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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의 한가운데] 3. 전원의 봄 (끝)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다(柳綠花紅)."

일찍이 생동하는 봄의 풍경을 보고 놀란 시인 소동파의 시구이다. 눈은 옆으로 코는 세로로 달려 있는 것과 같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에 감동하는 시인의 어린애 같은 눈길을 보라.

그런 경이에 찬 눈길이 있어 꽃과 함께 봄은 온다.

올해는 이상고온 탓에 산수유, 매화, 진달래가 핀 다음에 개나리, 목련, 살구꽃을 거쳐 복사꽃, 벚꽃, 배꽃이 피는 그 차례도 없이 그야말로 백화가 한꺼번에 만발이다. 순결함, 요염함, 우아함, 화사함 등의 관을 쓴 저 휘황한 화개(花開) 앞에서 세상에 열리지 않을 마음이 어디 있으랴.

더욱이 가지각색 빛나는 꽃의 색깔을 보라. 차갑기 그지없는 철학자 비트겐슈타인마저도 "색깔은 철학할 마음을 일으킨다"고 했으니 그 꽃색깔에 환해지는 우리 범인(凡人)들의 마음이야 오죽하겠는가. 세계 최고인 샤넬 향수조차도 결코 가 닿지 못할 싱그러운 꽃의 향기는 또 어쩌는가.

이런 날 내가 냉이, 민들레, 꽃다지, 제비꽃 등 풀꽃 낱낱에게마저도 그 이름을 불러주듯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준다면 "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 싶"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번에 조계종 새 종정에 추대된 법전스님은 인터뷰에서 "난 꽃은 별로여. 덧없잖아. 대신 소나무를 좋아해. 느티나무도 좋고"라고 했다. 그런데 요즈음 내 고향 농사꾼들은 또 다른 이유로 애써 꽃을 외면한다. "논일 밭일이 태산인데 꽃 쳐다볼 틈이 어디 있어. 화전놀이 꿈은 말 그대로 꿈일 뿐이여."

하기야 벌써 개구리들이 개울마다 암놈 수놈 등에 업고 업히어 감창소리 마구 앓아댄다. 엊그제 비조차 흠뻑 내리니 더 바빠져서 논두렁 쌓고 논물을 가두랴, 검은 그루에 두엄 내고 애벌갈이 하랴, 보리밭 비배관리 하고 하우스 속의 딸기며 토마토 따내고, 또 씨나락 담근 뒤 못자리 설치하랴, 그야말로 촌음을 다툰다.

그러나 힘써 일하다가 담배 한 대참의 우두망찰로라도 밭가의 홍도화에 취하는 일쯤은 왜 없겠는가. 다 늙어 꼬부라진 칠순 노파도 "봄바람에 꽃이 날리는 꿈을 꾸면, 깨어나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하거늘, 하물며 꽃 피고 새 울면 씨뿌리고 사랑하던 사람들이 왜 꽃을 모르겠는가. 비록 덧없는 꽃이지만 덧없는 것이야말로 또 더욱 애절한 게 아니던가.

이럴 때 머위잎, 불미나리, 냉이무침에다 애기쑥국으로 겨우내 군둥내 났던 입맛을 되살리며 그 꽃 지는 것 바라보라. 그러면 어느새 뒷산엔 연두초록이 마구 번져가고, 동구밖 느티나무는 그 둥근 초록의 광휘로 마을을 감싸리라. 이어 강변의 미루나무는 제 온몸의 금은보석을 짤랑거리며 빛과 바람의 전언(傳言)을 세상에 마구 퍼뜨릴 것이니 또 어찌하랴.

벽암록에 "푸른 바람 두루 불어 다함이 없네(淸風 地有何極)"라는 선어가 있다.

맑고 푸른 바람은 드넓은 대지에 두루 가득하여 어떠한 한정도 차별도 없는 것이니, 절망과 슬픔 중에서도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만 있으면 언제나 진리의 한복판에 있다는 말이겠다. 사실 자기의 수고로운 노동으로 먹을 것 걱정만 없다면 어디서든 천국일 사람들.

그들은 빛과 바람의 전언에 오래 전부터 귀기울여온 것이다.그러니 올해 또 꽃이 지고 봄날이 간다한들 어찌하랴.

고재종 시인

 

2002/04/26 18:32 <동아일보>

[철학의 창]조성택/늙은 수컷 원숭이

한 문화인류학자의 보고서. 남태평양 어느 섬에 서식하는 원숭이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정보의 수용과 유통 채널을 살펴보았다. 모래에 섞인 열매를 하나 하나 가려먹는 원숭이들 앞에서, 열매가 포함된 한 웅큼의 모래를 손으로 떠서 물에 모래를 가라앉혀 보다 손쉽고 효율적으로 열매를 골라낼 수 있는 방법을 시범으로 보인 뒤 이 새로운 기술 정보가 어떤 경로로 전파되는지를 관찰했다. 젊은 암컷 원숭이가 가장 먼저 신기술을 받아들이고 다음으로 그 원숭이의 친구, 젊은 수컷 원숭이, 엄마 원숭이의 순서로 신기술이 보급되어 갔다. 하지만 끝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여전히 재래식 방식으로 열매를 골라 먹는 것은 늙은 수컷 원숭이들이었다고 한다. ▼젊은 암컷의 역동성▼ 이 보고서는 한 사회를 들여다보는 일종의 프리즘 역할을 해준다. 젊은 암컷 원숭이로 대변되는 사회의 역동성과, 늙은 수컷 원숭이로 대변되는 보수성이 그것이다. 역동성과 보수성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을 때 그 사회는 이상적이겠지만, 그러한 완전한 평형을 이루고 있는 사회란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어느 쪽에든 쏠려 있게 마련이고, 또 다른 평형을 이루기 위해 사회는 부단히 움직여 나간다. 기원전 6세기 경 인도 사회. 집을 떠나 숲에서 생활하며 걸식으로 연명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생겨나게 된다. 슈라마나(sramana·沙門)라 통칭되는 이 젊은이들은 혼자서 혹은 소그룹으로 생활하면서 당시 인도 사회의 전통적인 바라문 사상에 따르지 않고 나름대로의 새로운 진리를 추구하며 수행했다. 이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당시 인도 사회의 제식문화(祭式文化)에 대항하는 반문화(反文化·subculture)가 형성되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 점에서 슈라마나들은 1960년대 미국 버클리대학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히피운동에 비유되기도 한다. 싯다르타는 35세에 ‘깨친 자’, 즉 붓다가 되었다. 붓다의 가르침은 새로운 것이었고 그 새로운 것에 귀 기울였던 선남선녀가 당시의 ‘젊은이들’이었다.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인 ‘지혜’는 흔히 요즘 영어의 ‘wisdom’으로 이해되는 ‘경험과 연륜에서 나오는 노인의 지혜’가 아니라 다이아몬드도 쪼개내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의미했다. 당시 불교는 젊은이들의 젊은 종교였던 것이다. 2002년 대한민국. 14년의 미국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두 달 조금 지난 지금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왜 왔니?”이다. 다들 못 나가고, 못 보내서 안달인데 중학교 다니는 애들까지 끌고 왜 들어왔느냐는 말이다. 한국에 있는 사람들은 한국이 얼마나 역동적인 사회인지 잘 모른다. 미국이 기회의 나라라고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그것은 50년대나 60, 70년대의 이야기다. 문화적 의미에서 미국은 이미 장년도 지나 노년기에 접어들기 시작한 나라다. 그래서 안정되고 원숙한 면은 있어도 청장년의 역동성은 이미 찾아보기 어렵다. 난 젊게 살려고 한국에 왔다. 한국은, 때로 혼란으로 느껴질 만큼 불안정하고 유동적인 사회다. 그러나 최근 50∼60년 간의 큰 흐름으로 볼 때, 여전히 기회의 나라이고 젊고 역동적인 사회다. 한국의 역동성은 ‘젊은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그러나 원숭이 사회와 인간 사회가 다른 것은 역동성이 반드시 생물학적인 남녀노소의 차이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젊은 여자 중에도 ‘늙은 수컷 원숭이’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이가 들어도 ‘젊은 암컷 원숭이’ 같은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정년퇴임 후에도 여전히 후학들과 모여 공부하고 이전까지 해오던 연구를 계속하는 ‘젊은’ 선배교수들을 보았고, 외환위기 이후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다시 학교를 다니며 공부하는 친구도 보았다. 한결같이 젊은 한국의 ‘젊은이’들이었다. ▼새로운 감성이 한국의 미래▼ 미국의 철학자 마르쿠제는 1960년대 미국과 유럽의 젊은이들을 가리켜 현대사회의 전환을 위한 ‘새로운 감성’이라고 불렀다. 비슷한 시기인 1960년대 한국에서는 ‘새로운 감성’이 4·19혁명으로 나타났고, 이는 그후 한국사회 각 분야에서 세대를 거쳐 이어져왔다. 그런데 이 젊은 한국에서 ‘늙은 수컷 원숭이’들의 합창소리를 가끔 듣는다. ‘늙은 수컷원숭이’들의 레퍼토리는 다양하기도 하다. 젊은 한국의 미래를 위해 ‘조기유학에 관한 법안’보다는 이런 특별법은 어떨까. ‘늙은 수컷 원숭이들의 이민에 관한 특별법.’

조성택 고려대 교수·철학

'미니예술품' 월드컵 입장권의 모든 것

<굿데이Good Day> 2002. 5. 18 토요일

영국 맨체스터에 있는 벰로즈사 인쇄기가 월드컵
입장권을 거침없이 토해내고 있다.

 


[관련기사]
[입장권 제작 과정]
월드컵 입장권 5가지 보안장치 '위조는 없다'

월드컵 입장권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고, 어느 경로를 통해 구입자의 손에 쥐어질까.

궁금증을 풀기 위해 최범석 한국월드컵조직위(KOWOC) 마케팅 전문위원이 지난 4월 말부터 이달 초까지 영국 맨체스터 벰로즈사와 바이롬사를 방문했다.

또한 입장권은 위조의 위험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을까. 월드컵의 진한 감동의 현장을 감상할 티켓인 입장권의 모든 것을 철저히 해부했다.

<최범석 사업국 전문위원>


필자가 90년대 중반 세계무역기구(WTO)에 근무할 당시 뤼드빅이라는 프랑스 외교관 친구와 가깝게 지냈다. 그는 거실 벽면에 와인 라벨들을 작은 나무액자에 담아 걸어놓은 독특한 취미를 가졌다. 자신이 아끼는 최고급 보르도산 와인은 언제 누구와 마셨는지 등의 추억을 영구히 보관하는 것이었다.
 
필자 역시 추억으로 남기고 싶은 소품들을 수집한다. 그 중에는 94년 미국월드컵 한국 경기와 유로2000 결승전 입장권이 있다.
 
뤼드빅이 와인 라벨을 바라보며 옛 추억을 되새기 듯 가끔 지난 입장권을 보며 90분 동안 경기장을 메우던 함성을 기억 속에서 재생한다. 또 하나의 소중한 기념품으로 남을 2002년 한·일월드컵 입장권 인쇄 과정을 최종 점검하기 위해 영국 맨체스터로 출장을 떠났다.


 
이번 월드컵의 입장권 제작은 국제축구연맹(FIFA)의 해외 판매대행사인 영국의 바이롬(Byrom)사가 맡았는데, 계획보다 인쇄 일정이 많이 지연됐다.

1년전에 입장권을 구매한 한국 축구팬들의 아우성을 등에 업고 40여명이 근무하는 바이롬사의 사무실에서 담당자들과 회의를 시작했다.

인쇄가 늦어진 가장 큰 이유는 국내 판매분을 비롯해 공식스폰서, 일본, 기타 해외 판매분 등 많은 데이터가 한꺼번에 몰리는 바람에 프로세싱 자체가 늦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바이롬사의 담당 직원들은 밤샘 작업을 하고 있었지만, 그 많은 데이터를 단시일 내에 효율적으로 처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음은 더없이 초조했지만 담당 직원들에게 더 빠른 처리를 촉구하고 작업 과정을 수시로 체크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인쇄과정 자체에서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바이롬 본사에서 차로 약 2시간 떨어진 인쇄사 벰로즈(Bemrose)로 향했다. 벰로즈사의 월드컵 입장권 프로젝트 매니저 올리버와 퍼거슨 이사가 우리를 맞았다.

그들은 우리의 다급한 상황을 이해하고 한국 입장권의 인쇄 데이터가 바이롬사로부터 넘어오는 즉시 24시간 공장을 가동하여 인쇄를 최대한 빨리 끝마치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국내에서의 효율적인 배송을 돕기 위해 우리 측이 제안한 대로 교부처별로 포장해주겠다고 했다.
 
공장은 철저한 보안 속에 가동되고 있었다. 바탕 디자인만 찍혀 있는 거대한 입장권 두루마리가 쌓여 있었고, 이후 홀로그램 부착과 개인정보 입력, 포장 작업까지 일사불란하게 작업이 이뤄지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러시아 국내용 복권이 인쇄되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방금 인쇄된 한 대형 은행의 자기앞수표가 포장되고 있었다.
 
퍼거슨 이사는 "위조를 방지하는 특수 인쇄물을 제작하는 게 우리 회사의 가장 큰 자랑거리죠"라고 설명했다.
 
출장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동안 인쇄 지연으로 인해 월드컵의 최대 고객인 축구팬들이 감수해야하는 피해를 어떤 식으로 보상해줘야 할지 난감했다. 그나마 한국대표팀을 비롯한 모든 팀의 멋진 플레이로 어렵게 입장권을 구매한 사람들을 조금이나마 위로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월드컵이 끝나고 한국의 10개 경기장이 텅 비어도 한달 동안 지구촌을 뜨겁게 달궜던 감동은 입장권과 함께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믿는다.

최 범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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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의 〈인왕제색도〉

 

- 인왕산 鶴학巢소島도에서 최범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