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를 멀리 하고 직장 동료나 아는 사람들과 모두 거리를 두고, 자신을 고립된 상태로 둘 것. 예술을 한다는 것은 혼의 문제와 접하는 것이므로 행복과 안정에 가까워지면 그만큼 거기서 멀어진다. 진실로 문학을 목표로 한다면, 고독을 향해 고독을 누르고 고독을 초월하라. 자신 이외의 곳에서 힘을 구하려 하지 마라. 불안, 분노, 고독감, 슬픔을 돌진해나가면 손대지 않은 문학의 금광이 펼쳐지고, 밟지 않은 봉우리들이 솟아 있다. 자폐가 아닌, 앞을 향한 ‘개인’, 앞을 향한 ‘활’이 되어야 한다…..

세상을 제대로 살아가는 사람과 정반대의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안정이 아니고 불안정, 질서가 아니고 혼란, 집단이 아니고 개인, 협조가 아니고 고행, 타협이 아니고 반항, 즉 반사회적 존재이다. 그 입장에 서봐야 보이지 않던 고통이 보이고, 갈등이 생기고, 불꽃이 튀는 것이다.”

마루야마 겐지, 에세이 <미래의 글 쓰는 이에게> 중에서

     

"나는 심심풀이로 책을 읽는 것이 싫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오토바이를 타고 바람처럼 질주하는 편이 좋다. 그쪽이 훨씬 재미도 있고, 훨씬 감동적이다. 젊은 사람은 활자의 세계에 탐닉하는 것보다는 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자신의 눈으로, 귀로, 온몸으로 현실이 무엇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젊은 시절부터 주위에 언어의 성을 높이 쌓아놓고 그 환상의 테두리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서려 하지 않으면서, 세상에 대하여 코멘트를 일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실은 현실처럼 재미있는 것도 없다. 그 어떤 소설보다 재미있다. 때로는 굴복하는 일도 있고, 엉망진창이라고 여겨지는 일도 있지만, 바로 그렇게 때문에 재미있는 것이다.

물론 실망스러운 일도 없지 않다. 더럽다고 하면 더럽기 짝이 없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 그러나 그런 현실 속에서 반짝이는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다. 그 발견의 감동이야말로 진정한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 마루야마 겐지 <소설가의 각오> p. 246

        

"이제 막 인생이 시작되었을 뿐인데, 고작 집과 학교 사이를 몇 년 왔다갔다한 정도로 모든 것을 다 알았다는 듯 시큰둥한 표정을 짓는 것은 머리가 나쁘다는 증거다. 그래봐야 제대로 접해본 인간상이라고는 반 친구나 선생, 부모 정도일 것이고 지식이래봐야 신문이나 잡지 그리고 텔레비전에서 주어들은 것뿐일 텐데, 고작 그런 것들을 가지고 판단을 한다면,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부모나 선생이 접하고 있는 세계 역시 좁디좁다. 그들은 종종 살 길은 한정돼 있고 그 길에서 벗어난 자는 인생의 패배자라는 투의 말을 즐겨 하는데,그것은 분명 틀린 말이다.

지금 젊은이들 앞에 가로놓여 있는 것은 다른 누구의 인생도 아니다. 다른 누구의 시간도 아니다. 다른 누구의 공간도 아니다. 한 젊은이가 제아무리 엉뚱한 짓을 저질렀다고 해도, 아무도 그 짓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주변에 있는 몇몇 인간이 자신의 삶의 양식을 깡그리 부정했다 해서, 일일이 좌지우지될 필요도 없다. 하물며 저 자신을 부정할 필요는 더더욱 없는 것이다."

"모든 예술이 그렇지만 문학 또한 얼마만큼 개인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에 따라 성패가 결정난다. 불안이나 고독에서 슬픔과 분노가 태어난다.

그 벽을 돌파한 곳에 나자신의 혼이 있다. 거기에 표현할 가치가 있는 무엇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니까 불안과 고독이야말로 창조하는 자들의 보물이다."

마루야마 겐지 인터뷰 (문예춘추 발간,『책 이야기』 2008년 5월호에 게재된 인터뷰)

-최신작(2008년) 『해와 달과 칼』은 전작 단편집 『낙뢰의 여로』에 비하면 피아노 소나타와 오페라 만큼 서로 다른 1300매짜리 대작입니다. 게다가 처음 내놓는 역사소설입니다. 우선 시대 설정을 무로마치시대로 한 것에 무슨 계기가 있으신 겁니까.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일월산수도병풍」(지쓰게쓰산스이즈)에 자극을 받았습니다. 아직 실물은 보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보고 실망할 것이 두려울 정도로 좋아하는 병풍화를 기폭제로 해서 상상력을 폭발적으로 전개한 소설을 쓰고 싶다는 꿈이 이미 40대부터 있었습니다. 구상도 어느 정도는 했습니다만 당시의 역량으로는 다소 힘에 부치는 점이 있어서 지금까지 미뤄왔던 겁니다.


늘 높은 것을 목표로 하는 소설가이고 싶다고 생각한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의 현재 실력 수준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입니다. 독자나 편집자나 평론가의 의견과는 관계없이 자신의 실력이 어느 단계까지 도달해 있는가 하는 평가를 냉철할 정도의 시선으로 확실히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만일 모든 어려움을 물리치고 노려야만 하는 작품을 완벽하게 다룰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면 자신에게 부족한 기술적인 문제를 어떻게 해서 해결할까를 곰곰 생각해서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책을 세워 몇 년이 걸리더라도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각오하고 착착 실행에 옮기는 겁니다. 즉 새로운 문체를 개발해서 그것을 확실히 몸에 익히는 것만으로도 최저 5년 정도는 걸립니다. 거의 매일 연습을 한다고 해도.”

-그런 생각을 처음부터 가지고 계셨던 건가요?

“예.『여름의 흐름』을 썼던 때부터 계속. 이 나라의 문학세계가 소설가의 재능을 인정하는 것은 기껏해야 알이나 좋게 말해도 병아리 수준입니다. 그것은 문학의 하늘을 마음대로 날 수 있을 정도의 재능을 꽃피우고 있는 기성 소설가가 제로에 가깝다고 하는 지극히 유감스런 상황이 당연시됐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알이나 병아리이더라도 프로 소설가로 충분히 통할 수 있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날 수 있는 새의 날개의 힘을 짐작하더라도 관계자의 태반은 그것을 재능으로 보지 않지요. 하지만 제 머릿속에는 처음부터 날 수 있는 새가 되려는 목표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까무러칠 정도의 세월을 들인다면 언젠가 틀림없이 알이나 병아리의 재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이십 몇 년 전에 이 작품의 구상을 자신에게는 벅차다는 느낌을 가지게 할 정도로 다듬고 또 다듬었던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아찔할 정도로 현란한 이야기에 알맞을 만한 표현력이 부족한 것을 직감이라고 할까, 본능이라고 할까, 어디까지나 나의 척도입니다만,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무리라고 하는 마음의 소리가 분명히 들렸습니다.

말 그 자체는 단순한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도구인 이상은, 당연히 기술적인 문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따라다닙니다. 도구에 생명을 주기 위한 궁리가 큰 과제가 되어 쓰는 사람에게 무겁게 덮쳐옵니다. 그것을 할 수 있는지 할 수 없는지가, 날 수 있는 새가 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중대한 갈림길이 됩니다.

아쿠타가와상이라든지 나오키상이라든지 하는 것의 기준은, “너에게는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하는 정도의 가벼운 보증 문서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책이 팔리면, 당사자나 편집자나 독자도, 그것을 재능이 꽃핀 것으로 착각해버려, 더 이상 요구하지 않게 됩니다. 차분히 기르면, 그렇게 멀지 않은 장래에 날 수 있는 새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재능 있는 알을 잡거나 병아리를 죽이거나 하고 있습니다. 그 작가가 죽고 나면 다음 알이나 병아리를 찾는다, 그런 반복을 무수히 보아왔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러한 상황이 끝없이 계속되겠지요. 날 수 있는 새로서 재능을 닦으려면, 쓰는 사람 자신의 강한 마음가짐과 몰두해서 지속하는 나날들에 창작의 진정한 기쁨이 숨어 있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느냐 없느냐에 모든 게 달려 있습니다.

-구상만으로 20여 년이라는 것이군요. “이제 할 수 있겠다”라는 느낌은 어떻게 찾아왔습니까.

“전작 『낙뢰의 여로』를 쓰기 조금 전부터입니다. 그것까지, 다른 소설에서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생각나는 한에서 시행착오를 반복하고 있었으니까. 문체의 문제, 스토리 전개의 문제 등 해결해야 하는 것이 산만큼 있었습니다. 특히, 형식의 문제에는 고생했습니다. 문장의 흐름을 어떻게 하면 이미지에 접근할까. 그 이미지란, 두루마리 그림입니다. 말만으로 표현하는 두루마리 그림을 구축해보고 싶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고생했습니다. 두루마리 그림에슴, 장면과 장면 사이 연결하는 작은 장면이 있습니다. 그 연결부분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고, 전체를 자연스럽고, 흐르듯이 만들고 있습니다. 이 연결을, 말로는 어떻게 처리하면 좋은 것인지, 생각해내기 어려웠습니다. 장면, 장면의 블록을 어느 정도의 길이로 하면 좋은 것인지, 행간을 얼마나 열면 좋은 것인지 짐작하지 못해서, 19세기의 시집을 참고로 해 연구했습니다만, 결국,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생각난 것이, 무성영화의 자막과 같이 짧은 문장을 사이에 두면서, 영상적인 장면을 이어간다고 하는 형식입니다. 연결 문장은, 구두점을 사용하지 않고, 단가에 가까운 것으로 하자. 그리고 비주얼적인 말을 충분하게 배치한 본문은, 점은 많이 써도, 구두점은 마지막 하나밖에 사용하지 않는, 무섭고 긴, 하나의 문장으로 하려고, 그렇게 결정했습니다. 다만, 그것을 갑자기 시작하면 독자가 당황하기 때문에, 처음은 연결의 문장과 블록의 문장을 조금 짧게 해두었습니다.”

-구두점이 없는 짧은 문장에서는, 독특한 리듬으로 쓰시고 있고, 긴 편의 마지막에 구두점이 찍히는 문장에서는, 꽤 의식적으로 어려운 한자와 그리고 일본 고유어가 혼합되어서, 구르듯이 앞으로 나아가는 문장입니다.

“그렇습니다. 한자어와 일본 고유어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 일본어의 궁극의 미는 아닐까라고 하는 생각이 강해서 아무래도 떨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번 소설의 무대가 된 무로마치라고 하는 시대를 배경으로 하면, 그것이 그다지 무리 없이, 오히려 효과적으로 발휘되는 것은 아닌지, 아름다움이 훨씬 두드러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기대도 있었습니다. 그 기대는 끝까지 배신당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정말 즐거운 집필이 되었습니다. 소설을 쓰는 것이 이렇게 즐겁다고 생각한 것은 처음일지도 모릅니다.

[출처] 해와 달과 칼--마루야마 겐지|작성자 포카라

[태평로] 어따 대고 반말이시니?

박은주 문화부장

20대 때 일했던 직장에서의 일이다. 전화가 왔다. "부장 바꿔." 당시로선 쳐다보기도 어려운 선배를 이렇게 찾으니 참을 수 없었다. "누구신데 전화를 이렇게 하십니까?" 저편에서 말했다. "허허, 할 만하니까 하지." 알고 보니 높은 분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반말은 권력이다.

반말이 권력일진대, 권력자로 가득한 국회에서 반말이 빈발하는 건 이상한 일도 아니다. 올해는 '반말 스타'로 정몽준 의원이 떠올랐다. 외교통상부 국감에서 장관에게 "그게 상식에 맞는 얘기야?" "초등학생이라도 이건 상식에 안 맞는 것 아니겠어"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거야" 등 초지일관 반말을 했다. 언격(言格)이 낮아 보인다는 것도 문제지만, 화를 내는 이유도 석연치 않았다. 내년 열릴 핵안보정상회담과 국회의원 선거유세 기간이 겹친다는 것에 국민은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지 않는다. 국익에 손해를 끼칠 대단한 과오가 있는 게 아니라, 장사(유세)하는데 맥을 끊는다는 얘기였으니까 말이다. 여론이 악화되자 정 의원은 "친한 관계라 그랬다"며 사과의 뜻을 전했다.

국회의원이 '민간인'을 상대로 윽박지른 것은 더 민망했다. 최종원 의원은 가수협회장을 대신해 국감에 배석한 가수 유열씨에게 "지금 누가 박수 쳤어? 박수 친 사람 누구야?" 손가락질하며 호통쳤다. "왜 장차관에게 '님'자를 붙이느냐"는 동료의원의 지적을 받은 전재희 문방위원장이 "상호존중하자는 의미"라고 설명하자 유씨가 박수를 쳤던 것이다. 만일 최 의원이 전직인 연극배우였을 때 국회의원에게 이런 꼴을 당했다면, 험한 말 분야에서는 결코 초선(初選)답지 않은 그가 유씨처럼 "죄송하다. 처음이라 그랬다" 했을 것 같지는 않다. "의원이 그렇게 잘났냐, 딴따라라고 이런 대접 해도 되나, 예술인의 이름으로 용서하지 않겠다" 정도는 나오지 않았을까.

국민을 대신해 국정을 감시하는 것이 국정감사다. 정보접근권이 대략 무한대에 달하는 의원 하나하나가 정부의 실정(失政)을 탐구, '팩트'를 보여줘야 한다. 그런 의원도 조금은 있지만 많은 국감 질의는 언론 기사와 정부 자료를 대충 엮은 것이다. 이 와중에 언론사 기자들의 이목을 끌어 '한 건(件)' 올리려면 소리 지르기, 자료 집어던지기 같은 '퍼포먼스(행위)'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다. 정성보다는 언성이 더 먹힌다는 계산인 거다.

하지만 어떤 의원도 유세철에는 그런 행태를 보이지 않는다. 평소엔 잘 입지도 않던 점퍼를 꺼내 입고, 거기 있는 줄도 몰랐던 시장이나 목욕탕으로 달려가 악수하며 이마를 배꼽에 맞추는 기예에 가까운 '비굴 악수'를 해댄다. 인간의 진화 단계에 빗댄 국회의원 자세 패러디 사진이 인터넷에 떠돈 것도 이런 이유다. 사실 반말보다 더 음험한 게 갑작스런 존댓말이다. 평소 반말하던 상사가 "김 과장, 지금 바빠요? 잠깐 볼까요" 이렇게 말을 건네온다면, 그건 좋지 않을 뉴스일 확률이 훨씬 높다.

진심이 받쳐주지 않는 반짝 예의, 급작스런 비굴은 오만한 권력보다 더 위험하다. 그런데도 유권자는 현혹된다. 이게 문제다. 유권자도 이젠 자존심 좀 챙겨야 한다. 대단하신 의원님들이 자기 앞에서 한 번 꿇어주는 게 무슨 가문의 영광인가. 국회의원 후보가 등 밀어주면, 때가 더 굵게 나온다던가. 비굴과 오만을 오가는 의원들을 눈여겨 봐두자. 유세철에 그들이 나타나 비굴악수를 청하면, 이렇게 말해주자. "누구신데 저한테 악수를 청하시니?"

 

최종원 "예의 못 지킨 유열씨가 잘못"

출처=민주당 최종원 의원 트위터 캡처
국회 국정감사에서 박수소리를 냈다는 이유로 가수 유열씨를 질책한 민주당 최종원 의원이 “유열씨가 예의를 지키지 못한 것은 잘못”이라고 밝혔다.

최 의원은 ‘유열 호통 발언’이 문제가 되자, 3일 만인 22일 자신의 트위터에 “국회의원은 국민 위에 군림할 수도 없고, 또한 국민의 머슴도 아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그는 이어 “(국회의원은) 국민의 이웃인데, 유열씨가 잘못한 국민으로 지켜야 할 예의를 지키지 못한 것은 잘못”이라고 덧붙였다. “국민은 국회의원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같은 국민”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네티즌들은 국민의 한 사람에게 반말과 삿대질을 한 최 의원에게 차가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조윤구씨는 “국회의원이 국민에게 호통을 쳐도 되느냐”고 밝혔고, 김영곤씨도 “국민의 대표가 맞느냐. 권위의식만 높다”면서 최 의원을 힐난했다. 이제훈씨도 “최종원씨를 좋아했는데 국회의원 배지를 달더니 안하무인 격”이라고 비판했다.

출처=연합뉴스
앞선 19일 최종원 의원은 가수협회장을 대신해 국감에 배석한 가수 유열씨에게 “누구야? 지금 누가 박수를 쳤어?”라며 큰소리로 꾸짖었다. 한나라당 전재희 문방위원장이 “국감장에 나온 장·차관들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은 상호존중하자는 의미”라고 말하자 공감의 의미로 유열씨가 손뼉을 쳤다는 이유에서다.

최 의원의 질책에 머쓱해진 유열씨는 일어나 “죄송하다. 국감에 참석하는 게 처음이고, 국회의 관례를 몰라 무심결에 그런 거니 양해해달라”면서 사과했다.

출처=연합뉴스

[시론] 문화부 장관이 누구시더라?

[한겨레]

지난달 취임한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는 전후 제95대 총리대신. 그에 앞선 간 나오토 총리는 15개월 재임했고, 그 앞의 세 총리는 1년씩 재임하는 단명 총리로 끝났다. 이러다 보니 <아사히신문>에 ‘일본에서도 2년 재임 총리를 보고 싶다’는 사설이 나오고, 너무 잦은 총리 교체를 안타까워하는 여론도 형성되고 있다.문화부 장관이 또 바뀐다. 정병국 장관의 재임기간은 불과 7개월. 역대 문화부 장관(공보부·문공부·문광부·문체부·문체관광부 모두 포함) 48명 중에서 재임기간 6개월이었던 이규현 전 장관을 빼고는 가장 단명이다. 이 전 장관이 1979년 대통령 시해라는 격랑 속에 취임했다 이듬해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소용돌이와 함께 물러났던 특수성을 고려한다면, 정 장관의 재임기간은 사실상 가장 짧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문화부 장관 임기는 1년 남짓한 경우가 절대다수. 자리를 기다리는 측근들 챙기는 게 불가피해서인지 ‘1년짜리 장관’이 양산되었다. 이러니 4년을 재임한 김성진 전 장관이 참으로 특별해 보인다.

이와 대비되는 프랑스에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 ‘장수 장관’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샤를 드골 대통령 시절의 앙드레 말로 장관(1976년 사망),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시절의 자크 랑 장관(현 하원의원)은 각각 10년씩 문화부 장관으로 봉직했다. 한 사람은 문화대국 프랑스의 기초를 닦았고, 한 사람은 꽃을 피웠다.

<정복자> <인간의 조건> 등의 소설로 잘 알려진 앙드레 말로는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중국 사회주의 혁명의 현장에 직접 뛰어들기도 했고, 스페인 내전 때는 민항공군 대장으로 반파시즘 전선에 참여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반나치 레지스탕스 대열에 가담했다. 1944년 알자스 전선에서 샤를 드골 장군을 만난 인연으로 그는 1958년 프랑스 제5공화국의 문화부 장관을 맡아 10년을 재임하며 문화대국 프랑스의 뼈대를 만들었다. 문화의 힘과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대통령의 지원 속에 효율적이고 강력한 문화행정으로 프랑스 문화의 큰 그림을 그렸다.

자크 랑은 특히 1989년 프랑스대혁명 200돌 기념행사를 총괄지휘하며 문화장관의 명성을 높였다. 루브르박물관 앞의 피라미드 조형물과 프랑스대혁명 당시의 바스티유 감옥 터에 지은 오페라극장 등 ‘3대 문화작품’을 선보여 갈채를 받았다. 이들 기념대작의 설계자나 주역들은 대부분 동양인 등 외국인이었다. ‘용광로’라 불리는 프랑스 문화의 진면목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을 만했다.

자크 랑 장관은 우리나라와 인연이 많다. 바스티유 오페라의 첫 지휘자 겸 음악감독으로 정명훈을 발탁했다. 외규장각 도서 반환에도 적극적이어서 1993년엔 미테랑 대통령을 설득했고, 올해엔 사르코지 대통령을 설득했다. 지난 6월 외규장각 도서 반환 때도 그는 함께 왔다. 2009년 프랑스 대북특사로 북한을 방문하기도 한 그는 한국의 스크린쿼터제를 적극 지지하기도 했다.

영화 <일요일은 참으세요> 주연으로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탄 배우 겸 가수 멜리나 메르쿠리. 그는 1981년 그리스 문화부 장관이 되어 영국이 가져간 파르테논 신전 대리석 조각의 반환을 추진했다. 유럽문화도시 지정에 앞장섰고, 아테네가 첫 유럽문화도시 지정의 영예를 갖도록 했다. 아테네 중심가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타계 17년이 지났지만 국내외 참배객들이 적지 않다. 그리스 국민과 세계인들이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은 누구보다 그리스를 사랑했던 이 국민배우를 기리기 때문이지만, 장관 재임 6년간의 활동 또한 훌륭했기 때문이다.

대통령 임기 5년 동안 한 부처 장관이 무려 6번까지 바뀌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이러다 보니 프랑스의 과기부 장관은 우리나라 전임 과기부 장관에게 편지를 보내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현 정부에서도 벌써 세번째 문화부 장관이다. 특히 정병국 장관 임면은 상식적으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바쁘디바쁜 3선의 지역구 국회의원에게 겸직 장관을 시켜놓고 7개월 만에 방을 빼라는 거다. 대통령은 애초부터 그런 인사를 왜 하는가?

임기 5년의 단임제 대통령제 아래에서 프랑스 같은 10년 장수 장관을 기대하긴 어렵다. 그래도 대통령과 임기를 같이하는 문화장관쯤은 보고 싶다.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 제대로 된 문화부 장관 한번 나왔구나 싶었던 이어령 선생조차 2년을 채우지 못했으니 안타까워서 하는 얘기다. 우리에게도 말로, 랑, 메르쿠리를 그리워할 권리는 있다.

[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128] 정자 기증

세계 최고 '다산의 여왕'으로 기네스북에는 평생 69명의 자식을 낳은 러시아 여인이 기록되어 있다. 모두 27번의 임신에서 두 쌍둥이, 세 쌍둥이는 물론, 심지어는 네 쌍둥이까지 낳으며 이 어마어마한 대기록을 수립한 것이다. 아이를 한 번이라도 낳아본 여성이라면 이 기록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 것이다. 기록은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지만 이 기록은 당분간 깨지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이 대단한 기록도 기네스북 그다음 줄에 나오는 남성의 기록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다. 기네스북이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자식을 낳은 걸로 기록한 남자는 모로코의 이스마일 황제이다. 그는 1703년까지 아들 525명과 딸 342명을 합쳐 무려 867명의 자식을 낳은 걸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1721년에 700번째 아들을 낳았다는 기록도 있는 걸 보면 실제 자식 수는 족히 1000명을 넘을지도 모른다.

다윈의 성선택(sexual selection) 이론에 따르면 출산 기록에 있어서 암수의 차이가 이처럼 엄청나게 나는 이유는 일단 난자와 정자의 크기 차이에서 출발한다. 새로운 생명체의 초기발생에 필요한 기본 영양소를 고루 갖추고 있어야 하는 난자는 달랑 수컷의 유전자를 전달하면 그 소임을 다하는 정자에 비해 엄청나게 크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수컷과 잠자리를 같이해도 낳을 수 있는 자식의 수에는 생리적 한계가 있는 암컷과 달리 수컷은 상대하는 암컷의 수에 비례하여 엄청난 수의 자식을 얻을 수 있다. 성에 있어서 암컷은 대체로 신중하고 수컷은 헤픈 까닭이 여기에 있다.

미국에서는 최근 한 남성이 정자은행에 제공한 정자로 150명의 형제자매가 태어난 사실이 드러나 시끄럽다. 같은 정자 기증자에 의해 태어난 사람들이 서로를 찾는 온라인 채팅 사이트 '인공수정 형제자매 찾기 센터'를 통해 무려 150명의 유전적 형제자매가 확인된 것이다. "피에 굶주린(The Bloodthirsty)"이란 별명까지 갖고 있던 이스마일 황제는 막강한 권력을 휘둘러 그 많은 후궁들로 하여금 자기 자식을 낳게 했지만, 문제의 이 사내는 단 한 번의 정자 기증으로 잠자리도 같이하지 않은 생면부지 여인네들로부터 무려 150명의 자식을 얻은 것이다. 다윈 선생님도 기가 차 하실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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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이모저모]덴마크 정자銀 “빨간머리 남성 사절”

“빨간 머리 남성의 정자는 정중히 사양합니다.”

덴마크에 본부를 둔 세계적인 정자은행 크리오스(Cryos)가 빨간 머리 남성의 정자를 받지 않겠다는 이색 선언을 했다. 이 회사의 올레 슈 이사는 최근 덴마크 신문 엑스트라 블라데트와의 인터뷰에서 “정자은행의 규모가 점점 확장되고 있어 정자를 고르는 데 좀 더 까다로워질 필요가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주 고객인 30, 40대 고학력 여성들이 더는 진저(Ginger·빨간 머리) 아기를 원치 않는다”며 “빨간 머리 남성의 정자가 불티나게 팔리는 곳은 아일랜드뿐”이라고 덧붙였다.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등 대부분의 유럽국가에서는 갈색머리와 갈색눈동자를 가진 남성의 정자가 선호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일간 더 선에 따르면 빨간 머리를 가진 사람이 가장 많은 곳은 스코틀랜드(13%)이며 미국에서는 최대 1800만 명이 빨간 머리다.

‘우주에서 가장 큰 정자은행’으로 기네스 세계기록에 오른 크리오스는 현재 14만 개의 샘플을 보유하고 있으며 해마다 전 세계 65개국 2000여 명의 여성 고객에게 정자를 팔고 있다.

Why] [김윤덕의 사람人] 월간 '샘터' 창간해 500호 맞은 김재순 前국회의장

"싸우지들 말게나 정치도 詩처럼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토사구팽···30년 우정의 내 마음, YS는 알텐데”
국회 상공위원장 시절 창간···세계 기능인대회 대표들 솜씨는 장인급인데 생계 위해 마지못해 일해
"그들에게 자긍심 심어주자" 궁리 끝에 '샘터' 만들게 돼
"진솔한 삶의 이야기 쓰자" 어렵고 유식한 얘기 쓰면 대학 교수들 원고도 '퇴짜'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소월의 시 '초혼(招魂)'을 외는 노(老)정객의 음성이 물기에 젖어 떨렸다. 나라 잃은 설움을 깨닫기 시작했던 중학시절 애송하고 또 애송했던 시란다. 50년 정치 인생, 그 영욕의 세월을 마감한 뒤에도 약주 한잔 들어가면 나지막이 소월을 읊는다고 했다. '그 사람이여'를 '내 조국이여'로 바꿔서….

김재순(金在淳·85). 사람들은 그를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정치인으로 기억한다. 1993년 3월 김영삼 대통령이 주도한 정치권 물갈이 과정에서 13대 국회의장을 역임한 7선 의원 김재순이 정계 은퇴를 선언하며 인용한 말이 '토끼사냥이 끝나자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는 뜻의 '토사구팽'이다.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의 일등공신인 자신을 퇴출시킨 데 대한 원망을 담은 이 사자성어는, 비정한 정치세계 혹은 염량세태를 풍자하는 말로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정계를 떠나 초야에 묻혀 살던 그가 최근 '경사'를 맞았다. 자신이 1970년 4월에 창간한 '월간 샘터'가 이달로 지령 500호를 맞았다. '평범한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교양지'로 출발해 한때 50만 부를 자랑하는 대중지로 사랑받은 샘터는 문인과 화가, 건축가 등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이자 아지트였다. '정치는 사람을 움직이는 것'임을 온몸으로 보여준 베테랑 정치인 김재순의 방대한 문화예술계 인맥의 뿌리가 바로 '샘터'다.

한국 현대건축의 거장 김수근의 대표작 중 하나인 서울 동숭동 '샘터' 사옥에서 김재순 고문을 만났다. 세상을 호령할 듯 부리부리했던 눈매는 '노인'의 어진 미소로 가득했다. 샘터 41년 역사와 함께, 유년시절 평양 대동강변에서 만난 조만식 선생으로 인해 첫 싹을 틔운 그의 정치인생 50년을 들었다. 치열하고도 험난했던 근현대사와 동고동락한 세월이었다.

담쟁이넝쿨 아름다운 빨간 벽돌집‘샘터’의 옥상에서 김재순 전 국회의장이 활짝 웃었다.“ 인생이 행복하셨습니까?”묻자, 그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더없이 행복했지 요. 아들 위해 헌신한 어머님이 계셨고, 정신적 안식처인 아내가 있고, 변변치 않지만 제 앞가림하고 사는 자식들이 있고요. 뭣보다 손주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어 행복하지요.” 호랑이상으로 유명했던 정계의 거물은 세월과 함께 인자한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 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법정스님과 생쥐

―2002년 대장암 수술을 받으셨는데도 건강해 보이십니다.

"(내 모습이) 아직 연애할 만해요?(웃음) 하루 4~5㎞씩 걸어요. 아주 좋아요."

―샘터의 오랜 생명력은 어디에서 비롯됐다고 보십니까.

"샘터를 변함없이 사랑해주는 독자들과 필자들이겠지요. 우리가 필자로 고른 사람들은 크게 세 부류였어요. 글 잘 쓰는 사람,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어른, 마지막이 무명이지만 삶의 현장에서 땀 흘리며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대학교수들도 샘터로부터 원고 '빠꾸'를 여러 번 맞았지요.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써달라는 건데 어렵고 유식한 얘기들만 쓰니 퇴짜를 놨어요. 그런 자존심이 샘터의 오늘을 만들어준 게 아닌가 싶어요."

―1970년 4월 '샘터'를 창간하신 때가 공화당 의원 시절이었습니다.

"내가 국회 상공위원장을 맡으면서 경제계, 산업현장을 가까이서 살폈어요. 그러다 세계기능인올림픽대회를 알게 됐고, 거기에 대표로 나갈 사람들을 뽑기 위해 국내 대회를 열었지요. 대패 하는 사람, 창호 하는 사람, TV 고치는 사람, 양복 만드는 사람 해서 20개 종목에서 금메달이 나왔지요. 그들을 하나하나 인터뷰했는데, 솜씨는 장인급이면서 하나같이 자기 일을 생계를 위해 마지못해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부모 잘못 만난 것, 집이 가난한 것, 학교 가지 못한 것들을 불평해요. 나라 경제를 발전시켜야 할 마당에 자기 하는 일에 신바람이 나야 경제고 뭐고 되는 것인데 큰일이다 싶데요. 그들에게 자긍심을 불어넣어 줄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다 나온 게 샘터예요."

―시인 김지하씨가 초대 편집장이 될 뻔했다고 들었습니다.

"후보에 오른 세 사람 중 하나가 김지하, 그때 이름은 김영일이었지요. 내 생각에도 김지하가 제일 괜찮은데 하필 폐병 3기였어요. 어느 날은 자정이 넘은 시각에 파출소에서 전화가 걸려왔어요. 김영일이란 사람이 만취해서 파출소를 다 때려부쉈대요. 내가 다 보상하겠으니 풀어달라고 했지요. 그것 때문은 아니고, 건강 탓에 초대 편집장으로 영입하질 못했어요."

―생전의 피천득 시인과 첫눈이 오면 서로 전화를 걸어주던 40년 우정이 유명합니다.

"피천득 선생은 첫눈을 하늘이 전해오는 메시지라고 했어요. 무슨 약속을 한 건 아니었고, 어느 날 눈이 오니까 선생님이 가장 먼저 생각나서 전화를 드렸지요. 세상만사 어지러울 때 첫눈, 그 숭고한 스펙터클이 주는 환희의 맛을 즐겼지요."

―법정스님을 빼고 '샘터'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스님이 30대였을 때 처음 만났지요. 이 말 저 말 중에 개 이야기가 나왔어요. 소학교 다닐 때 개한테 크게 물려서 내가 개를 무서워했거든요. 그러자 법정이 이런 말을 해요. 자기가 수도를 할 때면 밤낮 옆에 와 있는 쥐새끼 한 마리가 있다는 거예요. 수행이 다 끝날 때까지 지키듯 앉아 있다는 거지. 그래서 어느 날 '넌 왜 이렇게 못나게 생겼냐. 다시 살아나올 때는 예쁜 아기로 태어나라' 그랬대요. 며칠 뒤 그 자리에 갔더니 그 쥐가 죽어 있더래요. 그러면서 법정이 나더러 하는 말이 '개하고 얘기를 해보세요, 알아들을 겁니다' 해요. 그 말 들은 순간부터 개에 대한 무서움이 다 없어졌어요. 정말이야. 우리 집에 개 두 마리를 키우니 말 다했지요.(웃음)"

"인간 성철을 만나러 왔다"

―샘터 사옥은 한국의 대표적인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입니다.

"김수근이가 건축가협회 회장 할 때 나한테 상을 주더라고요. 건축가도, 시공자도 아닌데 왜 상을 주느냐고 하니까 건축가로서 이런 사주 만나기가 하늘의 별따기래요. 내가 일절 잔소리를 안 하거든요.(웃음) 수근이를 따라가려니까 우리가 손해가 많긴 했지요. 1층 스페이스를 행인들이 지나다니는 통로로 내주었으니."

―여의도 국회의사당 건축도 주도하셨다 들었습니다.

"공화당 원내총무 할 때 건축위원회도 책임졌는데 당시 국회의장이던 이효상 영감과 논쟁이 있었어요. 내가 전문가한테 맡겨서 받아온 설계도면을 보더니 그 양반이 의사당 지붕은 무조건 돔 형태로 올려야 한대요. 그 무렵 유신이 터져 나는 정계를 떠났고, 나중 완공된 의사당을 보니 원안에 없던 돔이 생겼지요. 그 어른 생각엔 만족스러울지 모르나, 내가 아는 사람들은 '상여' 같다 그래요. 한 국가의 상징물은 국제공모는 못할지언정 전문가들 손에서 태어나야 해요."

―성철스님과도 인연이 있으시지요?

"유신 직후 뇌질환으로 쓰러졌다 겨우 살아났을 때, 죽기 전 남들이 존경하는 명사들이나 만나보자 하는 생각에 마누라를 지팡이 삼아 해인사에 갔더랬죠. 스님 계신 백련암은 또 한참 산길로 올라가야 하는데 쉬엄쉬엄 두 시간 반 만에 당도했더니 '누가 나를 찾아왔다고?' 하면서 꽥꽥 소리를 질러요. 그러더니 삼천배를 하라는군요. 그래서 내가 그랬지요. '나는 성철스님이 아니라 인간 이성철을 만나러 왔다'고."

―고수가 고수를 만났군요.

"두 시간여 인생 사는 이야기 나눴지요. 그 인연으로 샘터를 보내드렸더니 꼬박꼬박 책값을 올려보냅디다.(웃음)"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샘터의 뒤표지에 원고지 넉 장 안팎의 칼럼을 싣고 계십니다. 영문학자 장영희는 '앞표지보다 뒤표지가 더 중요한 책이 딱 한권 있는데 그게 바로 샘터'라고 했을 만큼 의장님 글을 애독했다 들었습니다. 시대를 읽는 탁월한 안목에 팬들이 많습니다.

"내가 정치를 하니까 정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그중에서도 국제정세에 관심이 많아서 일본, 중국, 미국이 어떻게 움직여 나가는지, 그 속에서 한국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가 최고의 관심사였어요. 타임, 뉴스위크, 아사히신문, 일본경제신문, 요미우리 신문을 구독해 읽은 지가 벌써 40년 세월이에요."

―독서의 폭과 양이 중국 고전부터 젊은 작가들의 소설까지 상당하시더군요.

"독서라는 게 친구를 만나는 것과 같아요. 몇천년 전의 사람들, 동양친구이기도 하고 서양친구이기도 하고. 오늘은 누굴 만날까 하는 마음으로 책을 꺼내들지요. 500호에도 썼지만, 시시한 책 백권 읽는 것보다 좋은 책 1권을 100번 읽는 게 낫다는 게 내 지론이에요."

―'토사구팽'이란 말도 그 독서력에서 비롯된 것이겠지요.

"억울함을 토로하다 보니 2000여년 전 한신(韓信)이 한 말이 자동으로 나온 것뿐이에요.(웃음)"

좌우(左右)를 넘어 인맥의 폭이 넓었던 김재순은 의원 최다득표로 제13대 국회의장에 선출됐다. 1988년 제13대 국회 개원 축하연 에서 건배하는 모습. 왼쪽부터 윤길중 당시 민정당 대표, 김대중 평 민당 총재, 김재순 국회의장, 노태우 대통령,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 / 조선일보DB
김영삼, 그리고 兎死狗烹

김재순은 장면 총리의 민주당 시절 5대 국회의원으로 30대에 금배지를 달았다. 5·16 군사혁명으로 10개월간 옥살이를 하지만 김종필 등 청년 장교클럽과 극적으로 의기투합하면서 공화당에 입당, 원내총무까지 지낼 만큼 전성기를 구가한다. 그의 정치인생이 최대 고비를 맞은 건 유신 직후다. 유신에 반대한 이유로 16년간의 낭인시대로 접어들고 건강마저 악화된다. 그를 다시 국회로 불러들인 건 노태우 대통령이다. 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것은 물론 국회의장으로도 선출돼 화려하게 재기하지만, 3당 합당 이후 김영삼을 대통령에 당선시키는 것을 끝으로 정치생활을 마감한다. 공교롭게도, 당시 김영삼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는 글에서 김재순은 토사구팽의 그 사기(史記)를 인용했다. "유방(劉邦)은 정략·권모술수에 있어 장량(張良)보다 못하였고, 용병작전에 있어 한신(韓信)에 뒤졌으며, 행정수완처리에 있어 소하(蕭何)보다 못했지만 장량·한신·소하를 다 쓸 수 있었던 사람이 바로 유방이었다…."

―토사구팽의 진심은 무엇이었습니까.

"은퇴 후 만나는 사람마다 역사에 남을 명언을 만들었다고, 영삼이 따라다녀 봐야 뭐하겠느냐고 인사를 해요. 듣기 좋으라고 그랬겠지만, 내 심정을 진정으로 알지는 못했을 거예요. 함께 정치운동 할 때 영삼이는 늘 자기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했어요. 나는 고향이 이북이니 조국 통일에 한몫을 하는 사람이 되겠다 했지요. 그 포부는 (김)대중이도 잘 알아요. 나로서는 대통령 되겠다는 30년 우정의 영삼이를 충성으로 돕고 싶었어요. 그걸 알 텐데…, 그런 것들이 아쉬울 뿐이지요."

―고위공직자 재산공개가 원인이었습니다. 부정축재를 하신 것도 아닌데 항변하시지, 왜 바로 정계은퇴를 선언하셨습니까.

"청와대 심부름하던 주돈식(당시 공보수석)이 전날 밤 내 집에 왔어요. 덜덜덜 떨면서 말을 못하길래 '공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으니 편안하게 얘기하라'고 했지요. 다 듣고 나서 '내가 정계를 떠나겠으니 영삼이에게 전하라'고 했어요. 그리고 주돈식에게 물었지요. 나와 영삼이 중 누가 더 청렴하고 정직하게 살아왔는지 너는 알고 있지 않으냐, 그렇다면 너의 판단이 있을 줄로 안다. 그만 가라."

―은퇴 후 김영삼 대통령과 다시 마주할 자리가 있었을 텐데요.

"화도 가라앉힐 겸 하와이로 나가 있는데 서울대 총동창회장으로 내가 선출됐다는 소식이 전해와요. 회장 하는 일이 모교의 예산을 정부로부터 많이 따주는 것인데, 국회의장을 지낸 내게 기대하는 것이 있었나 봐요. 그래서 서울로 돌아왔고, 그 일을 하려면 동문인 대통령을 만나야 하니 청와대로 갔지요. 내 얘길 다 듣지도 않고 무조건 '그래 하자 하자, 해줄게' 하는 거예요. 속으로 그랬지요. '이 사람아, 나를 선거구 사람들 속여먹듯 하려느냐?'(웃음)"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보다 정계에서는 선배이십니다. 대권을 꿈꾸진 않으셨습니까.

"욕심이 아주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국회의원 선거에 이래저래 두 번 떨어지고 일곱 번, 그것도 힘겹게 힘겹게 당선되면서 그런 생각 아예 접었지요. 남한토박이도 아니었고, 또 선거구에 자주 내려가 돌볼 겨를이 없었어요. 서울에서 할 일이 많았거든요. 외교 분야, 재경 분야 일도 열심히 하고 싶었고. 그렇게 해서는 대통령이 되기 힘들어요. 오로지 대권 잡을 생각만 하고 그쪽으로만 머리를 써야 한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지요."

정치는 운명이다

―장면 총리 이후 가까이서 함께 한 역대 대통령 중 누구에게 가장 높은 점수를 주시겠습니까.

"(5·16 혁명 후 내가 공화당으로 갈아탔으니) 장면 박사한테는 할 말이 없죠. 그 어른의 경륜과 포부로 봐서 훌륭한 총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내각책임제의 운명이란 게 국회의원들 자질에 달려 있단 말이죠. 한데 민주당이 신·구파로 나뉘어 싸우는 바람에 장 총리가 좋은 일을 못했어요. 그 또한 리더십의 문제겠지만."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는 애증이 교차할 듯합니다.

"혁명 나고 감옥에 들어가 있는데 혁명주체세력 중 하나인 홍종철이가 한밤중에 육군형무소를 찾아왔어요. '나가자!' 하더니 지프에 태워서는 장충동으로 갔지요. 그 자리에 박정희 소장이 있어요. 일단 '감옥에서 나오게 해줬으니 감사합니다만, 노모를 모시고 있는 몸이라 먼저 인사를 드리고 다시 오겠다' 했지요."

―그로부터 2년 뒤 공화당 창당 발기모임에 참여하고, 박 대통령의 삼선개헌을 성사시키는 데 일조합니다.

"삼선개헌 당시 내가 공화당 대변인이었어요. 공화당 안에서도 찬성패, 반대패로 갈려 시끄러웠죠. 어느 저녁에 대통령이 우리 집으로 전화를 했어요. 좋은 술안주가 있으니 오라고 해요. 서로 술을 어지간히 먹었는데 대통령이 내게 말합니다. '내 한 번만 더 하고 종필이한테 물려줄 테니 봐 주십시오.' 그래서 '참말로 한 번밖에 안 하겠습니까?' 했더니 '다시 하면 성을 갈겠습니다' 그래요. 그 다짐을 받으니 큰 짐을 내려놓은 듯했지요. 이튿날부터 개헌 작업에 들어갔어요. 언론을 설득하고, 반대하는 분들과 성의껏 대담도 하면서 큰소리 없이 삼선개헌을 이뤄냈어요."

―그런데 유신을 단행했습니다. 그로 인해 김재순의 정치인생도 나락의 길로 떨어졌지요.

"내가 덜렁덜렁한 정치인도 아니고, 매사에 시리어스(serious)하게 사는 사람인데, 우리한테는 한마디도 없이 유신을 한 거예요. 마지막 당무회의장에서 내가 벼락을 쳤지요. 박정희 그릇이 고것밖에 안 되나 소리소리 질렀지요. 평안도 놈 기질이 나온 거예요.(웃음)"

―10·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셨을 때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그날 새벽 네시쯤 미국에 있던 우리 큰 놈이 국제전화를 걸어서는, '박정희가 죽었어요?' 하고 물어요. '이놈아 술 먹었냐, 전화 끊으라우!' 했지요. 그런데 10분, 20분 지나니까 각 신문사 기자들한테 전화가 걸려와요. '대통령 유고입니다' 하면서. 난들 몸을 가눌 수가 있겠어요? 유신 직후 쓰러져서 담배도 모두 끊고 살았는데, 마누라한테 담배 남아 있는 것 좀 찾아달라 했지요. 어디서 시가(cigar) 한 박스가 나와요. 그때부터 이걸 피우게 된 거예요."

김종필의 회혼

―박 대통령의 지도자적 자질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나랏일을 자기 일처럼 성실하고 책임있게,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좋다고 생각하는 것, 가야 할 길에 전력투구한 양반이에요. 거기에 대해선 인정하고도 남음이 있어요."

―'영원한 이인자'로 불리는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의 우정이 각별하셨다던데요.

"5·16혁명 직후 생업을 위해 영화를 두 편 제작했다 어그러진 적이 있는데, 그때 김종필의 도움을 받았어요. 그 인연으로 가끔 만나 밤을 새워가며 정치와 역사에 대한 토론을 했지요. 실은 삼선개헌 때도 청와대 들어가기 전 JP를 찾아갔어요. 내게도 반대하는 마음이 있어서 JP가 단연코 개헌을 반대하면 그 뜻을 따르려고 했어요. 그런데 JP가 예스다, 노다 대답을 안 했어요.… 지난번 김종필 내외가 회혼을 맞았다고 신문에 났길래 좋은 꽃 하나 사서 청구동에 갔어요. 말하는 데는 지장이 없어 보였지만 손이 굳어 있어요. 안쓰러워서 그 손을 만져주는데 마음이 참…."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진 이른바 진보세력의 집권시기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극히 유감이지요. 김영삼 때 무너진 경제를 김대중이 다시 일으켜주길 기대했어요. 영삼이와 달라 경제에 대한 생각이나 지식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어찌 된 게 나라 사정은 더욱 기울어만 가고, 개인 인기를 위해 이북과 작당하고 적잖은 돈을 보내는 걸 보고 실망했지요. 노무현은 말할 가치도 없어요. 민주주의 선거의 제일 약점을 타고 대통령이 된 사람이에요."

―이명박 정부가 집권 말기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정치에서 제일 중요한 게 사람을 쓰는 겁니다. 이명박씨가 대견하지만, 자라난 바탕이 정치가 아니라 누가 누군지 몰라요. 뭐가 막힌다 싶으면 그건 사람을 잘못 써서 그런 거예요. 실업계에서만 살아서, 장사꾼의 한계인 거지. 그러니까 협잡꾼, 사기꾼들에 휘둘려요. 안타깝지요."

―정가의 원로이시니 최근 불어닥친 '안철수 돌풍'에 대한 단상이 있으실 줄로 압니다.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니 뭐라 말할 순 없지만, 기성 정치인, 기성 정당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말해주는 반사적 현상인 것은 분명하지요. 지금의 우리 정치력이 아귀다툼의 세계사적 물결로 나아가는 젊은이들을 뒤받쳐주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쉬울 뿐입니다."

시인을 사랑한 정치인

―작가 한운사는 생전에 친구 김재순에 대해 '골프를 치면서도 명시 명구를 줄줄 외우는 로맨티스트'라고 했습니다.

"로맨틱하다는 말을 내가 부인하지 않아요.(웃음) 그게 젊음의 활기니까요."

―소월의 '초혼'을 왜 그리 좋아하십니까.

"일제시대 한국 젊은이들끼리 모이면 내 18번이 그거였어요. 가슴을 쓸어내리며 줄줄 외웠더랬지요."

―시를 왜 좋아하십니까.

"현실을 떠나 자기가 염원하는 이상(理想)으로 갈 수 있으니까. 세탁될 대로 세탁된 그 깨끗한 언어들이 좋아요. 영문학자였던 피천득 선생이 황진이의 시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보다 낫다고 칭송했어요. 그 어른 가장 좋아하신 시가 이거예요. '동짓날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밑에 서리서리 넣었다가, 얼운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행복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자기가 하는 일에 있지요."

―청년실업에 갇힌 젊은이들에겐 행복을 만끽할 '일'이 없습니다.

"고통이 없었던 세대가 있었나요? 한국 사람 치고 젊거나 늙었거나 고생 안 하고 살아온 사람이 있을까요? 오히려 고통 없이 지나온 사람이 있다면 좀 모자란 인생들이죠. 시련 속에서 빛을 찾아가는 일이 젊은이들이 할 일이에요."

―피천득 선생과의 좌담을 채록한 '대화'라는 책에 보니 '정치는 운명이다'라는 괴테의 말을 인용하셨더군요.

"내 덕이 부족함을 새삼 느낍니다. 당의 시인 백거이가 말했지요. 달팽이뿔 위처럼 작은 세상에서 무엇 때문에 싸우고 있는가. 부싯돌 불꽃 같은 인생에 이 몸 맡겼을 뿐인데, 부(富)하면 부한 대로 빈(貧)하면 빈한 대로 인생을 즐기는 것이리라. 입 열어 크게 웃지 못하는 자는 정녕 어리석나니."

―구십을 바라보는 연세입니다.

"생이 있으면 죽음이 있겠지요. 숨을 못 쉬면 죽었다 하겠지요. 하지만 죽은 자도 형태를 달리해서 살아 있는 것 아닐까요. 죽었다고 죄지은 사람의 죄가 없어지는 게 아니고 사랑했던 연인과의 추억이 소멸하는 게 아니니까. … 그런데, 난, 더 살고 싶어요. 조금만 더 살아서 우리 저 명민하고 아름다운 젊은이들이 대한민국의 새로운 역사를 열어가는 모습 꼭 보고 싶어요. "

"조만식·장면·장리욱·피천득… 내 운명을 만든 사람들"

"결국은 사람입니다." 김재순은 "사람과의 만남이 곧 운명"이라고 말했다. 그 자신의 정치인생 또한 그렇게 운명지어졌다.

평안남도 대동군 대동강면 토성리의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난 그가 세상을 향해 큰 꿈을 갖게 된 건 조만식 선생을 만나면서다. "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지요. 아들 교육을 위해 어머니가 평양 비단공장에 취직해 이사를 왔는데 그 바로 옆집이 조만식 선생 집이었어요. 그 집 아들과 친구여서 자주 놀러 갔는데,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했을 때 조만식 선생이 내 머릴 쓰다듬으면서 너는 공부를 잘하니까 세계에서 제일 공부 잘하는 사람이 되거라, 하신 말씀을 잊을 수가 없어요."

집안 형편으로 평양고보 대신 평양공립상업학교에 진학한 김재순은 같은 학교 5학년에 다니던 황장엽을 만난다. "전교생이 모란봉을 견학하고 왔는데 교장이 내 이름을 부르며 박물관 견학 소감을 말하래요. 그래서 '아, 슬프도다, 흥했던 고구려는 황폐해지고, 남은 것은 기왓장과 화살뿐이구나' 했더니 교장이 달려와 발길질을 해요. 며칠 뒤 황장엽이 지나가다 나를 알은체하며 '재순아, 공부 잘하거라' 하며 용기를 주더군요."

문학을 사랑했던 김재순은 당대의 문필들과 깊은 우정을 나눴다. 왼쪽부터 법정스님, 시인 피천득, 김재순 전 국회의장, 소설가 최인호. 2003년 봄, 샘터가 지령 400호를 발간한 기념으로 찍은 사진이다. / 샘터 제공

그의 본격적인 정치인생을 열어준 장면·조병옥·백낙준 등을 만난 건, 서울대 상과대학을 졸업한 뒤 흥사단에 입단하면서다. 시인이자 국회의원을 지낸 주요한과는 국제문제연구소를 열어 주요신문에 사설 쓰는 일을 했다. 그가 평생의 스승으로 여기는 장리욱 전 서울대 총장도 흥사단에서 만났다. "지혜로운 사람은 한 눈 뜨고 꿈꾸는 사람이라고 하셨지요. 뜬 눈으로는 현실을 보고, 감은 눈으로는 이상을 꿈꾸는 사람이 되라 하셨지요."

70년 월간 '샘터'를 창간하면서는 젊은 문인들과 교류했다. "김승옥, 최인호, 염무웅, 강은교, 오증자 같은 이들, 문학지망생들이 들끓었지요. 성철스님 인터뷰했던 정채봉은 한번 사표를 냈길래 '나 죽으면 내 관의 한쪽 귀퉁이를 들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호통을 쳤었죠. 그러더니 먼저 (세상을) 떠났어요."

그가 가장 사랑한 문화인은 길옥윤(본명 최치정)이었다. 소학교 친구였던 길옥윤의 장례식에서 그가 조사를 낭독했다. "학예회는 치정이 판이었어요. 하모니카 두 개를 가지고 아래위로 부는데 대단했지요. 나중에 경성치전(서울대 치대의 전신)에 갔길래 '너 왜 치과대학을 갔니?' 하니까 거기 브라스밴드가 있어서 갔대요." 김재순은 재즈의 매력을 길옥윤 덕분에 터득했다고 추억한다. "치정이가 재즈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묻길래 '잡놈들 음악 아니냐' 했더니 '좋은 그림 들여다보듯 재즈를 자꾸 들어보라고, 그러면 참 맛을 알게 되지' 하데요."

 

어떤 구두쇠 부부, 350억 다 주고 26평 실버타운으로

  • 김성민 기자 dori2381@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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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AIST에 전재산 기부한 김병호·김삼열 부부 "이쑤시개도 8조각 나눠 써" 남편 기부 2년뒤 부인도 실천"남편의 기부 바이러스가 저한테도 옮아왔나 봐요. 평생 아껴서 모으기만 했는데 이제 아낌없이 나누려고 해요."

    19일 서울 동대문구 카이스트(KAIST) 서울캠퍼스. 김병호(70) 서전농원 대표가 양복 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한 화장지를 꺼내자 부인 김삼열(61)씨가 "사람 많은 데서 창피하게 왜 이러세요" 하며 잽싸게 가로챘다. 김 대표가 손을 닦은 후 다시 쓰기 위해 버리지 않고 주머니에 넣어둔 화장지였다. 화장지도 아껴 쓰는 남편은 2009년 카이스트에 300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기부했다.

    이날은 부인 삼열씨가 자신의 명의로 된 50억원 상당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조안리 2247㎡(681평) 토지를 카이스트에 기부했다. 부부가 평생의 땀방울을 아낌없이 내놓은 것이다. 큰돈을 맡겨온 기부자의 가족이 수십억원대의 금액을 다시 맡겨온 경우는 카이스트 사상 처음이다.

    부인 김씨는 "30년 전 결혼기념일에 남편한테 선물로 받아 배나무·잣나무 등을 심고 노후 대비를 위해 관리하던 땅이었다"며 "우리 부부보다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되기 바란다"고 했다. 김 대표와 아내 삼열씨는 1970년 서울에서 전라도 광주로 향하는 기차 옆좌석에 앉은 것이 인연이 돼 1973년 백년가약을 맺었다. 김 대표는 17살이던 1958년 보리 한 가마니 가격인 단돈 76원을 들고 고향인 전북 부안을 떠나 상경했다.

    7남매 중 장남인 김 대표는 서울에서 식당 밥 배달원, 운수회사 직원 등으로 일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무더운 여름날 단돈 1원을 아끼려고 남들 다 먹는 사카린 음료수도 참았다고 한다. 부인은 "남편은 이쑤시개를 8조각으로 나누어 사용하고, 손 씻은 물도 모아놓고 재활용하는 사람"이라며 "아내로서 답답하기도 했지만 이제 나도 똑같아졌다"며 웃었다.

2009년 카이스트에 300억원을 기부한 데 이어 19일 다시 이 학교에 발전기금으로 50억원을 기부한 서전농원 대표 김병호(가운데)씨와 부인 김삼열(왼쪽에서 네번째)씨. KAIST 서울캠퍼스에서 서남표 총장에게 기금 50억원 기증서를 전달한 부부가 학생들과 나란히 교정을 걷고 있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이들은 어렵게 모은 돈으로 1988년 경기도 용인에 16만5000㎡(약 5만평)에 이르는 농장 터를 구입해 20여년간 서전농원을 운영하며 크게 성공했다. 부인 김씨는 "남편은 7남매 중 장남으로 동생들 학업을 뒷바라지하느라 정작 본인은 초등학교만 나왔다"며 "1987년 부친상을 치르고 남은 부의금을 친척 자녀의 등록금으로 내놓고, 고향인 전북 부안군에 장학금 10억원을 내놓는 등 기부에 열심이었다"고 했다.

2004년 10월 뇌졸중으로 쓰러졌던 김 대표는 회복 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지론대로 평생 모은 300억원 상당의 경기도 용인의 임야, 전답 등 9만4744㎡(2만8710평)를 카이스트에 기증했다. 한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과학 영재들을 키워달라는 의미였다. 그가 기증한 돈으로 카이스트에는 지하 1층, 지상 10층 규모의 'IT융합센터'가 세워지고 있다.

가진 것 대부분을 내놓은 부부는 현재 경기도 용인의 실평수 85㎡(26평)짜리 실버타운에 살고 있다. 사후 시신 기증까지 해놓은 상태다.

김 대표는 "'버는 것은 기술이요, 쓰는 것은 예술이다'라는 말을 좋아한다"며 "우리가 기부한 것을 많은 사람이 훨씬 가치 있게 사용한다는 생각에 뿌듯하다"고 했다. 아들 김세윤(38)씨는 "물질적 재산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유산'을 부모님께 많이 받았다"며 "부모님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가을밤 경회루 깨운 풍악에… 연못가 능수버들도 어깨춤

가무악 시범 향연에 관객 탄성… 내달 15일 유료 공연 열기로

17일 오후 서울 경복궁 경회루 연못에 띄운 나룻배에서 인간문화재 안숙선 씨가 심청가 중 뱃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날 열린 공연 ‘경회루 연향’은 전통 가무악이 어우러져 700여 관객을 매료시켰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17일 오후 8시 서울 경복궁 경회루(국보 224호). 나각(螺角)과 나발의 장엄한 소리가 누각 2층에서 울려 퍼지면서 경복궁의 어둠을 깨웠다. 경회루 1층 돌기둥 사이로 무용수들이 줄지어 나타나 질서정연하게 일무(佾舞)를 추기 시작했다. 일무는 종묘제례나 문묘제례 때 여러 줄로 벌려 서서 추는 춤이다. 일무가 끝나갈 즈음 청아하고 산뜻한 대금 소리가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경회루 연못 서편의 작은 섬에서 인간문화재 이생강 씨가 연주하는 대금 소리였다.

이날 경복궁 경회루와 주변 연못 일대에서는 1시간 동안 전통 가무악(歌舞樂)의 향연이 펼쳐졌다.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살아 숨쉬는 궁궐 만들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마련한 ‘경회루 연향(宴饗)’이다. 지난해엔 경회루 누각 2층 내부에서 공연했으나 올해엔 경회루 1, 2층과 연못 일대를 모두 배경으로 삼아 공연을 새롭게 꾸몄다.

객석은 경회루 정면 연못가에 마련했다. 어둠을 뚫고 경회루 뒤쪽으로 북악이 우뚝 솟았고 동쪽으로는 근정전과 전각들의 지붕선이 겹겹으로 이어졌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경회루 연못가의 능수버들이 조심스레 흩날렸다.

대금산조가 끝나자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웅장하고 화려한 궁중 정재, 생동감 넘치는 오고무(五鼓舞)가 이어졌다. 공연이 무르익어 갈 무렵, 연못에 나룻배 한 척이 모습을 드러냈다. 판소리 심청가 중 뱃노래가 들렸다. 인간문화재 안숙선 씨였다. 예상치 못한 경회루 선상 공연에 700여 객석에선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날 행사는 시범 초청행사였다.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10월 15일 오후 8시 유료 공연을 마련하고 내년부터는 공연 횟수를 늘릴 계획이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90세 브라질 남성, 자손이 무려 180명

[연합]입력 2011.09.20 15:14
부인들을 포함해 4명의 여성에게서 50명의 자식을 둔 90세 브라질 남성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19일(현지시각) 브라질 히우그란지 두 노르테주(州)의 캄포 그란데에 사는 루이스 코스타 데 올리베이라(90)라는 남성이 첫번째 부인에게서 낳은 17명을 포함해 모두 50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고 보도했다.

은퇴한 농장 노동자인 그는 첫번째 부인이 숨지고 나서 마리아 프란치스카 다 실바(64·여)라는 여성과 재혼해 17명의 아이를 더 낳았으며, 그녀와 결혼생활 도중 처제와 바람을 피워 15명의 자녀를 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장모와도 바람을 피워 1명을 더 낳았다.

이렇게 모두 50명의 자식을 둔 올리베이라의 손자는 100명, 증손자는 30명으로 그의 자손은 무려 180명에 달한다.

그는 "아들과 손자들의 이름을 다는 모르지만 많은 자손이 주위에 널려 있다"면서 "세상에서 신이 만든 것 중 최고는 여자고, 항상 여자를 만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내가 모르는 아이가 더 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의 둘째 부인 다 실바는 "그는 우리 중 누구도 학대하지 않았고, 언제나 아이들을 잘 돌봤으며 사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김대중 칼럼] '한나라'에 인질 잡힌 한국의 보수

김대중 고문

할 수 없이 한나라당 찍어왔으나 이념, 對北·복지정책 어긋나고 민주당 제2중대로 끌려다녀
대선 직전 우파분열 우려하지만 보수정치의 진정한 성공 위해 '새로운 보수' 모색해야

이제까지 이 나라의 보수우파 진영은 선택의 여지 없이 언필칭 '보수정당'이라는 한나라당을 찍어왔다. 한나라당을 전적으로 지지해서가 아니었다. 안보 문제에서, 경제 문제에서, 북한 문제에서 그래도 한나라당이 낫다고 해서 그랬다. 그래서 이들을 '전통적인 한나라당 지지세력'이라고 불러왔다.

이 '전통적 지지세력'이 깨지고 있다. 보수우파 사람들이 이 숙명적(?) 관계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한나라당이 반드시 그들의 이념을, 그들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화가 나기 시작했다. 한나라당과 한나라당 의원, 한나라당 대권주자들이 보수우파 세력을 오갈 데 없는 이념적 무능력자로 여기며 자신들을 장중(掌中)의 물건 취급하는 데 분통이 터진다. 마치 "당신들이 우리 말고는 갈 곳이 어디 있느냐"면서 "당신들은 죽으나 사나 한나라당을 찍을 수밖에 없다"는 오만과 조롱이 극에 달한 느낌이다. 한마디로 이들은 한나라당에 인질 잡혀 있는 꼴이다.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는 우리 국민, 특히 전통적인 한나라당 지지세력이 4년 전 그들을 선택해준 가장 핵심적인 동인(動因)인 이념 면에서, 안보 면에서, 대북인식에서 크게 어긋나고 있다. 이 나라를 좀먹는 친북(親北)·종북(從北)세력을 척결하기는커녕 그 기간 동안 종북세력의 방자한 행동과 판도는 그 어느 때보다 확대됐다. 경제·사회면에서도 정부와 한나라당은 기존의 보수적 트레이드마크인 시장자유, 친(親)기업, 건전재정의 모토를 버리고 포퓰리스트적인 복지를 따라 민주당의 제2중대로 가고 있다. 공권력의 강력한 집행, 법치 면에서도 야당에 질질 끌려 다녀온 4년이었다. 이럴 바에는 지금 한나라당이 가고 있는 길의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을 떠나 보수우파 사람들이 굳이 한나라당을 지지하고 선택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보수우파 진영은 우파의 다변화를 모색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왜 한나라당에만 목을 매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그들을 대변할 '새로운 보수'의 등장을 요구할 시점에 왔다. 물론 한나라당의 무슨 '대세론', 두자릿수 이상의 지지도(여론조사상)는 한나라당의 대안으로 나서려는 사람들에게 넘기 어려운 장애물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뒤집어 보면 지금 보수우파 진영을 대변할 정치세력의 다변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독점적 상황 때문에 생기는 한시적 현상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보수세력은 스스로에게 주눅들거나 쭈뼛거릴 필요가 없다. 한나라당이 그들을 대변하지 않거나 못한다면 과감히 한나라당을 버려야 한다. 그것에 안주할수록 한나라당은 보수우파 세력 위에 군림하며 더욱 기고만장하게 반(反)보수적 길을 갈 것이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보다 선택과 배신의 문제다. 우리가 뽑아준 대로의 길을 가지 않는다면 다른 대변자를 찾는 것이 순리(順理)의 정치다.

'새로운 보수'의 길을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은 보수의 다변화가 결국 우파의 분열을 초래할 것이고, 그것은 좌파세력에게 정권을 공짜로 갖다 바치는 것이라는 점을 두려워하고 있다. 한 보수인사는 "우파가 분열하면 민주당이 정권을 차지할 가능성이 크고 그것은 곧 민주당의 1중대인 민노당의 세상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만큼 정권을 민주당에 넘겨주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며 우파의 분열을 걱정했다. 그것이 바로 한나라당의 '보수 독점(獨占)'이라는 벽을 넘기 어려운 요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의 보수우파는 언제까지 '한나라당'에 갇혀 있을 수 없다. 어차피 지금의 한나라당 구성요소나 지도부의 색깔들로 보아 보수의 길을 보장받을 수 없다면 굳이 그들에 끌려다니는 것보다 '분열'이 주는 충격을 감수하는 것이 한 치유책일 수도 있다. 그리고 분열은 '단일화'의 전(前)단계일 수 있다. 야당과 야권은 크고 작은 선거 때마다 단일화의 드라마를 연출해 결정적 재미를 보고 있는데 보수우파라고 그것을 하지 못한다는 법이 없다. 하지만 실제로 우파는 지난번 서울시교육감 선거 때처럼 단일화를 할 줄 모른다는 지적이 있다. 너무 독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욕심이 많아서 그렇다고 한다. 그렇다면 더더욱 우파의 정치꾼들은 정권을 담당할 자격과 능력이 없다. 그것이 한국정치의 숙명이라면 도리가 없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한나라당식(式)' 정치의 방향이나 체질로는 한국의 보수정치가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한나라당의 대표나 대권주자들, 지도부가 독점체제에 안주하면서 보수우파 세력을 장중의 물건이나 '떼어놓은 당상'쯤으로 여기며 민주당의 짝퉁 노래나 부르고 있는 상황에서 한나라당의 재집권은 아무 의미가 없다. 보수우파 주류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이번에 정권을 넘겨주는 한이 있어도 '새로운 보수'와 더불어 재기(再起)를 모색하는 것이 한국정치의 긴 장래를 위해 바람직할 것이다.

사진]완벽한 휴식 가능, 외딴 섬 등대호텔

[팝뉴스]입력 2011.09.23 09:09

사람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바위투성이 외딴섬에 위치한 한 은밀한 휴식처가 공개되어 누리꾼들의 관심을 모았다. 노르웨이 북쪽 스타드란데트 해안의 작은 섬 스비뇌이 등대 호텔이 바로 그 화제의 주인공.

폭이 1km도 채 되지 않는 이 섬에 등대가 들어선 것은 1905년. 폭풍이 잦고 물살이 특히나 거센 이 지역에서 등대는 100년 넘게 바닷사람들의 눈이 되어왔다. 2005년 리모델링을 거쳐 별장식 호텔로 거듭난 이곳은 오직 헬리콥터로만 접근이 가능하기 때문에 자연 한가운데에서 고독을 즐기고픈 사람들에게는 안성맞춤인 휴식처. 24시간 상주하는 스태프들이 마치 내 집처럼 편안하고 안락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4개의 더블룸과 3개의 싱글룸을 갖추고 있어 친구 또는 가족과도 특별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이곳의 이용가격은 헬리콥터 이동과 식사 제공 서비스 모두 포함하여 1인당 250유로(약 40만 원). 수용가능 인원은 11명.

직장인 뇌구조‥男 ‘로또’ 女 ‘칼퇴근’이 최고

직장인들은 월급날을 가장 기다린다. 특히 남성 직장인들은 로또 당첨을 꿈꾸며, 여성 직장인들은 칼퇴근이 행복하다.

▲ 남녀 직장인의 뇌구조(도움: 심심해닷컴 http://www.simsimhe.com)

직장인들의 머릿속은 어떨까. 23일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남녀직장인을 대상으로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관심사’에 대해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월급날(36%)’을 가장 중요하게 꼽았다.

남성 직장인들은 현재 나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관심사로 로또(28.2%), 카드값(24.6%), 배우자(22.6%), 퇴근(21.9%) 을 주로 꼽았다.

반면 여성 직장인들은 퇴근(30.8%), 카드값(24.9%), 주말계획(21.7%), 이직(17.1%) 순으로 머릿속이 채워져 있다고 답했다.

그밖에는 점심메뉴(10.5%)와 휴가(9.6%)가 있었으며 기타 답변으로는 재테크 , 성형, 연봉인상, 노후걱정 등이 있었다.

직장인들의 업무 몰입도가 가장 높은 시간으로 39.7%가 10~11시를 꼽았다. 다음으로 9~10시(14.5%), 11~12시(9.2%)라고 답했다.

하지만 가장 잡생각이 나는 시간은 점심식사 바로 후인 것으로 조사됐다. 업무에 몰입이 안되고 가장 잡생각이 나는 시간대로 ‘13~14시’를 선택한 응답자가 22.3%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14~15시(17.9%), 17~18시(16.6%) 순이었다.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남녀 모두 ‘커피 한잔’이라고 답한 응답자가 각 33.1%와 37.4%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기사 검색(21.7%’을 선택했다.

이 외에도 남성 직장인들은 담배(17.4%), 온라인 쇼핑(8.9%)을 한다고 답했다.

여성 직장인들은 메신저 채팅(13.5%), 블로그, 페이스북 등 SNS활동(13.0%) 등이었다.
 

 

- 인왕산 鶴학巢소島도에서 최범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