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어머니가 갖다주신 옛 사진 몇 장

1996년 2월, 유난히 많은 눈이 그해 2월 빠리에 내렸다

<난쟁이가 쪼아올린 공>의 작가 조세희 선생과, 1995. 11 프랑스 빠리

이문열 선생과, 1995. 11 프랑스 빠리

고등학교 시절, 기숙사 방 책상 앞에서 공부하다 잠든 나, 친구 David Bertram 촬영

1982년 여름, 독일 라인강을 따라 자전거 여행 중 빵구난 자전거 앞에서

 

대나무-영적인 나무

대나무는 순절충신의 상징으로 우리의 마음속애 깊이 새겨져 있다. 이는 민충정공이 을사보호조약에 반대하여 자결한 자리에서 돋아났다는 혈죽의 유래에서 더욱 그러하다. 대나무를 신성시한 민속을 살펴 보면 십장생의 하나로 삼았고, 영수인 호랑이가 대숲에 사는 것으로 믿어 많은 그림에도 묘사되어 있다. 결혼식 때 초례상 위에 촛대와 함께 송죽을 양쪽 병에 꽂아 놓고 청실홍실을 걸어 연결하는 것도 신성과 장수, 번성을 기원하는 뜻이 함축 되어 있다. 또 대나무가 많이 나는 남쪽 지방에서는 출산하면 금줄에 솔잎 대신 대나무잎을 왼새끼중에 끼우며 여수지방에서는 금줄 대신 대나무장대를 문에 비스듬히 대각으로 세워서 이를 대신한다. 이때 황토를 문 안에 5-6군데 한 줌씩 깔아 부정을 막는다. 또 출산하면 송죽을 문전에 달아두기도 한다. 따라서 대나무가 귀신을 쫓는 제액의 주술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무당이 굿할 때 신장대도 주로 대나무로 만드는데 영수이므로 강신이 잘 된다고 믿고 있다. 성황신대도 대나무로 만들며 죽은 영혼을 달래는 굿을 할 때는 극락의 12대문을 대나무로 만든다. 그리서일까 대나무로 만든 물건으로 사람을 때리면 말라서 죽는 다고 믿어 금기로 삼고 있으며 방 고래 밑으로 대나무 뿌리가 뻗으면 집안이 망한다고 믿어서 싫어했다. 중국에서는 서조인 봉황새는 성인이 세상에 나올 때 나타나서 오동나무에 살면서 대나무 열매를 먹는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이 모두가 신령한 것들로소 흔치 않음을 뜻하는데 대나무는 60년을 주기로 하여 개화결실하면 죽고 마느데 음양설에 의거하여 60년을 서조(상서로운 징조)라 하여 말한 듯하다고도 풀이하고 있다. 전북 부안지방에서는 이중국의 전설에서 비롯된 듯 대나무가 드물게 개화결실하면 풍년의 징조라 하여 좋아했다 한다. 대나무는 열대와 아열대에 약 40속 600종이나 되는 대가족인데 개화하는 것이 일정치 않다. 조릿대류는 5-10년이면 개화결실하고 솜대나 반죽은 60-120년을 1주기로 개화하는 것도 있으나 다만 개화하면 말라죽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전남지방에서는 대나무 숲이 말라죽으면 나라에 큰 흉사가 생긴다는 옛적부터 전해오는 전설을 믿고 있으며 또 대나무 숲이 마르면 전쟁이 일어난다고 믿고 있는 지방도 있다.

개나리-공주와 개나리

개나리에는 전설이하나 있다. 옛날 인도에 한 공주가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이 공주는 어찌나 새를 사랑했던지 온 세상의 아름다운 새는 모두 사 모아 궁전은 온통 새로 꽉 찰 지경이었다. 이렇듯 공주가 새에 마음을 쏟으며 나라는 돌보지 않은데다가 신하들마저나라 걱정을 않고 공주의 환심을 사기 위해 새에만 정신을 팔다보니 백성들의 살림은 점차 가난해지고 원성은 높아만 갔다. 공주는 수많은 새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아름다운 새장 하나가 비어 있었다. 이 새장에 넣은 만큼 아름다운 새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래서 공주는 슬퍼하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노인이 눈부시게 찬란한 깃털과 감미로운 노랫소리를 지닌 신기한 새를 공주에게 가져왔다. 공주는 노인에게 후한 상을 주어 돌려보내고 온 마음을 이 신비한 새에게 주고 사랑하였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새는 점차 깃털이 바래고 그 곱던 노랫소리도 점차 이상하게 변해 갓다. 혹 옛 모습을 되찾을까 하여 옥욕을 시켰는데 물에 넣으니 아름답던 새는 새까만 까마귀로 변해 버렸다. 나라를 걱정한 노인이 까마귀에 색칠을 하고 목에는 소리 나는 기구를 넣었던 것이다. 너무나 상심한 공주는 마침내 죽게 되었고 공주가 묻힌 무덤에서 돋아나온 나무가 바로 개나리이다. 사람들은 까마귀 때문에 빼앗겨 버린 새장이 안타까워 공주가 긴 가지를쭉 뻗어 내고는 새장의 모습을 한 금빛 꽃을 달고 있는 것이라고들 한다.

느티나무-전설의 고향

느티나무는 은행나무와 함께 천여 년을 헤아리는 노수 거목들이 많이 있다. 서양에서 월계수를 신성시 하듯 우리나라에서는 이 나무를 신령한 나무로 받들어 오고 있어 여기에 얽힌 전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전주에서 남원으로 가다 보면 오수라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마을이 하나 있다. 오수는 개나무란 뜻인데 여기에는 사람과 개와 나무에 얽힌 유명한 이야기가 하나 있다.

옛날 이 고을에 개를 자식처럼 사랑하는 한 노인이 있었다. 어느 봄날, 장터에 다녀오던 길에 오랜만에 마신 술에 취하고 먼길을 다녀오느라 피곤하여 길 옆 잔디밭에 앉았다가 그만 잠이 들어 버렸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산불이 나서 봄바람을 타고 노인이 잠들어 있는 곳까지 번져 오고 있었다. 개는 근처의 물웅덩이를 찾아 자신의 몸에 물을 묻혀서는 불이 번지지 않게 뒹굴기를 수십, 수백 번 거듭하여 불을 껐으나 탈진해 개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잠아 깨어 사태를 알게 된 노인은 슬퍼하며 이 갸륵한 개를 고이 묻고 자신의 지팡이를 꽂아 주었다. 얼마 후 이 지팡이에서 뿌리가 내리고 싹이 터 훌륭한 나무로 자랐는데 사람들은 이 나무를 개나무, 즉 오수라고 불렀고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퍼져 나가 마을의 이름까지 오수가 되었다. 일제 시대에 우리나라에서 나무를 연구하던 한 일본 학자는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그 나무는 쉽게 싹이 트는 버드나무나 오리나무일 거라고 했으나 지금 그 자리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자라고 있다.

또 전라도 광주 서석동에 있는 효자 느티나무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아주 오랜 옛날 만석이라는 효자가 살고 있었다. 병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만석이는 착하고 부지런할 뿐만 아니라 효성이 지극하여 마을 사람들의 칭송을 한몸에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늙은 어머니는 원인 모를 깊은 병에 걸렸고 사방으로 약을 구해도 소용이 없자 만석은 마지막으로 산삼을 찾아 나서기로 하였다. 목욕 재계하고 무등산에 올라 석 달이 넘게 산삼을 찾아 헤매었으나 산삼은 보이지 않았다. 100일이 되어도 찾지 못하자 낙심하여 산을 내려오는데 만석이를 부르는 신비스런 소리가 들려 왔다. 놀라서 뒤돌아보니 분명 뒤에 서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에서 들려 오는 소리였다. 만석은 느티나무에게 예를 올리고 어머니를 살려 줄것을 간청했고 느티나무는 어머니를 살릴 약을 줄테니 두 눈을 빼어 달라고 하였다. 오직 어머니를 살리고 싶은 효자 만석은 두 눈을 뽑아서는 느티나무에게 바쳤다. 이 만석이의 효심에 감동한 느티나무는 스스로 잎을 떼어 만석에게 안겨 주고 만석이의 눈도 고쳐주었다. 이 느티나무가 준 잎을 달여 마신 어머니는 물론 병이 깨끗이 낳았다. 이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효자 느티나무로 부르고 신령한 나무로 여겨 지금까지 보호해 오고 있다.

느티나무의 관상적 가치는 현재 전국의 공원이나 학교 등 공공 건물에 얼마나 많은 느티나무가 있는지 보면 쉬이 짐작할 수 있?. 더욱이 먼지를 타지 않아 항상 깨끗하고, 벌레를 먹지 않아 귀히 보인다. 가로수로도 심어 놓은 곳이 있고 분재의 재료로도 적합하다.

대추나무-아들

대추나무는 예부터 아들과 관계있는 나무로 여겼다. 가락국 건국신화에 따르면,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 김수로왕을 만날 때 많은 대추와 복숭아를 가지고 왔다. 여기에서 대추는 아들을 많이 낳으려는 소망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서울에서는 꿈에 대추나 대추나무를 보면 아들을 낳는 것으로 믿었고,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에서는 제사를 지낸 후 대추를 먹으면 아들을 낳는 것으로 믿었다. 또한 민간에서는 부적을 만드는 재료로서 벼락맞은 대추나무를 최상으로 꼽았다. 천둥과 벼락의 힘이 깃들었다고 해서 귀신이 무서워 달아난다고 믿었던 것이다. 중국의 민속에는 대추가 죽음을 암시한 이미지도 있다. 민간에서는 꿈에 대추나무를 보면 빨리 죽을 문명으로 여겼다.

 

"개복숭아 파티"


명동성당 건너편 골목길, 조그만 카페건물 한 귀퉁이에 빨간 겹꽃을 한껏 피워 오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기쁘고 즐겁게 하던 홍도화(紅桃花) 한 그루가 있다.

나는 오늘도 그 골목길을 지나서 승강기도 없는 낡은 건물 5층, 두평 남짓한 사무실에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하고 있다. 짧은 봄철과 그리고 생각만 해도 진저리치는 여름날 폭우 때문에 빨강꽃을 피워 우리를 반겨주던 그 ‘홍도화’를 한동안 잊어버린채 벌써 가을을 맞았다.

며칠전 나는 가지마다에 제법 굵은 개복숭아가 주렁주렁 맺혀있는 것을 보았다. 어떤 놈은 제법 과일몫을 하는 양 붉은 색깔마저 띠고 있었으며, 대충 세어봐도 2,30개는 족(足)히 됨직했다.

동네 사람들, 아니 그 건물 주인의 심성이 곱고 또 참는 성격이 대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왠만하면 개복숭아가 빨갛게 익기도 전에 개구장이 녀석들이 한, 두개씩 맛을 본다면 어느새 죄다 먹어 치웠을 터인데 말이다.

잔무(殘務) 처리로 새벽 출근길에 나섰다. 어제와 다름없이 그 골목길의 개복숭아를 응시하니 50대 중반인 듯한 사람이 파란 플라스틱 바가지에다가 이 개복숭아를 따서는 가득 담고 있었다.

내가 “그것을 뭣하러 따는가?”하고 묻자 “개복숭아가 과일주에 좋다”는 얘기를 어제 친구가 하고 갔기에 아침 일찍 이 개복숭아를 따서 소주에 과일주를 담그려는 것이란다.

나는 과일주에는 백도(白桃)나 황도(黃桃) 등 수분이 많고 과질(果質)이 단단치 못한 놈은 제격이 아니라 개복숭아 같이 과실의 몸전체가 단단한 놈이 최고라는 상식쯤은 알고 있다.

그런데 왠지 그 개복숭아가 수북히 파란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겨지면서 하나, 둘 모두 없어지자 내 마음은 휑하니 구멍뚫린 것 같고, 사,나흘간은 사랑하는 애인이 내곁을 떠나간 양 허전하고 허무하기까지 했다.

지난 일이긴 하지만 나에게는 잊지못할 개복숭아에 얽힌 하나의 추억이 있었기에 자꾸만 생각나고 또 섭섭한 감정의 연속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가지면서 30여년 전 전방부대에서의 신병시절에 있었던 개복숭아의 추억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나의 군생활은 그 전부를 최전방에서 가졌다. 흔히들 말하는 「DMZ」 최전방 경계초소에서 3년을 보냈으니 그때는 모두가 을씨년스럽기만 했는데 지금은 한가지 빠짐없이 한결 아름답고 고귀한 추억으로 살아있다.

언제인가 자세한 기억은 없으나 대충 짐작으로는 팔월 추석이 가까워진 계절이 아닐까 한다. 지금도 군에서는 일찍 겨울 내의를 지급하는 곳이 있는데,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근무한 그곳은 추석이 다가오기 전에 겨울 내의가 장병에게 지급되며, 나는 이미 이때에 동내의를 끼어 입고 보초를 선 기억이 새롭다.

그곳은 해발 7,800m가 넘는 고지였기에 추위가 평지보다는 2개월 쯤 앞당겨 왔다. 6·25 전쟁의 포화로 이산 저산 계곡의 숲들은 타버린 잿더미가 된 채 아직도 그 잔해들은 곳곳에 남았으나 이곳만은 옛모습 원시림 그대로 울창한 송림과 참나무로 빽빽히 솟았었다.

아직 군대경력이 일천한 나, 곧 신병인 내 주제로는 이 울창한 수목들이 오히려 무서움과 두려움을 더해 주는 그 첫번째의 요인이기도 했다. 저녁마다 거센 바람소리에 못견딘 잎새들의 부서지는 아픔은 어느새 신병인 내 간담마저 싸늘하게 앗아갔다.

보초를 서는 그때마다 그 많은 수목 사이로 보이는 좀 이상한 것(?) 하나를 나는 발견했다. 이상한 것이라 한들 그것이야 다름 아닌 제멋대로 생긴 여러 그루의 복숭아 나무였다.

전방의 이 높은 지대에까지 어떻게 저 복숭아 나무가 살아서 추석을 앞둔 우리에게 빨갛게 익은 열매를 자랑이나 하듯 선보이고 있을까 하는 그 의문은 날로 더해 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는 전쟁 이전, 그토록 평화스러운 내 조국, 내 나라 남북의 동포가 함께 어우러져 산 동네(閑村)는 정녕 아니었기에 하는 말이다. 그런데 웬일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다. 생명의 신비함을 그 야생 복숭아 <누구는 ‘개복숭아’라고도 했다> 에서 다시금 보고 느끼게 하였다.

학자들의 주장에서 보면 야자수가 아닌 야자열매가 바닷물에 떠밀리고 밀려서 세계의 어느 곳 가릴 것 없이 다다러서는 그곳에서 싹트고, 열매맺고, 또 씨앗을 남겨 무성한 원시림 시대를 이루지 않았느냐는 학설처럼 말이다.

아마 잘 모르긴 해도 이 개복숭아도 이와 같은 이치임에 틀림이 없으리라 믿는다. 그런데 우리가 아닌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복숭아 나무 자체가 아니라 주렁주렁 열린 탐스러운 과일이라는 사실이다.

몇몇 전우와의 의기투합으로서 즐겁게 명절을 보내기로 엄숙한 결의를 다졌다. 산꼭대기의 우리 초소에서 내려다보이는 절벽같은 능선에 이놈의 개복숭아가 맺혀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위험을 무릅쓰고 위대한 탐험가의 정신으로 누구 하나가 반드시 그곳까지 내려가서 그놈을 따야만 한다는 엄연한 현실이다.

묘안이 금세 창출되었다. 우리는 저마다 띄고 있던 탄띠를 모두 한가닥 되게 연결했다. 그중에서 가장 고참인 K병장이 이 역사적(?)인 임무수행을 위해서 절벽으로 줄타기를 하기로 했다. 탄띠를 큰 소나무에 한쪽을 고정되게 단단히 묶고서 내려가는 K병장의 안전은 물론 빛나는 전과(개복숭아 따기)를 획득하기 위해서 엄호사격(보조역할)을 더욱 충실히 수행했다.

나무 나무마다 주렁주렁 달린 개복숭아는 금새 서너개의 철모를 가득 채운 채 운반되었다. 작전은 안전사고 한 건 없이 무사히 완료되었다. 작전에서 얻어진 개복숭아를 흐르는 계곡물에 깨끗이 씻은 후에 소대장(초소장) 이하 모두가 모여서 걸찍한 한판의 추석맞이 회식을 펼쳤다. 그러나 우리는 신성한 국방의무를 한치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혹시 모를 저놈들의 침탈에 적절히 대응하고자 동초(動哨)는 수시로 교대하며 개복숭아 파티를 맘껏 즐겼기에 하는 말이다.

그때만 해도 전방군인에게는 먹을 것이 없었다. PX가 있긴 했지만 3,4㎞ 떨어진 대대 본부나 중대본부에 있었기 때문에 그 흔한 ‘비과’ 하나 먹기가 하늘에 별따기보다 어려웠다. 이런 때에 우리가 포식한 이 개복숭아의 참맛을 어디에다 비견할까? 좀 지나친 표현일런지는 모르겠으나 진시황이 즐겼다는 ‘팔진미 오후청’을 어찌 이 맛에 견주리…! 우리는 이런 포만감과 자부심으로 그날 한바탕의 개복숭아 파티로 추석명절에 오기 쉬운 부모님에의 그리움, 향수에의 정을 떨칠 수가 있었다.

그 다음날 우리 초소원 모두가 배탈설사를 만나 온통 막사 주위가 오물투성이로 치장한 것은 더 이상 거론하고 싶지 않은 이 마음을 모두가 이해하리라 믿는다.,개복숭아에 대한 나의 추억을 소박하게 옮겨본다는 것이 너무 확대, 비약된 것만 같다. 내년 봄에는 만사 제쳐두고 홍도화 한 그루를 가까운 묘목상에서 구입해서는 손바닥만하지만 연립 한쪽 귀퉁이의 땅뙈기에 정성으로 심으리라.

참고 : http://www.army.go.kr/jikum/ji-3/238/66.htm

 

유리작품 갤러리 Gallery Sklo

http://www.cheju.rda.go.kr/agrinfo/htm/agro21/CGI-BIN/BD.htm

http://www.cheju.rda.go.kr/agrinfo/htm/agro21/CGI-BIN/BE.htm

http://www.cheju.rda.go.kr/agrinfo/htm/agro21/CGI-BIN/Bc.htm 

- 인왕산 鶴학巢소島도에서 최범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