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가 되려면 목숨을 걸어라(이광웅)

이 땅에서
진짜 술꾼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술을 마셔야 한다.

이 땅에서
참된 연애를 하려거든
목숨을 걸고 연애를 해야 한다.

이 땅에서
좋은 선생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교단에 서야 한다.

뭐든지
진짜가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목숨을 걸고……

“잡초를 한자로 풀면 `잡스러운 풀'이 됩니다. 한술서적을 뒤져 보면 영어로는 정의가 수십 가지가 나와요. 가장 대표적인 정의를 한두 가지 들어보면, `원치 않는 장소에 난 모든 풀들', 또는 `잘못된 자리에 난 잘못된 풀' 대개 이렇습니다. 이것은 풀에 대한 철저히 인간 중심주의적인 정의입니다. `내가 심은 것은 작물이고, 내가 길러 먹을 것 또한 작물이다. 너는 내가 길러 먹을 작물의 영양을 빼앗아 먹고, 재배하는 데 방해만 되니 하등 쓸모가 없는 풀이다. 그러므로 너는 나의 이해와는 상반되는 적이다. 내가 살기 위해서 미안하지만 너는 모조리 죽어 주어야겠다.'”

“사실 이 땅의 주인은 식물입니다. 지구상에 이렇게 동물들이 살 만한 조건을 만들어 준 게 식물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어느날 딱 나타나서는 야채를 심어 놓고 원래 주인인 풀들을 다 쫓아냈어요. 풀만 쫓아낸 것이 아니라 그런 풀들을 먹고사는 온갖 짐승들, 생물들을 다 쫓아냈습니다. 그 결과 이 자구상에 생물종들이 현저하게 사라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보고에 의하면 하루에도 몇백 종씩 사라져 가고 있다고 합니다.”

“사실 잡초 입장에서 보면 자신을 잡초라고 부르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얘기죠. 일종의 모독입니다. 사람들이 이상한 작물을 심어 놓고 자신을 모조리 제거하려고 드니 잡초로서는 정말 견디기 어려운 노릇입니다......그래서 저는 잡초라는 말을 안 씁니다. 대신에 저는 야초(野草)라는 말을 쓰고 있어요.”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쓸모없는 것은 하나도 안 만들었다는 겁니다. 야초도 마찬가지예요. 야초가 쓸데없이 그 자리에 난 건 하나도 없어요. 다 자연이, 그 땅이 필요해서 야초를 그 자리에 키우는 것이죠.”

황대권의 <야생초 편지> 중에서

<옥잠화>

<까막중>

<조롱박>

<수박꽃>

<담쟁이덩굴>

미모와 애교를 자랑하는 학소도 지킴이 <서울이>

씨가 날아와 학소도 뜰 구석에서 자생하는 어린 <측백나무>

2003년 학소도 <수확> 작품

둘레 180㎝, 무게 40㎏인 초대형 호박이 충북 보은군 회남면 한 농가의 밭에 열려 화제다. 어른이 양손을 뻗어 안아 보지만 팔이 모자란다./연합

[시론] 不倫 공화국

요즘 안방 극장과 영화관에 부는 바람이 인기가 있다. 드라마에선 앞집 뒷집 아줌마들이 바람을 피우고 부부가 맞바람을 피운다. 또 영화에선 아예 가족 모두가 떼바람을 피우기도 한다. 요즘 불륜은 아이들 장난처럼 코믹하게, 혹은 스트레스를 푸는 운동처럼 천연덕스럽게 다뤄지고 있다. 그리고 불륜 당사자들은 뻔뻔스러울 정도로 태연하고 행복해 보인다.

그들은 불륜을 마치 피로회복제 한 병을 마시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픽션에서 불륜은 종종 생활의 청량제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미화되곤 한다. 또한 불륜이 부부간 부조화와 갈등 또는 배우자의 무관심과 결혼생활의 권태에서 비롯되는 당연한 권리처럼 묘사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결혼이 개인을 속박하는 악처럼, 불륜은 결혼과 가족의 굴레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선처럼 그려지고 있다. 그래서 요즘은 싱글족이나 동거족이 늘고, 이것도 저것도 선택할 수 없는 기혼자들은 바람을 피운다.

그러면 결혼은 왜 하는가. 결혼은 배우자 서로가 상대방에 대한 애정과 함께 자기희생을 요구하면서 성관계의 배타적인 독점을 표방하는 사회적 계약이다. 사랑은 본래 견고하지 못한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결혼제도, 법, 도덕, 종교 등 온갖 사회적 힘으로 사랑을 붙들어 매어 부부에게 심리적 안정을 주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생활에는 부부 불화나 욕구불만족 등이 발생한다. 고민하던 자아는 결국 사랑과 결혼을 이상과 현실처럼 분리된 것으로 인식하게 되고, 진정한 사랑은 결혼제도 밖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특히 여성은 육아, 가사, 가부장적 남편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애인의 배려 속에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된다.

미국 사회학자 아네트 로손과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 부부는 보통 사람들이 사랑과 결혼에 대해 지나친 가치를 부여한 로맨틱 신화를 갖고 있음을 지적했다. 사람들이 불륜을 저지르는 이유는 결혼의 환상에 대한 실망과 뒤늦게 발견한 자아정체성 때문인 것이다. 80년대 후반 로손의 연구에 의하면, 불륜 당사자들은 자신의 불륜행위가 로맨틱한 결혼생활을 하지 못한 데에 대한 감정적 보상이라고 느낀다. 또한 불륜 남녀 모두 불륜을 통한 성적 충족감을 개인 존재에 대한 확인으로 받아들였다. 즉, 불륜을 통해 성적인 만족감, 자존심, 자신감을 회복하여 생의 활력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배우자를 기만했다는 죄책감과 발각의 두려움 등 불안한 감정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같은 죄책감은 최근 현저하게 줄었다. 2003년 미국의 성 연구가 수잔 사피로 브래쉬는 간통을 한 미국 가정주부 90%가 죄의식을 못 느낀다고 밝혔다. 오히려 이들은 간통의 쾌락과 흥분을 느낄 자격이 있다고까지 말했다. 또한 가정주부의 60%가 최소한 한번 불륜을 저지를 것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부부생활이 원만한 남녀들까지도 불륜에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조사결과도 발표되고 있다. 참으로 결혼제도와 부부생활 및 가족 붕괴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불륜은 당사자에게 새로운 사랑이며 쾌락이지만 그 배우자에게는 배신, 분노, 질투, 절망 그 자체이다. 그러나 부부 모두가 결혼 이데올로기와 관습에 빠져 사랑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책임이 있다. 결혼이나 불륜은 부부간의 애정과 의사소통 및 상호 신뢰에 관한 부부 당사자들의 문제인 것이다.

불륜 픽션들은 결혼 관습에 빠져 애정과 의사소통이 부족한 부부생활, 가부장적 결혼생활에 반발하고 자기 정체성을 찾으려는 주부, 형식적인 일부일처제의 문제 등을 드러내고 있다. 불륜을 무조건 비난하거나 그저 호기심으로만 바라 볼 일이 아니다. 이제 개인의 은밀하고도 이중적인 사적 문제들까지도 함께 고민해야 할 때다.

(현택수/고려대 교수·인문사회학부 사회학전공)

[기고] 性·결혼, 그리고 가족

늘어나는 불륜 드라마 … 다양한 생활양식 나타날 것


최근에 한국사회의 성·결혼·가족 문제에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영화, 드라마와 많이 만나게 된다.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는 혼전동거가 결혼의 예비적인 검증절차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사회적인 논의를 불러일으켰고, 영화 ‘싱글즈’는 자유롭게 성을 즐기는 화려한 ‘싱글’이 결혼을 우회해서 쿨한 ‘싱글맘’에 이르는 과정을 그렸다. 드라마 ‘앞집 여자’는 젊은 부부의 맞바람을 ‘명랑불륜 코미디’라는 컨셉션으로 담아내서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술 더 떠서 영화 ‘바람난 가족’은 남편, 아내, 시어머니가 동시다발적으로 바람이 난다는 어느 콩가루 집안의 이야기다. 혼전동거, 싱글맘, 맞바람, 콩가루 집안으로 이어지는 맥락이 무척이나 의미심장하다.

이들 영화와 드라마는 기존의 결혼과 가족, 더 나아가서는 일부일처제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종전과는 분명한 차이점을 갖는다. 불륜이나 외도는 그 자체로 이미 도덕적인 규범을 전제하는 말이다. 불륜이 일부일처제의 위협이라면, 윤리는 일부일처제의 옹호였다. 일부일처제야말로 결혼과 가족의 윤리적인 핵심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 영화나 드라마에서 불륜은 기존의 도덕률과 무관한 맥락에서 다루어진다. 탈(脫) 도덕화된 불륜은 일부일처제를 겨냥하는 화살이다.

일상화된 불륜은 드라마 주인공의 의상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1996년 아름다운 불륜을 표방했던 드라마 ‘애인’에서 유동근은 푸른색 와이셔츠를 입었다. 반면에 ‘앞집 여자’의 바람난 남편 상태(손현주)는 캐주얼 차림으로 아내와 애인 사이에서 갈등한다. 유동근의 푸른색 와이셔츠가 일상 너머의 고뇌를 상징했다면, 손현주의 티셔츠와 면바지 차림은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을 대변한다. 마치 불륜은 캐주얼(casual)을 걸친 가벼운 일상이라고 속삭이는 것 같다.

왜 이처럼 성·결혼·가족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어지는 것일까. 두 가지의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사회학적인 분석이다. 산업화시대에는 사회적인 차원에서 자유와 평등을 구현하는 일이 우선적인 과제였다. 하지만 사회적인 차원에서 자유와 평등이 일정 정도 구현되면, 부부와 가족과 같은 개인적인 관계에서도 자유와 평등이 요구될 수밖에 없게 된다.

자유와 평등은 사회적인 차원의 이념이 아니라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내밀한 욕망인 것이다. 따라서 자유와 평등에 대한 욕망은 성·결혼·가족의 사회적 울타리와 심각하게 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두 번째는 사회생물학적인 설명이다. 생리학적으로 남녀의 사랑이 유지되는 기간은 3~4년이라고 한다. 또한 대부분의 동물들은 다혼(多婚)이고, 포유류의 4%만이 일시적인 일부일처제를 채택한다. 인간도 오랫동안 다혼을 유지해왔으며, 일부일처제는 산업화시대의 발명품이라는 것이다. 일부일처제에 근거한 성·결혼·가족은 인간의 유전자와는 어울리지 않는 옷이라는 주장인 셈이다.

그렇다면 일부일처제에 근거한 결혼과 가족은 내부로부터 붕괴하고 있는 것일까. 이혼율이 30%를 넘었다는 기사를 보면 결혼 제도가 다 됐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지만 이혼자들의 많은 수가 재혼을 희망한다는 보고를 보면, 결혼 제도의 합리성과 경제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결국 ‘그렇다’ 이기도 하고 ‘아니다’ 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사회가 성·결혼·가족과 관련된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결혼과 가족의 내부적인 규율들은 보다 섬세하게 재조정되고, 다양한 거주 방식과 가구 구성에 대한 사회적 배려가 필요할 것이다. 성·결혼·가족과 관련된 하나의 지배적인 질서가 아니라 다양한 태도와 생활양식이 공존하는 양상으로 나아갈 것으로 보인다. 한국사회가 또 하나의 역사적인 문턱을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김동식·문학평론가)

당시 뉴요커지(誌) 기자였던 저자는 18시간 동안 지구 반 바퀴를 비행해 도착한 에티오피아에서 시네두의 자취를 밟는다. 정부 예산이 하버드 연간 운영비(14억 달러)와 유사한 극빈의 땅. 80개 종족과 64개 언어가 뒤섞인, 쿠데타와 공산혁명의 잔해로 침묵과 굴종이 예사가 된 그곳에서 저자는 기자로서의 숙명에 고뇌한다. 자신을 만나길 꺼리는, 딸의 결백을 확신하는 ‘살인범의 부모’의 항변이 되려 상처를 덧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절제의 미덕이 몸에 밴 시네두는 반복·암기에 능한 ‘공부 기계’였고, 귀국한 뒤엔 의사 1명이 3만5000명을 맡는 비참한 고국의 ‘희망’이 되길 다짐했었다. 가정(공동체)이라는 담요가 절실했던 그녀가, 친구도 없이 ‘완벽’을 꿈꾼다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 일이었을까를 저자는 확인한다.

저자는 이번엔 미국으로 이민 온 트랑의 유족을 찾아 나선다. 열살 때 아버지와 함께 보트 피플로 입국했고 어머니가 뒤이어 합류했지만, 서먹해진 부모는 재회한 지 얼마되지 않아 갈라선다. 시네두와 트랑의 아버지는 각각 에티오피아·베트남 정권의 박해로 투옥된 경험이 있지만, 자신에게 애정을 쏟은 가족에 대한 부양 의무로 무장한 트랑이 훨씬 진취적·사교적이었음을 저자는 알아낸다.

2학년 때부터 2년간 룸메이트로 지낸 둘은 ‘불평등한 우정’을 나눴다. 감응의 결핍과 의식의 분열이 상승 작용을 일으킨 시네두는 트랑의 관심에 목말라 하면서, 가족과 친구에 둘러싸인 트랑 곁을 맴돈다. 4학년 진학을 앞두고 트랑이 룸메이트를 바꾸려고 하자, 시네두의 자폐(自閉)는 극에 이른다.

‘내가 똑똑하다고 느끼게 해 줄 바보들이 필요해’ ‘한 책을 베끼면 표절이라 하고, 여러 책을 베끼면 연구라고 하지’…. 시네두가 일부러 공개될 것을 염두에 둔듯한, 냉소와 절망이 담긴 일기장은 ‘투쟁 기록’이었다. 자신을 노출하는 것에도, 상대방 세계에 다가서는 것에도 익숙치 않은 시네두는 ‘인생은 온통 지옥’이라고 적어 놓았다.

저자는 자책한다. 하버드대에서 작문 강사로 재직할 당시 시네두와 면담한 적이 있었지만, 낯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이 학생의 아픔을 읽어내지 못한 죄책감 때문이다.

시네두는 자신과 자신이 동경한 친구의 최후를 예견하는 복선(伏線)을 깔아 놓았다. 취재기인 책(원제 Halfway Heaven―Diary of Harvard Murder)이 흥미로운 소설처럼 읽히는 까닭이다. 시네두는 파멸해가는 자신의 얘기를 적은 편지를 전화번호부에서 고른 낯 모르는 이들에게 보냈고, 비극이 있기 며칠 전에는 하버드 대학신문에 ‘짜릿한 일이 터질 테니 내 사진을 꼭 보관하라’며 증명사진을 동봉해 보낸다.

고독과 끝내 악수하지 못한 아프리카 수재의 정신분열, 그토록 의지하고팠던 친구로부터의 배신, 동승하고자 했으나 자신을 외면한 문화로부터의 충격은 이 여학생을 잔혹한 살인범으로 내몰았다.

하버드 출신인 저자가 살인의 이유로 정녕 비판하고 싶어 하는 것은 따로 있다. ‘지상 최고의 대학에 온 당신은 행복하다’고 강요하는 듯한, 오만과 무관심으로 ‘미치광이 천재’를 양산하는 모교에 그녀는 살인 교사 혐의를 씌운다. 우발적 범행이 아닌, 경쟁에서의 승리를 강요하는 구조적 모순이 계획 범죄를 낳았다는 것이다.

학내 살인사건을 축소·은폐하려는 엘리트 학교의 비밀주의, 동아리 가입마저도 능력을 입증한 자만이 가능한 경쟁주의, 최고의 의료수준을 갖췄으면서도 정신과 상담을 방기하는 무사안일, 조교 채용의 족벌주의…. 저자가 고발하는 하버드는 파렴치한 난공불락의 요새다.

무얼 찾으려 경쟁하고, 무얼 위해 경쟁을 부추기는가? 경주자들의 고통에 왜 애써 눈을 돌리는가? 저자는 ‘좋은 성적은 불안에서 벗어나려 자신의 우월을 증명하거나 우울증에 빠진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인 경우도 많다’고 했다. 살인·자살 사건을 취재하면서 그녀가 맞닥뜨린 우리의 ‘인간관계’는 ‘곁에 있는 누구도 전혀 모르면서 만난다’는 것이다.

(박영석기자 yspark@chosun.com)  

 

- 인왕산 鶴학巢소島도에서 최범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