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만년 원형 간직한 자연의 스승…스승사라지면 행복도 사라져"
  • [환경지킴이] 캐나다 '뱀필드 숲'을 지키는 탁광일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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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 박정희 흉내로는 나라경제 일굴 수 없다

    [중앙일보]입력 2011.12.07 01:27 / 수정 2011.12.07 14:22

    이헌재 “묵언 기간 끝나” … 외환위기 후 14년 만에 입 열다
    최근 2년간 한국금융 10년 후퇴
    재정적자 해법 안 보이고 … 외환위기 넘긴 경험 공유할 때

    14년 만에 입을 연 ‘위기 해결사(Crisis Shooter)’. 1997년 외환위기 극복을 이끈 이헌재 전 재정경제부 장관이 지난달 29일 서울 통의동 사무실에서 당시를 돌아보고 있다. 그는 외환위기 때 DJ 정권의 금감위원장·재경부 장관으로 최전선에서 구조조정을 지휘했다. 노무현 정권 땐 카드 사태 진화를 위해 다시 재경부 장관직을 맡기도 했다. [최승식 기자]

    ‘구조조정의 전도사’ ‘용병 소방대장’ ‘야생마(재벌) 조련사’….

     이헌재(67)란 이름에 붙는 수식어다. 경제 관료로선 아주 많은 편이다. 그만큼 유명세를 치렀다는 얘기다. 그는 스스로를 “약간 개혁 성향이 있지만 전반적 보수”라고 말한다. 시장주의자요, 성장을 중시하는 친기업 성향이다. 그러나 막상 그가 경제 정책 총수로 활약한 건 DJ·노무현 정권 때다. 운명은 그를 취향과는 전혀 다른 길로 이끈 셈이다. 그만큼 갈등과 사연도 깊고 많았을 터다. 그렇지만 그는 지금까지 굳게 입을 다물어왔다. 그는 평소 공직자는 자신의 일에 대해 일정기간 침묵하는 ‘묵언(默言) 기간’이 필요하다고 말해왔다. 기간은 한 정권이 지날 정도가 적당하다고 봤다. 그런 그가 비로소 중앙일보를 통해 입을 열었다. 외환위기 후 14년 만이다. “이제야 묵언 기간이 끝났다”며.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14년 전 외환위기 때 금융·기업 체질을 확 바꿨습니다. 그런데도 걸핏하면 위기가 재연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당시 개혁은 잘됐어요. 그러나 위기 극복 이후 프로그램이 없었지. 이 나라의 경제 모델 중 성공한 거라곤 박정희 모델 하나밖에 없어. 역대 정권이 죄다 그걸 따라 했지. 그러나 60년대 체제, 박정희 흉내론 나라 경제를 제대로 일굴 수 없어. 세계는 복잡해졌고 금융·기업·외환은 동시다발적이 됐지. 달라진 세상, 새로운 경제에 맞는 새 모델이 나와야 해요.”

     -군사정권은 몰라도 DJ·노무현 정권까지 ‘박정희 흉내’를 냈단 말인가요.

     “박정희 흉내 내기의 원조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야. 노태우 정권도 똑같이 하다가 북방 외교 하나 더했지. 김영삼 정권도 마찬가지. 개방이란 개념을 추가하긴 했지만 관리는 못했어요. DJ는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를 합리적·이념적 어젠다로 세팅하는 데 성공했지. 이념은 진보했지만, 방식은 박정희식 60년대 체제를 답습했어. 노무현은 서두르고 미숙했지. 그 바람에 주저앉은 거야. MB는 콘텐트와 방식까지 ‘박정희 따라하기’야.”

     -박정희 모델이 뭐가 나쁩니까.

     “개발 독재의 특징은 선택과 집중이야. 삼성·현대 밀어줘 대표선수로 키웠지. 그것도 밀실에서. 에너지·자원·시간 낭비는 줄였지만 부작용이 왔어. 닫힌 사회가 된 거야. 사회는 닫히면 썩지. 요즘 젊은이들 불만도 그런 것 아닌가. 닫힌 취업, 닫힌 공부, 닫힌 인생…. 빨리 열린 사회로 바뀌어야 해요.”

    -‘준비된 대통령’ DJ도 박정희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얘깁니까.

     “DJ는 가장 준비를 많이 한 대통령임이 틀림없어. 집권 초·중반까지는 아주 잘했지. 효율적·대승적·통합적 정치를 했어. 그러나 집권 후반기엔 치열함이 떨어졌지. 특히 용인(用人)에 힘들어했어. 워낙 청탁이 많고 봐줘야 할 사람이 많았다고 해. 설송 스님의 전언에 따르면 2000년 청와대에서 독대한 DJ가 ‘딴 정책은 어떻게든 되는데 사람 (써달라는) 요청은 물리치기 정말 어렵더라’고 털어놓았다고 해. 그 말을 할 때의 DJ 표정이 어찌나 처연하고 애틋하던지 듣던 설송 스님은 ‘눈물이 핑 돌았다’고 하더군.”

     -설송 스님이 누굽니까.

     “경북 봉화 현불사의 큰스님이야. DJ의 대통령 당선을 예언했지. DJ는 물론 측근들과 두루 친했어. 재작년 입적했지. 나와도 야인 시절부터 오랜 인연이 있었어요.”

     그는 정책 구상이 취미인 사람이다. 경제나 위기를 보는 시선도 남다르다. 현 정부에 대한 고언(苦言)도 직설화법으로 던졌다. 그는 “최근 2년 새 한국 금융은 10년 후퇴했어. 신한금융·저축은행 사태에서부터 우리금융·산은지주 문제까지, 다시 따라잡기 불가능할 정도야”라고 말했다.

     -MB 경제·금융 정책이 그렇게 잘못 처방됐나요.

     “4대 강이 대표적이지. 올해부터 당장 수질관리 비용이 문제될 거요. 재정 적자도 해법이 없어 보이고. MB는 균형 재정 이루고 싶어하지만 대안이 잘 없어. 재정 잘 모르는 장관, 잘못된 인사를 바꾸지 못하고 그대로 가고 있거든. 이 정부의 전반적 무력함이 다 여기서 비롯됐어요.”

     그가 ‘묵언’의 금제를 깨기로 한 건 올 3월 초. 막 유럽 재정위기가 커져갈 때였다. 그는 “만사유전이라더니, 또 심상찮은 조짐이 느껴졌다”며 “외환위기 극복의 기록을 하루빨리 남겨야겠다”고 말했다.

     -기록을 왜 합니까. 혹 다음 정권에 한 자리 노리시기라도 하는 겁니까.

     “우선 개인적 정리가 필요할 때가 됐어요. 국가 경제로 봐도 타이밍이 맞는 것 같고. 이제는 위기가 일상화하는 ‘뉴노멀’의 시대야. 경험이 있으면서도 공유하지 않아 (국가가) 실수를 되풀이해선 곤란하잖아.”

     -외환위기 후 14년이 지났습니다. 그때를 돌아보는 게 지금 적절합니까

     “요즘 유럽이 많이 어려워. 어디서 본 듯한 장면도 많이 나오지. 그런데 우리가 겪었던 것과 좀 달라. 예컨대 그리스를 보면서 사람들이 물어요. ‘그때 우리는 왜 그렇게 일방적으로 당했나’ ‘그리스가 우리랑 다른 게 뭔가’. 그리스는 우선 수출 산업이 별게 없어요. ‘배째라’로 나오면 돈 빌려준 이들만 괴로워. 돌이켜보면 우리도 모라토리엄을 각오했어야 했어. 당시 그런 주장도 하고, 계산도 해봤지. 우리도 견딜 만했어. 그러나 DJ 정부는 ‘금리 불문, 어떻게든 갚는다’ 쪽으로 외채협상 가닥을 잡았지. 복기해보면 아쉬운 부분이야.”

     -누구한테 들려주고 싶은 겁니까.

     “경제 관료, 국정 책임자는 물론 국민 모두에게. 경제는 생물이자 역사야. 돌고 돌지. 경제정책도 그래. 다 생장의 과정을 겪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정책은 없어. ‘과거에서 배워 미래를 살찌운다’가 정답이야. 이런 걸 얘기하고, 알려주고 싶어요.”

     -갑자기 든 생각입니까.

    이정재 경제부장
     “나와 우리 세대는 복 받은 세대야. 단군 이래 최대 수혜자들이지. 하루가 지날수록 더 부유해졌어. 최악의 빈곤에서 시작해 기적의 ‘코리안 드림’까지 맛본 거야. (뭐 물론 약간의 반론은 있겠지만)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되는 세대였어. 아메리칸 드림 저리 가라지. 그런데 우리 다음 세대는 아니야. 우리보다 불행해. 일할 기회조차 잡기 어려워요. 고용 없는 성장 때문이지. 대기업들이 글로벌화하면서 글로벌 인재를 쓰다 보니 되레 국내 고용은 줄어든 거야. 국제 경쟁력 높이자고 한 구조조정이 우리 다음 세대 일자리를 없앤 셈이지. 어쩌면 우리 누린 세대 모두가 빚쟁이인 셈이지. 그 빚을 갚고 싶어요.”

     -어떻게 갚나요.

     “해법을 제공해야겠지. 지금 세대, 다음 세대가 잘살고 나라가 부유·부강해질 해법.”

     - 그런 게 있나요.

     “찾아야지, 지금부터. 없으면 만들어 나가야지. 우리 국민은 물꼬만 터주면 알아서 잘 헤쳐나가요. 미래를 위한 물꼬가 필요한 시점이야. 내 경험이 그 물꼬를 트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해.”

    이정재 경제부장

     [최보식 칼럼] 내가 있어야 할 자리
  • 최보식 선임기자

    모두 세속적 욕망으로 엉덩이가 들썩거려…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
    정확히 아는 사람은 동쪽으로 가서 貴人 만나는 것보다 더 어려워진 세상

    최보식 선임기자

    한나라당의 비상대책위원 '완장'을 찬 인사들의 발언을 구경하는 동안,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떠올렸다. 일종의 탐구심 같은 것이었다.

    좌장 격인 김종인씨는 5공(共) 국보위, 민정당, 민자당, 새천년민주당 등을 오가며 장관과 국회의원을 했다. 이런 '경륜'을 갖춘 인물은 가만히 쉴 수가 없다. 한때는 정운찬 전 총리의 '정치적 멘토'였다. 불과 몇달 전까지는 안철수 교수와 '정치'에 대해 논의해왔다. 이제 박근혜 전 대표의 '멘토'가 되자, 그는 인터뷰에서 "나더러 안철수 교수의 멘토라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비대위원인 이상돈씨는 뼛속까지 우파 학자였다. 그는 자유선진당에 가담했다. 그때는 자신이 원하는 걸 얻지 못한 것 같다. 어느 시점부터 그는 좌파에서 가장 환영받는 논객이 됐다. 4대강 사업을 반대했고, 천안함 폭침이 북한 소행인지 알 수 없다고도 했다. 그에게 어떤 사상적 고심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쥐구멍에 물이나 들어가라"며 이명박 대통령을 원색 비판한 승려 명진을 찾아가 '박근혜의 대선 성공 전략'을 묻기도 했다.

    세월이 흐르는데 사람만 꼭 같은 모습으로 있으란 법은 없다. 성인(聖人)도 요즘 같은 세상에 나오면 때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명분 있는 큰일을 하는데 시시콜콜한 흠결을 따지면 쓸 사람이 없다. 다른 인물을 택한들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안도하면서도, 정작 이들이 정의(正義)의 대변자로 등장하는 광경을 보면 혼란스럽다. 자기 분수를 지키는 게 참으로 어렵구나를 배우게 된다.

    그 누구도 과연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자리인지를 돌아보지 않는 세상이 됐다. 우리 삶은 이런 명망가들에게 휩쓸려왔다. 때로 환호하면서 말이다.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에 취임한 지 얼마 안돼 "역사의 물결을 거스르는 것은 현 집권세력"이라며 정치판에 뛰어오른 안철수 교수는 오히려 순정한 구석이 있다. 그를 앞세워 도모해보려고 했던 한 전직 장관은 퇴짜맞고도 "안 교수는 어떻고 저떻고…" 하며 매스컴에 계속 얼굴을 내밀고 있다. 욕망 앞에 체면 따위는 아랑곳없다. 또 어떤 승려는 최고의 '선거전략가'로 청와대까지 초청받으면서 세상을 휘젓고 있다. 얼마나 자랑스럽겠는가.

    배운 자, 나이 든 자, 수행을 하는 자, 사회적으로 책임져야 할 자들이 하나같이 다투어 자신을 드러내고 팔아먹는 데 혈안이 됐다. 감성적인 문학을 하던 작가가 어느 날 '정치 심판가'가 되고, 학생을 가르치는 국립대 교수가 선동꾼이 되고, 엄정한 재판을 해야 하는 판사가 트위터로 막말을 해 세상에 이름을 알린다. 모두가 세속적 욕망으로 엉덩이가 들썩거리고 있다.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정확히 아는 이를 만나는 게 동쪽으로 가서 귀인(貴人)을 만나는 것보다 더 어려워졌다.

    모두가 금욕(禁慾)의 수도자가 될 이유는 없다. 욕망은 삶의 동력이다. 욕망이 우리를 키워왔다. 이만큼 먹고 살 만하게 된 것도 욕망이 움직여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욕망은 돈과 권력, 명성만을 쫓아가고 있다. 고관대작에 오르고, 비싼 차를 타고, 비싼 집에서 살고, 비싼 레스토랑에서 폼나게 가재요리를 먹고, 비싼 명품백을 구입해야 성공한 삶이 된다. 매스컴은 이런 인간에 대해서만 조명한다. 이들을 인생의 표본처럼 받들어놓았다.

    이렇게 만들어놓은 세상에서 우리 아이들의 위인(偉人)은 재벌 2·3세나 연예인뿐일 수밖에 없다. 아이들도 한 방에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키는 꿈을 꾼다. 행여 밑바닥에서 힘들게 시작해보겠다면 부모가 나서 말릴 것이다. "때려치워라, 그걸로 언제 돈 벌어서 집을 사느냐"라고. 우리는 돈과 권력, 명성 이상의 삶의 가치와 철학을 잃어가고 있는 중이다. 자기가 있어야 하는 자리에서의 열정과 성취는 보잘것없는 것처럼 됐다. 고귀한 인격이나 영혼 같은 말은 우리 사회의 사어(死語)가 될 것이다.

    비록 세대 간 계층 간 부(富)의 격차가 있지만, 단군 이래 최대의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는데도 우리는 늘 욕망에 시달린다. 불만과 분노로 무장한 채 남들처럼 달려갈 뿐,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해 자신에게 묻지 않는다. 주어진 운명에 도전하는 것에만 우리는 익숙해 있다. 하지만 때로는 그런 운명에 순응하고, 자신의 분수를 지키는 사람들의 모습은 감동적이다. 이는 사회공동체를 성숙하게 한다.

    해가 바뀌면 북한의 급변과 총선·대선이 겹쳐 정치와 이념의 광풍(狂風)이 불어닥칠 것이다. 온갖 욕망이 넘쳐나고 말[語]들은 어지러울 것이다. 명망가들은 더욱 설쳐댈 게 틀림없다. 이 혼돈 속에서 우리 개인들이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한 번쯤 생각해볼 수 있기를. 마음의 고요함을 잃으면 어떤 깨달음도 없다고 했다.

     

    '2014소치동계올림픽 금 노린다' 안현수, 러시아 국적 취득

    러시아 국적 취득한 '쇼트트랙 황제' 안현수
    한국 쇼트트랙 국가대표 출신 안현수(26)가 러시아 국적을 취득했다.

    러시아빙상경기연맹(회장 알렉세이 크라프초프)은 29일(한국시간) 연맹 홈페이지를 통해 안현수의 러시아 국적을 인정하는 서류에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이 서명했다고 밝혔다.

    빙상연맹은 성명에서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26일자로 올림픽 3관왕인 안현수의 러시아 국적 취득을 허용하는 대통령령에 서명했다"고 전했다.

    러시아 국적 취득을 전해들은 안현수가 "공식적으로 러시아 국민이 돼 기쁘다. 이제 절차 문제를 고민하지 않고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됐다"는 소감을 밝혔다고 연맹은 소개했다. 크라프초프 회장은 "올해 초 러시아 국적을 희망한 올림픽 3관왕 안현수가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는데 관련한 모든 서류를 제출했고 공식 절차를 끝냈다"고 밝혔다.

    그는 "안현수가 부상 회복과 러시아 국적 취득 과정에서 생긴 심한 외상에서 벗어나 내년 유럽챔피언십에 나선다"며 "그가 이 대회에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기대감을 내비쳤다.

    안현수는 본인의 러시아 이름을 '빅토르'로 결정했다. 빅토르는 옛 소련 시절 명성을 떨친 고려인3세 록가수 '빅토르 최'라는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빅토르란 이름을 택한 이유에 대해 "승리를 뜻하는 영어 단어 'Victory'(빅토리)와 발음이 비슷해 내게 행운을 가져다 줄 것으로 믿는다. 또 러시아에서 매우 인기가 높고 한국에서도 유명한 고려인 가수 '빅토르 최'처럼 러시아에서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빅토르'라는 이름이 쉽고 빠르게 기억될 것이라는 점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안현수는 2006년 토리노동계올림픽 3관왕과 2003~2007년 세계선수권대회 5연패의 눈부신 업적을 쌓아 '쇼트트랙의 황제'로 군림했다.

    하지만 2006년 토리노동계올림픽 이후 빙상계 내부에 존재하던 파벌 싸움에 휩싸이며 심한 갈등을 겪었다. 이후 2008년에는 무릎 부상으로 2010년 밴쿠버동계올림픽 출전권을 따내지 못한 데 이어 지난 4월 국가대표선발전에서도 탈락하는 등 슬럼프에 빠졌다.

    안현수는 이런 고민 끝에 지난 6월 러시아로 건너가 8월 중순 자신의 미니홈피를 통해 러시아 귀화 의사를 밝혔다.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면서 안현수는 이중국적을 금지하는 국내법에 따라 한국 국적은 자동으로 상실하게 됐다.

    한편 안현수는 내년 1월 체코에서 열리는 유럽챔피언십에서 러시아 국가대표로 출전, 데뷔전을 치른다. 또한 그는 2014 러시아 소치에서 열리는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노리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예쁜 동전은 어느 나라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전은 어느 나라에 있을까? 얼핏 유럽이나 미국 등 선진국의 동전이 세련되고 아름다울 것 같지만, 의외로 아름다운 동전은 아프리카에 많았다.

    최근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동전’이라는 제목의 사진이 올라왔다. 사진 속 순위를 두고 네티즌들의 의견이 분분했지만, 대부분 1위로 선정된 동전에는 이견이 없었다. 바로 아프리카 카메룬의 동전이었다.

    출처=인터넷 커뮤니티
    실제 살아있는 나비가 앉아있는 형태의 카메룬 동전은 깔끔한 은색 주화 위에 형형색색의 화려한 나비가 앉아있는 모습이다. 아프리카 특유의 독특함과 생동감을 잘 표현했으며 다른 동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예술적 아름다움이 있다.

    2위는 코트디부아르의 동전. ‘상아의 나라’답게 코끼리의 조상 매머드의 당당한 모습을 동전에 담았다. 올빼미 모양의 몽환적 디자인을 가진 몽골 동전이 3위에 꼽혔다. 올빼미의 눈은 보석으로 장식돼 있으며, 주화 부분은 올빼미의 은색털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풍부한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호주의 동전도 깔끔한 디자인으로 4위에 꼽혔다. 라이베리아의 독특한 동전들이 각각 5위와 6위를 차지했으며, 보드 게임에 활용될 만한 독특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콩고의 동전도 아름다운 동전에 이름을 올렸다.

    자연담은 집, 자연닮은

    인류는 오래 전부터 자기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재료를 활용하여 집을 짓고 살아왔다. 집은 우리에게 안식처이며 삶을 일구어나가는 터전이다. 환경 친화적인 삶, 이른바 그린 라이프를 강조하는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는 주거 공간은 얼마나 환경 친화적일까.

    환경 친화 주거단지 개념의 등장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인류는 획기적인 건축 재료를 발명하고 새로운 재료를 활용하여 주택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이들 재료의 대부분은 경제성과 기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건강의 측면에서 볼 때는 결코 이롭지 않은 것들이다. 각종 화학 물질이 섞인 건축 재료 때문에 사람들은 알레르기 증세를 일으키는가 하면 천식, 기관지염 등에 걸린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대표적인 주거양식으로 꼽히는 아파트의 건축 재료에서도 인체에 해로운 물질이 방출되어 야기된 질병으로 고생하는 현대인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특히 건자재에서 발생하는 휘발성 유기 화합물(VOCs), 포름알데히드(HCHO) 등이 아토피성 피부염이나 두통과 같은 질환의 원인이 되고 있는데 이 물질들은 건축 후 5년이 지나도 계속 방출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들어서는 완벽한 방음과 밀폐를 위한 기술 적용으로 환기가 잘 되지 않아 집 안에 있는 것은 가스실에 갇혀 지내는 셈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한 번 건설하면 50년, 100년의 수명을 생각해야 할 아파트들이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면 이는 ‘지속가능한’ 건물이라고 할 수 없다. 이제는 외형적, 일시적으로만 소비자의 관심과 눈을 끌 것이 아니라,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참된 주거의 모습을 그리면서 건축 설계에 임해야 할 것이다.

    1992년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는 지금과 같은 대량소비의 성장방식이 지속되는 한 인류의 생존은 50년을 넘지 못할 것이라는 경각심에서 유엔환경개발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건축과 도시계획 분야도 중요한 테마가 되었는데 2차 유엔인간정주회의의 <Habitat Agenda>에 나타난 ‘지속가능한 정주지 개발’에서는 미래 세대가 사용할 지구 자원과 환경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현 세대가 필요로 하는 개발을 표방하며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도모하는 정주지를 지향하고 있다. 이를 출발점으로 삼아 일본에서는 ‘환경공생주택’, 우리나라에서는 ‘환경보전형 주택’, ‘생태적인 주거단지’, 또는 ‘생태건축·생태주택’ 등으로 불리는 개념이 등장했다. 이들은 생태계의 안정성 유지를 목적으로 한 자기완결적인 의미의 주거단지를 가리킨다. 인간을 둘러싼 생태계의 균형을 유지하고, 자연 환경에 유익한 개발을 하여 환경과 인간의 조화를 모색하는 미래 지향적인 개념의 주거단지이다.

    새로운 건축 방식과 친환경 건축 자재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유해 물질이 첨가된 건축 재료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반성의 움직임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다시 자연 재료를 활용하는 방향을 모색하였다. 이른바 생태주택을 짓는 사람들은 최대한 지역 내에서 얻을 수 있는 자재와 무독성 재활용 자재를 사용하며, 또한 재료의 수명이 다했을 때 그 자재가 재활용이 가능한 지도 고려한다.

    건축 과정에서 광범위하게 쓰이는 가장 해로운 건축자재는 접착제다. 기존의 건축 재료 중에서도 가장 독성이 강할 뿐만 아니라 환경에 미치는 부작용도 크다. 이것은 거의 모든 건축 현장에서 사용되는데 특히 나무 조각들을 접합하거나 바닥재 기반을 이루는 자재를 부착할 때 많이 사용된다. 접착제에는 헥산, 벤젠, 톨루엔 그리고 나프탈렌과 같은 석유화학물질과 포름알데히드 등 여러 가지 유해물질이 들어있다. 이 물질들은 메스꺼움, 어지러움, 졸음, 두통, 그리고 중추신경손상 등을 일으키는데 이를 대체할 수 있는 물질이 수성접착제다. 물론 원목이나 타일을 바닥재로 선택하면 못이나 회반죽을 사용하기 때문에 아예 접착제를 사용할 필요가 없어진다. 이 방법이 좀 더 간단하고 확실한 해결책이지만, 우리나라와 같이 아파트형 주거가 발달한 나라에서는 실현되기 어렵다. 사실상 기존의 모든 작업은 이것으로 대체 가능하며, 이것을 사용하면 세척시간도 절약할 수 있다. 한편 벽이나 천장에 목재를 접착하는 과정에서 실내공기오염이나 ‘병든 건물 증후군(Sick building syndrome)’을 유발하는 유독성 포름알데히드 및 기안산염 접착제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최근에는 이러한 유해 물질을 걱정하지 않고 고급 합판 대체품으로 사용 가능한 대마(hemp)와 같은 재활용 재료나 제품들이 보급되고 있다. 철거된 낡은 건물에서 회수한 재생 목재도 인기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재생 목재는 새로운 나무에서 찾아 볼 수 없는 특징과 품질을 갖추고 있는 동시에 벌목에 소요되는 비용도 절감시켜 준다.

    ‘볏짚’ 역시 주목할 만한 친환경 재료이다. 생태 건축가들의 실험 결과 볏짚의 두께는 절연재로서의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반영구적이며 쥐와 곤충들이 드나들 수 없을 정도의 밀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건축계에서는 볏짚의 새로운 이름으로서 ‘유전공학적인 유리’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자연을 닮은 세계 각지의 생태주거단지

    생태주거단지를 외부에서 볼 때 가장 큰 특징은 다양한 식물로 풍부한 자연경관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지붕, 벽, 베란다를 지나 정원에 이르기까지 녹색식물로 연결되어 주택과 단지가 온통 녹색이다. 이 식물들은 외관이 환경 친화적으로 보이게끔 하는 효과와 함께 건물을 보호하고 실내기온을 조절하는 역할도 한다. 또한 식물이 있는 곳은 자연스럽게 동물의 서식공간이 되며 거주지의 풍부한 식물과 동물로 이루어진 생물서식공간은 냇가나 가로수를 통해 숲과 산으로 띠처럼 연결된 비오톱 네트워크를 이룬다.

    -독일 비스마흐 주거단지

    독일의 겔센키르헨 지역에 위치한 이 주거단지는 주민들의 참여에 의해 지어진 친환경적인 주거단지다. 주민들은 주택뿐만 아니라 단지 내 학교 건물도 학생들과 함께 참여하여 건축하고 있다. 주택들은 이 지역의 최초 태양열 주택으로 태양열 에너지 이용이 우수한 편이다. 지붕 위에 잔디가 깔려 있고, 한쪽으로 경사진 지붕의 구조로 건축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단지 중앙에 있는 피라미드 형태의 건물은 이 지역의 이정표이자 공동 공간의 역할을 한다. 이곳은 주민들의 모임이나 축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며 때로는 학생들이 사용하기도 한다. 각 가정은 개인 난방을 하거나 8가구가 함께 중앙난방을 한다. 학교 건물 역시 잔디지붕으로 냉·난방비를 절감하고 있고 새로 건축한 학교의 실내 체육관은 태양열을 최대로 이용하도록 설계되었다. 또한 학교 건물에서 태양열로 발전하여 사용하고 남은 전력을 전력회사에 판매를 하고 있다.

    -스웨덴의 웁훌트 마을

    웁훌트의 생태마을은 스웨덴 예테보리의 도심에서 약간 벗어난 농촌 마을 호숫가에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은 1990년 세 명의 젊은 건축가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곳에는 현재 6가족이 살고 있는데 마을 주민은 어린이 2명을 포함하여 모두 18명이다. 주민의 절반은 예테보리 시에서 교사, 건축가, 공무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고 절반은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는다. 이 마을의 기본적인 디자인 개념은 자연을 보호하고 인간과 농작물 사이에 유기적 협동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들은 소변을 거름으로 활용하여 농사를 지으며 온실에서 채소와 꽃을 재배한다. 변기와 하수구에서 나오는 오수는 화학적 정수과정을 거쳐 농사에 재사용된다. 이러한 재활용이 가능하도록 마을에서 사용하는 세제는 물과 토지를 오염시키지 않도록 천연재료로 된 것만을 선별하여 사용한다. 이곳에서 사용하는 연료는 인근 지역에서 생산되어 버려지는 목재를 이용해서 만든 친환경 연료다. 이 연료를 주 열원으로 사용하여 바닥 난방을 하고, 자연형 태양열 시스템을 보조난방 열원으로 사용한다. 마을에는 주민들의 공동 세탁실과 회의실이 있는데 이 회의실에서는 한 달에 한 번 주민 회의가 열려 마을 공동의 관심사를 의논하고 친목도 도모한다.

    -국내의 패시브 하우스(Passive House)

    ‘패시브 하우스(Passive House)’는 태양광·지열 등 친환경 에너지를 생산하는 ‘액티브(Active)’ 기술과는 달리 첨단 단열 공법으로 에너지 낭비를 최소화한 에너지 절약형 신개념 주택이다. 현재 경기도 동탄·파주 등지에 세 채가 들어서 있는데 에너지 소비량은 일반주택의 10분의 1밖에 안 된다. 이에 따라 난방비는 최대 93%, 냉방비는 50% 이상 절감되는데 단열 기술 덕분에 한겨울에도 20℃, 한여름에도 26℃의 실내 온도를 유지한다. 국내의 패시브 하우스에 적용된 단열 기술들은 다음과 같다. (1) 지붕에서 태양 복사열 흡수를 최대화하고, (2) 창호는 3중 유리에 고단열 프레임으로 열손실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고, (3) 벽체의 경우 내부에는 3cm를, 외부에는 20cm의 단열재를 충진한다. 이러한 단열 공사비 때문에 일반 주택보다 평당 건축비가 50만 원 정도 더 들지만, 에너지 절감 효과를 통해 7~10년 정도면 추가 건축비를 모두 회수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생태적 공간을 만들기 위한 우리의 자세

    Serger Moscovici는 “18세기의 핵심적인 문제는 시민들의 정치적 권리 확보였고, 19세기의 사회 문제가 노동자들에 관련된 것이었다면, 20세기 그리고 더 나아가 21세기의 주된 문제는 생태계 파괴 및 자연의 빈곤화에 관련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인간의 잘못이 생태계의 위기를 초래했다는 지적을 우리는 너무나도 흔히 들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손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은 아닐까 낙담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여행은 발걸음 하나로부터 시작한다. 자연을 배려하는 주거 환경을 만드는 노력과 시도는 친환경 문명의 기초이며 첫걸음일 것이다.

    * 참고문헌

    <Living Green> 그레그 혼

    [생태건축·에코 인테리어·그린 라이프] 친환경 공간디자인, 연세대학교 밀레니엄환경디자인 연구소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의 실천, 친환경주거> 주거학 연구회

    “실내는 독가스실? 건자재서 오염물질 배출” 2003.07.20 동아일보

    [출처] 자연을 담은 집, 자연을 닮은 집 |작성자 유이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직이 아니라 업이다

    [중앙일보]입력 2012.01.07 00:00 / 수정 2012.01.07 00:00

    정진홍
    논설위원

    # 흔히 ‘직업(職業)’이라고 붙여서 쓴다. 하지만 이제는 ‘직/업’이라고 써야 할 것 같다. 엄연히 ‘직’과 ‘업’은 다르다. 직은 직위 내지 자리이고 업은 스스로에게 부여된 과업이다. 사람들은 대개 직에 관심이 많지 업은 뒷전이다. 누가 어떤 자리에 앉았느냐엔 눈에 불을 밝히듯 하면서도 정작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별반 관심이 없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직만 추구하면 업을 잃는다. ‘실업(失業)’하는 것이다. 직의 수명이 제일 길 것 같은 교수도 65세면 실업한다. 그러나 업을 추구하면 직은 거짓말같이 따라온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이 그 작은 증거 중 하나다.

     # 10년 전 ‘콘텐트 크리에이터’라는 업의 이름을 스스로 짓고 이것을 추구하겠다고 교수직을 떠났다.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결정이었다. 교수직을 그만 둔 덕분에 내 인생에서는 더 많은 도전과 모험의 기회가 열렸다. 직, 곧 자리는 사람을 안주시킨다. 자리가 편할수록 절실한 게 없다. 그러면 끝까지 안 한다. 대충 한다.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을 만큼만 한다. 더 하면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할수록 자신은 진짜 바보가 된다. 아니 바보가 되어가는 줄도 모를 만큼 바보가 되는 것이다. 좋은 자리가 큰 바보를 만드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 안정된 직이 아니라 스스로를 벼랑 끝에 세워 자기 안의 손조차 대지 않았던 가능성들을 끌어올려 업으로 진검승부를 한다는 건 힘들지만 멋진 일이다. 물론 그 업을 찾는 과정이 쉽지는 않다. 경험하건대 업을 찾는 길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 첫째는 좋아하는 일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이다. 그만큼 쉽지 않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다. 좋아하는 일을 발견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도전하고 모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머리로 “내가 뭘 좋아하지?” 하고 생각만 하면 늘 제자리에 맴돈다.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알려면 부딪쳐 봐야 하고 저질러 봐야 한다. 커피를 좋아하는 것은 취향이다. 하지만 커피가 좋아서 원두를 사러 다니고 그것에 미쳐서 들어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미국 시애틀의 구멍가게 커피점 스타벅스를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낸 하워드 슐츠가 그렇게 하지 않았나.

     # 업을 찾는 두 번째 단계는 자기가 발견한 좋아하는 일을 잘하는 것이다. 하지만 절대적 기준에서 잘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차이를 내면 잘하는 것이다. 물론 그 차이가 반짝 하고 마는 것이라면 별반 의미가 없다. 튀는 것으론 사흘을 못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업을 찾는 세 번째 단계가 중요하다. 그 차이를 지속하는 것이다. 차이의 지속이야말로 힘이요 파워다. 좋아하는 일을 발견하고 그것에서 차이를 만들어내며 그 차이를 지속하는 과정 속에서 자기자신만의 업은 숙성되고 성장한다. 그 업으로 진검승부를 펼치는 것이 진짜 자기 인생이다.

     # 새해가 되자마자 일자리 얘기가 쏟아졌다. 특히 요즘 화두는 단연 청년 일자리다. 대통령은 연두 회견에서 청년 일자리 7만 개를 만들겠다고 했다. 삼성 이건희 회장도 이에 호응했다. 하지만 자리 곧 직만으론 안 된다. 아마도 그동안 해마다 연초가 되면 단골 메뉴로 화두가 돼 공약된 일자리를 산술적으로 단순 합계하면 청년실업 문제는 해결되고도 남아야 정상이다. 하지만 청년실업은 줄기는커녕 더 늘었고 분노에 찬 청년들은 황량한 거리를 여전히 헤매고 있다. 청년실업, 청년일자리의 해법은 직의 시각에서만 보면 안 풀린다. 업의 시각에서 접근해야 한다. 정부에서 청년창업 지원금을 늘리겠다는 얘기도 들린다. 하지만 그 전에 젊은이 스스로 자신만의 업을 발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그럴듯해 보이는 자리에 취직해도 3개월을 못 배기고 나오기 십상이다. 그래서 단언하듯 다시금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직이 아니라 업이다”라고!

    Opinion

    The Rise of the New Groupthink

    By SUSAN CAIN
    Published: January 13, 2012

    SOLITUDE is out of fashion. Our companies, our schools and our culture are in thrall to an idea I call the New Groupthink, which holds that creativity and achievement come from an oddly gregarious place. Most of us now work in teams, in offices without walls, for managers who prize people skills above all. Lone geniuses are out. Collaboration is in.

    But there’s a problem with this view. Research strongly suggests that people are more creative when they enjoy privacy and freedom from interruption. And the most spectacularly creative people in many fields are often introverted, according to studies by the psychologists Mihaly Csikszentmihalyi and Gregory Feist. They’re extroverted enough to exchange and advance ideas, but see themselves as independent and individualistic. They’re not joiners by nature.

    One explanation for these findings is that introverts are comfortable working alone — and solitude is a catalyst to innovation. As the influential psychologist Hans Eysenck observed, introversion fosters creativity by “concentrating the mind on the tasks in hand, and preventing the dissipation of energy on social and sexual matters unrelated to work.” In other words, a person sitting quietly under a tree in the backyard, while everyone else is clinking glasses on the patio, is more likely to have an apple land on his head. (Newton was one of the world’s great introverts: William Wordsworth described him as “A mind for ever/ Voyaging through strange seas of Thought, alone.”)

    Solitude has long been associated with creativity and transcendence. “Without great solitude, no serious work is possible,” Picasso said. A central narrative of many religions is the seeker — Moses, Jesus, Buddha — who goes off by himself and brings profound insights back to the community.

    Culturally, we’re often so dazzled by charisma that we overlook the quiet part of the creative process. Consider Apple. In the wake of Steve Jobs’s death, we’ve seen a profusion of myths about the company’s success. Most focus on Mr. Jobs’s supernatural magnetism and tend to ignore the other crucial figure in Apple’s creation: a kindly, introverted engineering wizard, Steve Wozniak, who toiled alone on a beloved invention, the personal computer.

    Rewind to March 1975: Mr. Wozniak believes the world would be a better place if everyone had a user-friendly computer. This seems a distant dream — most computers are still the size of minivans, and many times as pricey. But Mr. Wozniak meets a simpatico band of engineers that call themselves the Homebrew Computer Club. The Homebrewers are excited about a primitive new machine called the Altair 8800. Mr. Wozniak is inspired, and immediately begins work on his own magical version of a computer. Three months later, he unveils his amazing creation for his friend, Steve Jobs. Mr. Wozniak wants to give his invention away free, but Mr. Jobs persuades him to co-found Apple Computer.

    The story of Apple’s origin speaks to the power of collaboration. Mr. Wozniak wouldn’t have been catalyzed by the Altair but for the kindred spirits of Homebrew. And he’d never have started Apple without Mr. Jobs.

    But it’s also a story of solo spirit. If you look at how Mr. Wozniak got the work done — the sheer hard work of creating something from nothing — he did it alone. Late at night, all by himself.

    Intentionally so. In his memoir, Mr. Wozniak offers this guidance to aspiring inventors:

    “Most inventors and engineers I’ve met are like me ... they live in their heads. They’re almost like artists. In fact, the very best of them are artists. And artists work best alone .... I’m going to give you some advice that might be hard to take. That advice is: Work alone... Not on a committee. Not on a team.”

    And yet. The New Groupthink has overtaken our workplaces, our schools and our religious institutions. Anyone who has ever needed noise-canceling headphones in her own office or marked an online calendar with a fake meeting in order to escape yet another real one knows what I’m talking about. Virtually all American workers now spend time on teams and some 70 percent inhabit open-plan offices, in which no one has “a room of one’s own.” During the last decades, the average amount of space allotted to each employee shrank 300 square feet, from 500 square feet in the 1970s to 200 square feet in 2010.

    Our schools have also been transformed by the New Groupthink. Today, elementary school classrooms are commonly arranged in pods of desks, the better to foster group learning. Even subjects like math and creative writing are often taught as committee projects. In one fourth-grade classroom I visited in New York City, students engaged in group work were forbidden to ask a question unless every member of the group had the very same question.

    The New Groupthink also shapes some of our most influential religious institutions. Many mega-churches feature extracurricular groups organized around every conceivable activity, from parenting to skateboarding to real estate, and expect worshipers to join in. They also emphasize a theatrical style of worship — loving Jesus out loud, for all the congregation to see. “Often the role of a pastor seems closer to that of church cruise director than to the traditional roles of spiritual friend and counselor,” said Adam McHugh, an evangelical pastor and author of “Introverts in the Church.”

    SOME teamwork is fine and offers a fun, stimulating, useful way to exchange ideas, manage information and build trust.

    But it’s one thing to associate with a group in which each member works autonomously on his piece of the puzzle; it’s another to be corralled into endless meetings or conference calls conducted in offices that afford no respite from the noise and gaze of co-workers. Studies show that open-plan offices make workers hostile, insecure and distracted. They’re also more likely to suffer from high blood pressure, stress, the flu and exhaustion. And people whose work is interrupted make 50 percent more mistakes and take twice as long to finish it.

    Many introverts seem to know this instinctively, and resist being herded together. Backbone Entertainment, a video game development company in Emeryville, Calif., initially used an open-plan office, but found that its game developers, many of whom were introverts, were unhappy. “It was one big warehouse space, with just tables, no walls, and everyone could see each other,” recalled Mike Mika, the former creative director. “We switched over to cubicles and were worried about it — you’d think in a creative environment that people would hate that. But it turns out they prefer having nooks and crannies they can hide away in and just be away from everybody.”

    Privacy also makes us productive. In a fascinating study known as the Coding War Games, consultants Tom DeMarco and Timothy Lister compared the work of more than 600 computer programmers at 92 companies. They found that people from the same companies performed at roughly the same level — but that there was an enormous performance gap between organizations. What distinguished programmers at the top-performing companies wasn’t greater experience or better pay. It was how much privacy, personal workspace and freedom from interruption they enjoyed. Sixty-two percent of the best performers said their workspace was sufficiently private compared with only 19 percent of the worst performers. Seventy-six percent of the worst programmers but only 38 percent of the best said that they were often interrupted needlessly.

    Solitude can even help us learn. According to research on expert performance by the psychologist Anders Ericsson, the best way to master a field is to work on the task that’s most demanding for you personally. And often the best way to do this is alone. Only then, Mr. Ericsson told me, can you “go directly to the part that’s challenging to you. If you want to improve, you have to be the one who generates the move. Imagine a group class — you’re the one generating the move only a small percentage of the time.”

    Conversely, brainstorming sessions are one of the worst possible ways to stimulate creativity. The brainchild of a charismatic advertising executive named Alex Osborn who believed that groups produced better ideas than individuals, workplace brainstorming sessions came into vogue in the 1950s. “The quantitative results of group brainstorming are beyond question,” Mr. Osborn wrote. “One group produced 45 suggestions for a home-appliance promotion, 56 ideas for a money-raising campaign, 124 ideas on how to sell more blankets.”

    But decades of research show that individuals almost always perform better than groups in both quality and quantity, and group performance gets worse as group size increases. The “evidence from science suggests that business people must be insane to use brainstorming groups,” wrote the organizational psychologist Adrian Furnham. “If you have talented and motivated people, they should be encouraged to work alone when creativity or efficiency is the highest priority.”

    The reasons brainstorming fails are instructive for other forms of group work, too. People in groups tend to sit back and let others do the work; they instinctively mimic others’ opinions and lose sight of their own; and, often succumb to peer pressure. The Emory University neuroscientist Gregory Berns found that when we take a stance different from the group’s, we activate the amygdala, a small organ in the brain associated with the fear of rejection. Professor Berns calls this “the pain of independence.”

    The one important exception to this dismal record is electronic brainstorming, where large groups outperform individuals; and the larger the group the better. The protection of the screen mitigates many problems of group work. This is why the Internet has yielded such wondrous collective creations. Marcel Proust called reading a “miracle of communication in the midst of solitude,” and that’s what the Internet is, too. It’s a place where we can be alone together — and this is precisely what gives it power.

    MY point is not that man is an island. Life is meaningless without love, trust and friendship.

    And I’m not suggesting that we abolish teamwork. Indeed, recent studies suggest that influential academic work is increasingly conducted by teams rather than by individuals. (Although teams whose members collaborate remotely, from separate universities, appear to be the most influential of all.) The problems we face in science, economics and many other fields are more complex than ever before, and we’ll need to stand on one another’s shoulders if we can possibly hope to solve them.

    But even if the problems are different, human nature remains the same. And most humans have two contradictory impulses: we love and need one another, yet we crave privacy and autonomy.

    To harness the energy that fuels both these drives, we need to move beyond the New Groupthink and embrace a more nuanced approach to creativity and learning. Our offices should encourage casual, cafe-style interactions, but allow people to disappear into personalized, private spaces when they want to be alone. Our schools should teach children to work with others, but also to work on their own for sustained periods of time. And we must recognize that introverts like Steve Wozniak need extra quiet and privacy to do their best work.

    Before Mr. Wozniak started Apple, he designed calculators at Hewlett-Packard, a job he loved partly because HP made it easy to chat with his colleagues. Every day at 10 a.m. and 2 p.m., management wheeled in doughnuts and coffee, and people could socialize and swap ideas. What distinguished these interactions was how low-key they were. For Mr. Wozniak, collaboration meant the ability to share a doughnut and a brainwave with his laid-back, poorly dressed colleagues — who minded not a whit when he disappeared into his cubicle to get the real work done.

    Susan Cain is the author of the forthcoming book “Quiet: The Power of Introverts in a World That Can’t Stop Talking.”

    [credit 출처: 이창양 교수 블로그 http://drcylee.blog.me/40149576472 ]

    알프스 산맥에서 미이라로 발견된 원시인의 비밀[Ice mummy of ancient man discovered Al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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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1년 해발 3200미터의 알프스 산맥 티롤의 빙하지대인 Otztal 계곡에서는 얼음에 싸여 바짝 마른 미이라형태로
    되어 있는 태고때의 원시인 시체 한구가 발견되었다.

    이 얼음 인간 미이라는 발견 장소에 의해 Oetzi 또는Etsi로 불린다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으로 이 미이라의 나이를알아본 결과 놀랍게도 무려 5300년전의 인간으로드러났다.
    이 인체 미이라는 현재에도 과학자들에 의해꾸준히 연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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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루미늄박 호일 위에 드러누워 있는원시인의 빈약하게 보이는 손




    네덜란드의 예술가인 아드리에와 알폰스 케니는 이 원시인의 원래 모습을 복원해 보기 위하여
    미이라 전체의 규격과 골격을 3D 스캐닝을 이용한정밀작업 끝에
    미이라의 실제 모습 복원에 성공하였다.

    과학자들은 처음에 이원시인의 눈동자 색깔이 푸른색(Blue)이라고 생각했지만
    최근의DNA테스트에 의한 결과 갈색(Brown)으로 밝혀졌다.




    유리로 본은 뜬 원시인의신발과 발 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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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험실로 옮겨진 후에 화씨 64도 정도로 온도를 높인후 해동된 상태의 미이라 모습

    과학자들은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한이 미이라를 해동시킨후

    해빙된 물속에서 발견될수있을박테리아의 존재를 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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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시간의 부검 시간이 끝난후 이 미이라는 화씨 21도 정도의 온도가 유지된 석관에 넣어져
    이태리 남부의 티롤 Bolzano 고고학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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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의 해발 3200미터 지점에 붉은 표시의 화살표가 가리키는 지점이 이 미이라를 발견했던 곳이다.

    이 미이라는 1991년 독일 뉘른베르그에서 이 곳을 방문했던 두명의 관광객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미이라 발견시 원시인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신석기 시대의도구들도 같이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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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견된 이 미이라의 무릎 두곳에는 십자가 모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수 있었다.

    과학자들은 이것을 관절염에 대한 치료 목적의의식에따른 표시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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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견된 이 미아라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었다.

    미이라의 발부분에서는 2가지 종류의 불을 붙이는 부싯깃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자작나무 조각의 부싯깃이었고그외일반적인 부싯깃 한가지가 더 있었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원시인의 신발과 칼이 같이 발견되었다.
    추가적으로 발견된 물건중에서는 구리로 만든 도끼와 두개의 화살및 나무껍질을 이용하여만든 끈이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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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드워드 윙글리 박사와 그의 동료들은 내시경을 이용하여 조사해본 결과 이 원시인의 어깨부분에
    화살촉이 박혀 있는것을 발견했다.
    그 화살촉이 동맥을 파열시키고 박힌 결과 피를 많이 흘렸을것이라고 추정했다.





    X레이 사진에 찍힌 빨간 화살표 표시가 원시인의 어깨에 화살촉이 박힌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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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자들은 9시간에 걸쳐 원시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세부적인 목록을 하나 하나씩 기록하는 일로 녹초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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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시인의 위속에서 채취한 내용물의 표본들

    박사들은 농담삼아 이 원시인은 대단한 식욕의 소유자였을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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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조사한신경외과 의사들의 조사 결과에의하면

    이 원시인은 죽기전에 머리에 심한부상을 입었음을 밝혀내었다.





    두가지 종류의 부싯깃

    과학자들은 이 두가지 부싯깃을 출혈을 멈추게 하기 위한 의료적인 목적으로

    사용하였을것이라고 보았다.




    석기시대의 돌칼과 칼집




    구리로 만들어진 도끼날을 이용한 도끼를 소지한것으로 보아

    이 원시인은 부족에서 그의위치는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냥과 방어용으로 사용했을 화살




    원시인의 장비 사이에서 같이 발견된 단풍나무의 잎사귀




    나무껍질을재료로 이용하여만든 밧줄

    이 밧줄은 원시인이 그의 장비를 설치할때 이용한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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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슴가죽과 곰가죽과 풀이 섞인 원시인의 신발

    이것은 과학들에게 발견된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유기물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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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유리 석관으로 옮겨질 미이라에 특수 액체 도포작업으로 마무리하는 에드워드 윙글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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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남부 볼차노의 티롤 고고학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알프스 원시인의 미이라

    오천년이 넘은 미이라를 보존하기 위하여 이 시뮬레이팅 아이스 캡속에는
    화씨 21도의 온도와 98.5%의 습도를 유지시키고 있다.




    과학자들은 알프스산맥에서 냉동 미이라상태로 발견되었던
    원시인의 나이를 40대 초반으로 추정했다.


    photo from : http://www.perekop.org/

    '분단' 건국 위해서 이승만과 손잡은 김구?

    [프레시안] 2012년 01월 16일(월) 오전 07:23

    [해방일기] 1947년 1월 16일

    [프레시안 김기협 역사학자]

    1947년 1월 18일

    정병준은 <우남 이승만 연구>(돌베개 펴냄)에서 1946년 12월 이승만이 미국으로 떠날 때의 상황을 서술한 절에 "이승만-김구-하지의 동상이몽"이란 제목을 붙였다(627~635쪽). 당시 남조선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세 사람이 다가오는 변화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 그런대로 어울리고 있던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는 1년 전의 반탁 운동 이래 김구에게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이승만과의 관계도 3월의 미소공위 개막 직전 민주의원 의장직을 물러나게 한 이래 전과 다른 거리가 생겼다. 특히 미소공위 중단 후 하지가 좌우 합작에 치중하면서 골이 깊어졌다. 모스크바 3상 회의 1주년을 앞두고 하지가 미소공위 재개에 힘을 기울이는 시점에서 이승만의 미국행을 하지가 반긴 것은 미소공위를 반대하는 이승만의 영향력이 줄어들 것으로 내다보았기 때문이었다고 정병준은 해석한다.

    김구와 이승만 사이에도 1946년 내내 세력 다툼의 긴장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반탁'이란 공동 과제가 있었고, 이승만의 출국으로 역할 분담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역할 분담을 정병준은 이렇게 설명했다.

    이승만은 도미에 앞서 김구와 향후 계획에 대해 합의했다. 이승만은 미국 여론에 호소하는 외교 활동 노선을 주장했고, 김구는 주한 미군 5만 명에 대항하는 폭동과 임정 법통을 근거로 한 정부 수립 노선을 주장했다. 논의 끝에 김구는 이승만이 미국 측으로부터 조속한 확약을 받지 못한다면, 자신의 혁명적 계획을 실천에 옮긴다는 전제로 이승만의 도미에 찬성했다.

    이승만과 김구는 국내와 워싱턴에서 반탁 운동을 격렬하게 전개한다는 데 합의했다. 그 핵심은 좌우합작위원회에서 우익 대표를 철수시키는 것, 입법의원을 반탁 운동의 선전장으로 활용할 것, 신탁 문제에 대한 미군정의 불확실한 태도와 공산주의자들을 선호하는 정책을 공격할 것,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할 것 등이었다. 종국적으로는 미군정에 대한 반란이었다.

    국내에서 김구가 반탁-반 군정-반 하지 운동의 일환으로 시위와 폭동을 일으키면, 미군정은 결국 김구를 체포-투옥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결국 김구는 순교자로서 집중 조명을 받게 된다는 시나리오였다. 동시에 이승만은 미국에서 하지가 공산주의자들을 감싸는 반면 한국 애국자들을 박해한다고 선전함으로써 하지의 해임을 요구하는 한편, 즉각적인 한국 독립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호소하려 했다. 국내와 워싱턴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이 반탁-반 군정-반 하지 운동은 반탁-모스크바 결정 폐기라는 종전의 반탁 운동과는 달리, 직접적인 정권 장악으로 초점이 이동해 있었다. (<우남 이승만 연구>, 633~634쪽)

    중간 문단에서 김구와 이승만의 합의 내용으로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할 것"이 들어 있는 사실이 주의를 끈다. 김구는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는 인물이며 분단 건국을 지지한 일이 없는 사람이다. 오히려 "38선을 베고 죽겠다"는 처절한 외침을 남긴 민족주의자다. 그런 그가 이승만과 함께 단독 정부 수립 노력에 합의할 수 있었을까?

    김구의 언행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가진 것이었으므로 단독 정부 수립에 대한 그의 입장은 앞으로도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 그런데 1946년 하반기의 그의 태도를 보면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그는 좌우 합작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하기는 했지만 원칙적 입장에 그쳤을 뿐, 실제로 좌우 합작에 힘을 실어주지 않았다.

    김구는 신탁 통치만이 아니라 군정까지도 부정한다는 점에서 이승만과 달랐다. '외세 거부'라는 점에서 민족주의자로서 순수성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지만, 그가 미국과 소련보다 중국의 영향력을 원했던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장개석 정부가 끝내 조선에 영향력을 누리지 못한 채로 몰락해 버렸기 때문에 이 점이 별로 부각되지 않고 말았지만, 김구의 중국 국민당 정부에 대한 의존 자세에는 민족주의의 기준을 벗어나는 점이 적지 않았다.

    김구가 1948년에 들어서서야 분단 건국 반대에 나선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1947년 중에 중도파의 좌우 합작-남북 합작 노력에 그가 동조했다면 이승만의 분단 건국 획책이 그처럼 순풍에 돛단 듯 진행되지는 않았으리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민족주의자인 김구가 분단 건국에 반대하는 마음을 가진 것은 당연한 일이고, 너무나 늦게까지 그 위험을 실감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극의 진행을 방관하는 결과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1947년의 상황 진행을 살피면서 다른 가능성도 검토하려 한다. 자신이 주도권을 쥘 수만 있다면 분단 건국도 감수할 용의가 있었으리라는 가능성이다. 물론 영속적 분단을 바란 것은 아니겠지만, 외세를 몰아내고 제대로 된 민족 국가를 남반부에만이라도 우선 세워놓은 다음 북반부를 '해방'시키는 것이 미국과 소련의 뜻에 따르는 건국보다 낫다고 그가 생각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었다면 이승만과의 합작이 좌우 합작이나 남북 합작보다 그에게 더 중요하게 생각되었을 수 있다. 1946년 말 도미 시점에서 이승만의 분단 건국 의도는 더할 수 없이 명백하게 드러나 있었다. 영속적 분단을 바라든, 일시적 분단을 바라든, 반탁-반 군정-반 하지 운동은 김구와 이승만이 공유하는 목적이었다.

    한 번 분단이 되고 나면 재통일이 쉽지 않고 분단으로부터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할 국제 정세였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은 이미 겪은 일이기 때문이다. 1947년 시점에서는 그런 위험을 인식한 사람도 있고 인식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김구가 철저한 외세 배격을 위해 일시적 분단이라도 감수할 생각이 있었다면 그것만으로 그를 비판할 일은 아니다. 주어진 상황과 그의 대응 방식을 구체적으로 검토하면서 비평할 점을 찾아볼 일이다.

    1월 16일자 하지의 성명서를 1월 11일자 일기에 실어 놓았는데, 그중에 주목할 대목이 있다.

    "남조선에 있는 일부 오도를 받은 정당의 경솔한 행동은 조선 문제에 다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국가들의 친선을 이간하고 또 그 국가들로 하여금 조선 민족은 그 자주 독립을 완성시키려고 조직된 기관에 협력하지 아니하므로 조선은 독립할 준비가 되지 못하였다는 관념을 주게 될 것이다. 조선에 관하여 다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본관 및 미국민은 조선 독립의 호기를 잃은 조선 사람들의 불온한 시위와 행동에 대하여는 대단히 유감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미소공위의 결렬을 비롯해 조선 독립이 순조롭지 않은 상황의 책임이 반탁 세력에 있다고 처음으로 지적한 것이다. '표현의 자유'를 들어 반탁 운동을 절대적으로 옹호하던 종래 하지의 태도와 다르다. 12월 24일 치스챠코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반탁 운동의 규제를 약속한 것이 단순한 전술적 양보가 아니라 상황 인식의 변화를 반영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는 미소공위에서 유리한 결과를 얻기 위해 반탁 운동을 이용하려 했으나 이제야 반탁 운동의 목적이 미소공위의 파괴에 있고 주둔군 사령관의 입장을 위협하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1947년 1월 중순 반탁 운동의 재개 시도는 미군정의 위상과 조선의 진로에 큰 영향을 끼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었다. 이 위협에 대한 하지의 대응은 정병준의 <우남 이승만 연구>에 잘 정리되어 있으므로 길게 인용한다(643~646쪽).

    구체적으로 이승만과 김구의 반탁-반 군정을 위한 폭동과 시위 계획이 미군정에 감지되었다. 미군정은 워싱턴의 이승만과 프란체스카가 주고받은 암호 편지들을 검열해, 이승만의 광범위하고 격렬한 반탁-반 군정- 반 하지 거사 계획을 알게 되었다. 하지는 이승만이 반미의 모든 악질적 음모를 꾸민 장본인이며, 김구 일당이 이승만의 이름을 빙자해 그의 추종자들을 이용하고 있다고 분노했다.

    한편, 이승만과 김구의 계획에 대한 제보가 1월 10일경에 접수되었다. 제보자들은 제2의 3-1운동으로 기획된 이 시위-폭동이 한인 중에 순교자를 발생시키고 혼란을 야기해서, 군정으로 하여금 김구나 여타 우익 지도자를 투옥하게 할 계획이라고 했다. "은밀하고 신뢰할 만한 제보자들"은 이승만이 이 폭동을 기획했으며, 기간은 1월 18일부터 20일까지고 예정되어 있다고 알렸다.

    하지와 미군정은 이승만과 김구의 반탁 시위와 폭동을 저지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워싱턴에 있는 이승만을 설득하는 작업이었다. (…) 굿펠로의 설득을 받은 이승만은 이 직후 대규모 시위를 중단하고 반외세-반미 행동을 자제하라는 언론 보도문을 발표했다. 이승만은 1월 15일에 김구에게 전문을 보내 소요와 폭력 시위 계획을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 이승만의 협조를 얻어낸 하지는 1월 16일에 김구와 2시간 반 동안 회담하며 설득을 시도했다. 브라운은 그 외의 우익 지도자들과 접촉했다. 이날 하지는 라디오와 방송을 통해, 반탁 시위가 남한 단정 운동과 긴밀히 연계된 것이라고 강력히 경고했다. (…) 하지의 지시에 따라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1월 17일에 모든 선동자들을 강력히 처벌하겠다는 경고 성명을 발표했다.

    미군정은 시위를 주도할 것으로 알려진 전국학생총연맹 본부를 1월 15일 3차례, 16일 1차례나 수색하며 관련자를 연행했고, 독촉국민회 부-군 지부장 회의에 참가한 지방 우익 지도자들을 귀가시키는 데 주력했다. 미군정의 강력한 조치로 인해 전국반탁학련 반탁궐기대회 1주년을 기념해 계획되었던 1월 18일의 대규모 반탁 시위는 별다른 일 없이 넘어갔다. 전국학련이 주최한 '탁치반대투쟁사 발표대회'가 천도교당에서 개최되었지만, 참석자는 1300명에 불과했다. 김구는 오늘만큼은 혼란을 일으키지 말고 조용히 해산해달라고 연설했다.

    이승만과 김구가 합의했던 1월 18~20일간의 반탁 시위와 폭동은 무산되었지만, 이번에는 김구가 독자적으로 세력 확장을 시도했다. 김구는 이승만의 계획을 이용해 자신을 수반으로 하는 임시 정부를 수립하려 함으로써 사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김기협 역사학자 ( tyio@pressian.com )

    “손님이 바꾼 복권으로 대박”…복권당첨 이색 사례들

    복권에 당첨될 확률은 벼락을 맞을 확률보다 낮다고 한다. 결코 아무에게나 찾아오지 않는 기회이기에 당첨을 둘러싼 뒷얘기는 언제나 흥미진진하다.

    중복당첨의 행운을 거머쥔 '신(新)의 손'에 대한 일화나 손님이 바꾼 복권으로 '대박'이 난 사연 등 이색적인 당첨 사례들을 모아봤다.

    #.2009년 3월 7일 추첨한 327회 로또 복권 추첨에서 12명의 1등 당첨자 중 무려 5명이 경남 양산의 동일 판매점에서 나왔다. 알고 보니 한 명의 당첨자가 5000원짜리 로또티켓 5게임을 동일번호로 적어내 전부 당첨된 것으로 확인됐다. '신의 손'으로 불리는 이 당첨자는 327회 1등 당첨금 8억8000만원의 다섯 배인 44억원을 받게 됐다.

    복권하면 특별한 '꿈'을 빼놓을 수 없다. 누구나 한 번 쯤은 '좋은 꿈'을 꾸고 복권을 구입한 경험이 있기 마련.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조상을 꿈에 본 뒤 행운을 얻은 주인공들이 많다.

    #. 가정형편은 넉넉하지 못했지만 효심이 깊었던 A씨는 자식들과 십시일반으로 고향 땅에 작은 선산을 마련했다. 일가친척들은 물론 주위 고향 어른들까지 L씨의 효성을 칭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죽은 지 30년도 넘은 남편이 갑자기 꿈에 나타나 L씨에게 돈뭉치를 주고 갔다. 다음 날 L씨는 복권을 구입했고, 1등에 당첨됐다.

    #. B씨는 할아버지 제삿날 정성스레 제사를 준비하고 잠이 들었다. 그날 밤 눈부시게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할아버지가 꿈에 나타나 B씨의 손을 꼭 잡았다. 평소에는 고된 일로 피곤해서 꿈을 거의 꾸지 않았던 B씨는 신기한 마음에 로또를 구입했다. 추첨 당일에도 일찍 잠이 들었는데, 다시 꿈속에서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다음날 당첨번호를 확인하니 1등이었다.
    해외의 경우 더 기막힌 사례들이 많다. 당첨번호가 2주 연속 동일했다던가, 하루에 복권 2장이 연달아 당첨되는 등 믿기 힘든 일도 있다.

    #. 2010년 10월 16일 이스라엘 2194회 로또의 당첨번호 6개(33,26,14,36,32,13)가 한 달 전 2187회의 1등 번호와 동일했다. 당시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 통계학 교수인 즈비 길루라 교수는 한 방송인터뷰에서 "6개 번호가 1달 안에 다시 1등 번호가 될 확률은 4조분의 1"이라며 "이는 화성에 생물이 살 확률과 동일하다"고 밝혔다.

    #. 미국 인디애나 주 설리반 시에서 남편과 함께 10여 년째 복권 판매점을 운영하고 있는 캐런지트 커. 2011년 1워25일 한 남성이 미리 골라놓은 6개의 번호가 자신이 말한 숫자와 다르다며 다른 복권을 요구했고, 그는 결국 그 복권을 되사야 했다. 복권 판매점을 운영하면서도 한 번도 복권을 사본 적이 없는 그는 별 기대감 없이 당첨번호를 확인했고, 복권은 100만 달러(11억2000만원)에 당첨됐다.

    #.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 사는 이름이 공개되지 않은 한 남성은 최근 하루에 복권 2장이 연달아 당첨되는 짜릿한 행운을 얻었다. 미국 MSNBC에 따르면 이 남성은 블랙티켓이란 복권에 당첨, 20만 달러(2억2000만원)가 넘는 당첨금을 수령하러 가는 도중에 은행 앞 슈퍼마켓에서 자신의 운을 시험해 보려고 산 즉석복권이 1만 달러(1100만원)에 당첨됐다고 한다.

    #. 2009년 9월 9일 TV로 생중계된 영국 로또 당첨번호가 추첨에 앞서 대런 브라운이란 마술사가 예언한 번호와 정확히 일치했다. 브라운은 방송직전 자신이 예측한 번호 6개(2,11,23,28,35,39)를 적어 넣은 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로또 추첨에 맞춰 자신의 공을 시청자들에게 보여줬는데 6개의 숫자가 당첨번호와 같았던 것이다. 이날 방송은 조작 시비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BBC 1'의 로또 추첨방송에 맞춰 '채널 4'의 스튜디오에서 생방송으로 진행됐다.

    #. 크로아티아 출신의 음악교사 프라노 셀리크는 33세였던 지난 1962년부터 1007년까지 35년간 7번의 죽을 고비에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했다. 기차추돌, 버스추돌, 자동차 폭발사고 등 남들은 평생 한 번 겪기도 힘든 일을 당했지만 부상 정도만 입고 다행히 목숨을 부지했다. 하늘이 그의 불행을 보상(?)해 준 것일까. 그는 2003년에 100만 달러(10억원)의 복권에 당첨됐다.

    #. 미국 콜로라도에 사는 중년부부 짐과 도로시는 2011년 4월 7일 자신들이 구입한 로또 6개의 숫자가 지역발행 일간지의 당첨번호와 일치함을 발견하고 자축파티까지 열었다. 하지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당첨금 450만 달러(49억원)의 행운이 신문사의 실수였음을 알게 됐다.

    #. 1993년 당시 52세인 한국계 이인자인 제니퍼 리는 미주리주 복권 추첨에서 1800만 달러의 복권에 당첨됐다. 복권당첨금 수령 직후 워싱턴 대학에 100만 달러를 기부했고, 민주당 등 정치권에 28만 달러를 후원했다. 세인트루이스 한인사회에는 건물을 기증하기도 했다. 과도한 기부와 도박으로 은행대출과 카드빚에 시달리던 그는, 2001년 결국 파산했다.

    <자료제공 = 기획재정부 복권위원회>

    건축가의 시간


    1889
    년은 프랑스 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 1886년 프랑스 정부는 100주년을 기념하여 파리에서 만국박람회를 열기로 하고 그 박람회를 상징해줄 장엄한 기념물을 원하게 됩니다. 프랑스 통상산업부는 당시의 기술적 진보와 산업발전을 인상적으로 보여줄 높이 300미터 폭 114미터의 철제구조물을 세우기로 하고 설계를 공모합니다.

    700
    여개의 설계도 중에서 에펠(Alexandre Gustave Eiffel 1832~1923, 프랑스 태생)의 설계도가 당선됩니다. 당선작이 발표되자 반대론이 들끓게 됩니다. 철제 구조물이 “마치 괴물 같다”느니, “기린을 가두는 우리”라느니, “추악한 해골” 이나 “침몰하는 배를 바라보는 등대”같다느니, 더 나아가서는 “노트르담 대성당에 대한 수치” 또는 “고전주의 법칙과의 비극적 단절”에서 “건축예술에 대한 전례없는 죄악”이라고까지들 떠들어 댑니다.

    1887
    2 14일 르땅(Le Temps)지에 모파상, 에밀졸라, 뒤마 등 당대 내로라 하는 파리의 작가, 화가, 조각가, 건축가 등이 “예술가의 항의” 라는 항의서를 발표하는데 “파리에 쇳덩이 조각으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삭막한 철 구조물을 세우는 것은 파리의 수치” 라는 내용입니다.

    300
    미터 높이의 에펠탑은 당시 어느 수학교수의 진단으로 200미터 높이에 이르면 붕괴될 우려가 제기되고 있었고 탑이 서게 될 샹 드 마르스 공원 주변 주민들은 탑이 자기 집으로 무너질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이게 되고 급기야 정부와 시를 상대로 소송하기까지에 이르게 됩니다.

    에펠은 만일 탑이 중도에 무너지면 모든 손해를 개인 비용으로 보상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1887 1 28일 공사가 시작됩니다. 에펠은 탑을 건설하기 전에 이미 긴 스팬(150미터) 의 철골 아치 등으로 많은 철교를 건설한 바 있는 교량기술자요 건축가였습니다.

    이 아치들은 비교적 작은 압연강(壓延鋼)을 대형 못(리벳)으로 접합하여 조립하는 구조입니다.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는 질 좋은 압연강재가 대량으로 생산되고 있어서 저렴한 가격에 공급이 가능했었죠. 각각의 부재를 삼각형으로 서로 이어서 트러스를 만들어 가는 트러스 공법으로 에펠탑의 경우 1,700여장의 설계도면과 3,700여장의 부문도면으로 오차가 있을 수 없는 단단한 철제구조물이 탄생됩니다.

    에펠이 설계에서 가장 크게 고려한 것은 탑이 바람에 견디도록 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바람에 견디도록 4개의 바깥쪽 기둥을 구조계산 아래 힘있고 강하게 구축합니다. 그리고 기하학적인 커브는 매우 부드러운 인상을 주게 되리라고 확신하였답니다.

    에펠탑은 300명의 인부가 26개월 만에 완성하여 1889 3 31일 준공됩니다. 15,000개의 강철 조각과 12,050,000개의 대형 못(리벳)이 사용되었으며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면 10센티미터 정도 흔들리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예측되었던 재난은 일어나지 않았고 탑이 준공되자 많은 찬사가 쏟아졌다고 합니다.

    당시 에펠탑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죠. 에펠은 자랑스레 외칩니다. “프랑스 말고 지구 상의 어느 국가가 자기네 나라 국기를 300미터나 되는 높은 깃대 위에서 펄럭이게 한단 말인가” 라고.

    원래 계획된 수명은 20년이었지만 120년 넘게 서 있는 에펠탑은 높이 324미터(건물 81층 높이) 41년이 지난 후 1930년 뉴욕의 크라이슬러 빌딩이 서기 전까지는 세계 최고의 높이를 자랑했었습니다. 탑의 유지 관리를 위해서는 주로 녹을 방지하기 위하여 7년마다 50 내지 60톤의 페인트로 도색작업을 새로이 하고 있습니다. 1985년 야간 조명장치가 설치되어 파리의 밤하늘을 밝히고 있으며 2002 11 28일 에펠탑에 2억 명 째의 관람객이 방문을 했다고 합니다.

    1886
    년 프랑스 정부는 신생 미합중국의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고 축하하기 위하여 자유의 여신상을 만들어 선물을 하게 됩니다. 뉴욕 앞바다 허드슨 강 입구의 리버티라는 작은 섬에 서있는 여신상의 발끝에서부터 오른손 횃불까지의 높이가 46미터이고 기단 부분은 48미터인데 그 전체의 내부 철재 골격을 에펠이 설계했다고 하는군요. 설계자, 건축가인 에펠 개인으로서는 자기의 이름이 붙은 에펠탑이 120년 넘게 서 있다는 것은 큰 영예임은 분명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잠깐 국내로 눈을 돌려보죠. 30년 전인 1977년 서울의 대학로에서 붉은 벽돌로 새로 지은 문예회관(현 아르코 극장)의 준공식이 거행됩니다. 준공식에 참석하러 왔던 문화계 인사들은 의아해 합니다. 문예회관의 설계자요 건축가인 김수근 (1931~1986)이 단하에 앉아 있었다는군요. 당시나 지금까지나 김수근은 김중업과 함께 국내 건축계의 큰 거목으로 작품이나 따르는 제자에서나 문화예술계에서는 홀대할 수 없는 처지였었는데 말입니다.

    단상에는 대단한(?) 인물들이 즐비하게 앉아서 축사, 기념사를 지루하게 이어갔겠지요. 30여년이 지난 2010 10 26일 서울 남산에서는 새로 지은 안중근기념관 준공식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행사를 주관하는 측에서는 역시 현상설계 당선자인 젊은 건축가(임영환, 김선현)의 의자는 준비 해놓지 않았답니다. 전도유망한 두 젊은 건축가는 씁쓸히 준공식장을 벗어났다고 하는군요.

    100
    , 200년 가는 건물의 밑그림을 그려 창조하는 건축가와 2, 3년 혹은 4, 5년 가는 직함을 지닌 대단(?)하신 분들이 단상단하로 나뉘는 세태는 3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변함이 없군요.

     

    장주익


    제물포고, 고려대를 나와 직장 (애경, 현대중공업, 현대건설, 금강개발, 뉴코아백화점 등)에서 근무. 정년퇴임 후 젊어서부터 관심 있던 건축분야에서 건축물의 이해를 돕는 해설 글을 쓰고  있다.

    Opinion The New York Times

    One’s A Crowd

    Riikka Sormunen
    Published: February 4, 2012

    MORE people live alone than at any other time in history. In prosperous American cities — Atlanta, Denver, Seattle, San Francisco and Minneapolis — 40 percent or more of all households contain a single occupant. In Manhattan and in Washington, nearly one in two households are occupied by a single person.

     

    By international standards, these numbers are surprising — surprisingly low. In Paris, the city of lovers, more than half of all households contain single people, and in socialist Stockholm, the rate tops 60 percent.

    The decision to live alone is common in diverse cultures whenever it is economically feasible. Although Americans pride themselves on their self-reliance and culture of individualism, Germany, France and Britain have a greater proportion of one-person households than the United States, as does Japan. Three of the nations with the fastest-growing populations of single people — China, India and Brazil — are also among those with the fastest growing economies.

    The mere thought of living alone once sparked anxiety, dread and visions of loneliness. But those images are dated. Now the most privileged people on earth use their resources to separate from one another, to buy privacy and personal space.

    Living alone comports with modern values. It promotes freedom, personal control and self-realization — all prized aspects of contemporary life.

    It is less feared, too, for the crucial reason that living alone no longer suggests an isolated or less-social life. After interviewing more than 300 singletons (my term for people who live alone) during nearly a decade of research, I’ve concluded that living alone seems to encourage more, not less, social interaction.

    Paradoxically, our species, so long defined by groups and by the nuclear family, has been able to embark on this experiment in solo living because global societies have become so interdependent. Dynamic markets, flourishing cities and open communications systems make modern autonomy more appealing; they give us the capacity to live alone but to engage with others when and how we want to and on our own terms.

    In fact, living alone can make it easier to be social, because single people have more free time, absent family obligations, to engage in social activities.

    Compared with their married counterparts, single people are more likely to spend time with friends and neighbors, go to restaurants and attend art classes and lectures. There is much research suggesting that single people get out more — and not only the younger ones. Erin Cornwell, a sociologist at Cornell, analyzed results from the General Social Survey (which draws on a nationally representative sample of the United States population) from 2000 to 2008 and found that single people 35 and older were more likely than those who lived with a spouse or a romantic partner to spend a social evening with neighbors or friends. In 2008, her husband, Benjamin Cornwell (also a sociologist at Cornell), was lead author of “The Social Connectedness of Older Adults,” a paper in the American Sociological Review that showed that single seniors had the same number of friends and core discussion partners as their married peers and were more likely to socialize with friends and neighbors.

    SURVEYS, some by market research companies that study behavior for clients developing products and services, also indicate that married people with children are more likely than single people to hunker down at home. Those in large suburban homes often splinter into private rooms to be alone. The image of a modern family in a room together, each plugged into a separate reality, be it a smartphone, computer, video game or TV show has become a cultural cliché.

    New communications technologies make living alone a social experience, so being home alone does not feel involuntary or like solitary confinement. The person alone at home can digitally navigate through a world of people, information and ideas. Internet use does not seem to cut people off from real friendships and connections.

    The Pew Internet Personal Networks and Community Survey — a nationally representative survey of 2,512 American adults conducted in 2008 that was the first to examine how the Internet and cellphones affect our core social networks — shows that Web use can lead to more social life, rather than to less. “Social Isolation and New Technology,” written by the Rutgers University communications scholar Keith Hampton, reveals that heavy users are more likely than others to have large and diverse social networks; more likely to visit parks, cafes and restaurants; and more likely to meet diverse people with different perspectives and beliefs.

    Today five million people in the United States between ages 18 and 34 live alone, 10 times more than in 1950. But the largest number of single people are middle-aged; 15 million people between ages 35 and 64 live alone. Those who decide to live alone following a breakup or a divorce could choose to move in with roommates or family. But many of those I interviewed said they chose to live alone because they had found there was nothing worse than living with the wrong person.

    In my interviews, older single people expressed a clear preference for living alone, which allowed them to retain their feelings of independence and integrity, and a clear aversion to moving in with friends or family or into a nursing home.

    According to research by the Rutgers sociologist Deborah Carr, at 18 months after the death of a spouse, only one in four elderly men and one in six elderly women say they are interested in remarrying; one in three men and one in seven women are interested in dating someday; and only one in four men and one in 11 women are interested in dating immediately.

    Most older widows, widowers and divorced people remake their lives as single people. A century ago, nearly 70 percent of elderly American widows lived with a child; today — thanks to Social Security, private pensions and wealth generated in the market — just 20 percent do. According to the U.C.L.A. economist Kathleen McGarry: “When they have more income and they have a choice of how to live, they choose to live alone. They buy their independence.”

    Some unhealthy old people do become dangerously isolated, as I learned when I researched my book about the hundreds of people who died alone in the 1995 Chicago heat wave, and they deserve more attention and support than we give them today. But the rise of aging alone is also a social achievement. The sustained health, wealth and vitality that so many people over age 65 enjoy allow them to maintain domestic independence far longer than previous generations did. What’s new today is that the great majority of older widows, widowers and divorced people prefer living alone to their other options, and they’re willing to spend more on housing and domestic help for the privilege. Some pundits predicted that rates of living alone would plummet because of the challenged economy: young people would move into their parents’ basements; middle-aged adults would put off divorce or separation for financial reasons; the elderly would move in with their children rather than hold on to places of their own.

    Thus far, however, there’s little evidence that this has happened. True, more young adults have moved in with their parents because they cannot find good jobs; but the proportion of those between 20 and 29 who live alone went down only slightly, from 11.97 percent in 2007 to 10.94 percent in 2011. In the general population, living alone has become more common — in absolute and proportional terms. The latest census report estimates that more than 32 million Americans live alone today, up from 27.2 million in 2000 and 31 million in 2010.

    All signs suggest that living alone will become even more common in the future, at every stage of adulthood and in every place where people can afford a place of their own.

    Eric Klinenberg is a professor of sociology at New York University and the author of “Going Solo: The Extraordinary Rise and Surprising Appeal of Living Alone.”

    [credit: 이창양 교수의 블로그 http://drcylee.blog.me/40151227013]


    뛰어난 이야기꾼


    내가 아직도 소설을 위한
    권위 있고 엄숙한 정의를 못 얻어 가진 것도
    "소설은 이야기다."라는 단순하고 소박한
    생각이 뿌리 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뛰어난 이야기꾼이고 싶다.
    남이야 소설에도 효능이 있다는 걸
    의심하건 비웃건 나는 나의 이야기에
    옛날 우리 어머니가 당신의 이야기에
    거셨던 것 같은 다양한 효능의
    꿈을 걸겠다.


    - 박완서의《모든 것에 따뜻함이 숨어 있다》중에서 -

     

    '쥬라기공원 현실로?' 3만년 전 열매로 꽃 피웠다
       
    [마이데일리 = 강지훈 기자] 3만 2000년 전 시베리아 지역에서 다람쥐가 굴 속에 감춰놓은 덜 익은 열매가 과학자들의 혁신적인 실험으로 다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미국 경제전문지 블룸버그는 21일(한국시각) 매머드 화석 유적지인 시베리아의 콜미아강 둑에서 석죽과 식물 실레네 스테노필라(Silene stenophylla)의 열매를 발견한 러시아 세포생물물리학 연구소 과학자들이 이 열매의 조직을 이용해 꽃을 피우고 번식력 있는 열매를 맺게 하는데 성공했다고 보도했다.

    연구진은 3만년 전 표토층이었던 지하 20-40m 지층에서 동결 상태를 유지해 온 다람쥐 굴 70여개와 그 안에 저장된 수많은 씨앗과 열매를 발견했다. 방사선 연대측정 결과 이들 식물의 연대는 3만 2000-2만 8000년 전으로 나타났다. 이 연구는 미국립과학원회보(PNAS) 최신호에 발표됐다.

    지금까지 고대 식물을 되살려 낸 사례로 가장 오래된 것은 이스라엘 마사다에서 발견된 2000년 전 야자 씨앗이며 중국 과학자들은 1300년 전 연꽃 씨앗으로 꽃을 피워내기도 했다.

    학자들은 처음엔 씨앗을 이용해 옛 식물을 되살리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하자 동물로 치면 '태반조직'과 같은 열매의 조직을 채취해 배양액에서 키웠다. 이 열매 조직의 세포들은 식물의 모든 부위로 자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배양액 속에서 조직이 싹을 틔우자 연구진은 이를 일반 토양에 옮겨 심었고 묘목은 잘 자라 꽃을 피우고 번식력 있는 열매까지 맺었다.

    연구진은 대부분의 식물 씨앗은 몇 년 안에 죽지만 1300년 전의 연꽃이나 스테노필라처럼 생명력이 강한 종들은 식물의 DNA를 보존하거나 수리하는 자체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다람쥐 굴이 발견된 지층은 매머드와 털코뿔소, 들소, 말, 사슴 등 대형 포유동물의 뼈들이 묻혀 있는 층 아래 쪽에 위치해 있으며 축구공 크기의 굴들은 맨 밑에 마른 풀, 그 위엔 동물의 털 등이 깔려 있어 천연 저장고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학자들이 되살려낸 식물은 지금도 시베리아 툰드라 지대에서 자라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연구진은 이런 종류의 실험이 식물의 진화 과정과 과거의 환경을 밝히는데 도움이 될 것이며 고대 표본이 존재할 경우 멸종한 식물도 되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 블룸버그 홈페이지 캡처]
    강지훈 기자 jhoon@mydaily.co.kr

    [조용헌 살롱] [824] 孔子―상갓집의 개

    40대 후반부터 주역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공자는 어느 날 자신의 남은 인생을 점치는 괘를 뽑아보았는데, '화산려(火山旅)'괘가 나왔다고 한다(황태연 '공자와 세계' 3권). '여(旅)'는 나그네 신세를 뜻한다. 세상사의 이치에 통달한 성인으로 여겨지는 공자도 인생 후반부는 나그네를 뛰어넘어 '상갓집의 개'(喪家之狗)로 살았다.

    50대 중반부터 60대 후반까지 14년 동안을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낭인으로 살았던 것이 공자 팔자였다. 이 기간 동안 죽을 고비를 4번이나 넘겨야 했고, 그날그날 끼닛거리와 잠자리를 걱정해야 하였고, 강도에게 포위되어 열흘 이상 굶주리는 상황도 있었다.

    '상갓집의 개'라는 표현은 사마천의 '사기'에 나온다. 사마천의 이 대목이 없었으면 우리는 공자의 파란만장을 제대로 모를 뻔했다. 상갓집의 개는 밥을 줄 주인이 없는 개다.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음식 찌꺼기를 상황 되는 대로 주워 먹어야 하는 개다. 주인이 없다는 것을 요즘 식으로 해석하면 직장도 떨어지고, 돈도 떨어지고, 길바닥에 나앉아야 하는 상황이다. 공자는 되는 일도 없고, 운도 없이 떠돌아다녀야 했던 서글픈 팔자였던 것이다.

    우리는 통상 성인 공자만 알지, '상갓집의 개' 생활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기 쉽다. 치욕적인 궁형을 당하고도 처절하게 살아야만 했던 사마천은 공자의 떠돌이 인생에서 깊은 동병상련(同病相憐)을 느꼈지 않았나 싶다. '공자도 이렇게 고생을 하며 살았는데, 여기에 비하면 내 처지는 낫구나' 하는 위안을 얻었지 않았을까! '상갓집의 개'라는 표현은 꼭 집어넣을 필요는 없었다고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사마천이 굳이 적어 넣은 것은 삶이라는 것이 성인(聖人)에게도 쉽지 않았다는 점을 후세에 전해주기 위한 의도였다.

    공자뿐만 아니라 "옛날 주 문왕은 감옥에 갇혔을 때 '주역'을 만들었고… 굴원은 초나라에서 추방되었을 때 '이소경(離騷經)'을 만들었다. 좌구명은 장님이 되고부터 '국어(國語)'를 만들었고, 손자는 다리를 끊기고서 '병법'을 만들었다"고 사마천은 말한다. 천재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역사적 인물들도 감옥생활 하고, 추방당하고, 장님이 되고, 다리를 절단당하는 불운과 불행을 피할 수 없었다는 것이 사마천의 인생관이었다.

    - 인왕산 鶴학巢소島도에서 최범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