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 순이 작년에 떨어진 낙옆을 뚫고 솟아나고 있다

순이 대나무로 성장하고 있다

어디로부턴가 은행나무 씨앗이 날아와 새생명을 시작하고 있다

반 고흐 - Peach Tree in Bloom

 

[이규태코너] 느티나무

요즈음 솜을 날려 호흡기 질환을 유발하는 개량나무들을 느티나무로 바꿔심는 공사가 진행 중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우리나라 기후풍토에서 아무 데서나 잘 자라고 병들지 않으며, 가장 장수하는 나무가 느티나무요, 보호받고 있는 1만4000그루의 보호수 가운데 절반인 7000그루가 느티나무이며, 그 중 1000년 이상 되는 노거수가 25그루나 된다. 한국 사람의 체형이나 체질, 그리고 사고방식이 한국풍토와 밀접하듯이 한국풍토에 적응한 느티나무는 한국인이다.

다빈치의 명화 「수태고지(受胎告知)」만 보더라도 배경의 나무들이 마치 자로 재 그려놓은 것처럼 좌우가 대칭이 돼있으며, 사실 유럽 나무들이 그렇게 균제미가 있다. 레스피기가 음악으로 그 수직감을 냈다는 로마의 소나무들은 늘씬하고 곧게 하늘을 찌른다. 이것이 아름답고 쓸모가 있다면 느티나무는 수형이 들쑥날쑥 아름답지 못하고 가지가 밑동 가까이부터 돋아나 늘씬하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장자는 재목으로 쓸 만한 나무를 문목(文木), 쓸모 없는 나무는 거목이라도 산목(散木)이라 했는데, 느티나무는 산목이다.

집을 짓는다든지 배를 만드는 등 재목으로는 부적하지만 비중이 0.7로 여느 어떤 나무보다 단단하고 치밀한 데다 목리(木理), 곧 무늬가 아름다워 일상생활의 목기나 가구로는 이보다 좋은 재목이 없다. 큰 재간은 몰라도 잔 재간 좋기로 추종을 불허하는 한국인은 느티나무다. 멕시코 유카단 반도의 이민촌은 한국인을 비롯, 일본인·중국인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밤송이 같은 낯설고 고약한 어저귀 농사에 가장 빨리 적응한 것이 한국인이요, 병원 나들이도 중국인이나 일본인에 비해 10명에 한 명꼴이었다는 보고가 있다. 곧 부적하고 낯선 여건에도 잘 착근하여 자라고 병충해에도 강한 한국인은 느티나무다.

많은 나무들이 집단이었을 때 잘 자라고, 고독할 때 발육이 지체된다던데, 느티나무는 독야청청이 적성이요, 그래서 정자나무로써 한 그루만으로 그 그늘에 많은 사람을 쉬게 하고, 한 그루만으로 방풍림 구실을 하기에 그 쓸모가 많은 것으로 미루어 혼자여야 똑똑해지는 느티나무는 한국인인 것이다.

우리나라 토종인 <구상나무>의 새잎

병꽃나무

부처님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불두화>



맨 얼굴 드러낸 '명품 정원' … 딱따구리도 "어서 오세요"

창덕궁은 다른 궁궐처럼 아무 때나 들어갈 수도, 아무 데나 돌아다닐 수도 없다. 문화재 보호를 위해서다.

왜 창덕궁만 유난스럽냐고 묻는다면 "창덕궁 하나 정도는 제대로 보호해야 하지 않겠느냐"(문화재청 관계자)고 답한다.

그래서 창덕궁 나들이는 약간 까탈스럽다. 문화해설사의 안내에 따라 입장하고 관람해야 한다. 만약 혼자 돌아다니면 곳곳에 배치된 직원들이 다른 장소로 신속하게 인도한다.

일반 관람 입장 시간은 매시 15분, 45분. 영어.일본어.중국어 안내 시간은 별도로 있다. 한번 둘러보고 나오는 데 1시간30분쯤 걸린다.

첫 입장 시간은 오전 9시15분, 마지막은 오후 5시15분. 매주 월요일 휴관.

5월 1일 공개되는 후원 코스를 포함한 특별 관람은 하루 세번(오전 10시, 오후 1시.2시), 한번에 50명씩으로 정했다. 2시간30분쯤 걸릴 거란다.

전화나 홈페이지로 3일 전에 예약해야 한다. 만 17세 미만일 경우는 가족 단위가 아니라면 관람을 금지한다. 워낙 광대한 숲길이라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몰라서다.

이용 문의가 폭주하면 추가 개방 여부를 새로 결정할 방침이다. 관람료 5000원. 무료.할인 혜택이 전혀 없다.

-일반 관람요금=2300원(25~64세), 1200원(7~24세), 7세 이하와 65세 이상은 무료.

-가는 길=지하철 3호선 안국역에서 5분, 지하철 1.3.5호선 종로3가역에서 10분. 02-762-0648. 홈페이지 :
http://changdeok.ocp.go.kr

어느 문화유산 답사가는 창덕궁을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고 했다. 소박하고 겸허하기 때문이란다. 일리가 있다. 경복궁의 3분의1 규모다. 경복궁에 비하면 아기자기하고 여성스럽다. 그러나 창덕궁의 가장 큰 특징은 궁궐답지 않다는 데 있다. 무릇 궁궐이라 함은 큰길 똑바로 바라보고 서있어야 하는 법. 하지만 창덕궁은 산 끝자락에 비뚜름히 기대 있다.

정문인 돈화문을 들어서자. 대전(大殿)이 바로 정면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창덕궁의 대전인 인정전은 오른편으로 꺾어 들어간 뒤 다시 왼편을 바라봐야 나온다. 얼추 무질서해 보이기도 한다. 다른 건물도 지형.지세에 맞춰 박혀 있다. 경사가 가파르면 경사를 따라 건물을 세우고, 언덕이 있으면 언덕을 돌아 길을 냈다. 후원에 정자를 올려도 도드라지지 않게 했다.

'동아시아 궁궐 건축에서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인 궁이다.' 1997년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될 때 유네스코가 밝힌 선정 이유다.

창덕궁이 가장 한국적인 이유는 역사적으로도 입증된다. 왕자의 난 직후인 1404년 태종은 혼란스러운 정세를 타개하기 위해 새 궁궐 조성을 명한다. 이듬해 창덕궁이 완공됐다. 그 후로 조선의 왕들은 실제로 경복궁보다 창덕궁에서 더 오래 머물렀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소실된 뒤 대원군 시대까지 200여년간 왕의 실제 주거 공간은 창덕궁이었다. 조선 후기 역사의 주무대는 창덕궁이다.

창덕궁에선 개화의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유리창이 난 궁궐 문짝이나, 샹들리에 아래 의자와 탁자가 놓인 내부 공간 등등. 이 서양식 배경에서 급속히 몰락해 간 왕조의 막바지, 그 어수선한 정세가 읽힌다. 처마 아래 금색의 꽃잎 문양은 전주 이씨 가문을 상징하는 오얏꽃(李花)이다. 일제가 조선 왕조를 이씨 조선이라고 부를 때쯤 새겨졌다.

해방 이후 창덕궁은 '비원(秘苑)'이었다. 일제가 창덕궁 후원을 일컬은 말이지만 해방 이후 궁은 사라지고 비원만 남았다. '비밀스러운 마당'으로 불려서인지 비밀스러운 사연도 적잖다. 창덕궁 인근 주민에 따르면 새로이 개방되는 후원 코스부터 신원전을 타고 도는 산길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종종 말을 타고 다녔다고 한다. 꼬장꼬장한 성격으로 유명했던 1990년대의 한 국무총리도 아침마다 이 길을 산책했다. 산책을 마치고 내려올 때는 양손에 담배꽁초나 쓰레기가 한가득 쥐여 있어 관리사무소 직원들이 식은땀을 흘렸다고. 60년대엔 신원전 근처에 프로레슬러 김일의 체육관이 있었다. 어떤 이유로 김일 체육관이 궁 안에 들어섰는지 아는 사람은 못 찾았다. 대신 지금의 40 ~ 50대 몇몇은 창덕궁에서 레슬러들을 구경했던 일을 추억으로 간직한다.

지금의 창덕궁은 자연 생태계의 보고다. 160여종 29만그루의 수목과 오색딱따구리.소쩍새.원앙 등 천연기념물을 비롯해 40여종의 조류가 살고 있다. 79년 후원 지역 일부를 폐쇄하면서 25년 동안 사람의 마구잡이 손길이 닿지 않은 덕이다. 현재 창덕궁에서 개방된 곳은 전체 면적의 5분의1 정도. 옥류천까지 개방해도 전체의 절반에 못 미친다.

글=손민호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 지금부터 창덕궁 탐험에 나선다. 창덕궁은 궁궐 해설사와 함께 다녀야 한다. 그래서 설명이 따로 필요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르는 소리. 여기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공식적인 문화재 안내가 아니다. 원래 숨겨진 이야기가 더 흥미롭고 때로는 진실에 더 가깝다.

금호문(金虎門)에서 시작하자. 주차장에서 들어가는 창덕궁의 서문. 대부분이 그냥 지나치는 곳이다. 안내 포인트도 아니다. 하지만 이곳은 6.10 만세 운동의 실질적인 발원지다.

1926년 4월 26일 오전 6시3분.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이 창덕궁에서 서거한다. 하지만 일제는 순종 서거 소식을 15시간 뒤에야 발표한다. 발표 직후 창덕궁 앞엔 구름 같은 인파가 몰려든다.

그 가운데 서른살의 송학선이란 인물도 있었다. 일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창덕궁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송학선은 총독 암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한다. 78년 전 꼭 이맘때(4월 28일)의 일이다. 그 뒤로 항일 투쟁이 들불처럼 일어났고 순종의 장례식 날인 6월 10일 대대적인 만세 운동이 있었다. 송학선이 의거한 곳이 바로 금호문 앞이다. 지금 그 자리에 키 작은 비석이 서있다. 비석을 뒤로 하고 비로소 입궁한다.

(1) 인정전(仁政殿)의 빛과 그늘
창덕궁의 법전(法殿), 그러니까 왕의 즉위식이나 외국 사신을 맞이할 때 쓰던 건물이다. 국보 225호.

겉으로 보기엔 여느 전각과 다름 없지만 안을 들여다 보면 심란하다. 일제의 손을 많이 탔다. 서양식 커튼과 샹들리에가 눈에 거슬린다. 인정전만 그런 게 아니다.

왕의 일상 업무 장소였던 선정전(宣政殿)엔 유리문이 걸려 있고, 왕의 숙소인 희정당(熙政堂)은 서양의 호텔처럼 꾸며 놓았다. 모두 1907년에 이렇게 됐다. 인정전을 지나치기 전 떠올려야 할 역사가 있다. 1910년 8월 22일. 이 건물에서 한일 병합이 이뤄졌다.

(2) 경복궁의 다른 얼굴 - 대조전(大造殿)
왕비의 숙소. 하지만 왕비의 침실을 엿볼 생각은 거둘 것. 대신 가슴 아픈 역사가 있다.

1917년 대조전 서편의 갱의실(나인의 탈의실)에서 원인 모를 불이 일어난다. 이때 크게 망가진 대조전을 새로 지으면서 일제는 공사에 필요한 목재를 경복궁에서 조달한다. 창덕궁 공사를 핑계로 멀쩡한 경복궁을 허문 것이다. 경복궁의 강녕전(왕의 숙소)은 희정당으로, 교태전(왕비의 숙소)은 대조전으로 바뀌었다.

그 흔적은 지금도 곳곳에서 확인된다. 특히 대조전은 옆의 전각과 아귀가 맞지 않는다. 억지로 끼워 맞춘 모습이 역력하다. 대조전은 일제의 경복궁 훼손을 증거하는 실체다. 순종이 숨진 곳이기도 하다.

(3) 낙선재(樂善齋)의 맵시

원래 낙선재는 상(喪)을 당한 왕비나 후궁의 숙소다. 그래서 다른 전곽보다 맵시가 난다. 하지만 낙선재의 역사는 우울하다. 왕조가 멸한 뒤에도 살아남았던 왕족의 거처였다. 해방이 되고도 20년 가까이 지난 63년에야 왕족인 영왕과 영왕비인 이방자 여사, 덕혜옹주가 일본에서 귀국한다. 그들이 죽을 때까지 낙선재에서 살았다. 70년 영왕이 숨지고, 89년 덕혜옹주와 이방자 여사가 차례로 숨진 뒤 창덕궁은 주인없는 빈 집이 됐다. 이와 관련한 황당한 사건. 이방자 여사가 숨진 뒤 창덕궁엔 이삿짐을 가득 실은 트럭이 종종 찾아오곤 했다. 트럭에서 내린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이방자 여사 다음에 낙선재에서 살 차례라며 방을 내놓으라고 소란을 피웠단다. 불과 4~5년 전의 일이다. 낙선재 앞에 종묘로 건너가는 길이 있다. 지금은 문을 잠가놨다.

(4) 왕가의 저주 - 규장각(奎章閣)
완만한 언덕을 넘으면 후원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왕실의 후원은 일반 백성이 접근할 수 없는 금원(禁苑)이다. 상림(上林)이라고도 했다. '비원'이란 기록은 1904년 처음 보인다. 후원은 단순히 왕이 놀던 곳이 아니다. 왕이 공부하고 거닐던 곳이다. 때로는 사냥도 하고 예를 배웠으며 연회도 베풀었다. 은밀한 정치적 결정이 이뤄지기도 했다.

후원의 첫째 경치는 부용지(芙蓉池)다. 직사각형의 연못인 부용지를 사이에 두고 자그마한 정자인 부용정(芙蓉亭)과 2층 건물 주합루(宙合樓)가 마주 본다. 주합루의 정문은 어수문(魚水門)이라 불린다. 물고기와 물의 문이라. 곡진한 사연이 숨어있다. 부용지 모서리 장대석에 물에서 튀어오르는 모습의 물고기 한마리가 돋을새김돼 있다. 그러니까 부용지에서 물고기가 튀어올라 어수문을 통과하면 주합루 건물에 도달한다. 주합루의 1층은 정조 때의 국책 연구기관 규장각이다. 이 철학적인 배치에서 입신 출세를 뜻하는 등용문(登龍門)의 신화를 읽는다.

현대사 인물 중에 규장각에서 부용지의 절경을 내려다보며 술을 마신 이가 둘이 있다. 일제의 초대 한국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박정희 전 대통령. 얄궂게도 두명 모두 총에 맞아 죽었다. 현대사 연구가들은 이를 '규장각의 저주'라고 한단다.

(5) 과거시험.향연의 장소 - 영화당(暎花堂)
이름처럼 꽃구경하기 좋은 곳이다. 왕이 향연을 자주 베풀었다. 더 재미있는 건 영화당이 바로 과거를 감독하던 곳이라는 사실이다. 춘당대에서 과거를 치렀는데 지금의 공중화장실 앞 공터부터 창경궁의 춘당지 근처까지가 옛날엔 춘당대라 불리던 창덕궁 담장 안이었다. 혹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받은 과거 시제를 기억하시는지. '춘당의 봄기운은 예나 다름이 없는데(춘당춘색 고금동.春塘春色古今同)'. 그 춘당이 바로 여기다. 하지만 과거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 부정 행위가 극에 달한다. 책을 베끼는 건 물론이고 대리 시험도 공공연했다. 답안지를 빨리 내면 좋은 성적을 얻는다 해서 좋은 자리를 맡아주는 전문 직종이 생기기도 했다. 일그러진 청운의 꿈을 달구던 곳에 지금은 화장실이 서있다는 게 참 묘하다.

(6) 도교의 향취 - 불로문(不老門)
'ㄷ'자를 세워놓은 생김새의 돌문이 앞을 가로막는다. 통돌이다. 불로문이라. 이 문을 통과하면 늙지 않는다는 뜻일 터. 도교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 역에도 창덕궁의 불로문을 본뜬 구조물을 세워놓았다.

불로문 너머에 사대부 가옥을 본뜬 연경당(演慶堂)이란 고택(古宅)이 나온다. 순조가 숙소로 자주 이용하던 곳. 소박하면서도 품격이 느껴진다. 연경당에 들어서기 전 정문 앞의 석분(石盆)을 허리 숙여 들여다볼 것. 네 귀퉁이에 돋을새김된 두꺼비 네마리가 있다. 그 방향이 재미있다. 세마리는 석분의 바깥을 향하는데 한마리만 안쪽을 향한다. 이유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분명한 건 두꺼비도 도교적인 소재라는 사실. 불로장생을 의미한다. 참고로 후원 곳곳에 놓여있는 석분 대부분은 광해군이 아끼던 장식물이었단다.

(7) 원래는 네모꼴 - 반도지(半島池)
지금부터가 새로이 개방되는 후원이다. 울창한 신록이 장대하게 펼쳐진다. 그러다 한반도 모양을 닮은 연못을 만난다. 반도지. 연못 허리께 부챗살처럼 생긴 관람정(觀纜亭)과 어울려 그럴듯한 풍광을 연출한다. 하지만 속지 말자. 1827년 무렵 제작된 '동궐도'란 지도를 보면 이 일대엔 네모난 연못 2개가 있었다. 특히 지금의 관람정은 일본 정자의 구조다. 반도지와 관람정은 일제가 꾸민 경치다. 일반인들은 경탄할지 모르지만 건축가들은 인상을 찡그린다. 동궐도는 매표소 옆에 있다. 동궐도와 지금의 창덕궁을 비교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8) 정조의 야망 - 존덕정(尊德亭)
겹지붕을 얹은 육각형의 정자. 다른 정자들보다 유독 눈에 띈다. 내부 단청도 무척 화려하다. 여의주를 사이에 두고 황룡과 청룡이 서로를 희롱하는 그림 아래 글씨가 빽빽이 새겨진 목판이 보인다. '세상의 모든 냇물이 달을 품지만 하늘의 달은 오직 하나다. 그 달은 곧 나 자신이요, 냇물은 너희들이다.' 이 위풍당당한 글의 주인공은 정조다. 세도 정치의 틈바구니에서 탕평책을 펼치며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던 그다. 정조는 홍국영 일파를 존덕정으로 불러 회유했을 것이다. 목판의 글씨를 읽어보게끔 한 뒤 왕을 따를 것인지 여부를 물었을 것이다. 정조는 자신이 등용했던 채제공 같은 남인과도 여기에서 술잔을 기울였을 것이다. 식탁 정치는 현대 정치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9) 왕의 예체능 교습소 - 폄우사(愚)
숲을 향해 잔디밭이 깔려있고 복판에 건물이 들어섰다. 어리석음을 경계하여 고친다는 뜻의 폄우사. 왕이 활쏘기를 연마하던 곳이다. 여기서 주목할 건 건물이 아니라 가는 길에 놓여있는 돌이다. 어른 보폭으로 맞춰 잔디밭에 박힌 돌을 따라 걸어보자. 자연스레 팔자 걸음이 된다. 돌의 앞부분이 바깥을 향하기 때문. 왕의 양반 걸음 연습 장소였다

(10) 궐 밖의 농사 살피던 곳 - 청의정
옥류천(玉流川) 지대에 들어선다. 정자 5개가 꼬불꼬불 이어지는 계곡물을 따라 옹기종기 모여 있다. 대부분 인조 때 올렸다. 인조반정 당시 크게 소실됐던 창덕궁을 다시 지으면서 옥류천도 조성했다. 바위에 새긴 '옥류천'이란 글씨도 인조의 것이다. 5개 정자 가운데 초가 지붕의 정자에 눈길이 머문다. 청의정이다. 정자를 둘러싸고 맨흙이 깔려있다. 옛날엔 이 흙밭이 논이었다고 한다. 산책을 나선 왕이 벼가 얼마나 자라는지 지켜봤다는 얘기다. 바로 담너머가 성균관대학교. 혈기왕성한 대학생들이 가끔 담을 넘어 오곤 한다.

 

출처: www.joins.com

꿈과 환상에의 여행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두루마리/비단에 담채, 38.7×106.0 cm, 일본 천리대학 중앙도서관 소장
꿈 속에 보았던 황홀경의 세계가 눈 앞에 다시 펼쳐진다면,
그 황홀감이야 말로 다 하겠는가? 안견이 그린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는 500년이 지난 지금도 황홀하기만 하다, goodnews*****

지조와 절의의 상징형
[김정희(金正喜)의 세한도(歲寒圖)]
두루마리/종이에 수묵, 23.7×108.2 cm, 개인 소장
갈필로 성글게 그려진 소나무와 잣나무, 그것은 빈틈과
미완성을 통해 보여지는 알참과 완성의 세계이다.
‘아아 잣가지 높아 서리 모르시올 화반이여’멀리 신라의 충담이
읊었던 노랫가락이 천년 후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듯하다.

인간과 자연의 불가사의한 도(道)
[신잠(申潛)의 탐매도(探梅圖)]
견본담채, 43.9×210.5 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잔설이 분분한 첫봄에 몇 송이 피어난 매화, 세상의 어떤 예술가가
그 은은한 향기에 취하지 않으랴? 매화를 찾아나선 선비는 결국 인간의
깨끗한 본성을 발견하고 탐매의 길을 마감하리라. 하지만 그 길에 끝이 있을까?

강호자연에의 동화
[이정(李楨)의 산수도(山水圖)]
화첩(畵帖) 12면 중 제 5엽(葉),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저 돛단배는 물 위에 뜬 것인가, 하늘을 나는 것인가?
아무런 작위도 없이 바람과 물결에 몸을 내맡기니, 그 또한 신선이 아닌가!
우리도 그처럼 물같은 하늘, 하늘같은 물고요와 적막에 흘러와 쌓이느니 시간 뿐이요,
다시 흘러가 사라지느니 그 또한 시간 뿐이다. 붓을 들어 시간의
흐름을 그려낼 자, 그 누군가? 안견이 아니라면 아무도 없으리.

소요유의 풍류
[이불해(李不害)의 예장소요도(曳杖逍遙圖)]
견본담채, 18.8×13.3 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위에 몸을 맡길 수 있다면…

이념화된 산수자연
[전(傳) 안견(安堅)의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제1첩산시청람(山市晴嵐) 제2첩연사모종(煙寺暮鐘)
제3첩소상야우(瀟湘夜雨) 제4첩원포귀범(遠蒲歸帆)
제5첩평사낙안(平沙落雁) 제6첩동정추월(洞庭秋月)
제7첩어촌석조(漁村夕照) 제8첩강천모설(江天暮雪)
움직임이 없는 세계, 그
두 손을 뒷짐을 지거나 소매 속에 감추거나, 지팡이를 끌고 가거나
한가로움에는 무엇이 다르랴? 지팡이를 끌면서 고개 돌려 뒤돌아보는 저 선비의
모습을 오늘날 다시 볼 수 있다면, 그 지극한 즐거움을 다시 누릴 수 있다면…

한국인의 이상향

[정선(鄭敾)의 금강전도(金剛全圖)]
수묵담채, 130,6 X 94,1 호암미술관 소장
일만이천 개골산, 누가 있어 그 진면목을 그렸는가?
하늘님이 내려다보며 암시라도 하였는가? 천리를 멀다 않고
한 걸음에 달려가 보고 싶은 마음이 그림 속에 살아있다.

시화일체의 세계
정선(鄭敾)의 [동리채국도(東離採菊圖)]
선면/지본 담채, 22.7 × 59.7 cm,국립중앙박물관 소장(위)
[유연견남산도(悠然見南山圖)]
선면/지본 수묵, 22.7 × 62.7 cm,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아래)
동쪽 울타리의 국화 송이 꺾어 들고, 유연히 남산을 바라다 본다.
그 깊고 깊은 은일처사의 세계를 시인은 글로 쓰고, 화가는 붓으로 그려냈다.
시 가운데 그림이 있고, 그림 가운데 시가 있어 감흥 또한 곱절이다.

강산 유람의 풍류
[김응환(金應煥)의 금강산 연주담도(連珠潭圖)]
견본 담채, 32×42.8 cm, 개인 소장
죽장에 삿갓 쓰고 금강산에 오르니, 몸은 조용하고 마음은 한가롭다.
고개들어 올려다보는 보이지 않는 얼굴 표정 속에는
연주담 주변 풍경의 진면목이 담겨있을까?

한국적 소산지기
[전기(田琦)의 계산포무도(溪山苞茂圖)]
지본 수묵, 24.5×41.5 cm,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짧게 삐친 점들과 굴곡있는 선들은 삽상한 건강미를 전해준다.
복잡한 듯 단순하고, 시끄러운 듯 고요한 포무의 세계, 그것은
한국인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원초적인 공간의 모습이 아닐까?

자연 회귀의 심성
[김수철(金秀哲)의 송계한담도(松溪閑談圖)]
화첩/종이에 담채, 33×45 cm, 간송 미술관 소장
송림 사이로 스치는 솔바람 소리, 악보도 없고 곡조도 없이 타는
줄없는 거문고 소리던가. “송풍아, 세상 기별 오거든
불어 도로 보내어라.” 세속이 멀어지면, 화두조차 솔바람 되리

[이정(李楨)의 산수도(山水圖)] 설명에서

- 인왕산 鶴학巢소島도에서 최범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