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최범석입니다.

 

제 아버님(최일곡 崔一谷 알렉스)이

2002년 3월 14일 0시 20분 일산에서 운명하셨습니다.

원래 건강하셨던 분이었는데,

모든 일이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일어나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군요.

지금은 경기도 파주 천주교 공원묘지에 누워계십니다.

올해 연세가 예순아홉이시니,

아직 삶을 즐기실 날들이 많을줄 알았는데

그렇게 허무하게 떠나셨습니다.

아버님에 대해 그리고 아버님께

하고 싶은 얘기가 많지만,

지금은 제 마음속에 간직하고 싶군요.

어느땐가 아버님 남기신 빈 공간이 현실로 받아들여질 때,

그 얘기들을 글로 표현하려고 합니다.

 

아버님 장례 때 옆에서 진심어린 마음으로 도움을 준 친구들과

따뜻한 마음과 말로 위로해준 분들,

그리고 저를 기억해주시고 걱정해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별의 고통 때문에 만남을 거부할 수는 없겠지요.

만남이 없으면 이별도 없겠지만,

만남 없는 삶이란 또한 있을 수 없으니까요.

그 사별의 고통은 바로 우리가 살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만남을 위해 치뤄야하는 비용인가봅니다.

 

장례식을 마치고 아버님 서재를 둘러보다가

오래된 스미스 코로나 타자기에 말린 종이 위에서

아버님이 병원에 가시기 직전에 직접 타이핑하신

시를 보았습니다.

 

빈 자리에 그 반짝이는 물 출렁이는 걸 바라봐야할 시간.

세상을 잊기 위해 나는 산으로 가는데,

물은 산 아래 세상으로 내려간다.

버릴 것이 있다는 듯 버리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있다는 듯

나만 홀로 산으로 가는데,

채울 것이 있다는 듯 채워야 할 빈자리가 있다는 듯

물은 자꾸만 산 아래 세상으로 흘러간다.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눈을 감고 내 안에 앉아 빈 자리에

그 반짝이는 물 출렁이는 걸 바라봐야 할 시간.

 

 


<사별> 진웅기(수필까/번력문학가) / 한국수필가협회가 엮은 <<우리가 잃어가는 것들>>

사람이 죽어 누워도 가족은 그 사실을 납득하지 못한다. 눈 앞에 일어난 현상을 빤히 보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멍하니 바라보다가 사정을 조금 알아차리게 되면 무서운 아픔이 이는데, 마음은 여전히 어떻게든 이 사실을 부정(否定)하려고 몸부림친다. 단지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닐까? 되살아날 수는 없을까? 자꾸 시체를 확인해 본다. 사실의 검은 구름은 괴로운 발작을 마음 안에 일으키며 밀려나고 밀려들고 한다.

......

슬픔이란 사실의 인정(認定)과 부정의 싸움이다. 그의 죽음을 마음에서 밀어내고 그가 살아 있는 것처럼 느끼려는 줄기찬 노력이다.

사람은 한 번 죽으나 가족은 그의 죽음을 세 번 보아야 한다. 숨을 거두는 것이 첫 번째요, 널 속에 못질하는 것이 두 번째요, 세 번째는 땅속에 묻는 일이다. 아무리 서러워도 그의 시체를 옆에 놓고 살 수는 없다. 어디 모셔 놓을 데도 없다. 결국 형체 있는 것의 가장 성실한 보호자인 대지에 맡길 수밖에 없다. 그러데 그가 살아 있다는 환상을 버릴 수 없으니 잠깐 잠들어 있는 그를 흙속에 처박을 수가 없다. 매장은 인류가 가장 늦게사 갖게 된 습관이다.

......

애정은 실상 별 도움이 못 되는 것이다. 애정을 가장 강하게 느끼는 것은 언제인가? 그가 죽었을 때이다. 그러나 산 사람에 대한 애정은 기쁨이지만 죽은 사람에 대한 애정은 아픔이다. 그가 살았을 때는 애정은 흐려 있었다. 죽음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보면서도 진심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가 죽는다 해도 그것은 별일이 아닐 것 같았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회한이 따른다. 슬픔이란 후회의 아픔인 것이다. 그를 죽게 한 실수가 몇십 가지고 되풀이 생각난다. 뒤늦게사 그를 살릴 수 있었던 기회가 정세하게 발명된다. 그것은 그를 산 것처럼 느끼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슬픔은 회상(回想)이다. 살았을 때는 그를 조금밖에 생각지 않고 죽으면 그를 많이 생각한다. 그가 남기고 간 커다란 빈칸을 그의 생각으로 채워야 한다. 그가 살았다면 잊고 말 작은 일들이 대신 살아나 그의 전기(傳記)를 되풀이 엮는다. 그것이 아픔인데도 그를 살리는 작업을 멎을 수가 없다.

......

사별은 한편으로 아쉬움이요 다른 편으로 연민(憐憫)이다. 그가 그립고 그가 불쌍하다. 마음은 번갈아 자기를 위해 울고 또 그를 위해 운다.

......

매우 이기적인 것 같으면서도 기쁨을 혼자 가질 수가 없는 것이 사람이다. 기쁨은 누군가에 애정으로 발산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이제는 사랑할 수 없게 된 그의 존재가 느껴지니 즐거움이 괴로움이다. 모든 즐거움이 마음에 와 닿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몸을 도사리고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럴 수도 없는 것이 인간사(人間事)여서 사람을 묻고 와서도 맛이 이상해진 김치로도 밥을 먹어야 하며 따뜻한 이불 속에 발도 뻗는다. 그것은 자기만 행복을 갖는 일에의 가책이기도 하다.

 

 

강희언의 〈인왕산도〉

 

- 인왕산 기슬 鶴학巢소島도에서 최범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