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과 9월에 학소도 옥상에서 iPhone으로 촬영한 저녁노을 사진들

나는 심심풀이로 책을 읽는 것이 싫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오토바이를 타고 바람처럼 질주하는 편이 좋다. 그쪽이 훨씬 재미도 있고, 훨씬 감동적이다. 젊은 사람은 활자의 세계에 탐닉하는 것보다는 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자신의 눈으로, 귀로, 온몸으로 현실이 무엇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젊은 시절부터 주위에 언어의 성을 높이 쌓아놓고 그 환상의 테두리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서려 하지 않으면서, 세상에 대하여 코멘트를 일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실은 현실처럼 재미있는 것도 없다. 그 어떤 소설보다 재미있다. 때로는 굴복하는 일도 있고, 엉망진창이라고 여겨지는 일도 있지만, 바로 그렇게 때문에 재미있는 것이다.

물론 실망스러운 일도 없지 않다. 더럽다고 하면 더럽기 짝이 없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 그러나 그런 현실 속에서 반짝이는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다. 그 발견의 감동이야말로 진정한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 마루야마 겐지 <소설가의 각오> p. 246

[Why] [김윤덕의 사람人] 인생도 경영도 나무처럼… 회장님 '비밀의 정원'이 속삭인다

  김윤덕 기획취재부 차장

창업 60년 맞는 화승그룹 현승훈 회장
성철 스님과 화승원 _ "여기가 천국" 두세 달씩 칩거
"나 자신을 바로 보라" _ 힘들 때마다 스님말씀 되새겨

'산은 산, 물은 물'이라 한 성철 스님이 말년에 머물렀던 '비밀의 정원'이 있다. '중 보러 절에 가지 말고 네 마음속 부처를 찾으라'고 일갈하던 그 버럭 스님이 '여기가 천국이다' 칭송하며 두세 달씩 칩거했다는 곳이다. 천 년 주목과 아름드리 노송 울창하고 사시사철 맨드라미, 봉숭아가 지천으로 피는 언덕. 입적하던 1993년에도 스님은 봄과 여름을 이 정원에서 나고 해인사 백련암으로 마지막 작별을 하러 떠났다고 했다.

정원의 문패가 '화승원(和承苑)'이다. 부산 금정산 자락, 오륜대가 건너다보이는 언덕배기에 오롯이 숨은 동산. 1만평에 이르는 비밀의 정원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 부산시장도, 내로라하는 정치인, 지역 유지도 이 정원 한 번 구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란다. 주인장의 고집 탓이다. "나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들일 생각이 없다"는 게 주인장 현승훈(69)의 원칙이다.

현승훈 회장은 '나이키' '르까프'로 유명한 화승그룹의 소유주다. 쓰레기더미였던 언덕을 30년간 정원으로 일궈온 '농부'이기도 하다. 재계에서는 골프 안 치고, 비서를 두지 않고, 부동산이 없다고 '삼무(三無) 회장'이라고 한다. 경영 리더십을 연구하는 이들은 그를 '덕장(德將)'으로 분류한다. 정신과 이시형 박사는 '기차표 고무신'에서 출발해 신발은 물론 자동차 고무 부품업계 1위가 되기까지 화승의 신화를 구축한 현 회장의 덕치 경영 리더십을 '걸어가듯 달려가라'(중앙북스)는 책으로 펴냈다.

운이 좋게도 여름의 끝자락, 화승원에 입성했다. 백일홍 붉게 물든 뜨락에 앉아 성철 스님이 남기고 간 이야기, 그리고 창업 60년을 맞는 화승의 산 역사를 들었다.

나무의 힘

―저 까마득히 크고 웅장한 나무는 무엇입니까.

"향나무예요. 오래 살고, 이름 그대로 향이 나고요. 굽이굽이 흐르는 자태가 아름다워 정원수로 많이 쓰이지요."

―부채처럼 땅에서 여러 줄기가 올라온 저 나무는 소나무인가요?

"밥상을 닮았대서 반송(盤松)이라고 하지요. 사람도 소나무처럼 품위 있게 늙어야 하는데, 그게 참 어려워요.(웃음)"

―기업 하느라 바쁘실 텐데 나무는 언제 키우셨습니까.

"골프 안 하고 술 안 하면 키울 수 있지요.(웃음)"

―정원 디자인도 직접 하신 건가요?

"디자인이랄 게 있나요. 지형에 맞게 축담도 쌓으면서, 햇빛 잘 드는 곳에 한 그루씩 심었지요."

―33년 전 첫 삽을 뜨셨다고 들었습니다. 왜 이곳입니까.

"근방의 호수로 낚시하러 다니면서 오다가다 바라보는 이 언덕배기가 좋았어요. 원래는 밭이었는데 돌이 많아 농사짓기 불편했대요. 내가 구입한 뒤 돌은 그대로 두고 주위에 나무를 심었어요. 괜찮아 보이지요?(웃음)"

―정원을 만드신 특별한 사연이 있습니까.

"어릴 적 살던 집에 나무가 많았어요. 열세 살에 어머니 여의고 서른여섯 살에 아버지마저 떠나시니 외롭고 허전했나 봐요. 나무를 키우고 싶데요. 일본 출장을 가도 늘 정원만 눈에 들어왔어요. 작은 마당에 나무 한 그루를 심어도 정성껏 가꾸는 모습이 좋더라고요. 흔들림 속에서도 나를 바로 세워준 게 이 나무들이에요."

―나무가 어떻게 힘이 됩니까.

"저 포구나무를 보세요. 둥치가 뻥 뚫릴 만큼 만고풍상을 견뎌낸 흔적이 위대하지요. 제아무리 잘난 척해도 사람의 수명 고작 해야 100년인데 저들은 1000년을 묵묵히 살아요.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지요."

“나무를 보면 좋지 않은 마음 가질 수가 없어요.”33년을 공들여 가꾼‘화승원’에서 현승훈 회장이 활짝 웃었다. 향나무, 포구나무, 적송, 반송 등 1만여평 동산에 아름드리 고목들이 우아한 자태로 서 있다. 동영상 보기 / 김용우 기자 yw-kim@chosun.com
나를 바로 보라

―말년에 성철 스님이 화승원에 머물렀다 들었습니다.

"입적하실 때까지 8년간 드나드셨지요. 정원에 조그만 암자를 지어 드렸어요. 따님인 불필 스님이 산청 생가에 붙인 이름과 같은 '겁외사'예요. 백련암에 계시면 신도들이 몰려오니 스님이 이곳으로 피신해 와서는 '여기가 천국이다' 하셨지요.(웃음)"

―스님과는 어떻게 알게 되신 겁니까.

"생전의 아버님(창업주 현수명)과 교유하셨고, 유언 또한 성철 스님을 아버지처럼 모시라는 거였어요. 49재 때 큰스님 뵈러 백련암에 갔더니 삼천배를 해야 만나주신대요. 도무지 엄두가 안 나 돌아섰다가, 한번 해보자 했지요. 절을 할 때마다 온몸에 고통이 퍼져 나가요. 1000배를 넘기니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지데요. 한데 신기하게도 어느 순간부터는 고통을 느낄 수가 없어요. 삼천배가 끝나는 순간 온몸에 평화가 찾아옵디다. 고통은 고통으로 이겨야 한다는 걸 스님이 알려주셨어요."

―지금도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108배 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하신다 들었습니다.

"5년 전까지만 해도 오백배를 올렸는데 이젠 체력이 안 돼 108배만 해요.(웃음) 절을 하면 하심(下心), 마음이 낮아지지요. 교만을 물리치게 되니 마음 수행으로 참 좋아요."

―성철 스님은 괴팍하기로 유명하셨지요.

"삼천배를 해야 만나준다 하시니 거만하고 괴팍하다 했겠지요. 당신을 위해 삼천배 하라는 뜻이 아니고, 그 사람의 의지, 불심을 보고자 했던 것인데 이런저런 오해가 많았어요."

―인간적인 분이셨나요?

"그럼요. 아이들을 참 좋아하셨어요. 시중 사람들은 스님을 도인으로 알고 그분의 옷자락을 만지면 업장이 해소된다 하고 따랐는데 그걸 싫어하셨어요. 하루는 아내와 함께 백련암에 갔더니 솔잎가루, 불린 콩, 김 몇 장에 밥 한술을 드세요. '내가 좋은 것은 다 먹제' 하고 겸연쩍게 웃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입적하시던 해 봄, 큰스님의 마지막 모습을 사진으로 여러 장 담으셨다 들었습니다.

"카메라 싫어하시던 스님이 5월 어느 날 사진을 찍고 싶다 하시니 다들 놀랐지요. 언제 떠날지 아시고 미리 인연을 정리하셨던가 봐요."

―스님이 생전에 남기신 말씀이 있습니까.

"대중에게 늘 하시던 말씀, '나를 바로 보라'는 그 말씀. 힘들 때마다, 자기를 바로 보고 처신하라는 큰스님 말씀 떠올리며 견뎌냅니다."

1993년 봄, 성철스님과 함께 화승원에서 찍은 사진. 그해 11월 스님은 세상을 떠났다. / 화승그룹 제공

기차표에서 르까프까지

화승그룹의 모태는 1953년 부산에서 출범한 동양고무산업이다. 50~60대 중년은 누구나 기억할 '기차표 고무신'을 만든 회사다. 장남 현승훈이 가업을 물려받은 것은 1977년. 3년 뒤 회사명을 '화승'으로 바꾼 현 회장은 나이키·리복 등 세계적인 스포츠용품 브랜드를 OEM(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 방식으로 생산하면서 국내 최대 신발업체로 부상한다. 이에 힘입어 현 회장은 자동차 부품, 정밀 화학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하지만, 1997년 IMF 파고에 휩싸인다. 모회사인 ㈜화승과 화승상사가 부도 처리되면서 창업 이래 최대 위기를 맞았다. 화의신청을 한 화승은 뼈를 깎는 구조조정, 밀착형 영업 체제를 구축하면서 7년 만인 2005년 법정관리에서 벗어나고, 2010년에는 3조3000억원의 매출을 달성하는 기염을 토한다. 화승R&A를 비롯해 계열사만 국내외 24개. 주력사인 화승R&A는 미국·중국·인도 등 6개국에 진출, 현대·기아·GM·크라이슬러·도요타 등 세계 유수 자동차 기업들에 자동차 부품을 공급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모태인 동양고무산업이 6·25전쟁 직후 설립됐지요.

"충북 괴산이 고향인데 부산으로 피란 왔다가 큰아버지, 작은아버지네는 서울로 올라가시고, 아버지만 부산에 남아 기차표 고무신을 창업하셨어요."

―왜 기차표 고무신이라고 이름 붙였을까요?

"기차는 달려가잖아요. 내 추측이 그래요.(웃음) 아버지는 새로운 것에 도전을 많이 하셨어요. 하이힐 고무신도 아버지 아이디어예요. 키 작은 한국인을 위해 고무신에 힐을 붙인 거죠. 케미컬 슈즈도 만드셨는데 일본 교포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어요."

―80년에 나이키를, 83년에 리복을 OEM으로 생산하면서 국내 최대 신발업체로 급부상합니다.

"화승의 기술로 만든 나이키가 전 세계로 수출됐지요. 국내 신발산업의 고급화가 시작됐고요. 1억달러 수출을 달성했으니 대단하지요?"

―하지만 86년 나이키와 사업 제휴를 종결하고 '르까프'라는 토종 브랜드를 만듭니다.

"세계적인 수준의 우리 기술로 남의 국적 신발을 만든다는 게 자존심이 상했어요. OEM의 한계도 절실히 느낀 터라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을 앞두고 르까프로 모험을 시작했지요. 우리에겐 국내 최고 스포츠 브랜드라는 자부심과 노하우가 있었어요."

―결국 르까프가 나이키를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초반의 선풍을 이어가지 못했어요. 투자만 많이 해놓은 상태에서 IMF가 터졌지요. 디자인 싸움에서도 밀렸고요."

―인건비 급등으로 신발산업이 사양화하고 있는데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업이고, 우리 그룹의 뿌리니까요. 신발산업에서 닦은 화학 분야의 기술력을 토대로 화승인더스트리, 화승R&A를 설립할 수 있었어요. 고무를 다루는 기술, 내구성을 높이는 노하우가 자동차 부품 생산에서 빛을 발한 거죠. IMF를 넘길 수 있었던 것도 그 덕이었고. 튼튼한 나무 둥치에서 화려한 가지들이 자라나갈 수 있어요."

3無 경영의 비법

―이시형 박사는 책에 '화승의 가장 큰 재산은 인화(人和)'라고 썼더군요. 촌스럽고 투박하지만 순수한 사람 경영 59년의 역사가 오늘의 화승을 있게 했다고 썼습니다.

"좋게 봐주신 거죠.(웃음) 언제고 사람 마음을 얻는 게 가장 중요하고 생각해요. IMF라는 거대한 파도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죠."

―화의 상태에 들어간 뒤 임직원 4명 중 3명을 자르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했는데, 노조의 반발은 없었나요.

"내 형제, 친인척부터 정리했어요. 내 식구들 남겨놓고 다른 직원들을 해고할 수 없지요. 회사가 본궤도에 올라 돌아오신 분도 적지 않고요. 아마도 그런 노력 덕분일 거예요."

―2007년 자동차산업 불황으로 화승R&A가 경영 위기에 처했을 때, 노조가 임금 동결은 물론 인원 감축을 포함한 모든 임금·단체협상 결정 권한을 사측에 위임한다는 결정을 해서 뉴스가 됐습니다.

"회사가 어려울 때 힘을 합쳐 살려야겠다는 의욕을 직원들이 갖고 있으면 무너지지 않습니다."

―덕치 경영의 비법이 있습니까.

"참으려고 노력하지요. 막 성질날 때 있지만 참고 견디면 직원들이 그 마음 알아줘요.(웃음) 잘났거나 못났거나 그들이 가진 능력에 맞게 설 자리를 만들어주면서 다 함께 끌고 가지요. 내겐 고객보다 직원이 더 소중하거든요. 경영학 하는 분들이 나처럼 회사 하면 망한다고 하던데, 구닥다리 소리 들어도 나는 그렇게 하고 싶어요."

―골프 안 치고, 비서 없고, 부동산 투자 안 하는 '3무 경영'으로 유명하십니다. 다른 건 몰라도 부동산이 없다는 건 믿기지 않습니다.

"아버지 대부터 그런 데는 관심이 없었어요. 땅은 자기가 필요한 만큼 가지는 거지 그걸로 돈 번다는 생각은 못했어요. 남들 부동산으로 부를 축적할 때 나는 화승원 가꾼다고 취미 생활한 셈이니 반성은 좀 돼요.(웃음) 조금 가지고 있던 부동산은 IMF 때 회사에 다 넘겨줬지요. 사람이 죽어서 빈손으로 간다 생각하면 그리 아쉽지도 않아요."

―정치권 로비에서는 자유롭지 않았을 듯합니다.

"옛날에도 대통령 후보로 나온 어떤 분이 나랑 학교 선후배라고 해서 우리가 뭘 주지 않았는가 했는데, 설령 요구를 받아도 단호히 거절했어요. 로비 같은 거 했으면 회사 규모가 요것밖에 안 될 리가 없지요.(웃음) 내 역량도 부족하지만, 정도(正道)를 가는 게 옳아요. 기업은 로비로 하는 게 아니에요. 규모는 작지만 그 분야에선 최고가 돼야 한다는 게 내 경영 원칙이에요. 그 덕에 화승이 지금껏 외면당하지 않고 부산의 향토 기업으로 생존할 수 있었고요."

굴뚝산업이 좋다

―두 아드님은 어떻게 가르치십니까.

"나의 단점은 버리고 장점만 가져가라고 하지요.(웃음) 편하게 돈 벌면 안 된다고 해요. 기업주 2세들이 펀드하고 주식하다가 엇나가는 경우 많지 않나요? 굴뚝산업이 왜 소중한지 가르칩니다. 딴 얘기지만, 정주영·이병철 같은 분들이 참 대단한 분들인데 교과서에는 전태일 같은 노동자만 실리는 게 나는 이해가 안 돼요. 기업인들의 부정적인 모습도 있지만 우리나라를 이만큼 키워온 그들의 노고도 인정해줬으면 좋겠어요."

―청년 실업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반발할지 모르지만, 사실 일자리가 없는 게 아니에요. 젊은이들이 무조건 큰 기업, 에어컨 잘 나오는 멋진 회사만 선호하고 어려운 일은 안 하려고 하는 것도 문제라고 봐요. 작은 기업이라도 자기 뜻을 우직하게 펼칠 수 있는 좋은 회사들이 많습니다."

―글로벌 금융 위기에 화승은 안전한가요.

"IMF로 공부를 세게 해서 그런가, 아직은 괜찮아요.(웃음) 군살을 불리지 않으려고 항시 노력하지요."

―이 정원에서 특별히 아끼는 나무가 있습니까.

"다 아끼지요. 자식이 다 좋아 보이듯이."

―화승원에 매일 들르신다 들었습니다. 일꾼들이 어련히 알아 돌볼 텐데요.

"주인이 봐야지요. 병이 들었나, 물이 부족한가. 일꾼들과는 관심의 차원이 달라요."

―자연 그대로 둬도 아름답지 않습니까.

"며칠만 방치해도 엉망 되고 흉해져요. 사람도, 기업도 마찬가지예요. 일으키는 것도 어렵지만 지켜가는 일은 더더욱 어렵지요."

-곧 창업 60주년을 맞습니다.

"선대보다 기업 규모가 커졌으니 '잘했구나' 생각해요.(웃음) 하지만 여유를 부릴 틈이 없어요. 다 왔다 싶어 쉬려고 하면 새로운 위기가 오니까요. 페달을 항상 구르고 있어야 자전거가 굴러가는 것과 같지요. '논어'에 나오는 '공관신민혜(恭寬信敏惠)'라는 말을 좋아해요. 공손하고 너그러우며 신의가 있고 민첩한 사람, 더불어 은혜를 베풀 줄 아는 사람이 성공하지요. 젊은이들에겐 고리타분하게 들릴까요?(웃음)"

 

‘인류 진화’의 역사서술을 바꿀만한 최근 연구들(2)
BY 오철우 l 2011.09.16


최근 1~2년 사이에 인류 진화 역사에 대한 설명을 수정해야 할 이유들이 터진 봇물처럼 잇따라 생겨나고 있다.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진화의 과정에서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 같은 다른 종들과 짝짓기를 하여 유전자 교환을 했다는 디엔에이의 증거들이 발견되었으며,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속과 사람 속을 잇는 새로운 화석이 남아프리카에서 발굴되어 학술지에 발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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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인류(호모 사피엔스)의 기원과 확산을 설명하는 가장 널리 알려진 학설은 대강 이럴 것입니다. 20만 년에 아프리카에서 출현한 호모 사피엔스의 일부 집단이 6만5천 년 전~7만 년 전 무렵에 아프리카를 벗어나 서서히 전 대륙으로 확산하고 진화하면서 여러 인종과 민족이 현재 지구촌에 분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호모 사피엔스에 훨씬 앞서 40만~50만 년 전 무렵에 아프리카를 벗어나 이미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던 다른 고인류 종들은 멸종하였으며, 호모 사피엔스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지금 우리의 첫 조상인 ‘아담’과 ‘이브’는 아프리카에서 태어나, 거기에서 시작된 가지치기를 따라 지금까지 그 자손이 번창해왔다고들 얘기되지요.


그런데 최근 들어 현생 인류의 기원과 관련해 새로운 화석이 발견되고, 또한 고인류의 유전체(게놈) 분석 기법들이 발전하면서, 인류의 진화 역사를 설명하는 주류 학설에 변화가 조금씩 생기고 있어서 주목됩니다.


변화를 몰고온 것은 무엇보다 혁신적으로 발전한 게놈 염기서열 분석 기법입니다. 그리고 3개의 화석 조각들입니다. 그 하나는 이미 널리 알려진 네안데르탈인의 화석이며, 지난해 발표돼 단박에 주목의 대상이 된 시베리아 지역의 데니소바인 화석, 그리고 얼마 전에 발표된 남아프리카 지역의 세디바인 화석입니다.


금 화제가 되는 주요한 연구결과들을 간추리면, 먼저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 화석에서 추출한 소량의 게놈을 증폭하여 분석했더니, 뜻밖에도 지금 살고 있는 인류의 일부 지역 인구집단들의 게놈에 고인류와 공유하는 1 내지 5퍼센트가량의 디엔에이(DNA)가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를 인류 진화사에서 해석하면 현생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나온 뒤 확산하는 과정에서 네안데르탈인이나 데니소바인과 이종 짝짓기를 하여 유전자를 교환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현생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나와 호모 사피엔스만의 고유한 유전체를 유지하며 여러 인종으로 분화했을 거라는 기존 설명은 바뀌어야 하겠지요. 현생 인류의 진화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설명도 되겠군요.


또한 최근에는 세디바인의 화석이 인류가 진화계통상 더 오래된 유인원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속과 연결돼 있음을 보여주는 해부학적 증거들을 지닌 것으로 제시되었습니다. 즉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속과 호모 속을 연결하는 징검다리의 종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것이지요. 이런 최근 연구들은 우리 자신의 오래된 역사를 파고든다는 점에서 매우 높은 관심을 받고 있으나, 아직은 현재진행의 과학이기 때문에 여전히 연구결과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며 세부적인 논란도 벌어지고 있다는 점은 염두에 두고서 바라봐야 할 듯합니다. 후속 연구들에서 더 많은 증거와 분석들이 쌓이고 뒷받침되면서 인류 진화의 역사는 점점 더 정교하게 서술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 글에서는 인류 진화와 관련해 주목받았던 최근 연구들 몇 가지를 외신 보도와 논문들의 머릿글을 중심으로 간략히 정리해보았습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속, 호모 속, 호모 에렉투스 종, 호모 사피엔스 종, 그리고 호미니드(사람과[科]) 같은 분류학 용어들이 헷갈린다면, 먼저 이 글의 맨 아래에 붙인 표 그림들을 보는 게 도움이 됩니다. 인류 진화의 역사를 큰 그림으로 조망하는 표, 호미니드 과에 속한 다른 영장류들의 속을 분류한 표 등입니다.)

2011. 9. 9



■ 세디바인 Australopithecus sediba

“호모 속과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속을 잇는 징검다리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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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랄로피테쿠스 세디바의 두개골 화석. 출처/ Wikimedia Commons

세디바인 화석은 2008년 8월 남아프리카 말라파(Malapa) 지역의 동굴에서 처음 발견됐다. 후속 발굴 작업을 거쳐 10대 소년과 30대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머리, 손, 발, 골반 뼈들이 잇따라 발견됐다. 이 화석을 발견하고 분석한 남아공 비트바테르스란트대학의 리 버거(Lee Berger) 교수 연구팀은 최근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이 화석의 해부학적 특징을 다각적으로 분석해보니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특징과 인간의 특징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는 이 화석의 주인공이 두 속을 잇는 진화의 연결고리일 가능성이 높다는 다섯 편의 논문을 한꺼번에 발표했다.


이런 연구결과의 주요 근거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무엇보다 머리 화석을 통해 추정되는 세디바인의 뇌 용량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나 침팬지와 비슷하게 아주 작은 420 세제곱 센티미터 정도로 추정됐으나, 인지 능력과 깊은 관련이 있는 뇌의 전두엽 부위가 인간 종과 비슷하게 확장되고 있는 흔적이 싱크로트론 장비를 이용한 정밀분석 과정에서 발견됐다. 또한 다리뼈와 복사뼈로 볼 때에 세디바는 직립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복사뼈는 인간의 것과 매우 비슷한 꼴을 갖췄으나, 반면에 발과 정강이 뼈는 침팬지와 비슷한 꼴을 지닌 것으로 분석됐다. 머리는 크지 않은데도 골반 뼈는 인간의 것과 비슷하게 비교적 큰 것으로 조사돼, 뇌 용량이 커지면서 뒤이어 골반 뼈가 커졌다는 기존 학설에 의문을 제기하는 증거로도 해석되고 있다. 세디바인은 두 발로 걸을 수 있었으되 주로 나무 위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버거 교수는 세디바인이 호모 에렉투스의 직접 조상이거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후기 종일 가능성이 있다는 해석을 제시했다.


[논문 안내 글 직접 읽기]

“인류(호모) 이전 200만 년 전에 생존했던 속(genus)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인간 조상이 갈라져 나온 변화 과정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이런 변화 과정 무렵에 존재했던 주요한 화석이 남아공 동물에서 발견된 몇 개의 표본들로 대표되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세디바이다. <사이언스> 이번 호에 실린 5편의 보고서는 세디바 화석의 주요 특징들을 논한다. 거기에는 비슷한 다른 호미니드(사람과[科]) 유물들에서는 잘 보존되지 않은 일부 특징도 포함돼 있다. [다섯 편의 보고서 중에서] 피커링(Pickering) 등의 논문은 화석의 연대가 200만 년이 조금 안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키바이(Kibii) 등의 논문은 세디바의 뇌 용량은 작았는데도 세디바의 골반 구조가 당시에 이미 인간의 것과 유사한 쪽으로 진화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칼슨(Carlson) 등의 논문은 세디바의 뇌가 크지는 않았지만 현생 인류의 뇌 모양 쪽으로 점차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두개골의 뇌 흔적 형상을 설명한다. 키벨(Kivell) 등의 논문과 지펠(Zipfel) 등의 논문은 손, 발, 복사뼈의 해부학적 특징을 서술하는데, 이는 세디바가 여전히 나무들 사이에서 이동하며 살았을 가능성을 보여준다.”(5편 논문을 소개하는 <사이언스>의 편집자 글)


과학저널 <네이처>는 뉴스 보도에서 세디바가 인류의 조상일 수 있음을 밝힌 연구논문들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고 전하면서, 동시에 아직까지는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는 연구결과를 즉각 받아들이지 않는 신중한 분위기도 있다고 전했다. 미국의 한 신경해부학자는 “두개골 안쪽에 나 있는 뇌의 압박 흔적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속 다른 종들의 것과 비교해봐야 세디바의 뇌 형상이 인류와 닮았다는 점을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반응을 보였으며, 다른 미국 고고인류학자는 세디바가 인류로 이어진 조상인지 인류의 특징을 일부 지니다가 멸종한 종일 뿐인지 판단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2010. 12. 22



■ 데니소바인: hominid Denisovans

“현생 인류와 공존했던 제3의 고인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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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소바인의 게놈 분석은 손가락뼈와 어금니(위 사진)에서 추출한 것을 이용해 이뤄졌다. 사진/ Nature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의 일부 집단이 아프리카에서 나온 뒤 고유한 유전자를 지닌 채 지금의 여러 인종으로 분화했던 게 아니라, 그 과정에서 다른 종들과 이종교배를 하며 유전자 교환을 했을 가능성이 있음은, 네안데르탈인의 게놈과 오늘날 인류의 게놈을 비교분석한 앞선 연구결과에서도 제시된 바 있다(이 글 아래에 자세히). 그런데 현생 인류가 네안데르탈인과는 또 다른 종과도 짝짓기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연구결과가 지난해 12월 새롭게 발표돼 주목을 받았다 (뉴욕타임스 보도).


독일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의 스반테 파보(Svante Pääbo) 박사가 이끄는 독일, 러시아, 미국 공동 연구팀은 지난 2008년 시베리아 남부 알타이산맥의 데니소바 동굴에서 러시아 연구팀에 의해 발견된 손가락뼈와 어금니 화석에서 미량의 게놈을 추출해 분석하고 이를 지금 인류의 게놈과 비교함으로써 이런 결론을 얻어냈다. 이 연구는 과학저널 <네이처>에 2010년 12월 발표됐다.


국제연구팀을 이끈 파보 박사는 이에 앞서 네안데르탈인의 화석에서 추출한 미량의 게놈을 분석하는 기법을 개발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네안데르탈인의 게놈 염기서열을 분석한 바 있다. 이런 앞선 연구를 바탕으로, 국제연구팀은 데니소바인의 게놈을 네안데르탈인의 게놈, 그리고 현존 인류의 게놈들과 비교했으며, 여기에서 데니소바인이 네안데르탈인도 아니며 현생 인류도 아닌 제3의 고인류 종일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을 얻어냈다. 데니소바인의 등장은 고인류의 생물학적 다양성이 지금껏 알려진 것보다 컸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연구팀은 데니소바 동굴에서 발견된 화석의 주인공한테 ‘데니소바인’이라는 이름을 따로 붙였다.


연구에서는 지구에 존재했던 시기가 겹치는 데니소바인과 현생 인류 사이에 이종 짝짓기가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유전학적 증거도 발견되었다. 비교 연구에 쓰인 현생 인류의 게놈으로는 현존하는 남아프리카인, 나이지리아인, 프랑스인, 중국인, 그리고 파푸아 뉴기니인의 게놈이 사용되었다. 이 분석에서는 놀랍게도 데니소바인의 게놈 일부가 현생 인류의 게놈에 흘러들었을 가능성이 나타났다. 특히 파푸아 뉴기니인의 게놈에서는 데니소바인의 고유한 디엔에이가 4.8퍼센트나 발견되었다.


이에 따라 데니소바인은 네안데르탈인의 이주 시기와 비슷하게 대략 5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나와 퍼졌으며, 네안데르탈인이 서쪽 방향으로 이주해 유럽과 서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퍼진 데 비해 데니소바인은 동쪽 방향인 아시아 쪽으로 이주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논문 머릿글 직접 읽기]

“시베리아 남부 데니소바 동굴에서 발견된 손가락뼈에서 추출한 디엔에이를 추출해, 우리는 원시 사람과(科)의 게놈 염기서열을 1.9배수로 해독했다. 이 개체는 네안데르탈인과는 공통의 기원을 지닌 집단에 속해 있다. 이 인구집단은 네안데르탈인에서 유라시아인으로 흘러들어갔을 것으로 보이는 유전자 흐름과는 관련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번에 분석한 데이터는 그 인구집단의 유전물질 4~6%가 오늘날 멜라네시아인에게 전해졌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 사람과(科)의 인구집단에 ‘데니소바인(Denisovans)’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그들이 홍적세(Pleistocene epoch, 200만 년 전~1만 년 전) 후기에 아시아에 널리 퍼져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제시한다. 데니소바 동굴에서 발견된 이빨에는 손가락뼈의 것과 매우 흡사한 미토콘드리아 게놈이 들어 있다. 이 이빨은 네안데르탈인이나 현생 인류와 비교할 때에 파생된 형태의 특징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더 나아가 데니소바인은 네안데르탈인과 현생 인류와는 다른 진화의 역사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네이처 논문 요약문)



2010. 5. 7



■ 네안데르탈인: Homo neanderthalensis

“현생인류의 이종교배 가능성을 처음 보여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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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안데르탈인의 디엔에이 물질은 이 뼈 조각 화석들에서 추출됐다.

독일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의 스반테 파보 박사가 이끄는 연구팀은 지난 2010년 5월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네안데르탈인과 현생 인류 사이에 이종교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 흔적이 현생인류의 게놈에 남아 있다는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네안데르탈인은 유럽과 서아시아 등지에서 3만 년 전까지 생존했던 구인류로서, 생존 지역과 기간으로 볼 때에 호모 사피엔스와도 상당 기간에 걸쳐 공존했을 것으로 추정돼왔다.


연구팀은 크로아티아의 동굴에서 출토된 네안데르탈인 뼈 조각 화석에서 추출한 미량의 디엔에이 물질을 증폭하는 기법을 활용해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 정보를 분석했다. 연구팀은 네안데르탈인의 게놈을 지금 인류의 게놈 정보와도 비교해보니 오늘날 비아프리카인의 게놈 중에서 1~4%가 네안데르탈인의 게놈에서 온 것으로 추정된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밝혔다. 이는 현생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나온 이후에, 그리고 유럽인과 아시아인으로 갈라지기 이전에, 네안데르탈인과 이종교배를 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유력한 증거로 해석되고 있다 (뉴욕타임스 보도).


[논문 머릿글 직접 읽기]

“오늘날 인류 종에 가장 가까운 진화 관계에 있던 네안데르탈인은 3만 년 전 사라지기 전까지 유럽과 서아시아의 넓은 지역에 퍼져 살았다. 우리 연구팀은 3개체에서 나온, 40억 개 이상 염기로 이뤄진 네안데르탈인 게놈의 염기서열 분석 초안을 제시한다. 이 네안데르탈인 게놈을 오늘날 세계의 5개 지역에 떨어져 살고 있는 5명의 게놈과 비교함으로써, 우리는 현생 인류 조상에서 적극적 선택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이는 많은 게놈 영역들을 찾아냈다. 거기에는 대사와 인지 발달, 두개골 발달과 관련된 유전자들도 포함돼 있다. 우리 연구팀은 네안데르탈인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현존 인류보다는 유라시아의 현존 인류와 더 많은 유전적 변이를 공유하고 있음을 제시한다. 이는 네안데르탈인에서 비아프리카인 조상으로 향한 유전자 유입이 유라시아인 집단이 분화하기 이전에 일어났음을 보여준다.”(사이언스 논문 요약문)




2011. 8. 25



■ 종간 유전자 교환

“현생 인류는 양질의 면역 유전자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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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피엔스는 진화하며 세계 각지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 같은 다른 고인류들과 짝짓기를 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출처/ Nature에 실린 도표 부분

현생 인류가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 같은 진화의 사촌 종들과 짝짓기를 했다는 게놈 비교분석의 결과들이 잇따라 발표돼 주목받는 가운데, 최근에는 이런 종간 짝짓기가 현생 인류한테 매우 값진 면역 유전자를 획득하는 기회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는 연구논문도 발표돼 주목받았다.


미국 스탠포드대학교 의과대학의 피터 파엄(Peter Parham) 교수가 이끄는 국제 공동연구팀은 2011년 8월25일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병원체를 찾아내어 공격하는 우리 몸의 면역 기능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는 HLA(인간백혈구항원) 계열 유전자의 변이가 오늘날 인종별로 어떻게 다르게 분포하는지 분석하고 이를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의 게놈과 비교해 이런 결론을 제시했다. 수천 명의 현존 인류와 3개체의 네안데르탈인 화석, 그리고 1개체의 데니소바인 화석에서 추출한 게놈의 일부 염기서열을 비교 분석했다.


분석 결과를 보면, 네안데르탈인이나 데니소바인이 지닌 HLA 계열의 특정 변이 유전자는 오늘날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 사는 사람들한테서도 자주 나타났으나, 특이하게도 현존 아프리카인들한테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발견됐다. 특정 변이 유전자는 연구팀은 이런 특정 유전자의 분포의 불균등은 현생 인류와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의 종간 짝짓기 때문일 수 있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즉, 이런 변이 유전자는 6만~7만 년 전에 현생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나온 이후에 마주친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들과 짝짓기를 하면서 유전자 교환을 한 데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아프리카인들한테서는 잘 발견되지 않으나 유럽인과 아시아인들한테서는 자주 발견된다는 것이다. 현생 인류가 질병과 환경에 대해 갖춘 훌륭한 면역 기능의 일부는 다른 종들과 짝짓기를 하면서 생긴 유전자 교환 덕분이라는 설명이다.





■ 참고 자료 그림들



(1) 인류 기원의 역사를 큰 그림으로 조망하는 데에는 아래 표 그림이 도움이 됩니다. 위키피디어에서 가져온 그림입니다 (Wikimedia Commons). 대략 700만 년 전부터 시작하는 이 그림은 대략 20만 년 전쯤에 출현한 현생 인류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가 인류 진화사에서 볼 때에 최근의 일임을 보여줍니다. 오랜 시기가 겹치긴 하지만 호모 속 이전에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속의 시대가 있었으며, 그 사이에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세디바의 이름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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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랄로피테쿠스 속과 호모 속을 주로 보여주는 부분만을 확대한 그림은 아래와 같습니다. 세디바인은 어디쯤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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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래 그림은 호미니드(사람 과[科])의 분류표입니다. 위키피디어에서 가져왔습니다 (Wikimedia Commons). 인간은 사람 속(genus Homo)에, 침팬지와 보노보는 판 속(genus Pan)에, 고릴라는 고릴라 속(genus Gorilla)에, 오랑우탄은 퐁고 속(genus Pongo)에 분류되어 있으며 이 속들이 호미니드에 속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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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래는 ‘사람과(호미니드)에 속한 인구집단들의 시공간 분포’를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현생 인류와 네안데르탈인이 시공간적으로 겹쳐 존재했음을 보여줍니다. 학계에는 하나의 정설만 있는 게 아니므로 이 그림에 실린 용어나 종들의 지리적 분포에 관해 다른 견해들도 있습니다. 그림 자료는 위키피디아에서 가져왔습니다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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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철우
“기억 남는 네이처 사설- 과학과 저널리즘은 같은 기초 위에 있다... 두 집단은 모두 직업적으로 의문을 품는 (그리고 확인하는) 사람들로 이뤄져 있다.”

한겨레신문사 과학담당 기자, 사이언스 온 운영자 | <과학의 언어> <과학의 수사학> 번역, <갈릴레오의 두 우주체제에 관한 대화> 저술 | 트위터 @wateroo

[여성조선] "생살을 깎아 먹여도 아깝지 않은 내 아들 반기문"

  신현순 여사는 지팡이를 내던지고 아들 반기문을 끌어안았다. / 조선일보 DB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 母情


아흔의 노모가 지팡이를 내던지고 달려간 곳은 장남의 품속이었다. 매일같이 108배를 올려가며 그저 건강하기를 빌고 또 빌었던 아들이었다. “생살을 깎아 먹여도 아깝지 않다”던 노모의 아들은 얼마 전 연임소식을 전해온 반기문 유엔(UN) 사무총장이다. 1년 만에 다시 아들의 얼굴을 매만졌다는 노모는 벌써부터 아들이 그립다.

“나는 친정 할머니가 가르쳐주신 대로 우리 애들을 키웠는데, ‘물에 돌팔매질 하지 말거라.’, ‘나뭇잎 함부로 따지 말거라.’, ‘땅에 떨어진 물건이라도 함부로 주워오지 말거라.’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어. 기특하게도 우리 애들은 누구 하나 속 한 번 안 썩이고 가르친 대로 착실하게 커줬어.”

반기문 UN 사무총장의 어머니 신현순 여사(90)를 만난 건 충북 충주시의 한 아파트 노인정에서였다. 연분홍 장미가 그려진 곱디고운 치마에 하얀 리넨 재킷을 차려입은 신 여사는 아흔이라는 나이가 무색하도록 정정한 모습이었다. 약속도 없이 찾아간 기자 일행이 당황스러울 법도 했지만, “어떻게 그 멀리서 나를 보러 왔느냐”며 손을 꼭 잡아주기도, 등을 쓸어내려주기도 했다.

노인정 한쪽에서 화투삼매경에 빠져 있던 할머니들이 “아들이 유명해서 사진도 찍히고 좋겠다”는 농담을 건네자 신 여사는 “여기저기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데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 줄 모른다”며 웃었다. 며칠 전 있었던 반기문 사무총장의 고향 방문행사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반 총장은 지난 14일 고향인 충북 음성군 원남면 상당1리 윗행치마을을 방문했다. 유엔 사무총장이 된 후 네 번째 방문이었다. 선친 묘에서 성묘를 한 뒤 광주 반씨 조상의 사당에서 참배를 마친 반 총장 내외는 지난해 말 복원된 생가를 둘러보기도 했다.

수많은 환영 인파에게 “여러분의 따뜻한 성원에 힘입어 열심히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뜻을 전한 반 총장은 모교 충주고등학교를 찾아 후배들을 만나기도 했다. 6일간의 한국 방문일정을 마친 반 총장은 이날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딸 반정란 씨 내외와 함께 살고 있는 노모는 집으로 가자며 기자의 손을 이끌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파트 앞 슈퍼에서 사들고 간 두유박스를 한사코 노인정에 두고 가라며 손사래를 치던 모습이었다. “여기 할머님들 잡숫게 그냥 두라”는 말씀 속에는 분명 따뜻한 배려가 배어 있었다.

공동 출입문을 열고 도어락의 숫자를 누르는 등 아흔의 노인에게 결코 간단하지만은 않을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어느 깔끔하고 소박한 가정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사진기자가 안쓰러웠던지 노모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선풍기 바람을 쐬라고 성화였다.

반기문 총장의 어머니 신현순 여사 / 조선일보 DB
이리저리 돌아가는 선풍기 고개를 바라보며 그렇게 인터뷰가 시작됐다. 기자는 노환으로 청각이 불편한 신현순 여사의 곁에 바짝 다가앉아 귀에다 대고 큰 소리로 또박또박 질문을 해야 했다.

불과 3일 전 아들을 부둥켜안은 노모는 “그날이 꼭 꿈결 같았다”고 회상했다. 연임 이후 처음으로 고향 방문에 나선 아들을 만나기 위해 노모는 미리부터 행사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학수고대 하던 아들이 들어서자 노모는 지팡이를 내던지고 얼른 아들을 얼싸안았다. “1년 만에 만났는데 너무 좋았지 뭐. 바빠서 제대로 얘기도 못 했어. 그저 건강해라. 끼니 잘 챙겨먹어라. 그러고 말았지.”

아들 얘기에 진작부터 화색이 돌던 신현순 여사는 반 총장의 어린 시절을 들려달라는 말에 마치 어제 일인 양 생생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기문이 위로 형이랑 누나가 있었어. 토실토실하니 잘 크던 애들이 꼭 두 살을 못 넘기고 고만 가버리더라고. 세 번째 들어선 애가 기문인데 앞에 애들이 잘못돼서 집안 어른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태기가 있자마자 친정 할머니가 무당을 불러다가 굿까지 했을 정도니까…. 나도 절에 다니면서 빌고 또 빌었어. 점점 배가 불러오는데 얼마나 조심을 했다고. 기문이를 낳은 건 초여름이었어. 그날 우리 숙모가 도토리묵을 쑨다 그래서 같이 도토리 물을 내는데 아무래도 애가 나올 것 같더라고. 집에 가서 낳아야겠다는 생각에 대문간을 막 나서는데 문지방을 넘기까지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몰라. 간신히 문지방을 넘어서 앞치마 끄르고, 치마 끄르고 애를 낳았지. 그런데 애 목에 탯줄이 세 번이나 감겨 있었어. 새파랗게 질려서 울지도 않더라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 그래 앞치마를 덮어서 가만, 가만 애기 몸을 주무르니까 그때서야 켁켁거리면서 울기 시작하는 거야. 애가 소담하니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천신만고 끝에 얻은 아들. 어머니는 불면 날아갈까 쥐면 터질까, 애지중지 아들을 길렀다. 부유한 가정에서 가족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란 어린 시절의 기문은 예의를 알고, 도리를 아는 착한 아이였다.

“우리 기문이는 참 착했어. 너무 착해서 가끔 미울 정도였지. 마을에 동갑내기 애가 하나 있었는데, 걔한테 만날 그냥 두들겨 맞고 오는 거야. 그러면 기문이 동생이 대번에 나한테 쫓아와서 ‘엄마, 형아 또 맞아. 형아 죽어.’ 그랬지. 속은 상해도 ‘너도 같이 때려라.’ 그러진 않았어. 나는 친정 할머니가 가르쳐주신 대로 우리 애들을 키웠는데, ‘물에 돌팔매질 하지 말거라.’, ‘나뭇잎 함부로 따지 말거라.’, ‘땅에 떨어진 물건이라도 함부로 주워오지 말거라.’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어. ‘나중에 저승 가면 그대로 되돌려 받느니라.’ 그랬지. 기특하게도 우리 애들은 누구 하나 속 한 번 안 썩이고 가르친 대로 착실하게 커줬어.”

3남2녀의 형제들 중에서도 유독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했던 장남 반기문은 어머니의 자랑이었다. 동네 어른들에게 90도로 허리 굽혀 인사하는 아이, 밥 한 술에 신문 한 줄을 읽던 아이, 다투는 동생들에게 찬찬히 그 이유를 묻고 이야기를 들어주던 아이, 그 아이가 바로 반기문이었다.

통운회사 소장을 지냈던 아버지가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급격하게 가세가 기울었던 그 시절에도 기문은 동생들을 보살피며 집안일을 도왔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을 만큼 지독하게 공부했는데, 어머니는 아직도 밤을 새워가며 책을 읽고 공부를 하던 아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좀 자거라, 자거라.’ 하는 말이 입에 붙어버렸어. 어쩌다 밥이 눌어 누룽지가 생기면 그거 박박 긁어서 공부하는 데 밤참으로 넣어주고 그랬지. 외교관이 꿈이라 영어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저기 댐 가는 길목에 비료공장이 하나 있었단 말이야. 거기에 있는 외국인 근로자를 만난다고 친구 서이서(셋이서) 만날 쫓아다녔어. 그 친구 이름이 뭐냐면….”

아흔이 넘은 노모는 50년 전 아들의 친구 이름까지 줄줄 꿰고 있었다. 아들에 대한 지극한 애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반 총장이 서울대 입학시험을 앞두고 있던 그때 나무 밑에다 백설기를 쪄놓고 수십 번, 수백 번 절을 올리던 어머니는 실로 놀라운 일을 경험하기도 했다.

“우리 기문이가 서울대 입학시험을 치르고 와서 나한테 그래. 어젯밤에 꿈을 꿨는데, 벽에 웬 문제가 빽빽하게 적혀 있어서 다 풀어봤더니 다음 날 시험에 꿈에서 본 문제가 똑같이 나오더라고. 예삿일이 아니구나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서울대 외교학과에 수석으로 척 붙었지 뭐야.”

노모는 요즘도 매일같이 집 근처 절에 출근도장을 찍는다. 불상 앞에 앉아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치성을 드리는데, 그 정성의 중심엔 언제나 아들 반기문이 있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없어도, 유독 아픈 손가락은 있게 마련이다. “뭐니 뭐니 해도 장남이 최고”라는 노모의 얼굴에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애정이 서렸다. 노모의 지극정성은 반 총장을 지탱하는 힘이었다.

반기문 총장은 어머니 신현순 여사를 많이 닮았다. 노인정에서 한눈에 반 총장의 어머니를 알아볼 수 있었던 건 그래서였다. “반 총장님이 어머님을 많이 닮았다”는 말에 노모는 “나보다 저희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기문이는 아버지랑 판박이여. 점잖은 성격이며, 남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아주 똑같아. 애 아버지 살아생전 내 소원이 뭐였게. 부부싸움 한번 해보는 게 소원이었어. 마음 단단히 먹고 한바탕 하려고 들면 고만 자리를 피해버리는데 싸움이 날 수가 있나. 한약방을 했던 시아버지도 아픈 사람들을 도와주곤 하셨어. 그러고 보면 사람 선한 게 집안 내력인 것 같아. 참 우리 남편 사진을 좀 보여줄꺼나.”

신현순 여사는 한 장 한 장 사진을 짚어가며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 조선일보 DB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난 노모는 방으로 들어가 장롱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쇼핑백에서 꺼낸 세 개의 액자 속에는 반기문 총장의 부친 고 반명환 선생과 신현순 여사의 사진이 담겨 있었다. “한 30년 전에 서울 구경 가서 찍은 사진인데, 양복 차려입은 품새가 근사하지? 참 멋쟁이셨어. 청주 농고까지 나온 똑똑한 양반이었는데…. 너무 일찍 가버렸지….”

시와 붓글씨에 능했다는 반명환 선생은 1991년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했다. 당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협상에 매진하던 반 총장은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공동선언이 채택된 후에야 아버지 빈소가 있는 충주로 직행했다.

유치장에 갇혀 있는 교통사고 가해자를 돌려보낸 일도 반 총장의 인품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크고 작은 일화 중 하나다. 창고에 숨어든 도둑에게 “도둑이 되고 싶어 도둑이 됐겠나. 배가 고프니 그랬겠지” 하던 반명환 선생이나 “사고를 내고 싶어서 냈겠나. 피할 수 없어 그랬겠지” 하던 반기문 총장이나, 부자는 따뜻한 인품까지 꼭 닮아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반 총장의 효심 또한 아버지를 닮은 것이라고 했다. “애들 아버지가 부모님한테 그렇게 잘하더니, 우리 아들도 똑같이 배웠어. 한 달에 서너 번은 꼭 전화해서 ‘어머니 건강조심하세요. 잡숫고 싶은 거 꼭 드세요.’ 신신당부를 한다고. 용돈도 풍족하게 주는데, 선물도 참 잘해줘. 특히 좋은 약 같은 걸 얼마나 많이 사다준다고. 내가 이렇게 건강한 건 다 새끼들 덕분이여. 나랑 같이 사는 우리딸은 오빠 한국 오기 전에 나 잘못되면 다 지 책임이라면서 고기며, 과일이며, 날마다 잘해줘. 내가 참 복이 많아.”

며느리 유순택 여사와 다정하게 손을 잡고있는 노모. / 조선일보 DB
인터뷰 내내 신현순 여사가 가장 많이 쓴 단어는 “착하다”였다. 그리고 착하디착한 아들보다 더 착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큰 며느리 유순택 여사라고 했다.

반 총장은 고등학교 3학년 때 ‘VISTA(Visit International Student to America) 프로그램’에 충청도 대표로 자동 선발되어 1등으로 시험을 마치고 다른 학생 세 명과 함께 미국에 다녀왔다. 백악관에서 케네디 대통령을 직접 만난 반기문은 그 일을 계기로 외교관의 꿈을 더욱 확고하게 키웠다고 한다.

당시 한국 대표로 선정된 반기문에게 이웃의 충주여고 학생들이 복주머니를 만들어 건넸는데, 외국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기념선물로 나눠주라는 의미였다. 이때 완성된 복주머니를 대표로 전달한 사람이 당시 충주여고 학생회장이었던 유순택 여사였다.

“우리 며느리가 고등학교 때부터 집에 놀러오고 그랬어도 기문이 색싯감인 줄은 몰랐어. 다른 데서 자꾸 중신이 들어오는데 기문이가 싫다니까 분명 색시가 있구나 했었지. 나중에 기문이 친구한테 둘이 서로 좋아지내는 사이라는 걸 듣고서 내가 10월 동짓달에 바로 결혼시켜 버렸어. 겪어보니, 우리 아들도 착하지만 며느리는 더 착해.”

결혼 직전 유순택 여사의 어머니는 “남자가 해 지기 전에 집에 오는 것은 직업이 없거나 큰 병을 앓고 있을 때이니 반 서방이 늦게 들어오는 것에 대해 뭐라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아내의 내조 덕분에 반 총장은 업무에 매진할 수 있었고 승승장구했다.

반 총장은 유 여사와 슬하에 1남2녀를 두고 있다. 현재 아시아재단 사업부장으로 근무 중인 맏딸 선용 씨(41),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미국 UCLA 경영대학원 과정을 마친 뒤 현재 뉴욕 금융회사의 중동지점에서 근무하고 있는 아들 우현 씨(37), 유엔아동기금(UNICEF) 케냐사무소에서 국제기구초급전문가로 일하고 있는 막내 딸 현희 씨(36)다. 신 여사는 “아이들 모두 제 아비, 어미를 닮아 착하고 바르게 컸다”며 “늘 보고 싶다”고 전했다.

지난 14일 충북 음성에서 있었던 반기문 un 사무총장의 고향방문 행사 / 조선일보 DB
인터뷰 말미, 문득 ‘반기문 총장의 태생에 어떤 특별함이 숨어 있진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 들었다.
“꿈에 내가 어디를 막 가는데 길이 두 갈래로 나뉘더라고. 어느 한 길로 들어서니까 갑자기 하얀 도포를 입은 할아버지가 나타나서 다른 쪽 길로 가라지 않겠어? 그래 그 할아버지가 일러준 길로 걸어들어 갔는데 길마다 소나무가 다북다북하니 참 좋아. 한참을 가다 보니 조그만 오두막에서 우리 숙모가 나오데. 나한테 찹쌀떡 세 개를 주더라고. 그래서 내가 아들만 셋인가 봐.(웃음) 찹쌀떡을 받아들고 다시 걸어갔더니 이번엔 호두나무에 호두가 주렁주렁 열려 있어. 참 그 호두 좋구나 하면서 나무 가까이 가보니까, 그 아래 장끼 새끼가 푸드덕푸드덕 날아다니고 있는 거야. 그 꿈을 꾸고 나서 대번에 태기가 있더라고.”

두 시간의 인터뷰 끝에 “착한 끝은 있다”는 말과 “자식은 부모의 덕으로 커간다”는 말이 떠올랐다. 겸손함과 성실함, 상대를 먼저 살피는 배려는 반 총장이 부모님에게 받은 최고의 유산이었다. ‘생살을 깎아 먹여도 아깝지 않은 부모의 마음’을, 이날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봄 폭풍우는 지금 막 가라앉았다.

산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마을은 다시 한 번 정적에 깊이 가라앉고, 여기저기 실개울 소리가 되살아나고 있다. 안개처럼 아래로부터 피어올라오는 소리는 몇 만 마리의 누에가 쉬지 않고 뽕잎을 뜯어먹는 소리다. 하얗고 통통하게 살진 그 벌레들은 짧은 일생을 충실하게 이어가고 있다. 나는 숨죽이고 방 밖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온 신경을 모으고 있다.

나는 "밤까지 기다려"라고 말했다.

야에코는 블라우스 단추를 모두 끄르며 씩 웃더니 가슴을 활짝 열어 보였다. 예쁜, 소독약보다 하얀, 유방이 이글거리는 태양의 직사광선을 받았다. 나는 펌프를 바삐 움직여 수압을 높이고 나서, 다시 울타리 쪽으로 달려간다. 달래서 돌아가게 할 생각이었는데, 야에코에게 다가가자 입보다 손이 먼저 나가버린다. 그렇다고 때린 것은 아니다. 오른손이 가시철망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 하얗고 부드러운 것을 움켜잡는다.

나는 지금 분명히 행복하다.

일년 전에는 상상조차 못했던 날들이다. 사과를 재배하고, 결실의 반은 내다팔고 반은 먹고, 오래 살고, 생선 껍질로 된 옷을 입고, 누군가를 쫓고, 그러다 언젠가는 사과나무 아래 묻히는, 그런 일생을 살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나에게는 야에코가 있다.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자는, 아버지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꿈’이 아니라 ‘현실’을 살다[2011.09.12 제877호]
[2011 만인보]한국인 남편과 사별 뒤 홀로 아이 키우는 흐엉씨…고향 베트남을 그리워하며 고단한 오늘을 견디는 그녀
“엄마, 엄마!” 꿈결처럼 아이의 목소리가 흩어진다. 4살의 동그란 눈에 까만 머리칼을 한 딸 하란이 흐엉(25·가명)씨를 깨웠다. 아침 7시30분. 또 지각이었다. 흐엉씨는 서둘러 일어나 아이의 밥부터 챙긴다. 어린이집 버스 도착 시간에 간신히 맞춰 딸아이를 태우고는 머리를 질끈 묶은 채 아파트 옆 지하실로 향한다. 그녀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하는 작은 건어물 포장 공장이다.

20살 때 만난 33살의 한국 남편

» 남편과 사별한 흐엉씨는 홀로 4살짜리 딸을 키우며 살고 있다. 지난 8월31일 오후, 직장인 집 근처 건어물 공장에서 그녀가 일하고 있다. 한겨레21 정용일
새벽부터 오토바이 소리가 가득해지는 베트남, 호찌민시 외곽의 시골마을 하우얀이 그녀의 고향이다. 무성한 숲에 둘러싸여 유독 공기가 달콤했던 작은 마을. 그곳에서 그녀는 오빠 4명과 언니 2명을 둔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마을 안에서 작은 생선가게를 했고, 집은 그 안채의 작은 방이었다. 온 식구가 가게 일에 매달렸지만, 특별한 술수도 욕심도 없는 그들의 소득은 언제나 부족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초등학교 6학년까지 학업을 마친 그녀는 학교도 다니지 않고 가게와 안채에 머물며 나머지 청소년기를 보냈다. 책 읽을 기회도 다양한 문화를 접할 기회도 없었다. 유일한 세상의 창은 텔레비전이었다. 베트남에 한류 바람이 불 때였다. 자연히 그녀도 한국에 대해 막연한 동경을 품었다. 마을 친구들이 하나둘 한국으로 국제결혼을 해서 떠나자, 부러움이 솟았다. 15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가게를 도맡은 오빠들이 하나둘 결혼해 집은 점차 좁아졌다. 20살, 마침내 그녀는 가족이 반대하는데도 국제결혼 소개소의 문을 두드렸다.

남편 김씨는 33살의 청년이었다. 농사가 아닌 운송(그는 택배를 그렇게 표현했다) 일을 하고, 비교적 젊은 축에 드는데다 눈빛이 선량해 흐엉씨는 처음부터 믿음이 갔다. 국제결혼을 하는 다른 이들처럼 그들도 한두 번의 만남으로 탐색을 종결짓고 베트남식 결혼식을 올렸다. 온 가족이 모여 찍은 처음이자 마지막 사진이었다.

한국에 오자마자 후회를 했다. 북적거리는 집이 싫은 때가 언제이던가 싶게 그 비좁고 시끄러운 집이 서럽도록 그리워졌다. 얼마간 자신을 탓하며 지냈다. 다행히 남편은 한국 남자답게(베트남 남자들은 냉정한 편이라고 생각하는 그녀다) 자상했다. 덕분에 초기 향수병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러나 언어 장벽 문제는 여전했다. 한국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고, 친구는 한 명도 없었다. 흐엉씨는 동 주민센터의 도움을 받아 한국어 가정방문 수업을 꾸준히 받으며 언어와 한국문화 공부에 열을 올렸다. 어느 정도 말문이 터졌을 때, 딸 하린을 얻었다. 남편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기뻐했다. 연로하신데다 병환이 깊은 시아버지 때문이기도 했지만, 본래 아이를 좋아하는 남편이었다. 일이 끝나면 쏜살같이 집으로 돌아와 하린을 돌보았다. 아직은 한국말이 서투른 엄마 대신 말을 가르친 것도 그였다. 흐엉씨는 살림이 빠듯하고 종종 외로움에 시달렸지만, 남편과 딸아이와 함께 꾸려가는 한국 생활에 감사했다. 2년 전에는 가족 모두 베트남에도 다녀왔다. 타국으로 떠난 막내딸이 손녀까지 데리고 돌아오자, 어머니는 기뻐하며 눈물을 흘렸고, 그토록 먹고 싶던 음식도 잔뜩 만들어주었다. 흐엉씨는 그 모든 행복이 계속되리라고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거짓말 같은 남편의 죽음

» 건어물 공장이 9월에 먼 외곽으로 이전한다. 흐엉씨는 아이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따라갈 수 없다. 곧 다른 일거리를 찾아야 한다. 집의 대출금을 갚아야 하고, 아이를 양육해야 한다. 그녀의 요청에 따라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했다. 한겨레21 정용일
남편의 죽음은 너무나 갑작스러워 믿기지 않았다. 심장마비. 아직 젊은 그였다. 남편은 어린 딸이 눈에 밟혀 차마 눈도 감지 못하고 떠났다. 흐엉씨는 가엾은 남편과 자신, 그리고 딸을 생각하며 울었다.

살아간다는 것은 때론 잔인한 일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오늘’이라는 하루의 시간을 살아야 했다. 아빠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고 여전히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하린을 위해 그녀는 눈물을 삼키고 살 궁리를 찾았다.

베트남의 가족은 귀향을 독촉했다. 타국에서 남편도 없이 홀로 아이를 키운다는 게 쉽겠느냐는 말이 틀리지는 않아 보였다. 하지만 한국에서 태어나 아직 한 번도 베트남어를 뱉어본 적 없는 하린에게 혼란을 주는 게 옳은 일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시댁 역시 아이를 데려가는 것을 반대했다. 아이를 두고 혼자 베트남으로 가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베트남행을 포기하는 대신 이사를 선택했다. 도저히 남편의 그림자가 있는 곳에서 눈물 없이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시댁 식구의 도움을 받아 이사했다. 작고 낡은 1층 집. 그래도 새로 벽지를 바르고 장판을 까니 나쁘지는 않았다. 일자리도 얻었다. 근처의 건어물 공장에서 명태, 북어, 멸치 등속을 포장하는 일이었다. 그것이 9개월 전이다.

흐엉씨는 공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잠시 멈춰섰다. 환기가 잘 되지 않는 자신의 집과 마찬가지로 이곳 지하 사무실은 곰팡이 냄새와 마른 건어물 냄새가 뒤엉켜 잠시 숨고르기가 필요하다.

“흐엉, 어서 와서 일해야지. 지각이라고.”

동료 하나가 그녀를 발견하고 부른다. 공장은 요즘 한국의 대명절 추석이 다가와서 매우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추석이 지나면 공장 이사도 계획 중이어서 사무실은 혼잡하다. 그녀는 수없이 쌓인 상자들 사이를 지나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멸치를 상자에 담는 단순한 작업이다. 머리 위로 낮은 창문에 달린 환풍기가 탈탈탈 돌아갔다.

잠시 쉬는 시간, 추석 선물용으로 팔려나가는 멸치 상자를 바라보며 흐엉씨는, 어쩔 수 없이 하우얀 고향마을을 떠올린다. 베트남에도 큰 명절이 두 번 있다. 설과 비슷한 1월의 명절 ‘뗏’과 4월의 ‘탈먼’이 그것이다. 명절이 되면 베트남에서도 성묘를 가서 절을 하고 ‘덧커리우’(우리나라의 장조림과 비슷한 음식으로, 명절뿐 아니라 평소에도 자주 먹는다)를 해먹었다. 가족이 오랜만에 모이면 나오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며, 생선가게에서 풍겨오는 익숙한 비린내와 밤이면 시끄럽게 울어대던 풀벌레 소리…, 흐엉씨는 어느새 오래전 기억으로 눈가가 촉촉해졌다.

아주 소중한 마음속 고향

“또 집 생각해?”

지나치던 사장님이 묻는다. 흐엉씨는 한국에서의 오랜 습관처럼 씨익 웃어 보인다. 무어라 설명할 길이 없을 때면, 그녀는 늘 그렇게 웃었다.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때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때도.

베트남에서도 말이 많은 아이는 아니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요란해지기보다는 가족과 함께 지내는 고요함을 즐기던 그녀였다. 그래서 더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지 모른다. 매년 가을이 되면 언니들과 어울려 찾던 루바산의 절에서 드리던 불공과 한가로운 산책을 다시 한번 할 수 있다면, 흐엉씨의 얼굴이 상상만으로도 족한 듯 밝아진다. 하린이 자라 함께 그런 시간을 즐길 수 있는 날이 언제 올지 아득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분명한 색채와 향기로 기억되는 마음속의 고향이 아주 소중하다. 그것이 지금 한국에서의 생활을 지탱해가는 힘이므로.

어느새 시간이 지나 오후 6시가 되었다. 사장님은 잔업을 좀더 해주기 바라지만,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하린을 돌봐줄 사람이 없는 흐엉씨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기다렸다는 듯이 버스에서 아이가 뛰어나왔다.

“엄마!”

흐엉씨는 아이를 안고 집에 들어간다. 이제부터 아이와 둘만의 시간이다. 저녁밥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는 단순한 일상이다. 밤 10시가 넘으면 아이는 떼도 부리지 않고 잠이 든다. 아직은 말이 서투른 엄마와 4살배기 딸만이 사는 고적한 집 안에서의 일과다. 최근 하린은 또래에 비해 말이 서투르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시청의 도움으로 하린이 한국어 방문수업을 받을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흐엉씨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처럼. 종종 그렇듯, 그녀는 잠이 든 아이의 곁에서 무수한 생각의 꼬리를 잡는다.

9월이면 공장은 이사를 간다. 먼 외곽으로 떠나기 때문에 그녀는 아이 때문이라도 따라갈 수 없다. 당분간은 일을 쉬더라도, 곧 일거리를 찾아야만 한다. 집의 대출금을 갚아야 하고, 아이를 양육해야 하고, 베트남에 다녀올 돈도 모아야 한다. 아이 학자금도 모아야 하고, 좀더 나은 한국에서의 삶을 만들어가기 위한 자격증 교육도 받고 싶다.

흐엉씨는 모든 게 낯선 타국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짐이 가끔은 믿기지 않는다. 처음 한국으로 떠나올 때 그저 결혼만 하면 모든 것이 행복해지리라는 단순한 믿음을 가진 것이 문제였는지 모른다. 나의 행복을 타인에게서 찾겠다는 것은 어쩌면 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 같은 것이었는지도…. 남편을 잃고 홀로 남은 그녀는, 그러나 스스로 강해지기 위해 입술을 깨문다. 이제는 가족에게 의지하거나 고향을 그리워하거나 남편을 생각하며 눈물만 지을 수는 없다. 베트남인이지만 한국인으로 살아남기 위해, 한 아이의 엄마로 살아남기 위해, 딸아이의 작은 손을 쥐며 약해지는 마음을 추스른다.

올 추석, 아이와 해먹을 ‘덧커리우’

아침이 밝아오면, 그녀는 또다시 건어물 사이에 앉아 하루 종일 포장을 하고 상자를 쌓아갈 것이다. 그것이 그녀가 동경해온 한국에서의 삶은 아니었을지라도, 꿈이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는 자신의 하루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그녀는 애써 웃으며 생각했다. 이 모녀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긍정과 용기이므로. 어디선가 엄마가 만들어주던 덧커리우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이번 추석에는 아이에게 그 요리를 만들어주리라. 어느새 베트남의 강렬한 색채를 입은 꿈에 휘감겼다.

전주=글 김소윤 제2회 손바닥 문학상 당선자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 인왕산 鶴학巢소島도에서 최범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