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우연히 강북삼성병원 뒷편 골목을 따라 언덕으로 올라가 보았는데,

그곳에 홍난파 작곡가의 생가가 있었다.

이 유명한 작곡가의 생가가 아니었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이 집을 보고 발길을 잠시 멈추었을텐데...

우리에게 소중한 문화유산을 남겨준 예술가들의 더 많은 흔적들이 홍난파 선생님의 생가같이

예쁘게 보존되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자주 지나다니는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시민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과 볼거리가 항상 많은데,

의외로 관객은 많지 않다.

다들 바쁜 관계로....

삼청각

주말 밤 삼청동

조선 왕실도 저출산의 늪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김지영 서울대연구원 논문, 인조 이후 출산율 반토막]
후기 갈수록 유교이념 심화, 처첩 차별현상 더욱 심해져
양반집 딸들 후궁되길 꺼려… 제사 늘어 왕 금욕기간도 증가저출산은 우리 시대만의 고민은 아니었다. 조선 왕실도 노심초사했다. 왕손의 출생을 '종사지경(螽斯之慶·한 번에 알 99개를 낳는 곤충인 종사에 빗댄 경사)'이라 부를 정도로 다산을 염원했지만 출산력은 갈수록 줄었고 급기야 고종·철종에 이르러서는 방계 자손에서 양자를 들여야 했다.

조선시대 왕실의 인구학적 변화와 사회문화적 원인을 통계학적으로 정밀 추적한 연구 논문이 나왔다. 김지영 서울대 비교문화연구소 연구원이 계간 '정신문화연구' 가을호에 발표한 논문 '조선시대 왕실 여성의 출산력'에서는 왕실 출산이 후기로 갈수록 떨어진 것이 유교 질서의 심화와 궤를 같이한다고 분석한다.

왕실의 多産 열망은 높았지만

조선 왕실은 왕위 계승자인 원자(元子)의 탄생이 늦어질 때마다 종묘사직의 위기라며 불안해했다. 다산 열망은 여러 형태로 표출됐다. 왕실 가례 집사관을 뽑을 때도 '자식 복이 많은 사람'인지가 중요했다. 숙종과 인원왕후 가례에서 부사를 맡은 인경황후 김씨 친오빠 김진구는 자녀가 9남3녀였다. 왕실 가례에 쓰인 병풍인 '곽분양행락도'는 중국 당대 곽자의(697~781) 장군의 생애를 그린 것으로 그는 8남7녀를 뒀다. 조선 후기 왕실은 '팔자칠서(八子七�E· 8명의 아들과 7명의 사위)'를 목표로 내걸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스냅샷으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조선닷컴
조선 왕조에서 자녀수가 가장 많았던 왕은 태종이었다. 왕비 원경왕후로부터 4남 4녀, 10명의 후궁으로부터 21명의 자녀를 두어 모두 29명을 기록했다. 위의 그림은 서양화가 고영훈이 2002년 본지에 연재된‘다시 읽는 여인열전’에 그린 태종 인물화.

하지만 인조시대를 분기점으로 총 자녀 수가 이전 183명에서 이후 90명으로 반 토막 났다. 앞서 태종·세종·성종·중종·선조대에는 자녀가 20~29명이었으나, 인조 이후는 4~14명에 그쳤다. 왕비가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경우도 속출했다.

왕의 여자… 출산의 주축은 후궁

왕실 출산력의 주축은 후궁이었다. 조선시대 왕실 자녀 총 273명 중 왕비 자녀가 93명, 후궁 자녀가 180명(전체 3분의 2)이었다.

후궁에는 간택후궁과 승은후궁이 있었다. 간택후궁은 왕비처럼 가문·부덕·자색을 겸비한 양반집 딸 중에 공식 간택 절차를 거쳐 후궁이 된 경우. 승은후궁은 궁녀 중 왕의 '승은(承恩)'을 입은 여성들이었다. 승은을 입고도 공식 품계를 받지 못한 경우엔 특별상궁이라 해서 직무를 면제받았다. 궁인들의 주 임무는 처소 주인의 시중·바느질·자수·음식·청소·세면·빨래 같은 일이었다. 이 중 침실 시중을 드는 지밀나인이 승은을 입을 가능성이 컸다. 지밀나인의 입궁 나이는 4~10세로 다른 궁인들(12세 내외)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렸고 따로 시녀 교지(敎旨·왕이 관원에게 내리는 문서)를 받았다.

후기에는 양반집 딸도 후궁 꺼려

태종은 후궁제의 기초를 닦으면서 왕이 3명의 간택후궁을 두도록 했다. 세종은 아들 문종을 위해 권·정·홍씨 등 3명의 후궁을 동시에 뽑기도 했다. 조선 초기엔 왕 1명당 후궁이 평균 7~8명이었지만 후기에는 평균 3명으로 줄었다. 전기엔 간택후궁(30명)이 승은후궁(28명)보다 많았지만 후기에는 간택후궁(5명)은 줄고 승은후궁(29명)이 늘었다. 그 배경에는 간택후궁의 사회적 지위 추락이 있었다. 전기만 해도 후궁이 왕비가 되는 경우도 많았지만 후기에는 드물었다. 선조 이후부터는 왕비가 죽으면 아예 계비를 간택하는 것이 관례가 됐다. 영조는 60세에 15세 신부(정순왕후 김씨)를 계비로 맞았다. 조선 후기에 왕위 계승자를 낳은 후궁을 왕비로 책봉한 사례는 희빈 장씨밖에 없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유교적 종법 질서가 심화됐기 때문이었다. 17세기 이후 '예학'이 발전하고 적장자(嫡長子·정실이 낳은 맏아들)를 통한 집안 계승이 중시된 결과, 처첩 구분이 커졌고, 왕비·후궁 간 지위 격차도 벌어졌다. 양반집에서도 딸을 간택후궁으로 들이는 것을 꺼렸다. 승은후궁의 출산력도 줄면서 헌종 이후 왕실 직계 자손 가계는 단절되기에 이른다.

설상가상… 왕 금욕 기간도 늘어

여기에는 왕의 금욕도 한몫했다. 조선 중기 이후 유교 의례가 강화되면서 지도층의 상례와 제례 실천이 강조됐다. 상례의 핵심이 '3년상'이었다. 기일로부터 만 24개월간 상중 금욕이 요구됐다. 국왕도 예외가 아니었다. 현종비 명성왕후는 효종의 3년상이 끝나고 부묘(祔廟·신주를 종묘에 모심)도 하기 전에 임신하고, 부묘 후 얼마 있지 않아 출산했다가 송시열의 비난을 샀다. 제사 대상자 수도 갈수록 늘어난 데다 다른 국가 제사 기일까지 포함해 왕의 '금욕 기간'은 후기로 갈수록 길어졌다. 왕실은 저출산의 늪에서 헤어날 길이 없었다. 김지영 연구원은 "조선사회의 유교화 과정이 출산과 같은 사적인 일상생활 영역까지도 근본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잃어버린 20년 日本에서 배운다] 인력 유치는커녕… 한국 온 이민자 5년새 1만여명 줄어

[5·끝] 고령화·저출산 탈출구는…
反외국인 정서 강하고 교육·의료 시스템 문제…
값싼 노동력 몰려오는데 고급 두뇌는 한국 외면

"에너지가 넘치는 개방형 사회로 가기 위해 10~15년에 걸쳐 모두 200만명의 아시아계 이민자를 받아들이자."

삼성전자를 10여년간 이끌었던 윤종용 한국공학한림원 회장은 요즘 어디를 가나 이 같은 주장을 강조한다. 출산율 하락과 고령화에 따른 급격한 생산연령 인구(15~64세) 감소가 국가 경쟁력 추락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이를 피하는 탈출구는 외국의 노동력을 들여오는 것이란 논리였다. 하지만 지금 한국은 거꾸로 가고 있다. 해외에서 우수 인재를 유치해도 부족할 판에 올해까지 우리나라가 받아들인 외국 이민자는 53만4800여명으로 5년 전과 비교해 1만6000여명이 줄었다(유엔경제사회국 조사).

고급 인재는 한국 외면

그나마 한국으로 들어오는 외국인은 동남아시아와 중국 등에서 중소기업 생산현장, 식당 종업원 등 저임금 일자리를 찾아 오는 값싼 노동력이 90%를 넘는다. 일부 금융업을 제외하고, 고급 두뇌는 여전히 한국을 외면하고 있다.

이달 초 서울 양천구에 있는 법무부 산하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 2층에 있는 중국 체류관리·여권교부 사무실은 외국인 등록증을 받으려는 중국 동포 100여명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정면 전광판에는 '대기인 57명'이라고 적혀 있었다.

국내 외국인 유학생들 수도권의 한 대학에서 외국인 학생들이 캠퍼스를 거닐고 있다. 우리나라로 온 해외 유학생은 8만3800여명, 이 중 중국을 제외하면 2만6000여명 수준이다. /김용국 기자

비슷한 시각, 같은 건물 1층에 위치한 글로벌인재·투자외국인 유치 지원센터는 딴판이었다. 이곳에서는 기업체 임원이나 투자자, 교수 등 소위 전문직 외국인을 대상으로 체류 관련 서류 작성과 행정 절차를 도와준다. 5개의 상담 부스는 텅텅 비어 있었다. 센터 직원은 "하루에 한두 명 오는데, 오늘은 아직 없다"고 말했다.

단기(短期) 체류하는 저임금 외국인 근로자 위주의 수혈(輸血)로는 경쟁력을 보완하는 데 한계가 있다. 문제는 숙련 노동자와 고급 인력에 대한 문을 더욱 활짝 열어야 하는데, 국내의 제도적·문화적 폐쇄성이 이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픽=유재일 기자 jae0903@chosun.com

겉으로 드러난 우리 국민의 글로벌화에 대한 믿음과 열정은 상당한 편이다. 국제경쟁력 평가로 유명한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의 2010년 보고서에 따르면, '글로벌화에 대한 태도' 부문에서 한국은 13위를 기록해 18위를 기록한 일본이나 21위를 기록한 캐나다보다 앞섰다.

후진적 교육·의료시스템이 인재 유치 막아

하지만 실제 모습은 외부 세계에 개방돼 있지 못하다. 영국 출신 엔지니어 B(38)씨는 지난 2007년 국내 굴지의 전자회사에 파격적인 조건으로 스카우트돼 가족과 함께 한국에 왔다. 하지만 1년 반 만에 부인과 딸을 영국으로 돌려보냈고, 그 역시 계약이 끝난 지난 8월 영국으로 돌아갔다. B씨는 "딸을 외국인 학교에 입학시키려고 했는데, 6개월이나 기다려야 하는 등 교육 여건이 너무 불편했다"고 말했다.

세계화에 대해 부족한 우리들의 의식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LG전자에 근무하는 마두커 구룽(Gurung·32)씨는 인도 명문 공과대학을 졸업한 엔지니어이다. 그는 최근 길을 가다 외국인 단속반으로 보이는 사복 차림의 한 남자로부터 여권 제시를 요구받았다. 불법 체류자로 의심받은 것이다. 그는 "남아시아계 사원들은 이런 일을 종종 겪게 된다"며 "회사에서도 인도·파키스탄계 사원들에게는 여권 사본과 LG 사원증을 항상 갖고 다니라고 조언한다"고 말했다.

이런 사회·문화적 분위기와 뒤떨어진 교육·의료 등 사회 시스템은 고급 외국인력 유치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 김동열 연구위원은 "단순 노동 인력을 수입한 독일은 심각한 인종 갈등을 겪는 반면, 전문직을 적극 받아들인 캐나다는 산업 생산력이 향상됐다"고 말했다.

 

[잃어버린 20년 일본(日本)에서 배운다] 일(日) 빈집 756만채… 뉴타운이 '고스트 타운'으로

[3] 거품 꺼진 부동산… 신도시 시대 끝났다
1.고령화·저출산 2.청년실업 4.재정 5.탈출구
조선일보·LG경제硏 공동기획
60~70년대 열풍 일었던 도쿄·오사카 주변 뉴타운 고령화·불황에 '텅빈 도시'
젊은이들은 싼 집 찾아 공장지역 몰리는 기현상일본 오사카 센리(千里)뉴타운의 북쪽 지구 후지시로다이(藤白臺) 마을 모양은 방사형이다. 주거지와 녹지가 이상적으로 짜인 이곳 중심부에 도착하자 푸른색 진료소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외과·내과 등 의원 6곳의 이름이 나열돼 있었다. 주민들이 '의사촌'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인근 시민회관에선 노인들이 노래방·댄스 모임을 열고 있었다. 입구에서 접수를 하고 있던 노인에게 의사촌에 대해 물으니 "지금은 내과·안과·소아과만 남았다"고 말했다. 9년 전에 이비인후과, 4년 전에 외과가 사라졌고, 치과는 2년 전 의사가 고령으로 눈이 어두워져 문을 닫았다는 것이다.

현재 진료 중인 내과 의사는 84세, 소아과 의사는 82세, 안과 의사는 76세. 소아과 의원은 지난 4월부터 진료일을 일주일에 나흘(종일 진료는 이틀)로 단축했다. 접수창구의 노인은 "기력도 떨어지고 손님(어린이)도 줄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첫 신도시인 오사카의 센리뉴타운. 주민 10명 중 3명이 65세 이상인 노인 도시로 변했다. /오사카=선우정 특파원

오사카 지역의 북쪽 센리뉴타운(1160㏊)은 일본에서 처음 조성된 대규모 신도시다. 영국 전원도시 모델을 도입해 일본 전국에 뉴타운 열풍을 일으킨 진원지로 꼽힌다. 1962년 입주를 시작해 48년이 흘렀다. 전성기였던 1975년의 인구는 13만명. 65세 이상 노인 인구의 비율(고령화율)이 3.5%였던 젊은 도시였다.

40년이 지난 이곳의 인구는 9만명으로 줄었다. 반면 고령화율은 29.9%로 높아졌다.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일본 긴키(近畿)지역의 고령화율(23%)을 크게 넘어선다. 어린이가 줄면서 1973년 개교한 기타센리(北千里) 초등학교는 작년에 문을 닫았다. 의사들의 고령화로 병원은 64곳에서 46곳으로 줄었다.

센리뉴타운에서도 비교적 초기에 건설된 후지시로다이 지역의 고령화율은 32%. 10명 중 3명 이상이 노인이다. 주민 미시마 유키에(69)씨는 "아파트에 엘리베이터가 없어 4, 5층까지 올라가기 어렵고 공간이 필요없이 넓어 말년에 도심 소형주택으로 이사를 하는 노인들도 많다"고 말했다.


일본의 뉴타운은 40대 가장의 4인 가족을 모델로 조성됐다. 그러나 가장은 늙고 자녀가 떠나면서 도시 전체가 비어가고 있는 것이다. 인근 부동산업체 중계인은 "노후 건물을 재건축하고 있지만 80㎡ 분양 가격이 4000만엔 수준이라 젊은 가족은 여전히 입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오사카 지역의 동쪽에선 정반대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일본 최대의 중소기업 지역인 히가시오사카(東大阪)시. 중심부인 다카이다(高井田) 지역에 들어서니 공장 사이사이에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오사카 공업지대의 '주공혼재(住工混在)' 현상이다.

고도성장의 막바지였던 1983년에 1만 곳을 넘긴 히가시오사카시의 공장은 현재 6000곳 정도. 장기불황과 엔화강세로 공장들이 줄줄이 폐업하거나 해외로 빠져나갔다. 이 틈을 아파트가 비집고 들어와 주거지와 공장이 뒤섞이기 시작하면서 공장 소음 때문에 주민들이 충돌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쾌적한 신도시는 비어 가는데 온종일 기계 소리가 요란한 공장 지역엔 사람들이 몰리는 이상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다카이다의 부동산 중계인은 "주거 환경이 안 좋은 만큼 집값이나 월세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히가시오사카의 80㎡ 규모 신축아파트 분양가격은 2300만엔 수준. 센리뉴타운의 절반 가격이다. 장기불황 이후 사회에 나온 젊은 가족들이 비싼 신도시 대신 싼 공업지역을 선택하는 것이다. 고령화와 장기불황이 맞물린 결과다.

이런 기형적 현상은 지금 일본 전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1971년 센리뉴타운에 이어 일본 최대 규모(2226㏊)로 건설된 도쿄의 다마(多摩)뉴타운 역시 1990년대 이후 주민 고령화와 공동화(空洞化)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히가시오사카와 비슷한 규모의 도쿄 중소기업 밀집지역인 오타(大田) 지구도 공장과 주거지가 공존하는 '주공혼재' 문제로 고심하고 있다.


◆주공혼재 (住工混在)

도시 한복판에 공장과 주택이 뒤엉켜 주거환경이 열악한 지역. 한국의 경우 과거 서울 구로동과 성수동 같은 지역이 대표적이다. 출퇴근은 편리하지만 공해와 환경오염으로 집값이 떨어지고 자녀 교육에도 불리하다. 일본에서는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면서 공장밀집 지역 주변에 대규모 주택지가 형성되고 있다.


◆공동기획·취재팀

〈조선일보〉
차학봉 특파원, 선우정 특파원, 유하룡 기자, 이인열 기자, 김수혜 기자, 방현철 기자, 염강수 특파원, 이성훈 기자, 곽창렬 기자, 박승혁 기자

〈LG경제연구원〉
이지평 수석연구위원, 이근태 연구위원, 김형주 연구위원, 강중구 책임연구원, 윤상하 선임연구원

전원주택 5채… 숲 속에 살포시 내려앉다

'포레스트 퀸텟' 건축가 이현호 홍익대 교수
자연이 집 안으로 지나가도록 여러 각도로 개방되게 지어
"거기에 사는 사람과 잘 맞는 집이 좋은 집"

조용한 시골에서 노후를 보내려는 사람들이 늘면서 전국에 전원주택이 속속 세워지고 있다. 하지만 모든 전원주택이 건축적으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설계 전에 땅을 운동장처럼 평평하게 깎아버려 대지의 특성을 지워버리는 사례가 많다. 너무 큰 집을 짓는 바람에 관리가 제대로 안 되기도 하고 무성의하게 네모반듯한 집을 지어 주변 환경과 부조화를 빚기도 한다.

홍익대 건축대학 이현호(41·키아즈머스 대표) 교수의 '포레스트 퀸텟(forest's quintet)'은 강원도 양구군 숲 속에 5채의 전원주택을 지은 프로젝트다. 주변 자연과 조화를 이뤘다는 점에서 전원주택 건축의 한 방향을 제시한 프로젝트로 인정받아 올해 한국건축가협회상 '베스트 7' 가운데 하나로 선정됐다. 이 교수는 인천 송도아트센터 오페라극장과 일본 도쿄 긴자의 샤넬빌딩 등을 설계한 건축가다.

포레스트 퀸텟은 '숲의 오중주'라는 뜻이다. 음색이 다른 악기들이 이루는 오중주처럼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다섯 채의 집이 숲과 어우러져 있다. 최근 양구군 현장에서 만난 이 교수는 "자연 속에 숨는 게 아니라 건물이 각자 개성을 뽐내면서도 자연의 질서를 깨지 않으려 했다"며 "자연스러운 건축은 건축물이 대지에 살포시 얹힐 때 생겨난다"고 했다.

프로젝트는 2008년에 착수했다. 50∼60대의 건축주 5명이 이 교수를 찾아왔다. 친척, 친구 사이인 이들은 "은퇴 후에 조용한 시골에 모여 살기로 약속했다"며 5쌍의 부부를 위해 5채의 집을 설계해 줄 것을 의뢰했다. 양구를 택한 것은 아직 난개발이 진행되지 않은 지역을 찾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교수는 "대지를 보는 순간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고 했다. 숲을 가로질러 작은 임도(林道)가 난 것을 제외하면 거의 손을 대지 않은 땅이었기 때문이었다.

외장재로 사용한 이페 나무에 약제 처리를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변색이 일어나게 했다. 2층의 방 두 개 사이의 공간은 한옥의 대청마루처럼 앞쪽 산을 향해 개방했다. /사진가 박영채
주택은 주인의 생활 습관까지 세심하게 고려해야 한다. 규모는 작아도 설계하기 어렵다. 이 교수는 "이번 프로젝트는 5채의 집이 각자 개성을 드러내면서도 통일성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더 어려웠다"고 했다.

5채의 집 모두 건물 면적이 148㎡(45평)로 같지만 건축주의 요구는 저마다 달랐다. 부부의 생활공간과 손님 방을 1·2층에 분리해 달라고 부탁하는가 하면, 손님을 자주 초대하는 부부는 파티를 열 수 있도록 1층 거실에 베란다처럼 이어진 야외 공간을 요구하기도 했다. 각 집이 놓이는 대지의 모양이 다르다는 점도 건물의 외관이 조금씩 차이를 보이는 이유다. "경사지고 좁은 땅에 놓이는 집은 기둥 위에 건물을 올려 공간을 확보하고, 숲이 정면을 가로막는 집은 건물 자체를 높여 숲 너머까지 보이게 했다."

건물이 제각각 튀지 않도록 통일성을 부여하는 데도 신경을 썼다. 공통으로 적용된 콘셉트는 사면의 풍광을 바라볼 수 있도록 개방된 정자(亭子)였다. 천창·발코니·통유리 등을 활용, 주변의 자연을 향해 여러 각도로 개방된 집을 지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자연이 집 안으로 지나가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건물 모서리에 예각과 둔각을 사용해 뾰족한 지붕이 있는 집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을 은유적으로 남겨 뒀다(위). 정면을 숲이 가로막은 집은 건물의 키를 키워서 숲 너머 먼곳까지 내다보이게 했다(아래).

건물이 주변의 숲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도록 외장재에 이페 나무(ipétrees)를 쓴 점도 눈에 띈다. 목질이 단단한 이페 나무는 원래 데크 재료로 자주 쓰인다. 시간이 갈수록 갈색에서 은회색으로 변하기 때문에 보통은 겉에 약제를 발라 변색을 막는다. 이 프로젝트에서는 의도적으로 이 과정을 생략해 시간의 흐름이 건물에 스며들도록 했다고 한다.

건물 모두 대부분의 모서리가 예각과 둔각으로 돼 있다. 직각으로 꺾인 부분을 찾기 어렵다. 이 교수는 "전원주택을 짓는 사람들은 은퇴를 앞둔 60세 전후인 경우가 많은데, 이들은 아파트 이전 뾰족 지붕(박공지붕) 집에 살던 기억을 간직한 사람들"이라며 "그 기억을 은유적으로 남겨 두기 위해 각(角)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고 했다.

5채의 집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잘 지어졌을지 묻자 현답(賢答)이 돌아왔다. "가장 좋은 집은 없다. 거기 사는 사람과 가장 잘 맞는 집이 있을 뿐이다."

정치권 ‘막말 종결자’는 누구?
2011-09-30 오후 2:51:40 게재

일방적 자화자찬, 막말·망언 난무 … 진실·위로·감성의 말 드물어

정치는 말이다. 말 한마디에 정국이 하루아침에 뒤집어지기도 한다. 때론 정권이 휘청거리기도 한다. 그만큼 정치인의 말은 영향력이 크다.

지도자의 말은 더욱 그렇다. 말과 글은 정치인들이 대중과 소통하는 일차적 수단이다. 다만 글은 한 번 정도 걸러지는 과정이 있다. 하지만 말은 다르다. 수정할 기회조차 없이 대중들에게 곧바로 전달된다. 각종 말실수, 막말, 망언으로 설화에 휘말리고, 곤욕을 치른 정치인이 어디 한 두 명인가.

주요정치인들의 말과 화법을 통해 대한민국정치의 일단을 살펴본다.

국민 분노 부르는 MB식 화법 = <나는 꼼수다>라는 인터넷 라디오 방송이 네티즌들 사이에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명박 대통령에게 헌정하는 방송'이라며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 파격 때문이다. 여기에도 자주 등장하는 것이 이명박 대통령의 화법이다. 이 대통령은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내가 민주화 운동을 해봐서…" "내가 노점상을 운영해봐서 아는데…" "나도 창업했던 소상공인 선배라 아는데…" 등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평범한 샐러리맨에서 씨이오, 서울시장, 대통령에까지 오른 성공 신화가 오히려 화를 부르는 '석세스 트랩(성공의 덫)'이 되고 있다고 평가한다. 자신의 경험과 성공이 항상 옳다는 것을 전제로 행해지는 화법은 국민에게 위로보다는 좌절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얼마 전 미국을 방문했을 당시 "내가 대통령일 때 경제위기를 두 번 맞아 다행"이라는 표현은 국민에게 '좌절'을 넘어 '분노'를 느끼게 했다는 평가다. <나는 꼼수다>의 진행자들은 이 같은 MB식 화법을 두고 '전지전능한 각하'라고 비꼰다.

속모를 박근혜, 장광설 손학규 = 여야 대선주자로 불리는 정치인들도 나름의 독특한 화법이 있다. 한나라당 박근혜 전대표는 엄격하게 절제된 표현을 구사한다. 단문을 즐겨 쓰고, 단답형으로 대화하길 좋아한다. 대통령 딸로서 어릴 때부터 엄격하게 교육과 훈련을 반복해 온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여기에 4년을 지켜온 '대세론'도 한 몫 했다. 절제된 표현과 자제력은 추가 득점보다는 실점을 하지 않겠다는 수성의 의미가 크다. 박 전대표는 이 같은 절제된 표현으로 지난 1월 민주당 이낙연 의원과 함께 '국회를 빛낸 바른 언어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나친 절제에 대한 비판도 만만찮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측근조차 모를 정도라는 지적이다. 최근에도 서울시장 선거를 지원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숱한 관측이 난무하고 있다. "오늘은 얘기하지 말자"고 해놓고 다음에 언제 어떻게 설명하겠다는 설명은 어디에도 없다. 대변인 격인 이정현 의원이 늘 해설하고 풀이해주는 방식이다. 친 박근혜 계로 불리는 인사들조차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어 보인다. 당연히 국민들은 그 속을 알기가 더 힘들 수밖에 없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데 어떻게 지지하라는 의미인지 궁금할 뿐이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는 교수출신 정치인이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인다. 이 때문에 회의가 길어지기 일쑤다. 오죽하면 최고위원 회의에 발언시간을 제안하는 방식이 도입됐을 정도다. 본인도 알고 있다. "내가 이렇게 생겨먹어서…"라며 쑥스러워 한다. 하지만 말이 길어지면서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분명치 않아지는 경우가 잦다. 말은 소통의 수단이자 방법일 뿐이다. 그런데 잘못된 수단 때문에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는다면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한 정치컨설턴트는 "손 대표는 최대한 단문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때론 며칠 정도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방식도 검토해 봐야 한다"고 충고했다.

정치인 한마디에 국민 울고 웃는다 = 막말과 망언, 폭언도 정치권의 단골메뉴다. "너 맞아볼래?"(홍준표) "병 걸리셨어요?"(박근혜) "춘향전은 변사또가 춘향이 따먹는 얘기"(김문수) "죽여버려야하지 않겠냐"(천정배)…, 정치권에 파장을 부른 말들이다. 국감 때 마다 반말로 이름을 떨친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 자연산 발언의 안상수 전 한나라당 대표도 만만찮다. 저격수 출신으로 불리는 홍준표 대표와 박지원 전 민주당 대표도 말에 관한한 정치권의 이슈 메이커다. 하지만 최근에는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단연 두각(?)을 나타낸다. 춘향전 발언으로 '따먹'이라는 별칭을 얻는 김 지사는 최근에도 퍼레이드를 이어갔다. 김 지사는 최근 한 강연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스스로 바위에 떨어져 돌아가셨다. 이명박 대통령도 굉장히 징조가 좋지 않다"고 발언해 논란을 자초했다. 일부에서는 이를 두고 '노이즈 마케팅'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기술보다 중요한 건 진실과 겸손 = 요즘은 짧지만 적절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충고다. 적절한 유머까지 결합되면 금상첨화다. 원-라이너(One-liner), 사운드-바이트(Sound Bite) 등의 짧고 정곡을 찌르는 표현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SNS가 대세인 것도 비슷한 이유다.

말 잘하는 정치인의 대표적 인물로 김대중 전대통령을 꼽는 경우가 많다. 끊임없이 주변사람들에게 자신의 말을 검증받고 수정을 반복하면서 최적의 표현을 찾아내 국민들에게 전달하는 노력과 방식이 높이 살만하다는 것이다. 김 전대통령은 대중연설에도 뛰어났다.

외국에서는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의 처칠 수상도 위트있고 정곡을 찌르는 숱한 명언으로 유명하다. 민주정책연구원의 이철희 부위원장은 "정치인의 말은 메시지를 담아내는 수단이다. 어떤 표현을 쓰느냐가 중요한 것은 결국 대중(국민들)과 제대로 소통하기 위해서일 때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진짜 중요한 것은 말의 기술이 아니라 태도라는 충고도 이어졌다.

촌철살인의 달인으로 알려진 민주당 이낙연 의원은 "정치인의 말은 본인이 생각한 것 이상의 사회적 파장을 갖게 된다"면서 "국민에게 말할 때는 어느 경우에나 겸손하고 진실해야 하고 그래야 국민이 그 말을 듣는다"라고 말했다. 자화자찬, 무책임한 막말이 아니라, 삶의 무게에 상처받고 지친 서민들을 위로해 주는 따뜻한 감성의 말이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

[뉴스 분석] "대통령이 되려면 추풍령을 넘어라"
인기·바람 확산 막히면 대권꿈은 물거품으로
실업계고·바닷가 출신 권좌 많이 오른것도 특징… 수도권 출신 아직 전무
"대통령이 되려면 추풍령을 넘어라."

대통령학의 귄위자인 함성득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의 '추풍령론'이다. 서울, 경기지역 출신 대통령 후보나 호남, 영남 출신의 대통령 후보 모두 그들의 인기가 추풍령을 넘지 못하면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간명한 이론이다. 추풍령은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과 경북 김천시 봉산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다. 남쪽에서 바람이 불건 수도권에서 바람이 불건, 추풍령을 넘지 못하면 힘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1년 앞으로 다가온 18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 추풍령론이 힘을 받을까.


역대 한국 대통령은 총 10명. 우선 가장 큰 특징은 이들 중 서울은 물론 경기 등 수도권 출신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초대 이승만 전 대통령은 황해도 평산, 4대 윤보선 충남 아산, 5~9대 박정희 경북 구미, 10대 최규하 강원 원주, 11~12대 전두환 경남 합천, 13대 노태우 대구, 14대 김영삼 경남 거제, 15대 김대중 전남 신안, 16대 노무현 경남 김해다. 17대 이명박 대통령은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지만 실질적으로 자란 곳은 경북 포항이다. 영남지역이 10명중 6명이다.

이들의 출신 고등학교를 분석해도 흥미롭다. 실업계고 출신이 가장 많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대구공고를 나왔고, 노태우 전 대통령은 대구공고를 다니다 경북고에 편입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목포상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부산상고, 이명박 대통령은 동지상고를 나왔다. 10명 중 절반인 5명이 실업고를 다녔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배재학당, 윤보선 전 대통령은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다 중퇴했다.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 최규하는 경기고의 전신인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 김영삼은 경남고를 졸업했다.

초기 4명의 대통령이 다 해외유학파라는 것도 흥미롭다. 이승만은 미국 조지워싱턴대와 프린스턴대 등을 거쳤고 윤보선은 영국의 에든버러대, 박정희는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유학했고, 최규하는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한국에서 일반 대학을 졸업한 대통령은 두 명밖에 없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울대 철학과를 나왔고 이명박 대통령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단일 학교로는 육군사관학교 출신이 가장 많다.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학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한국 역대 대통령의 표준은 '영남 출신으로 실업계고를 졸업하고 국내 대학을 나오지 않은 인물'이다. 특히 1980년대 이후에는 바닷가 출신이 김대중, 김영삼,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 등으로 다수다.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과 대선에서 두 차례 맞붙었던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대표는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 출신이라는 최고 학벌로도'상고 출신 비대졸자'들에게 쓴맛을 봤다.

함성득 교수는 "바닷가 출신 실업계고 졸업생 중에 대통령이 많이 나온 것은 그들이 척박한 삶을 살아오면서 무에서 유를 창조했기 때문"이라며 "땅을 밟으면서 호연지기가 길러졌고 가난하게 살면서 권력의지를 불태울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됐다"고 분석했다. 이른바 '동기이론(motivation theory)'이다.

함 교수는 "우리나라의 경우 프랑스 등 유럽과는 달리 한 세대 만에 하층에서 상층으로 뛸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어 있다"며 "지역정서나 경제상황 등이 매우 동적이라 선거에서 감동을 줄 수 있는 드라마틱한 과정이 중요시된다"고 덧붙였다.

그는 특히 대선의 변수로 경남과 부산지역에 주목했다. 부산지역은 호남사람들이 주민의 15%에 이르고 제주도 사람들도 꽤 많다. 거기에 한국전쟁 당시 부산을 거쳐간 사람들이 많고 인구가 다른 지역에 비해 많기 때문에 경남ㆍ부산에서 뜨면 다른 지역까지 아우를 수 있어 당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강력한 대통령 후보로 떠오르고 있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어떨까. 함 교수는 "지금의 여론조사는 인지도 조사가 많고, 박 전 대표의 인지도가 높다는 것이 유리하게 작용한다"면서"실제 선거에서 그대로 반영이 될지는 의문"이라고 밝혔다.

[서민의 과학과 사회]변호사의 노고… 도가니 변호사 “명문가 자제분에, 저질 누명
서민|단국대 의대 교수
 

“서울대 법대에 수석 입학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해 변호사가 된다. 하지만 그의 고객은 물난리로 집을 잃은 수재민, 연탄공장 옆에 살다 진폐증에 걸린 시민, 교통사고로 직장을 잃게 된 전화교환원, 성고문을 당한 여대생….” 1990년 43세의 나이로 타계하신 조영래 변호사의 삶을 요약한 글이다. 돈 없고 ‘빽’ 없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정의를 실현하는 변호사들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아름답다. 돌아가신 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고인이 칭송받는 이유다.

하지만 세상일이 다 그렇듯이 가진 자의 편에 서서 진실을 흐리는 데 온 힘을 기울이는 변호사도 있기 마련인데, 그게 결코 쉬운 게 아니다. 올해 5월, 남학생 셋이서 같은 학교 여학생을 성추행하고 동영상까지 촬영한 엽기적인 범죄가 일어났다. 그네들이 인간의 몸을 담당하는 의대생이라 충격이 더 컸는데, 끝까지 범행을 부인한 배모 학생은 유명 로펌을 포함, 무려 7명의 변호인단을 구성해 화제가 됐다. 변호사 수가 많을수록 유리하다고 믿은 학생도 문제지만, 돈을 받고 이런 파렴치한 사건에 동원된 변호사들도 딱하긴 마찬가지다. “배 피고인은 한번 잠들면 잘 깨지 않는다”는 구차한 변명을 하려고 그 어려운 사법시험 공부를 한 건 아닐 텐데 말이다. 결국 세 명 모두 실형을 선고받았으니, 그 좋은 머리들이 노력한 보람은 다른 데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올해 초엔 만삭의 여인이 목욕탕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여러 가지 정황상 의사였던 남편이 죽인 게 아닌가 의심됐다. 피살자의 목이 졸린 흔적이 있었고, 남편의 팔에는 격투를 시사하는 상처가 여러 개 있었다. 남편은 사고사라고 주장했지만,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서울대 법의학 교수는 “타살이 확실하다”며 맞섰다. 수사 결과 남편의 말들이 대부분 거짓으로 드러나고, 남편이 외국에서 불러온 법의학자마저 타살 가능성을 인정했지만, 남편 측 변호사는 앵무새처럼 “사고사”를 외쳤다. 하지만 자신이 믿는 바와 반대되는 말을 할 때 괴로움을 느끼는 건 인지상정, 아내 빈소에서 판타지 소설을 읽고 있는 남편을 바라보면서 변호사는 “내가 이 짓을 계속해야 하나”라며 회의에 빠졌을 거다. 남편이 결국 20년형을 받았을 때 변호사는 차라리 후련해하지 않았을까?

“어린아이와 성인 남성의 성관계가 가능합니까? 여성의 자발적 동의 없이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장애인들을 위해 봉사한 이 명문가의 자제분들에게 이런 누명, 누명치고는 너무 저질적인 누명이 씌워질 수 있는지….”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도가니>에서 무진고 출신의 변호사는 어린 장애아들에게 끔찍한 성폭행을 저지른 인화학교 교장과 행정실장을 변호한다. “훌륭한 교육가문의 교육자들을 음해하는 세력을 밝혀내지 못한다면 우리나라는 너무 부끄러운 나라일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그 변호사는 정말 그들이 죄가 없다고 믿었을까? 아이들의 진술에 일관성이 있고 증인도 있었으니 그렇진 않았을 거다. 어쩌면 그는 장애아들을 두 번 죽인다는 생각에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했을지 모른다.

못가진 자의 편에 서는 건 자신의 양심한테 떳떳하고 사람들의 칭송도 받을 수 있으며, 훗날 대통령을 비롯한 공직에 출마할 자산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가진 자들의 편에 서서 정의 구현을 방해하는 일은 돈은 많이 받을지언정 양심에 반하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우리나라 법체계상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한다는 것. 다행히도 많은 분이 이런 일을 전문적으로 하고 계신데, 이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인화학교 교장은 자유의 몸이 됐고, 삼성가는 3대째 세습을 완성했으며, 한상률 전 국세청장은 무죄방면됐다. 변호사들의 노고를 잊지 말자.

아저씨가 좋아
일본, 10살차 커플 10년새 두배
“불안한 여성들, 안정남 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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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밤, 도쿄 긴자에서는 결혼정보회사 아이비제이(IBJ) 주최로 색다른 맞선 행사가 열렸다. 남녀 5쌍이 참가한 이날 맞선에서 여성들은 나이가 22~28살인데 견줘, 남성들은 10살가량이나 많은 35~48살이었다. 나이 많은 남성을 원하는 여성들의 요청에 따라 결혼정보회사가 일부러 짝을 이렇게 구성한 것이다.

나이 차이가 많은 짝의 결혼이 일본에서 최근 크게 늘고 있다. 결혼정보서비스회사 오네트가 올해 상반기에 결혼을 성사시킨 짝 가운데 나이 차가 10살을 넘은 경우가 5%에 이르렀다고 <아사히신문>은 12일 전했다. 2000년과 비교하면 그 비율이 갑절로 늘었다고 한다. 연예계에선 나이 차가 이보다 훨씬 더 큰 짝의 결혼이 잇따라 화제가 되고 있다. 65살인 탤런트 사카이 마사아키는 지난 8월 22살 연하의 여성과 결혼했다. 코미디언 가토 차(68)도 같은 달 45살이나 적은 23살의 여성과 결혼했다. 앞서 2009년엔 배우 고바야시 가오루(당시 59살)가 21살 적은 여배우와 재혼한 바 있다.

<나이 차 결혼, 왜 동년배에게 끌리지 않는 걸까?>의 공동저자인 우시쿠보 메구미는 “이런 결혼 붐의 배경에는 여성들의 ‘불안’이 자리잡고 있다”고 분석한다. 취직하기도 어렵고 노동환경도 나쁜 젊은 여성들은 무언가 돌파구를 원하지만, 동년배 남자들은 이성과 연애 욕구가 시들한 ‘초식남’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지식과 사회경험도 많은 나이 든 배우자를 대안으로 선택한다는 설명이다.

여자 쪽이 나이가 많은 짝도 물론 많다. 여배우 고유키(34)는 지난 4월, 8살 연하의 배우 마쓰야마 겐이치와 결혼했다. 여자 탤런트 호시노아키(34)는 오는 12월, 13살 적은 경마 기수와 결혼할 예정이다. 이 또한 젊은 남성이 먼저 안정을 찾은 여성과 결혼한다는 점에서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일본 후생노동성 통계로 보면 여자가 연상인 결혼 커플은 1970년엔 10.3%였으나, 2010년에는 23.6%로 늘었다. 도쿄/정남구 특파원 jeje@hani.co.kr

[건축이 도시문화를 바꾼다] 현대건축에 되살아나는 '한옥의 멋'
다양한 기능 담은 설계기법 선봬
한옥호텔 '라궁'·남산국악당 등
새로운 공공건축 양식 가능성 제시
  • 2009년 일반주거 부문 본상을 받은 '집운헌'.
  • '우리 시대의 한옥이란 어떠해야 하는가.'

    최근 전통 주거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한옥에 대한 재평가가 잇따르고 있다. 이에 따라 현대 주거와 접목한 한옥 건축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지난 2009년 건축문화대상 일반주거 부문 본상을 받은 '집운헌'은 서울 북촌 한옥마을에 지어진 '현대 한옥'의 전형이다. 철근콘크리트구조 지하부에 전통 목구조를 구현한 지상부가 올려져 있는 구조다. 지하는 주차장ㆍ서재ㆍ수납공간이 있다. 지상은 침실ㆍ거실ㆍ주방 등 생활공간으로 구성됐다. 전통 창호와 현대적 시스템창호를 동시에 사용하는 등 단열ㆍ방음 등 기본적인 현대 주택의 기능을 수행하며 전통 한옥의 멋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 특징이다.

    한옥은 주택뿐 아니라 호텔ㆍ전시장 등으로 외연을 확대하고 있다. 다양한 규모ㆍ주제ㆍ기능을 담아내는 '새로운 한옥설계'로 이어지고 있는 것. 2008년 건축문화대상 우수상을 받은 전통한옥호텔 '라궁'은 전통적인 조형을 현대적으로 해석해 적용한 '새로운 전통적 격식의 공간'이다. 숙박동은 궁이나 절의 회랑과 도시한옥 유형을 결합해 구성됐다. 객실 내부에는 누마루를 둬 조경과 수경 공간을 조망하는 것을 쉽게 했다. 입구 관리동은 2층 규모 요사체와 높은 회랑을 결합해 건축했다.

    서울 중구 필동 '서울남산국악당'은 훌륭한 한옥건축의 모범사례로 평가 받으며 2009년 사회공공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매표ㆍ관리실, 공연장 입구동, 국악체험실 등이 마당을 둘러싼 'ㅁ'자 구조다. 공연장은 창호지를 받은 전통 창살무늬 창호를 사용해 '한국의 멋'을 담았지만 조명이나 음향조절의 효과도 우수하다. 인근 한옥마을, 놀이마당, 남산 지세와 조화를 이루면서 한옥이 공공건축으로도 훌륭한 양식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건축이 도시문화를 바꾼다] <6> 단독주택
    자연환경과 조화 이루면서 가족애 담은 도심속 예술품
    삼각형 부지에 지은 '반포577'… 국도변에 입지한 '루트하우스'…
    주택을 예술로 승화시켜 찬사
    마당 접근성 돋보인 '연하당' 가족의 소중함·배려심 깨닫게·
    황정수기자 pao@sed.co.kr


    건축물의 역사는 개인 주택에서 시작한다. 인간이 나무ㆍ돌 등 자연의 일부분을 이용해 자연 속에서 개인의 안락한 공간을 마련하고자 하는 욕구가 건축을 있게 한 근원이다. 현대 단독주택 건축에도 이 같은 가치가 반영되고 있다. 주변 자연환경과의 조화를 이루면서 개인의 의식주 해결에 대한 건축주의 고차원 적인 요구를 충족하는 현대 단독주택은 지난 20년간 한국건축문화대상 수상작 명단에 숱하게 이름을 올렸다. 특히 건축미가 한껏 발휘된 단독주택들은 개인 공간에 머물지 않고 지나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안겨주는 도심 속 소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단독주택, 건축주와 건축가의 조화가 빚어낸 예술=단독주택은 의식주의 기본적인 행위가 일어나는 가족의 삶이 깃들어 있는 공간이다. 건축주는 단독주택이라는 개인의 공간에 삶의 가치를 투영하고자 건축가에게 개성 있는 건축에 대한 요구를 하게 된다 한다. 건축가는 건축주의 욕구를 받아들이고 주변 자연환경과 잘 조화되는 하나의 예술품으로 단독주택을 승화시키기 위해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다. 한 건축가는 단독주택 건축에 대해 "참으로 어렵지만 즐거운 작업"이라고 표현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2009년 건축문화대상에서 일반주거 부문 대상을 수상한 서울 서초 반포동 '반포577'은 건축주의 요구, 주변 환경, 건축가의 예술성이 조화를 이룬 수작이다. 157㎡ 삼각형 부지 형태, 3면을 4층 이상의 다세대ㆍ다가구 주택이 둘러싸고 있는 주변 환경에 따른 프라이버시 확보 등 어려운 문제를 이겨내고 주택을 예술로 승화시켜 전문가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맞은편 주택들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면서 2차원에 머물던 거주자의 시선을 위로 향하게 하는 독특한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2008년 건축문화대상 일반주거 부문 본상을 수상한 '루트하우스'도 국도변이라는 특이한 입지, 건축주의 '비벌리힐스와 강원도 유년시절의 추억'이라는 이색적인 요구를 조화시켜 단독주택을 '작품'으로 격상시킨 사례다. 건축가는 루트하우스의 '언덕'을 마당ㆍ옥상ㆍ발코니의 기능까지 담당하도록 활용했다. 지붕과 언덕을 푸른 잔디로 해 자연과의 조화도 이뤘다. 전통적인 모습과 더불어 1층위에 2층이 없고 바로 3층으로 연결되는 현대적인 구조를 만들어 '이질적인 요소의 결합'을 잘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소박하게 지내는 부부의 삶과 학습하는 공간이 중심이 되는 집'이라는 뜻을 가진 2010년 건축문화대상 우수상 수상작 '박학재'는 교수 부부인 건축주의 개성과 특징이 잘 반영된 단독주택이다. 미술관 같은 느낌을 준다. 이와 함께 '수입777(2005년 우수상)' '오름: 묵방리 주택(2006년 대상)'도 자연의 흐름과 건축주의 개성을 담은 단독주택 건축으로 평가된다.

    ◇'가족'의 중요성을 간직한 단독주택=한국건축문화대상이 발견한 단독주택에서는 세대 간 분리라는 현대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도 엿보인다. 2004년 본상을 받은 '연하당'은 서울 성북동의 3층짜리 단독주택이다. 공동 생활공간인 중앙 부문 마당은 실내 어느 곳에서도 접근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마당을 둘러 싼 유리창을 통해 반대편에 공간에 생활하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을 인식할 수 있도록 했다. 거실 입구를 부모실의 출입구인 계단 앞에 배치해 부모와 자녀와의 만남이 자주 이뤄질 수 있도록 설계한 것도 '가족'에 대한 배려다. 2007년 건축문화대상 본상 수상작인 '양익재'는 마을 토박이로 2남3녀를 키워낸 노부부를 위해 자녀들이 지어준 '가족 공간'이라는 남다른 의미를 갖는 작품이다. 주변 이웃에 위화감을 주지 않도록 소박하게 지어달라는 건축주의 요구에 따라 노부부와 자녀의 생활패턴에 맞춰 '미적 가치는 갖췄지만 겸손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유곽·공창 도입한 이토 … ‘색계’로 한국을 타락시키다

    [중앙선데이]입력 2011.10.09 02:14 / 수정 2011.10.09 23:37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일제는 우리 밤 문화도 크게 바꿔놓았다. 일제 침략사를 연구했던 임종국 선생이 밤의 일제 침략사에서 ‘일제는 한 손에 대포와 한 손에 기생을 거느리고 조선에 건너왔다’고 말한 것처럼 일본은 조선의 밤 문화를 창기(娼妓)문화로 타락시켰다. 우리 사회가 술과 여자에 빠질수록 독립운동에 나서지 않을 것이란 계산도 한몫했다.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들은 고리대금업과 매춘업을 많이 했다. 일본식 유곽 문화가 퍼지면서 기예 중심이던 조선의 밤 문화는 매춘 중심의 하급 문화로 전락했다. [백범영-백귀야행(百鬼夜行), 43×99㎝, 화선지에 수묵담채, 2011]


    식민통치 구조
    ⑤ 공창(公娼)


    대한제국은 1895년 갑오개혁 때 관기(官妓) 제도를 혁파했다. 이로써 관기는 국가의 예속에서 해방되어 자유 신분이 되었다. 그러나 한 해 전인 1894년의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진주하면서 관기 혁파는 무의미해졌다.

    1894년 6월 해군 중장 이도(伊東祐亭)가 선발대를 이끌고 서울에 온 것을 필두로 일본군이 속속 진주하자 일본 거류민회는 묵정동에 대지 70평을 구입해 유곽(遊廓)을 만들었다. 군대 진주와 더불어 유곽을 만드는 일본군의 이런 전통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뿌리인 셈이다. 러일전쟁으로 일본군이 대거 증파되면서 이 유곽은 8300여 평으로 크게 확대된다. 이 유곽지대가 일종의 공창(公娼)지대였다. 공창이 확산되는 데 큰 공헌을 한 두 인물이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일진회의 송병준(宋秉畯)이었다.

    천도교에서 발행하던 종합월간지 개벽(開闢) 48호(1924년 6월호)는 경성의 화류계란 흥미로운 기사를 싣고 있다. 필자인 일기자(一記者)는 송병준을 색작(色爵), 이토를 색귀(色鬼)라고 표현하고 있다. 송병준이 망국 후 자작(子爵) 작위를 받았다가 1920년에 백작(伯爵)으로 승진한 것을 그의 엽색(獵色) 행각에 빗대 색작이라고 비꼰 것이다. 송병준은 1900년 10월 일본인 첩 가쓰오(勝女)를 시켜서 요릿집 청화정(淸華亭)을 열었다가 1906년에 개진정(開進亭)으로 확대했다. 충무로 2가의 개진정은 양식까지 제공하던 요릿집으로서 친일파들의 단골 회식장소였다.

    이토는 1906년 3월 초대 조선통감으로 부임할 때 육군 소장 무라다(村田淳)와 해군 소장 미야오카(宮岡直記), 통감부 외무총장 나베시마(鍋島桂次郞) 같은 공식 수행원뿐만 아니라 4명의 화류계 여성들도 데리고 왔다. 도쿄 니혼바시(日本橋) 출신의 오카네(お柳), 표면상으론 이토의 전용 간호사지만 실제로는 정부였던 오류우, 비파(琵琶)의 명인 요시다 다케코(吉田竹子), 도쿄 신바시(新橋) 출신의 게이샤 사다코(條子)였다. 이토는 사다코를 4500원의 1년 출장 화대를 주고 데려왔는데, 당시 쌀 한 가마 값은 5원 정도였다. 그래서 주한 일본인들도 이토를 ‘풍류 통감’이라고 불렀다.

    이토가 통감으로 부임하자 시모노세키 시절 이토의 이웃이었던 닛다(新田又兵衛)가 한국으로 건너와 남산동에 천진루(天眞樓)를 열었다. 천진루 연회에서 닛다는 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 대장과 무라다(村田淳) 소장 사이에 앉아 ‘닛다(新田) 중장’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이토는 “취해서 미인의 무릎을 베고 눕고, 깨어서 천하의 권력을 잡는다(醉臥美人膝,醒掌天下權)”는 한시(漢詩)를 지을 정도로 여자·술과 정치를 동일시했던 인물이었다.

    임종국 선생이 밤의 일제 침략사에서 ‘일제는 한 손에 대포와 한 손에 기생을 거느리고 조선에 건너왔다’고 말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일제 식민통치에 비판적인 역사학자 야마베 겐타로(山邊健太郞)는 일본 통치하의 조선(日本 統治下の朝鮮:1971, 번역서는 일본의 식민지 조선통치 해부)에서 “병합은 그 경과로 보더라도 일본군의 강대한 무력을 배경으로 한국 상층의 일부를 매수해서 이루어진 것이 명백하다”라고 쓰고 있는데, ‘한국 상층 일부’를 매수하는 방법이 술과 여자였던 것이다. 이토는 대한제국의 고위 관료들을 초청해 연회할 때 게이샤 한 명을 각각 앉혀 대접하게 했다. 일제가 경의선 부설권을 얻기 위해 내부대신 이재완(李載完:망국 후 자작 수여)에게 거금 5만원을 준 것도 이런 술자리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일본이 사실상 공창(公娼)을 허용하면서 조선의 기생들은 일패(一牌), 이패(二牌), 삼패(三牌)로 나뉘게 된다. 그 유래는 분명치 않지만 갑오개혁 때 관기 제도가 폐지되자 관에서 풀린 기생들이 자신들을 몸 파는 기생들과 구분하기 위해 나눈 것으로 짐작된다. 일패는 과거의 관기들로서 몸은 절대 팔지 않고 가무를 선보였던 예인(藝人)들이다. 이들 중에 생활고에 시달려 은밀하게 매춘도 하는 기생들이 이패였다. 이패를 ‘숨어 있는 군자’라는 뜻의 은군자(隱君子), 또는 ‘은근짜(慇懃-)’라고 불렀는데 그만큼 몸을 파는 것을 부끄러워했다는 뜻이다. 삼패는 돈만 있으면 아무나 안을 수 있는 창부(娼婦)로서 세칭 가무 못하는 ‘벙어리 기생’이었다.

    일본에서 건너온 기생은 대부분 3패에 속하는 저질들이었다. 이런 일본의 저질 밤 문화가 퍼지자 1908년 관기(官妓) 출신들이 한성(漢城) 기생조합을 만들었다. 한성 기생조합은 유부녀 기생들의 모임으로서 기예는 팔아도 몸은 팔지 않는 예인들의 조합이었다. 그러자 송병준이 평양 출신의 남편 없는 기생들을 주축으로 만드는 것이 다동(茶洞) 기생조합이었다. 기생조합의 명칭이 권번(券番)으로 바뀌면서 다동 기생조합은 대정권번(大正券番)이 된다.

    1929년도 조선은행 회사조합요록(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에는 1923년 창립한 경성권번이 자본금 2200원의 합자회사로 버젓이 등재되어 있는데 사업 목적은 ‘예기(藝妓)의 양성, 유흥업’으로 적고 있다. 일제가 공창제도를 버젓이 운영했다는 뜻인데, 경성권번의 대표 홍병은(洪炳殷)은 송병준의 대정권번에서 사무를 보던 인물이었다. 영·호남 출신 기생들이 주축인 한남(漢南)권번이 있었고 경화(京和)권번도 있었다. 경화권번은 조선권번으로 명칭이 바뀌는데 그 대표 하규일(河奎一)도 송병준의 대정권번에서 감독으로 있던 인물이었다. 송병준을 색작(色爵)이라고 부른 것은 이런 까닭이 있었다.

    하규일이 송병준의 심복 안순환(安淳煥)과 충돌한 후 독립해서 차린 권번이 경화권번인데, 안순환의 이력도 특이하다. 경시통감(警視總監) 와카바야시(若林賚藏)가 2대 통감 소네(曾<79B0>荒助)에게 보낸 비밀보고서에 따르면 안순환은 궁중의 음식을 담당하는 전선사(典膳司) 상선(尙膳)으로 있으면서 이용구·송병준의 일진회에 가입한 자였다. 이런 안순환이 궁중에서 나와 1908년 12월 지금의 광화문 일민미술관 자리에 차린 요릿집이 한세월을 풍미하던 명월관(明月館)이었다.

    일제 진출 이후 서울의 밤 문화는 이토 같은 색귀 통감과 송병준 같은 친일 색작 등이 주도하면서 과거의 기예(技藝) 중심의 품격은 사라지고 삼패 중심의 천박한 매춘으로 전락했다. 일패 기생들 중에는 애국자도 적지 않았다.

    매천야록 1906년조는 미모에다 서예도 잘했던 진주(晋州) 기생 산홍(山紅)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 이지용(李址鎔:망국 후 백작 수여)이 첩으로 삼으려고 하자 산홍은 “세상 사람들이 대감을 5적의 우두머리라고 하는데, 비록 천한 기생일지라도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라고 꾸짖어 구타당했다는 것이다. 이지용은 1904년 러일전쟁 때 외무대신 임시서리로 대한제국의 영토를 일본군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허용하는 한일의정서를 체결해준 대가로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에게 1만원을 받았는데, 이때 산홍에게 주려고 한 돈이 1만원이었다는 뒷얘기도 있다.

    주요한(朱耀翰)이 발행하던 동광(東光) 28호(1931년 12월호)에는 한청산(韓靑山)이 쓴 기생철폐론이 실려 있다. “옛날은 관기(官妓)라고 해서 군수 사또가 아니면 데리고 놀지 못하던 기생이 하루아침에 양반정치가 무너지고 섬 건너 양반정치가 된 뒤로 아주 철저히 민중화가 되어 이제는 개쌍놈의 아들이라도 황금만 가졌으면 일류 명기(名妓)를 하룻밤에 다 데리고 놀 수 있게 되었다”고 비난하고 있다. 양반·쌍놈 등의 인식에는 문제가 있지만 예기 중심의 고급문화가 매춘 위주로 천박해졌다는 문제의식은 맞는 말이었다.

    앞에 인용한 경성의 화류계는 “많은 권번을 일본인 또는 준(準)일본인이 경영한다. 그의 세력이 화류계에서까지 위대한 것은 참 주목할 일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일본인들이 조선에 진출해 전개한 사업은 고리대금업과 매춘업이 주류였다. 임종국 선생은 1930년 무렵 한국인은 4만3700여 명에 한 명꼴로 기생이 있었지만, 일본인은 1400여 명에 한 명꼴로 서른 배 이상 많았다고 분석하고 있다. 기생철폐론은 “기생이 없어져도 내외 술집이 있고 카페가 있고 은군자(隱君子)가 있고 유곽(遊廊)이 있고 무엇이야 없으랴. 그러하나 공공연하게 사회가 허락하는 소위 요리관 교제만 없애도 우리 사회의 능률이 얼마나 증진되랴”면서 기생 철폐론을 주장했다.

    술자리에 여자를 동석시키는 현재의 잘못된 밤 문화도 알고 보면 그 뿌리는 일제시대에 있다. 1919년 기생들이 3·1운동에 대거 동참한 것은 밤 문화까지 잠식한 일제에 대한 항거이기도 했다.

    [태평로] '스타'가 아니라 '영웅'을 꿈꾸게 하라

    조정훈 스포츠부장
    전화기 너머 김성집 대한체육회 고문의 목소리는 쩌렁쩌렁했다. 92세 노인이 맞나 싶었다. 김 고문은 대한체육회와 한국체육학회가 올해 처음으로 제정한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에 고(故) 손기정 선생과 함께 선정됐다. 하지만 김 고문은 지난달 22일 열린 헌액(獻額)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스포츠 관련 행사라면 빠지지 않았던 김 고문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아들만 대신 보낸 이유가 궁금했다. 김 고문은 "역도 하다가 허리를 많이 다친 탓인지 얼마 전부터 허리가 아파서 잘 걷지 못한다"며 "그 꼴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한 것도 없는 늙은이한테 '스포츠 영웅'이라고 하는 건 과분한 대접"이라고 했다.

    본인은 손사래를 치지만 김성집 고문은 대한민국 스포츠의 살아있는 역사(歷史)다. 1948년 런던올림픽 역도에서 동메달을 따내며 올림픽 무대 시상식에 처음으로 태극기를 선보인 인물이다. 스물아홉살 영웅(英雄)은 그때도 "최선을 다하였으나 여러분의 기대에 어그러져 죄송하다"며 머리를 숙였다. 서울 종로2가에서 서울역까지 가두행진을 할 때 길가에 늘어서서 "이기고 돌아오라"던 국민들의 뜨거운 성원을 기억했던 까닭이었다. 항일(抗日)수단으로 역도를 보급하던 스승 서상천의 영향으로 역도에 입문한 김 고문은 당초 1936년 베를린올림픽을 노리고 있었다. 선발전에서 우승했지만 조선 출신 선수를 가급적 배제하려 했던 일본체육회의 방해로 최종 명단에서 빠졌고, 12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올림픽 2연속 동메달과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낸 그는 은퇴 후 체육 행정가로 변신했다. 대한체육회 사무총장 시절엔 고(故) 민관식 대한체육회장과 함께 태릉선수촌 건립을 주도했다. 1976년부터 18년간 태릉선수촌장(長)을 맡으며 한국스포츠의 부흥을 이끌었다. 흐트러짐 없고 수도자처럼 절제된 생활을 했던 까닭에 생긴 별명이 '걸어다니는 시계(時計)' '태릉의 기인(奇人)'이었다. 훈련을 빼먹거나 요령을 부리면 여지없이 불호령을 내렸던 그를 국가대표 선수나 코치들은 '호랑이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대쪽같은 성격의 김 고문은 많은 일화(逸話)를 남겼다. 1990년대 말 고려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주겠다고 했지만 "그냥 운동선수로 남아야 김성집"이라며 끝내 고사했다. 외국출장을 다녀올 때도 그 흔한 쇼핑을 하지 않았다. 출입국 검사 때 빈 가방으로 제일 먼저 통과하는 인물이 그였다.

    우리는 '스타의 홍수(洪水)' 시대에 살고 있다. 정치판이나 연예계에는 입만 벙긋해도 화제가 되는 스타들이 즐비하다. 스포츠 분야에도 스타들은 차고 넘친다. 하지만 돈을 많이 벌고 많은 팬을 거느린 스타라고 해서 모두가 영웅이 되는 게 아니다. 젊은 세대의 롤(role) 모델이 될 만하고, 사회통합과 국위(國威)선양에 기여한 인물이라야 진정한 스포츠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를 되짚어 보면 우리 국민들이 좌절하고 실의에 빠졌을 때마다 용기와 꿈을 심어준 스포츠 영웅들이 적지 않았다. 이제라도 우리 사회가 스포츠 영웅을 인정하고 대접하기로 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 선정 사업이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지 않도록 좀 더 내실(內實)을 기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흘린 땀과 눈물을 오롯이 되살려 다음 세대가 본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스타보다는 영웅을 꿈꾸는 청소년들이 많은 나라, 그게 바로 선진국이다.

    "잡스, iSad"

    전세계 애도 속에 그는 갔지만
    그의 메시지는 사람들 가슴에

    6일 아침, 독자들은 좀 이상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죽었다. 난 그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지인의 부음을 듣는 것 같다.'

    2004년부터 췌장암을 앓아온 스티브 잡스가 56세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6일 오전. 젊은이들은 스마트폰을 집어들고 문자메시지로, 트위터로, 인터넷 댓글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같은 시각 미국·유럽·남미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문장은 짧았다. '아이 새드(iSad·슬퍼)'. 당연히 그의 히트작 아이패드(iPad)에서 온 말이다.

    하버드대를 다닌 천재이자 기부·선행의 대명사인 빌 게이츠가 '모범답안' 천재라면, 미혼모에게서 태어나 망나니짓을 하고 대학을 중퇴한 스티브 잡스의 시작은 삼류였다. 자기 회사에서 쫓겨나기도 했고, 대드는 직원은 가차없이 잘랐다.

    그런데도 세계는 이 괴팍한 창조자에게 열광했다.

    스티브 잡스는 소문자 'i'면 충분하다는 걸 증명했다. 애플의 아이맥(iMac), 아이폰(iPhone), 아이팟(iPod), 아이패드(iPad)엔 모두 'i'가 붙는다. 대문자가 아니라 소문자다. 죽은 그가 'iHeaven(천국)'에 있을 것이란 농담도 그래서 나온다.

    "나는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본 적이 없다. 나는 룰을 만드는 사람이다." 당돌한 비주류 선언이었다. 젊은이들은 이렇게 받아들였다. 그래, 나(i) 별거 없는 인간이다. 그런데 나는 나다.

    그가 40대였을 때 이렇게 말했다. "외부 세계는 당신을 특정한 이미지로 규정하고 그걸 더 공고히 만들려 할 것이다. 예술가로 살아가기란 점점 더 힘들 수밖에 없다. 그럴 때 '잘 있어, 나는 벗어나고 싶어'라 말하고 박차고 일어나야 해." 잡스 제품은 오만하고 낯설었다. 아이폰·아이패드는 배터리를 교체할 수 없다. 매끄러운 디자인을 위해서다. 소비자가 싫어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결국 성공했다. 이런 뜻이다. 좀 깨지면 어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런 잡스에게 '대세'란 의미 없고 따분한 것이었다. "나는 세계 최대가 아니라 최고 기업을 만드는 게 꿈이다." 잡스는 애플2로 PC(개인용컴퓨터)시장을, 다시 아이패드·아이폰으로 '포스트PC'시장을 만들었다. 경쟁자와 아등바등하는 대신 쿨(cool)하게 시장을 새로 창조했다. 청바지와 검은색 티셔츠로도 충분히 멋지다는 것, 커다란 회사명 대신 '애플' 마크 하나로도 디자인이 멋질 수 있다는 것, 전화기로 전화만 거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 것도 스티브 잡스였다.

    6일 지구인들이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것은 그가 '다르게 생각하기(Think Different)'라는 새로운 복음을 전파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그걸 잡스 스타일이라 부른다.


    “곧 죽을 거란 사실을 안다는 것은, 인생에서 커다란 선택을 내리는 데 도움을 주는 가장 중요한 도구....

    죽음 앞에서 외부의 기대나 자부심, 좌절과 실패 등은 덧없이 사라지고 정말로 중요한 것만 남는다”

     

    전세계 심금 울린 잡스의 한마디

    잡스의 '유언' 2005년 스탠포드강연 전문
    췌장암 수술 이듬해 죽음 예고하며 삶의 의지 강조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가 사망하면서 그가 자신의 죽음을 거론한 6년전 스탠포드대 강연에 다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잡스가 2005년 6월12일 서부의 명문 스탠포드대 졸업식에서 행한 강연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불꽃 같은 삶의 의지로 승화시켰다는 평가와 함께 전세계인의 심금을 울렸다. 잡스는 그 전해 췌장암 진단에 이어 수술을 받고 사실상 시한부 인생을 시작했었다. 당시 강연에서 잡스는 “누구도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며 “천국에 가길 원하는 사람들도 그곳에 가기 위해 죽기를 원하지는 않는다”며 자신의 운명에 대한 안타까움을 피력했다.

    그러나 그는 “곧 죽을 거란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인생에서 커다란 선택을 내리는 데 도움을 주는 가장 중요한 도구”라며 죽음에 대한 공포를 오히려 삶의 동력으로 삼으려는 의지를 피력했다.

    잡스는 “죽음은 우리 모두의 도착지”이기에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에는 한계가 있다”며 학생들에게 치열한 삶을 주문했다. “남의 인생을 사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 “남들의 의견이 내는 잡음에 당신 내면의 목소리가 휩쓸려 가게 내버려두지 말라”는 그때의 충고는 평생 혁신하는 ‘청춘’으로 살기 원했던 잡스가 세계 젊은이들에게 남긴 ‘유언’이 됐다.

    /온라인뉴스부

    <영어 전문>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six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So why did I drop out?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They said: Of course.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cent deposits to buy food with,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Let me give you one example: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I was lucky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dollars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the Macintosh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 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r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Because almost everything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Dont be trapped by dogma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Stay Hungry. Stay Foolish.

    Thank you all very much.

     

    - 인왕산 鶴학巢소島도에서 최범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