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름의 유래

98년 <산림>지 9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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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에는 약 1천 여종의 나무가 있고 남한만 하여도 약 6.7백 여종이 자라고 있다. 이렇게 많은 종류의 나무 이름에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우선 전혀 의미를 알 수 없는 생소함에 당황하게 된다. 그러나 옛 사람들이 처음 나무의 이름을 붙일 때는 그 나무가 갖는 독특한 특성에 근거를 두었으므로 나무마다 어떤 의미를 가진 연유가 있으나 우리가 찾지 못할 따름이다. 이름을 붙일 당시는 짧게는 수 백년, 길게는 수 천년 전이어서 지금은 그 의미를 새겨 볼 수 없는 경우가 많으나 나무의 특성과 연관지어 추정해 보면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는 수종도 상당수 있다.

나무의 바깥 모양, 쓰임새, 수피, 잎, 꽃, 열매, 가시 등으로 나누어 나무이름의 연유를 찾을 수 있는 나무의 특징과 이름과의 상관관계를 구명해 보고자 하였다. <나무백과>, <우리나무백가지>, <한국수목도감>, <수우 이창복교수의 발자취> 등에서 이미 밝혀진 수종명의 유래를 소개하고 필자가 나름대로 구명한 내용을 추가하여 기술하고자 한다. 필자의 홈페이지http://bh.kyungpook.ac.kr/~sjpark/에 들어가면 더욱 구체적인 내용을 볼 수 있다.

1. 나무의 모양

나뭇가지가 돌려나기하고 거의 직각으로 퍼져 층 층을 이룬다하여 층층나무, 나뭇가지가 정확하게 3개씩 갈라지는 삼지(三枝)닥나무, 멍석을 깔아놓은 것처럼 땅에 바짝 붙어 자라는 멍석딸기, 줄줄이 이어 자라는 줄딸기, 껍질도 속도 하얗고 길게 늘어져서 국수를 연상한다하여 국수나무, 가지가 꼬불꼬불하여 용트림을 하는 용(龍)버들, 가지가 길게 늘어지는 버들이란 뜻의 수양(垂楊)버들, 미국에서 들어온 버들 혹은 아름다운 버들이란 의미로 미류(美柳)나무, 빗자루를 만들고 약용으로 쓰이는 초본의 비싸리 보다 작고 땅에 붙어 자란다는 땅비싸리를 예로 들 수 있다. 또 가지가 부드럽다는 뜻의 부들나무가 버들이 된 것으로 보이며, 싸리가 아니나 광대처럼 싸리 흉내를 낸 광대싸리, 중국의 위성에 많이 심었고 모양이 버드나무처럼 늘어지는 위성류(渭城柳)가 있다. 모양이 웅장하고 크다는 뜻으로 왕(王)이란 접두어가 붙은 이름이 많은데 왕버들, 왕자귀나무, 왕머루, 왕팽나무, 왕대 등의 예가 있고, 나무가 누워있다는 뜻으로는 눈잣나무, 눈향나무, 눈측백나무 등이 있다.

2. 나무의 쓰임새

나무 자체의 쓰임새로 이름이 붙여진 것은 대팻집나무, 참빗의 살을 만든 참빗살나무, 고기잡이 도구로서 작살에 쓰인 작살나무, 윷을 만들기에 적합한 윤노리나무, 키나 고리괘짝을 만든 키버들과 고리버들, 조리를 만드는데 사용한 조릿대 등이 있다. 나무껍질의 용도로 붙여진 이름을 보면 껍질을 벗겨 삿자리 등으로 이용한 피(皮)나무, 사위가 짐을 질 때 힘을 덜 수 있도록 연약한 줄기를 가진 사위질빵이란 이름이 있으며 이정표로 쓰인 나무에는 5리 및 10리마다 심었다는 오리나무와 시무나무가 있다. 또 칠에 쓰인 나무로서는 옻칠에 쓰인 옻나무, 황금빛을 낼 수 있는 황칠(黃漆)에 쓰인 황칠나무를 들 수 있다. 기타 잎으로 떡을 갈아 싸는 떡갈나무, 환자가 생기지 않는다는 무환자(無患子)나무, 가지가 낭창낭창하여 말채찍으로 쓰였다는 말채나무의 예를 들 수 있다.

3. 수피의 형태

수피의 색깔로 붙여진 이름에는 거의 흰 빛의 얼룩얼룩한 수피를 갖는 백송(白松), 검은빛 수피를 가진 흑피목(黑皮木)에서 검은 피나무로 되고 다시 변하여 된 가문비나무, 회갈색의 흰수피인 분피(粉皮)나무가 변한 분비나무, 검은 소나무라는 뜻의 흑송(黑松)이 검솔을 거쳐 곰솔, 붉은 수피로 대표되는 주목(朱木), 내수피가 짙은 황색을 나타내는 황벽(黃蘗)나무, 은빛 백양나무라는 뜻의 은백양(銀白楊) 등이 있다. 노각나무는 사슴뿔처럼 보드랍고 황금빛을 가진 아름다운 수피라는 뜻에서 녹각(鹿角)나무라고 하다가 발음이 쉬운 노각나무로 되었다. 또 벽오동(碧梧桐)은 수피가 푸른색이라서 붙여진 이름인데 한자로는 청동목(靑桐木)이며 북한에서는 청오동이라 한다. 피부병의 일종인 버짐이 핀 것처럼 수피가 생겼다하여 버즘나무, 수피의 모양새가 독특하여 붙여진 이름에는 줄기에 화살 날개모양의 코르크질 날개가 달리는 화살나무, 코르크가 굵은 혹처럼 발달한 혹느릅나무, 두꺼운 수피 때문에 세로로 깊은 골이 파진다하여 골참나무로 부르다가 변한 굴참나무가 있다.

4. 잎의 특징

잎 모양의 특징에 따라 붙여진 이름은 박쥐가 날개를 폈을 때 모양과 같다하여 박쥐나무, 잎이 갈라지는 모양이 손가락 8개달린 손바닥 같은 팔손이, 7개로 잎이 갈라지는 칠엽수(七葉樹), 잎이 5개로 각 각 갈라지고 껍질을 약제로 쓴다는 뜻으로 오가피(五加皮)가 변한 오갈피나무, 가위로 잘라 놓은 것처럼 잎이 깊이 파진 가새뽕나무, 고추 잎을 닮은 고추나무, 작은 깻잎 모양을 한 좀깨잎나무, 사방오리보다 잎이 작고 잎맥수가 많은 좀사방오리, 잎 끝이 우묵하게 들어갔다 하여 우묵사스레피나무, 침엽이 좌우로 줄처럼 달린 모양이 한자의 아닐 비(非)자를 닮았다하여 비자(榧子)나무가 있다. 잎이 떨어지는 모양으로 본 이름은 속생하고 있는 잎이 1개씩 떨어지는 낙엽송(落葉松), 잎은 물론 작은 가지의 일부가 깃처럼 떨어지는 낙우송(落羽松)을 들 수 있다. 그 외 단풍이 특히 붉게 든다하여 붉나무, 밤에는 복엽으로 붙은 작은 잎이 서로 닫히는 모양이 잠자는데 귀신 같다하여 자귀나무, 잎 뒷면이 은빛인 단풍나무라는 의미로 은단풍(銀丹楓), 참나무 종류 중에는 잎이 가장 작다는 졸참나무, 반대로 잎의 크기가 다른 나무보다 훨씬크다하여 태산목(泰山木), 사철 푸르다는 사철나무, 잎자루가 길어 약간의 바람에도 잎이 벌벌 떤다는 사시나무, 덩굴의 뻗음이 튼튼하여 미역 고갱이처럼 생겼다하여 미역줄나무 등이 있다. 또 싹이 나오는 모양이 말의 이빨처럼 튼튼하게 생겼다하여 마아목(馬牙木)이 변한 마가목, 마찬가지로 순이 나오는 모양이 붓처럼 생긴 붓순나무, 겨울눈의 모양이 호랑이 눈을 닮았다 하여 호랑버들, 마찬가지로 겨울눈 모양이 삐죽해서 빗죽이나무라 부른다고 한다.

5. 꽃 모양

꽃이 피었을 때의 생김새에 따라 붙인 이름이 많다. 이팝나무는 꽃이 만개 할 때는 흰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마치 쌀밥을 고봉으로 담아 놓은 것 같은 모양인데 조선시대 쌀밥을 먹기 위하여 이씨의 밥을 먹어야 한다는 뜻에서 이밥나무가 변하여 이팝나무가 되었다. 비슷한 유래의 이름으로는 잔잔한 흰 꽃이 조밥을 연상시키는 조밥나무에서 조팝나무가 된 예가 있다. 또 새하얀 꽃핀 모양을 밤에 보면 빛을 발하는 것 같다는 야광(夜光)나무, 밤을 능가할 정도로 꽃이 환하다는 뜻의 능소화(凌宵花)도 있다. 기타 튤립 꽃과 비슷한 꽃이 나무에 달린다하여 튤립나무, 비단으로 수를 놓은 것 같은 둥근 꽃이 달린다는 뜻의 수구화(繡毬花)가 변한 수국, 수수꽃을 닮은 꽃이 핀다하여 수수꽃다리, 참꽃나무 비슷한 꽃이 달리나 상록으로 겨울을 나므로 참꽃나무겨우살이, 연꽃모양의 꽃이 피는 나무란 뜻의 목련(木蓮), 함박꽃 모양의 꽃이 피는 함박꽃나무, 겨울에도 꽃이 피는 겨울나무란 뜻의 동백(冬柏), 나무모양은 버드나무 비슷하나 복사나무를 닮은 꽃이 핀다하여 유도화(柳桃花, 협죽도)가 있다. 팥꽃나무와 분꽃나무도 비슷한 유래의 이름이며 꽃 모양이 병과 같다하여 병꽃나무란 이름도 있다. 꽃의 색깔로 붙인 이름에는 옥매(玉梅), 홍매(紅梅), 황매화(黃梅花)가 있으며 하얀 꽃이 스님의 머리 같다 하여 불두화(佛頭花)란 이름도 이채롭다. 오랫동안 계속하여 무진장하게 꽃이 핀다는 무궁화(無窮花)가 있으며 무화과는 꽃이 없는 과일이란 뜻인데 꽃이 필 때 꽃받침과 꽃자루가 긴 타원형 주머니처럼 비대해 지면서 수많은 작은 꽃들이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꼭대기만 조금 열려있어서 꽃을 잘 볼 수 없으므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

6. 열매 특징

열매의 바깥 모양에서 유래된 이름이 많으며 먹는 열매로서는 살구모양인데 은빛이라는 뜻의 은행(銀杏)나무, 참외모양의 열매가 나무에 달린다 하여 목과(木瓜)나무가 변한 모과나무, 주염 열매가 달리는 주엽나무, 신선의 과일이라는 천선과(天仙果)나무, 먹기만 하면 요강이 뒤집어질 정도로 정력이 세어진다는 복분자(覆盆子)딸기가 있다. 독특한 열매모양을 갖는 나무로서는 까마귀가 베기에 적당한 작은 베개 모양을 한 까마귀베개, 열매가 전통악기인 장구모양을 한다하여 장구밥나무, 4개로 갈라진 열매의 끝이 선풍기 날개처럼 휜 나래회나무, 열매가 모여 족제비 꼬리모양을 한 족제비싸리, 산 속의 큰 나무에 딸기 모양의 열매가 달리는 산딸나무, 열매의 모양이 마치 부채를 펴논 것처럼 아름답게 생겼다는 뜻으로 미선(美扇)나무, 열매가 둥글고 반질반질하여 스님의 머리를 닮았다고 직설적으로 표현한 중대가리나무를 들 수 있다. 열매가 쥐똥 같다는 쥐똥나무는 북한에서는 검정알나무라 하여 우리보다 훨씬 아름다운 이름을 쓴다. 열매의 용도에 따라 붙여진 이름에는 모든 병에 다 효력이 있는 만병통치약이란 뜻의 만병초(萬病草), 단단하고 새까만 열매가 달려 염주를 만들 수 있는 염주(念珠)나무, 열매에서 머릿기름을 짜내는 동백나무에 비하여 열매가 작다는 뜻으로 쪽동백나무, 마찬가지로 기름을 짜는 열매가 달리고 오동나무 비슷하다는 유동( 油桐)이 있다. 또 열매가 작은 아기배 모양이라서 아기배나무가 변한 아그배나무, 열매가 말발굽 모양을 한다는 말발도리, 동그란 핵과가 구슬모양인데 익으면 과육이 푸석푸석하여 멀건 구슬나무란 뜻의 멀구슬나무가 있다.

7. 가시의 특징

가시의 특징으로 붙여진 이름에는 실거리나무가 대표적이다. 즉 가시가 날카로운 갈고리처럼 휘어있어 실이 잘 걸리는 나무란 의미이며 일명 총각귀신나무라고도 한다. 기타 가시모양이 엄하게 생겼다는 음(엄嚴)나무, 가시가 굵고 튼튼하여 호랑이 발톱 같다하여 호자(虎刺)나무, 탁엽이 변하여 매발톱같은 날카로운 가시가 3개씩 달린 매발톱나무, 잎의 가장자리가 단단한 침으로 변하여 호랑이가 등이 가려울 때 등긁기로 쓴다는 호랑가시나무, 가시에 잘 찔린다하여 찔레나무, 가시가 용의 발톱 같다하여 용가시나무, 줄기에 큰 가시가 발달하는 조각자(?角刺)나무가 있으며, 가시가 접두어로 붙은 나무 이름에는 가시오갈피나무, 가시딸기 등이 있다.

8. 냄새 및 맛

잎이나 가지를 꺾으면 생강냄새가 나는 생강나무, 잎에서 역한 누린내가 나는 누리장나무, 지독히 쓴맛인 소태 맛이 나는 소태나무, 나무에서 향기가 나는 향(香)나무, 익는 열매에서 신맛, 단맛, 쓴맛, 짠맛, 매운맛의 다섯 가지 맛이 섞여 있다는 의미의 오미자(五味子), 열매에서 달다는 뜻의 다래, 꽃향기를 약제로 쓰는 정향(丁香)나무, 상스러운 향기가 난다는 서향(瑞香), 향기가 백리에 이른다는 백리향(百里香) 등이 있다. 또 돈나무는 열매가 겨우 내내 끈적끈적하고 달큼한 액체를 분비하므로 각종 곤충과 파리 떼가 날아와서 지저분하기 때문에 똥나무가 변하여 돈나무가 되었다 한다. 기타 잔가지를 꺾어 물 속에 넣으면 푸른 물이 울어난다 하여 붙여진 이름에 물푸레나무가 있다.

9. 생태 및 기타

살아가는 생태적인 특성에 따라 낙엽이 저버린 기주(寄主)나무에서 겨울을 상록으로 나므로 겨울살이가 변한 겨우살이, 혹은 겨우겨우 살아간다는 뜻의 겨우살이, 반상록으로 겨울도 참고 잘 견딘다는 뜻의 인동(忍冬)덩굴, 주로 개울가에 자란다는 갯버들, 담장의 덩굴이란 의미의 담쟁이덩굴, 바위가 많은 지역에 자라는 바위말발도리, 바닷가에 자라는 소나무란 뜻의 해송(海松) 등이 있다. 또 태우고 나면 황색의 재가 남는다는 노린재나무, 같은 유래의 검은재나무, 나무의 색이 붉은 가시나무란 뜻의 붉가시나무도 있다.

나무가 자라는 곳이 습기가 많거나 나무의 생재함수율이 높아서 붙은 이름에는 물박달나무, 물황철나무, 물오리나무, 물참나무, 물갬나무 등 앞에 물자가 있는 이름이다. 유사한 나무와 구별하기 위하여 참자가 붙은 참가시나무, 참개암나무, 참느릅나무, 참조팝나무, 참싸리 등이 있다. 또 깊은 산에 자란다는 산딸기나무, 산벚나무, 산뽕나무, 산앵도, 산조팝나무, 산팽나무, 묏대추, 두메오리나무 등의 예가 있다.

열매를 팽총의 탄환으로 사용할 때 날아가는 소리가 팽~한다하여 팽나무, 잎이 두꺼워 불 속에 던져 넣으면 "꽝꽝"하는 소리가 나는 꽝꽝나무, 수피를 태울 때 "자작자작"하는 소리가 나는 자작나무, 분지를 때 "딱"하고 분질러지는 닥나무, 마찬가지로 분지르면 "댕강"하고 분질러지는 댕강나무가 있다.

10. 한자 이름

오랑캐나라에서 들어온 복숭아처럼 생긴 열매라는 호도(胡桃)나무, 뼈를 책임진다는 의미가 있고 한약제로 쓰이는 골담초(骨擔草), 가서목(哥舒木)에서 가서나무를 거쳐 변한 가시나무, 노가자목(老柯子木)에서 변한 노간주나무, 대조목(大棗木)에서 대조나무를 거쳐 대추나무, 구룡목(九龍木)에서 변한 귀룽나무, 서목(西木)에서 변한 서나무(서어나무), 마찬가지로 소서목(小西木)에서 변한 소사나무, 수액을 채취하여 마시면 뼈에 좋다는 뜻의 골리수(骨利樹)에서 변한 고로쇠나무, 개 뼉다귀나무란 뜻의 구골(狗骨)나무, 겨울에 반상록으로 지나나 대체로 살아서 겨울을 난다는 생동목(生冬木)에서 생동나무를 거쳐 변화된 상동나무, 목단(木丹)이 변한 모란 등이 있다. 그 외 가짜중이란 뜻의 가중(假僧)나무, 진짜 중이란 의미의 참중(眞僧)나무가 있다. 또 거제수나무의 한자이름은 황화수(黃樺樹)이나 수재를 막아주는 나무란 뜻의 거제수(去災水)로 해석하기도 하며 괴화(槐花)는 회화나무의 중국이름인데 '괴'의 중국발음이 '회'이므로 회화나무 혹은 회나무가 되었다 한다.

10. 동물 이름

개, 곰, 소, 호랑이, 여우, 고양이, 박쥐, 병아리, 까마귀, 까치 등이 있으며 특히 '개'라는 접두어는 본래의 나무와 비슷하나 무엇인가 좀 떨어진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나리 꽃과 비슷하나 나리가 아니란 의미의 개나리를 비롯하여, 개느삼, 개다래, 개머루, 개벚나무, 개벚지나무, 개비자나무, 개박달나무, 개산초, 개살구, 개서어나무, 개오동, 개옻나무, 개잎갈나무, 개회나무가 있다. 기타 곰딸기, 곰의말채, 호랑가시나무, 호랑버들, 호자나무, 쇠물푸레나무, 여우버들, 괭이싸리, 괭이신나무, 박쥐나무, 병아리꽃나무, 까마귀머루, 까마귀밥나무, 까마귀베개, 까마귀쪽나무, 까치박달, 까치밥나무 등인데 개, 까마귀 등이 접두어로 붙은 경우가 가장 많다.

11. 지명

산 이름이 붙은 경우는 백두산자작나무, 백운산물푸레, 지리산오갈피나무, 한라산철쭉이고 특정 지방의 이름이 붙은 것은 강계버들, 광능물풀레, 서울귀룽나무, 설령오리나무, 제주광나무, 풍산가문비, 회양목 등이다. 나라 이름인 경우는 구주물푸레, 구주소나무, 구주피나무, 당느릅나무, 당매자나무, 당버들, 미국산사나무, 서양까치밥나무, 서양측백, 일본목련, 일본잎갈나무, 일본젓나무, 중국굴피나무, 중국남천, 중국단풍나무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보리수(甫里樹)는 보리라는 마을에서 생산되는 나무의 의미로 추정된다.

12. 비슷한 이름

나무이름은 비슷하나 과 혹은 속이 다른 수종에는 <나도밤나무, 너도밤나무, 밤나무>, <오동나무, 벽오동, 개오동, 꽃개오동, 유동나무>가 있고 과는 같으나 속이 다른 이름은 , <까치박달, 개박달나무, 물박달나무, 박달나무>, <돌배나무, 콩배나무, 아그배나무, 팥배나무>등이 있다.

13. 다른 나라의 일반명

네군도단풍(negundo), 방크스소나무, 리기다소나무(rigida), 스트로브잣나무(strobus pine), 테다소나무(teada), 아까시나무(acacia), 피라칸사(pyracantha)등의 예가 있다.


벚꽃은 언제부터 한일 양 민족이 모두 즐기는 꽃이 되었는가?

우리나라의 봄은 마치 벚꽃과 함께 시작하는 것처럼 진해 벚꽃맞이를 비롯하여 전국이 벚꽃축제를 각종 매체에서 우리 모두를 들뜨게 만든다. 거의 동시에 이웃 일본에서도 벚꽃축제가 남쪽의 구주에서 북쪽 끝인 북해도까지 거의 한 달에 걸쳐 법석을 이룬다. 그렇다면 벚꽃은 언제부터 한일 양 민족이 모두 즐기는 꽃이 되었는가?

옛 우리의 선조 들은 벚나무라면 껍질을 벗겨 활의 재료로 사용하는 것 외에 꽃을 감상하였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의 정사기록에는 물론 동국이상국집, 파한집 등의 시가집에도 매화, 살구, 복숭아, 자두 등 수많은 꽃나무가 있어도 벚나무만은 찾을 수 없다. 아마 동시에 피었다가 동시에 져버리는 벚꽃의 특성이 너무 경박하여 우리의 민족정서에 맞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조선왕조에 들어오면서 화피(樺皮)라는 나무가 기록에 나오기 시작하는데, 세종 10년(1428) '함경도 경성 관아의 버드나무에 하루는 베필(布匹) 같은 한 물건이 공중에서 길게 쭉 뻗치어 내려왔습니다. 바로 불타는 화피였습니다' 고 하였는데 여기서의 화피는 자작나무 껍질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세종실록의 오례에 관한 내용 중에 '붉은 칠을 한 활은 동궁이라 하고, 검은 칠을 한 것은 노궁이라 하는데 화피를 바른다' 하여 여기서의 화피는 벚나무임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 갑오년 2월5일자에도 화피 89장을 받았다는 내용도 역시 벚나무 껍질이다. 즉 자작나무와 벚나무를 동일한 한자인 화(樺)로 표기하고 뒤섞어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사전적인 화피의 의미는 자작나무 껍질이 아니라 벚나무 껍질을 말한다.

선조들은 쳐다보지도 않던 벚꽃을 즐기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 그들의 천박한 문화는 물론 기호품까지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면서 시작되었다. 벚나무가 우리나라에 처음 심겨지기 시작할 때의 전후사정은 조선일보에 실린 '이규태 역사에세이, 산림전쟁 이야기(99.8.12)'에 잘 나타나 있으므로 그대로 전재해 본다.

<일본의 침략정책으로 우리들 기억에 사라지고 있는 '사쿠라 정략'을 놓칠 수 없다. 을사조약으로 들어선 일본 통감부는 일본 국화인 사쿠라를 서울의 도심으로부터 심어나가 전 국토를 덮게 함으로써 정서의 일본화를 꾀했던 것이다. 창경원 남산 장충단 창덕궁의 사쿠라가 바로 이 정략의 일환이었다. 이 음흉한 사쿠라 정략의 저의를 알지 못했던지 순종황제께서 벚꽃이 곱다하니 빨리 피우게 하여 볼 수 없느냐고 말했다 한다. 얼씨구나 하고 통감부 당국자는 묘목이 아닌 지름 4치 남짓한 큰 사쿠라나무 열 그루를 군함을 동원, 일본에서 싣고 와 황제가 거처하는 문전에 심었다. 이때 황제는 손수 뜰에 나와 심는 장소를 지적해주기도 했다 한다. 이를 못마땅하게 본 궁중의 누군가가 이 열 그루의 나무에다 친일파 대신들의 직함과 성명을 적은 푯말을 걸어두어 한때 옥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 궁중 사쿠라 이식으로 명분을 얻은 제국주의자들은 관아가 늘어선 광화문으로부터 팔도 도처에 심어나 간 것이다. 이 사쿠라 정략에 반감도 대단하여 심어놓으면 뽑아 없애 길 거듭했고, 이를 방지하고자 세 그루 당 한 명의 책임경관을 두어 보호시키기까지 했다. 통감부의 당초 계획은 팔도의 모든 신작로의 가로수를 사쿠라로 할 셈이었으나 이 뽑아 없애는 저항에 굴복, 그 전국화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일병탄이 시작되고 한반도로 이주해 오면서 그들이 좋아하는 벚꽃은 방방곳곳에 차츰 심겨졌고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서서히 우리 고유의 것처럼 되어 버렸다. 남의 나라 왕궁인 창경궁에다 동물원을 만들고 그도 모자라 벚나무를 줄줄이 심고 시민의 휴식처란 이름으로 놀이터를 만들었다. 지금도 '치욕의 벚꽃놀이'가 아니라 '추억의 벚꽃놀이'로 그때를 그리워하는 이가 많다. 1906년경 진해와 마산 지방에 들어온 일본인들이 심기 시작하여 저들의 대륙침략 전진기지로 진해를 군항(軍港)으로 개발하면서 집집마다 거리마다 벚나무로 단장하였다. 반일투사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시절 한때 벚나무를 베어내는 일까지 있었으나 박정희 대통령이 다시 심고 가꾸라는 지시로 마치 우리나라의 봄이 '벚꽃 군항제'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다.

요즈음에는 청와대, 국회의사당, 육·해군사관학교, 남산, 어린이대공원과 학교 등 각종 주요기관, 사찰, 역사유적지까지 벚나무는 옛날부터 그 땅에 자라던 것처럼 버젓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무슨 근거로 벚나무를 우리의 국화인 무궁화보다 더 많이 심고 있는가? 이는 왕벚나무의 원산지는 제주도 한라산이라서 바로 우리의 꽃이므로 일본 꽃으로 알고 경원시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논리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산하에 자라는 대부분의 나무는 고향이 우리나라이며 왕벚나무에 버금갈 만큼 아름다운 꽃나무만도 수십 종에 달한다. 벚나무의 뼈아픈 역사적인 의미가 단순히 원산지가 우리나라라는 이유만으로 모두 무시될 수는 없다고 본다.

흔히들 벚나무가 일본나무이니 우리는 우리나라가 원산지라는 왕벚나무를 심으면 된다는 논리를 편다. 벚나무의 종류를 좀더 자세히 알아보면 벚나무, 왕벚나무, 산벚나무, 올벚나무, 개벚나무, 섬벚나무, 꽃벚나무 등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고 좀처럼 구별할 수도 없는 비슷비슷한 벚나무들의 한 종류이다. 이들을 구별하는 기준이란 암술대와 꽃자루에 털이 있느냐, 꽃잎의 길이가 기냐 짧으냐 등이 고작이어서 오랫동안 식물분류학을 공부한 전문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일 따름이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원산지인 왕벚나무나 일본인들이 심는 벚나무나 보는 사람은 그냥 '벚나무'일 따름이다.

문제는 벚나무가 일본의 국화로 오래 전에 지정되어 한때 일본군국주의의 표상이기도 하였고 지금도 국민 모두가 사랑하고 아끼는 꽃으로, 또 일본을 대표하는 꽃으로 확고하게 자라잡고 있는 '현실'이다.

어떤 이는 말한다. 장미와 튤립은 세계인이 즐겨하는 꽃일 따름이지 아무도 영국의 국화라고 네델란드의 국화라고 꺼려하지 않는다는 논리이다. 또 워싱턴 포트맥 강변의 수천 그루에 달하는 벚나무도 미국민이 모두 좋아하며 2차 대전 때 "일본 놈들은 지옥으로!!"라는 구호와 함께 42그루나 누가 베어 버렸어도 시민들은 보존하기로 하고 지켰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아름다운 벚꽃을 우리가 즐기면 그만이지 꽃나무 하나에까지 무슨 국수주의적 발상이냐고 편협함을 탓한다.

그러나 온 나라를 일본과 꼭 같은 벚나무 천지로 만들었을 때, 그렇지 않아도 서양인들의 눈에는 자연풍광에서 사람들의 얼굴까지 비슷하기만 한 일본과 무엇으로 차별화 할 것인가? 오늘날 벚꽃에 길들여진 우리의 눈으로 보아 꽃의 아름답기로 친다면 벚꽃 만한 꽃이 없는 것은 사실이나 그 이유 하나만으로 남의 나라꽃, 그것도 우리의 현대사를 망쳐놓은 일본의 국화로 온 나라를 뒤덮은 것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하필이면 일본을 대표하는 벚꽃의 아름다움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개살구, 살구, 복숭아, 귀룽나무, 돌배나무, 야광나무 등 찾아보면 벚꽃에 못지 않은 꽃나무도 얼마든지 있다.

워싱톤 벚나무 자료

워싱톤의 봄은 '포토맥' 강변의 벚꽃과 함께 활짝 피어오른다고 한다. 해마다 벚꽃 나들이 차 워싱톤을 방문하는 인파가 60만을 넘으며, 특히 '재퍼슨 기념관' 앞뜰의 타이들 연못가에 원을 그리며 펼쳐진 3,000여 그루가 장관이라 한다. 이 벚나무는 요꼬하마 영사로 있던 오빠를 찾아갔다가 벚꽃의 아름다움에 깊은 인상을 받은 '엘리자 씨드모어'란 여인이 1900년 워싱톤 시에서 '포토맥 공원' 일대를 새로 단장할 때, 벚나무를 시에 추천해 심겨지기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 이 여인이 벚꽃을 사 들일 모금운동을 벌리자 이를 알게된 동경시장은 2천여 그루를 기증하였으나 키우기에 실패하고 1912년 다시 3천여 그루를 보내서 심은 것이 그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벚꽃을 아름다운 꽃으로만 감상하던 미국인들도 일본군이 진주만을 습격하자 사정이 달라졌다. 사흘 뒤인 1942년 12월 10일에는 누군가 일본의 상징인 벚나무 42그루를 톱으로 잘라 버리고 "일본 놈들은 지옥으로!!"라는 구호를 나무에 써 붙였다. 이에 벚나무 제거 문제가 대두되기도 하였으나 벚나무를 그대로 두기로 하여 오늘에 이른다.




금 일십만원정 왕후박나무 사진 한 장 왕후박나무

후박나무는 남해안을 비롯한 난대림의 대표적인 늘 푸른 활엽수이다. 나무의 모양새가 아름답고 옛부터 한약제로 널리 이용되었고 목재도 팔만대장경판의 일부 수종으로 쓰일 만큼 좋은 나무이다. 그러나 도남벌이 심하여 아름드리 후박나무를 거의 만난 적이 없다. 그래서 천연기념물 299호로 지정된 남해군 창선면 대벽리에 있는 거대한 왕후박나무를 내 사진첩에 담아 보고자 몇 번 계획하였으나 틈을 못내고 있었다. 드디어 1999년 3월31일 수요일, 1시간 짜리 수업마저 email로 수강생 30명에게 휴강이라고 통보하고 아침밥도 먹지 못한 채, 새벽 5시 나의 고물 엘란트라 승용차의 운전대를 잡았다. 구마, 남해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왕복 500km에 휘발유 값만 5만원, 500년된 나무의 사진 한 장 값으로 연결되는 5라는 숫자와 함께 좀 아깝다는 생각을 계속하였다.

그것도 흔한 용역비나 연구비를 받아서 하는 일도 아니고 순전히 내가 좋아서, 거창하게는 무엇인가 보람된 일을 해보자는 생각에 안사람 눈치 봐가면서 아까운 시간 빼앗기고, 멍청하게 봉급이나 축내는 일을 하고 있다니!. 그러나 나의 홈페이지에 올려둔 사진 한 장이 그래도 이용하는 이들에게는 쓰임새가 있을 것이라는 자위로 애써 오늘의 촬영여행에 의미를 부여하였다. 남해대교를 넘어 고현면 대사리의 팔만대장경판에 사용한 목재의 집산지로 추정되는 관음포에 들러 멀리 섬진강하구와 이어진 물길을 바라보면서 잠간 역사의 큰 수레바퀴를 뒤로 돌려 대장경판을 만들던 고려인들과 마음속의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다.

남해읍의 내리막길 우회도로를 빠져 나오는 순간 육교 밑에 숨어있는 교통경찰을 무심히 보고 지나가는데 앞에 있던 다른 교통경찰이 큰 손짓으로 나를 오라고 한다. 아이쿠 걸렸구나! 하면서도 설마 내가 속도 위반이라고는 미쳐 생각지 못하였다. 도로에 나가면 경운기를 빼고 자동차라고 생긴 것은 모두 나보다는 빨리 가는 운전실력이라 가장 억울해 하는 것이 속도 위반이다. 아무튼 법규위반은 분명한 사실이니 항의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거금 3만원이란 벌금을 왕후박나무 사진 값에 보태야 하였다. 그래도 함정 단속한 경찰의 소행이 어쩐지 개운치 않아 운전을 하면서도 계속 앙앙불락하는 사이 앗불사!, 이번에는 창선대교 쪽으로 좌회전해야 되는 길을 놓치고 계속 상주해수욕장 쪽으로 내려가 버렸다. 해안도로를 타고 다시 올라오는데 미조라는 항구로 또 잘못 들어갔다가 겨우 창선 쪽으로 길을 잡았으니 족히 50km는 두른셈, 다시 휘발유 값 5천원이 추가되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찾아간 왕후박나무의 웅장하고 장엄한 모습을 보는 순간, 사진 값 계산은 내 머리속에서 말끔히 사라지고 감탄사만 연발하였다. 필림 한통을 거의 다 쓰가며 샷터를 눌러대는 동안 나는 기품있는 나무의 모습과 짙푸른 바다와 넓은 들에 둘어싸인 주위 환경마저 더더욱 왕후박나무를 돋보이게 하였다.

소개 팻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져있다.

<이 나무의 높이는 9.5m, 밑둥에서 바로 올라온 큰 가지가 11개이며 땅에 닿은 부위의 둘레가 11m, 수관의 크기는 동서 21.2m, 남북이 18.3m나 되는 웅장한 나무이다. 약 500년전 이 마을의 노부부가 고기잡이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가던 중 어느 날 큰 고기를 잡았는데 배속에서 이상한 씨앗이 나와 뜰 앞에 심은 것이 이 나무라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나무 앞에서 당제를 지내고 풍어와 풍년을 빌었다 한다.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장군이 왜병을 물리치고 이 나무 밑에서 점심을 들고 휴식을 취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기분 좋게 촬영을 마치고 삼천포행 도선에 차를 실었다. 바닷 바람에 실려오는 따스한 봄기운이 옷깃을 스쳐가는 것을 간지럽게 느낄 즈음 삼천포에 도착하였다고 내리라고 한다. 비좁은 삼천포 항을 빠져나오는데 성질 급한 우리 백성들!, 운전이 능숙하지 못한 나에게 빨리 가라고 빵빵거리고 고개 내밀고 욕하며 아우성이다. 당황한 나는 이번에는 오른 쪽에 세워둔 화물차의 돌출부에 내차의 옆을 살짝 그어버렸다. 참 억세게 재수 없는 날이라고 투덜 됐지만 가벼운 상처라 그나마 천만다행, 또 다시 5천원을 추가하여 9만원이 되었다. 싱싱한 생선 회를 사준다는 꼬임에 따라온 집사람에게 기사식당에서 5천원 짜리 백반 두 그릇으로 입막음을 하고, 내 다시 남해에 오는 가 봐라!고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하며 대구로 향하였다.

결국 왕후박나무 사진값은 금 일십만원정, 가슴아프지만 남해 창선면 왕후박나무의 사진촬영 명세서이다.

복분자딸기와 산딸기, 그리고 복분자술


요즈음 극심한 환경공해에 찌든 현대인들은 옛 우리 선조 들의 전통먹거리나 건강식품에 대하여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전라북도 고창군을 중심으로 전통방식으로 제조되고 있는 복분자술은 비록 개발한지는 오래지 않지만 이와 같은 국민적인 정서에 힘입어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러나 각종 언론매체에 술의 원료가 되는 복분자딸기에 대한 식물학적인 상식을 충분히 알리지 않아 산딸기와 혼동되어 소개되고 있는데, 이는 복분자술의 독창성, 희귀성, 상표로의 가치가 훼손 될 것 같아 전문가인 입장에서 몇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복분자는 정식 이름이 복분자딸기이고 식물학적으로는 장미과의 딸기속(Genus Rubus)에 들어가는 나무덩굴이며 학명은 Rubus coreanus Miq. 이다. 원래 자라는 곳은 우리 나라와 중국이나 학명에 coreanus가 들어 있으며 자라는 중심지가 우리 나라이므로 우리의 특산 나무라고 보아도 좋다. 딸기속에는 복분자딸기 이외에도 산딸기, 곰딸기, 멍석딸기, 줄딸기 등 20여종의 딸기나무가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각각 모양과 특성이 다른 별개의 나무인데 산에 자라는 딸기나무는 전부 복분자딸기인 것처럼 오도되고 있다. 모양새의 차이를 보면 산딸기는 줄기가 붉은 갈색이며 거의 곧추서고 잎은 보통 셋으로 갈라져서 한 잎자루에 한 개의 잎이 달린다. 반면에 복분자딸기는 줄기가 마치 밀가루를 발라놓은 것처럼 하얗고 덩굴이며 잎은 한 잎자루에 3-5개가 달린다. 곰딸기는 줄기에 가느다란 가시가 곰의 다리처럼 털보숭이로 달리고, 멍석딸기는 멍석을 깔아놓는 것처럼 땅바닥을 기어 자라므로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따라서 복분자딸기는 산딸기의 한 종류도, 산딸기와 같은 나무도 아니고 지구상에 하나밖에 없는, 그것도 우리 나라 특산의 약용나무이다. 그러나 신문, TV등에 소개되는 고창군의 복분자술은 산딸기로 만든 것인지 복분자딸기로 만든 것인지 알 수 없게 뒤범벅이 되어 있다. 분명히 다른 나무임에도 불구하고 전국어디에나 너무나 흔히 자라는 산딸기와 신비한 약효를 가진 복분자딸기를 같은 반열에 올려놓음으로서 복분자딸기의 품위를 떨어트리는 것이다.

복분자딸기의 쓰임새는 복분자(覆盆子)라는 한자 이름을 해석하여 정력제로만 알고 있다. 열매를 먹고 요강에 앉아 소변을 보면 오줌발이 너무 세어 요강을 뒤집는다(覆)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분(盆)자는 본래 물을 담은 동이의 의미인데 어느 듯 항아리, 요강으로 변질되고 바로 여성의 치부와 연결지워 정력제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동의보감에는 <남자의 정력이 모자라고 여자가 임신되지 않는 것을 치료한다. 또한 남자의 음위증을 낫게하고 눈을 밝게하며 기운을 도와 몸을 가볍게 한다>고 하여 정력제로만이 아니고 여러 가지로 훌륭한 건강보조 식품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12년(1429) 4월21일 조를 보면 궁내의사 노중례(盧重禮)가 중국에 갔다가 돌아와서 아뢰기를, <우리 나라가 바다 모퉁이에 있어 본시 좋은 의원은 없으나, 다행히 몇 가지 약초가 나오는데 그 진위를 알지 못하여, 이제 본국 소산 약재를 가지고 와서 그에 비슷한 이름을 붙이고 발기를 벌여 적어서 갖추 올리오니, 자세히 살피시고 밝은 의원으로 하여금 진가를 가려 증험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이에 예조에서는 중국의사 주영중과 고문중을 초빙하여 판별하게 하였더니 후박 등 열 가지는 합격하였으나 복분자, 귤껍질 등은 알 수 없다고 하였다한다. 한편 중종34년(1539) 5월20일 조를 보면 <이번에 놀라운 일이 있었다. 동산색 내관(東山色內官)이 철마다 나는 과일을 올리는 예에 따라 오늘 아침 복분자를 따기 위하여 후원에 들어갔더니, 바깥성과 안 담장 사이에 어떤 중이 숨어 있기에 붙잡았다.>고 하였다. 이런 여러 가지 고사로 볼 때 복분자는 중국약제가 아니라 드물게도 우리의 약제, 우리 선조가 개발한 자랑스런 약제임을 알 수 있고 임금님도 궁중에 심어놓고 즐겨먹는 과일이며 보약이었다.

이상 문헌의 어느 구석에도 산딸기와 복분자가 꼭 같다는 내용은 찾을 수 없고 앞에서 지적한대로 우리가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약용 딸기나무는 분명히 복분자딸기이지 산딸기는 아니다. 이것을 혼동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복분자술의 독창성과 희귀성을 떨어트리고, 나아가서는 전국 아무데서나 만드는 술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점을 상기하고 싶다.

평강공주에 얽힌 느릅나무 이야기 느릅나무

영명으로 elm이라 하여 세계적으로 재질이 좋고 쓰임새가 넓은 나무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목재로서 보다 나무 껍질을 벗겨 배고픔을 달래는 구황식물로 이용한 예가 삼국사기 열전(列傳) 온달조에 잘 나타나있다. 평강공주가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온달의 집을 찾아가서 그의 어머니와 만나는 과정을 기록한 내용에 보면,

공주는 보물 팔찌 수십 개를 팔꿈치에 걸고 궁궐을 나와 혼자 온달의 집을 물어 찾아갔다. 눈먼 노모에게 절하고 아들이 있는 곳을 물었다. 늙은 어머니가 대답하였다. "내 아들은 가난하고 보잘 것이 없으니, 귀인이 가까이 할 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보통이 아니고, 그대의 손을 만지니 부드럽기가 솜과 같으니, 필시 천하의 귀인인 듯합니다. 누구의 속임수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까? 내 자식은 굶주림을 참다 못하여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려고 산 속으로 간 지 오래인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공주가 그 집을 나와 산 밑에 이르렀을 때,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것을 보았다. 공주가 그에게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하니 온달이 불끈 화를 내며 말했다. "이는 어린 여자가 취할 행동이 아니니 필시 사람이 아니라 여우나 귀신일 것이다.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 온달은 그만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공주는 혼자 돌아와 사립문 밖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에 다시 들어가서 온달과 그의 어머니를 설득하고 금팔찌를 팔아서 전답과 집, 살림 용품을 모두 구비하였다.

혹시 잠간이나마 온달을 부러워했다면 마음 고쳐먹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공주라는 신분에다 돈까지 잔득 가지고 시집을 왔고, 글 모르는 신랑을 교육시켜 장군으로 출세까지 시켰으니 온달입장에서는 평생 평강공주에게 소리 한번 크게 낼 수 있었겠는가?.

고려사에는 느릅나무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조선왕조실록에는 많은 기록이 있다. 세종 3년(1420) 1월16일조에는 나무지팡이를 창녕 부원군 성석린에게 하사하였는데 나이 84세이나 강건하고 노쇠하지 아니하여 자신이 손수 감사하는 글을 지어 올리기를,“하늘과 땅이 생물을 기르는데 가죽나무와 참나무 같이 쓸 데 없는 재목도 버리지 아니하고, 은혜를 베푸시어 뽕나무와 느릅나무의 늙은 시기까지 덮어 주시어 늙고 어린것이 다 같이 나서 자라나이다". 하여 쓸모 있는 나무의 대표로 느릅나무를 들고 있다.

느릅나무 껍질은 유피(楡皮)라 하여 위장을 튼튼히 하는 약제로도 잘 알려져 있고 잎은 초봄에 어린잎을 뜯어 밀가루나 콩가루에 버무려 떡으로 흔히 쪄먹기도 하였다.

전국 어디에나 자라고 잎이 떨어지는 활엽수 큰나무로서 높이 15m, 지름 70-80cm에 달한다. 열매는 거꾸로 세운 달걀모양이며 종자가 가운데 있고 가장자리는 얇은 날개로 이루어져 있어서 날라 다니기 편리하게되어 있다.

천하의 명약! 뽕나무 꼬리겨우살이 꼬리겨우살이

옛 우리 선조들은 겨우살이 종류중에서 특히 뽕나무에 기생하는 겨우살이를 상기생(桑寄生) 또는 상상기생(桑上寄生)이라 하여 귀중한 약제로 이용하였다. 뽕나무겨우살이는 오늘 날의 식물분류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꼬리겨우살이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동의보감과 본초도감에서의 다음과 같은 내용 때문이다. 효능에 관하여 <뽕나무겨우살이는 성질이 평(平)하며 맛은 쓰고 달며 독이 없다. 힘줄 뼈, 혈맥, 피부를 충실하게 하며 수염과 눈썹을 자라게 한다. 요통, 옹종과 쇠붙이에 다친 것 등을 낫게 한다. 임신 중에 하혈하는 것을 멎게 하며 안태시키고 몸푼 뒤에 있는 병과 붕루를 낫게 한다>하였으며 생태에 관하여는 <늙은 뽕나무가지에서 자란다. 잎은 귤잎 비슷하면서 두텁고 부드러우며 줄기는 회화나무 가지 같으면서 살찌고 연하다. 음력 3∼4월에 누르고 흰빛의 꽃이 피고 6∼7월에 열매가 익는데 색이 누렇고 팥알 만하다. 다른 나무에서도 붙어 자라는데 뽕나무에서 자란 것만을 약에 쓴다. 음력 3월초에 줄기와 잎을 따서 그늘에서 말린다. 이것은 진짜를 얻기 어렵다. 그 줄기를 끊어볼 때 진한 노란색이고 열매 안의 즙이 끈적끈적한 것이 진짜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백령도와 대청도가 특산지로 알려져 있고 기타 세종지리지에는 충청도, 경상도, 황해도, 강원도에서 올린 약제에 뽕나무겨우살이가 포함되어 있다. 세종13년(1430) 3일10일 <의원 김자견이 황해도 백령. 대청 두 섬에서 나는 뽕나무겨우살이 50근을 채취하여 바쳤다. 이 섬에는 예전에 뽕나무겨우살이가 없던 것을 순심별감 고전성이 순찰 발견하여 비로소 이를 얻게 된 것이다>하였고 광해7년(1614) 1월8일 사간원에서 명약 뽕나무겨우살이의 종자를 없어지게 한 일로 김기명의 국문을 청하는 내용 중에 <뽕나무겨우살이는 얻기 어려운 명약입니다. 팔도에 생산처가 없는데 오직 백령도에만 있습니다. 첨사 김기명이 관재(棺材)로 쓰고자 하여 그 늙은 뽕나무를 베려고 하자 주민들이 일제히 호소하기까지 하였는데도 끝내 듣지 않고 모두 베었습니다. 대개 겨우살이는 수백 년 묵은 이 지역의 뽕나무가 아니면 나지 않는데, 이로 인해 멸종되어 내국(內局)에 올리는 것을 빠뜨리게 되었습니다. 감사된 자는 의당 캐물어서 처벌을 해야 하는데, 범연히 전후 첨사에게만 허물을 돌리며 다른 약으로 바꾸어 정하고자 하였으니,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급기야 내국의 독촉을 받은 후 도리어 가짜 뽕나무겨우살이로 올려보냈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가 위에 이바지하는 도리이겠습니까. 김기명은 사욕을 영위하고 공무를 저버려 군상에게 바치는 영약으로 하여금 종자가 없어지게 하였으며, 감사와 봉진관(封進官)은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는 것으로 책임을 모면하려 하고 있습니다. 김기명은 잡아다가 국문하고 감사 및 봉진관은 우선 파직한 뒤에 추고하소서>하여 겨우살이가 달린 뽕나무를 베었다가 파직까지 당할 위기에 몰렸다. 그러나 임금은 차차 결정하겠다고 답하고 그대로 두니 한달 남짓 뒤인 같은 해 2월23일에 사간원에서는 같은 내용을 다시 들고일어났다. 그래도 임금은 여전히 김기명을 벌주지 않아 광해9년(1616) 6월24일 조에는 <백령 첨사 김기명이 나라에서 벌채를 금지하고 있는 뽕나무겨우살이가 난 뽕나무를 모두 베어서 판자를 만들어 사사로이 썼다. 그런데도 조정에서 죄주지 않자 공론이 모두 분하게 여겼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어서 광해10년 (1617) 11월22일 조에는 <백령도와 양남 각 섬의 뽕나무겨우살이를 각별히 배양하고 돌보라고 전교하다> 하여 백령도의 뽕나무겨우살이는 유명하였던 모양이다.

한편 백령도 및 대청도 이외 지역의 관련 기록에는 광해9년(1616) 6월24일 전라 좌수사 이흥립이 뽕나무 겨우살이를 올렸는데, 내의원 제조 등이 글을 올려 포상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아뢴대로 하라고 답하고 비망기를 내리기를, <이흥립이 내국에 뽕나무겨우살이가 다 떨어졌다는 기별을 듣고서 뽕나무겨우살이 2근을 구하여 올려보내었는데, 그 품질이 아주 좋다. 그러니 즉시 내의원 관원 손몽상을 파견하여 그로 하여금 적간하게 하라. 순천 방답진 파태도에 뽕나무가 무성하게 자랐는데, 겨우살이가 붙어 있는 것이 아주 적어서, 1근 반 정도만을 채집하여 와서 바쳤으며, 이흥립 역시 2근을 채집하여 올려보내었다. 본도에 뽕나무 네 그루가 있는데 겨우살이가 모든 가지에 빽빽이 나서 무성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흥립은 품계를 올려주고 손몽상은 동반(東班)에 임용하라>하였다.

겨우살이 한 두근에 벼슬이 올라가는 출세를 하였을 정도이다. 이에 대하여 사초를 담당한 사신(史臣)의 평이 재미있다. <뽕나무겨우살이는 일개 풀에 불과하며, 임금을 위하여 약재를 구하는 것 역시 신하의 분수 안의 일이다. 이흥립이 채집하여 진상한 것은 필시 상을 노리고서 한 것이며, 내의원에서 포상하기를 아뢴 것 역시 그의 욕심을 맞추어 준 것이다. 심지어 동반의 직책이 아래로 천한 자에게 미치게 하다니, 될 말인가?>하여 임금의 분별없는 벼슬주기를 비판하고 있다.

보길도에서 구룡포로 시집온 생달나무 생달나무

1987년 나는 10여년이나 재직하고 있던 전남대학에서 경북대학으로 학교를 옮겨오게 되었다. 그러나 연습림이 있는 보길도에 수없이 들락거리면서 낙엽수가 모두 발가벗어 버리는 겨울은 물론 봄 여름 가을까지 짙푸른 상록활엽수의 아름다움을 내내 잊지 못하고 있었다. 89년쯤 마침 구룡포에 있는 경북대 수련원에서 수목기증을 받는다기에 천리길 보길도를 멀다하지 않고 달려가 생달나무, 굴거리나무, 구실잣밤나무, 돈나무 등 2∼3년생 상록활엽수 묘목을 얻어다 주었다. 그러나 관리 직원들은 새끼손가락 굵기 남짓한 보지도 못한 상록수 몇 그루가 마음에 맞지 않았던지 수련원 한 구석에다 적당히 심어 두었다. 당시에는 교직원으로부터 5만원이라는 거금을 희사 받아 4∼5m정도 되는 가이쓰카향나무를 길 양옆에 보기 좋게 심어 두는 처지라 내가 기증한 서너 뼘 남짓한 키의 상록수 몇 나무는 생색이 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가이쓰카향나무는 뾰족뾰족한 침엽도 없는 것이 향나무 같지도 않을 뿐더러 인공적으로 둥글둥글하게 깎아놓은 수형이 너무 일본 냄새가 나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나무 중의 하나이다. 바닷가에는 맞지도 않은 나무지만 내가 시시비비를 말할 입장에도 있지 않아 그대로 두고 보기로 하였다. 십여년이 지난 오늘 날 생달나무를 주축으로한 보길도 상록수들은 시집의 풍토에 잘 적응하여 아름다운 숲을 만들고 있는 반면 거금을 들인 가이쓰카향나무는 그 때나 지금이나 별 볼품없이 겨우겨우 생명을 부지하고 있다. 생달나무의 잎을 손으로 비벼서 냄새를 맡아보면 향긋한 냄새가 난다. 녹나무속의 수종에는 장뇌향을 분비하는 유세포(油細胞)라는 특수한 세포가 있기 때문이다. 잎으로는 녹나무와 구분이 거의 되지 않는다.

오! 내사랑 참식나무 참식나무

나의 아파트 베란다에는 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도에서 가져온 참식나무 한 그루가 작은 화분에 담겨져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 봄이 되면 마치 포인타의 귀처럼 늘어지는 새 잎이 너무 신기하여 만져보면 새로난 잎의 그 보드라움은 말로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었다. 또 어린 잎의 뒷면은 처음에는 짙은 황금색을 나타내어 푸른 바다 위에서 반사된 햇빛과의 조화가 일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고 자라면서는 하얗게 되어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는 인간사의 과정을 엿보는 것 같기도 하였다. 잎만으로도 삭막한 아파트 베란다의 풍경을 난대 상록수림의 일부인양 바꾸어 주어 좁은 공간에서 나마 공주처럼 사랑을 받고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보길도의 짙푸른 고향바다를 뒤로하고 경상도 땅, 그것도 공중에 매달린 아파트에 강제로 시집온 것이 불쌍하여 넓은 장소라도 마련해 주자고 용단을 내려 따뜻한 어느 봄날 연구실 건물의 앞마당에 옮겨 심었다. 대학문화를 창달하고 젊음의 힘을 마음껏 발산한다는 6월의 축제가 있던 다음 날, 어떤 학생의 소행인지는 모르지만 손가락 굵기의 나무 줄기를 통채로 분질러 던져버린 시목(屍木)을 발견하게 되었다. 무엇이 못마땅하여 간신히 뿌리를 내려가는 가련한 참식나무의 목을 베어 버리는 사형 선고를 내렸는지 나로서는 그 못된 심통을 헤아리기 어렵다.정이 너무 든 나무라 지금도 다른 참식나무를 볼 때마다 '나의 참식나무'가 눈에 선하다.

모란과 선덕여왕과 모란이 피기까지 모란

한자 이름인 목단(牧丹)이 모란으로 되었다. 크고 탐스러운 꽃이 매우 화려하여 아름다운 여인을 흔히 모란꽃 같다고 한다. 모란을 소재로 한 한시 한 구절를 읊조리는 것은 옛 풀류객의 멋이었으며 민화에도 자주 등장한다.

삼국사기 제 46권 열전6 설총조에는 {설총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신이 들으니 예전에 화왕(花王, 모란)이 처음 들어 왔을 때, 향기로운 꽃동산에 심고 푸른 장막으로 보호하였는데, 봄이 되어 곱게 피어나 온갖 꽃들을 능가하여 홀로 뛰어났습니다. 이에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에 이르기까지 곱고 어여쁜 꽃들이 빠짐없이 달려와서 혹시 시간이 늦지나 않을까 그것만 걱정하며 배알하려고 하였습니다. 모란을 꽃중의 왕으로 표현하여 '화왕'이라 하였다. 고려사 예종 17년(1122)조를 보면 <정축일에 왕이 사루(紗樓)에 나가 문신 56명을 불러서 초에 금을 그어 시간 한계를 정하고 모란에 관한 시 여섯 구를 짓게 하였는 데 첨사부 주부 안보린이 1등이 되었다. 왕이 이에 참가한 문신들에게 비단을 차등 있게 주었다. 한편 같이 참가한 강일용은 시 잘 짓기로 명성을 날렸으므로 왕이 그의 시짓는 솜씨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촛불이 다 타려 할 때 일용이 겨우 생각하여 “머리 흰, 취한 노인은 대궐 뒤를 보고 있는데 눈 밝은 늙은 선비는 난간 가에 비켜 섰네”라고 쓴 다음 그 초고를 소매에 넣고 나가서 대궐 뜰 개천에 쳐넣었다. 왕이 환관을 시켜 가져다가 보고 칭찬하기를 아끼지 않으면서 “이는 옛 사람의 말한 바와 같이‘늙은이에게는 온 얼굴에 꽃 장식을 하더라도 서시(西施)의 절반 단장만 못하다.’는 것과 같다.”하고 그를 위로하여 돌려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모란꽃은 화려하고 아름다우나 향기가 없는 꽃이다. 일연의 삼국유사에 선덕여왕(632-647)때 당태종이 모란그림과 종자를 보낸 기록이 있다. <당나라 태종이 붉은빛과 자주빛, 흰빛으로 그린 모란과 그 씨 3되를 함께 보냈다. 왕은 이 그림의 꽃을 보더니 "이 꽃은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하고 뜰에 심으라 명하였다. 뒤에 신하들이 향기가 없는 꽃인 줄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임금에게 물었더니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므로 그 향기가 없음을 알 수 있었소. 이는 당나라 임금이 내가 짝이 없는 것을 희롱한 것이오"하였다>. 삼국사기의 진평왕(579-632) 조에도 거의 같은 내용이 기술되어 있으므로 모란이 중국에서 우리 나라에 들어 온 것은 이 때 쯤이 아닌가 생각된다.

서정시인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란 유명한 시에 모란이 잘 묘사되어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음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하게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나면 그 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삼백 예순날 마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보길도 개발과 우묵사스레피 우묵사스레피 선창리방조림

크고 작은 섬들이 점점이 떠 있는 남해바다, 그 서남쪽 완도와 진도사이에 배로 한 시간 남짓한 거리에 보길도라는 아름다운 섬이 있다. 윤선도가 제주도로 귀양을 가다가 섬의 경치에 반하여 여기에 정착하고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지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길쭉하게 생긴 보길 섬의 서쪽 끝에 선창리라는 아름다운 마을이 있었다. 10여호 남짓한 한가한 어촌이나 앞에는 1km 가까이 잘 가꾸어진 상록수 방조림이 황해의 억센 바닷 바람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해 주었다. 바닷가에는 보길도 특유의 잘 다듬어진 까만색 차돌과 썰물 때만 나타나는 맑은 샘물이 있어서 보길도 수목채집을 가면 항상 선창리에서 점심을 먹도록 계획을 세웠다. 방풍림의 수종은 동백나무, 후박나무, 참식나무, 까마귀쪽나무, 감탕나무, 보리밥나무, 천선과, 머귀나무 등 남쪽의 대표수종들이며 특히 바닷쪽으로 늘어진 자그마한 우묵사스레피나무는 작고 앙증맞은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이 나무와의 만남이 보길도를 찾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96년 2년만에 찾아간 보길도 선창리는 2차선 아스팔트길에 멋진(?) 현대식 벽돌건물로 치장되어 있었다. 내 사랑 우묵사스레피나무는 뿌리채 뽑혀서 어디론가 없어져 버리고 썰물 때만 나타나는 샘물도 마을을 개발한다고 온통 뒤집어 놓은 바람에 오염되어 먹을 수가 없단다. 서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거의 매년 가던 보길도 수목채집도 그 이후 중단하고 있는데 개발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다시 선창리를 찾아가야 되겠다. 사스레피나무와 생김새가 비슷하나 잎 끝이 뒤로 말리어 우묵하게 들어가서 우묵사스레피나무라고 한다. 또 열매가 쥐똥 같고 해안과 섬에 주로 자란다하여 섬쥐똥나무라 불리워지기도 한다.

불쌍한 박쥐나무여! 박쥐나무

학생들과 함께 책으로 배운 나무 모양도 익히고 표본 채집을 위하여 산에 가는 일이 많다. 나무 이름을 알려주면 우루루 달려들어 꽃이나 열매가 달리고 잎이 깨끗한 표본을 만들려고 경쟁적으로 가지를 잘라댄다. 그런데 큰 나무라면 좀 잘라주어도 상관이 없는데 작고 가지가 많이 달리지 않은 나무는 30여명의 학생이 가지 하나씩 잘라 버리면 그야말로 이솝 우화의 개구리 이야기처럼 생명이 왔다갔다 한다. 박쥐나무는 숲속의 큰 나무 밑 음지에 살면서 그래도 많은 태양광선을 받겠다고 작은 덩치에 비하여는 넓고 큰 잎을 분에 넘치게 달고 있다. 꽃 모양도 독특하여 3∼4cm나 됨직한 길이의 연노랑 꽃잎이 살짝 벌어져서 조선왕조시대의 가련한 여인을 연상케 하는데, 학생들이 자르기 시작하면 그 자리에서 생명이 끝나 버린다. 공부를 시킨다는 명분으로 생명을 앗아버린 가련한 박쥐나무에게 나는 "불쌍한 박쥐나무"라고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고 감히 용서를 빌어본다.

잎 두께가 얇고 잎맥이 뚜렷하며 마치 박쥐가 날개를 편 모양과 닮았다하여 박쥐나무라 한다. 우리 나라 어디에나 자라는 낙엽활엽수 관목으로 높이 4m정도 자란다. 나무 껍질은 흑자색으로 외피는 흔히 벗겨진다. 잎은 어긋나기로 달리고 원형이며 끝이 3∼5개로 얕게 갈라지며 양면에는 털이 있다. 꽃은 암꽃과 수꽃이 따로 있고 취산화서로서 잎 겨드랑이에서 나오고 5∼7월에 1∼4개의 백황색으로 핀다. 핵과는 짙은 푸른 색이고 둥글며 9월에 익는다.

수로부인과 철쭉 철쭉

철쭉은 한자로 '척촉'이라고 하는데 철쭉 척 자에 머뭇거릴 촉 자를 쓴다고 한다. 꽃이 너무 아름다워 지나가던 나그네가 자꾸 걸음을 멈추어 이런 이름이 생겼다하며 산객(山客)이란 이름도 같은 맥락에서 생긴 이름이다. 내가 자라던 경상북도 청도 지방에서는 진달래를 참꽃이라 하여 어린시절 꽃잎을 따먹기도 하였는데 철쭉은 연달래라 하여 먹으면 죽는다고 '선배 어린이'들로부터 단단히 교육을 받았다. 임학을 공부하면서 철쭉 꽃잎에는 독이 있어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번 옛 사람들의 경험과학에 감탄하였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전을 보면 철쭉과 관련된 재미있는 수로부인(水路婦人) 이야기가 실려 있다. <신라 성덕왕(702-737) 때 순정공(純貞公)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는 길에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곁에 있는 돌 봉우리가 병풍처럼 바다를 두르고 있어 그 높이가 천 길이나 되고, 그 위에는 철쭉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공의 부인 수로가 이것을 보자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저 꽂을 꺾어다가 나에게 줄 사람은 없는가?" 했으나, 사람들은 "거기는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입니다" 하고 아무도 가지 않았다.

이 때 늙은이 하나가 암소를 끌고 지나다가 부인의 말을 듣고 그 꽃을 꺾어 가사까지 지어서 부인에게 바쳤는데 그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다시 이틀을 편안히 가다가 임해정(臨海亭)에서 점심을 먹는데, 바다에서 용이 나와 갑자기 부인을 끌고 바다로 들어갔다. 공이 땅에 넘어지면서 발을 굴렀지만 어찌할 수가 없었는데, 또 한 노인이 나타나더니 "옛말에 여러 사람의 말은 쇠도 녹인다 했으니, 이제 바다의 용인들 어찌 여러 사람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 마땅히 경내의 백성들을 모아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지팡이로 강 언덕을 친다면 부인을 만나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공이 그 말대로 했더니 용이 부인을 모시고 나와 도로 바쳤다. 공이 바다에 들어갔던 일을 묻자, 부인은 대답하기를 "칠보 궁전에 음식은 맛있고 향기로우며 깨끗한 것이 인간들이 먹던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하는데, 부인의 옷에서 나는 이상한 향기도 세상에서는 맡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수로 부인은 아름다운 용모가 세상에 뛰어나 매양 깊은 산이나 큰 못을 지날 때면 여러 번 신물(神物)에게 붙들려 갔다. 이 때 여러 사람이 부르던 해가(海歌)의 가사는 이러했다.

거북아 ! 거북아 ! 수로를 내놓아라/남의 부인 앗아간 죄 얼마나 크랴

네 만일 거역하고 내놓지 않으면/그물로 잡아서 구워 먹으리

또 노인이 수로부인에게 바친 헌화가는 이러했다.

자주빛 바위 가에/잡은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면/ 저 꽃 꺽어 바치오리다 >(삼국유사, 이민우 옮김, 범우사간에서 발췌).

수로부인은 용모가 너무 뛰어나 지나가던 노인도 암소를 팽개치고 절벽에 기어올라 철쭉꽃을 따다 노래까지 지어 받칠 정도이다. 그러나 천길 절벽에 매달린 철쭉꽃을 따 달라고 할만큼 주책이 없고 걸핏하면 용왕과 물귀신에게 붙잡혀 다니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예쁜 부인을 둔 탓에 순정공은 아마 평생 속이 새까맣게 썩었을 것이다.

영산홍(暎山紅)과 연산군 영산홍

일본인들은 철쭉을 가지고 오랫동안 개량하고 육종하여 사쓰끼철쭉, 기리시마철쭉 등 여러 가지 꽃 모양과 색깔을 가진 수백 가지 품종을 만들었는데 이를 모두 합쳐서 영산홍이라 한다. 일본철쭉이란 이름이 맞는 말이나 영산홍이 더 많이 쓰이고 있는 이름이다. 4∼5월에 걸쳐 무릎높이 남짓한 작은 키에 여러 가지 색깔의 꽃이 무더기로 달리므로 우리 나라에서도 정원수의 가장 대표적인 꽃나무가 되어 버렸다. 영산홍은 일찍 고려때 벌써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왕조실록에는 성종2년(1470) 11월21일 장원서(掌苑署)에서 영산홍 한 분을 올리니, 명하기를, <겨울 달에 꽃이 핀 것은 인위에서 나온 것이고 내가 꽃을 좋아하지 않으니, 금후로는 올리지 말도록 하라>하였다. 연산때는 11년(1504) 1월26일<영산홍 1만 그루를 후원에 심으라>, 12년(1505) 1월25일에 <영산홍은 그늘에서 잘 사니, 그것을 땅에 심을 때는 먼저 땅을 파고 또 움막을 지어, 추위에 부딪쳐도 말라 죽는 일이 없게 하라>, 12년 2월2일에는 <영산홍 재배한 숫자를 해당 관리에게 시켜서 알리게 하라>고 하여 조선왕조때는 제법 널리 퍼져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의 옛 문헌에 실린 영산홍이 오늘 날의 일본철쭉과 같은 나무인지는 논란이 있다. 영산홍이 본격적으로 우리 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일제 강점기 이후의 일이며 어디까지나 일본인에 의하여 만들어진 일본의 꽃이다. 따라서 심어서는 안될 장소-예를 들면 고사찰의 대웅전 앞, 심지어 이순신장군의 사당이 있는 한산도의 제승당, 울릉도 도동에 있는 독도박물관 등 분별없이 심겨져 있는 것을 보면 심한 거부 반응을 느낀다. 어떤 이는 나무마저 국수주의적 발상을 한다고 비판할지 모르나 우리의 전통이 있는 곳에는 우리 나무와 우리꽃으로 꾸며야 하지 않나 생각해본다.

참나무는 없다??

우리 나라의 나무 중 침엽수를 대표하는 나무는 소나무이고 활엽수를 대표하는 나무는 참나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참나무라는 이름은 식물학적으로는 없는 이름이며 흔히 참나무라고 부르는 나무는 참나무속에 속하는 여러 수종에 대한 공통의 명칭이다. 낙엽성이며 잎의 모양이 밤나무잎처럼 날렵하고 길죽하게 생긴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 같은 낙엽성이면서 둥그스름하고 비교적 큰 잎을 가진 신갈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및 떡갈나무가 흔히 말하는 참나무의 기본 6종이다. 이 녀석들은 정조관념이 별로 없어 종간에 교배가 잘되어 잡종이 많다. 그러나 넓은 의미의 참나무란 상록성이며 남쪽 지방에 주로 자라는 가시나무, 붉가시나무 및 종가시나무 등도 참나무로 통칭되는 나무이다. 또 참나무란 이름의 나무들은 모두 도토리를 생산하므로 도토리나무란 이름이 더 친숙하고 쉽게 알 수 있을지 모른다. 일부 지방에서는 꿀밤나무라고도 한다. 참나무는 땅이 깊고 비옥한 곳을 좋아하는 잎이 떨어지는 큰 나무이며 떡갈나무는 직경 20∼30cm에 불과하나 그 외의 참나무류는 나무높이 20∼30 m, 지름 1 m까지 달한다. 기건비중 0.8, 압축강도 560 kg/cm2, 인장강도 950 kg/cm2, 휨강도 600 kg/cm2 정도로서 나무질은 단단하면서 질기고 쉽게 썩지 않으므로 쓰임새는 기구재, 선박재, 농기구, 건축재, 숯제조 등 다양하였다.

나무의 재질과 분포 특성으로 보아 한반도에 처음 들어온 우리의 선조들은 처음 참나무로 만든 움막집 에서 생활을 영위한 것으로 생각되며 실제로 신.구석기 시대 유적에서 많은 참나무가 출토되고 있다. 건축재로서는 무량사 극락전 기둥이 상수리나무이고, 선박재로서는 완도 어두리 화물운반선의 외판과 가룡 및 장삭이 상수리나무와 졸참나무, 관재로서는 의창 다호리 가야고분의 목관재가 상수리나무인 것 등 참나무는 선인들이 즐겨 사용하던 나무이었다. 아울러서 참나무류는 가뭄이 들어 사람이나 산짐승이 모두 굶주림에 허덕일 때 풍년이 들 때 보다 훨씬 많은 도토리를 생산하는 특성을 갖고 있어서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면서 구황식물(救荒植物)로서도 각광을 받아왔다. 참나무 종류의 한자 이름은 작, 상(橡), 진목(眞木),력목 등 참나무 종류의 구분이 어려운 만큼 여러 가지 글자를 쓴다. 이 중에 어느 것이 상수리 나무이고 어느 것이 떡갈나무 등 다른 참나무 종류인지 알 수는 없다. 참나무 종류의 열매는 뭉뚱그려서 도토리라고 하는데 이름에 약간의 혼란이 있다.

어느 때인가 문화방송의 <여성시대 손숙.김승현입니다>라는 라디오 프로에서 도토리와 상수리가 같다고 말하였다가 청취자들이 도토리와 상수리는 전혀 다르다는 항의 전화가 수 없이 걸려와서 정정 사과방송을 하는 것을 들었다. 참나무열매는 모양이 수종간에도 엇비슷하여 식물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이 엄밀 하게 구분하기가 어렵다. 옛부터 흉년이 들면 도토리를 주어 대용식으로 하였는데 전혀 구분하여 사용하 지 않았으며 지방에 따라 도토리를 상수리라고 하고 경상도에서는 꿀밤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상수리와 도토리가 같다고 보아도 꼭히 틀린 이야기라고 할 수 없다. 꼭히 구분을 하자면 상수리는 도토리의 한 종류일 따름이다. 그 분야의 전문가도 아니면서 자기가 알고 있는 얄팍한 상식과 다르다고 전화질부터 먼저 해대는 청취자나 항의 전화온다고 확인도 안하고 사과방송부터 해 버리는 방송진행자의 태도나 모두 성급한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였다.

고려사에 보면 우왕5년(1379) <근자에 왜적의 침략과 수해 및 한재로 인하여 백성들이 굶고 있으니 응당 구휼해 주고 농업을 장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후소(後蘇)와 좌소(左蘇)의 토건 사업이 한창이 므로 백성들은 부역에 지쳐서 장차 죽음의 구렁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농사만을 못 지을 뿐만 아니라 도토리를 주어 살아갈 수도 없을 것이니 이 역사를 즉시 중지했다가 가을에나 다시 시작하 기를 바랍니다>고 하였고 충선왕원년(1298)에는 <이달에 금년 농사가 흉작이어서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는 까닭에 왕이 자기 반찬을 줄이고 주방에 명령하여 도토리를 가져다가 맛보았다> 하여 흉년의 대용식으로 널리 쓰인 것을 알 수가 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원년(1400) 12월20일조를 보면 <노한이 아뢰기를,“충청·경상·전라도는 수재·한재와 이른 서리로 말미암아 백성들의 기근이 심합니다. 가을이 되어도 밀과 보리도 파종하지 못하고, 도토리도 주울 수 없어서, 민생의 어려움이 또한 심합니다... 배 만드는 것을 감독하니, 주린 백성들이 두려워하기를 호랑이같이 하여 혹은 도토리로 양식을 하며, 10월에 역사(役事)에 나가 물에서 나무를 운반하여 몸에는 전연 살이 붙어 있지 않습니다. 어떤 군인 한 사람이 오랫동안 물 가운데 서 있었기 때문에 허리 아래가 다 얼었으므로, 강변에 얼마 동안 누워 있었으나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어떤 중이 이를 보고 불쌍히 여기어 쌀미음을 주었더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이 물을 마시고 연명하여 다시 이 역사를 하란 말이냐?’ 하고, 땅바닥에 버리고 곧 물에 빠져 죽었다 합니다.> 중종12년(1518) 8월12일조를 보면 <...황해도에 참나무가 많이 있는데 구황에는 아주 요긴하니, 군현(郡縣)을 시켜 각각 2∼3백 석을 저장하되 따로 창고를 만들어서 흉년에 대비하게 하면 어찌 백성에게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여러 해 묵으면 썩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부로(父老)에게 물었더니,다들‘잘 익으면 30여 년 뒤에도 쓸 수 있다.’합니다> , 선조 27년(1594) 7월15일조에는 비변사가 아뢰기를,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일은 쌀이 모자라면 초목의 열매도 굶주림을 구제할 수 있으니 도토리가 가장 요긴합니다. 요즘에 서희신이 글을 보내 상수리 열매의 이로움에 대해 신들에게 말하기를 ‘강원도의 모든 산에 금년에 도토리가 많이 달렸으니 만일 8월 후에 승군(僧軍)이나 기민(飢民) 또는 관원을 시켜 형편에 따라 주워 모으게 하면 천만 석이라도 걱정없이 얻을 수 있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이 말로 미루어 보면 관동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충청 ·경기·경상 · 전라·황해·양계(兩界) 등 산이 있는 곳은 참나무가 없는 곳이 없으니 만약 열매가 여문 때에 여러 면으로 백성을 권하여 따 모아 가을과 겨울에 구제할 용도로 준비하게 한다면 참으로 편익할 것입니다 호조로 하여금 빨리 사목(事目)을 만들어 각도의 감사에게 알리게 하소서>하였다. 일산 신도시지역 선사유적 발굴조사에서도 졸참나무가 출토되었으며 이와 같이 고려사 및 조선왕조실록의 곳곳에 도토리의 비축을 권장하는 대목이 있어 선조들의 귀중한 식량자원이었음은 짐작케 한다.

 

창덕궁의 다래나무

천연기념물 251호 1975.09.02 지정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2-71 창덕궁 비원

새로운 천년이 며칠 남지 않은 99년의 마지막 일요일 창덕궁 비원 안에 있는 다래나무의 수안(樹顔)을 감히 우러러 보기로 하였다. 창덕궁에다 공문을 내어 정식 조사요청을 하기에는 너무 번거로워 공무원 신분증을 무기로 출입을 통제하는 직원과 바로 접촉하였다. 하얗게 바래 버린 머리에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맨 내 모습이 들어가서 엉뚱한 짓은 하지 않을 것 같았던지 쉽게 허락해 주었다.

건춘문을 지나 궁의 서쪽 담을 타고 계속 올라가서 신선원전을 지나 커브 길을 돌아가면 대보단(大報壇) 터가 있고 이어서 숲 속으로 조금 들어간 작은 개울가에서 다래나무를 만날 수 있다. 내가 가는 날은 마침 며칠 전 온 눈이 녹지 않아 마치 지리산 골짝에라도 온 것처럼 호젓이 고궁의 설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인구 천만이 북적대는 서울 한 복판에 이런 곳이 있다니! 하고 혼자 감탄하면서 즐겁게 나무를 찾아갔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일반인들은 들어 갈 수 없는 곳이다.

나무는 승천할려는 용이 비가 궨아지면 당장이라도 일어 날 듯이 구불구불하며 이상하게 꼬이고 뻗어서 진기하게 보인다. 뿌리 가까이의 줄기는 둘레가 70cm에 이르기도 하나 대부분의 줄기는 둘레가 30-50cm에 이르며 덩굴줄기 6개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긴 줄기는 길이가 30~40 m에 이른다. 갈색의 나무 껍질은 두꺼운 종이처럼 벗겨지면서 매끄러운 나무살갗을 내놓아 햇빛에 살짝 그슬린 남성의 근육을 보는 것도 같다.

아직도 자람새가 왕성하여 바로 옆에 있는 말채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뒤덮고 있을 정도이다. 이 다래나무는 나이가 약 600년으로 추정되며 원래부터 이곳에 자생한 것인지 혹은 창덕궁을 지을 당시에 이곳으로 옮겨 심은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그러나 특별히 다래나무를 조경용으로 옮겨 심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자연생으로 본래부터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다래나무란?

다래나무과 (학명) Actinidia arguta Planch. (영명) Bower Actinidia (일명) サルナシ (漢) 藤梨, 미후桃

햇빛이 내려 쪼이는 한낮에는 아직도 무더위가 가시지 않은 초가을, 지리산 실상사 입구에는 '고무반티', 즉 재생플라스틱 함지박에 손가락 굵기 만한 검푸른 열매를 수북히 담아놓고 지나가는 관광객을 유혹한다. 맛만 보고 가라는 아줌마들의 미끼에 못 이기는 척하고 몇 알을 입 속에 넣어보면 약간 달큼한 맛에 깨알처럼 씹히는 씨앗까지 감칠맛이 일품이다. 이것이 바로 '아! 다내'에서 유래된 다래이다.

다래는 머루와 함께 깊은 산 숲 속에 자라면서 항상 배고픔을 면하기 어려웠던 그 옛날 먹거리의 일부로, 때로는 맛있는 간식거리로 사람은 물론 초식짐승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등리(藤梨)라고도 하는데, 옛날 배는 돌배이므로 지금처럼 징글맞게 크지 않아 다래를 등나무에 달린 배로 비유한 모양이다. 또 원숭이의 등나무나 복숭아란 뜻을 갖는 중국이름을 그대로 따서 미후등(  藤) 혹은 미후도(  桃)라고도 한다.

다래는 이처럼 사람과 원숭이가 모두 좋아하는 과일이었으며 여기에 반달곰과 불곰도 먹이 경쟁에 끼여 들 만큼 귀중한 야생과일이다. 과일주를 담그면 달콤한 맛 때문에 먹기가 좋고 비타민C와 타닌 등이 함유되어 있어 피로회복·강장·보혈·불면증 등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동의보감에는 '심한 갈증과 가슴이 답답하고 열이 나는 것을 멎게 하며 요결석을 치료한다. 또 장을 튼튼하게 하고 열기에 막힌 증상과 토하는 것을 치료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후기의 한의학자 이제마(李濟馬)는 사람의 체질을 4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여 사상의학(四象醫學)으로 발전시켰는데, 이중에서 태양인(太陽人)은 병이 들면 미후등식장탕(  藤植腸湯)이라 하여 다래가 주로 들어가는 탕제로 치료한다.

곡우를 지나 나무의 생리활동이 왕성한 시기에 고로쇠나무나 자작나무와 마찬가지로 다래나무도 건강식품으로 수액을 뽑아먹는다. 굵어야 팔뚝 남짓한 다래나무 줄기에서 물을 뽑아내자니,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손쉽게 덩굴의 가운데를 잘라버린다. 여기에는 마치 깊은 상처를 입어 피가 용솟음 치듯이 수액이 넘쳐흐른다. 보고 있으면 뚝뚝 떨어지는 모양이 섬뜩하여 마음 약한 사람은 마실 엄두가 나지 않는다. 다래나무 수액채취는 나무의 특성으로 보아서 제발 삼갔으면 한다.

그 외 다래나무는 다른 나무를 감으면서 생기는 U자나 O자 부분을 잘라 손잡이를 만들거나 눈에 빠지지 않도록 신은 설피의 재료가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숲 속에 자라는 덩굴나무로 길이 10∼20m, 지름5∼6cm정도가 일반적이다. 비원 안에 있는 천연기념물 251호 다래나무는 나이가 6백년에 길이는 수십m, 굵기는 10cm에 달한다.

어린 가지에 잔털이 있으며 숨구멍이 뚜렷하고 갈색이다. 잎은 어긋나기하기 타원형으로 크기는 갓난아이 손바닥만하다. 잎 표면은 갈색으로 광택이 있으며 뒷면은 연한 초록빛이고 가장자리에는 바늘모양 톱니가 촘촘하다. 암수 딴 나무이고 꽃은 여름에 흰빛으로 피고 마치 작은 매화꽃과 같이 생겼다.

다래나무 종류에는 이외에도 개다래와 쥐다래가 있다. 둘 다 다래나무와는 달리 잎이 마치 백반병(白斑病)이 든 것처럼 흰 잎이 띄엄띄엄 섞여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중에서 개다래의 열매는 끝이 뾰족한 것이 쥐다래와의 차이점이다. 개다래는 달지 않고 혓바닥을 톡톡 쏘는 맛이 있어서 약용으로 쓸 따름이지 먹지는 않는다.

수입하여 키우고 있는 키위도 다래의 한 종류이다. 언제부터인가 키위를 참다래라고 부르고 있다. 판매량을 늘리려는 재배농민의 심정이야 이해가 가지만 키위에다 참다래란 이름을 붙여버리면 우리 산에 자라는 다래나무의 열매는 모두 가짜 다래란 말이 된다. 키위는 키위라고 그대로 부르고 참다래는 우리의 다래로 남아 있어야 할 것이다.

다래나무와 족보는 멀지만 잎이나 덩굴의 모양이 매우 비슷하여 혼동하기 쉬운 노박덩굴이 있다. 다래나무는 잎 가장자리의 톱니가 짧은 바늘처럼 뾰족하고 촘촘한데 반하여 노박덩굴은 물결모양 톱니인 것이 차이점이다. 물론 샛노란 노박덩굴의 열매를 보면 금새 구분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산에서 흔히 만나는 큰 나무 덩굴은 머루, 다래, 노박덩굴이 있다. 이들은 햇빛을 받기 위하여 다른 나무를 타고 올라가 꼭대기를 덮어 버리기 때문에 숲 속에서는 줄기만 보이는 경우가 많다. 세 나무 모두 줄기가 회갈색이면서 길쭉한 비늘처럼 벗겨져서 줄기만 보고는 구분하기가 어렵고 잎을 보아야 구분이 된다. 다래나무와 노박덩굴은 비교적 햇빛이 많이 드는 곳에 자라며 봄에 나오는 새싹은 나물을 해먹는 구황식물이기도 하다.