻는다. 좋고 싫고를 떠나서, 웃긴 걸 웃지 못하게 하는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생체반응이 한참을 갔다. 저기서 일하는 속기사나 질서요원은 웃고 싶어서 어떻게 참는다니. 복남씨 말씀에 참으면 병 된다는데. 검사는 어떻게 웃지도 않고 쥐 그림을 똑바로 가리키며 “번영된 국가를 향한 아이들의 꿈을 강탈…” 어쩌고 하는 대사를 자기 확신에 찬 듯 말하며, 심지어 완벽한 분노 크리를 탈 수 있을까? 웃기면서도 신기하고 한편으로는 참 안 됐다는 느낌이 드는 건 어인 일인가. 웃자고 한 짓에 죽자고 매달리며, 그것도 벌써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사건에 한 상자 분량의 서류뭉치를 뒤적이며 날콩 씹는 쌩소리를 해대는 검사도 참 3D업종이구나 싶은 측은지심이 밀려오는 것이다. 집에 오니 지하철 성추행 현행범이 현직 판사라는 뉴스가 나온다. 이해가 갈 만도 하다. 그토록 인간의 성정을 억압한 작업환경에서 하루 종일 소외된 노동에 시달리며 오로지 법의 잣대 외에는 다른 가치를 생각지 못하는 판검사들이니, 욕망 역시 자연스럽게 발산되지 못하고 금기에 대한 일차적 위반에 집중되어, 퇴폐 성접대를 받거나 지하철 성추행을 향하는 것이겠지. 과연 억압은 변태를 낳는구나.

#“내 딸아, 입에 풀칠만 할 수 있어도 발랄한 예술하며 살아라” 

 60년대 고물상을 하다가 장물 취득 혐의로 법정에 섰다는 나의 부모님은 판검사의 위엄에 감명을 받아 “천한 장사치로 살지 말고 판검사가 되라”고 자식들에게 가르치셨다. 하지만 나는 내 딸에게 이렇게 말할 것 같다.

 “겉보리 서 말만 있어도, 입에 풀칠만 할 수 있어도, 발랄한 예술하며 살아라. 소외된 판검사 따위 될 생각 절대로 하지 말고!”

황진미 영화평론가

 

96년 ‘서태지 여대생과 결혼’ 기사, 특종상 놓친 이유
결속력 강한 ‘서태지 팬덤’ 공고함 유지할 듯
신문사 압박하는 등 지나치게 권력화 비판도
하니Only
» 스포츠 서울 서태지 결혼 보도
 “서태지-이지아 사건 최대 피해자는 정우성이 아니네요. 서른 다섯먹은 내 마누라 옛날부터 서태지 광팬인 것은 알고 있는데 두시간 전부터 찔찔 짜더니 이제는 아예 통곡을 한다. 저는 저녁도 굶을 거고 밥상을 못차리니까 아들 녀석하고 나는 당분간 나가서 사먹으란다. 이제 세살먹은 내 아들내미는 영문도 모르고 엄마를 따라 운다.”

 한 남성은 24일 서태지-이지아의 결혼·이혼 보도의 충격을 직격으로 맞은 집안의 풍경을 이렇게 전했다. 다른 남성은 이를 받아서 “여기도 유사상황”이라며 ‘동병상련’의 맨션을 올리기도 했다.

 서태지의 결혼·이혼 사태는 누구보다도 일부 서태지 팬들을 충격과 혼돈 속에 빠뜨리고 있다. 무엇보다 서태지 본인이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만나서도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공언하는 등 여러차례 순결주의를 표방해왔기 때문에 일부 팬들이 느끼는 혼란이 크다.

 한 대중음악 평론가는 <한겨레>와 한 전화통화에서 “알고 지내는 몇몇 골수 팬들은 보도 이후 식음을 전폐하고 있다”면서 “여성 골수팬들 가운데는 남자친구를 사귈 때 팬클럽 활동은 간섭하지 않는다는 전제로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알아요>과 함께 한국의 팬덤문화을 활짝 열어젖힌 이후 20년 가까이 한국대중음악사에서 가장 공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평가를 듣고 있는 서태지를 둘러싼 팬덤(특정한 인물이나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나 그런 문화현상)은 이대로 무너질 것인가?

 

■ “더욱 공고해질 것” 전망 우세  

많은 팬들이 배신감을 느끼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속력이 여느 팬클럽보다 강한 서태지팬덤은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대중음악 평론가 김작가씨는 “일부 팬들은 서태지의 결혼-이혼 소식에 ‘속았다’는 감정을 느끼고 있지만 갑자기 언론의 공격을 받고 있으니까 우리가 지켜줘야 한다는 책임감도 동시에 느끼는 복합된 감정의 소용돌이에 놓여 있다”면서 서태지 팬덤 유지론에 무게중심을 두었다.

 서태지팬덤은 팬클럽이기보다는 소사이어티에 가까운 특이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이번 사태가 서태지팬덤을 근본적으로 바꿀 만큼 대세를 형성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서태지팬덤은 그의 순결주의·신비주의적 면모에 환호하는 측면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1990년대를 관통한 문화적 상징성, 세대의 영웅으로 중시하는 경향이 크기 때문에 시대의 평가와 상관없이 마이웨이식 팬덤문화는 오히려 공고화해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실제로 서태지공식팬클럽인 서태지닷컴에는 “서태지를 믿고 지켜보자”는 옹호론이 우세하다. 기자가 트위터를 통해 서태지 팬들의 반응을 확인한 결과에서도 비슷한 의견이 눈에 띈다.

  “그가 결혼 이혼했다 해서 15년간 그의 음악과 공연에 열광한 제 마음이 달라졌을 것이냐 절대 아니거든요. 그럼 왜 숨겼느냐. 바로 지금처럼 우리 대중과 언론은 개인의 사생활을 ‘사태’로 만들어 즐기기 때문이죠”(아이디 @promunhak)

 “개인의 사생활을 사건이라는 명목으로 이렇게 알리시는 것도 이해가 안갑니다. 근데 대부분의 팬들은 실망하지 않았다는데 왜 자꾸만 실망이란 단어를 사용하십니까? 그 실망은 언론사분들이 특종을 놓친것에서 온 것 아닐까요? 사실을 그대로 알려주세요”(@tjworldo7)

 서태지의 결혼-이혼은 개인의 사생활이기 때문에 언론에 알릴 필요가 없다는 논리는 서태지팬덤의 일관된 논리이다.

 

■ 서태지팬덤의 빛과 그림자 

서태지팬덤은 조직적 팬클럽 문화의 선구자인 동시에 가장 강력하게 조직된 팬클럽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평가이다. 1980년대에도 조용필의 오빠부대 같은 팬덤은 있었으나 서태지팬클럽은 “스타를 조직적으로 관리하고 운용한 시이오(CEO) 형 팬덤”(김작가)이었다는 점에서 이전과 확연히 구분된다. 서태지팬덤의 위력은 발매할 때마다 서태지의 음반이 수십만장을 훌쩍 넘는 판매고를 기록하는 데서도 쉽게 확인된다.

 특히 이들은 단순한 문화소비자에서 가요 사전심의 폐지운동에 앞장서고 방송사의 가요심의 폐지운동을 펼치는 등 문화정치적 팬클럽으로까지 진화했다. 서태지 팬클럽 이후 에이치오티(HOT), 동방신기, 제이와이제이(JYJ) 등 다른 팬클럽의 팬덤도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지만 서태지팬덤만큼 문화정치적 움직임을 보인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서태지팬덤은 지나치게 공세적이고 폐쇄적이라는 점에서 부작용을 낳고 있다. 특히 서태지를 둘러싼 언론의 보도를 쥐락펴락할 정도로 권력화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1996년 11월20일치 서태지 결혼예정 사실을 특종보도한 <스포츠서울>에 수백명의 팬들이 몰려가고 항의하고 전화공세를 편 사례가 대표적이다. 결국 <스포츠서울>쪽은 시내판에 이 특종보도를 1면에서 내리는 등 서태지쪽과 팬들의 압력에 굴복했다.

 이 기사를 작성한 이기종 전 스포츠서울 편집국장은 “예비 신부의 친척으로부터 확인을 거친 기사였으나 팬들이 몰려들어 ‘서태지 오빠는 결혼할 일이 없다’ ‘그렇게 결혼할 사람이 아니다’라는 거친 항의를 하고, 소속사에서도 기사를 빼달라고 강력히 주장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 때문에 신문사쪽에서 기사를 1면에서 빼고 시내판에서 간지로 돌렸다”면서 “특종상을 받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내가 쓴 서태지의 예비신부가 바로 이지아였고, 이 기사 때문에 서태지쪽이 결혼식을 연기한 뒤 결혼했다”면서 “보도가 나간 뒤 1년 뒤쯤 결혼사실을 확인했으나 결혼보도 여파로 내보내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1992년 서태지 관련 책을 써서 40만권을 판매하기도 한 그는 서태지 팬덤과 다른 팬덤과의 차이점에 대해 “엄청나게 집요한 팬들, 골수팬들이 많은 데다 20년 가까이 지나도 결속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남다르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서태지도 결혼도 할 수 있는 평범한 인간인데 팬들이나 서태지 주변사람들이 과민반응해온 것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서태지팬덤은 또한 서태지 음악 자체를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비판을 봉쇄하고 신화화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한 평론가는 “2000년 발매된 서태지의 6집 앨범 <울트라맨이야>에 대해 비판적인 평론을 썼다가 서태지 팬들로부터 블랙리스트로 찍혔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울트라맨>이 서태지의 안티가 생긴 시점이라는 것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면서 “그전까지는 서태지 음악이 무에서 유를 창조한 아티스트라는 신화적 색채로 포장됐으나 인터넷을 통해서 미국 등 서구의 음악을 접할 기회가 많이 늘어나면서 서태지의 음악이 외국음악, 특히 10대 백인 남성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따라하는 것 아니냐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골수 서태지팬들 사이에서는 서태지의 음악은 여전히 절대적이다. 한 팬은 최근 네이버 지식인 게시판에 서태지 음악적 성과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자 “국내에서 서태지 음악은 과대평가된 것이 아니라 과소평가 됐다”며 서태지 음악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설파하는 장문의 글을 올리기도 했다.

김도형 선임기자/트위터 @aip209

암(癌) 냄새 맡아 주인 구한 개

출처=데일리메일
미국에서 암(癌) 냄새를 맡아 주인을 구한 개가 화제가 되고 있다.

27일(현지시각) 영국 데일리메일에 따르면 화제의 주인공은 박서종의 8살 난 개 플로이드 헨리(Henry). 헨리는 지난 2008년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시작했다.

헨리는 주인인 캐럴 윗처(Witcher·67)에게 다가가 오른쪽 가슴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기 시작했고 발을 들어 윗처의 가슴을 계속 긁어댔다.

헨리가 3일 동안 같은 행동을 보이자 이상하게 여긴 윗처는 의사를 찾아갔고 유방암 3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심각한 암을 발견한 그는 바로 암 제거수술을 받았고 2년에 걸친 항암 치료와 방사선 치료로 암을 완치했다.

스탠퍼드 대학의 전문가들은 후각이 예민한 개가 암 냄새를 맡은 것이 아니냐는 의견을 내놨다. 개는 콧구멍 안에 ‘날개 주름’이라는 조직을 가지고 있는데 이 조직은 개의 후각을 민감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유방암 전문의인 설리 가브람-멘돌라(Gabram-Mendola) 박사는 “암에 걸리면 우리 몸은 특정 혼합물을 배출하는데 개만이 이 혼합물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했다.

지난 1월 영국의 저널 거트(Gut)에는 특수훈련된 개가 91%의 확률로 결장암을 찾아냈다는 연구결과가 실리기도 했다. 또 개의 후각은 사람보다 수백만배 더 민감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개가 피부암·방광암·폐암·난소암 등의 냄새를 맡았다는 연구결과도 보고되고 있다.

"질러버리는 한국인 특성이 혁신의 힘"

MIT 미디어랩 소장 임명된 일본인 이토 조이치氏
인터넷 생태계 이끄는 한국, 일본과 미국이 배울 점 많아 "한국인들은 일본인과 달리 '그냥 질러 버려(Just do it)'정신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특성이 바로 세계 최고 수준의 혁신을 이끈다고 생각한다."

뉴욕타임스는 매사추세츠공대(MIT) 미디어랩 차기 소장으로 임명된 이토 조이치씨에 대해 "파격적이다. 그러나 적절하다"고 보도했다. 이토씨는 25일 본지와 인터넷 메신저 인터뷰에서 "20세기 인터넷이 혁명이었다면 21세기 인터넷은 문화다. 그리고 이 문화의 핵심은 '연결성(connectivity)'이다"라고 말했다.

MIT 미디어랩 차기 소장에 최근 임명된 벤처 투자가 이토 조이치씨는 27일 요르단 방문 중 인터넷 메신저로 가진 인터뷰에서 “한국인의 화끈함을 배우고 싶다. 한국은 인터넷 생태계를 이끌 정도로 혁신적인 나라”라고 말했다. /이토 조이치씨 제공

―외신들은 세계 최고의 연구소 소장에 학사 학위도 없는, 대학 중퇴 출신이 임명됐다는 사실에 흥분하고 있다. 대학은 왜 그만뒀나.

"1984년 터프스대 컴퓨터공학과에 입학했다. 컴퓨터를 학교에서 배운다는 것 자체가 멍청한 발상이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1986년 시카고대 물리학과에 진학했다. 역시 1년을 못 버텼다. 교수님에게 문제를 직관적으로 해결할 방법을 알고 싶다고 물었더니 '공식이나 외워라'고 답하더라. 뒤돌아보지 않고 그만뒀다. 그 후 시카고의 나이트클럽에 디스크자키(DJ)로 취업했다. 당시 경험은 교육 수준과 명성은 당신이 얼마나 흥미로운 인간인지와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줬다."

―MIT 미디어랩이 당신을 왜 소장으로 초청했다고 생각하나.

"일반인들은 MIT 미디어랩이 천재들끼리 모여 연구를 수행하는 매우 폐쇄된 조직이란 이미지를 갖고 있다. MIT 미디어랩이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은 외부 세계와의 연결 고리다. 인터넷 투자자로 주로 일해온 내가 MIT 미디어랩과 세상을 연결할 적임자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MIT 미디어랩을 변화시키고 싶은 건가.

"MIT 미디어랩의 핵심은 다양성이다. 이 다양성을 촉진시키는 연구소를 만들고 싶다. 그런 면에서 나는 일본, 그리고 미국이 한국으로부터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이동통신 시장은 휴대전화뿐 아니라 게임과 TV가 융합돼 있다. 여기에 초고속 인터넷 기술과 놀라울 정도로 세련된 인터넷 소비자들이 결합했다. 한국의 인터넷 시장은 세계의 인터넷 생태계를 이끌 정도로 혁신적이다."

―나이트클럽 DJ·투자자·영화 제작자·인터넷 쇼핑 운영자… 경력이 정말 다양하다. 특화된 한 분야에 집중하고 싶지는 않은가.

"난 제너럴리스트(generalist· 이것저것 두루 섭렵한 사람)란 말을 싫어한다.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을, 이것저것 주워 모아서 남들이 다 할 수 있는 발상을 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나. 나는 한 가지 사안을 깊이 들여다본 다음, 거기서 남들이 찾을 수 없는 미묘한 차이를 찾아내기를 즐긴다."

―MIT 미디어랩 소장으로 일하면 상당히 제약이 많아질 텐데, 자유로운 삶이 그립진 않겠는가.(그는 스쿠버다이빙 강사 자격증을 따려고 요르단에 갔다가 메신저에 접속했다고 했다.)

"'권력에 도전하고 스스로 생각하라'. 하버드대 심리학자였던 티머시 리어리의 말로, 내 삶의 신조다. MIT 미디어랩의 가장 큰 장점은 규율이 존재하되, 그 규율을 깨기를 권고한다는 것이다. 뭐, 내가 소장이니 규율을 바꾸면 되지 않겠는가."

―당신이 '인터넷 생태계의 혁신 국가'라고 말한 한국에도 권위적 문화가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한국이 신기하다. 권위와 혁신, 그리고 박력이 공존한다. 혹시 화끈한 요리가 비결 아닐까,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다."

☞MIT 미디어랩

'멀티미디어' 개념을 만들어낸 MIT 니콜라스 네그로폰테 교수가 1985년 설립한 미디어융합 기술연구소. 산학협동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 연구소로 평가되고 있으며, 가상현실·3차원 홀로그램·유비쿼터스 등 최첨단 기술의 초기 모델을 만들어냈다.

 

 

- 인왕산 鶴학巢소島도에서 최범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