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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떠나며

 

여행의 본질은 자유로움이다. 여행의 생명은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여행은 반복적인 일상의 억압과 무게로부터 벗어남이며 규칙적이고 잘 짜여진 삶에서의 탈출이다.

그래서 여행의 매력은 복잡하고 세속적인 욕망과 힘든 일상의 짐을 벗어 던짐에 있다.

계속되는 채움의 욕심을 비고 텅 빈 마음으로 바람처럼 훌훌 떠남에 있다....... 

세심한 준비, 꼼꼼한 짐 챙김보다는 작은 배낭 하나,

지도 한 장이면 더 자유스럽고, 더 멋있고 즐거운 여행이 될 것이다.

무거운 짐을 지고 골칫거리를 버리지 못하고 길을

떠나는 여행자가 있다면 그는 현명한 자가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길을 떠나려거든 눈썹도 빼어 놓고 가라"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버림으로써 자유로울 수 있으며 비움으로써 더 즐거울 수 있고 벗어남으로써 생명의 힘찬

소리와 삶의 소중함을 온 몸으로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더 높고, 더 아름다움으로 마음을 채울 수 있다면 충전의 기쁨과 더 큰 꿈을 꿀 수 있는 자유를 얻는다.

버림과 비움, 그리고 벗어남, 그래서 여행은 생각만 해도 즐겁고 힘이 솟는다....... 

나는 종종 여행을 우리 춤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 춤, 살풀이가 맺힘과 한과 아픈 응어리의 풀음이요,

치유라면 여행 또한 긴장과 스트레스의 풀음이요 치유다.

그러한 면에서 여행은 살풀이 한 바탕이다.

한바탕 춤판을 통해 응어리, 그 막힘과 맺힘을 뚫어 버리고 풀어 버림으로써,

해원의 카타르시스를 통해, 우리는 더 큰 생명의 활력을 찾는다. 생의 힘찬 에너지를 얻는다.

지나친 비약일지 몰라도 여행은 섹스와도 같다.

성이 단순히 탐닉과 욕망에 대한 담론을 넘어서 소통의 욕구,

자기의 존재의 회복과 확인을 위한 노력이라면 여행의 본질과 크게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다른 문화와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

그 신선한 부딪침에 대한 기대로 여행은 떠나기에 앞서 늘 가벼운 흥분과 설렘에 사로잡히는지 모른다.

이러한 면에서 여행은 홀로 가는 것이 좋다.

보고 싶을 때 보고 쉬고 싶을 때 멈추고 마음 내키는 대로 대상을 정해

다시 떠나는 그 자유로움을 위해서 우리는 가슴을 열고 누구의 구속도 없이 홀로 떠남이 좋다.

 

최 진용 전 국립국악원 단장의 <문화와 역사와 신화를 찾아서> 중에서

삶을 잘 들여다 보면

집은 저절로 풀리게 마련이다.

삶을 잘 알수록

더 살기 좋은 집을 만들 수 있다.

우리가 더 좋은 삶을 원할수록

더 좋은 집을 만들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집이 그저 그 모양이라면

그만큼 우리는

우리의 삶에 둔감하거나

우리의 삶을 잘 모르거나

우리가 원하는 삶이 무언지 확실치 않거나

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우리는 우리의 삶에 그렇게 둔감할까?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어떤 모양인지 모를까?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삶을 가지고 있지 못할까?

 

21세기엔 이런집에 살고싶다!

새주택설계연구회 지음

(김진애/박인석/최재필/

김혜란/신혜경/임창복/조성룡)

 

취한 배
Le Bateau Ivre

나는 도도한 강물을 따라 내려갈 때, 나는
예인(曳引)자들이 날 인도하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떠들썩한 인디언들이 그들을 깃발 기둥에
발가벗겨 묶은 뒤 과녁으로 삼아버렸다.

플랑드르 밀이나 영국 목화를 나르는 나는
선구(船具)들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내 예인자들과 동시에 그 야단법석이 끝나자,
나는 원하는 곳으로 강물 따라 흘러흘러갔다.

지난 겨울, 물결의 성난 찰랑거림 속으로,
어린이의 두뇌보다 더 말 안 듣는 나,
나는 달려갔다! 하여 출범한 반도도 더 기승스러운 혼란을 겪지 않았다.

폭풍우가 내 해상(海上)의 각성을 축복했다.
코르크 마개보다 더 가볍게 나는 춤추었다.
조난자의 영원한 짐수레꾼이라 불리는 물결 위에서,
열 밤 동안, 등대의 어리석은 눈을 그리워하지도 않고!

신 능금 같은 어린이의 살결보다 더 부드럽게,
푸른 바닷물이 내 전나무 선체를 꿰뚫고,
키와 닻을 흩뜨리면서, 나에게서
푸른 술 자국과 토사물을 씻어냈다.

그때부터 나는 별들이 우러나는 젖든 바다의
시에 기꺼이 잠겼다. 푸른 창공을 탐욕스레 보면서.
바다의 시에는, 넋을 빼앗겨 파랗게 질린 뗏목,
사념에 잠긴 익사자가 때때로 내려가고,

알콜보다 강하고 리라보다 장대한
쓰라린 사랑 적갈색 얼룩이 반짝이는 햇살 아래
헛로리와 느린 리듬 되어 술렁인다! 갑자기
푸르스름한 바다를 물들이면서.

나는 번개로 갈라지는 하늘, 소용돌이와
파랑과 해류를 알고 있다. 나는 저녁을,
비둘기 무리처럼 고양된 새벽을 알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았다고 믿는 것을 때때로 보았다!

나는 낮은 태양을 보았나니, 그것은 신비한 공포로
얼룩져, 아주 옛날 연극의 배우들과 비슷한 긴 보라빛
응고선(凝固線)들로, 덧문 떨리는 소리를 내며
멀리 굴러가는 물결들을 조명했다!

나는 꿈꾸었다 눈부신 눈이 내리는 푸른 밤을,
천천히 바다의 눈들로 올라오는 입맞춤을,
들어보지 못한 수액들의 순환을,
그리고 노래하는 형광체들의 노랗고 파란 깨어남을!

나는 신경질적인 암소떼들처럼 암초에
부딛치는 파도를, 려러 달 내내 뒤따랐다.
마리아의 빛나는 발이 콧잔등을 헐떡이는 대양에
처박을 수 있을 거라는 건 생각도 않고!

알다시피 나는 사람의 피부를 한 표범의 눈들이
꽃들과 뒤섞이는 믿기지 않는 플로리다,
수평선 아래에서 청록 가축떼에
고삐처럼 묶인 무지개들과 부딛혔다!

나는 보았다 거대한 늪이, 레비아탄
한 마리가 골풀 사이에서 온통 썩어가는 통발이,
잔잔한 가운데 물이 무너져내리는 곳이,
심연 쪽으로 폭포를 이루는 먼곳이 술렁이는 것을!

빙하, 은빛 태양, 진주모빛 물결, 잉걸불의 하늘!
갈색 만들의 밑바닥에 펼쳐진 보기 흉한 양륙지들,
거기에선 이들이 득실대는 거대한 뱀들이
검은 향기를 내뿜으면서 비틀린 나무에서 떨어진다!

나는 푸른 물결무늬의 그 만새어들, 그 황금빛 물고기들,
그 노래하는 물고기들을 어린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으니.
--- 꽃의 거품들은 내 출항을 가만히 흔들어주었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바람이 가끔 나에게 날개를 달아 주었다.

때때로, 흐느끼면서 내 옆질을 부드럽게 하는 바다가
극지방과 여러 기후대에 싫증난 순교자인 나를 향해
노란 현창(眩窓)까지 그 어둠의 꽃들을 올라가게 했고,
나는 무릎 꿇은 여자처럼 가만히 머물렀다......

섬처럼, 내 가장자리 위 갈색 눈의 욕쟁이 새들
그것들의 구슬픈 울음과 똥을 피하려 몸체를 뒤흔들면서.
그리고 나의 연약한 줄들을 가로질러 익사자들이
잠자러 내려갈 때, 거꾸로 항해했다!

그런데 나, 작은 만들의 머리칼 아래 길을 잃고,
태풍 때문에 새들 없는 창공 속으로 던져진 배,
소형 군함과 한자동맹의 범선들이라도 물에 취한
나의 시체를 건져올리지 않았을 나,

자유롭고, 담배 피우며, 보랏빛 안개에 싸여 상승하는 나,
훌륭한 시인들에겐 맛 좋은 잼이,
태양의 이끼와 쪽빛 콧물이 있는
붉어가는 하늘에 벽처럼 구멍을 뚫은 나,

7월이 불타는 듯한 폭발 구멍들이 있는 군청빛 하늘을
몽둥이 타작으로 무너지게 했을 때,
전기 궁형 구름들에 얼룩지고 검은 해마들의 호위를 받으며
미친 널판때기처럼 달린 나,

베헤모트들의 암내와 깊은 소용돌이의 신음 소리를
50해리 밖에서 느끼고는 전율하는 나,
파란 부동상태의 영원한 도망자,
나는 옛 난간들의 유럽을 그리워한다!

나는 항성의 떼섬들! 그리고 헛소리하는
하늘이 표류자에게 열려 있는 섬들을 보았다.
--- 수많은 황금빛 새들이여, 오 미래의 원기여,
너가 잠들고 유배되어 있는 곳은 저 밑바닥 없는 어둠 속인가?

그러나, 진실로, 나는 너무나 울었다! 새벽은 가슴을 에는 듯하다.
모든 달이 지긋지긋하고 모든 태양이 가혹하다.
쓰라린 사랑이 나에게 황홀한 무기력을 불어넣었다.
오 내 용골(龍骨)이여 깨져라! 오 나를 바다로 가게 하라!

내가 유럽의 물을 원한다면, 그것은
웅크린 어린이가 향기로운 황혼 무렵에
슬픔으로 가득차 오월 나비처럼 연약한
배를 띄우는 검고 차가운 물웅덩이이다.

오 파도여, 나는 그대들의 무기력에 젖어,
이제 더 이상 목화운반선을 바짝 뒤따를 수도,
군기와 삼각기들의 오만을 방해할 수도,
거룻배들의 끔찍한 눈 아래에서 항해할 수도 없다.

랭보 소개(1854~1891)

랭보 사진 아르튀르 랭보(1854~1891)는 엄격한 카톨릭 신자인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으나 세 번이나 가출하기도 하고, 광범한 독서와 비범한 시적 재능으로 독창적인 시들을 썼습니다. 견자(見者)의 시학을 내세웠던 그는 훗날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는데 '감각', '취한 배', '지옥의 계절', '일뤼미나씨옹' 등을 써낸 그는 시인 베를렌과의 유별난 교제와 그로부터 총격을 받고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문학에 더 이상 감흥을 못 느낀 그는 19세에 문학을 던져버린 이후 '힘있고 돈많은 사람'이 되기 위해 유럽 각국과 아프리카 등지로 다니며 유랑생활을 하다가 사업이 번창할 즈음 무릎 종양으로 1891년 37세로 숨을 거둡니다...

'저주받은 시인'- 정치, 예술, 인생의 혁명가, 부르주아의 졸렬함을 거부하는 젊은 반항의 상징... 이것이 우리가 랭보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들입니다. 그리고 베를렌과 지낸 짧지만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을 중심으로 그 후의 일생을 그린 영화 '토탈 이클립스'의 경우 랭보의 행동이 대부분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많은 사람들은 랭보가 14세에서 19세 사이에 쓴 그 작품들의 번득이는 재능에 가히 충격을 받습니다. 시라는 것은 인류 역사의 대단하지 않은 표현방식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한 그는 스무살 나이에 그것들을 내던지고 행위 속에서 더 완전한 표현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현대식 영웅은 행위의 인간'이라는 그가 역사에 남긴 메시지는 훗날 '도어즈'와 '너바나' 같은 많은 뮤지션과 아티스트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랭보 연보

1854년 10월 20일,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는 벨기에 국경 근처인 북프랑스의 샤를르빌에서 태어난다. 아버지 프레데릭 랭보는 근처 소도시에 주둔한 보병 제47연대 소속의 대위, 어머니 비탈리 퀴이프는 로셰의 농가 출신으로 광신적인 가톨릭 교도로서, 엄격한 성격임.
1860년[6세] 그의 양친들은 성격상의 불화로 별거, 어머니는 세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샤를르빌의 부르봉 거리에 있는 낡은 집으로 이사를 하여 여기서 영주하게 된다. 여기서 막내딸 이자벨이 태어나다.
1862년[8세] 샤를르빌에 있는 로사 학원에 입학.
1864년[10세] 숙제장에 '태양은 아직 뜨거웠다'라는 작문 등을 쓰다.
1865년 샤를르빌에 고등중학교 제7급에 입학한 이후 그리스어, 라틴어, 프랑스어와 그 밖에서도 눈부신 재능을 발휘하여, 겨우 몇 달만에 제6급으로 진급하여 교사들을 놀라게 하다. 또 신앙심도 두터웠다고 한다.
1866년[12세] 이 무렵부터 가톨릭교에서는 이단의 책들로 되어 있는 라틴어의 시 따위를 탐독하게 되다. 그러나 성적은 뛰어났고, 형 프레데릭이 제6급에 머물러 있는 동안 그는 제4급으로 진급하다.
1868년[14세] 5월, 황태자가 처음으로 성체배령(聖體拜領)한 것을 축하하는 라틴어의 시를 바쳐 감사장을 받다.
1869년[15세] 그 해 아카데미의 콩쿠르에서 라틴어로 시를 지어 수상, 이 해 연말에 프랑스어로 시(詩)의 처녀작 '고아들의 새해 선물'을 쓰다.
1870년[16세] 1월 2일, 전해 연말에 쓴 '고아들의 새해 선물'이 '라 르뷔 풀 투스'지에 발표되다. 한편 젊고 진보적인 조르쥬 이장발이 수사학(修辭學)의 교사로서 샤를르빌 고등중학교에 부임해 오다. 이장발은 랭보의 뛰어난 재능을 인정하고, 좋은 상담 상대가 되다. 이 젊은 교사가 랭보에게 끼친 영향은 커서, 특기할 만한 것이었다. 당시 프랑스 문단의 대가 위고의 작품과 고답파(高踏派) 작가의 시들을 랭보에게 빌려주기도 한다.
5월 24일, 랭보는 고답파의 시인 테오도르 드 방빌에게 '감각', '오필리어', '일체를 믿다'(나중에 '태양과 육체'라고 게제됨)의 작품과 편지를 보내고, "고답파 시인들 틈에 공석을 만들어 주신다면..."하고 그 게제를 의뢰했다.
8월 29일, 이미 7월 19일에는 프랑스와 프러시와의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승리를 거듭하는 독일군은 국경을 돌파하여 파리 포위의 직전에 있었다. 이날, 랭보는 학업을 포기하고, 책을 팔아버린 후 파리로 첫번째 가출을 하다. 그러나 교통비 부족으로 체포되고, 또 스파이 혐의로 마자스에 투옥된다. 랭보는 9월 5일자 편지에서 이 어려움을 이장발에게 알려 도움을 청하고 있다.
9월 8일, 이장발의 노력에 의해 석방된 랭보는 거기서 두에로 갔다가, 이 달 27일에 샤를르빌로 돌아오다. 그러나 방랑의 맛을 알게된 그는 그로부터 10일 뒤에 두번째 가출을 하게 된다. 이때는 걸어서 벨기에로 가고, 샤를르르와나 브뤼셀을 방랑하고 다시 두에로 간다. 이 동안에 '푸르름', '깜찍한 아가씨', '찬장', '겨울을 위한 꿈', '나의 방랑' 등을 쓰다. 10월 말, 랭보의 어머니는 이장발에게 부탁하여 그를 샤를르빌로 데리고 돌아오게 하다.
1871년[17세] 2월 25일, 랭보는 세번째 가출을 하다. 이 출분은 혁명적 정열과 방랑벽에 의한 것이었으나, 3월 10일까지 파리를 방랑하고, 결국에는 걸어서 샤를르빌로 돌아왔다. 3월 18일에는 파리 코뮌의 소요가 일어났다. 그 무렵의 랭보는 혁명적 정열을 작품과 언동으로 토로했다. 그리고 네번째 파리로 가기를 결심한 것은 4월 말이었다. 이 네번째의 방랑에서 그는 눈으로 본 반란군의 실태에 환멸을 느끼고, 혁명에 대한 정열은 식었으며, 시작(詩作)에 그의 정열을 돌렸다. 5월 13일에 이장발 앞으로, 그로부터 이틀 뒤인 15일에는 드므니 앞으로 랭보는 편지를 보내어, 새로운 시법을 개진하고 있다.
9월 초, 랭보는 이미 서정시인으로서 명성을 얻고 있던 대선배 폴 베를렌에게 편지와 작품을 보냈다. 베를렌은 그의 작품을 보고, 랭보의 재능에 감탄하여 그에게 파리로 오라는 편지를 보냈다.
9월 중순, 랭보는 파리로 가서 베를렌과의 방탕하고 기묘한 생활을 보낸다. 랭보의 초기 운문시의 태반은 이 시기에 씌어졌다.
1872년[18세] 랭보는 베를렌과의 동거생활에 싫증을 느껴, 3월에는 샤를르빌로 돌아왔다. 그러나 5월에 베를렌이 부르는 편지가 와서 다시 파리로 간다. 이 시기에 '눈물', '카시강', '갈증의 희극', '아침의 좋은 생각', '금의 시대', '새 살림' 등의 후기 운문시를 썼다. 또 운문의 대작 '일뤼미나씨옹'은 1872년의 작품이라 추정되고 있다.
7월, 압생트주(酒)와 방탕의 무질서한 생활을 버리고, 랭보와 베를렌은 벨기에로 여행에 나섰다. 그러나 무질서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9월에는 둘이서 영국으로 건너간다.
12월, 랭보는 혼자 되는 것을 원하여 고향인 샤를르빌로 돌아온다.
1873년[19세] 1월, 랭보는 베를렌이 런던에서 병으로 쓰러졌다는 것을 알자, 런던으로 돌아간다.
4월, 랭보는 로셰의 가정으로 돌아온다. 그 무렵 그는 산문시 '지옥의 계절'을 쓰기 시작한다. 베를렌으로부터 재삼 편지가 와서 5월에 또 한 번 영국으로 건너 갔으나 두 사람의 사이는 어색해질 뿐이었다.
7월 4일, 마침내 두 사람은 심한 말다툼을 하게 되고, 베를렌은 랭보를 런던에 남겨두고 브뤼셀로 돌아갔다. 랭보는 베를렌에게 런던으로 돌아와 달라고 편지로 애원을 한다. 마침내 기다리다 지친 랭보는 7월 8일, 베를렌의 뒤를 따라 브뤼셀로 간다. 결국 싸움은 되풀이 되고, 랭보가 파리로 혼자 떠나려고 하자, 베를렌은 둘이서 다시 한 번 런던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그러나 랭보의 굳은 의지에 베를렌은 실망과 술기운에 권초으로 랭보를 쏘아 왼쪽 손목에 상처를 입히는 사건이 일어난다. 베를렌은 체포되어 2년 금고형의 언도를 받고, 몽스의 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7월 하순, 랭보는 로셰로 돌아간다. 11월, '지옥의 계절'을 완성한다.
1874년[20세] 랭보는 이 해 연초 무렵, 새로 교제를 하게 된 시인 제르망 누보와 같이 런던에 머물렀다. 누보가 4월에 런던을 떠나자, 랭보는 12월 말에 샤를르빌로 돌아왔다. '일뤼미나씨옹'은 1872년의 작품이 아니라 이 해에 그 대부분을 썼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1875년[21세] 1월 16일에 베를렌은 교도소에서 나온다.
2월, 랭보는 슈트드가르트로 가서 가정교사 일을 한다. 그 달 말 몽스의 교도소를 나온 베를렌이 랭보에게 면회를 청하고 신앙을 권한다. 그러나 랭보가 받아들이지 않자 두 사람은 완전히 헤어진다.
5월, 슈트드가르트를 떠나 걸어서 스위스 등으로 여행을 한 다음 이탈리아로 간다. 그리고 밀라노에서 병으로 쓰러진다. 어떤 이탈리아 여성의 간호로 회복되고, 그 달 말에 블린디시로 향했으나, 다시 도중에 일사병으로 쓰러진다. 그러나 병을 무릅쓰고 파로스 섬으로 건너간다.
6월 15일, 리부른의 프랑스 영사에 의하여 랭보는 송환되었다.
그해 겨울, 샤를르빌로 돌아온 랭보는 가족과 같이 지내며 스페인어, 아라비아어, 이탈리아어, 근대 그리스어, 네덜란드어 따위를 배운다.
1876년[22세] 5월 19일, 네덜란드 식민지의 용병이 되어 6년간의 계약으로 300프랑을 받는다. 6월 10일, 일개 사병으로 입대하여 7월 23일 바타비아로 옮겨간다.
그러나 그해 8월에 네덜란드군을 탈주하여 살리타가를 시발점으로 방랑한 끝에 12월 말에 샤를르빌로 돌아온다.
1877년[23세] 랭보는 함부르크로 가서, 파리 곡마단의 통역이 되어 스웨덴과 덴마크를 일행과 함께 돌아다닌다. 스톡홀름에서 프랑스 영사관으로부터 송환명령을 받고 프랑스로 돌아간다.
9월, 랭보는 마르세유로 가 거기서 알렉산드리아로 떠나지만, 도중 병에 걸려 샤를르빌로 되돌아온다. 그 해 겨울은 샤를르빌에서 지낸다.
1878년[24세] 이 해 봄, 랭보는 동양으로의 여행을 떠나기 위해, 함부르크로 가지만 뜻대로 안되어 샤를르빌로 돌아온다.
10월, 랭보는 걸어서 겨울의 알프스를 넘어 제노바로 가며, 11월 19일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배를 타고 키프로스섬으로 간다. 그곳에서 프랑스 상사의 채석장 감독이 된다.
1879년[25세] 5월, 키프로스 섬에서 노역을 하다 장티푸스에 걸리자 프랑스의 가족들에게 돌아간다. 그 해 겨울은 샤를르빌에서 지낸다.
1880년[26세] 랭보는 다시 키프로스 섬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 해 8월에 키프로스 섬을 뒤로 하고, 아라비아 남단에 있는 아덴으로 간다. 아덴에서는 커피를 중개하는 상사에세 근무한다. 그곳 상사의 대표사원 자격이 되어, 이디오피아로 가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의 거래는 총기 매매였다.
12월 중순, 랭보는 이디오피아 하단에 있는 회사의 대리점으로 옮긴다.
1885년[31세] 이 해 가을, 랭보는 하단에서 부바사 사이의 미지의 오가딘 지역을 탐험하며 그 보고서를 파리의 지리학회에 제출한다. 그 무렵에서야 그는 약간의 재산을 모은다.
랭보는 10월 초 회사를 사직한다. 그는 독립하여 회사를 경영할만큼 성공한다. 프랑스 상인 페이르 라바튀를 만나 공동으로 무기 수입을 할 것을 계약한다.
1887년[33세] 2월 말, 코아의 메네리크 왕과 무기를 거래한다. 그러나 랭보는 메네리크에게 물품을 건네주고도 충분한 대가를 받지 못하여 손해를 본다.
1888~1890년[34~36세] 랭보는 사브레와 손잡고 무기의 밀수입과 상아, 커피 따위를 매매한다. 사업은 신통치 않았으며 다시 류마티즘에 걸린다. (이 동안에 노예매매도 한 것 같다는 주장도 있으나 분명치 않다.)
1891년[37세] 2월, 그때까지도 류마티즘에 시달리고 있었으나, 어느 날 갑자기 오른쪽 발에 심한 고통을 느끼고 그만 일어설 수 없게 된다.
4월, 일기를 쓴 적이 없는 랭보는 병의 고통을 참아가면서 연필로 여행일지를 쓴다. 들것에 실리어 제이라에 도착하여 여기서 아덴으로 간다.
5월 22일, 마르세유의 콩세프숑 병원에 입원한다. 이 달 26일에 무릎의 악성종양이 악화되어, 어머니의 입회 아래 오른쪽 다리를 절단한다. 어머니는 랭보의 동생 이자벨의 병과 밭일 때문에 랭보를 남겨두고 6월 10일 로셰로 돌아가 버린다.
7월 23일, 절단한 곳이 치유되어 퇴원, 로셰로 돌아간다. 그러나 보행의 곤란에 괴로워한다. 얼마 안있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8월 23일에 다
시 마르세유의 병원에 입원한다. 이때 여동생 이자벨의 돌보아 준다. 이자벨은 랭보의 좋은 동조자였고, 그의 임종까지 곁에 있는다.
11월 10일, 랭보 사망.
* 많은 부분을 이준오 교수님이 번역한 '랭보 詩選'(책세상)에서 발췌했습니다... ^^;

정선의 〈인왕제색도〉

 

- 인왕산 鶴학巢소島도에서 최범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