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반더루스트, 영원한 자유의 이름>의 책장을 넘겨보았다.

가끔 책을 선물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좀처럼 그 책을 만지게 되지 않는다.

어언 5년전에 출간된 책이어서,

다시 읽게되면 내가 뭘 모르고 썼다는 자책감에 빠질가바 그럴지도 모르지.

오년이란 세월을 보내면서 나는 많이 변했다.

나의 환경과 목적도 변했고, 내 머리를 채우는 화두도 그렇다.

가장 큰 변화는 내가 <학소도>에서 살게된 것이리라.

직업도 바뀌었고, 생활 패턴도 그렇다.

물론 변하지 않은 것도 많다.

내 삶의 밑바탕에, 마르지 않는 시냇물처럼 흐르는

기본 가치관, 세계관은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책장을 넘기다보니 내가 쓴 글인데도 불구하고 문득,

낯설 게 와닿는 문장이 있다.

마치 내가 예언이라도 하듯이.

"누군가 말했지. '돌아올 곳'이 없다면 떠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인간이 부러워하는 날개를 달고 태어난 새들도 어쩌면 '돌아갈 곳'이 있기에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떠나지 않고는 '돌아올 곳'이란 무의미하다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떠나야만 도착할 수도, 돌아올 수도 있다. 종착역 없는 열차란 없기 때문에. 결국, 떠나고 싶은 우리의 마음이란 돌아갈 곳을 찾는 마음이 아닐까."

이 글을 쓸 때만해도 내가 <학소도>로 돌아와 살 게 될줄 정말 몰랐었는데,

그 당시엔 <학소도>란 당호도 물론 없었고

고향, 귀향이란 단어가 큰 의미를 갖지 않았던 때였는데,

지금 돌아보면 <학소도>로의 귀향은

내가 잠재의식 속에서 찾고 있던 바로 그 '돌아올 곳'이었나보다.

운명이란 참 묘하다.

학소도의 장미축제

 노천명의 <남사당(男寺黨)>이란 시에 산딸기가 나온다.

나는 얼굴에 분(粉)칠을 하고/삼단 같은 머리를 땋아내린 사나이 초립에 쾌자를 걸친 조라치들이/날라리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치마를 두르고 나는 향단(香丹)이가 된다.
이리하여 장터 어느 넓은 마당을 빌어/
램프불을 돋운 포장(布帳) 속에선
내 남성(男聲)이 십분(十分) 굴욕된다.
산 넘어 지나온 저 동리엔/은반지를 사주고 싶은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 /다음 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나는 집시의 피였다. /
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우리들의 도구(道具)를 실은/노새의 뒤를 따라
산딸기의 이슬을 털며/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꾼을 모으는 날라리 소리처럼/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전국 산야에 자라는 낙엽활엽수 관목으로 높이 2m정도에 이른다. 어린줄기는 적갈색으로 어릴 때는 털이 있고 갈퀴 같은 가시가 달린다. 잎은 달걀모양 또는 타원형이고 흔히 3∼5개로 갈라진다. 꽃은 암꽃과 수꽃이 따로 있으며 가지 끝의 산방화서에 달리고 5∼6월에 지름 2cm정도의 흰빛 꽃이 핀다. 열매는 둥글고 지름 1cm 내외이며 7∼8월에 적자색의 장과로 익는다.

 변영로의 <논개>에는 '석류속 같은 입술'이란 구절이 있다.

거룩한 분노는/종교보다도 깊고/불붙는 정열은/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그 물결 위에/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높게 흔들리우며/그 석류 속 같은 입술/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그 물결 위에/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길이길이 푸르리니/그대의 꽃다운 혼(魂)/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


우리 속담에 땅에 떨어진 석류가 안떨어지는 유자를 부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모두 제멋에 산다는 의미란다. 동의보감에는 목안이 마르는 것과 갈증을 치료하는 약제로 석류가 쓰인다고 한다.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이 원산인 데 언제 우리 나라에 들어 온지는 알 수 없다. 낙엽활엽수 소교목 으로 나무높이가 10m에 이르며 줄기가 뒤틀리는 모양을 한다. 잎이 나오는 것이 다른 나무에 비해 늦어 4월 하순이나 5월 상순이 되어야하며 긴 타원형으로 톱니가 없고 마주나기 한다. 꽃은 5∼6월에 피고 가지 끝의 짧은 꽃자루에 1∼5개씩 달리며 6개의 붉은 꽃잎이 포개져 종 모양이 된다. 열매는 둥글며 홍황색으로 익고 흔히 두꺼운 과피가 터져 종자가 드러난다.

 퇴계는 왜 매화를 사랑했는가

퇴계 이황(李滉)은 매화가 피는 겨울 섣달 초순에 운명했다. 그는 운명하던 날 아침, 기르던 분매(盆梅)에 "물을 주어라"고 명했다. 이것이 퇴계의 마지막 유언이다. 퇴계는 이토록 매화를 혹애(酷愛)했다.

매화를 '매형(梅兄)', '매군(梅君)', '매선(梅仙)' 등으로 부르며 깍듯이 하나의 인격체로 대우했다. 그래서 때로 의인화시켜 시를 주고받기도 했으며, 매화를 시의 제재로 가장 빈번히 다루었다. 퇴계는 생전에 매화를 제재로 한 시만을 모아 『매화시첩(梅花詩帖)』을 편집해 두기도 했다. 여기에는 90여 수가 실려 있다. 한국의 문인과 학자들 가운데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다.

한국 문헌에서 매화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大武神王) 24년에서다. 「8월, 매화꽃이 피다」라는 기사다. 한겨울에 피어야 할 매화가 8월에 피었으니 이상하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삼국사기』의 매화는 국가적인 재액의 징표를 기록한 것이다.

 

다음으로 매화는 통일신라 말기의 시인 최광유(崔匡裕)의 시에 나온다. 최광유는 견당(遣唐) 유학생 시절, 당나라 친구 집 뜰에 핀 매화를 보고 "뜨락 한 구석에서 섣달의 봄을 독점하고 있네"라고 읊었다. 일찍 피는 꽃으로서의 매화를 취한 것이다.

중국에서 일반화된 상징 '봄의 선도자'에 다름아니다. 그런데 "내 고향 시냇가에도 매화나무 있어/ 만리 밖 당나라로 간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라는 시구로 보아 당시 신라에서도 매화는 일정하게 관상적(觀賞的)으로 주목되는 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고려 중기에 임춘(林椿), 이인로(李仁老), 이규보(李奎報), 진화(陳華) 같은 시인들이 모두 매화를 읊고 있다.

대체로 '봄의 선도자'로서의 매화를 취하여 중국의 매화 관련 전고(典故)를 써서 작품화하고 있어 뚜렷하게 새로운 상징은 파생시키지 못하고 있다. 다만 이규보와 진화의 시에 매화가 맑은 향기를 풍기거나 담장(澹粧)한 미녀로 형상화되어 있다.

옥결 같은 살결엔 맑은 향기 아직도 있는/ 선약(仙藥)을 훔친 달 속의 항아(姮娥) 몸"은 이규보의 시구이고, "봄의 신이 뭇 꽃을 물들일 때/ 맨 먼저 매화에게 옅은 화장을 시켰지// 옥결 같은 뺨엔 옅은 봄을 머금고/ 흰 치마는 달빛이 서늘해라"는 진화의 시구다. 그러나 향기롭거나 옅은 화장을 한 미녀로서 매화를 형상화한 것은 유교적인 매화 상징의 본령과는 거리가 먼 문예 취향의 것이다. 유교가 아직 심화되지 못했던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하겠다.

매화가 '봄의 선도자'라는 상징은 그 상징의 생성 계기가 유교에 있다고 해서 유교의 상징일 뿐, 실제 중국에서는 진작부터 많이 문예 취향화되었다. 이러한 예는 앞의 고려 중기 시인들의 작품에서 그 자취를 확인할 수 있다. 일연(一然)은 이렇게 문예 취향화된 상징을 다시 불교적 사실의 상징으로 쓰고 있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신라에 불교가 모례(毛禮)의 집을 통해 처음으로 전해진 사실을 이렇게 시로 읊었다.

"금교(金橋)엔 눈이 얼어 아직 풀리지 않아/ 계림(鷄林)에 봄빛은 온전히 돌아오지 않았는데// 기특도 해라, 봄의 신 꾀도 많아서/ 모례의 집 매화에다 먼저 손을 썼네."

문예 취향화된 '봄의 선도자'로서의 매화 상징은 이렇게 '불교의 최초 도래'를 상징하고 있다.

유교의 심화는 도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13세기 말부터의 도학 수용은 매화 상징을 보다 유교적으로 만들어 갔다. 일련의 고려 말기 유학자들의 작품에서 우리는 그 점을 확인하게 된다.

이곡(李穀)은 "우물 밑 양기 돌아/ 가지에 꽃 기운 움직이네"로 심동(深冬)에 피는 매화를 양기의 되돌아옴으로 읊었다. 이집(李集)은 "이미 주인과 함께 희고 깨끗하니/ 복사꽃 오얏꽃 고울 때를 따를까 보냐"라고 하여 속류(俗類)와 어울리지 않는 매화의 고결한 인품을 읊었다.

이색(李穡)은 "지축(地軸)이 돌아 한 점 봄/ 밝은 창 아래 문득 은은한 향기 새롭네"라고 하여 매화의 착화(着花)를 동지에 양기의 되돌아옴으로 우회적으로 읊었다. 정몽주(鄭夢周)는 "스스로 향기로운 덕을 안고 있으니/ 풍설이 몰아침을 시름할까 보냐"라고 하여 역경을 견디어 내는 선비를 상징했다.

정도전(鄭道傳)은 「매천부(梅川賦)」를 지어 당시의 선비 하유종(河有宗)의 고결한 인품을 '눈과 달빛으로 청결한 섣달 밤의 냇가에 맑은 향기를 풍기며 서 있는 매화'로 표현했다. 그는 또 "천지간에 음기(陰氣)가 꽉 차 있어/ 어느 곳에서 봄빛을 찾는담// 기특하기도 해라, 저토록 수척한 것이/ 얼음 서리 물리쳐 내네"라고 하여 '양기의 전령사'로서의 매화를 읊어, '절조가 빼어난 사람'을 상징했다.

 

퇴계와 매화 시

 

역사적으로 도학의 수용 과정에서 매화 시의 창작 빈도가 높았듯이 퇴계 개인에게서도 매화 시의 창작 빈도는 그의 도학에 대한 몰입 과정과 유사하다.

즉 100여 수의 매화 시 중 33세 때 2수를 지은 것 외에는 모두 그가 도학에 몰입해 가기 시작하던 중년 이후의 창작이다. 그것은 또한 매화를 사랑하고 여러 수의 매화 시를 남긴 송나라의 주희(朱熹)에 몰입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 같은 사실들은 매화와 퇴계의 도학 사이에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암시한다.

100여 수의 매화 시에서 퇴계는 매화를 실로 다면적으로 묘사·서술했다. 물론 퇴계는 도산서당(陶山書堂)에 소나무·국화·대나무와 함께 매화를 심어 두고 '절우사(節友社)'라 명명하고, "내 이제 매형(梅兄)까지도 아울러서 풍상계(風霜契)를 만드니/ 절개와 맑은 향기 흠뻑 알겠네"라고 종래의 관용적인 매화 상징 즉 '절조가 빼어난 사람', '고결한 기품을 가진 사람'으로서의 상징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대부분의 매화 시는 이런 외적인 규정성으로 정리된 상징에 집착하지 않고 이를 넘어서 있다. 말하자면 사랑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임을 두고 작품을 쓰듯 갖가지 사연이 갖가지 방식으로 토로되었다.

여기에는 퇴계의 매화에 대한 대전제, 즉 퇴계에게 매화가 사랑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임이 되게 된 소이연이 있었다. 그것은 매화가 '청진(淸眞)'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퇴계가 추구하는 청진은 '인간 내면 세계의 청진' 그것이다. 그런 점에서 퇴계에게 매화 상징은 본질적으로 '절조가 빼어난 사람', '고결한 기품을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청진'은 바로 이런 사람의 내면 세계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44세 때 매화를 읊은 작품을 보자. "막고산(?姑山) 신선님이 눈 내린 마을에 와/ 형체를 단련하여 매화 넋이 되었구려// 바람 맞고 눈에 씻겨 참 모습 나타나니/ 옥빛이 천연스레 속세를 뛰어났네// 이소(離騷)의 뭇 화초에 끼여들기 싫어하고 / 천년이라 고산(孤山)에 한 번 웃음 웃네."
 

 

막고산 신선님은 살결이 빙설(氷雪) 같고, 몸이 가볍고 보드랍기가 처자 같다는 신선이다.

이러한 신선이 그것도 눈 내린 마을에 와서 매화로 화신했다고 한 문맥에서 매화는 청정(淸淨) 그 자체로 표상되어 있다.

그리고 천연스런 옥빛으로 이소의 뭇 화초에 끼여들지 않고 고산(孤山:임포가 살던 곳으로, 이 시에서는 매화의 고고함을 드러내기 위하여 쓰였음)에 피어 있다는 문맥에서 매화의 고고한 자태가 표상되어 있다.

이와 같이 매화는 퇴계에게 그가 추구해 마지않던 '인간 내면의 청진' 그 자체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퇴계가 매화로 '청진'을 상징한 이면에는 그의 도학이 추구해 마지않던 이(理)의 세계가 있다. 퇴계가 도학에 몰입해 갈수록 매화 시의 창작 빈도가 높아간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다.

퇴계는 매화의 청진함에서 이(理)의 세계의 청진함을 본 것이다. 퇴계는 이의 세계를 "깨끗하디 깨끗하고 맑디 맑아"라고 묘사한 적이 있다. 매화의 청진함으로 결국은 '이의 세계', 그것도 특히 '인간 내면의 이의 세계'를 상징하려 했던 것이다. 매화가 도선(陶仙:퇴계)에게 답한 작품 한 수를 보자.


"들으니 도선도 우리마냥 쓸쓸하더군요/ 임 가실 때를 기다려 천향(天香)을 풍기리다// 임이여 원컨대 대할 때나 그릴 때나/ 옥설(玉雪)과 청진을 둘이 함께 잘 간직하도록."

마지막 시구에 매화가 도선에게 하고자 하는 다짐이 분명하게 시사되어 있다. 매화와 이(理)를 직접적으로 상징의 매개와 그 취의(趣意)로 하지 않은 것은 그렇게 할 경우 이를 논리적으로 다루는 데 엄청난 장애를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진'을 통해 우회적으로 상징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매화는 한국에서 '천심(天心)'과 '이(理)'라는 두 가지 유교적인 상징을 낳았다. 퇴계 이후 적어도 유교에서는 매화를 매개로 한 상징이 더 파생된 것 같지는 않다. 유교에서 어떤 관념이나 덕성(德性)을 화훼로 상징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도덕성이 심미성으로 전화되고, 심미성이 도덕성으로 전화된다는 미선일치(美善一致)의 관점에서다.

인간의 도덕성 함양과 조상 숭배라는 유교의 두 가지 교의의 흐름 가운데 인간의 도덕성 함양에는 이런 사유의 기제(機制)가 스며 있다. 그러므로 매화는, 나아가 세한삼우나 사군자는 심미적으로 아무리 분방한 예술적 취향으로 표방한 그림이라 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그것들의 유교적 상징, 곧 도덕적 상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 이동환

텃밭 한쪽 구석에서 자라는 포도나무

담쟁이덩굴은 의외로 매력적인 식물입니다. 생명력도 강하구요.

서른살도 더된 회양목 -- 저는 이 회양목의 가지를 잘라 인감도장을 만들었답니다.

이 어여쁜 꽃이 무슨 꽃이고 하니.....우리가 먹는 파의 꽃이랍니다

작년에 수확했던 호박이 썩어서 땅에 묻었더니 많은 새생명을 탄생시켰네요

<학소도의 약도>

- 인왕산 鶴학巢소島도에서 최범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