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폴더를 열어보니 여름에 찍어놓은 사진들이 여러 장 나왔다

겨울이 꼬앞인데, 몇 달 전의 여름이 오랜 과거의 시간 같이 느껴진다

남은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면 또 봄이 오고 여름도 오겠지.

그러면 나는 또 다시 이 초록이 친구들을 마주하면 미소짓겠지.

<불두화>

<어린 주목>

<탱자나무>

<무늬 오가피>

<클레마티스>

친구 전용찬 박사와 광화문에서 식사 후

생야일편부운기 사야일편부운멸(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삶도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도 한 조각 뜬구름이 스러짐이다)

부운자체본무실 생사거래역여시(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是·뜬 구름 자체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니, 나고 죽고 오고 감이 역시 그와 같다네)

- 서산대사가 입적 전에 남긴 게송

[걷기예찬]

바디드 르 브르통 산문집 / 김화영 옮김

David Le Breton  “Eloge de la marche”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발로 걸어가는 인간은 모든 감각기관의 모공을 활짝 열어주는 능동적 형식의 명상으로 빠져든다. 그 명상에서 돌아올 때면 가끔 사람이 달라져서 당장의 삶을 지배하는 다급한 일에 매달리기보다는 시간을 그윽하게 즐기는 경향을 보인다. 걷는다는 것을 잠시 동안 혹은 오랫동안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숲이나 길, 혹은 오솔길에 몸을 맡기고 걷는다고 해서 무질서한 세상이 지워주는 늘어만 가는 의무들을 면제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 덕분에 숨을 가다듬고 전신의 감각들을 예리하게 갈고 호기심을 새로이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걷는다는 것은 대개 자신을 한곳에 집중하기 위하여 되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9)

 

걷는 동안 여행자는 자신에 대하여, 자신과 자연과의 관계에 대하여, 혹은 자신과 타인들의 관계에 대하여 질문하게 되고 뜻하지 않은 수많은 질문들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보게 된다. 바쁜 사람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한가로이 걷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여겨질지도 모른다. 시간과 장소의 향유인 보행은 현대성으로부터의 도피요 비웃음이다. 걷기는 미친 듯한 리듬을 타고 돌아가는 우리들의 삶 속에서 질러가는 지름길이요 거리를 유지하기에 알맞은 방식이다. (14, 15)

 

스티븐슨이 생각하기에 ‘전정한 걷기 애호가는 구경거리를 찾아서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기분을 찾아서 여행한다’ (21)

 

루소에게 있어서 걷기는 고독한 것이며 자유의 경험, 관찰과 몽상의 무궁무진한 원천, 뜻하지 않는 만남과 예기치 않은 놀라움이 가득한 길을 행복하게 즐기는 행위다. 젊은 시절의 토리노 여행을 추억하면서 로소는 걷기의 향수와 행복을 말한다. ‘나는 내 일생 동안 그 여행에 바친 칠필 일 간만큼 일체의 걱정과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틈을 가져본 기억이 없다…… 그 추억은 그 여행과 관련된 모든 것, 특히 산들과 도보여행에 대한 가장 생생한 맛을 내게 남겨놓았다. 나는 오직 행복한 날에만 늘 감미로운 기쁨을 만끽하며 걸어서 여행했다. 머지 않아 온갖 책무들, 볼일, 들고 가야 할 짐보따리 때문에 나는 하는 수 없이 점잔을 빼면서 자동차를 타야 했다. 전과 달리 그때부터 내가 여행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가는 기쁨과 도착하는 기쁨뿐이었다.

 

스위스의 소로투른에서 파리로 가면서 청년 루소는 중요한 것이라곤 오직 존재하는 것뿐인 이 완벽한 순간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 이 여행에는 보름이 걸렸는데 나는 이때를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로 꼽을 수 있다. 나는 젊었고 건강했으며 돈도 충분히 있었고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나는 여행을 하는 것이었다. 도보로, 그것도 혼자서 여행하는 것이었다……여러 가지 감미로운 공상들이 나의 동행이 되어주고 있었다. 내 뜨거운 상상력이 내게 이처럼 멋진 공상들을 안겨준 적은 한번도 없었다……나는 한 번도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으며 이렇게 뿌듯하게 존재하고 살아본 적이 없었다.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때 혼자 걸어가면서 했던 생각들과 존재들 속에서만큼 나 자신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23, 24)

 

걷기는 집의 반대다. 걷기는 어떤 거처를 향유하는 것의 반대다. 우연히 내딛는 걸음걸음이 인간을 과객으로, 길 저 너머의 나그네로 변모시키기 때문이다. 그를 걷잡을 수 없는 인간으로, 집도 절도 없는 인간으로, 구두밑창이 닳도록 어느새 저만큼 떠나버린 인간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바로 그가 저녁마다 잠자는 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여기 혹은 저기에 존재한다는 것은 실처럼 뻗어간 길, 고저장단으로 변화하는 곡선의 한 과정에 불과하다. 사실 걷는 사람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 속에다가 거처를 정한다. 저녁에 멈추는 발걸음, 밤의 휴식, 그리고 식사는 매일같이 새롭게 달라지는 거처를 체험적 시간 속에 새겨놓는다. 걷는 사람은 시간을 제 것으로 장악하므로 시간에게 사로잡히지 않는다. 숱한 여러 가지 다른 수단들을 다 버리고 바로 이런 이동수단을 택함으로써 그는 달력의 시간과 맞서서 자신의 양보할 수 없는 권능을, 사회적 리듬에 맞서서 자신의 독립성을 앞세운다. 그리하여 길가에서 등에 진 배낭을 벗어놓고 달콤한 낮잠을 즐기거나 돌연 마음을 흔들어놓는 한 그루 나무나 어떤 풍경을 음미하거나 또는 운 좋게 목격하게 된 어떤 지역의 풍습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선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33)

 

걸어서 여행하는 사람은 누구에게 무엇을 보고해야 할 의무 같은 것은 없는 자유인이다. 그야말로 기회와 가능성의 인간이요, 흘러가는 시간의 예술, 길을 따라가며 수많은 발견을 축적하는 변화무쌍한 상황의 나그네다. (35)

 

스티븐슨은 대번에 보행자에게 왜 고독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이론을 내놓는다. ‘도보로 산책하는 맛을 제대로 즐기려면 혼자여야 한다. 단체로, 심지어 둘이서 하는 산책은 이름뿐인 산책이 되고 만다. 그것은 산책이 아니라 오히려 피크닉에 속하는 것이다. 도보로 하는 산책은 반드시 혼자 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유가 그 내재적 속성이기 때문이고 마음내키는 대로 발걸음을 멈추거나 계속하여 가거나 이쪽으로 가거나 저쪽으로 가거나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걷기 챔피언 옆에서 뛰다시피 따라 걷거나 데이트하는 처녀와 함께 느릿느릿 걷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의 보조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50)

 

빅토르 세갈렌…..’남다르고 각별한 경험을 하는 데는 자기만의 견고한 정체성이 필요불가결한 조건이다. 이러한 규칙에 수반되는 약간 의외의 귀결은 바로 혼자서 여행하는 편이 낫다는 사실이다. 둘이서 여행하게 되면 벌써 동일한 경험을 나누어 가지기 위하여 자신이 어느 한 몫을 포기하게 되며 그리하여 목표에 다가갈 위험이 있는 것이다. 이때 목표란 바로 세상에서 제일 친한 두 친구의 여행에서 얻는 결론, 즉 여행은 혼자서 하라는 교훈 바로 그것이다.’ (50, 51)

 

소로는 처음부터 생각이 뚜렷하다. 그는 이렇게 쓴다. ‘확신하거니와, 내가 만약 산책의 동반자를 찾는다면 나는 자연과 하나가 되어 교감하는 어떤 내밀함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그 결과 나의 산책은 분명 더 진부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사람들과 어울리고자 하는 취미는 자연을 멀리함을 뜻한다. 그렇게 되면 산책함으로써 얻게 되는 저 심오하고 신비한 그 무엇과는 작별인 것이다.’ (51)

 

해즐리트(William Hazlitt)…..’방 안에 있을 때는 다도 남과 어울려 지는 것을 즐긴다. 그러나 일단 밖에 나서면 자연만으로 충분하다. 내가 혼자일 적만큼 덜 외로울 때는 없는 것이다. 나는 걸으면서 동시에 말을 하는 것이 지성의 증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들판에 나가면 들처럼 식물이 되어 지내고 싶다. (51)

 

아름다움은 민주적인 것이어서 만인에게 주어진다. 지극히 아름다운 곳들은 수없이 많다. 심지어 같은 날, 같은 산책에서 경이로운 일이 몇 번씩이나 되풀이하여 나타나서 어떤 배경, 분위기, 풍경, 소리, 얼굴을 남긴다. 보행은 세계의 희열을 향한 자기개방이다. 그것이 내면적인 휴지와 평정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변환경과 몸으로 만나는 일이므로 우리는 여러 장소의 감각적 조건에 끊임없이, 거리낌없이 자신을 맡기게 된다. (115)

 

세상에 대한 지식을 무한히 넓히기 위해서도 길이 필요하다. 아스팔트에는 역사도 없고 이야기도 없다. 심지어 그 위에서 사고가 일어났다 해도 자동차들은 그곳에 아무런 기억의 자취도 남기지 않고 지나가버린다. 자동차는 장소와 역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풍경을 칼처럼 자르고 지나간다. 자동차 운전자는 망각의 인간이다. 풍경이 차의 앞 유리창 너머 멀리서 휙휙 지나갈 뿐이므로 길에 대한 감각적 마취 혹은 최면상태에 빠져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다만 엄청나게 커진 눈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경우 그는 길을 가다가 멈출 여유가 없다. 그는 바쁜 사람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걷는 사람은 전신의 감각을 열어놓고 몸을 맡긴 채 더듬어가는 행로와 살아 있는 관계를 맺는 가운데 매순간 발밑에 밟히는 땅을 느낀다. 그는 자신이 거쳐 가는 길 위의 숱한 사건들을 골고루 기억한다. 물론 길가의 산세가 아름답다고 해서 너무나 열중해서 감상하다 보면 다른 보행자와 충돌할 위험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121, 122)

 

다른 곳으로부터 와서 그저 비껴지나가는 것뿐이라는 사실 때문에 사람들의 굳게 닫혔던 입이 열리고 즉각적인 접촉이 더 쉬워지는 경우도 없지 않다.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어서 기껏해야 몇 시간 뒤면 저마다 멀리 떠나 있으리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만남이 더욱 용이해지는 것이다. (135)

 

글쓰기는 길을 가는 동안 수집한 수많은 사건들의 기억, 숱한 감동들, 그리고 느낀 인상들이다. 그것은 여행자가 시간의 한계로부터 벗어나 그 시간을 공책의 페이지들로 탈바꿈시켜가지고 나중에 향수에 젖으며 그 시간으로 되돌아가보는 방식, 텍스트 여기저기에 점철된 수천 수만 가지의 표적들 덕분으로 그 시간을 추체험하는 한 방식이다. 기억이란 그것대로 한계를 가진 것이기에 우리는 걷는 동안 경험한 것들 중에서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 것들의 전체는 우리들 앞에 보잘것없는 몇 토막이 남았을 뿐인 기록의 합에 비긴다면 어지러울 정도로 그 수가 많은 것이다. 길을 가면서 일기를 쓰게 되면 그때의 우여곡절들을 규칙적으로 기록하고 또 더듬어온 길들을 회상해보거나 과거의 에피소드들을 상기해보기 위한 독서에 바쳤던 노력 덕분에 그 도보여행은 그만큼 더 생생하게 기억 속에 남는다. 물론 세월이 흐르면서 상상이 실제 경험과 뒤섞이고 간결하게 기록한 몇몇 문장들에서는 실제로 표현된 것 이상의 암시가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글 속에는 여행으로부터 축적된 수많은 이미지가 저장되어 있는 것이다. (140, 141)

 

카잔차키스……’나는 노랗게 바랜 여행수첩을 뒤적여본다. 그러니까 어느 것 하나 죽어 없어진 것은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이 내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이제 이렇게 그 모든 것이 깨어나서 반쯤 지워진 해묵은 페이지들로부터 솟아올라 다시 수도원이 되고 수도사가 되고 그림들과 바다가 되다니! 그리하여 나의 친구도 그때의 아름답던 모습 그대로, 꽃다운 청춘의 모습 그대로, 독수리 같은 푸른 눈으로 시가 가득한 가슴으로 빛나는 미소를 지으며 땅속에서 다시 솟아오른다. (142)

 

도시인은 침묵이 지배하는 공간에서는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 그는 침묵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얼른 큰 소리로 말을 하거나 자동차의 라디오나 시디 음악을 켜서 안도감을 주는 소리를 추가하고 누구에게건 휴대전화를 걸어서 자기의 존재를 확인받고자 한다. 소음에 길이 든 사람들에게 고요한 침묵의 세계는 결국 표적이 사라진 불안의 세계가 되고 만다. 갑자기 떠들썩한 소리가 딱 그쳐버리면 기분이 으스스해지기 쉽다. (213)

 

긷기는 사람의 마음을 가난하고 단순하게 하고 불필요한 군더더기들을 털어낸다. 걷기는 세계를 사물들의 충일함 속에서 생각하도록 인도해주고 인간에게 그가 처한 조건의 비참과 동시에 아름다움을 상기시킨다. 오늘날 걷는 사람은 개인적 영성의 순례자이며 그는 걷기를 통해서 경건함과 겸허함, 인내를 배운다. 길을 걷는 것은 장소의 정령에게, 자신의 주위에 펼쳐진 세계의 무한함에 바치는 끝없는 기도의 한 형식이다. (237)

 

길을 걷는 것은 때로는 잊었던 기억을 다시 찾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리저리 걷다보면 자신에 대하여 깊이 생각할 여유가 생기게 되기 때문만이 아니라 걷는 것에 의해서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 트이고 추억들이 해방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걷는 것은 죽음, 향수, 슬픔과 그리 멀지 않다. 한 그루 나무, 집 한 채, 어떤 강이나 개울, 때로는 오솔길 모퉁이에서 마주친 어느 늙어버린 얼굴로 인하여 걸음은 잠들어 있던 시간을 깨워일으킨다. (255)

 

우리가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행이 우리를 만들고 해체한다. 여행이 우리를 창조한다.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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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진돗개

2011.10.25

 

오래 전 진돗개 가운데에서도 검은색과 누런색이 섞여 야성의 멋이 풍기는 재구를 키웠습니다. 지인이 귀한 진돗개라며 선물하여 준 어린 것을 '돌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애지중지 몇 달을 잘 키웠습니다. 그러다가 개가 탈이 났습니다. 그때 돌이를 방안으로 안고 들어와 상태를 기록하며 밤새 간호를 했습니다.

어린 돌이는 앓는 상황에서도 토하거나 변이 마려우면 꼭 마당까지 걸어 나가 일을 보았습니다. 끙끙 앓다가 비실비실 일어나 나가서 일을 보고 다시 걸어와 끙끙 앓는 것입니다. 그렇게 며칠을 앓다가 돌이는 먼 하늘나라로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뒤로 다시는 진돗개를 키우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을 했습니다. 헤어지는 슬픔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약이라고, 아픈 기억도 조금씩 흐릿해지는가 봅니다. 슬그머니 진돗개를 또 키우고 싶은 생각이 드니 말입니다. 물론 지금은 아파트라는 주거 환경 때문에 개를 키우고 싶어도 여의치 않지만, 어쨌든 진돗개에는 남다른 추억이 많습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지인으로부터 한 진돗개 단체에서 주관하는 진돗개 전람회 행사가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개를 가지고 어떻게 전람회를 한다는 것일지, 호기심과 설렘으로 전람회장을 찾아갔습니다.

비가 갠 일요일 오후, 경기도의 한 중학교 운동장에 마련된 전람회장에 개들은 적당한 간격을 두고 온순하거나 늠름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전국에서 모여든 진돗개들이 운동장을 가득 메운 모습을 보니 "이거 정말 개판이군." 이라는 농담과 함께 행복한 웃음보도 터집니다.

 

진돗개는 보통 다섯 가지의 모색(毛色)으로 구분합니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백구와 황구를 비롯하여 늑대 같은 잿빛의 재구, 호랑이 무늬의 호구, 그리고 눈 위의 황색점이 있는 흑황색 네눈박이까지 총 다섯 종류입니다. 황구와 백구는 평소에도 가끔 보아왔지만 재구와 네눈박이 같은 유색견은 접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전람회장 곳곳에서 만날 수 있어 반가웠습니다.

그런데 진돗개는 왜 황구와 백구만 알려지고 나머지 재구, 호구, 네눈박이는 잘 알려지지 않았을까요. 천연기념물 53호인 진돗개는 문화재관리법과 한국진도개보호육성법에 의해 보호가 되는데 공식적으로 백구와 황구만을 진돗개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머지 모색의 진돗개는 법적으로는 진돗개가 아닌 셈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대한민국 국견협회 우무종 총재는 백구와 황구만을 계속 교배시키면 대가 이어질수록 모색이 옅어지고 안색(眼色)도 흐려지는 등의 퇴화현상이 일어나게 된다고 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재구, 호구, 네눈박이 같은 유색견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색견과의 교배를 통해 진돗개 고유의 모색을 지켜낼 수 있고 자연스럽고 토종의 맛이 나는 진돗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전람회장에서 본 네눈박이와 재구는 강인함을 풍기는 외모와 당당한 성품으로 애견인들의 주목을 끌었습니다. 유전학적으로도 중요하고 외모도 우수한 네눈박이, 재구 같은 진돗개가 왜 법적인 측면에서 진돗개로 인정받지 못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국견인 진돗개의 발전을 위해서 풀어야 할 문제가 많을 것 같습니다. 법적인 문제의 개정에서부터 단체와 협회마다 조금씩 다른 표준체형의 통일, 과학적인 방법에 의한 혈통 관리, 해외 진출과 육성을 위한 지원 등의 문제입니다.

진돗개 전람회의 겉모습이야 세계 양대 전람회인 영국의 크래프트 그레이트 도그 쇼(Craft Great Dog Show)나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도그 쇼(Westminster Dog Show)에 비할 수 없겠지만, 전람회에 참여한 애견가들이 토종을 지키고 키운다는 일종의 사명감은 대단한 열정으로 느껴졌습니다.

또 하나 도그 쇼의 출전 개들이 미용실도 다녀오고 한껏 멋을 부려 주목을 받지만, 우리의 진돗개들은 얼굴의 상처도, 운동장의 흙먼지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 땅에서 오랜 시간 같이한 친구의 모습으로 당당한 것도 살갑게 느껴졌습니다. 모쪼록 우리의 토종 진돗개가 더 멋지게 달릴 수 있도록, 토종에 대한 재발견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필자소개

 

안진의

한국화가. 홍익대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색채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홍익대에서 채색화와 색채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화폭에 향수 사랑 희망의 빛깔로 채색된 우리 마음의 우주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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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의 “산 정상 3%밖에 못 왔다”

[중앙일보] 2011년 10월 17일(월)

 

주일 미국대사와 특별대담
[중앙일보 서승욱] “목표로 했던 산 정상까지 아직 3%밖에 못 온 것 같다. 산은 점점 커지고, 난 아직도 너무나 작은 존재다.”

연매출 3조 엔(약 45조원)의 회사를 이끄는, 지난해 말 기준 일본의 네 번째 부자인 손정의(54·사진) 소프트뱅크 회장의 말이다. 15일 ‘시대를 만드는 두 가지 방법’이란 제목의 주일 미국대사관 주최 특별대담에 초청받은 그는 ‘당신이 목표로 한 산 정상까지 얼마나 왔느냐’는 한 청중의 즉석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주일 미국대사관은 이날 도쿄 아오야마(靑山)의 복합문화공간 ‘스파이럴 가든’에서 손 회장과 존 루스 주일 미국대사의 대담장을 만들었다.

사전 인터넷 예약을 통해 방청권을 획득한 250명의 청년들과 기업가들은 손 회장의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을 향해 던진 손 회장의 메시지는 명쾌했다. “한 번뿐인 인생을 위해 정열과 꿈을 가져라” “자신만의 큰 영웅(big hero)을 만들고, 도전할 산(mountain)을 정해라. 그 뒤엔 고민하지 말고 도전하라. 이 산과 저 산 사이를 저울질하는 건 그냥 배회하는 것일 뿐이다”였다. 그의 영웅은 19세기 최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 근대화를 이끈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그가 정한 산은 정보통신기술(ICT)이었다. 그는 대담에서 재일동포 3세에 대한 차별에 괴로워하던 16세 때 가족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료마처럼 살겠노라’라며 미국 유학을 결심했던 추억을 떠올렸다.

그러곤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 활력을 잃은 일본 젊은이들을 향해 “외국으로 빨리 떠나 배워라, 인생의 눈을 떠라”고 권했다. 해외 유학이 줄고 있는 일본의 현실에 대해 그는 “직업이 정해지면 떠나기가 어렵다. 한국이나 중국엔 도전정신이 확대되고 있는데 일본 청년들은 조금 움츠러들고 있다. 넓은 세상에 뛰어들라”고 말했다. 또 “일본에서 태어난 나는 일본을 사랑한다. 그렇지만 그 말이 다른 나라와는 싸운다는 의미는 아니다”라며 ‘일본을 사랑하면서도 미국·한국·중국 모두를 사랑하고 돕는 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기업가들에게 강조한 그의 키워드는 ‘stay young and hot(젊고 뜨거워야 한다)’이었다. “94세 된 내 아버지가 올해 초 100만 달러를 달라고 하더라. 이유를 물었더니 아버지는 ‘돈이 필요한 게 아니다. 인도에다 회사를 차리고 싶다’고 하더라. 성장 가능성이 큰 인도에 회사를 차리고 싶다는 것이었다….” 손 회장은 “아버지의 이런 정신을 존경하고 있다”고 했다.

2시간에 걸친 대담 내내 “꿈을 크게 가지라”고 조언했던 그가 청중을 향해 던진 마지막 한마디는 “인생은 딱 한 번뿐(Life is only one time)”이었다.

도쿄=서승욱 특파원

[동서남북] 젊은 프런티어가 개척하는 미래

선우 정·산업부 차장

우리가 스스로 비판하는 것을 밖에선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교육열이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만 칭찬하는 것이 아니다. 일본 오사카지사는 교육열을 배우기 위해 작년 한국을 방문했다. 그가 견학한 곳에는 외국어고도 있었다. 그는 당시 인터뷰에서 "이 정도의 어학 실력을 갖춘 학생이 한 학교에서 한 해 400명씩 나오는 게 한국이 약진하는 계기"라고 했다. 얼마 전 인터뷰를 한 다케다약품 사장도 "풍요에 젖은 일본 젊은이는 영어는커녕 일본어조차 이상하게 하는데, 한국 젊은이들은 영어는 기본이고 일본어를 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한국 대학에서 인재를 뽑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나온 푸념이었다.

외국인이 사정을 잘 모르고 하는 말이려니 여길 수도 있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일본도 교육 광풍(狂風)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한국을 부러워하는 것은 강요든 뭐든, 결과로 나타나는 학생들의 학습열과 성취욕이 아닐까 한다. 한국 젊은이들을 보면 풍요 속에서 성취욕을 상실해가는 물렁물렁한 일본 젊은이들이 정말로 못마땅한 것이다.

지난 3월부터 보육원에 다니기 시작한 우리 집 세 살 꼬마는 요즘 "많이, 많이 윤(자기 이름)이 꺼" "윤이가 일등"이란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보육원 형들에게 배운 모양이다. 이런 아이에게 "아니야, 콩 한 알이라도 나누고 늘 양보해야 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기적이고 못된 아이가 되라는 뜻이 아니다. 한국이 발전 과정에 있는 이상, 획득하려는 소유욕과 앞서가려는 성취욕이 여전히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한국은 지금 너무 감상적이다. "아이들에게 눈칫밥을 먹일 수 있는가"라는 상투적 구호가 "이건희 회장 손자까지 공짜밥을 줘야 한다"는 논리로 쉽게 비약한다. 동심을 어루만지기 위해선 수조원도 투입할 수 있는 통 큰 나라가 됐다. 한국이 선진국이라면 물론 이보다 좋은 일이 없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나라다. 과거 20년과 마찬가지로 앞으로 20년도 성취하려는 젊은 프런티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나라를 성장시키는 과정이 될 것이다.

그래서 공짜밥에 서러운 아이들에게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솔직할지 모른다. "네가 살아야 할 자본주의는 그런 것이야. 설움을 발판으로 성공해서 너 같은 아이에게 빛을 전해 주렴"이라고. 그리고 그 아이들이 세상에 대비할 수 있도록, 부자에게 쓸 돈으로 학원 쿠폰을 사주는 것이 더 현명한 방식일 수 있다. 가난한 프런티어의 앞길을 막는 장애를 무너뜨리고 성공의 사다리를 세우는 것이 더 정당할지 모른다. "이건희 손자도 공짜밥을 먹으니 이제 눈물을 닦으렴"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이들을 속이는 것이다. 공짜밥 정도에 눈물을 흘리면, 앞으로 세상에 나와 더 크게 울어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 이런 생각을 한다. 외고를 비판하던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은 왜 자녀를 외고에 보냈을까? 백 번을 양보해 출판사가 한 일이라고 해도, 왜 출판사는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에게 '서울 법대' 명찰을 달아준 것일까? 읽을 수도 없는 하버드대 도서관 장서 수백만권을 왜 전부 읽었다고 말한 것일까? 외고, 서울 법대, 하버드대…. 그들이야말로 속세에 완벽하게 충실한 것 아닐까.

물론 그들이 말하는 아름다운 세상은 올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방식대로는 오지 못할 것이다. 지금 눈칫밥을 참고 극복하는 젊은 프런티어가 치열하게 개척하는 미래일 것이다.

[Weekly BIZ]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회장 문화산업 비법은?

  [위클리비즈 창간 5주년, 역대 에디터의 인터뷰] 혼돈의 시대… 길을 묻다
"리스크 큰 CT<컬처 테크놀로지>산업… 내 성공 비결은 매뉴얼, 인내 그리고 꿈"
5만5000명의 청중이 야광봉을 흔들며 파도처럼 물결 치고 있었다. 5시간 30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이어진 공연을 거의 모든 청중이 내내 서서 지켜봤다. 소녀시대동방신기, 슈퍼주니어가 나타날 때마다 그들은 환호하고, 따라 노래를 부르고, 눈물을 흘렸다.

이수만 회장이 말한 '버추얼 네이션(virtual nation ·가상국가)'이란 말이 실감 났다. 일본의 심장 도쿄돔에서, 거의 대부분 한국어로 불리는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그들은 일본인이기도 하거니와 'SM엔터테인먼트'라는 가상국가의 국민이기도 한 것이다.

이 공연의 티켓 값은 1만2800엔, 우리 돈으로 약 20만원이다. 그런데 맨 앞자리이든 3층 맨 뒷자리이든 객석 어느 자리나 티켓 값이 똑같다. 이수만 회장의 표현에 따르면 자리는 오직 '충성도'에 따라 결정된다. 인터넷 예매 때 1초라도 빠르면 앞자리에 앉고, 5분이 늦으면 맨 뒷자리에 앉는 식이다.

원래는 4월에 갖기로 한 공연이었다. 그런데 3·11 일본 대지진이 터졌고, 공연이 무기 연기됐다. SM측은 티켓값을 환불해 주려고 했다. 그런데 팬들이 결사 반대했다. "로또 당첨되듯 표를 구했는데, 왜 뺏어가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환불해 주지 않고 돈을 고스란히 5개월을 갖고 있다가 공연했다. 장사를 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프랑스의 경영 석학 장 클로드 라레슈 교수가 "제품을 고객에게 밀어붙이기 식으로 팔지 않고, 사지 않고는 못 견디게 만들라. 스스로 물살을 만들어 올라타라"고 했는데, 바로 이런 게 딱 떨어지는 예일 것이다.

기자는 이수만이 부른 ‘행복’이며 ‘모든 것 끝난 뒤’와 같은 노래를 듣고, 그가 진행하는 TV쇼를 보며 자랐다. 그런데 처음으로 직접 만난 그의 나이가 만으로 59세. 내년이면 환갑이다. 여전히 젊고 활기찬 모습이었지만, 세월의 더께를 감출 수 없었다. 기자는 첫 질문으로 지난해 그의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강연 이야기를 꺼냈다.

―강연 제목이 ‘귀를 자르려고 하지 마라(Don’t try to cut your ears)’였는데, 어떤 내용이었나요?

“반 고흐 같은 천재가 귀를 자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자는 겁니다. 천재들을 위한 교육을 하고, 천재들을 이해할 수 있는 사회 기반을 만들자는 이야기였어요. 반 고흐의 천재성은 남들이 못 갖고 있는 오감(五感)에서 나왔을 겁니다. 그는 음악을 들어도 그림이 보이고, 음식을 먹어도 그림이 보였을 겁니다. 이수만이란 사람은 반대로 그림을 보면 음악으로 들리겠죠. 어느 날 고흐가 바람소리를 듣습니다. 그랬더니 벽이 막 녹아내리는 겁니다. 영화에서 가끔 보잖아요? 소리를 들으면 보이는 거죠.”

―감각이 통합되는 경험 말씀이군요.

“예. 사실 그런 경험은 천재에겐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고흐도 그런 느낌을 처음엔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스스로도 감당을 못하게 힘들어진 게 아닐까. 그래서 귀를 잘라낸 게 아닌가 생각해 보는 겁니다. 천재를 위한 교육이 안 돼 있어서 생긴 비극인 셈입니다.”

그는 주먹구구식이던 한국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최초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매니지먼트 시스템을 도입했다. 고흐처럼 천재의 싹을 가진 연습생을 뽑아 13년 동안 장기 육성해 아이돌 스타로 길러냈다. 그는 영재학교의 교장이었던 셈이다.

◇우연과 일회성에서 벗어나는 시스템화가 필요

하지만 13년에 이르는 장기계약은 ‘노예계약’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공정거래위원회와 협의 끝에 계약 기간을 한국에만 있을 경우 7년, 해외에 나갈 경우 10년으로 줄였다고 했다). 13년이란 시간은 연습생에게는 물론, 경영자에게도 긴 시간임에 틀림없다. 그 기간 동안은 책임지고 키워주겠다는 약속이니까.

가수이자 TV쇼 진행자였던 이수만. 자신의 영문 이름을 딴 SM을 통해 수많은 아이돌을 길러낸 그는 영재학교의 교장이었던 셈이다. / SM엔터테인먼트 제공
이수만 회장은 K-팝이 전 세계를 휩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장기 계약에 의한 매니지먼트 시스템을 꼽았다.

“우리 같은 매니지먼트 시스템은 미국도 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연습생을 선발해서 장기 계약해서 오랫동안 트레이닝하는 일이 미국에선 못하게 돼 있습니다. 미국은 에이전시 제도라고 해서 가수나 연예인이 스스로 커지면 에이전시 회사에 일을 하도급을 맡기는 식입니다. 그러니 에이전시가 하도급업체로 전락하고, 유망주에 장기적으로 투자할 수 없는 것이죠. 그런데 뒤늦게 문화산업이 발달한 한국이나 일본은 자유 계약이 가능했고, 그래서 장기 투자를 하게 된 겁니다.”

―CT(컬처 테크놀로지)라는 말을 만드셨는데, CT 산업에서 승자가 되는 비결은 뭡니까?

“IT 산업을 흔히 고위험-고수익 산업이라고들 합니다. 그런데 CT 산업은 한술 더 떠 초고위험-초고수익 산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연과 일회성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그는 도자기공의 예를 들기 시작했다. “어느 뛰어난 도자기공이 독보적인 도자기 제조 기술을 갖고 있습니다. 그의 기술은 그의 감각과 손끝에 있습니다. 그것을 배우려면 그 사람 밑에 들어가 배워야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만일 그런 기술을 잘 성문화(成文化)하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면, 그리고 이것을 잘 전수해서 저작권료를 받았다면 하나의 산업이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SM은 이걸 하자는 겁니다. 제가 갖고 있는 것, 또 우리 직원 누군가가 갖고 있는 기술, 이런 것들을 성문화하고, 교육을 통해 전수하자. 그래야 지속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러한 시스템이 정립되지 못하면 모든 것이 우연으로 끝날 수 있다는 것이죠.”

요컨대 문화산업 특유의 ‘암묵지’를 ‘형식지’로 전환시키는 매뉴얼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그의 충고는 비단 엔터테인먼트산업뿐만 아니라 ‘초불확실 환경’에 직면한 모든 기업인들에게 의미심장한 충고일 것이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그가 매우 치밀하고 논리적인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경영자라면 감성 지향의 우뇌형 경영자의 모습을 기대하기 쉬운데, 그가 구사하는 언어는 다분히 좌뇌적이었다.

그는 “이수만이 없으면 SM이 끝나는 것 아니냐고 걱정들을 하는데, 그래서 이수만을 대신할 수 있는 ‘클론’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사내에 춤과 노래, 믹싱 등 각 분야 전문가 6명으로 만든 팀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이란 플러스 알파를 갖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이수만의 머리를 카피한 것 이상이 나올 것이고 SM은 더 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수만 경영의 요체는 ‘인내’

이수만 회장을 오랫동안 지켜본 이장우 경북대 교수(경영학)는 그의 성공 비결을 “최고를 위한 인내의 경영”이라고 표현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선택의 연속이다. 좋은 가수를 고르고, 좋은 스태프를 고르고, 좋은 음악을 고른다. 그런데 그 선택에 극도의 인내심을 발휘하는 사람이 이수만 회장이다. 선택을 위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선택지를 검토하지만, 그래도 답이 없다고 생각하면 깨끗이 포기한다. 회수할 수 없는 ‘매몰 비용(sunken cost)’이 발생하게 되지만 개의치 않는다. 어정쩡한 제품에 목을 매는 리스크를 감수하기보다는 시간과 비용이 들어도 최고가 될 때까지 투자하고 기다린다는 것이다.

이수만 회장이 키워낸 대표 아이돌 그룹 소녀시대. / 연합뉴스
SM엔터테인먼트는 요즘 새로운 팀을 내놓을 준비를 하고 있다. 똑같은 콘셉트의 팀 두 팀을 구성해서 한 팀은 한국에서, 다른 한 팀은 중국에서 동시에 같은 곡을 부르게 된다. 가칭 M1과 M2이다. 두 팀의 타이틀곡 하나를 쓰기 위해 SM은 지난 8월 덴마크노르웨이에서 뮤직캠프라는 행사를 개최했다. 전 세계 작곡가 50여명이 모여서 3~6일간 SM엔터테인먼트를 위한 곡을 쓰는 행사이다. SM측이 M1과 M2를 보여주고, 원하는 콘셉트를 이야기하고, 리듬을 들려주면 작곡가들이 자유롭게 곡을 창작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행사를 두 차례나 했는데도 아직 M1과 M2의 타이틀곡을 못 골랐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경비를 다 날린 셈이죠. 하지만 우리는 늘 그런 짓을 하고 있습니다. SM엔터테인먼트의 힘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트레이닝, 둘째 시스템적으로 움직이는 것, 셋째 곡을 중요시하는 겁니다. 새 팀 하나 론칭하는데 보통 4년이 걸립니다. 동방신기 곡 하나 쓰는데 50명이 모여서 썼고, 맨 처음 데뷔하는 데 40억원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음반을 내는 프로모션비가 또 40억원씩 들어갑니다.”

그는 보아가 일본 진출에 성공한 이후 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통할 수 있는 최고의 팀을 구상했다. 그러나 자원의 한계 때문에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그래서 여러 팀에서 최고를 한 사람씩 뽑아서 메이저리그라고 할 수 있는 단 한 팀을 구성했고, 그것이 동방신기였다. “여기에 선발되지 않은 팀은 모두 와해될 판이었습니다. 하지만 계약을 했기 때문에 책임져야 했지요. 그래서 그런 팀 중에서 음악도 잘하고 버라이어티쇼도 할 수 있는 팀으로 키운 게 슈퍼쥬니어였어요.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피눈물나는 노력을 기울였고, 저희도 미안해서 도와주게 됐지요.”

그 슈퍼쥬니어가 생각지도 못한 대박을 터뜨렸다. 지금 슈퍼주니어는 유럽, 태국, 남미에서 최정상의 가수이다.

◇동양의 할리우드를 한국이 만든다

―미국 LA에 이어 메디슨스퀘어가든에서 SM타운 콘서트를 개최할 예정인데, 이제 미국 시장에 본격 진출하는 건가요?

“그런 건 아닙니다. 미국에 진출한다기보다 SM타운이란 가상 국가의 동포들이 거기에도 있으니 위문공연차 가는 겁니다. 앞으로 중국과 아시아 시장이 미국보다 더 커질 겁니다. 그러니 굳이 미국에 갈 필요가 없는 것이죠. 머지않아 동양에 할리우드가 생기면서 문화의 중심이 갑자기 이리로 대이동을 하게 될 겁니다. 미국에서는 동양 노래를 잘 모른다고요? 전혀 상관없어요. 중심은 아시아가 될 거니까요.”

그는 “아시아에 제2의 할리우드가 생긴다면 한국이 일본과 중국을 업고 가는 전략을 펴야 한다”고 덧붙였다. “예를 들어 프로듀싱은 우리가 하고, 마케팅은 일본이 하고, 가수나 탤런트, 감독은 중국 사람이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 있나요? 그렇게 해서 그 큰 시장의 3분의 1만 우리가 가져와도 우리 국민이 4500만명밖에 되지 않으니 1인당으로 따지면 우리가 가장 수혜를 보지 않을까요?”

그는 늘 꿈을 꾼다. 그가 새로 꾸는 꿈은 ‘빌리 엘리어트’와 같은 뮤지컬을 만들어 전 세계에서 저마다 다른 팀을 선발해 공연하는 것이다. 엄마와 자식이 클래식과 팝을 두고 갈등을 벌이다가 화합해서 더 좋은 음악을 만드는 내용이란다. 그동안 나온 SM엔터테인먼트의 곡과 새로운 곡들을 섞을 것이라고 했다.

이 기사를 쓰던 중에 마이클 잭슨의 프로듀서이던 테디 라일리가 소녀시대의 새 앨범 타이틀곡을 썼다는 뉴스가 나왔다. 이수만 회장은 “SM엔터테인먼트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작곡가를 배출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스티브 잡스의 숨겨진 이야기…잡스 공식 전기 출간

◆ 천재와 일하고 싶었던 잡스

잡스는 애플에 일류 인재를 뽑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스스로가 천재라고 생각한 그는 바보가 아닌 천재들과 일을 하고 싶었다. 자신이 회사에 이류 인재가 넘치지 않도록 경계하기 위해 천재에 못지 않다고 생각하는 팀 쿡이나 조너선 아이브 같은 회사 수뇌부 인사들이 직접 면접하도록 했다.

잡스는 창업부터 함께한 워즈니악도 평범한 엔지니어보다 50배나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워즈니악이 다른 사람과 회의를 하지 않고도 자신의 머릿속에서 마치 상대방과 마주 앉아 회의를 하는 것 처럼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로 생각했다. 특히 잡스는 뛰어난 인재들이 같이 일할 수 있도록 조직을 꾸몄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맥 팀이었다. 잡스는 맥 팀을 에이스 직원으로 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일반인들의 우려와 달리 에이스 직원들은 같은 부류의 에이스 직원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많은 이들은 잡스가 온라인과 떼서 생각할 수 없는 IT 신봉자인 만큼 사람과의 접촉을 싫어할 것으로 예상한다. 하지만 잡스는 e메일보다 사람 냄새가 나는 ‘직접적인 만남’을 신봉했다. 특히 디지털 세상에서는 고립될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 때문에 애플의 핵심 브레인들과는 적접적인 만남을 선호했다. 독재권력을 휘두르고 있던 자신도 모르게 회사의 변화가 생기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잡스는 이와 관련 “네트워크 시대에는 이메일이나 아이챗을 통해 아이디어들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그건 말도 안 됩니다”고 일갈하기도 했다.

그는 또 창의성이 우연한 만남이나 무작위적인 논의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신봉했다. 그래서 잡스는 픽사 건물을 우연한 만남과 임의적인 협력을 독려하는 방식으로 설계했다.

잡스는 이와 관련 ”건물이 그런 것을 독려하지 않으면 뜻밖의 발견으로 야기되는 혁신과 마법을 상당 부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이 사무실에서 나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서로 만날 일이 없었을 사람들과 중앙 안뜰에서 섞이도록 건물을 설계했지요“라고 말했다.

◆ 프레젠테이션 달인…비결은 집착에 가까운 준비

잡스는 제품 출시 쇼를 진두지휘하는 연출가이자 발표자였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사소한 부분까지 집착한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제품 출시 쇼를 정교하게 기획했다.

그는 CEO임에도 불구하고 슬라이드에 들어갈 내용과 연설의 요점을 직접 작성하고 수정했다. 자신의 아이디어가 가장 많이 반영된 제품인 만큼 자신이 슬라이드에 들어갈 내용과 연설의 요점을 가장 적확하게 정리할 수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완벽을 추구하는 그의 성격 탓이 더 크다. 그는 발표에 사용될 각각의 슬라이드를 예닐곱 차례나 수정할 정도로 꼼꼼히 살폈다. 발표 전날에는 밤늦게까지 슬라이드를 점검하고 발표 연습을 반복했다.

그는 이런 준비 과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는 듯이 아주 느긋하고 편안하게 제품을 발표했다. 두려움을 전혀 모르는 타고난 발표자 처럼 태연히 행동했다. 객석은 지지자들로 가득했고 잡스는 청바지와 터틀넥을 입고 생수병을 든 채 무대를 유유히 거닐었다. 행사장 분위기는 기업의 제품 발표회라기보다는 차라리 종교의 부흥회와 비슷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잡스의 부인인 로렌 파웰은 잡스에 대해 "발표 예행연습을 한 차례 한 다음, 한두 가지 단어를 바꾸고 처음부터 다시 예행연습을 할 정도로 사소한 부분까지 심하게 집착하는 편이에요”라고 말했을 정도다.

◆ 아이패드용 칩 만든 삼성전자도 원래는 대안에 불과

아이패드에 들어가는 삼성전자(005930) (943,000원▲ 2,000 0.21%)의 칩이 처음부터 잡스의 간택을 받은 것은 아니다. 잡스는 처음에는 아이패드에 인텔이 개발중인 낮은 전압의 ‘아톰 칩’을 탑재하려고 했다. 특정 설계를 공동으로 진행하자는 인텔의 폴 오텔리니 CEO의 주장에 잡스 역시 동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텔은 배터리 수명을 관리해야 하는 기기보다는 벽에 플러그를 꽂아 쓰는 기기를 위한 프로세서를 제작하는 데 익숙했다. 그래서 애플 내부에선 단순하고 전력을 적게 사용하는 ARM 아키텍처 기반을 쓰자는 주장이 제기됐다. 애플은 초창기에 ARM과 파트너십을 맺었으며, 원조 아이폰에도 ARM 아키텍처를 사용하는 칩들이 사용됐다.

ARM 칩을 쓰자고 주장한 것은 아이패드 부문 부사장인 토니 파델이었다. 그는 인텔 쪽으로 기운 잡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회사를 관두겠다는 협박까지 서슴지 않았다. 결국 잡스도 토니 파델의 손을 들어줬다.

애플은 이후 아이패드용 칩 개발을 위한 인텔과의 관계를 끊었다. 그리고 관련 회사를 인수하고 자체적으로 개발하게 된다.

애플은 ARM 아키텍처의 라이선스를 얻는 동시에 팰러앨토에 있는 사원 150명의 마이크로프로세서 설계 회사 P.A. 세미를 인수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A4라는 맞춤형 SoC를 개발했다. A4는 ARM 아키텍처를 기반으로 한국의 삼성전자에서 제조됐다.

[ESSAY] 九旬 넘은 어머니를 양로원에 모신 뒤…

박병준 캐나다 교포

귀 어둡고 기력 떨어진 老母 혼자 있다가 큰 일 겪으면
맏아들 불효자 만들까봐 양로원 가시겠다고 고집
작년 말 거처 옮긴 어머니 '눈 조심하라'며 전화
어머니 체취 남은 빈방을 오늘도 나는 서성인다

아직 밖이 어두워 잠자리에 있는데 전화가 '따르릉' 울린다. 이 시간에 전화하는 사람은 어머니다. 자식 사랑하는 마음이 담뿍 담긴 음성이 전선을 타고 건너온다. "눈이 많이 오고 있다. 꼼짝하지 말고 집에 있어라." "예"하고 대답하는 순간, 칠순(七旬) 넘은 아들은 초등학생이 된다. 어머니는 지금 양로원에 계신다.

1975년에 캐나다 밴쿠버로 이민 왔다. 자리를 잡자마자 부모님을 모셔왔고, 어렵사리 마련한 집에서 다시 모인 가족은 오순도순 행복했다. 우리 부부가 모두 직장에 나갔기 때문에 집안살림은 어머니 몫이었다. 부업으로 새를 키웠는데 그 일 역시 어머니가 맡았다. 어머니는 환갑에 홀로 된 뒤 노인아파트에 독립했다가, 심장에 탈이 나서 고생하신 후 다시 모여 살았다.

어머니 방은 2층에 있었다. 기력이 좋을 때에는 괜찮았지만 기운이 떨어지면 계단을 하나씩 기어오르셨다. 그 모습을 뵈면 참 마음이 아팠다. 아래층에 방을 더 만들 형편도 안 돼 퍽 난감했다. 또 우리가 외출할 일이 생기면 문을 잠가야 할지 열어 두어야 할지 망설여졌다. 열어 두면 귀가 어두운 어머니는 누가 들어와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혹 도둑이 힘없는 노인네를 밀치고 물건을 다 들어내도 꼼짝없이 당할 판이다. 문을 잠그고 나가면 불의의 사고가 날 때 구조대가 문을 부수고 들어와야 할 판이었다.

1997년 처음 한인 단체산행(山行)을 시작한 우리 부부는 매주 한두 번씩 집을 비웠고, 캐나다를 소개하는 잡지 취재로 여러 날 집을 떠날 때도 많았다. 멀리 외지에서 집으로 전화할 때 어머니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걱정하는 아들 내외가 안쓰러웠던지 어느 날부터 양로원으로 가시겠다고 우기기 시작했다. 친구 분들이 한국 음식을 제공하는 양로원에서 같이 지내자고 권한 게 계기가 됐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는 듯했다. 혼자 계시다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거나 어지럼증으로 쓰러져 목숨을 잃게 되면 맏아들을 불효자(不孝子)로 만들고 만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일본에 유학한 신여성이었던 어머니는 두메산골 삼대독자인 아버지와 혼인하여 나를 낳았다. 일제의 압박에 신음하는 동포를 구하라는 의미로 아명(兒名)을 '모세'라고 부르며 나에게 온갖 기대를 걸고 한세상을 살아오신 어머니다. 파란만장하게 살아온 한 세기의 삶이 막바지에 이르러 자신보다 아들의 안위(安危)를 더 걱정하신다. 양로원 얘기가 나왔을 때 가장 반대한 것은 아내였다. 아흔이 넘은 어머님의 여생이 얼마나 남았다고 낯선 곳에 보내느냐, 어머님이 떠나시는 날까지 모시겠다는 아내의 고집을 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하지만 옛날 같으면 그 자신 차려주는 밥상을 받고 아랫목에서 상노인 대접을 받을 칠십 넘은 아내가 구십 넘은 시어머님을 모시고 늘 웃는 얼굴로 살아온 지난 세월이 고맙고 안쓰러웠다. 또 어머니도 우리가 집을 비우는 동안 라면이나 찬밥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기 일쑤인데, 양로원에 가시면 하루 세 끼 따뜻한 식사를 드실 수 있을 것이다. 말벗이 있고 영양이 충분한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에 보내드리는 게 효도 아니겠느냐고 설득했다. 동생과 조카들은 이해하고 동의했지만 아내는 결심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결국 어머니와 같이 양로원 답사를 하고 돌아온 후 아내는 고집을 꺾었다.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낸다고 생각하니 우리 세 식구가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던 시간이 제일 아쉬웠다. 어머니가 이끌던 뒤뜰 농사는 어찌할까. 씨 뿌리는 시기를 정하고, 씨앗을 관리하는 일은 어머님 몫이었는데…. 작년 말 마침내 어머니는 양로원으로 옮겼다. 집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있어 가까운 곳이고, 지금 어머니가 받는 연금으로 매달 생활비를 내고도 용돈이 조금 남기에 부담 없이 입주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양로원 생활이 즐거우신 모양이다. 차려주는 밥상에 앉아 식사하신 후 수저도 챙기지 않고 일어서기가 민망하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그리고 양로원의 어른으로 입주자 간 사소한 문제까지 앞장서 챙기시며 존경을 받는다고 했다. 집에 계실 때에는 자식에게 얹혀사는 노인이었는데 지금은 활달한 사회생활로 다시 돌아가신 듯하니 더없이 반갑다.

어머니가 계시던 2층 방은 지금 비어 있다. 어머니의 다정한 체취가 남아 있고, 시원하게 낮잠을 주무시던 모습이 눈에 선해서 나도 모르게 들여다보게 된다. 오늘도 어머니가 안 계신 빈방에서 칠순 아들은 서성인다.

말썽피워도, 대학 중퇴해도… IT천재 부모는 자식 믿었다

▲ 1972년 9월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있는 리드(Reed)대학. 폴 잡스와 클라라 잡스 부부는 아들을 차에 태우고 캘리포니아주 서니베일에서 1000㎞를 달려왔다. 아들이 대학에 입학하는 날이었다

 

(왼쪽)스티브 잡스가 1984년 매킨토시 컴퓨터를 발표하던 당시 모습. 잡스는 자동차 수리공 출신인 부친 폴 잡스<작은 사진>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일을 처리하는 완벽주의를 배웠다. /연합뉴스 (가운데)1984년 컴퓨터 운영체제 MS-DOS를 개발하던 빌 게이츠. 변호사인 부친 윌리엄 게이츠 2세<작은 사진>와 교사 출신 모친은 그가 어려서부터 컴퓨터를 갖고 놀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corbis·토픽이미지 페이스북의 최고경영자 마크 저커버그가 온라인 영화감상 기능을 설명하고 있다. 치과의사인 부친 에드워드 저커버그<작은 사진>는 아들이 10세도 되기 전에 고급 프로그래밍을 가르쳤다. /블룸버그
잡스의 부모는 아들이 다니던 공립 중학교에서 패싸움과 성폭행 사건이 빈발하자 지역의 명문 학교로 전학시켰다. 이를 위해 집을 팔고 이사를 가야 했다. 친부모에게 "아들을 꼭 대학에 보내겠다"고 약속했던 양부모는 잡스를 사립 리드대학에 입학시키기 위해 10년 넘게 모아둔 적금통장을 깼다.

3. 내 아들을 믿는다

잡스가 말썽을 피워 학교에 불려간 부친은 "학생이 공부에 흥미를 잃는 것은 교사 책임이지 아이가 잘못한 게 아니다. 호기심을 자극하지 못하면서 바보 같은 내용만 달달 외우게 하는 학교가 문제"라고 오히려 야단을 쳤다.

게이츠와 저커버그의 아버지도 자기처럼 변호사나 의사가 되라고 강요하지 않고 아들이 하고 싶은 대로 믿고 내버려뒀다. 둘 다 명문 하버드대를 중퇴하고 각각 MS와 페이스북을 창업한다고 할 때도 반대는커녕 사업자금을 대줬다. 빌 게이츠는 "당시 아무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소프트웨어 사업을 한다고 하버드대를 때려치울 때도 부모는 나를 믿어 주었다"고 말했다.

4. 자녀에게 모범을 보인다

잡스 부친은 집에 울타리를 만들 때 망치질을 가르쳐주고, 차고에서 자동차를 수리할 때도 함께 일했다. 그는 "남에게 보이는 앞부분만 신경 쓸 게 아니라 숨겨져 있는 뒤쪽도 잘 다듬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잡스의 완벽주의는 어려서부터 잉태된 셈이다.

저커버그도 "부모님에게 질문을 하면 '예' '아니오' 같은 단순한 답변이 아니라 사실과 경험, 논리와 이성적인 근거를 대고 설명해줬다"고 말했다. 부모가 자녀의 가장 훌륭한 역할 모델이었던 것이다.

"제 이름은 링컨입니다"


"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업을 하다 두 번 망했고, 선거에서는 여덟 번
낙선했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잃고 정신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습니다. 제가 운이 나쁜
사람이라고요? 글쎄요.
참, 하나를 빼먹었군요. 저는 인생 막바지에
미국의 16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제 이름은 링컨입니다."


- 신인철의《핑계》중에서 -

백남준 ‘유치원 친구’ 이경희의 회고 C’est La Vie 이것이 인생

[중앙일보]입력 2011.11.06 09:12 / 수정 2011.11.06 16:41
여성중앙“세라비! 우린 너무 늦게 만났어.”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 35년 만에 귀국해 ‘유치원 친구’를 껴안으며 한 말이다. 유치원 친구의 사랑 혹은 우정이 이렇게 오래갈 줄 몰랐다. 수필가 이경희가 털어놓는 이야기 안에 ‘예술’이 있고 ‘인생’이 있었다.

“예술은 반은 사기입니다. 속이고 속는 거지요. 예술이란 대중을 현혹시키는 겁니다. 매스 게임이 아니라 페스티벌이지요.” (『중앙일보』1984. 6. 30. 기사 중에서)

시대를 앞서간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그가 35년 만에 귀국해서 가진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아메리카와 유럽을 연결하는 위성 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로 세계적인 화제를 모은 후였다. 그런 그가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기자들에게 한 말이 있다. “내 유치원 친구 이경희를 만나고 싶다.”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경희, 이마 다친 것 어떻게 되었지?

백남준과 이경희, 두 사람은 명동성당 건너에 있던 애국유치원을 함께 다닌 유치원 동창이다. 당시 동대문 밖 창신동에 살던 백남준은 요즘으로 치면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였다. 서울에 두 대밖에 없는 캐딜락이 있었고, 집 뒤뜰에 동산이 있을 정도였다. ‘유치원 친구’ 이경희는 당시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남준이 어머님과 우리 어머님이 가깝게 지냈어요. 남준이 집에 가면 일본 고단샤 출판사의 그림책을 볼 수 있어서 매일같이 놀러 가곤 했죠. 가끔 남준이랑 을지로에서 동대문까지 전차를 타고 집에 가기도 했어요. 남준이 집에서 숨바꼭질을 하다 낮은 지붕에 오른쪽 이마가 긁혀 피가 난 적이 있죠. 남준이는 그 일을 두고두고 미안해했어요.”

두 사람은 초등학교에 올라가면서 헤어졌다. 이경희는 숙명여중에 다닐 때 단체 관람으로 명동의 국립극장을 찾은 적이 있다. 그때 경기중학교 학생들도 와서 같이 관람을 했다. 이경희는 경기중에 다니는 유치원 친구를 찾았지만 끝내 볼 수 없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터졌다. 백남준이 일본을 거쳐 독일로 유학을 갔고, 장가도 안 가고 전위 예술인지 뭔지 하는 이상한 짓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 친구가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되어 한국에 돌아왔다.

백남준의 ‘유치원 친구’ 이경희를 자택에서 만났다. 견우와 직녀처럼 서로의 궤도를 돌다 35년 만에 만난 두 사람의 인연이 애틋하고도 아름다웠다.
유치원 친구를 찾는다는 말을 듣고 기분이 어땠나요 귀국 소식을 매스컴을 통해 알았어요. 남준이가 일본인 부인과 함께 입국하는 모습을 TV로 봤죠. 반갑기도 하고 서먹서먹하기도 하고….

아무튼 기분이 이상했어요. 남준이가 묵고 있는 워커힐 호텔에 연락처를 남겼더니 얼마 후 전화가 왔어요. 남준이는 내 이마가 다친 걸 두고 미안해했어요. 유치원 때 일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더군요. 훗날 명동 국립극장에서 날 보고도 부끄러워서 숨었다는 얘기도 하고.

워커힐 호텔 펄빌라에서 두 분이 따로 만났죠 두 번째 만남이었어요. 한국일보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절 섭외한 거죠. 이틀 전에 남준의 부모님 산소에 따라갔다가 저녁에 작은 누님(백영득) 댁에서 식사를 함께했어요. 남준이는 누님이 차린 음식에는 손도 안 대고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느라 바빴죠.

보다 못한 누님이 음식을 챙겨주라고 해서 생선을 뜯어서 남준이 접시에 놓아준 기억이 나요. 시게코는 말도 통하지 않고, 다들 남편만 챙기는 분위기가 못마땅했는지 먼저 호텔로 가겠다며 고함을 쳤어요. 그날 제가 시게코를 꼭 껴안으며 달랜 기억이 나요. 그렇게 해서 소동이 가라앉았죠.

호텔에서 두 분이 나눈 대화 중에 “난 섹스를 못해. 당뇨병이라”는 말이 인상적이더군요 백남준만이 할 수 있는 말이죠. 그는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순수한 사람이었어요. 남준이가 생각하는 사랑에는 육체적인 사랑이 들어 있죠. 그 전에 두 팔로 절 감싸 안으면서 “세 라 비! 우린 너무 늦게 만났어”라고 한 말이 더 기억에 남아요.

어릴 때 남준이 집에 가면 다들 저를 ‘남준이 색시’라 불렀어요. 집안 어른들이 혼인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죠. 백기사(백남준을 기리는 사람들) 모임에 공동 대표로 있는 황병기 선생도 그런 말을 하더군요. 뉴욕에서 만났을 때 ‘유치원 친구’ 얘기를 들었다고.

남준이가 날 기억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남편과 결혼을 해서 딸 넷을 낳아 기르고, 수필을 쓰고 꼭두극단을 만들어 유럽 순회공연을 다니느라 바쁘게 지냈어요. 남준과 저는 ‘견우와 직녀’처럼 서로의 궤도를 돌다 35년 만에 만난 거죠.

별안간 춘(春)을 느끼어 서로 내외하다가

이경희 여사는 최근『백남준, 나의 유치원 친구』를 펴냈다. 책에는 프랑스 카날 풀뤼 TV에서 촬영한 백남준의 다큐멘터리에 한복을 입고 출연한 사연,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 백남준과 함께 워터 택시를 타고 황금사자상을 받으러 간 이야기, 아내 구보타 시게코 여사를 달래느라 백남준이 절교 편지를 팩스로 보낸 재미난 사연들이 들어 있었다.

“2000년에『백남준 이야기』를 펴낸 적이 있어요. 생전에 남준이가 글을 써달라고 조르는 통해 어릴 적 사사로운 이야기를 풀어냈죠. 이번 책은 백남준 사후에 그의 예술 세계를 궁금해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썼어요.

돌이켜보면 남준이와 사적으로 만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두어 걸음 떨어져서 나란히 걸으며 서로 행복했다는 느낌? 그런 기분이 들어요. 저는 끝내 남준이의 마음을 받아주지 못했어요. 그럴 기회가 마지막에 있었지만, 얼마나 쓸쓸하게 끝나버렸는지….”

[사진=임영균]


“‘난 섹스를 못해. 당뇨병이라.’ 이런 말은 백남준만이 할 수 있죠. 그는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순수한 사람이었어요. 남준이가 생각하는 사랑에는 육체적인 사랑이 들어 있죠”

백남준은 일본과 독일에서 유학하며 공연과 전시의 경계를 허무는 전위 예술을 선보였다. 미국으로 건너가 아방가르드 첼리스트인 샬럿 무어만과 선정적인(?) 공연을 벌여 화제를 낳았고, 인터넷이 세상에 알려지기 전인 1974년에 이미 유럽과 아시아를 가로지르는 몽골 제국의 교역로에서 착안해 ‘일렉트로닉 슈퍼하이웨이’(전자 초고속도로)란 개념을 제시했다.

그의 아이디어를 훔친 사람은 빌 게이츠만이 아니었다. 백남준은 1996년 4월에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반신마비로 오른손만 쓸 수 있게 된 그가 2년 후 백악관 만찬에 초대됐다. 백남준이 클린턴 대통령과 악수를 하기 위해 일어서는 순간 바지가 흘러내리며 아랫도리가 드러났다. 그는 속옷을 입지 않았다.

르윈스키와의 부적절한 성관계를 조롱하는 백남준식 해프닝이었죠 그 영상을 저도 본 적이 있어요. 남준이는 똑똑하고 유머가 많았어요. 저한테 보낸 드로잉이나 사인을 봐도 어느 것 하나 똑같은 게 없죠. 르윈스키와의 관계를 조롱했다기보다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함부로 훔쳐서 선거 공약으로 쓴 일에 항의하려는 의도가 더 강했어요.

1995년 대통령 선거전에 클린턴 진영에서 ‘인포메이션 슈퍼하이웨이’(정보 초고속도로)란 공약을 내걸었거든요. 남준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그들이 훔쳤다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백남준과 얽힌 다른 얘기가 없을까요 사람들은 첼리스트였던 샬럿 무어만과 백남준의 러브 스토리에 관심이 많더군요. 남준이가 일본인 전자 기술자인 아베 슈야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유럽에서 콘서트를 하다 돈이 떨어져서 사흘간 노숙을 하기도 했고 치즈로 하루를 버티기도 했죠. 여자란 귀여울 때는 마냥 귀여워도 돈 문제로 아귀처럼 변할 때가 있다는 말도 나와요. 세계적인 예술가 자리에 오르는 길이 순탄치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죠.

프랑스 카날 풀뤼 TV에서 촬영한 백남준 영상에 선생님이 나온 걸로 아는데요 남준이가 어릴 때 살았던 창신동에서 촬영했어요. 저는 한복을 입었고 남준이는 흰 도포 차림에 갓을 쓰고 있었죠. 남준이는 숨바꼭질을 하다 다친 내 이마의 흉터 자리를 들여다보면서 카메라맨에게 그 장면을 찍게 했어요.

‘큰 대문 집’이란 주차장 간판이 남아 있어서 그것도 찍었고. 남준이네는 가을에 서리가 내릴 즈음 굿판을 크게 벌였어요. 부잣집답게 동네 잡귀신까지 다 모셔서 배불리 대접하는 한바탕 축제였죠. 그런 기억들이 남준의 작품에 많이 반영된 것 같아요.

백남준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첫 드로잉 작품을 보낸 걸로 압니다. 작년 가을에야 대중에 공개한 이유가 뭔가요 현대화랑을 통해 제 앞으로 콜라주 드로잉 50점을 보냈다고 해서 갔더니 모두 73점을 보냈더군요. ‘비디오 벽’이란 작품 앞에 서 있는 나체 사진을 보고 무안했던 기억이 나요. 남준이 말로는『플레이보이』에 나오는 가장 비싼 모델을 사서 사진을 찍었다고 하더군요.

그 뒤로 14년간 작품을 열어보지 않고 보관하다 작년 가을에야 포항시립미술관에서 전시를 했어요. 사진 주변에 “기동차를 타고 뚝섬 가자”(뚝섬에 포도밭이 있었다고 한다), “세검정으로 원족(遠足) 가자”는 말들이 적혀 있었어요. 모두 유년기의 추억을 담고 있죠. 김소월의 ‘먼 후일’이란 시도 기억나요. “잊었노라…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같은.

각별한 애정이 아니고는 받기 힘든 선물 같은데요 마흔이 다 되어 첫 수필집(『산귀래』)을 준비할 때 문득 남준이 생각이 나서 쓴 글이 ‘왕자와 공주’예요. 남준이는 ‘큰 대문 집’ 시절의 추억이 담긴 이 글을 참 좋아해서 영어와 독어로 펴낸 책에 인용을 하곤 했죠.

남준이가 귀국하고 2년 뒤에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인데, 건축가 김수근씨가 창간한『공간』이란 잡지에 남준이가 ‘뉴욕 단상’이란 글을 기고한 적이 있더군요. 1968년 8월호 잡지였어요. ‘별안간 춘(春)을 느끼어 서로 내외(內外)하다가 6·25로 헤어진 친구’가 바로 저예요. 그때 남준이는 무명에 가까웠죠. ‘남준이도 오랫동안 나를 기억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견우와 직녀도 일 년에 한 번은 만나는데

백남준은 이경희를 ‘라디오 스타’라 불렀다. 서울대 약대를 나온 이경희의 이력은 화려했다. 대학 시절 KBS 라디오의 ‘스무고개’와 ‘재치문답’에 고정으로 출연해 ‘이경희 박사’로 이름을 알렸다. 1970년에 수필가로 데뷔했고, 1994년부터 2007년까지 무려 13년 가까이 월간
『춤』에 기행 수필을 연재하기도 했다.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오랫동안 실린 ‘현이의 연극’이 바로 그의 수필이다.

하지만 이경희가 친구의 예술 세계에 처음부터 공감한 것은 아니다. 경기도 용인에 백남준아트센터가 문을 열고 이영철 관장과 인연을 맺으면서 백남준의 예술 세계에 조금씩 다가갈 수 있었다. “이영철 관장이 공들여 작업한『백남준의 귀환』같은 책은 백남준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어요.

1992년 8월, 서울 프라자 호텔에서 점심을 먹은 후 백남준이 장미꽃을 받자 “장미꽃이라면 경희에게 주어야지” 하며 건네는 중이다. 두 사람의 얼굴이 행복해 보인다.
저는 남준이가 보낸 사인이나 콜라주 드로잉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어요. 처음에는 그냥 낙서인 줄 알았죠(웃음). 훗날 이영철 관장, 김남수 연구원 같은 분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많아요.”

백남준은 2006년 1월 29일 미국의 마이애미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백남준 타계 직후 그를 기리는 지인들이 ‘백기사’를 결성했고, 이경희 여사는 그 모임의 공동 대표를 맡고 있다. 2009년 7월 백남준이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나눈 가상의 대화를 기록한 ‘태내기 자서전’ 퍼포먼스를 할 때는 국악인 황병기가 백남준 역을, 이경희가 어머니 역을 맡기도 했다.

백남준이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마이애미로 그를 찾아갔다가 갑작스럽게 헤어지지 않았나요 영화로 치면 아마 그 장면이 클라이맥스겠죠. 2004년 12월로 기억해요. 남준이는 뉴욕의 추위를 피해 마이애미에서 겨울을 보냈어요. 남준이는 내가 가겠다고 하자 호텔 이름까지 알려주면서 들뜬 기색이었어요.

그런데 막상 도착해서 연락을 하니 전화를 받지 않더군요. 막막한 기분에 아침 바다를 둘러보고 나와 노천카페를 따라 걷는데, 등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어요. 바로 남준이었죠. 그렇게 기적적으로 만났지만, 제가 전화 얘기를 꺼내는 바람에 상황이 나빠졌어요. 남준이가 흥분해서 막 소리를 지르는 걸 제가 머리를 감싸 안고 진정시켰어요. “경희, 옛날과 똑같아.” 이 말도 기억이 나요.

부인 시게코와는 불편하지 않았나요 저는 시게코를 이해해요. 참으로 대단한 여자라는 생각도 들고. 백남준과 결혼하기 위해 그 힘든 과정을 이겨내면서 자기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었잖아요. 언젠가 남준이 생일에 생모시로 홑이불을 만들어 시게코 것과 함께 선물한 적이 있어요.

시게코는 그 모시에 홍콩 실크를 받치고 한국 사람에게 바느질을 시켜 한복 마고자처럼 디자인한 코트를 만들었어요. 그 옷을 남준이가 정말 좋아했어요. 남준이가 장례식 날 저세상으로 떠날 때 그 옷을 입혀 보냈다고 하더군요.

남편분의 반응은 어땠나요?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가 친구라는 사실이 달갑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남편은 아주 유머가 많았어요. 백남준이 귀국해서 날 찾는다는 소식을 전했더니 내뱉듯이 한마디 하더군요. “미친 놈!” 하고. 남편이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있었더라면 더 불편했을 거예요.

2004년 겨울, 남준이를 보러 마이애미에 가면서 쿠바 여행을 핑계로 댔어요. “쿠바에 가려고 한다. 가는 길에 마이애미에 들를까 하는데 가도 되느냐”고 물었죠. 남편도 내 의중을 알고 있었어요. 남준이를 보러 가는 줄 알고도 가만히 있더군요. 그런 남편도 지금은 세상을 떠나고 없지만요.

백남준은 선생님께 어떤 남자였나요? 지금까지 후회되는 일은 없나요 20년 동안 남준이는 무던히도 나를 졸랐어요. 자기 전시회에 와서 봐달라고 졸랐고, 둘 사이에 얽힌 이야기를 글로 써달라고 졸랐고, TV에 같이 나와 달라고 졸랐어요. 그 부탁을 외면하기가 힘들었어요. 그 기분을 뭐라고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네요.

어린애가 엄마 치마를 붙들고 어리광을 부리는 느낌이라면 설명이 될까요? 그는 너무나 솔직하고 순수했어요. 나한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연을 맺은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었죠. 얼굴도 참 잘생겼고(웃음). 아, TV에 같이 나와달라고 한 부탁을 못 들어준 게 후회가 돼요. 남준이가 살아 있다면 틀림없이 그 부탁을 들어줬을 거예요.

이경희의 수필 ‘왕자와 공주’가 독일어로 번역돼 실린 페이지에 백남준이 사인을 했다. 물음표 하나를 뒤집어 하트 모양을 만든 것이 재밌다. 금강산 여행 중에 찍은 백남준의 가족사진도 보인다. 앞줄 왼쪽 끝이 백남준.
 취재_성재경(객원기자) 사진_이진하(studio lamp), 중앙포토, 디자인하우스 제공

김두한·연산군부터 변강쇠까지… '한국 마초의 아이콘' 배우 이대근

 '마님~'은 없었다. 한국 마초의 아이콘, 남성성의 심벌로 각인된 배우 이대근은 변강쇠도, 삼돌이도 아니었다. 검정 베레모에 검정 카디건을 걸치고, 몸에 딱 붙는 블랙진을 입고 서울 이태원에 나타난 이대근은 차승원만큼이나 도회적이고 멋졌다. 70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팽팽하고 단단했다.

지난달 대종상영화제 시상식에서도 그랬다. 공로상을 받으려고 무대 위로 저벅저벅 걸어나온 그의 외모는 젊은 후배들에게 밀리지 않았다. "영화만큼 아름다운 세상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남은 인생 영화에 바칠 것"이라며 양팔 벌려 인사할 때 객석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이대근은 사진 찍기를 싫어했다. “배우는 무대 위에서 가장 아름다우니까.” ‘전성기가 그립지 않으냐’ 는 질문에는 고개를 저었다. “20대부터 미친 듯이 바쁘게만 살아서. 쉬니까, 일이 많지 않으니까 오히려 행복해."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김두한' 시리즈로 시작해, '거지왕 김춘삼' '제3부두 고슴도치' '시라소니'에서 특유의 원투 스트레이트 펀치를 화끈하게 보여주며 호쾌한 액션 배우로 이름을 알린 배우 이대근. 사람들은 '변강쇠'를 이대근의 대명사로 여겨 희화화하기 일쑤지만, 그는 김수용의 '화려한 외출', 유현목의 '장마', 정진우의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이장호의 '어둠의 자식들' 등 문제작에 출연해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선보인 당대의 '대물'이었다. 여전히 거친 목소리의 이대근은 "변강쇠를 지금도 에로영화로 분류하고 있는 한국 사회는 무식하다"고 일갈했다. "극좌 세력이 좌지우지해온 한국 영화판"을 개탄하기도 했다.

이대근은 사랑과 예술과 자식은 무수한 훈련과 노력을 통해서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특히 배우는 노동자이자 스포츠맨이어서 한시도 훈련하지 않으면 몸과 정신이 녹슬지요." 삼돌이의 뒤뚱대는 걸음걸이, 숯가마꾼 현보의 이글거리는 눈빛, 변강쇠의 우악스러운 몸짓 등 연기는 발가락 끝까지 계산돼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얘기다.

일흔 나이에도 영화 현장에서 현역으로 뛰고 있는 이대근은 부리부리한 눈빛만큼이나 자신감에 넘쳤다. "후배들? 사각의 정글에서 만나면 날 이겨낼 수 있겠나 싶어요. 대사 한마디 없이 무대 뒷구석에 가만히 앉아서도 관객들 시선을 내게로만 향하게 할 수 있지요."

변강쇠, 에로영화 아니다

―팽팽한 외모와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평생 남의 인생 살아와서 그렇지. 매일매일 욕을 먹고 살아서 그래요. 오늘 TV에 나오면 내일 비판받고, 오늘 극장 걸리면 내일 비판받았으니까. 그래서 나와 싸우는 시간이 많지요."

―보톡스 맞는다, 오해받으시겠습니다.

"진선미(眞善美)를 이기는 게 귀(貴)예요. 귀할 귀.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아무리 까불어도 엘리자베스 여왕 옆에 서면 식모야, 식모. 이방자 여사도 생전에 얼마나 귀티가 나셨는지, 제아무리 예쁘다는 여배우들도 곁에 서면 단박에 초라해졌지. 화장품만 들이 때린다고, 성형만 한다고 아름다워진다고요? 웃기고 자빠지라고 해. 귀(貴)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을 뿐더러 마음에서 우러나야지요. 아무리 젊고 예뻐도 그가 가진 생각과 철학이 엉터리이면 결코 귀해질 수 없어요. 차 한잔 마시고 싶은 생각 안 든다고."

―젊음의 비결은 말씀해주지 않았습니다.

"내 마음이 더러워지지 않게 노력해요. 마음을 늘 백지 상태로 두려고 애를 써요. 아직도 생선 대가리 칼로 내리치는 걸 못 봐요."

―뜻밖입니다. 이대근이란 이름은 거칠고 용감한 남성성의 상징인데.

"스타란 그 시대가 지어준 이름에 불과하지요."

―300편에 달하는 영화를 찍으셨습니다. 대표작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최인호 소설에 '내 몸을 스쳐간 모든 사람은 다 아름답기만 하다'라는 말이 있어요. 모든 작품이 내겐 다 아름답고, 작품 속 인물이 모두 나보다 훌륭하지요. 그래도 꼭 이야기하라면 액션에서는 '김두한' 시리즈, '시라소니 1·2' '거지왕 김춘삼' '제3부두 고슴도치' 정도. 사극으로는 '연산군'이고, 향토물에서는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심봤다' '뽕'. 아, '감자'도 있네."
―'변강쇠'는 왜 안 꼽으십니까?

"열심히 했지. 10만 관객이 들었으니, 지금의 1000만명 수준이지요."

―배우 이대근이 변강쇠 이미지로 각인된 게 싫은가요?

"싫은 게 아니라, 그런 인식이 굉장히 오래가고 있다는 게 웃긴 거지. 변강쇠를 문학이 아니라 에로티시즘으로 보는 한국 사회는 정말 무식해. 판소리 열두마당 중 하나인 변강쇠전은 당시 위정자와 양반들의 위선, 문란한 성문화를 꼬집고 비판한 풍자 해학극이에요. 변강쇠의 아랫도리가 유난히 큰 건 일종의 불구를 상징한다고. 인권이야. 옹녀도 제도권에서 버림받은 여자예요. 그 둘이 만나 사랑을 나누고 산중에 들어가 가족을 일구려고 발버둥치지. 마지막 장면에 변강쇠가 장승을 붙들고 막 싸우잖아요? 결국엔 장승을 도끼로 찍어 불태우고. 장승은 곧 제도를 의미한다고요."

그거, 그거, 괴롭지 않겠습니까

이대근이 강수연과 열연한 영화 ‘연산군’(1987년).

―영화를 그렇게 이해하는 대중이 많지 않다는 게 문제 아닙니까.

"해학이 뭔지도 모르고 그런 소리들 하지요. 영화 한번 봐봐. 내가 윗도리 벗고 뭐했나. 어떻게 그게 섹스물인가. 타락의 시대라 그래요. 비아그라가 판을 치고, 남자의 정력이 세면 좋다고 하고. 병신 같은 세상이지. 여자를 어떻게 아랫도리로 잡습니까. 남자의 넥타이가 뭘 상징하는 줄 알아요? 뱀이야. 혁대도 뱀을 상징하지. 정력을 아래에서 한 번 묶고, 목에서 한 번 묶어야 이성을 갖게 돼요. 사랑은 이성으로 하는 거라고."

―개인적으로는 영화 '변강쇠'가 좀 지루했습니다. 절벽에 선 변강쇠가 폭포수처럼 소변을 쏟아내는 장면에서 배꼽 쥔 것 말고는 클라이맥스나 대단한 감동이 있지는 않더군요.

"연출력은 개판이었지. 끝내고 나서도 감독한테 이걸 작품이라고 만들었느냐고 막 화를 냈어요. 그게 뭐 대박이 난 셈이지만. 그 와중에 감독이 안기부에도 끌려갔어요. 원판에 장승이 처음엔 사또로 오버랩돼 나오거든. 현 정부에 대한 저항이냐면서 그 한 컷을 잘라냈지."

―변강쇠 속편에는 출연하지 않으셨지요?

"2편을 한다길래 감독한테 에로영화 소릴 듣고 또 찍을 거냐며 손을 내저었지요. 개런티를 더블로 준다고 했지만 안 했어요. 봉변은 또 얼마나 당했는지. 목욕탕 가면 아랫도리 훔쳐보는 사람은 왜 그리 많아. 그러니까 전국노래자랑 수준이 딱 우리나라예요. 고층 아파트에 살고, 더운 물 쓴다고 떵떵거려도 문화 인식 수준이 그 정도인 거예요."
―이미숙과 주연한 영화 '뽕'은 영화평론가협회상을 받았습니다.

"나도향의 원작을 가지고 만들었으니까. 김동리 등 당시는 모두 한(恨)의 작품이야. 그런데 무식한 사람들이 뽕도 에로티시즘이라는 거지. 명작이라고는 읽어보지도 않은 거야. 반항하면 죽고, 저항하면 병신 되던 일제시대의 한을 담은 거예요 그게."

―'뽕'에서는 안협댁(이미숙 분)한테 헛물만 켜는 삼돌이로 열연합니다. 결국 단 한 번도 애정 신 없이 영화가 끝나더군요. 섭섭하셨겠습니다.

"섭섭은 무슨. 애정 신 찍어봤자 배우들은 벽만 바라보지, 호강하는 건 풀샷으로 그 장면 찍는 카메라맨, 스태프들이라고(웃음). 그리고 여배우들은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치고 촬영했지만, 난 팬티 한 장 벗어본 적 없어요. 즐거운 게 다 뭐야. 여배우 히프가 내 앞에 턱 와 있고, 감독은 좀 더 실감 나게 연기하라, 예술로 승화시키라고 다그치고…. 그거, 그거, 괴롭지 않겠습니까?"

아름다운 배우, 정윤희

―정윤희, 이미숙, 원미경, 강수연에 이르기까지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과 연기했습니다.

"특권이었지요. 정윤희가 으뜸이었어요.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찍을 때 산속 움막에서 촬영하는데, 그 움막 빌려준 노부부 살림살이가 숟가락 두 벌밖에 없어요. 14인치 TV를 사서 선물하더라고. 정말 착했지요. 여성의 아름다움은 모성 플러스, 아이처럼 맑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거예요."

―강수연은 까마득히 어린 후배였습니다.

"'연산군' 촬영했던 기억이 나요. 나랑 강수연은 목욕통에 들어가 앉아 있고 우리 주위를 궁녀 36명이 맨몸으로 서 있는 장면. 강수연이 한창 자기가 제일 예쁘다고 우쭐할 때인데, 내 눈엔 엑스트라에 불과한 그 배우들이 강수연 못지않게 아름다워 보입디다. 미의 기준이 뭐예요? 세상에 자기와 똑같은 사람은 자기 하나고, 그래서 최고의 미녀일 수도 있고 최고의 추녀일 수도 있지요. 서로의 독창적인 아름다움에 반해 사랑을 하는 거 아니겠어요?"

―70~80년대 이대근에게 열광하는 여성이 많았습니다.

"여자들 보기에 내가 좀 착하게 생겼대. 우악을 떨어도, '넌 내 말 한마디면 꼼짝을 못 한다' '손 들고 서 있어, 하면 서있을 것 같이 생겼다' 그래요(웃음). 사랑이 좀 있는 거처럼 보이나 봐. 드라마 '역풍' 찍을 때는 우체부가 타이탄 트럭으로 내 팬레터를 싣고 스튜디오로 들어왔어요."

―신성일씨와는 라이벌이었습니까.

"최무룡, 신성일을 뛰어넘어 이대근의 독주 시대가 열렸지요. 그러고 한참 있다가 안성기 시대가 온 거고. 라이벌이 없으니까 1년에 100개씩 시나리오가 들어오고 매니저가 그중 30편을 골라서 가져오면 내가 17~18편을 확정했어요. 아침 8시부터 밤 12시까지 살인적인 스케줄이 기다리고 있었다고요. 의상 입고 벗는 게 지긋지긋할 정도로. 요즘 스타들은 스타도 아니야. 스타라면 적어도 10년 세도는 해야지요. 난 30년 했다고. 이대근이 세금 제일 많이 내고 그다음에 이주일이 따라왔지요."

―스캔들도 꽤 있었을 것 같습니다.

"살아가면서 남자가 아내 이외에 사랑을 느끼는 여자가 없었다면 거짓말이지요. 인간이니까. 하지만 내게도 손자 손녀가 있고, 상대도 육십은 족히 넘었을 테니 각자 추억으로 삼고 사는 거지요. 그때는 아프고 괴로웠지만 지나고 보면 아름다운 추억이에요."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정지하면 썩어요. 그게 사랑의 최대 약점이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죽는 날까지 노력하고 정지하지 않고 사랑해야 굴러가는 게 사랑이에요. 하늘에서 툭 떨어진 순간만 좋아라 하고 시련이 닥쳤다고 정지하면 사랑은 실패한다고. 그래서 어머니의 사랑이 위대한 거예요."

―이대근은 마초입니까.

"나는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사내는 여자를 보호하고 책임질 능력이 있어야 하고, 여인은 그 남자를 받아주고 위로하고 아이처럼 보살펴야 아름답지."

액션? 목숨을 걸어야지

영화 ‘가루지기’(1988년)에서 다시 변강쇠를 연기했다. 우람한 풍채를 연출하기 위해 양철갑옷을 몸에 두른 뒤 의상을 입었다.

이대근은 변강쇠보다는 '한국판 앤서니 퀸'이라는 수식에 더 어울리는 배우다. 서라벌예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뒤 정통 연극배우로서 발군의 실력을 보인 작품이 '노틀담의 꼽추'다. 미국 영화에서 꼽추 역을 맡은 앤서니 퀸 못지않은 연기였다고 호평을 받았다. 1963년 KBS 7기 탤런트 공채를 거쳐 MBC로 자리를 옮긴 건 순전히 '배가 고파서'였다. '수사반장' 첫 회의 마약 사범으로 등장하는 이가 이대근이다. 영화는 최무룡 감독의 '제3지대'로 데뷔했지만 신상옥이 제작한 '김두한'에 출연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영화만 300편 가까이 찍을 만큼 이대근의 영화에 대한 사랑은 강렬했다. "TV 드라마는 영화를 위한 훈련용"이라고 할 만큼 영화를 최고의 예술로 자부했다.

―연극 '노틀담의 꼽추'를 초연했습니다.

"연극으로서는 세계 초연이었어요. 명동 국립극장이 터져나갔지. 극단마다 서로들 날 데려가려고 했는데, 배가 고파서 '바보상자' 속으로 들어갔어요. 연극판에서 욕했지만 생업이 안 되는 걸 어떡해. MBC로 와서는 월화수목 매일 서로 다른 드라마에 나갔어요. 출연료가 쌀 두 가마니값이었으니 쏠쏠했지요."

―이대근을 최고의 액션 배우로 추억하는 영화 팬이 의외로 많더군요.

"300편 영화 중 절반이 액션이야. 김두한, 김춘삼, 시라소니…. 한국의 '오야붕' 역할은 다 했지. 김두한이 한창 인기일 때 부산 촬영을 갔더니 깡패 30명이 둘러싸. '네가 싸움을 그렇게 잘해? 어디 붙어보자' 하대요. 감독이 득달같이 달려와 '이건 영화예요, 영화' 하고 달래서 겨우 돌려보냈지요."

―대역을 쓰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때 액션은 작품이었어요. 목숨을 건 진짜였지. 유리도 뚫고 지나가고, 낭떠러지에서 치고받고 싸우고, 바다에도 뛰어들고. 주먹 신도 상대의 주먹이 날아오기 한참 전에 피하면 폼이 안 나요. 코앞을 스치기 직전에 날쌔게 피해서 한 방을 날려야 그림이 예쁘지. 그게 이대근의 원투 스트레이트야. 요즘처럼 마구잡이로 잔인한 거만 보여준다고 액션이 아니라고."

―강인한 체력, 남성성은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으신 모양입니다.

"자유당 시절 대한청년단 간부로 활동하실 만큼 악질 건달을 다스리는 공포의 건달이었죠(웃음). 내가 무녀독남인데, 어릴 때부터 태권도, 복싱, 레슬링, 기계체조를 섭렵했어요. 날아다녔지. 고등학교 때는 트럼펫을 배워서 군 복무할 때 국립묘지 초대 나팔수로 진혼곡도 많이 연주했어요. 제대한 뒤 아현동 시장에서 아버지의 야채 장사를 거들면서 시장 내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고 배운 게 연기에도 큰 도움이 됐지요."

―전성기가 지난 뒤에는 한국영화인총연합회 등에서 간부로 활동하셨지요.

"내가 이승만 정권부터 지금까지 대통령을 다 겪었는데, 그 사이 우리 영화계에도 좌파 우파가 생겨납디다. 좌파, 좋지요. 비판할 수 있어. 그런데 극좌는 안 돼요. 이게 선배고 뭐고가 없어. 저희끼리 똘똘 뭉쳐서 영화진흥기금 다 해먹고, 자기네 반대하는 사람들은 영화도 못 하게 해요. 그 돈 가지고 전부 좌파 영화 만들었잖아요? 수익금으로 정치자금 만들고. '바다이야기' 총책이 누구예요? 예술가는 그렇게 살면 안 돼요. 타협하면 안 된다고. 열흘 보는 꽃이 없고 3대 가는 부자 없어요. 영화는 커피 팔듯 하는 산업이 아니에요. 정신 산업이라고."

―60대에 오랜만에 주역을 맡은 '이대근, 이댁은'은 배우 이대근을 새롭게 보여준 작품이었습니다. 흥행은 별로였지만 노년의 외로움과 가족의 소중함을 도장집 노인으로 분해 실감 나게 연기하셨지요.

"내가 해온 작품 중 열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좋은 영화였죠. 한복을 입고 70대까지 연기해야 하니까 그땐 운동도 안 했어요. 근육이 보이면 안 되니까."

―그 작품으로 2007년 대종상 영화제 남우 주연상 후보에도 오릅니다.

"내가 연기로는 누구와 붙어 져본 적이 없는데, 무슨 변고인지 주연상이 '라디오 스타'의 안성기한테 갑디다.(웃음)"

―요즘 젊은 영화인들 보면서 어떤 생각 하십니까.

"중이 승복을 입었다고 해서 다 중이 아니에요. 꽃미남이 다 뭐예요? 하룻밤을 자더라도 목숨을 걸고 싶은 남자여야 매력적이지. 안 그래요? 무엇보다 철학이 없어. 그 시대를 직시하면서도 멀리 보는 눈이 있어야 예술인 아닌가."

정통 연극배우 출신인 이대근은 다양한 캐릭터로 연기 변신을 해왔다. 왼쪽부터 ‘거지왕 김춘삼’(1975년), ‘ 대의’(1976년), ‘ 이대근, 이댁은’(2007년).

내 인생은 아름다웠다

―원조 기러기 아빠입니다. 80년대 초 부인과 세 딸을 미국으로 보내셨지요.

"77년엔가 미국에 갔더니 할리우드가 우리보다 100년을 앞서가고 있더라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아래로 펼쳐진 뉴욕을 내려다보며 내 딸들은 이런 문화를 보고 자랐으면 좋겠다 싶었지요."

―고생도 많이 하셨겠습니다.

"처음 들어가서는 하도 막막해서 와이프랑 붙잡고 울었어요. 후회도 엄청 했어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가족과 떨어져 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지만 때는 늦었고."

―그래도 세 딸을 미국에서 훌륭하게 키우셨지요. 큰딸, 둘째 딸은 약학 박사로 FDA 고위 관료라고 하던데요.

"큰딸이 미국식품의약국(FDA) 14급 공무원이에요. 15급이 장관이니까 차관쯤 되는 거죠. 딸들을 아내가 아주 엄하게 키웠어요. TV는 두드려야 나올 정도로 고물을 가져다놓고 그나마 하루에 1시간 이상 안 보여줬어요. 자명종 놓고 스스로 일어나도록 하고, 늦잠 자면 학교를 아예 안 보내요. 미국에서도 회초리 들고 키웠어요. 하루 4시간 이상 못 자게 해서 박사 학위 따게 한 셈이지요(웃음)."

―사위들은 마음에 드십니까.

"절대로 내 딸들을 배신하지 마라, 책임져라, 보호 관리하라 다짐을 받았지요. 그거 못 하면 사내가 아니야."

9일 서울 캐피탈호텔에서 배우 이대근이 자신의 연기 인생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스캔들은 물론 이혼도 두세 번 해야 '배우 이대근'에게 어울릴 법한데, 한 여인과 평생을 해로하셨습니다.

"나보다 공부 잘했으니 머슴처럼 섬겨야지.(웃음) 떨어져 있어도 매일 아침저녁으로 통화해요. 별일 없나? 나는 잘 있으니 오케이. 애들 전화 왔나? 오케이. 사랑은 정지하면 안 된다고 아까 얘기했지요? 와이프는 내가 모자라는 게 많은 남자라는 걸 알아요. 나는 영화 한 가지만 생각하고 살았으니까.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른다고. 자동차 오일 가는 것도 모르고 사기도 많이 당하고. 하지만 내가 착한 사람이라는 걸 아내는 알아요. 불현듯 가족이 그리워지면 바로 비행기표 끊어 워싱턴으로 날아가는데, 나 좋아하는 음식 한 상 차려놓고 기다리지요. 우리 와이프가."

―사나이 이대근도 눈물을 흘립니까.

"나에게 최고의 사랑을 주셨던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울었지요. 편찮으실 때 어머니 소변을 받아내는데 냄새가 그렇게 날 수가 없어요. 내가 인상을 찡그리니까 어머니가 껄껄 웃으시면서 그래요. '나는 네 기저귀가 얼마나 구수하던지 코에 대고 킁킁 맡기까지 했단다'. 그 말씀에 내가 무릎을 꿇었어요. 나는 뱀의 혓바닥이요, 입술로만 어머니를 사랑한 거였지요. 돌아가신 뒤 6년 동안 1주일에 한 번씩 꽃을 들고 어머니 묘에 갔어요. 나도 부모가 되어 보니 자식은 뼈 국물까지 짜서 사랑해야 하는 거더라고요."

―영화만큼 아름다운 세상을 보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영화와 인생이 똑같아요. 우주라는 공간, 지구라는 무대에서 해와 달이란 조명을 받아가면서 사랑이라는 테마로 누구나 행복하게 살려고 불철주야 홈드라마를 연기하는 게 우리 인생사지요."

―다시 태어나도 영화를 하시겠습니까.

"그건 다시 태어나 봐야 알겠어요. 액션영화 찍으면서 죽을 고비를 하도 많이 넘겨서.(웃음)"

―이대근은 명배우입니까.

"죽어서도 생각나는 배우가 명배우이니 내가 죽은 다음에나 알게 되겠지요. 신상옥 감독이 아무리 천재 배우라도 훈련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 노동자처럼, 스포츠맨처럼. 영화는 TV 연기의 300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해요. 영화는 최고의 예술이었고, 그래서 내 인생은 아름다웠지요."

뜨거운 교미도 DNA가 시킨 일이다

  • 김수혜 기자
  •  

    노랑과실파리, 복잡한 교미 과정순서대로 진행
    "DNA는 결정한다… 육체적 특징은 물론 행위·취향까지…"

    corbis/토픽이미지

    행동은 어디까지 유전될까?

    야마모토 다이스케 지음|이지윤 옮김
    바다출판사|205쪽|1만2000원

    결론부터 얘기하면 솔직히 저자도 답은 모른다. 알았으면 책 제목이 물음표로 끝나지 않았다. 요컨대 '답이 없는 얘기'인데 그럼에도 흥미롭다. 호모사피엔스가 지구상에 출현한 지 20만년이 됐지만 진화론과 유전학을 깨친 건 길게 잡아도 두 세기 안팎의 일이다. 인간은 이제 막 자신이 누구이며 왜, 어떻게 이 땅에 존재하게 됐는지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저자는 세계 최초로 파리 유전자에서 '게이 유전자'를 찾아냈던 행동유전학자다. 과학을 모르는 일반 독자를 위해 이 책을 썼다. 그는 자연선택을 주장한 찰스 다윈(1809~1882), 유전법칙을 발견한 그레고어 멘델(1822~1884), 돌연변이를 확인한 휘고 드브리스(1848~1935)에서 출발한다. 진화론과 유전학이 어떻게 발달해왔고, 어디까지 알아냈는지 일반인 눈높이로 쉽게 풀어나간다.

    책의 앞쪽 절반은 교양을 위한 독서로 좋다. 본격적으로 독자의 마음에 궁금증이 샘솟는 건 뒷부분 절반이다. 각종 동물 연구를 통해 육체적 특징은 물론 행위와 취향까지 상당 부분 DNA에 적혀 있다는 사실이 속속 확인되고 있다고 저자가 주장하기 때문이다.

    가령 노랑과실파리는 교미할 때 ①수컷이 암컷을 쫓아간 다음 ②앞다리로 암컷을 애무하며 좌우 날개를 차례로 한쪽씩 부들부들 떨어 독특한 '왱' 소리를 내고 ③암컷이 이에 혹해 멈춰섰을 때 ④농밀한 애무를 거쳐 20분간 짝짓기한다. 미물이 수행하기엔 꽤 복잡한 행동 패턴이건만 노랑과실파리는 일체의 학습 없이 매번 정확하게 같은 순서로 교미를 완수한다. 노랑과실파리의 DNA에 들어있는 '피리어드(period) 유전자'가 이런 패턴을 작동시킨다.

    노랑과실파리와 가까운 친척 중에 노랑초파리가 있다. 외양이 흡사해 학자들도 왕왕 헷갈린다. 자기네끼리 드물게 야생에서 잡종이 생기긴 하지만, 대다수 암컷은 따로 학습하지 않아도 동종(同種) 수컷의 구애 소리를 식별해 선택적으로 교미에 응한다. 노랑과실파리 수컷과 노랑초파리 수컷은 '왱' 소리의 음파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도 피리어드 유전자의 작동이다.

    실제로 미국 브랜다이스대학 연구팀이 노랑과실파리와 노랑초파리의 해당 유전자 일부를 바꿔치기한 결과 노랑과실파리 수컷이 흡사 노랑초파리 수컷처럼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떨까? 핀란드 연구팀이 '아침형 인간'이 유독 많은 가계(家系)를 대상으로 아침형 인간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DNA를 비교해보니 아침형 인간은 피리어드 유전자 일부가 보통사람과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저자는 한발 더 나아가 노랑초파리 수컷의 유전자를 조작해 돌연변이 수컷을 만들어냈다. 이 수컷은 겉보기에 기운이 넘치는데도 암컷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저자는 성욕이 없는 수컷을 만들어낸 줄 알고 일본말로 '사토리'(깨달음)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추가 연구 결과 해당 수컷은 깨달은 게 아니라 단순히 '다른 대상'에 꽂힌 것뿐이었다. 암컷은 본척만척하던 사토리가 다른 수컷을 보자 노랑초파리 수컷 특유의 구애 행동을 명확하게 보인 것이다.

    오스트리아 연구팀이 바통을 이어받아 같은 방식으로 노랑초파리 암컷의 유전자를 조작해봤다. 해당 암컷은 마치 수컷처럼 다른 암컷을 향해 구애 행동을 보였다. 이후 네덜란드에서 동성애자와 이성애자는 뇌 신경세포 구성이 다르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멈춰선다. 아직 우리는 인간에 대해 밝혀내지 못한 게 많다. 유전자 수준에서 행동원리를 밝혀내는 '분자생물학'이 학문으로 정립된 건 극히 최근이다. 분자생물학이라는 용어 자체가 1990년에 처음 쓰였다. 인간의 DNA 속에는 아데닌·구아닌·시토신·티민 등 네 종류의 염기성 물질이 30억개 들어있다. 일렬로 늘어놓으면 2m 길이다. DNA 속 염기성 물질이 배열되는 순서야말로 유전 정보 그 자체다. 인간의 행위와 취향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유전이라고 그 속에 적혀 있는지 우리는 조금씩 파악해가는 과정에 있다.

    [문갑식의 세상일기] 'B보이 출신'이 '화난 젊은이'들에게 말하다

  • 문갑식 선임기자
  •  
  •  중1 때 아버지 여의고 3년간 'B보이' 생활
    춤 실력 늘수록 성적 뒷걸음
    고2 말 나는 결심했다 '다시 공부를 시작하자'
    삭발 1년 후 대학 합격 그 1년 후엔 최연소 회계사
    '화난 젊은이'들 심정 이해해
    아프니까 청춘이지만 포기할 수 없는게 우리 삶
    문갑식 선임기자
    "지미 포터는 사탕 파는 시장 노점상(露店商)이다. 대학 졸업 후 번듯한 직장은커녕 하류층으로 몰린 처지에 좌절한 청춘이다. 그에게 사회는 부조리(不條理)다. 악덕감시관은 상인을 쥐어짠다. 상인들은 인도인을 차별하며 화를 푼다.

    그의 분노는 고스란히 아내 앨리슨에게 향한다. 군상(群像)의 악다구니가 사라진 밤, 트럼펫을 부는 게 그의 유일한 낙(樂)이다. 그렇다고 그게 구원이 되진 않는다. 오히려 순종하는 처(妻)에 대한 지미의 학대는 더 심해져만 간다…."

    영국 극작가 존 오스본의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는 우울하다. 1956년 이 희곡이 발표된 뒤 그를 비롯한 일군(一群)의 작가들을 '앵그리 영맨(Angry Young Men)'이라 불렀다. 그들은 2차 세계대전 후 기성 권위에 도전하는 영국 젊은이들을 글감으로 삼았다.

    1929년 태어난 오스본의 삶은 희곡의 주인공 지미와 비슷했다. 상업미술가인 아버지가 요절하자 술집에서 일하던 어머니가 그를 길렀다. 공부는 16세 때, 배우의 꿈은 지방극단을 돌다가 끝났다. '앵그리 영맨'은 그 자신이었던 것이다.

    비슷한 시기, 미국엔 '비트 제너레이션(Beat generation·패배한 세대)'이 등장했다. 그들 아버지뻘로 '로스트 제너레이션·Lost generation·잃어버린 세대)'이 있었다. 최근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점령하라(Occupy)! 세대'의 뿌리는 이렇게 깊다.

    중1 때 아버지를 여읜 서준혁(26)씨의 사정도 오스본이나 지미와 다를 바 없었다. 가방 만드는 회사 사장이었던 아버지는 IMF 외환위기 때 다 말아먹었다. 그 후 취업했지만 남긴 재산보다 빚이 더 많았다. 네 살 위인 형은 가사(家事)에 짐이었다. 어머니가 부동산중개사·미용사 자격증을 따며 안간힘을 썼지만 돈이 안 되긴 마찬가지였다. '장롱 면허'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한 탈출구는 '비보이(B-boy)'가 되는 것뿐이었다. 중2 때 그는 그 길로 들어섰다.

    서씨는 초등학교 때 재미삼아 시작한 춤에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춤 실력이 늘수록 중상위권이던 학교 성적은 뒷걸음질쳤다. 그는 "반(班)에서 저보다 공부 못한 아이들이 한자릿수였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말렸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중2 겨울방학부터 그는 병역기피 의혹으로 더 유명해진 MC몽(본명 신동현)이 속한 '피플크루'의 백댄싱팀이 됐다. 최연소였다. 매일 아침 8시 서울 대방동 연습실에 가서 청소를 한 뒤 밤 9시까지 땀을 흘렸다. 방송 출연을 앞두곤 밤도 새웠다. 끼니는 보통 김밥·라면이었다. 방송에 나가면 2만원씩의 수당을 받았다. 남는 시간엔 오토바이를 끌고 피자 배달도 했다. 만일 고등학교 2학년 때 새 삶을 결심하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도 마룻바닥에 머리를 비벼대고 있었을 것이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어느 날 갑자기 '이대로 살면 어떻게 될까,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결론은 '아니다'였어요. 다시 공부를 하자고 마음먹었지만 제 상황이 한심했어요. 수학은 인수분해조차 풀지 못할 정도였어요. 영어는 더 엉망이었고요."

    고2 겨울방학 때 그는 머리를 빡빡 밀었다.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노량진 학원에서 단과(單科)반을 들었고, 새벽 3시까지 닥치는 대로 문제집을 풀었다. 미친 듯 공부의 숲을 헤매자 성적이 올랐다. 그는 숭실대 경영학과에 합격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은 사실인 모양이다. 중학 시절엔 춤추고 고교 때는 학교 응원단장이던 그가 지금도 못 잊는 선생님이 두 분 있다. 월촌중 3학년 때 담임이었던 정혜원 교사는 방황하는 소년의 몇 안 되는 말 상대였다. 양정고 3학년 때 담임이었던 백승문 선생님은 그가 반장에 나서겠다고 하자 "믿겠다. 잘해보라"고 격려했다. '공부도 못하는 게'라는 냉소를 예상했던 그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반장이 된 그가 얻은 것은 감투가 아니라 "하면 된다"는 자신감이었다.

    서준혁은 대학생 때도 머리를 밀고 다녔다. 삭발이 그에겐 제의(祭儀)였다. 이번엔 공인회계사가 목표였다. 2학년 때 그는 1004명 중 최연소로 합격한 뒤 운전병으로 군 복무를 마쳤다. 대학 졸업 때 그는 '인문사회계 수석' 타이틀을 추가했다.

    스물여섯 서준혁에게선 사회나 어른에 대한 불만이 나오지 않았다. "어떤 애들은 입사원서를 100장 넘게 써도 안 되고 누구는 대여섯 군데씩 합격합니다. 번듯한 직장을 잡으려는 욕심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데 그게 결국 노력의 문제거든요."

    요즘 우리 사회를 강타하는 '화난 젊은이'들의 문제를 개인의 노력 부족만으로 요약할 순 없을 것이다. 구조적 결함도 있고, 어른들이 제대로 못 보살핀 잘못도 있고, 부자(富者) 정권의 한심한 작태가 인내하던 그들을 폭발시킨 탓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트럼펫이 지미의 삶을 못 바꾸듯 삼류 떨거지들의 독설(毒舌) 향연이 화난 젊은이들의 위안일 순 없겠다. 소설가 겸 언론인 민태원이 '그들은 순진한지라 감동하기 쉽다'고 예찬했지만 말이다. 그것은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가 최무룡·박노식 주연의 동명(同名) 짝퉁영화와 구별돼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누구 말마따나 아프니까 청춘이다.

     

     

    - 인왕산 鶴학巢소島도에서 최범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